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10월 2일 연중 제26주간 수요일 수호천사 기념일

Margaret K 2019. 10. 1. 18:59

2019년 10월 2수요일 수호천사 기념일


수호천사는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천사다.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 한 분을 정해 주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게 하신다. 하느님의 사랑이다. 다음은 수호천사에 관한 『성경』의 표현들이다. “그분께서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어,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시리라”(시편 91〔90〕,11). “저를 모든 불행에서 구해 주신 천사께서는 이 아이들에게 복을 내려 주소서”(창세 48,16).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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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
(마태 18,1-5.10)


For I say to you that their angels in heaven
always look upon the face of my heavenly Father."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천사를 보내시어, 곁에서 그들을 지키고 주님께서 마련하신 곳으로 데려가게 하실 것이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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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당신의 특사를 임명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보호하며 이끌도록 하셨습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 곁에서 하느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이면서, 우리의 기도를 하느님께 전달해 주고, 신앙의 여정에서 우리와 함께합니다. 그리고 그 여정에서 만나는 모든 악과 불행에서 지켜 주면서 우리가 악과 싸워 승리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 하고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의 나라가 세워진 뒤 자신들이 누릴 지위와 서열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대답하십니다.하느님 나라에서 위대한 인물이 되는 첫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회개한다는 것은 죄를 아파한다는 의미뿐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것입니다. 한 방향으로 가던 사람이 자기 인생의 모든 진로를 완전히 바꾸는 것, 온전히 하느님께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두 번째 조건은 어린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어린이는 신중하지도, 독립적이지도, 성숙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무능력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며 어른의 보호와 지도를 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어린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유치함이나 미성숙함이 아니라 의존성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그렇게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며, 하느님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생활입니다.세 번째 조건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존중입니다. 가진 것이 없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는 자세입니다. 모든 이가 수호천사를 모시고 있음을 기억하는 동시에 내 수호천사의 인도를 바라며 기도해야 하겠습니다.예수님의 눈길은 늘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먼저 향합니다. 예수님의 자비로운 시선에서 이방인들이라고 제외될 수 없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이 전해져야 합니다. 거부당하고 어려움에 부딪히더라도 복음 전파를 위한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소위 벼락부자가 된 사람들을 매스컴에서 종종 봅니다. 복권 당첨, 주식 투자, 땅값 상승 등의 이유로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중 90% 이상이 망해서 그전보다 더 안 좋은 생활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들의 공통점을 연구했습니다. 그 공통점은 교육수준이 낮고, 책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교육은 앎을 통해 세상에 대한 견문을 넓혀줍니다. 그런데 교육수준이 낮으면 좁은 시각으로 인해 더 높은 이상을 추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모험을 즐기게 됩니다. 물론 모험정신이 나쁜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견문이 좁아서 무모한 모험을 하더라는 것입니다.

교육의 목적은 단순히 좋은 성적을 받아 좋은 대학이나 회사에 들어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사회에 온전히 설 힘을 기르고 세상에 유용한 사람이 되는 것이 교육의 목적입니다. 따라서 학교에 가고 학원에 가서 교육을 받는 것만이 그 목적에 부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이웃과 만남 그리고 지금 하는 일 등에서 의미를 찾는 것 역시 나의 견문을 넓히는 또 다른 훌륭한 교육이 될 수 있습니다.

내 삶의 자리는 이렇게 훌륭한 교육의 장입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곳에 이웃이 있고, 내가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자리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을 내세워서 미워하고 단죄한다면 어떨까요? 이웃이 아니라 원수가 될 것이며, 기쁜 일이 아니라 짜증 나고 힘든 일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은 사람을 선으로 이끌며 악으로부터 보호하는 수호천사 기념일입니다.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천사들을 보내시어 그를 지키고 도와주도록 명령을 내리셨지요. 그 천사가 바로 내가 만나는 사람입니다. 나의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 천사를 못 만나게 하고 내 삶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이 만난 많은 사람을 떠올려 보십시오. 하루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을 만납니까? 나를 웃게 해주었고, 기쁘고 행복한 의미 있는 하루를 만들어 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을 부정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이면 어떨까요? 의미 있는 하루가 아닌 최악의 하루를 만들게 될 것입니다.

사람과의 만남을 허투루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수호천사를 만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만남의 의미를 넓혀야 합니다. 그런 만남 안에서 나의 견문이 넓어지면서 이 세상의 삶을 더 큰 기쁨과 행복의 장으로 만들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오늘, 천사를 만나는 기쁨의 날로 만드십시오.
문득 생각해 본다. 나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던가, 내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는다고 느꼈던 순간이었다(공병각).



