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성녀 축일

3월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Margaret K 2018. 3. 9. 20:30

3월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축일:3월15일 
성 클레멘스 마리아 흡바우어 
St. Clemens Hofbauer, C
St. CLEMENT MARY HOFBAUER
San Clemente Maria Hofbauer 

26 December 1751 at Tasswitz, Moravia as John Dvorak
- 15 March 1820 at Vienna, Austria of natural causes
Beatified:29 January 1888 by Pope Leo XIII
Canonized:1909 by Pope Pius X
Patronage:Vienna Austria (named by Pope Pius X in 1914)
Clemente =indulgente, generous



클레멘스 마리아 홉바우어는 1751년 12월 26일 모라비아의 타스비츠에서 태어났다. 
그는 빵공장에서 일하였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을 느껴 가능한 한 한 많은 시간을 내어 학업을 계속하였다.
로마에서 구속주회에 입회하였고 사제로 서품된 후 바르샤바로 갔다.

거기에서 폴란드 내의 첫 번째 구속주회 공동체인 ’성 베노’를 열고 매우 풍성한 사도적 결실을 거두었다.
후에 많은 이들의 박해로 비엔나로 옮겼고 거기에서 20여년을 일하고 1820년 3월 15일 세상을 떠났다.
많은 이들이 그의 전구를 통해서 기적적인 은총을 받았으며 1909년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구속주회홈에서)



모라비아의 타쓰비츠 태생인 체코 사람으로 그의 본명은 얀 드르략인데 독일 이름인 흡바우어로 개명하였다. 
그는 푸주간의 아홉째 아들인데, 어려서 부터 빵굽는 기술을 배웠고, 어려운 생활을 하였으나, 항상 은수자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동안은 로마와 비엔나 사이를 오가는 방랑생활을 하다가, 브룩크에서 프레콩트레 수도원의 빵굽는 데서 일하였으며, 마침내 은수자가 되었다.
그러나 요셉 2세 황제가 은수소들을 폐쇄하였을 때, 그는 비엔나로 돌아와서 빵굽는 사람이 되었으나,
친구인 베드로 쿤즈만과 함께 티볼리의 주교 키아라몬띠의 승락을 받고 재차 은수자가 되었다.

그는 그 후 비엔나와 로마 대학교에서 공부하였고, 속죄회에 입회하여, 1785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비엔나로 파견되었으나 황제가 많은 수도회를 축출하였기 때문에 속죄회 수도원 건립이 불가능하게 되어,
돌아오는 길에 옛 친구인 쿤즈만을 만나 평수사로 입회시켰다.
그러나 교황 대사의 요청에 따라, 그들은 바르사바로 갔으며, 그곳에서 20여 년 간 선교활동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클레멘스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하였다.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속죄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기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는 끝내 비엔나에 정착하기로 결정하고, 그곳의 이탈리아 구역에서 일하였으며,
울술라회의 지도신부로도 활약하면서 부터는, 그의 설교와 성덕, 그리고 지혜와 고해신부로서의 이해심 등이 높은 명성을 얻게 하였다.

그는 비엔나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였고, 독일 지역의 수도생활 재생을 위하여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클레멘스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하였다. 그는 1909년에 시성되었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요셉주의 Josephinism 
오스트리아 황제 요셉 2세(재위: 1741∼1790)의 종교정책으로, 그에 따르면 국가는 교회에 대한 간섭권, 우위권을 갖는다고 한다. 
황제는 교회의 재산 대부분을 몰수하고, 
교회에 바쳐지는 모든 기금을 종교기금 (Religions fund)에 통합시켜 공공의 종교활동비에 충당하려 하였다. 
목적달성을 위해 황제는 모든 수도원을 해산시켰고, 이를 세속용으로 불하하였다. 
양초에 관한 규칙에 이르기까지 교회를 간섭한 요셉 2세는 `제의실의 황제’라고 불렸다. 
(가톨릭대사전에서)



성 클레멘스 호프바우어는 20세기에 새로 성인품에 오른 분으로서 1909년 5월 20일 비오 10세 교황에게 시성되고, 
1914년 빈의 사도인 동시에 수호 성인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수도명은 클레멘스이고 세례명은 요한이었다.

그는 1751년 오스트리아(Austria)의 빈도보나(Vindobona)에서 태어났다.
열두 형제 중 아홉째의 아들이고, 가정은 가난한 고기 파는 직업이었으나 양친은 모두 신심면에 열심한 분들이었다.
그가 7세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어 어머니는 그를 십자가 앞에 데리고 가서 손으로 가리키며 ’보아라, 이제부터 네 아버지는 하느님이시다"라고 타일렀다고 한다. 



