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성녀 축일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Margaret K 2018. 1. 15. 21:27

1월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축일:1월 31일 
성 요한 보스코 사제
St. John Bosco, Priest Founder (RM)
San Giovanni Bosco Sacerdote
St. Joannes Don Bosco, C.

(Don Bosco; Giovanni Bosco; Giovanni Melchior Bosco; John Melchoir Bosco)
1815 at Becchi, Castelnuovo d’Asti, Piedmont, Italy
- 1888 at Turin, Italy
Canonized :1934 by Pope Pius XI
Name Meaning :God is gracious (= John)
Founder: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Societa’di san Francisco Salesio) 



1815년 8월 15일, 베키에서 태어난 요한 보스코는 일찌기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한 홀어머니 말가리다 오키에나의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두 형제들과 함께 힘든 유년기를 보낸다.

요한 보스코가 아홉살 때 한 꿈을 꾸게되는데 그 꿈은 그의 일생을 계시해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 꿈을 계기로 요한 보스코는 사제성소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되지만,
가난한 과부의 아들로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지 않아
남의 집 머슴살이나 상점의 점원 또는 직공 등을 하면서 신부가 되는데 필요한 공부을 길을 찾는다.

자연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이지만 천부적인 명석함을 지닌 그는 신학교를 다 마치고 마침내 1841년 토리노 교구의 사제로 서품된다.
사제가 된 요한 보스코 신부(일반적으로 ‘돈보스코’라 부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년원에 수감되어 있는 청소년들을 찾아보는 것이었다.
당시 이탈리아 사회는 공업화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시골에서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드는 청소년들로 인한 많은 혼란들이 있었다.
도시에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지 못한 시골 출신의 젊은이들은 쉽게 범죄의 상황에 빠져들게 되었고, 교도소는 항상 넘쳐나고 있었다.

보스코 신부는 버림받은 청소년들이 그들을 돌보아주고 곁에 있어주고
정직한 주인 밑에서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면 정직한 시민과 착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을 체험으로 간파한다.
그리하여 보살펴주는 이가 아무도 없는 소년들을 위하여 ‘오라또리오’라 부르는 기숙사를 세워
이들의 의식주를 마련해주고 일자리를 얻는 데 필요한 기술과 공부를 가르쳐주는 일을 시작한다.



그의 보살핌을 받는 소년들의 숫자가 점점 늘어나자 보스코 신부는 많은 평신도들을 영입하여 자신의 일을 돕게 한다. 
특히 보살핌을 받고 있는 소년들 가운데서 
보다 성숙한 젊은이들이 보스코 신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이들을 주축으로 하여 수도회를 창설하기에 이른다.
보스코 신부는 마음을 매혹시키는 독특한 방법으로 청소년들을 사랑했다.

초창기 오라또리오의 600명이 넘는 소년들은 모두가 제각기 자신이 보스코 신부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들도 이에 대한 보답으로 보스코 신부를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느껴지는 각별한 사랑의 친밀감으로 인하여 소년들은 보스코 신부를 ‘돈보스코’라고 부르면서 자신의 삶을 의지하였다.

그래서, 처음 수도회 설립의 뜻을 젊은이들에게 밝혔을 때, 많은 젊은이들은 수도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깊이 파악하지도 않고 단지 돈보스코와 함께 일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일생을 바칠 수 있다고 하면서 참여하였던 것이고,
이렇게 해서 1854년 살레시오 수도회는 탄생되어 1869년 교황청의 정식 승인을 받는다.
보스코 신부는 살레시오 수도회에 이어 ‘살레시오 수녀회’와
평신도 단체인 ‘살레시오 협력자회’를 창설하여 남여 청소년들을 위한 교육 사도직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다.

청소년들 특히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학교, 기숙사, 기술학교, 주일학교, 야간학교 등 다양한 교육기회를 제공한 요한 보스코 신부는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이며, 동시에 2천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놀랄만한 작가이고,
사회변혁의 순간에 교회를 적극적으로 옹호한 호교론자이며, 청소년 교육이라는 새로운 영성을 교회안에 심은 대영성가이기도 하다.

“나는 청소년 여러분을 위하여 일하며, 공부하고, 나의 생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가 되어있습니다.”라는 확신처럼
돈보스코는 자신의 모든 것을 청소년 특히 보다 가난한 청소년들을 위해 다 내어주고 1888년 1월 31일에 선종한다.
그리고 1934년 부활절, 교황 비오 12세에 의해 성인으로 반포되어 ‘청소년들의 아버지요 스승’이라는 칭호를 받는다.(살레시오수도회홈에서)



요한 보스코의 교육 이론은 오늘날에도 학교에서 잘 활용될 수 있다. 
그것은 신체적 처벌을 지양하고 학생들이 잘못될 수 있는 상황을 배제함으로써 학생들의 행동을 선도하는 예방 조치이다.
그는 고해 성사를 자주 받고 영성체를 자주 하도록 권한다.
그는 학생들의 일과 공부 그리고 놀이에 영적 생활을 연결시키려 애쓰면서 교리 교육과 어버이의 훈육을 결합시켰다.

젊은 시절에 청소년과 어울려 일할 수 있는 사제가 되라는 권고를 받은 요한은 1841년에 토리노에서 서품을 받았다.
젊은이들에 대한 그의 봉사활동은 그가 가난한 고아 소년을 만나 첫영성체 준비를 시킬 때 시작되었다.
그때 그는 젊은 견습공들을 모아서 교리를 가르쳤다.

여직공들의 기숙사에서 지도 신부로 일하면서 그는 소년들을 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기도원을 개설했다.
몇몇 부유하고 권세 있는 후원자들이 물질적 도움을 베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는 소년들을 위한 두 개의 작업장을 마련하여 구두 만드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할 수 있었다.
1856년 이르러 이 단체는 인원이 150명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고, 종교 관계 팜플렛과 교리 교육 팜플렛을 찍어 내는 인쇄소까지 차렸다.

직업 교육과 출판업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가 젊은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며, 가톨릭 출판업자들의 수호자로서 잘 맞는 것이다.
요한의 가르침에 대한 명성은 널리 퍼졌고
1850년에는 젊은 신부들을 보조자로 두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스스로 자기 협력자들을 훈련시키게 되었다.

1854년에 그와 그의 동료들은 우선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이름하에 서로 결속했다.
교황 비오9세의 격려를 받고 요한은 1859년에 17명으로 살레시오회를 창설했다.