6%의 사랑.

여러분의 자녀가 국어 95점, 사회 90점, 생물 70점, 수학 30점인 성적표를 받아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과목에 가장 먼저 눈이 가세요? 그리고 어떤 과목에 대해서 자녀와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시겠습니까?

실제로 미국에서 이런 문제에 관해서 연구했습니다. 77%의 부모들은 가장 먼저 눈이 가고 또 가장 오래 대화할 수밖에 없는 과목으로 성적이 좋지 않은 수학을 선택했습니다. 반면에 최고점을 받은 국어의 성적에 주목한 부모는 단 6%에 불과했습니다. 그렇다면 77%의 부모는 왜 수학을 선택했을까요? 자기 자녀의 약점을 보완해야 성적이 올라가고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6%의 부모는 자녀의 장점을 또 자녀의 긍정적인 모습을 사랑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부모가 자녀와의 관계가 좋을까요? 77%의 부모가 아닌, 6%의 부모가 자녀들과의 관계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살다 보니 성적보다 더 좋은 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랑의 관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즉, 좋은 관계가 유지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적이니 재물이니 지위니 하는 모든 것들은 별 것 아닙니다.

77%의 눈에 보이는 문제에만 급급한 우리가 아닌, 6%의 사랑을 먼저 생각하는 우리가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                   

나를 수호천사로 만드는 '바라봄의 법칙'

-전삼용신부-


선조 16년 율곡 이이는 외세의 침입에 대비해 십만 명의 군사를 양성해야 한다는 개혁안을 내었습니다. 선조는 이를 묵살하였습니다. 덕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수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고스라니 받아야했습니다. 물론 자신은 도망 다니기 급급하였습니다.

      선조는 조선건국 이래 처음으로 적통 출신이 아닌 왕이었습니다. 중종의 후궁인 창빈 안씨가 낳은 덕흥대원군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자신의 불안한 왕권을 지키기에 급급하였습니다.

      선조는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모든 이들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우선 선조는 임진왜란 때의 영웅 이순신을 역사에서 지우려고 하였습니다. 이순신만이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류성룡 등도 은근히 미워하였습니다. 전라도의 탁월한 의병장 김덕령 장군도 미운 털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순신이 전쟁에서 죽지 않았어도 선조에게 죽었을 것입니다. 선조가 육전의 영웅 김덕령을 이몽학의 역모에 엮어 사형에 처해 버린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왜 나라를 보호하고 이끌어야 하는 왕이 오히려 그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을까요? 자기 걱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불안하면 누구도 도울 수 없습니다. 자신도 바로 서지 못하는 아기가 어떻게 남을 잡아줄 수 있겠습니까? 비틀거리면 잡히는 무엇이나 자신이 설 수 있게 만드는 도구로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오늘은 우리 각자를 지켜주시는 수호천사님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안위를 잊고 우리 안위를 위해 희생 봉사하는 이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작고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지 않도록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여기서 관심을 가져야하는 것은 수호천사들의 시선입니다. 수호천사의 시선은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고, 또 자신이 보호해주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있지도 않습니다. 수호천사들의 눈은 하느님의 얼굴을 향해있습니다. 우리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려면 이와 같아야합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성모님은 누구를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포도주가 떨어져 쩔쩔매는 혼인잔치를 준비한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흘깃 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 포도주를 채워줄 분을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을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부족한 포도주가 채워졌습니다.

      마찬가지로 가족을 지키고 싶다면 가장은 가족의 부족한 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한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하느님을 한없이 바라봐야 합니다. 참으로 가족을 보호하고 싶다면 누구에게서 도움이 올 수 있는지를 알아야합니다. 선조처럼 정작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을 내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바라봄의 법칙’의 저자 주대준씨는 거제도 섬 소년이었다가 청와대경호실 차장을 지낸 인물입니다. 정보화 불모지였던 청와대에 들어가 경호 시스템을 IT로 변화시켰고, 탁월한 리더십으로 경호실 사람들의 학업 수준을 엘리트로 바꾸어 놓은 업적이 있습니다.

      그가 이런 꿈을 이루게 된 것에는 ‘바라봄의 법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경남 산청군 산골마을에서 태어나 부모님의 갑작스런 사업실패로 거제도로 가게 된 저자는, 아버지의 병치레와 죽음으로 초등학교 때부터 고학을 해야만 하는 처지에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긍정의 모터를 단 사람처럼 늘 탱크같이 전진했습니다.

