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 성녀 축일

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Margaret K 2018. 1. 15. 21:17

1월24일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隙紊?3.Mandatum Novum Do Vobi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

축일 : 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Saint Francis de Sales 
St. Franciscus de Sales, E. et D
San Francesco di Sales Vescovo e dottore della Chiesa
 
1567 at Chateau of Thorens, Savoy -
28 December 1622 at Lyons; buried at Annecy
Beatified:8 January 1662 by Pope Alexander VII
Canonized:19 April 1665 by Pope Alexander VII



이 위대한 주교는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샤토 드 살에서 태어나 파리의 아네시와 클레르몽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파두아 대학교에서는 법률과 신학을 전공하여, 불과 24세의 약관에 법률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가족들의 반대는 물론 이사직의 제안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수도생활을 위하여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 후 그는 카블레 지방의 선교사로서 5년 동안 활동하였는데, 이곳 사람들은 군사력으로 가톨릭을 억누르는 사보이 공작의 노력에 피나는 항쟁을 하고 있었다.

암살자와 칼빈교도들의 끊임없는 공격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 주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1599년, 그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가 되었다.
그는 곧 반개혁자의 지도자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었는데, 그의 지혜와 지식을 따를 사람이 없었다.

뛰어난 고해신부이자 설교가이며, 해박한 신학지식과 이해심은 만인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았다.
그는 학교를 세우고, 예비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교구를 훌륭하게 다스렸다.
1604년, 그는 프란치스까 드 상탈을 만나 그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으며, 그녀와 함께 방문회를 세웠다(1610년)

그는 프랑스 리용에서 운명하였는데,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1. 신심생활 입문(1609년), 2.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6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성바오로수도회에서)

*성녀 요안나 프란치스카 드 샹탈 수도자 축일:12월12일,게시판1519번.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5월31일.게시판1187번.



프란치스코 드 살은 부친의 뜻을 받들어 변호사가 되고, 나중에는 프랑스 사부아 지역의 상원 의원이었던 부친의 후계자가 되어야 했다. 
그 때문에 그는 법률을 공부하러 파도바로 갔다.
그곳에서 박사 학위를 받아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적당한 시기에 부모에게 사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의 부친은 완강하게 반대를 했지만, 착한 프란치스코의 꾸준하고 열심한 설득에 결국은 허락하고 말았다.
프란치스코는 사제로 서품되어 얼마 뒤에는 칼뱅교의 중심지였던 스위스 제네바 교구의 사무관으로 선출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칼뱅과 이단자들을 회개시키기로 결심하고, 특히 샤빌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는 진정한 가톨릭 교리를 설명하는 자그마한 팜플렛을 만들어 배부하고 설교도 함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35세에 제네바의 주교가 된 프란치스코는 교구의 사목 행정을 담당하면서도 설교를 하고 고해성사를 주며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쳤다.
그의 부드러운 성격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는 "한 숟가락의 꿀은 한 통의 식초보다 더 많은 파리를 끌어들인다."는 자신의 좌우명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널리 알려진 [신심 생활의 입문]과 [신애론] 외에도 수많은 소책자를 쓰고 광범한 분야에 걸쳐서 편지 왕래를 했다.
그의 이러한 문필 생활로 인해 그는 가톨릭 신문의 수호 성인이 되었다. 

그는 비교적 짧고도 바쁜 일생을 보냈지만 ’방문 수녀회’를 창설하는 일에서 또 다른 성녀인 잔 프랑스아 드 샹탈과 협력할 수 있는 여유를 가졌다.
이 수녀원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데서 모범을 보인 덕행, 즉 겸손과 신심 그리고 상호 애덕을 실천하고자 하는 여인들에 의해서 이룩되었다.

프란치스코 드 살은 우리에게 말한다.
"그리스도교적 온화함을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부드럽고 사랑스럽다.
그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고 변호해 줄 자세가 되어 있다.
그의 착한 마음은 그의 말과 행동에 영향을 주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태도에서 나타나며,
모든 일에 있어서 가장 큰 애덕과 기쁨의 빛을 비추는 관점을 제공한다." (꼰벤뚜알프란치스코회홈에서)



1567년 사보이아에서 태어났다. 사제로 서품된 후 자기나라에서 가톨릭 교회의 재건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제네바의 주교로 선임되어 성직자와 신자들에게 참다운 목자로서의 면모를 보여 주고,
만사에서 모범이 되고 저서로써 모든 이에게 신앙을 가르쳐주었다.
1622년 12월 28일 리옹에서 세상을 떠나, 1623년 1월24일 안네시에 묻혔다.