그들의 활동은 교육과 선교 활동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
나중에는 소녀들을 도와 주기 위하여 살레시오 수녀회도 조직했다.
그는 1888년 1월 31일에 세상을 떠났고 1934년 비오11세께서 시성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인간성 그 전체를 교육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것, 
즉, 일, 공부, 놀이 등 모든 것에 가득히 스며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요한 보스코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일주일에 한번 주일미사에 참여하는 정도로서가 아니라 전적인 노력을 경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우리가 하고 있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찾고 발견하는 것이며,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인도하도록 온전히 밑기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요한 보스코는 재능과 능력을 살리는 직업 훈련과 자신감 그리고 긍지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따라서 그는 장사하는 기술에 관해서도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요한 보스코 사제

’모든 교육은 하나의 철학을 가르친다. 
그것이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제안이나 암시 또는 분위기로서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한 교육의 각 분야는 다른 모든 분야들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만일에 그것이 어떤 인생관을 갖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교육이 아니다.(G,K 체스터턴) 
-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1841년 사제로 서품된 뒤 가난한 젊은이들의 직업 교육에 헌신하였습니다. 
그는 젊은이들에게 전문적인 능력과 기술을 가르치면서
그리스도의 삶을 그들의 인생의 목적으로 삼을 수 있는 신앙을 심어 주었습니다. 

이 가난한 젊은이들의 모임이 전 세계적으로 퍼진 [살레시오회] 의 모체가 되었으며 
1874년에는 마리아 동정회를 설립하였습니다.

요한 보스코는 자신의 구제 사업의 계속적인 발전을 위하여
수도원을 창설하여 [살레시오 성 프란치 스꼬의 신심회] 라 이름지었습니다.
따라서 돈 보스코를 근대 사제의 이상형으로, 19세기의 가장 훌륭한 교육자로 손꼽습니다.

그는 정치적 문제에 까지 탁월한 조언을 했으며
교육 부문에 100여권의 저서를 남길 정도로 문필가로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오라토리오의 소년들에게 고해성사를
주는 돈보스코 (1861년)


1815년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어렵게 보냈다.

사제가 되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온갖 심혈을 기울였고
젊은 이들에게 기술 교육과 그리스도인 생활을 가르치는 살레시오회를 창립했다. 

신앙을 옹호하는 몇 개의 소품들을 남겼다. 1888년 세상을 떠났다.

클릭하시면 원본 크기로 보실수 있습니다.

오라토리오의 소년들과 어울려 있는 
돈보스코 (1861)


성 요한 보스꼬 사제의 편지에서
(Epistolario, Torino, 1959, 4,201-203)

나는 언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했습니다.

우리가 무엇보다 생도들의 참된 행복을 찾고 그들이 생활에서 자신의 본분을 다하도록 인도해 주고 싶다면, 
우리는 이 사랑하는 젊은이들의 부모를 대리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나 그들을 위해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하고 노력하고 또 사제 직분을 이행해 왔습니다.
비단 나만이 아니고 살레시오회의 회원 전체가 그렇게 했습니다.

자녀들이여, 나는 나의 긴 생활을 통해서 이 위대한 진리에 대해 얼마나 자주 확신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참는 것보다 화를 내는 것은 더 쉽고 젊은이들을 위협하는 것은 설득시키는 것보다 더 쉽습니다.

이런 이야기까지 하겠습니다.
즉, 참아 내지 못하고 오만한 성격을 지닌 우리에게 있어서, 반항하는 생도들을 참아 주면서
엄중하게 그리고 온유하게 그들의 잘못을 고쳐 주는 것보다 벌을 주는 것이 더 용이한 일이라는 점입니다.



성 바울로가 초심자들에 대해 지녔던 그 사랑을 나는 여러분에게 천거합니다. 
바올로 사도는 그들이 잘 순종하지 않고 자신이 베푸는 사랑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보았을 때
그 사랑은 바울로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하고 그들에게 권고하게끔 해주었습니다. 

여러분이 주체 못하는 분노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할 근거를 어느 누구에게도 주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벌을 줄때 우리가 권위를 주장하거나 또는 분노를 폭발시키려고 행동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해 필요하게 되는 그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기한 힘든 일입니다. 

우리 권하에 있는 이들을 우리 자녀로써 바라보도록 합시다.
명령하러 오시지 않고 순종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그들을 섬기는 자가 되도록 합시다.
지배한다는 그런 인상 마저 부끄럽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더 잘 봉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그들에게 지배권을 행사하지 맙시다. 



예수님이 사도들을 대하신 방법도 바로 이것입니다. 
사도들은 무지하고 예의를 모르고 불충실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은 그들을 참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죄인들도 자비와 애정 어린 지극한 친밀성으로 대하셨습니다.

그것을 본어떤 이들에겐 놀라움이 되었고 또 어떤 이들에겐 걸림돌이 되었지만
한편 다른 이들은 그분으로부터 죄 사함을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보고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가 되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생도들이 진정 우리의 자녀라면 그들의 잘못을 고쳐 줄때,
우리는 온갖 분노를 제거해 버리거나 분노를 완전히 제어한 것으로 보일 정도로 가라앉혀야 합니다.
우리는 분노로 마음의 평화를 잃거나 멸시의 눈초리를 보여 주거나 또는 마음 상하는 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고,
오히려 잘못을 고쳐 주고 다 잘되게 해주는 참된 부모들처럼 지금은 자비를 베풀고 미래에는 희망을 내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중대한 문제들이 있는 경우에는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리는 것보다는 겸손과 항구심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절조 없이 말을 뇌까릴 때 그말을 듣는 사람에게 마음을 상하게 만들고
잘못을 저지른 이들에겐 유익한 것을 하나도 주지 못합니다.(가톨릭홈에서)

1865-68.

이탈리아의 피에드몬트, 베치에서 가난한 부모 사이에 태어난 요한은 2살 때 부친을 잃고, 
16세 때 치에티의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또리노에서 학업을 계속한 뒤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는 요셉 카파쏘 신부의 격려로 토리노에서 고아들과 함께 일을 시작하다가,
1844년 그곳에 세워진 소녀들을 위한 성녀 필로메나 고아원의 원장으로 임명되자, 
그 부지 내에 소년들을 위한 집도 마련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이 너무나 규율을 어기고 불량배들 처럼 되어가자, 한 때 그는 원장직으로부터 사임을 권고받기도 하였다.

마침내, 그는 그 직책을 사임하고, 어머니와 함게 버림받은 소년들을 위한 보금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는 그 소년들을 위한 집과 학교를 세웠고, 교육을 실시하다가,
1856년에는 150명으로 불어나자, 10명의 사제들과 함께 500명이 넘는 학생들을 지도하는 다른 보금자리를 꾸미기도 하였다.
그의 사업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는 엄격한 규율이나 훈련을 피하고, 사랑으로 대하였으며,
각자의 발전을 주도 면밀하게 관찰하여 대응하였고, 그들의 개성과 신앙을 격려하여 훌륭한 인격의 소유자로 길러내었다.