      그가 그렇게 전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바로 ‘주 씨 아저씨’가 있었습니다. 저자는 처음 교회에 갔을 때 교회 문 위에 걸려 있는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현판을 보고 예수님의 성이 자신과 같은 주 씨 인 줄 알고 단번에 친근감을 느꼈고, 주 씨 아저씨를 평생의 멘토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평생의 멘토를 만난 저자는 늘 하느님을 바라보고 전진해, 마침내 바라보고 바라봤던 청와대에 입성하게 된 것입니다.

      선조는 자신만 바라봤습니다. 그 이유는 누구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면 자신에 대해 걱정하지 않게 되고 그 에너지를 이웃을 위해 쏟을 수 있게 됩니다. 주대준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을 바라보며 기도하면, 내 안에 있는 ‘안 된다’, ‘어렵다’, ‘불가능하다’, ‘포기하고 싶다’는 부정적인 생각들이 달아났다. 그분은 사막에서도 강을 내시고 광야에서도 물을 내시는 분이 아니던가. 내가 요행을 바라지 않고 그분의 뜻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살아갈 수만 있다면, 내 가 품은 꿈도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그분이 도와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확신은 현실로 이루어져 나갔다. 이른바 ‘입을 벌려 기도하고 바라보면 바라보는 만큼 채워주시는 하느님’을 체험을 통해 ‘바라봄의 법칙’을 확립하게 된 것이다.”

      주님만을 오로지 신뢰하는 마음으로 바라봅시다. 그러면 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집니다. 나에 대한 걱정이 사라질 때 이웃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수호천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신학생들을 위해서 30일 피정을 함께 했었습니다. 지금은 멀리 있어서 하지 않지만 제게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신학생들과 면담을 하고, 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피정하는 주체는 신학생이고, 피정을 이끄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제가 힘을 주고, 제 뜻대로 신학생을 이끌려고 하면 저도 힘들었고, 신학생도 능동적으로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신학생들을 믿고, 격려하고, 피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기도하면 저도 힘이 덜 들었고, 신학생들이 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30일 피정을 마친 신학생들은 부제 서품을 받습니다. 부제님들은 외부 사제들에게 영적 지도를 청할 수 있었습니다. 저와 함께 피정했던 부제님들이 저를 찾아온 곤 했습니다. 저도 선배로서 편하게 부제님들을 만났습니다. 책을 소개하기도 했고, 맛있는 식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부제님들도 피정 때 보다 훨씬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논문에 관한 이야기, 사목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고백성사를 청하면 성사를 주었습니다. 제게 도움을 받으러 온 부제님들이었지만 저도 보람 있었고, 도움을 받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

 

돌아보면 제게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천사와 같은 분이 많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신학교에 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본당 신부님이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고집이 세신 아버님이 신앙에 충실할 수 있도록 설득하셨습니다. 오랜 시간 성당에 오지 않으셨던 아버님은 아들이 신학교에 가기 위해서는 성당에 와야 한다는 본당 신부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아버님은 이유를 불문하고, 다시금 신앙에 충실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저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셨습니다. 영적인 아버님이셨던 본당 신부님과 저를 낳아 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2005년 캐나다에서 지낼 때입니다. 겨울은 길고 추웠습니다. 갑자기 찾아온 통풍으로 힘이 들었습니다. 14년이 지난 이야기입니다. 토론토의 추운 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는 천사 같은 분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한인 성당 신부님은 매주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사제는 신자들과 함께 미사 할 때 힘을 얻습니다. 차량 봉사를 해 주었던 부부도 있었고, 엠이 모임에 초대한 부부도 있었고, 필요한 반찬을 주신 부부도 있었습니다. 가장 고마웠던 건 16개월 함께 지냈던 동창 신부님이었습니다. 서로 성격이 다르기에 힘든 점도 있었지만, 함께 했기에 즐거운 시간이 많았습니다.

 

2019년 뉴욕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신문사 옆에 있는 한인 성당 신부님께서는 식사에 초대해 주시고, 매주 미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습니다. 길을 알려 주시는 분도 계시고, 법률적인 문제에 도움을 주시는 분도 계십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을 사랑하시고, 구독하시는 분은 모두 제게는 천사 같은 분입니다. 광고를 통해서 도움을 주시는 분, 후원 회원으로 도움을 주시는 분도 제게는 천사 같은 분입니다. 제가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고, 안내해 주는 직원들도 제게는 천사 같은 분입니다.