성 프란치스꼬 살레시오 주교의 [신심 생활 입문]에서
(Pars, 1, cap. 3) 

신심 생활은 모든 소명과 직업에 가하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실 때 그 종류를 따라 열매를 맺을 것을 초목에게 명하셨다. 
이와 같이 하느님은 또한 그 교회의 생활한 초목인 신자들에게 그 처지와 각자 맡은 직분에 따라 각각 신심의 열매를 맺기를 설명하신다. 
귀족과 직공, 왕족과 노복, 과부와 주부, 소녀들의 차이에 따라 그들의 신심은 각각 달라야 한다.

또 한층 이것을 개인의 능력, 일, 직무에 맞추어야 한다. 
필로테아여, 주교가 샤르트르 수도회의 수사처럼 관상적 독수자가 되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일 가정을 가진 자들이 카푸친회수사들처럼 금전을 소홀히 여기거나, 또는 직공이 수도자처럼 종일 성당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다든지, 
또는 수사가 주교처럼 언제나 타인을 위해 분주히 돌아다닌다면, 
이런 신심은 참으로 우습고 질서를 뒤집으며 또한 견디기 어려운 일이라고말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이런 착오는 극히 많다. 따라서 세속은 참된 신심과 그릇된 신심을 구별치 않고 또는 구별하려고도 않으며 신심을 배척하고 이를 비난한다. 
그러나 이런 비난과 배척은 위에 말한 그릇된 신심에 한해서만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필로테아여, 진정한 신심은 아무것도 손상치 않고 오히려 만사를 완성시킨다. 
자기의 정당한 직무를 거스르는 자의 신심은 확실히 그릇된 신심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꿀벌은 꿀을 마실 때 조금도 꽃을 상하지 않게 하며 꽃은 이전의 아름다움을 조금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참된 신심은 이보다 더 어떠한 직무나 처지도 손상치 않을 뿐더러 오히려 이를 아름답게 꾸민다. 
보석을 꿀에 담그면 그 성질에 따라 광채를 더한다고 한다.
그와 같이 어떤 사람도 그의 경우를 신심과 합치시켜면 그의 경우는 일층 더 아름다워진다. 
가정의 평화는 커지고 부부간의 애정은 깊어지며, 임금께 대한 충성은 두터워지고 각자가 맡은 일은 유쾌하고 즐거워진다.

신심 생활의 군인들의 병영, 직공들의 공장, 제왕의 궁정, 결혼한 자들의 가정에 존재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유설이며 이단의 교설이다. 
필로테아여, 관상적인 신심이나 수도원식 또는 수도자적 신심이 이런 이에게 전연 맞지 않을 것은 말할 여지도 없지만,
위에 말한 세 가지 신심 외에 세속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완덕으로 인도하는 신심의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완덕의 생활을 구할 수 있고 이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가톨릭홈에서)



"거짓 예언자가 여기저기 나타나서 많은 사람들을 속여 넘길 것입니다. 
또 세상은 무법천지가 되어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을 것입니다"(마태 24, 11).

주 예수의 이 예언 말씀은 16세기에 놀랄 정도록 맞아 들어갔다.
즉 루터를 위시해 쯔빙글리나 칼빈이라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서 각각 이단을 주장하고 프로테스탄트를 세우므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여러 지방의 인심을 현혹케 했다.

그러나 자비 깊으신 하느님께서는 가련한 양(羊)인 신자들이 포악한 사람인 이단자들에게 현혹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3인의 유명한 성인을 보내셔서 교회를 개혁케 하셨다. 
그들은 즉 독일에 있어서는 성 베드로 가니시오, 이탈리아에 있어서는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프랑스에 있어서는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다.