1865-68

이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그는 소년들에 대한 교육과 사랑을 설교하러 다녔으며, 유명한 저서를 저술하였다. 
수많은 도움을 베풀기 위하여 그는 살레시오회를 세워야 하였다.
이 회는 1859년, 비오 9세로부터 승인을 받았으나, 1884년까지는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하고 활동하였다.

그의 임종시에는 64개의 살레시오 수도회가 있었고, 유럽과 아메리카로 확대되었으며, 약 800명의 살레시안 사제들이 활동하였다.
1872년, 그는 크리스챤의 도움이신 성모 수녀회를 창설하여 가난한 삶들과 버림받은 소녀들을 돌보게 하였고,
살레시안 협력자들이라 부르는 3회가 뒤따랐다.

그는 1888년 1월 31일, 토리노에서 운명하였고, 1934년에 시성되었다. 그는 편집과 교정자의 수호성인이다. (부산교구홈에서)



이탈리아의 토리노에는 "고아들의 아버지"라고 기록된 한 무덤이 있다.
비명(碑銘)은 지극히 간단하지만
그 밑에 묻혀 계시는 분이야말로 무수한 고아의 아버지로 공경을 받는 성 요한 보스코이다.

교회의 역사를 보는 이는 누구든지 깨달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교회의 내외에 어떤 위험한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어느 성인을 보내셔서 그 위험을 선처하시고
아무리 반대자가 주님의 계획을 파괴하려고 해도 결국 실현케 하시는 것이 상례이다.

1867

요한 보스코는 1815년 8월 16일, 
북 이탈리아의 토리노 교구의 카스텔누오보 근처의 작은 마을 베치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프란치스코 루이지라는 분으로 근면하고 조심성 있는 독실한 신자였고,
어머니는 마르가리타로서 역시 모든 선덕을 구비한 신심 깊은 부인이었다.

그런데 이 가정은 물질적 면으로는 겨우 그날의 생활을 이어나갈 정도였지만,
정신적 면으로는 극히 혜택을 받은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뜻밖에 감기로 급성폐렴에 걸려 34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남편이 임종시에 유언한
’자녀들을 부탁하오. 특히 어린 요한을..."이라는 말을 언제든지 잊지 않고
요한을 훌륭한 인물로 양성하기 위해 밤낮으로 고심했다.



그녀의 교육에 대한 열성이야말로 모든 사람들이 "마르가리타만은 그리스도교를 믿는 어머니들의 모범이다."하며 늘 칭찬하는 정도였다. 
몇 해 후에 요한 보스코가 아동 교육에 성공을 한 것도 본래는 훌륭한 어머니의 감화가 대단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렇다 할지라도 그를 잘 선도한 힘은 물로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그는 후에 하느님께 특별한 사명을 위탁받으리라는 것은 어렸을 때부터 기이한 일로 예측되어 있었다.

예컨데 9세 때 그는 처음으로 주 예수의 발현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지도자로 주신다는 고마운 말씀을 들었는데,
실제로 후일 예상한 것 이상으로 대성공을 하고, 또 그가 창립한 살레시오회의 경탄할 만한 신속한 발전을 생각할때에
성모의 도움이 대단한 것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가 없다고 요한 보스코 자신이 고백하고 있다.


요한 보스코는 성모께 무한한 신뢰를 바치고 있었다. 그리고 은총의 인도로 몸을 수련하고 덕행의 길로 매진했다.
그는 극기 금욕의 생활을 즐겁게 하면서도 항상 쾌활하고 사람으 즐겁게 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가끔 아이들을 위하여 
스스로 줄넘기나 장난을 해 주는 때도 있으나 사람들의 영혼을 점점 더 귀중히 생각하며 소년 시대부터 사제가 되려고 굳게 결심한 바가 있었다.




오라토리오의 악대. 돈보스코는 
"음악없는 오라토리오는 영혼 없는 육신이다." 라고 말했다(1870)


가정이 구차하기 때문에 그것을 실행할 수가 없어 
어느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게 되었으나 이것조차 여러 가지 사정으로 종종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12세부터 14세까지의 2년간을 숙부의 집안에서 일을 도우며 지낸 것도 그 한 예이다.
숙부는 요한의 경건한 마음과 그의 뜻을 깨닫고 돈 가로소라는 성인같은 한 사제에게 위탁하고 그를 공부시키게 했다.
그러나 가로소 신부는 오래지 않아 심장마비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요한은 그때 돌연한 그의 죽음에 아무 유언을 들을 사이도 없이 
다만 스승한테 받게 된 것은 한 개의 손금고(手金庫)와 그의 열쇠 뿐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주려는 의사였을 것인가? 적어도 가로소 신부의 조카되는 사람은 그렇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요한 보스코는 ’나에게는 현세의 보배는 필요없습니다.
천국만을 잃지 않으며 그것으로 만족합니다"하며 끝끝내 그것을 받지 않았다 



그 후 부터 그는 공부를 계속할 수가 있게 되었다. 
이제서야 그는 천부적 재주를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뛰어난 좋은 성적을 올리고,
1835년에 신학교에 입학해 전부터 절실히 원하던 것을 실현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 신학교에서 6년간 철학과 신학을 연마하는 동안 그는 얼마나 덕행의 길에 힘썼는지!
그러나 겸손한 그는 될수 있는대로 겉으로 나타나지 않도록 힘썼다.

요한이 바야흐로 사제 서품을 받게 된 것은 1841년 4월 5일이었다.
세라핌적 사랑으로 첫 미사를 봉헌한 그는 점점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높아질 뿐이었다.
그래서 한 번이라도 그의 미사에 참여하려고 먼길을 무릅쓰고 찾아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첫 미사때, 어머니 마르가리타는 사랑하는 아들을 하느님께 봉헌한 즐거움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훈계했다. 

"너도 오늘부터 하느님의 것이 되었지만 사제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잠시도 망각하지 말아라.
지금은 이 말을 깨닫지 못하겠지만 언젠가 반드시 깨달을 날이 올 것이다. 
오늘 부터는 내 일은 염려하지 말고 너는 다만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 열심히 일해라.
나는 네가 항상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이제는 만족이다..."

이와 같은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난 요한이 후에 성인으로 공경을 받게된 것도 생각하면 우연한 일이 아니다.

또한 그에게는 토리노에 성 요셉 카파소, 성 요셉 베네딕토 코톨렌고는 두 친구가 있었다.
그들은 그의 사명을 재빨리 알아채고 박애 사업에 일생을 바치라고 권고했다. 

요한은 그 충고에 순응해 즉시 가련한 고아들을 모아 아버지가 되어 교리를 가르쳐주고, 혹은 기술도 가르쳐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는 아직 고아원도 없어서 그들은 요한과 그의 어머니와 같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 아이들은 토리노의 사람들에게 "요한 보스코의 왈패자식들"이라고 불렸지만 
덕망이 많은 성인의 감화를 받고서 모두 온순한 아이들이 되었다.
요한 보스코는 또한 토리노에 있는 양로원이나 자혜병원,
형무소까지도 방문하고 거기에 있는 불쌍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도와주며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했다.