그 뒤 형제들 중 일곱까지 일찍 다 죽었으므로 요한은 아직 소년의 몸으로 노동에 종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기도하고 또 일하라"(Ora, et labora)함은 유명한 트라피스트(Trappisst)의 표어지만 당시 요한의 생활을 나타낸 말이기도 했다.
거기에 대해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손님이 와서 어머니와 대화 중 권태(倦怠)란 말을 여러 번 하고 있었는데, 그는 그 뜻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금 뒤 그는 어머니에게 그 뜻의 설명을 들었지만 "하는 일이 없어 심심하다"는 생각은 그가 이제까지 조금도 알지 못했던 관계로 대단히 놀라며
"엄마, 그러한 때에는 기도를 바치면 좋을텐데.."하고 태연히 말했다고 한다.

요한은 어려서부터 항상 사제가 되려는 꿈을 갖고 있었으며 얼마동안은 로마와 빈 사이를 오가는 방랑 생활을 하다가
부룩크에서 프레몽트레 수도원의 빵 굽는 데서 일하면서 라틴어 문법을 배웠다.
그 뒤 그는 로마에 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을 참배하고 일심으로 기도하고 돌아오는 도중 이탈리라의 티볼리 부근에
초막을 마련하여 잠시 은수자의 생활을 해 보았지만, 본래 사제를 지망하는 그는 이에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다시 오스트리아로 돌아왔다.



그때의 그 생각에는 그 나라의 서울인 빈에 가면 어떻게든지 제 목적을 달성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으나 
막상 가 보니 쉽사리 마음대로 안 되고, 우선 살아가기 위해 할 수 없이 와이리히라는 빵집에 취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데 신심이 깊었던 선량한 주인 부부는 성실한 요한이 한결같이 마음에 들어 사위로 삼으려고 했으므로
요한은 이를 알자 자못 놀라며 기회있는대로 도망을 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어느 날 아침 그가 여전히 근방에 있는 스테파노 대성당에서 미사 참여하러가서 복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려고 하니 때마침 큰 비가 쏟아졌다.
현관에서는 세 귀부인도 야단난 것처럼 서있었다. 친절한 요한은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서 비오는 가운데 뛰어가서 마차를 불러왔다.
귀부인들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거듭 사례하며 "그대도 함께 탑시다"라고 자꾸 권하므로 사양할 수 없어 같이 탔던 것이다.
가는 도중 요한은 그들이 묻는 대로 자기는 사제가 되기를 희망하지만 학비가 없어서 될 수 없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러자 평소에 그의 열심하고 경건함에 탄복하고 있던 그들 세 사람은 극히 동정하며
"그만한 비용이라면 어떻게든지 장만해 드리겠습니다"하고 생각지도 않던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이처럼 의외로 학비의 혜택을 받게 된 요한은 그 당시 30세라는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똑같이 어학부터 철학, 신학에 이르기까지 모두 배웠다. 
그런데 그 당시의 빈 대학에 있어서의 신학의 경향에는 매우 좋지 못한 점이 있어서,
지금까지 순수한 가톨릭 교육만을 받아온 요한은 얼마나 마음으로 그것을 우려했는지 모른다.

하루는 어느 교수의 합지주의설에 대한 강의를 듣고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선생님, 그렇다면 참된 가톨릭교라고 부를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만..."이라고 항의했다.

그래서 그는 순수한 가톨릭의 학설을 배우러 로마에 가려고 결심하고 휴부르라는 친구와 함께 제일 먼 성도(聖都)로마를 방문해
그 날 밤은 여인숙에서 머물고 다음날 아침 제일 먼저 종이 울려온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여했다.



그것은 근방에 있는 구속주 수도원에 속하는 성 율리아노의 성당이었다. 
하느님의 섭리는 기묘한 것으로서 오래지 않아 이 두사람은 그 곳의 수도자가 되어 
요한은 클레멘스라고 개명하여 35세때 비로소 오랜 세월 갈망하던 사제가 되었던 것이다.

수사 신부인 클레멘스는 총장으로부터 북쪽 유럽에 구속주회를 발전시키라는 분부를 받고 러시아의 독일 이민부(移民附) 사제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가는 도중 휴부르와 같이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당도하니 로마 교황청의 대사 사르쯔오는 그들을 동시에 머루르게 하고
성 벤노에게 봉헌된 성당을 내주며 그 시에 살고있는 독일인 신자들을 맡아보게 했다.