*성 베드로 가니시오 사제 축일:12월21일.게시판1531번.
*성 가롤로 보로메오 주교 축일:11월4일.게시판1454번.
*성 필립보 네리 사제 축일:5월26일.게시판1182번.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1567년 8월 21일에 토랑에 있는 가족 성(城)인 사토 드 살에서 후작가(候爵家)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양친은 모두 경건하고 독실한 신자였고, 특별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어머니 프란치스카는 아들의 교육을 세심한 주의로 시행하는 동시에
그 순진한 어린 마음에 신앙과 덕행의 씨를 뿌리며 이를 양성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첫째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파리에 있는 예수회의 대학에 입학하고 오래지 않아 그 지혜와 성실한 점으로 단연 출중한 성적을 올려 
교사들을 놀라게 했을 뿐 아니라 신앙 도덕을 위협하는 많은 위험 중에서는 자숙하여 기도와 고행에 
그러한 십자가의 길로써 무사히 백합화와 같은 마음을 끝까지 보존할 수가 있었다.
그가 가장 정덕에 대해 노력한 것은 그때에 비로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이미 어렸을 때 성 마리아 제대 앞에 엎드려 일평생 동정을 지킬 서원을 발한 때부터였던 것이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파도바 대학으로 가서 신학과 법학 박사의 학위를 획득하고 대 성공리에 졸업했지만, 옛 고향인 사보아에 금의환향(金衣還鄕)하기 전에
먼저 성도(聖都) 로마를 방문하고 세상에서 출세해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사제가 되어 희생의 생활을 하려고 결심했다.
그런 줄도 모르던 아버지는 벌써부터 그를 사보아에서 변호사 개업을 시킬 예정이었지만, 신앙심이 깊었던 관계로 아들의 희망을 듣고 나서
즉시 승낙하게 되어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수도 생활을 위해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교황에게 아네시 주교의 참사원(參事員)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제단에서 처음으로 미사 성제를 드린 것은 1593년 12월 초순경이 었다.
그 후 그는 뜨거운 신앙심으로써 다른 사람들이 영혼 구원을 위해 일하며 사제로서의 성무를 완전히 이행했고,
아네시 주교는 그의 수완을 인정하여 특히 중대하고 어려운 사명을 그에게 맡기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보아의 남부에서 세력을 부리고 있던 칼빈파 이단에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개종시키는 일이었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지만 일단 착수해보니 그 사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교회의 이단자들에게 쫓겨 깊은 산으로 피신한 때도 있었고,
초막에서 하룻밤을 지낸 일도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위험하게도 생명을 빼앗길 뻔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성인은 영웅적인 인내와 온순과 겸손으로 취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후 비로소 크리스카스 밤 미사를 이단의 중심지에서 봉헌하고 8백 명의 개종자에게 성체를 영해 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칼빈파의 지반은 점차 붕괴하여 연거푸 개종자들이 증가해, 1597년에는 프란치스코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7만을 헤아리게 되었다.
참으로 사보아의 남부에 있던 칼빈파의 이단이 전멸된 것은 오로지 성인의 감탄할 만한 기도와 희생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네시 주교는 자기의 후계자로서는 이 젊은 사도 프란치스코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교황에게 추천했으므로,
그는 1599년에는 제네바 주교의 보좌 주교로 임명되었다가, 1602년에는 완전히 계승하여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높은 지위에 올랐어도 항상 겸손하며 자기가 맡은 영혼을 돌보는데도 각별한 열의를 항상 가지고 있었다.
우선 그는 자기 교구에 있어서 성직 지원자의 전형(銓衡)을 엄격히 하고, 참으로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만을 뽑고,
모든 이에게 모범을 보이는 완덕의 생활과 그의 스승다운 깊은 학문 등을 그들에게 요구했다.
그리고 자신은 주교직에 있으면서도 주일에는 신자들에게 도리를 설명해 주고 성사를 주는 등 보농 사제들과 같이 영혼의 지도에 노력했다.

물론 이와 같은 그의 사도적 활동이 세상에 퍼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지 않아 그의 유명한 명성은 프랑스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국왕은 파리나 리용의 대도시에 아직 남아있는 칼빈파 이단을 전멸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를 초빙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에서 강론과 기타 모든 방법으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덕이 높고 학식이 많은 성인에게 영적 지도를 청하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기에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지만,
끝까지 친절하고 온순한 주교는 서간으로써 각자에게 적당한 권고와 교훈을 하며 할 수 있는 데까지 그들의 희망을 채워주려고 했다.
또 그의 유명한 저작 필로테아라는 신심생활의 입문서도 그의 지도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청으로 저술한 것이다.