 

저는 가브리엘 세례명을 좋아합니다. 가브리엘 천사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하얀 옷을 입고, 날개를 달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서에서 보면 천사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야곱에게 나타나서 씨름하였습니다. 토비야에게 나타나서 길을 안내하였습니다.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아이를 잉태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오늘 내가 전하는 따뜻한 말과 친절은 고통 중에 있는 이웃에게, 절망 중인 친구에게 위로와 힘을 줄 것입니다. 천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지만,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기도할 수 있고,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바로 그런 우리들의 모습이 천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천사는 이렇게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고,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쩌다 한번, 잠시 천사의 모습으로 보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천사의 모습으로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영적인 사람,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우리는, 그간 한번도 맛보지 못했던 은총과 축복을 선물로 받게 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연세 지긋하신 한 할머님께서 백내장·녹내장이 동시에 와서 큰 고생을 하셨습니다. 사람 얼굴이나 사물이 부옇게 보이고, 촛점도 안 맞춰지니, 너무나 답답하셨던 나머지, 큰 마음 먹고 수술을 하셨습니다.

 

 수술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이렇게 잘 보이는 걸, 진작에 할걸!”하는 후회가 막심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던 손주·손녀들 얼굴도 또렷하게 보이니 너무 좋았습니다. TV 드라마 보는 재미도 훨씬 커졌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화장실로 들어가신 할머님께서 세면을 하고 난 후,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본 순간,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넘어질 뻔 하셨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처음에는 너무나 낯설어 도둑이 들어왔나? 하는 생각까지 하셨답니다.

 

 수술전 모든 게 흐릿하게 보일때만 해도, 그런데로 봐줄만한 얼굴이었는데, 수술후 눈이 밝아진 후 바라본 자신의 얼굴 위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세월의 흔적이 얹혀져 있었던 것입니다.

 

 너무나 크게 상심하신 할머님께서는 수술을 집도하신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 원상복구해 주시기를 부탁드려야 하나, 고민까지 하셨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

 

 적합한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우리 역시 영적인 눈을 뜨면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그간 죽었다 깨어나도 보지 못했던 것들, 내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있던 다양한 주님 은총의 손길, 그분으로부터 오는 축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영적인 눈이 밝혀지면, 그간 보지 못했던 우리 자신의 철저한 나약함과 큰 결핍, 짙은 어둠과 숱한 죄들도 보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을 뜨게 될 때, 얻게 될 유익함이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그간 아니 계시는 듯, 너무 멀리 계시는 듯 느껴지던 주님께서 늘 내 지척에 현존하고 계심을 알게 될 것입니다. 성령과 성모님께서 내 인생길을 동반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시각이 회복되는 날, 또 한 가지 큰 축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이 고되고 혹독한 지상에서의 여행길을 나 혼자 걷는 것이 아니라, 나의 수호천사가 늘 함께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수호천사는 마치 내가 직접 고용한 사설 경호원처럼 언제나 적극적으로 나를 밀착 수행하고 있습니다. 나를 갖은 위험에서 지켜주고 있으며, 그의 시선을 늘 나를 향해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육적인 삶에 너무 푹 빠져 살아가다보니,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우리의 수호천사들을 도외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영적인 삶, 영적인 존재, 영적인 세계는 존재합니다.

 

 지금 우리가 너무 커져버린 나머지, 너무 높이 올라간 나머지, 너무 인간적·지상적 삶의 방식에만 몰두한 나머지, 또 다른 방식의 세계와 존재, 삶에 대한 감을 상실해버린 것입니다.

 

 영적인 삶의 방식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은?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그 길을 명확하게 제시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오 복음 18장 3~4절)


누가 가장 큰 사람인가?

 -반영억신부-

 

“천사”라는 말은 어떤 존재의 본성이 아니라 기능을 가리키는 명칭입니다.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천사는“모두 구원을 상속받을 사람들에게 봉사하도록 파견된 시중드는 영들”(히브1,14)입니다. 그리스도의 협조자들이 된 인간을 보호합니다(마태18,10). 그들은 하느님께 성도들의 기도를 전달하고, 의인들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합니다(루카16,22). 그리고 자기들의 지휘자인 미카엘과 더불어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태초부터 사탄과의 사움을 계속합니다(묵시12,1-9). 모든 천사들은 그리스도께 복종함으로써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우리를 보호하는 천사가 있어서 감사합니다. 특별히 각 개인의 인생여정을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역할을 하도록 지정하신 영적존재를 수호천사라고 합니다. 수호천사가 있어서 행복합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늘나라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세워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의 주인공은 어린이가 아니라 어린이같이 된 사람입니다. 어린이가 지닌 가장 큰 특성은 의존성입니다. 어린이는 어리면 어릴수록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부모의 품에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아이처럼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사람입니다. 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많이 가진 사람, 높은 지위에 있고, 권력을 가진 사람을 높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하늘나라에서는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 위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마르10,21).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19,27)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관념, 틀, 명예욕, 지배욕, 물질에 대한 애착을 버리고 주님께로 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늘나라의 주인이 어린이가 아니라 회개하여 어린같이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다른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께만 의지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워즈워드는 ‘어린이를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습니다. 어린이의 솔직함과 겸손, 단순함, 신뢰, 특별히 의존성 안에서 한수 배우시기 바랍니다. 키가 커서 큰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차지해서 큰 사람 되시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끔은 사람을 든 사람, 난 사람, 된 사람으로 구별해 봅니다.

