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19년 9월 20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19. 9. 19. 18:18

2019년 9월 20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일곱 마귀가 나간 막달라 여자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신하 쿠자의 아내인 요안나,

그리고 수산나라는 여자를 비롯하여 다른 여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들은 자기네 재산을 바쳐 예수의 일행을 돕고 있었다.
(루가 8,1-3)

 

 Mary, called Magdalene,

from whom seven demons had gone out,
Joanna, the wife of Herod’s steward Chuza,
Susanna, and many others
who provided for them out of their resourc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티모테오에게,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들과 복음을 전하러 다니실 때,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등이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우리나라 한 지역의 오랜 부자 가문에는 돈을 똥으로 여기라는 가훈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합니다. 똥은 내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영양분을 준 음식의 찌꺼기입니다. 몸 안에 찌꺼기를 계속 지니고 있으면 몸이 상하지만 그것을 밭에 뿌리면 우리가 먹고 살아갈 양식의 거름이 됩니다. 그 가문은 이러한 돈의 속성을 잘 알았기에 오랜 기간 큰 부자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돈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돈을 죄의 도구로 만들기도 하고, 구원의 도구로도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돈 자체가 죄가 아니라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합니다.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여인들 가운데는 악령과 병에서 풀려난 여인들, 곧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가 있고, 타락의 온상이었던 헤로데 궁에서 일하는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닌 재물은 그리 깨끗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하며 그 여인들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돈은 우리 몸의 피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몸에 피가 부족하면 죽음에 이릅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지 않고 고여 있어도 사람은 죽습니다. 피가 돌아가야 하듯이 돈도 돌아야 합니다. 흐르지 않으면 죽습니다. 교회라는 몸 안에 피를 흐르게 만드는 것은 신자들의 몫입니다. 돈이 죄의 도구가 아니라 구원의 도구가 되도록 이 심장의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의 몫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



돈이 모든 악의 뿌리인가?

-전삼용신부-


어떤 유럽의 목사님이 나체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하고 왔더니 목사님 사모님이 소감이 어떠했냐고, 무슨 생각을 하며 설교를 했냐고 물어보더랍니다. 목사님은 무슨 생각을 하며 설교했을까요?

      이 분이 자기 부인보고 대답하기를 “저 사람들이 헌금 과연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 그 생각하면서 설교를 했답니다. 돈 주머니를 안 가지고 왔을 테니까.

      우리는 각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왜 하필 돈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돈을 자선을 베푸는데 쓰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모으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돈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돈을 모으려는 마음이 뱀이 시키는 것이고, 돈을 내어주라고 하느님께서 시키십니다. 돈을 계속 좋아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은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도구로 전락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돈에 대한 집착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돈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고, 풍족하면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누어주며 살면 됩니다.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데 자꾸 모으려는 마음이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히게 됩니다.

      어떤 분은 노숙자 체험을 일부러 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것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되면 가진 아주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가난해지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라도 이런 경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때에야 돈을 좋은 곳에 쓸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여인들 가운데는 악령과 병에서 풀려난 여인들, 곧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가 있고, 타락의 온상이었던 헤로데 궁에서 일하는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닌 재물은 그리 깨끗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하며 그 여인들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인들처럼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려면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하고, 더 나아가 부족하게 살 줄 알아야합니다.

      어느 정년퇴직 한 노신사가 학교 부근의 작은 집을 구입해 이사했습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작은 집에서 사는 것에도 만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과 후 꼭 3명의 아이들이 집 앞에 있는 휴지통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휴지통을 차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가 참으로 재미있게 논다고 칭찬해주며 “나도 차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서 못 하네. 만약 너희가 계속 와서 휴지통을 찬다면 내가 매 번 1달러씩 주겠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일주일 동안 1달러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서 노신사는 “참으로 미안하구나. 내가 계속 돈을 주고 싶은데 나도 생활비가 조금 딸리네. 내가 50센트씩만 줄게.”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50센트라도 그게 어디냐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주일 뒤에 노신사는 또 미안하다며 25센트씩만 주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불평합니다. 겨우 그것을 받고 매번 와서 휴지통을 차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런 푼돈으로는 더 이상 일을 해 드릴 수 없다며 아이들은 휴지통을 차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돈에 대한 욕심만 없어지면 돈도 유익하게 쓸 수 있습니다. 가장 유익한 일은 돈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욕심 때문에 그 좋은 일에 돈을 쓰지 못하고 모으다가만 죽는다면 하느님께 칭찬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께 자신의 돈을 복음 전파를 위해 쓰라고 드린 여인들을 생각합시다. 내가 머리 쓰지 않아도 돈은 좋은 곳에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은 모든 악의 뿌리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잘 사용하면 영혼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가장 잘 사용하는 법은 복음전파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 3)

-한상우신부-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든 이들의
환한 마음을 만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배경이 되었던
모든 이들의
기쁜소식입니다.