1864년에 고아원이 건설된 후부터 수용한 아이의 수는 매년 증가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아이들에게 대하여서는 눈에 보일 정도로 신기한 힘을 가진 것처럼 
아무리 왈패인 아이라도 자유롭게 통솔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는 전에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과 같이 사제의 길은 바로 십자가의 길이었다. 
정직한 그는 악인의 원한을 사게 되어 전후 일곱 번이나 살해될 뻔했다.
그러나 그럴때마다 어디선가 사나운 개가 나타나서 악인에게 달려드는 등 기이한 일이 일어나서 환난을 면할 수가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 사업의 계속되는 발전을 위한 한 수도원을 창설해
’살레시오 성 프란치스코의 신심회’하고 이름지어
1859년 12월 18일 제자 몇명을 데리고 교황 비오 9세를 알현하고 그 인가를 청했다. 
다시 1875년 8월 5일에는 살레시오 수녀원도 창설했다.

이 두 수도원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교적 교육을 베풀어
천국의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하고 또 직업을 줌으로써 현세의 행복까지도 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수도원이 얼마나 사회에 유익이 되었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받았는지 측량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교황 레오 13세가 요한 보스코를 향해
’전 세계 교회는 당신을, 당신의 사업을,
당신의 수도원을 우러러보며 다만 탄복할 따름입니다"하고 말한 것도 결코 과분한 칭찬이 아니다. 

성인은 1888년 1월 31일 아침 삼종소리가 날 때 고요히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많은 공적은 영원히 빛날 것이고, 오늘날도 그 위대한 사업은 그의 애제자인
살레시오 회원의 손으로 훌륭히 계속되고 우리나라에서도 그 수도자들이 활약하고 있다.(대구대교구홈에서)



[꿈] 

예언적인 꿈은 우리가 보통 꾸는 꿈과는 달리 미래의 방향을 알려 주고 우리의 희망과 열정과 목표를 보여 준다. 
요한 보스코는 예언적인 꿈을 꾸는 사람이었다. 
그는 9살 때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가난한 소년들을 도와 주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가르쳐 주는 꿈을 꾸었다. 
꿈은 줄곧 그의 일생을 이끄는 역할을 했다 
. 
그는 꿈을 통해서 자신이 가르치는 어린 소년들의 영혼 상태를 식별하기도 하고 새로운 계획과 선교에 관한 전망을 얻기도 하였다. 
요한 보스코에게는 언제나 자금이 충분치 않았지만 
하느님이 모든 것을 마련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으로 일을 시작하면 예기치 못한 방법으로 재원이 마련되곤 했다. 

하느님은 그가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셨다. 
요한 보스코의 꿈처럼 예언적이지는 않더라도 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준다. 

관심을 갖고 꿈을 잘 살펴보면 잠재되어 있는 깊은 열망이나 포부를 알아낼 수도 있다. 
꿈은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암시해 주기도 하며, 
하고 인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별히 예언적인 꿈을 꾸어 본 적이 있는가?
꿈은 때로 잠재 의식을 반영한다. (까리따스수녀회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이) Societa’ di san Francisco Salesio 
(영) The Society of St. Francis De Sales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축일: 8월 4일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Saint John Mary Vianney
St. Joannes Maria Vianney
San Giovanni Maria Vianney Sacerdote 
Dardilly (Lione, Francia), 8 maggio 1786 
- Ars-sur-Formans (Ain, Francia), 4 agosto 1859 
Giovanni = il Signore è benefico, dono del Signore, dall'ebraico(=God is gracious)
Canonized :1925.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




프랑스 혁명으로 불안정한 시기에 리용 교외 시골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비안네 성인(1786-1859년)은

정상적인 초등 교육을 거의 받지 못하였으며, 
바리에르의 소신학교에서 철학을(1811년),리용의 대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으나(1813년),

라틴어 때문에 퇴학당하였습니다.(1814년)
그러나 18세 부터 시작되었던 에퀼리의 신부 아베 발레의 지속적인 개인교수와 특별 시험 주선으로

1815년 그레노블에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제직을 수여받지 못할 정도로 신학교 성적이 부진하여 장래를 기약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어떤 자격보다도 훌륭한 신심과 좋은 의지를 참작한 교회가 그를 사제로 서품함으로써

한 성인의 탄생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3년동안 아베 발레 신부의 보좌신부로 있은뒤,

1818년 주민 230명의 한적한 시골인 벨레 교구 아르스의 주임사제로 부임하여
여기서 죽을 때까지 40년 동안이나 일하며 열심한 설교와 고행과 기도와 선행 등 놀라운 방법으로

본당을 쇄신하고 발전 시켰다.
단순한 설교와 충실한 고해신부로 이름이 퍼져나가,

마침내 조용한 시골을 프랑스 전역으로부터 연 2만여명에 이르는 고해자들이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만여 명의 사람들이 들이닥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고

해성사와 영적 지도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그의 설교를 경건히 듣곤 하였다.

그는 하루에 열 여덟 시간이나 고백소에서 지냈고

그의 설교는 단순하지만 심금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영적 권고와 충고에 있어서는 간단 명료하였고, 신심이 흘러 넘치는 직설적인 설교를 하였다.

그는 순례자들의 소란, 끊임없는 고해성사 요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선을 다한 그는 과로로 운명하였다.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오해하여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인 허풍쟁이"라고 힐난했으나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 모든 사제들이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면서 옹호하였다고 한다.
성인은 단지 세 번 아르스를 떠났는데, 그 모두가 수도원을 잠깐씩 다녀오는 것이 전부였다.
1929년 교황 비오 11세께서 그를 본당 사제의 수호성인으로 선언하였다.


이름의 뜻은 God is gracious(하느님은 자비롭다)이다.



당신은 자신이 참으로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고 느끼는가?

다른 세계나 다른 시간에 속한 존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가? 
’아르스의 성자’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는 "우리의 집은 천국에 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는 호텔에 투숙한 여행객과도 같으며

길을 떠나자마자 항상 천상의 집을 그리워하는 존재이다.

우리의 최종 목적지가 이 세상에 있지 않다는 한 가지 증거는

우리의 정의와 공평에 대한 내적인 감각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죽음과 고통이 없으며 정의가 다스리고 모든 것이 공평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우리가 어떻게 공평과 정의에 대해 알 수 있겠는가?

우리의 영혼에는 천국을 가리키는 나침반이 하나씩 들어 있다. 
칠흑 같은 망망대해에서도 나침반의 바늘을 보고 뱃머리를 결정할 수 있듯이,

마음속에 간직한 나침반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길을 인도한다. 
그 나침반을 잃지 않는 한 우리는 진정한 집을 향해 하고 있음을 믿어도 좋을 것이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www.ofmconv.or.kr)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의 교리 지도에서
(Catechisme sur la priere: A.Monnin, Esprit du Cure d’Ars, Paris 1899, pp.87-89)

기도와 사랑은 고귀한 과업이다.