든 사람은 배운 것이 많아서 학식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당해 분야에서 보다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난 사람은 이름이 알려져서 누구나 아는 사람입니다. 당해 실무 분야에서 뛰어나게 실무처리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된 사람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아도 배운 것이 없어도 인간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꼼수 보다는 원칙을 살아갑니다. 곧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서 큰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송영진신부-


“너희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여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10).”

여기서 ‘작은 이들’은 “나보다 힘이 약하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고,
‘천사들’은 수호천사들입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하느님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는 말씀은,
‘작은 이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수호천사들이 곧바로 하느님께 보고를 드린다는 뜻인데,
하느님께서 언제나 항상 ‘작은 이들’을 보살펴 주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가해자 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작은 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이고,
사실상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작은 이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하느님께서 항상 보호해 주신다는 격려와 위로 말씀이 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다는 것이 우리 교회의 믿음입니다.
내가 ‘작은 이들’을 괴롭힐 때 그들의 수호천사는 그 일을 즉각
하느님께 보고 드리는데, 그때 나의 수호천사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러면 안 된다고 나를 타이를 것입니다.
따라서 ‘작은 이들’을 괴롭히는 일은 하느님을 거스르는 일이면서
동시에 나의 수호천사를 거스르는 일이 됩니다.
‘작은 이들’을 괴롭히는 죄뿐만 아니라, 모든 죄가 다 그렇습니다.
무슨 죄든지 간에 수호천사는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그러지 말라고 타이를 것입니다.
(수호천사가 죄 자체를 막아 주지는 않습니다.
선택은 내가 하고, 책임도 나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수호천사를 ‘보호자’로만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어떤 힘든 일을 만나면,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물으면서 찾습니다.
극적으로 위기를 피하면 수호천사가 도와주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내가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 위기를 피하지 못하고 불행한 일을 당하고 말았을 때에는
도와주지 않은 하느님과 수호천사를 탓하기도 합니다.
잘된 일은 내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된 일은 수호천사가 직무 수행을 제대로 하지 않은 탓인가?
(아슬아슬하게 교통사고를 피했을 때의 상황이 좋은 예입니다.
수호천사가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더욱 조심스럽게 운전하지만,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사드리는 마음이 없으니 그 삶에 변화가 없습니다.
만일에 자기가 신호위반과 속도위반을 하고, 음주운전을 해서 사고가 났다면,
그래도 수호천사가 도와주지 않았다고 탓할 것인가?)

하느님께서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려가게 하겠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탈출 23,20).
이 말씀은 사실상 “내가 너희를 항상 지켜 주겠다.” 라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한 뒤에
어떤 죄들을 지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했고, 반항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려고 잠시 그들 곁을 떠나 있었을 때에는
우상숭배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그런 죄를 지은 것은 하느님의 보호를 거절한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지켜 주겠다는 약속의 말씀을 하신 다음에 바로
“너희는 그 앞에서 조심하고 그의 말을 들어라. 그가 너희 죄를 용서하지
않으리니, 그를 거역하지 마라.”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탈출 23,21).
이 말씀은 사실상 “나를 거역하지 마라.” 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싶다면, 또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수호천사의 보호를
받고 싶다면, 하느님을 거역하면 안 됩니다.
항상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살 때에만
수호천사의 도움과 보호를 요청할 자격이 생깁니다.

물론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고통과 불행이 항상 ‘죄 때문에’
생기는 것만은 아니고, 죄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들도 많습니다.
살다보면 정말로 억울한 일들과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당할 때가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 ‘고통’도 하나의 ‘신비’(미스터리)입니다.
그래서 그런 고통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모른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고통들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숙제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을 실천하라는 숙제.