성인의 개인적 지도로 가장 훌륭하게 된 이는 한 수녀원을 창설한 샹탈의 백작(伯爵)부인 성녀 프란치스카였다.
성인은 1604년 사순절의 강론때에 처음 프란치스카를 만나 즉시 그녀가 하느님께 간선된 부인이라 이미 1610년 6월 6일
두 동료와 같이 하느님의 전선을 찬미하여 유화(柔和), 소박(素朴), 자비(慈悲)의 정신을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는 새 수도회(방문회)를 세웠다.

그 이상(理想)에 대해서 성 주교 자신의 얼마나 열렬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던가는 그가 프란치스카에게 말한 다음의 말로써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는 언제 참된 사랑과 온순으로 모든 사람들을 대할 수 있을까?
나는 온전히 자기를 끊고 무슨 일에 있어서든지 모든 사람들의 희망대로 하고 그를 위해 진력하고 싶다!"
이와 같이 사랑이 대단하고 친절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만큼 아무리 완고한 이단자라 해도 그에게 자기 죄를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전후 20년간 주교직에 있으면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감화를 주며 제네바에 있는 600여개의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북돋아 주고 교리를 모르면 그들에게 잘 깨닫게 해 주었다.
그 뿐 아니라 중부 프랑스, 동부 프랑스의 사람들도 이 성스러운 주교를 만나 그의 말씀을 들으려고 성인을 초대하고 교훈을 청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성무와 영혼의 지도에 진력한 결과, 과로하게 되어 아직 노년이라 할 수 없는 55세 때인 1622년 12월 28일,
리용에서 병석에 눕게 되어 모인 사람들이 병자를 위한 기도문을 외울때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은 ’신심 생활 입문(1609년)과 ’신애론(1616년)이다.
그는 사망한 해에 시복되었는데, 성 베드로 성당에서 거행한 첫 번째 공식 시복식으로 기록되었고, 1655년에 시성되었다.
또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대구대교구홈에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회
청소년들의 스승이요 아버지라고 불리는 성 요한 보스코(St. John Bosco, 1815~1888) 에 의해 1854년,
이탈리아의 토리노에서 창립된 살레시오 수도회는 청소년 교육을 주목적으로 한다.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성인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의 사도적 사명감과 고귀한 정신에 감명되어 수도회 명칭을 살레시오회로 하였다고 합니다.

*성 요한 보스코(돈 보스코) 사제 축일:1월31일.게시판922번.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1)

우리의 영원한 귀감, 영성의 대가들 (34) - 성프란치스코 살레시오(1) 

근대의 성인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 또는 17세기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성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들 중의 한 분으로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독창적 방식으로 교회의 정통적 영성을 가르치고 생활하며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는 무엇보다도 성성(聖性)에의 보편적 성소의 선각자였다. 성인(聖人)으로 불린 이는 일부 소수의 특전 받은 사람이 아니고 주어진 각 생활 상태에서 사는 모든 그리스도인이라는 이 중요한 교의는 그 후 약 400년 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밝히고 공식으로 천명하게 되는 진리(좥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좦 39~42항 참조)이다. 먼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생애를 살펴보기로 한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이탈리아의 국경에 접해있는 프랑스 동남쪽 사보아 지방에서 1567년 8월 21일에 명문가 드 살르(de Sales) 후작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경건한 신앙인들이었는데 특히 신앙심이 두터웠던 모친은 아들이 어렸을 때부터 좋은 인성 및 신앙을 갖추도록 교육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프란치스코는 지방의 학교 교육과정을 마친 후 빠리에 유학하여 예수회가 운영하는 끌레르몽 대학에서 6년 동안 수사학, 철학 및 신학 등을 공부하였다. 이 기간에 그는 신앙의 일대 위기를 겪게 된다. 그것은 그가 당시 파급되어 있던 칼뱅의 운명 예정설에 사로잡혀 자신이 혹시 구원받지 못하고 영원한 지옥으로 예정된 것이 아닐까 심히 번민하며 고통스러워하던 체험이다. 그 때 그는 하느님을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게 되리라는 상상에 빠져 들어가면서 크게 고뇌했던 것이다. 그는 이 고통스런 상상을 떨쳐버리려고 애썼으나 벗어나기 어려웠고 점점 더 깊이 우울한 환상에 사로잡혀 나중엔 온갖 신심이 한낱 기만으로 여겨지기까지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성모님 상 앞에 꿇어 기도하던 중 종신토록 정결을 지키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봉헌하겠다는 서약을 했는데, 그 순간 놀랍게도 마음의 폭풍우가 홀연히 진정되고 감미로운 평화로 가득 채워지게 됨을 느꼈다. 이러한 어둔 밤의 체험은 훗날 그가 사목 활동 중 어두움 속에 헤매면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읽고 이해하며 도와주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빠리에서 공부를 마친 후 그는 부친의 원의에 따라 유명한 법학부를 갖추고 있던 이탈리아의 빠도바 대학으로 옮겨가 법률 공부를 하게 된다. 거기서 그는 법 뿐 아니라 또한 신학 공부에도 계속 열중하였다. 신앙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학문의 불충분함과 허전함을 보충하고 보완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그가 어린 시절부터 마음이 끌리던 사제 생활에 대한 성소를 그 때에 더욱 강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는 1592년에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샨 베리 시(市)의 원로원의 법률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부친의 주선으로 그는 원로원 의원직 취임 교섭까지 받았으나 정중히 사양하였다. 그가 걸어야 할 길과 수행해야 할 사명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깊이 의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자신의 소망을 채워주지 않아 실망스러워 하던 부친에게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하는 자신의 입장을 차분히 설명하면서 허락해 주길 간곡히 청하여 결국 부친을 설득하였고 이로써 그에게 사제의 길로 나아가는 길이 열렸다. 