자녀들이여, 그리스도인의 보화는 지상에 있지 않고 천상에 있음을 생각하십시오.

따라서 우리 생각을 우리 보화가 있는 곳으로 향해야 하겠습니다. 
기도와 사랑은 사람의 고귀한 과업이요 의무입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사랑은 이 지상에서 누리는 행복입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일치 외에 다른 어떤 것이 아닙니다. 
순수하고 또 하느님과 일치된 마음을 지닌 사람은

위안을 받고 감미로움으로 충만해지며 놀라운 빛으로 눈부시게 됩니다. 
이 긴밀한 유대 안에서 하느님과 영혼은

녹아 합치된 두 자루의 초와 같아 아무도 그것을 분리시킬 수 없습니다. 
미소한 피조물과 하느님의 이 결합은 지극히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 행복은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행복입니다.

우리는 기도 드릴 자격을 잃은 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심으로 우리가 당신과 대화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우리 기도는 하느님이 지극히 기뻐하시는 향기 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여러분의 마음은 작지만 기도는 그마음을 넓혀 주어 하느님을 사랑 할 수 있는 능력을 베풀어 줍니다. 
기도는 천상을 미리 맛보게 해주고 천상에서 무언가 우리에게 흘러내리게 해줍니다.

감미로움을 남겨 주지 않는 기도는 없습니다. 
기도는 마치 영혼에 흘러내리는 꿀과 같아 모든 것을 달게 해줍니다.

잘 바치는 기도에서 고통은 마치 햇빛을 받는 눈처럼 녹아 버리고 맙니다.

기도는 또 한 가지 특성을 지닙니다.

기도는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보이게 해주고

너무도 큰 즐거움을 가져다 주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해줍니다. 
내 얘기를 한번 들어 보십시오. 내가 브레스의 본당 사제로 있을 때

한번은 동료 사제들 대부분이 앓아 눕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긴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여행 중 자비로운 하느님께 계속 기도했습니다.

분명히 말씀 드리지만 그때 나에게 시간이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자비로운 하느님께 온전히 헌시하여 물 속에 있는 고기처럼 기도 속에 완전히 파묻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에는 헷갈림이 조금도 없습니다.


나는 그런 거룩한 영혼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모릅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꼬와 성녀 콜레트는

우리 주님을 뵙고 사람끼리 서로 이야기하듯 그분과 대화했습니다.


한편, 얼마나 자주 우리는 무엇을 하고자 하는지

또는 무엇을 청하고자 하는지 생각지도 않고 성당에 나오는지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방문하러 갈 때 무엇 때문에 가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비로운 하느님께 흡사 이렇게 말하려는 듯합니다. 
"내가 당신께 말씀 드리려고 하는 것은 한두 마디뿐입니다. 빨리 좀 가게 해주십시오......" 
나는 자주 이런 생각을 합니다.

즉 우리 주님을 예배하러 나올 때 우리가 산 신앙과 완전히 순수한 마음으로 청한다면

청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 축일:10월4일,게시판676번.1403번.
*성 프란치스코의 오상 축일:9월17일.게시판644번.1369번.
*성녀 콜레타 축일:2월7일,게시판938번.1606번.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요한 비안네는 이상을 가진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는 사제가 되기를 원했으나 정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신학 공부를 잘 해낼 수가 없었다.

이상을 가진 사람은 장애를 극복하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과감하게 실행한다.
결국 라틴어 강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으로 신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그러나 사제가 되고자 하는 꿈을 이루기 위해 그는 개인 교수를 찾았다. 
책과의 오랜 투쟁 끝에 요한은 마침내 사제가 되었다.

불가능한 행위를 필요로 하는 상황들이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요한이 주임 신부로 있던 아르스 본당에는 편안한 생활에 젖어 신앙에는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의 이상은 "일부 악마들은 오로지 기도와 단식으로만 쫓아 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엄격한 단식과 짧은 수면을 통해 자신을 이끌어 갔다.
그는 카타리나 랏사뉴와 베네딕타 라르데트와 함께 소녀들을 위해 섭리의 집을 설립했다.
그들은 이 섭리의 집을 만드는 데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하느님께서 도와 주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요한 비안네의 뛰어난 점은 고해 신부로서의 업적이다.

겨울에도 그는 하루에 11,12시간 동안 성사를 주었고, 여름철에는 하루에 16시간씩이나 고해 성사를 주었다.
만일 그가 사제의 사명에 헌신적이 아니었다면

매일매일 자신을 아낌없이 주는 그런 일은 결코 견디어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곧잘, 하고 싶었으나 할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한 일들을 하기 위해 은퇴를 기대한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신부는 은퇴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짐에 따라 신자들에게 봉사하는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
그는 수면 시간을 짧게 가졌고 자주 마귀의 방해를 받았다.

이상을 가진 사람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가 항상 넘치는 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물질적 안락에는 강한 애착을 가지면서도 종교에 대해서는 무관심한 것이

우리 시대의 보편적인 현상인 것 같다.
만일 외계에서 온 사람이 우리를 관찰한다면,

그는 우리가 목적을 향해 가고 있는 순례자라고는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 비안네는 항상 목적을 가지고 여행을 한 사람이었다. 

요한 비안네 신부는 전례적인 기도를 권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개인적인 기도는 여기저기 흩어진 밀짚과도 같다.

만일 당신이 그것에 불을 붙인다면 조그마한 불꽃이 일어날 것이지만 
밀짚을 다발로 모아서 불을 붙인다면 하늘로 치솟는 기둥 같은 큰 불꽃이 일어날 것이다.

공동 기도는 이와 같은 것이다."



구약성서에 "하느님은 성인들 사이에서 기적을 행하신다"하신 말씀은 모든 성인 성녀를 일컬은 말이지만,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에게는 특히 적중되는 말씀이다.

그는 1786년 5월 8일 프랑스의 리용 근교인 다르딜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농업을 생업으로 하는, 재산은 별로 없었으나 부지런하고 성실한 부부였다.
아버지는 가난한 사람, 특히 어려운 길손을 받아들이기를 매우 좋아했는데,

그런 손님 중에는 성 베네딕토 라브르도 끼어있었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훌륭한 부모를 모신 넷째 아들이었다,
그의 부모들은 다른 독실한 신자와 마찬가지로 심히 근심했으며

특히 신부가 없어 미사참여와 영성체를 마음대로 하지 못함을 비통하게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비안네는 열 한살이 되어 첫 고해를 하고 그 2년후에 첫영성체를 했다.