그 교회는 황폐하기 짝이 없어 클레멘스는 우선 손질과 청소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게다가 때는 마침 프랑스 대혁명의 시초였고, 그의 영향은 바르샤바까지 미치게 되어, 시민은 가톨릭 신자이면서도
교회의 중요 신앙 조목조차도 모르고도 수치로 여기지 않던 상태였으므로 클레멘스는 신앙의 부흥을 위해 다음 세대의 국민인 아이들에게
교리를 철저히 가르칠 필요성을 통감하고 그를 위해 노력하는 한편, 빈민이나 고아들의 구호 사업에 착수하고, 자신은 빈궁을 감내하면서도
그들에게는 부자유를 주지 않으려고 힘껏 일하며 그것 때문에 친히 구걸하러 다니고, 때로는 박해나 수치를 당해도 조금은 언짢은 기색이 없었다.

한 예를 들자면 어느날 그가 요리점에 가서 구걸을 애원하니까 손님 중의 하나가 욕성르 퍼부으며 그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그래도 그는 동요하는 기색이 없이 천천히 그것을 씻고 나서
"지금 것은 나에게 주신 것이고, 이번에는 불쌍한 고아들에게도 아무것이나 베풀어주지 않겠습니까?"라고 정중히 말해
상대자도 매우 부끄러워하고 또한 거기에 모여 있던 사람들도 대단히 감동하여 각기 응분의 희사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같이 구걸하면서도 부족할 때에는 하느님께서 기적으로 도우신 때도 종종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성 벤노 교회 사제의 감탄할 만한 활동 상태는 오래지 않아 그 부근에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되자 동정하는 이도 증가되어 기부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성당을 보살펴 주는 이도 있었다.
교회는 날로 새로워져서 자유로 장엄한 예식도 거행할 수가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성 벤노 교회는 신심의 보금자리(오아시스)"라고 불리기까지 되었다.
이 칭찬의 언사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그가 구속주 수도원이 형제들과 활동을 개시하던 첫 1년간 성체를 영한 신자수는 2천명이었지만
그로부터 14년후에는 10만여명에 달했다는 점으로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늘 가난한 이들과 더불어 일했으며, 고아원과 학교를 세웠고, 독일과 스위스로 선교사들을 파견했다.

그런데 선행을 멸망시키려는 악마는 도처에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클레멘스는 사악(邪惡)한 사람의 모함을 당하여 나폴레옹이 수도회를 탄압할 때,
그와 그의 동료 구속주 회원들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각기 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렇게 되고 보니 그렇게 번성하던 성 벤노 교회도 하루 아침에 멸망의 운명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클레멘스는 사방을 헤매다가 1808년 빈에 돌아와서 그곳 우르술라회(Urusline convent) 수녀들의 지도 사제가 되어, 
고해 성사도 주고, 강론도 하며 가난한 이의 아버지, 학생들의 좋은 지도자로서 바쁜 생활을 보내기를 13년간이나 했다.
일류의 학자나 정치가도 영적 문제에 대해서는 그에게 교훈을 청하고 또한 프러테스탄트 인으로서 그의 지도에 의해 개종한 이도 얼마나 많았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는 빈에 가톨릭 대학을 설립했고 독일 지역의 수도 생활 재생을 위해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그는 요셉주의자들의 그릇된 사상과 대치하여 힘찬 싸움을 했다



그러던 중 성자 클레멘스에게도 드디어 이 세상을 떠나 영혼의 고향인 천국에 개선할 날이 다가왔다. 
뜻밖에 장티푸스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된 그는 1820년 3월 15일 정오,
요란히 들려오는 삼종소리를 들으며 "삼종소리가 들리니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하면서 고요히 눈을 감았다.
그의 장레식의 시각은 계원(係員)의 불찰로 발표를 잊고 있었으나 어떻게들 알았는지
정각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깊은 애도 속에 성인의 유해는 묘지까지 전송되었다.

"클레멘스 사제의 죽음은 나에게도, 국민에게도,
심지어 교회에 대해서도 다시 찾을 수 없는 손실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그는 유일한 교회의 기둥이었기 때문이다."라 함은
그의 죽음에 오스트리아의 프란트 황제가 발표한 애도사 중의 한 구절이다.
(대구대교구홈에서)

* 우르술라회(The Ursuline Sisters) 창설자
성녀 안젤라 메리치 동정 축일:1월27일.게시판1589번
*성녀 우르술라 동정 축일:10월21일.게시판143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