1593년 12월에 프란치스코는 사제 성품을 받고 열정적으로 사목 활동을 하면서 봉사하였다. 교구의 장상이 샤블레의 칼뱅파 교도들을 다시 성교회로 귀의시키기 위해 선교활동 할 사제를 찾고 있을 때 그는 그 사명을 수행하겠다고 자원하여 나섰다. 그는 많은 위험과 곤경 중에도 굴복하지 않고 칼뱅주의자들의 귀의를 위해 온갖 정성과 방법들(동기는 선의였으나 비판받을만한 방법들도 활용했음을 뒤에서 살펴보게 될 것임)을 동원하여 투신하였으며 결국 7만이 넘는 사람들을 가톨릭 교회로 다시 돌아오도록 하는 데 기여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1602년에 즈네브의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는 교구장으로서 그리고 사목자로서 교구쇄신을 위한 폐습의 교정과 조직 개편, 신자들의 신앙교육을 위한 여건 조성과 장려, 쇄신적 사제양성을 위한 배려, 수도생활 쇄신을 위한 독려, 영적 서적들의 저술, 영적 지도 등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그는 교구 내 산재해 있는 벽촌들을 끊임없이 순회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강론하며 고해성사 집전과 교리교육 등 헌신적인 사목 봉사를 하였다. 그는 또한 자주 사제들을 두루 방문하여 그들과 친교를 이루고 그들이 사도직에 더욱 충실하며 기쁨에 충만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이단으로 황폐해졌던 그의 교구가 얼마 후엔 프랑스에서 가장 열심하고 모범적인 교구가 되었다. 

1607년엔 성녀 요한나 샹딸과 함께 성모 방문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그 수도회는 봉쇄 공동체였는데, 심한 육체적 고행을 회칙으로 명하던 종전의 수도회들과 달리, 신체적으로 연약한 여인들도 입회할 수 있도록 수덕 행위를 덜 엄격하게 조절 완화하였다. 완덕에 이르는 데 필요한 것은 육체적 고행보다 정신적 희생 즉 자신의 뜻을 떠나며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르고 일치하는 것이라는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견해를 따랐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주교는 1618년 11월부터 다음 해 9월까지 빠리에 용무가 있어 머물게 되었는데 시민들은 이 유명한 대 강론가의 말씀을 경청하고자 매일 성당에 운집하였고 그들은 열광적으로 환호하면서, 불가능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빠리에 상주하기를 간청하였다. 그가 그 곳에 머무는 동안 가장 큰 기쁨이 되었던 것은 자선사업의 사도이며 프랑스 성직자들의 쇄신 활동가로 유명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와 친교를 맺은 것이다. 그는 빠리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의 영적 지도를 빈첸시오 아 바오로에게 부탁하였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영성은 그의 저작 총 27권 안에 풍성히 담겨있으나 특히 신심생활 입문과 신애론(神愛論) 그리고 영적 담화에 잘 나타나고 있다. 그의 작품 중 12권에는 영적 지도를 위해 그가 썼던 2100여 통의 편지들이 수록되어 있다. 