그는 일찍부터 신부가 되고자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러나 집안이 가난해 학비를 조달할 길이 없음을 알고

부모에게 그런 뜻을 전하지도 못하고 매일 매일의 양을 치며 농가의 자녀로서 할 일을 다하며 지냈다.

그는 어떠한 일이든지 다 잘했다. 그러나 신부가 되고가 하는 마음은 사라지지 않고 날로 더 커갔다.
그래서 그는 17세 되는 때 용기를 내어 부모에게 그 뜻을 표명했다.

물론 부모들의 기쁨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공부를 하기에는 경제적인 여건이 넉넉하지 않아,

그로부터 2년간을 더 집안 이을 돌보는데 소일했다.
그러자 하느님의 안배로 에쿨리 마을의 바레이 신부가 그 자신이 가난한 시골 신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부 시켜주기로 했다.
이리하여 비안네가 그 신부 밑으로 가게 된 것은 1805년이었다.



바레이 신부는 손수 비안네에게 필요한 학문을 가르쳤다.
그런데 이 성인처럼 열심한 신부가 가장 정신을 차려 가르친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속죄로서 고행을 하는 것이었다. 
요한이 침식을 가리지않고 공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 후 베리오르 소신학교에 입학했으나, 거기서도 역시 성적은 좋지 않았다.
이해력은 있으나 기억력은 매우 부족했다. 교사들은 그의 성적이 불량하므로 그를 퇴학시키기로 했지만

그의 두터운 신앙심과 품행의 단정함은 전 학우의
모범이 되었으므로 재학하도록 한 것이다. 그 후 요한은 불요 불굴의 정신으로 공부를 해

겨우 신학부에 진급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그의 소망인 사제 서품을 받게 되었다.

신부가 된 그는 그의 은사인 바레이 신부의 보좌가 되었다.

바레이 신부는 이미 연로해 때때로 병석에 눕게 되었으나 여전히 엄격한 고행의 생활을 계속했다.
그는 은사와 더불어 무엇이든지 하고, 은사에게 무엇이든지 배우려 했으며,

은사는 제자에게 한 가지라도 더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이 두성인의 공동생활은 오래 계속되지 못했으니,

즉 그가 부임한 지 2, 3개월이 되자마자 은사 바레이 신부는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기 때문이다.
그 후 비안네 신부는 아르스의 주임 신부로 임명되었다.

아르스는 작은 마을인데, 주민들은 다 신자이지만 대개가 냉담하여 판공성사도 보지 않는 형편이었으며,
주일이 되어도 성당에 나오지 않고 예사로 밭에 나가서 일을 하며 세상 쾌락만을 찾는 것이었다.
이 젊은 신부는 이러한 본당 형편에도 조금도 낙심치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했다.
얼마 안되어 그의 친절, 그의 자애심, 그의 훌륭한 행실은 자연히 모든 사람의 마음에 큰 감명을 주게 되었다.

그의 덕에 경탄하게 되고 이어 그의 훈계를 명심하는 자들이 되었으며

그처럼 냉담하던 자들이 차차 신앙심이 깊어져 성실한 신자가 되었다 



그들에게 회개의 은총을 주기 위해 비안네 신부는 얼마나 열심히 기도를 하고

얼마나 많은 고행을 하며 초인간적 활동을 했을까?
그의 존엄한 속죄 생활은 증인이 없으면 믿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그는 끊임없이 단식재를 지키며 감자만으로 식사를 했다. 
딱딱한 침대에 담요 한벌, 그 나머지는 성당의 장식을 하든가 빈민에게 희사하던가 했다.
그러한 성스러운 신부의 활동은 곧 근방에 알려지게 되고 나중에는 전국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성사를 보기 위해 먼 곳에서도 사람들이 모여왔다.

그들 중에는 신앙에 대해 실망한 자, 마음의 고민으로 위로가 필요한 자,
오랫동안 성사를 보지 않고 방탕한 생활로 대죄중에 있는 자들도 무수했지만,

성인 신부를 만나고 난 후부터는 모두 기쁜 마음으로 돌아갔다. 

비안네 신부는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의 빛으로 사람의 마음속까지 꿰뚫어 보는 은혜를 받았다.
사람들이 어려워서 말을 못하는 것까지 들여다보며

그는 매일 장시간 동안 고해성사를 주지 않으면 안 되었다.
어떤 날은 15시간, 17시간씩 고해 성사를 주는 일도 있었으며

그에게 성사를 보는 사람은 1년에 평균 2만명에 달했다.
그 지방의 기후는 여름에는 매우 덥고 겨울에는 매우 추웠다.
이러한 일기에도 불구하고 비안네 신부에게 성사를 보고자 하는 신자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은 2,3일 동안 줄을 지어 기다리는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요한 비안네는 이런 많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면서도 그의 엄한 고신 극기의 생활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수년 동안 그의 마음을 혼란시키려는 악마의 유혹을 당했다.

그 외의 다른 시련도 닥쳐왔다. 즉 그를 허무맹랑하게 악평하는 투서를 몇 통 받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평상시와 같이 모든 사람들을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를 조금도 변치 않았다.

그는 매일 솔직하고 유효한 설교를 하며 충실히 자기 의무를 이행했다.
그러한 생활과 활동은 정말로 하느님의 특별한 도움이 없이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알게 되자 불신한 자들도 많이 회개했고 그를 조소하던 자들도

그의 성덕에 감동되어 신덕을 굳게 했다.



요한 비안네는 이렇게 부단한 고행과 활동의 생활을 보내기를 41년간,

1859년 7월 29일엔 열 일곱 시간이나 고해 성사를 주고 성당에서 나오자 
"나는 이제 그만이다!"하고 말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의 건강은 다시는 회복될 수가 없었다.
그는 5일 후에 임종했는데, 감격의 눈물을 머금고 노자성체를 영하고

신자들에게 강복을 주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주교가 왔을 때 그는 다시 눈을 떴다. 그리고 2, 3시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그는 과로로 운명한 것이었다.
교황 비오 10세는 그를 복자위에, 교황 비오 11세는 그를 성인품에 올렸고 본당 사제의 수호 성인으로 선언했다


성 요한 보스코(2)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42) - 성 요한 보스코(2) 


2. 영성사 안에서의 기여 

1) 요한 보스코의 영성에 크게 영향을 미친 영성가들은 프란치스코 드 살, 로욜라의 이냐시오, 아빌라의 데레사, 필립보 네리, 빈첸시오 아 바오로, 알퐁소 드 리구리 등이었다. 보스코는 젊은이들을 교육하는 사도직에서 온유함과 인내가 요구되었기에 온유와 애덕의 사도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을 본받고자 하였으며 로욜라의 이냐시오로부터는 악에 대항하는 열정적 싸움과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노력을 배우고자 하였다. 그는 그의 교육 영성을 형성하고 실현하는 데 있어 성 필립보 네리의 기쁨의 정신과 교육 방침을 많이 참고하였으며 성 알퐁소 드 리구리의 윤리적 가르침을 적용하였다. 그는 또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로부터 하느님께 대한 깊은 사랑과 헌신 그리고 한결같은 평온함을 본받고자 하면서 청소년들을 교육 하였다. 