봉사자들의
땀방울 속에서
가을아침이
밝아옵니다.

모든 순간들은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순간들입니다.

하느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에는
이와같이 진실된
사랑이 있습니다.

진실된 사랑은
덧없이 지나가는 것이
아닌 지금 이곳에서
영원한 사랑을
맛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서로를 도와주는
사랑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아름다워지는
복음의 여정입니다.

복음의 여정은
무엇을 위해 우리의
시간과 마음을
바쳐야 할지를
가르쳐줍니다.

힘겨움과
불편함을
정성어린 희생과
봉사로 메워주는
소중한 봉사자분들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을 위한 삶이
실은 모든 이를 위한
삶입니다.

섬김과 봉사는
서로의 처지에서
만나게되는 소통의
기쁨입니다.

시중드는 마음과
시간만큼 예수님을
알게되고
사랑하게되는
복음의 기쁨입니다.


-오상선신부-


9월 20일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이지만, 통상적으로 한국 교회는 다가오는 주일(올해는 22일)에 경축 이동하여 모든 신자들과 함께 지내지요. 그래서 오늘은 보편교회 전례력에 따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의 말씀을 묵상합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선교 여행을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루카 8,1)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직접 다니시면서 전하셨습니다. 앉아서 당신을 찾아 오는 사람들만 상대하신 것이 아니라 몸소 하느님 백성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신 것입니다.

그분의 동선을 관상하노라면 움직이는 교회가 보입니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루카 8,1) 그리고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루카 8,2)다고 하지요.

그들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무리를 지어 다니며 예수님께서 말씀으로 전하시는 하느님 나라를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존재들입니다. 아직 저마다 부족하고 미숙하지만,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말한 "의로움과 신심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1티모 6,11)하면서 말입니다.

특별히 예수님 곁에 모여든 여성들에 대한 서술이 눈에 들어옵니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가 낫게 된 몇몇 여자들, 그리고 다른 여자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저마다의 역사가 있듯이, 그들도 우리처럼 예수님과 사연을 간직한 이들입니다. 어떤 이는 극적이고 어떤 이는 평이한 체험을 소유하고 있겠지요. 중요한 건 그들 모두 예수님이라는 구심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일 겁니다. 거기 예수님이 계시기에 그들이 모인 것입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모인 이들은 아직 불완전하나 교회의 완전성을 지향합니다. 남녀, 중년과 청년, 기혼과 미혼, 존재와 선포, 시중과 섬김... 특히 여성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루카 8,3)고 하지요.

모성성과 여성성에 대한 담론이 매우 민감한 시대를 사는 우리에겐 조심스런 부분이나, 당시 예수님 중심의 공동체에서 여성들의 역할은 참으로 헌신적이고 포용적이었으리라 짐작하게 됩니다. 그녀들은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재산을 사용해 섬김의 수고까지 완수하였으니까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티모테오에게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1티모 6,10)라면서 물질, 특히 돈의 덧없음과 해악을 강조합니다. 이 시각으로 보면 복음 속 여인들의 공로는 "자기들의 재산으로"라는 표현보다 "시중을 들었다"라는 말씀에서 드러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재산은 인간이 하느님께 바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분일 겁니다.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1티모 6,7)기에 기껏 하느님께 받은 것을 도로 내어드리는 정도일 뿐이니까요.

"시중을 들다"는 말씀은 "섬김"을 의미합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섬기러 왔다"(마태 20,28 참조)고 피력하실 만큼 귀하고 소중한 가치입니다. 다만, 이 역시 남성 중심의 교계 제도 안에서 균등한 기회와 자발성이 배제된 채 차별적으로 부여될 때는 진정한 교회 정신을 잃고 표류하게 됩니다. 섬김은 상하고저 남녀노소를 떠나 누구든 예수님을 사랑해 닮고자 하는 이에게서 앞다투어 발휘되어야 하는 덕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또한 "신심이 이득의 수단으로"(1티모 6,5) 사용되는 해악을 우려합니다. 복음 속 여인들처럼 오로지 주님과 하느님 나라 때문에 직접적인 봉사와 재산의 헌납까지 불사하는 이들이 신심을 미끼로 이용당해서는 안되기 때문이지요.

무엇 하나 아쉬울 것 없으신 예수님께서도 이 지상 삶의 여정 동안 도움을 받으셨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참여하고자 하는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예수님 덕분에 악령과 질병에서 해방된 이들은 물론 다른 이들도 예수님 곁에 머물며 서로 도움을 주고 받았습니다. 이 자체가 곧 완성을 향해 가는 하느님 나라이고, 교회의 못자리입니다. 나눔과 마찬가지로 섬김 역시 주님의 허락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오늘 내가 하느님께 받은 것으로 섬기는 날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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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