‘작은 이들’과 수호천사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 있는 다음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
이 말씀들을, “너희는 작은 이들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도와주고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를 보내주셨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우리 각자가 서로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기를 바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어떤 일을 당한 사람이 “나의 수호천사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답은 “지금 네 곁에서 너를 도와주는 ‘그 사람’이 바로 너의 수호천사다.”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어떤 일을 당했을 때 나를 도와주는 그 사람이 나의 수호천사이고,
내가 외롭고 슬플 때 내 곁을 지켜 준 그 사람도 나의 수호천사이고,
죄를 지을 때 그러면 안 된다고 나에게 충고하는 그 사람도 나의 수호천사입니다.
그것을 믿는다면, 우리가 할 일은 우리도 그렇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수호천사가 도와주기를 바란다면, 먼저 남에게 수호천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완전한 종속

-이종훈신부-


예수님이 선택하신 제자들은 거룩하거나 의롭지 않고 소위 말하는 속물들이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지만 그들이 예수님께 거는 기대는 그냥 세속적이었다. 그분이 곧 임금이 될 테니 자신들은 개국공신처럼 서로 높은 지위를 나눠 갖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그 때에 임금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고 청했고(마르10,37), 그들 중 누가 가장 높은 사람인지 논쟁도 하였다(마르 9,34). 게다가 예수님을 돈 몇 푼에 팔아넘긴 이도 있었다. 그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았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스승이 옥좌가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계시고, 임금이 아니라 죄인이 돼버렸으니 말이다. 하늘과 땅이 뒤바뀌는 시간이었다. 누가 가장 크냐는 그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가장 작은이, 어린이를 그들 한 가운데에 세우시며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이가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이다(마태 18,2-4).” 하고 대답하셨다. 그런 일을 예고하신 셈이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설명을 들으면 어린이는 낮아짐을 상징한다. 높아지려는 의도를 가진 거짓 낮아짐이 아니라 너무 작고 어려서 부모나 어른의 도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완전한 종속이다.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하느님이었다. 보호와 양육, 즉 나의 삶이 절대적으로 그분들에게 속해있었다. 하느님의 나라는 그런 마음을 지닌 이들의 것이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삶이 그분에게 완전히 종속된 이들의 나라이다.

 

부모는 하느님이나 슈퍼맨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안다. 어쩌면 그런 척하느라 사는 게 더 버거울지도 모르겠다. 수도생활의 햇수가 더해지며 더 잘 알게 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의 죄스러움이다. 어둠 속에 발견한 아름다운 빛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빛보다는 그것에 비추어진 자신의 허물과 상처 그리고 죄스러움이 더욱 잘 보인다. 그리고 그 죄스러움은 뼈와 신경계 속으로 너무 깊숙이 박혀 있어 죽지 않고서는 그 지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노력해도 늘 그 자리다. 우리는 훌륭한 부모도 충실한 제자도 아니다.

 

예수님은 큰 사람이 아니라 작은 어린이가 되라고 분부하셨다. 하느님 아버지 어머니에게 완전히 종속되어야한다고 가르치셨다. 그렇지 않고서는 하늘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 고백소에서 부끄러운 과거를 마치 남 얘기하듯 말할 수 있는 것이 예수님의 그 말씀 때문이다. 자신의 영웅적인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하지 않고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를 믿어서 구원받는다. 완전한 종속이 구원이다.

 

예수님, 주님은 사람을 잘 아시니 저를 잘 아십니다. 저도 모르는 것도 아십니다. 저를 이토록 사랑하시니 제가 무엇이 부끄러워 숨기고 감추며 위선을 떨겠습니까? 그 위선의 무게가 저를 짓눌러 삶이 무겁고 어두워집니다. 모든 것이 주님 앞에서는 환하게 드러나 있음을 잊지 않겠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부끄러움은 잠깐, 나머지는 신뢰하며 살게 도와주소서. 아멘.


-조욱현신부-


복음: 마태 18,1-5.10: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라

오늘 교회는 수호천사 기념일을 지내고 있다. 수호천사는 하느님의 뜻에 따라 각 사람에게 파견되어 그를 악으로부터 보호해주고 선을 행하도록 이끌어주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천사이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아무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 하나라도 업신여기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하늘에 있는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다는 것을 알아두어라.”(10).

 

제자들은 예수님께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1)라고 묻는다. 하늘나라가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교회를 말하는 것이냐, 아니면 어린이들처럼 처신할 때 장차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의 나라인지는 굳이 구분할 필요는 없다. 둘 다 해당되는 것이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불러 그들 가운데 세우시고는, 제자들처럼 자신을 높이지 말고 어린이들처럼 자신을 낮추어야만 하늘 나라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신다. 오직 일정한 자격을 갖춘 사람만 하늘 나라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이다. 하늘 나라 들어가기 위해 겸손을 촉구하신다. “하늘 나라에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4).