프란치스코는 또한 과학, 예술 및 프랑스어의 연구 발전에 큰 관심을 기울이며 안느시에 플로리몬타느 아카데미를 세웠는데 그것은 프랑스 아카데미가 태어나기 30년 전 일이었다.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는 1622년 겨울에 리옹 시에 있는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머물게 되었는데 갑자기 뇌일혈로 인해 세상을 떠나 하느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 때가 그의 나이 56세이던 1622년 12월 27일이었다. 그의 유해는 안느시의 성모 방문회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1665년에 교황 알렉산더 7세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를 시성을 통하여 성인품에 올렸으며, 1877년에 교황 비오 9세는 그를 좥교회의 박사좦로 선언하였다. 그리고 비오 11세는 그의 문학적 능력과 공헌을 높이 기리며 그를 언론인과 저술가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박재만>가톨릭 신문기사입력일 : 200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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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후의 명작

 -양승국신부-

 

‘불후의 명작’ ‘불세출의 걸작’들은 읽으면 읽을수록, 바라보면 볼수록, 들으면 들을수록 깊은 감동과 전율, 기쁨을 선사합니다. 그런 면에서 성인(聖人)들도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 땅위에 두 발을 딛고 사는 이상 다들 너나할 것 없이 부족할 수밖에 없는 존재려니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우리들 사이에 명품(名品), 곧 성인이 존재합니다.

 

보면 볼수록 더 보고 싶은 사람,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사람,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사람, 아마 이 시대 성인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금 더 보탠다면 가장 큰 사랑으로 사소한 일상을 정성껏 살아가는 사람, 작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 안에 깃든 하느님의 손길을 찾는 사람,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환한 얼굴로 살아가는 사람이 곧 오늘의 성인일 것입니다.

 

우리 시대 성인은 대단한 기적을 일으킨다거나 특별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일에 열중합니다. 그 무엇도 물리치지 않고 그 어떤 청도 거절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존재, 사건, 만남을 하느님께로 더 나아가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는 솔직하고 자연스러우며 유머감각도 풍부합니다. 우리 시대 성덕은 왕좌 밑에 감춰져 있을 수도 있고 노숙인의 외투 안에 숨어있을 수도 있습니다.

 

한 인간 존재가 자신의 영역에 있어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겸손할 때, 반대로 한 인간이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여있다 할지라도 이를 기꺼이 수용할 때 성덕은 빛을 발하기 시작합니다. 신학자가 성인일수 있지만 과학자도 성인일수 있습니다. 수도회 창설자가 성인일수도 있지만 한 가정의 가장도 성인일수 있습니다. 반드시 대단한 업적을 남겨야만 성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성인이 이룩한 업적 안에서 성덕이 발견될 뿐입니다. 성덕은 한 나라를 통치함에서 드러날 수도 있지만 작은 노점상 안에서도 발견된다는 것, 오늘 우리에게 큰 희망으로 다가옵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봐야할 특별한 성인(聖人)이 한 분 계십니다.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입니다. 그는 어렵게만 여겨졌던 성화의 길이 사실 그렇게 어렵지 않다는 것을 일찍이 만천하에 공포하신 분입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 사람들은 성화의 길이 아주 어려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성화는 성직자나 수도자의 전유물로 생각했기에 평신도들은 아예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이냐?”며 크게 반박하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성인의 길은 모든 사람들에게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는 당시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성성(聖性)의 보편성을 강조했습니다. 성직자·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의 신분과 직업 안에서 다양한 방법을 통해 완덕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선언한 것입니다. 성화와 관련된 그의 활짝 열린 시각은 400년 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고스란히 수용되고 만천하에 선포됩니다.

 

살아생전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의 매력과 명성은 대단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한 지방에 순회강연을 갔다가 그 도시를 떠날 때의 일이었습니다. 시민들은 감사의 표시로 고급 식기 한 벌과 사파이어 반지를 선물로 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들의 마음 외에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겠다며 극구 사양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출발하는 광장에 모여 마차가 못 지나가도록 막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안타까워하였습니다. 준수한 외모와 다정다감한 성품의 소유자, 감동적인 설교가였던 그를 남녀노소 모든 사람들이 흠모하고 존경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