2) 요한 보스코는 청소년 사목을 위한 하느님의 부르심을 깊이 인식했고 그 소명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면서 투신하였다. 요한 보스코는 17세기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발전했던 관상적, 학문적 영성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 보다는 활동적, 실천적 영성이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소명에 응답하는 길임을 깨닫고 그것을 택했다. 그의 시대는 사회 상황의 변화와 산업 혁명으로 인구의 도시 집중, 통일 국가에 대한 열망, 유럽 식민지 팽창 등으로 인해 정치, 경제, 문화 등이 급속히 변화하고 혼란스러워 많은 젊은이들이, 특히 가난하고 소외된 계층의 젊은이들이 방황하고 있었다. 
요한 보스코는 그들을 교육하고 선도해야 할 사명감을 일찍부터 자각했고 준비하였으며 그에 온힘을 기울였다. 한편 그는 성령의 도구로서 활동하는 데 요청되는 적절한 카리스마를 풍성히 받았었 기에 그의 사도직은 더욱 성공적 결실을 얻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들을 극진히 사랑했으며 근본적으로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현실생활에 필요한 존재들이 되도록 복음 정신에 입각하여 교육하였다. 

3)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방법' (preventive system)을 도입하여 젊은이들 교육과 지도에 힘썼는데 이 교육방법은 교육사에 획기적 으로 공헌했을 뿐 아니라 영성사 안에서 독특한 교육 영성의 장을 이룩하였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참된 인간적. 영적 양성을 목표로 한다. 이 교육의 원리와 방법은 이성(理性), 종교 그리고 사랑이라는 세 단어로 요약 표현될 수 있다. 

4)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의 체계는 여러 교육 사상을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종합한 것이다. 그의 교육 체계엔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과 교육, 영성 등에 관한 교회의 가르침이 바탕이 되었다. 다른 하나의 영향은 당시 피에몬테에서 성행하던 얀센주의적 교육 사상이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로 인해 인간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고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엄격하고 금욕적이던 얀센주의자들과의 논쟁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았지만 무의식적으로 그들의 개념과 교육방법 중 일부를 수용하였다. 인간의 나쁜 성향을 억제시키는 데 도움되는 방법과 규율, 교육자의 임무에 대한 규정으로서 늘 깨어있는 자세, 청소년들이 죄를 범할 수 있는 기회를 없애기 위한 적극적 대책 등 긍정적 요소들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실천 방법과는 달리 보스코는 청소년들이 즐겁게 지내고 스스로 여러 방법으로 표현하기를 바랬으며 필요시에만 그들을 통제했다. 그는 얀센주의자들이 거부했던 애정, 관심, 경쟁, 창의력 같은 인간적 수단을 교육에서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루소의 교육 이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얀센주의자들과 달리 루소는 인간이 본래 선하게 태어났으나 사회가 인간을 악하게 만들기 때문에 아이들을 사회에서 격리시켜 자연상태에서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요한 보스코는 원죄 교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자연주의 철학자 루소를 닮아갔다. 그는 수많은 창의적 가르침을 활용했고 가능한 한 교육에 많은 즐거움의 요소를 도입하며 산책이나 소풍, 인생경험, 독서를 통해서 필요한 교훈을 가르쳤다. 그는 또한 학생들의 개성을 존중하고 자발성을 북돋아 주었다. 그러나 루소와 달리 그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선하며 저절로 진리와 선을 지향한다고 믿지는 않았다. 그는 인간이 교육적으로 개발할 수 있는 착한 본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했지만 교육자가 통제할 수 없는 악한 성향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요한 보스코에게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당시 교육 사상과 활동의 중심지였던 토리노 대학에 만연되어 있던 자유정신이었다. 특히 그의 친구이며 교육 사업을 도와 준 철학자 안토니오 로스미니에게서 교육 철학적 영향을 받았다. 실로 보스코의 주요 교육 방법들이 로스 미니의 논문에서 발견된다. 요한 보스코는 로스미니 교육철학의 원칙 들을 그의 예방 교육의 근본 요소인 이성, 종교, 사랑으로 새롭게 발전 시켜 정리했다. 그의 교육활동의 핵심은 전인적 그리스도 중심주의이다. 

5) 평생 부지런히 일하며 청소년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인 성 요한 보스코는 또한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 성인이다. 
그는 농촌에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도우며 일을 배우고 몸에 익혔다. 그는 또한 기술자들이 많이 살던 카스텔 누오보 에서 자라면서 대단한 호기심을 가지고 장인(匠人)들의 일솜씨를 지켜 보았고 어깨 너머로 그것들을 배웠다. 두뇌가 명석했고 눈썰미가 좋았 으며 재주가 비상했던 그는 기술자들의 솜씨를 암기했다가 곧잘 모방 하였다. 그러한 눈썰미와 일솜씨는 그가 중등학교 시절 학비를 마련 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대장장이, 제화공, 목공일들을 닥치는 대로 해야했던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은 뒷날 가난한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어려운 사정을 공감적으로 이해하며 도울 수 있게 되었고 직업 학교를 세워 그들에게 기술을 습득시켜 사회에 적응하도록 돕고 고무 하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살레시오회원들 뿐 아니라, 그의 젊은이들에게 열심히 일하도록 가르치고 독려했을 뿐 아니라 언제나 몸소 그들에게 근면의 모범을 보였다. 그는 노년에 이르러서도 일을 줄이거나 중단하지 않았다. 그가 지상 생애를 마친 후에도 젊은이들을 가르치는 그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고 그의 동료들이며 분신들인 살레시오 회원들에 의해 전 세계에서 지속되어 왔으며 오늘도 여전히 점점 확대되고 발전하고 있다. 
교황 비오 12세는 한 교서(1958. 1.17)를 통해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공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했다. "이탈리아 정부의 노동 및 사회 보장부 루이지 구이 장관은 성 요한 보스코를 청소년 견습 노동자들의 천상 수호자로 선포해 줄 것을 겸허하게 청원하였습니다. 성인은 출중한 인물이며 교회와 사회에 위대한 공적을 끼친 분으로서 진보의 최전선에 스스로 나서서 무수한 젊은이들에게 각종 직업 교육을 시켰으며 정직 하고 경건한 생활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성 요한 보스코를 하느님 앞에서 이탈리아 청소년 견습공들을 위하여 천상 수호자로 택하고 선언하며 영구히 선언하고 확정합니다" 


박재만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 가톨릭신문 기사입력일 : 2000-11-05
성 요한 보스코(3)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43) - 성 요한 보스코(3) 

3. 예방 교육 

요한 보스코가 헌신적으로 봉사한 사도직은 젊은이들의 참된 인간적.영적 양성을 위한 종교 교육이었다. 그는 교육의 이론 가라기보다는 교육실천가로서 참신하고 획기적인 교육 방법을 도입하여 젊은이들의 교육과 지도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것이 바로 '예방 교육 방법' (preventive system)이었다. 훌륭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처럼 그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가족적인 교육 환경을 만들고, 형제적 친밀감으로 그들의 삶을 함께 나누며 또한 온화하지만 단호하게 그들을 선으로 이끌고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사로잡기 위하여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요한 보스코가 교육에 도입하고 적용한 혁신 방법이었다. 