 

그러면서 또한 예수께서는 사회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처신과 명령, 예수님의 이름으로’(5) 불쌍한 어린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고아 같은 어린이를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 선행이 바로 당신 자신에게 베푼 선행으로 간주하신 최후의 심판 담화’(참조: 마태 25,31-46)를 연상케 한다. 물론 이 구절이 앞의 내용, 즉 겸손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것 같아도 마태오는 여기에 수록을 하고 있다. 아마 그것은 이러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도 자기 자신을 그만큼 낮추지 못하면 진정한 사랑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여기에 수록하고 있을 것이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10)은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가까이 따르던 제자들이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마태오 교회의 미천한 교우들을 가리킨다. 그들의 그리스도 신앙을 무너뜨려서도 안 되고 그들을 업신여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염려하는 천사들이(토비 5,6-7.22; 사도 12,15)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를 항상 모시고 있기”(10) 때문이다. 이 천사들은 하느님 가까이서 시중드는 매우 높은 천사들이다.

 

이 천사들은 보잘것없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기도 하고 그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을 하느님께 고발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 스스로 낮추어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하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고, 또한 우리가 우리 형제를 업신여김으로써 또한 그들을 창조하신 하느님까지 멸시하는 결과를 초래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눈에 보이는 인간은 바로 보이는 하느님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마태 18, 10)

-한상우신부-

수호 천사는
용서와 사랑을
일깨워줍니다.

고된 우리의
삶에 수호 천사를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아끼고 품어주는
사랑의 하느님께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하느님의
천사를 통해
우리의 삶은
수호하고 수호받는
소중한 여정을
걸어갑니다.

삶의 시작도
삶의 마침에도
하느님의 천사는
늘 함께합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삶의 이아픔도
견딜 수 있습니다.

깊이깊이
삶의 신비를
느끼게합니다.

끊임없이 하느님을
믿도록 우리를
도와줍니다.

저마다의
수호 천사를 통해
차별없는 하느님
사랑을 만납니다.

하늘의 은총은
천사를 통해
드러납니다.

사람을 살리시는
하느님을 깨닫습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외롭지 않습니다.

신앙의 기쁨을
누리게합니다.

일상에서 만나는
평범한 모습이
가장 빛나는
수호 천사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참모습을
일깨워주는
수호 천사와 함께

우리의 삶이
사랑하는 삶으로
나가길 기도드립니다.

수호 천사가 있기에
살 만한 세상이 됩니다.

모든 삶은
수호 천사와
함께하는 하느님
사랑입니다.

-오상선신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셔서 지상 삶을 살아가게 하시면서, 각자에게 수호 천사를 붙여 주셨습니다. 이는 험하고 거친 지상 순례길을 걷는 약하고 가련한 우리에게 필요할 순간마다 힘과 용기가 되어 주라는 그분의 섬세한 배려라 할 수 있지요.

"그는 내 이름을 지니고 있다"(탈출 23,21).
이름이 곧 현존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지닌 존재는 하느님을 품고 있고 그분의 뜻과 마음으로 움직입니다. 우리에게 보내 주신 천사는 그 자체로 하느님의 현존이고, 하느님 사랑의 증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인 천사뿐 아니라 눈에 보이는 천사들도 보내주십니다. 가족, 이웃, 친지, 그리고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선한 영향력의 주인공들... 그런데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이들만 천사가 아닙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 우리의 관심과 손길이 절실한 이들도 우리를 하느님 닮은 존재로 형성되어가도록 기회를 부여하는 천사들이지요.

"하늘 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큰 사람입니까?"(마태 18,1)
그런데 제자들의 관심사는 여전히 크고 강하고 우월한 존재와 그런 자리에 쏠려 있습니다. 세속적 질서에 발을 파묻은 채 하늘 나라에 대해 이해하려니 자꾸 예수님 가르침과 엇나갑니다. 이에 예수님은 사랑으로 통치되는 하느님 현존 상태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해 어린이를 들어 인내롭게 설명하십니다.

"너희가 회개하여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마태 18.3).
우선 자기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합치되지 않는 부분을 돌이켜 하느님을 향하도록 돌려놓아야 합니다. 회개자는 옛 삶은 하느님 자비에, 미래는 하느님 섭리에 맡긴 채 현재를 철저히 의탁해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보호자가 꼭 필요한 어린이처럼 말이죠.

"자신을 낮추는 이"(마태 18,4).
진정으로 부서지고 낮추인 영혼이 된다는 것은 인위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와 죄인인 자신의 작음이 이루는 극적인 대비를 받아안고 자기 자리를 찾게 되는 질서입니다. 그런데 무능하고 약해서 누군가 들어올려 주지 않으면 낮은 곳에 자리할 수밖에 없는 어린이같은 이가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크다니 하늘 나라에서의 크기는 곧 "작음"의 크기인가 봅니다.

"이 작은 이들"(마태 18,10).
이제 큰 사람에 관한 화제는 작은 이에 대한 관심으로 넘어갑니다. 설령 인간의 세속적 눈에 보잘것없는 이라도 그의 천사가 그와 하느님 곁을 오가며 그를 위해 애쓰고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 곁에서 그분 얼굴을 뵙고 있는 우리 각자의 수호천사를 통해 하느님의 시야 안에, 마음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크고 작음을 가늠할 필요없이, 감출 것 없이 아버지 품에 안긴 어린이처럼 말입니다.

인위적으로 무엇이 되려 하기보다 그런 회개자, 그런 어린이, 그런 작은 이, 그렇게 낮추어진 이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자비와 사랑이 꼭 필요한 존재이기에 하느님께서 당신 눈동자처럼 보호하고 돌볼 수 밖에 없는 이들이니까요.

이것이 바로 하늘 나라에서 통용되는 도량형의 비밀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큰 사랑과 자비가 더 절실한 이들이 큰 사람이라는 것! 그러니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자기 기만과 착각과 허세만 살짝 내려놓으면 우리는 이미 하늘 나라에서 충분히 "큰 사람"이 아닐까요?


내겐 무용지물 천사? 
-김찬선신부-


"보라,내가 너히 앞에 천사를 보내어
길에서 너희를 지키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너희를 데레가게 하겠다."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늘 보고 있다."

여러분의 염려와 기도 덕분에 긴 기간의 외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저의 여정의 처음부터 끝까지
참으로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그래서 고마웠습니다.

그런데 놀라실 테지만 사실 저는 그렇게 해외여행을 많이 했어도
저 혼자 여행한 적이 없고 늘 누가 안내재줘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혼자 어느 나라를 가도 공항까지 누가 늘 마중나와줘야 하고
돌아올 때 공항까지 데려다줘야 하며,그곳에 있는 동안에도
혼자 밖을 다니지 않고 꼭 누가 있어야만 나가고,
한번도 그 나라 돈을 바꾼 적도, 제가 가지고 있은 적도 없으며,
그러니 당연히 저 혼자 뭘 산 적도 없지요.

그래서 해외여행을 할 때의 저는 오늘 복음말씀의 어린이처럼
제 스스로 어디를 갈 수 있다고 생각지도 않고 
안내해줄 사람이 없으면 아예 가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해외여행을 할 때는 이처럼 안내를 잘 받는데
영적인 여정을 가는데는 그 길의 안내자인 천사의 안내를 잘 받는지
오늘 수호 천사의 축일을 지내며 성찰케 되고 반성케 됩니다.

사실 저는 수호천사의 안내를 잘 받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에게는 영적 지도자나 안내자를 가지라고 하면서 
참 부끄럽게도 제게는 영적 동반자는 있어도 지도자는 없으며
그것도 따로 한 사람이 특별히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여럿이 있습니다.

왤까를 생각하면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른 사람의 영적 여정의 동반자나 지도자는 되어줘도
나는 나 혼자 갈 수 있기에 혹 동반자는 필요해도
굳이 지도자까지는 필요치 않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영적 안내자인 수호천사를 필요로 하냐 하면
그렇기에 수호천사의 안내를 잘 받지도 않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보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천사를 보내주시어 우리가 갈 곳을 가게하신다고 하지요.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안내를 잘 받건 받지 않건
우리의 개별 안내자 수호천사를 보내주신다는 것인데
그럼에도 우리가 그 천사의 안내를 잘 받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차에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사용치 않는 것처럼
영적 내비게이션인 수호천사도 잘 이용치 않는 것이지요.

그런데 더 문제인 것은 앞으로 한 동안 그럴 것 같은 점입니다.
교만이 쉽게 깨지지 않을 것 같기도 하지만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 안내서인 복음이 있으니 그 복음을 제가 꾸준히 묵상하고
저를 성실히 성찰한다면 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저는 수호천사를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호의와 사랑에 소홀해도
하느님께서는 그 수호천사를 거두지 않으시고 
수호천사도 제가 알게모르게 보호하고 안내해줄 거라고 믿습니다.

어린애가 자기 혼자 갈 수 있으니 가겠다고 해도
부모가 '그러면 그래라!'하며 내버려두지 않고
어떻게 가나 뒤에서 몰래 따라가며 보고 보호해주시듯이 말입니다.

아무튼 수호천사가 무용지물이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10월 2일 월요일 수호천사 기념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