1) 예방 교육의 기본적 원리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강압적인 것으로 여긴 기존 교육에 대응하여 발전시킨 것으로서 악을 사전에 막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것은 약보다 위생을, 치료보다 예방 건강을 중시하는 현대의학의 발전적 경향과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에 의하면, 강압적 방법은 학생들이 규칙을 위반하거나 잘못 처신 했을 때 그들을 처벌하거나 강제로 가르치는 것이고, 예방적 방법은 친절로 그들이 규칙을 잘 지키도록 돕고 목표 달성을 위해 그들에게 가장 적당하고 효율적 수단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 교육의 첫 원칙은 하느님께 대한 경외심을 학생들의 마음에 넣어주는 것이고 교리 교육과 윤리 교육을 통해 선에 대한 애착과 악에 대한 혐오감을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을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에 의해 그리고 실천적 신앙생활을 통해 성성에 이르는 길로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학생들의 학업, 노동 그리고 그들의 놀이에서 도 언제나 친절한 도움을 준다. 
그는 바람직한 인간성 형성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젊은이들의 나쁜 습성, 악의 유혹을 예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예방은 엄한 벌 이나 책망보다 친절한 사랑과 적절하고 현명한 충고, 신심을 실천 하도록 돕는 데 있다고 확신하며 사랑, 이성, 종교를 예방 교육 방법의 원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교육 목표는 '예수님을 닮은 사람' 즉 인간적.영적으로 성숙하는 전인(全人)양성이었으며, 그 교육의 영성은 아이들을 사랑하시어 언제든지 기꺼이 받아들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었다. 그의 교육의 많은 결실 중 손꼽을 수 있는 하나는 소년 성인 도메니코 사비오를 배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가) 이성(대화와 합리적 설득) 

요한 보스코에 의하면 이성은 교육자가 피교육자를 순응하도록 이끌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적용하고 가르치며 실천해야 할 방법 중의 하나였다. 교육자는 젊은이들 스스로가 올바른 분별력을 통해 학업 뿐 아니라 규율 준수나 부과된 벌, 나쁜 습성의 교정 또는 전례와 성사 생활의 의미, 실천의 당위성 등을 순수하게 받아들이도록 합리적 방법으로 가르치고 인도해야 한다. 그러할 때 그들이 자발적으로 규율 준수 뿐 아니라 부과된 모든 과제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된다. 

나) 종교(복음적 신앙 교육) 

요한 보스코는 예방 교육에서 신앙 생활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했다. 젊은이들이 하느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며 기도하면서 살아간다면 악습 예방은 물론이고 올바른 생활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교육 사목 체험에서 젊은이들이 고해 성사와 성체 성사를 합당하게 자주 받으면 그들의 인간적.영적 형성에 효과적 결실을 얻는 다는 것을 확신했다. 이러한 생활에서 교육자의 솔선 수범이 참으로 중요하다. 

다) 사랑 

요한 보스코의 예방 교육은 사랑에 기초한 것이다. 그의 교육은 오래 참고, 친절하며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사랑(1고린 13, 4~7 참조)에 대한 바오로 가르침에 토대를 둔다. 예방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고 그들과 어울리면서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며 그들의 잘못과 연약함까지 이해하는 자애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교육자와 피교육자의 애정 어린 협력 관계이므로 사랑을 그의 교육의 최고 원리로 여겼다. 그러므로 중요한 일은 젊은이들을 사랑해야 할뿐 아니라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보스코는 그들 가운데 좥현존하는 것좦과 그들을 위해 '항구하게 일하는 것' 을 사랑 교육의 두 원리로 채택하였다. 

2)특성 

요한 보스코의 교육은 언제나 복음적 사랑 속에서 자유롭고 즐겁게 행해 졌으며 평화롭고 신뢰에 찬 가족적인 분위기를 지향하며 이루어졌다. 
가) 가족 정신 

가족 정신은 복음적 연대성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그의 교육의 근본 이상 이며 지도 이념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오라토리오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서 요한 보스코는 젊은이들과 협조자들 가운데서 아버지로 살았다. 그는 오라토리오를 대 가정처럼 운영했고 평화로운 기쁨이 그 공동체를 감싸 도록 하였다. 그 안에서 젊은이들에게 규율과 바른 행위에 어울리는 자유가 부여되었다. 그러한 가족 정신 안에서 기쁨이 체험되었으며 마음의 개방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젊은이들은 그 안에서 보호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었다. 

나) 만남과 대화 

가족적 분위기에서 이루어지는 만남과 대화는 젊은이들을 잘 이해하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길이다. 요한 보스코는 개인적인 만남과 대화의 시간들을 영성지도의 기회로 적절히 이용했으며 흔히 고해성사로 끝나도록 했다. 
그는 또한 밤 인사(Buona notte) 시간을 교육의 좋은 기회로 활용하였다. 그것은 학생들이 잠자리에 들기 전에 짧게 사랑의 인사를 표현하는 것인데 그 내용은 주로 일상생활에서 도움되는 교훈이나 명언 혹은 감명을 주는 일화들이었다. 그리고 그는 율동으로 구성된 오락에 큰 중요성을 부여하며 항상 즐겁게 그들과 어울렸으며 그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조언해 주기도 했다. 
다) 효율적 처벌과 훈계 

그는 가능하면 처벌보다는 칭찬을 통해 그들이 올바른 행동을 계속 실천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처벌해야할 경우엔 그 벌이 감정적 화풀이가 아니라 오직 학생 자신이 나쁘게 행동했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도록 해야한다고 가르친다. 그는 훈계나 처벌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초기의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마음을 열고 산보를 청하거나 일이나 놀이에 초대하여 대화하면서 진상을 규명하였다. 그는 학생들이 이성과 신앙으로 자기 잘못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인내와 신중함 을 기울여야 한다고 여겼다. 또한 꾸중은 개인적으로 해 대중 앞에서 모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요한 보스코는 '귓속말' 이라는 독특한 방법으로 효율적인 권고와 훈계를 하였다. 


박재만신부(대전 대흥동본당 주임)가톨릭신문 기사입력일 : 2000-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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