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흔들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라/보경스님

Margaret K 2011. 6. 1. 21:34

 

뜻이 거룩하면 작은 욕구의
충족여부는 대단하지 않아
 
                           ...보경스님...

부처님께서 마가다국 판차사라 마을에 계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하루 한 번인 아침공양을 얻기 위해
탁발을 나가셨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그 날은 마을의 젊은
선남 선녀가 자신이 준비한 선물을 교환하는 축제일이었다.
모두 축제로 들떠 있던 탓에 아무도 음식 공양을 올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부처님은 빈 발우를 들고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빈손으로 돌아오는 부처님을 본 사악한 마라가
속삭였다.

“당신은 전혀 밥을 얻지 못했습니까? 어떻게 하루 종일
굶을 수 있습니까. 규칙을 어기고 다시 마을로 들어가십시오.
내가 음식을 얻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부처님은 거절하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설령 음식을 얻지 못하였다고 해도 나는 즐겁게 살아간다.
저 광음천(光音天)과 같이 나는 법열의 기쁨을 양식으로
삼아 기쁘게 살아간다.” (<잡아함>39권 ‘걸식경’)

이 법문을 읽으면서 우선, 사람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빵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식은 생명이고 사랑이다. 우리는 이 생명인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간다. 아기가 엄마를 만나는 것도 음식으로서
시작된다. 엄마는 자신을 먹임으로써 아기를 성장시킨다.
음식이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다스리는 일은 중요하다.
본능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반응한다면 아름다울 수 없다.
본능은 신념에 따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부처님은 뜻이 거룩하면 작은 욕구의 충족여부는 대단하지
않음을 여기에서 보여주셨다. 단적으로 말해서 음식으로
얻는 기쁨(食樂)이 법의 기쁨(法悅)을 넘지 못한다는 것
이다. 사찰의 대중공양 하는 곳의 편액이 ‘선열당(禪悅堂)’
으로 내걸리는 뜻이 여기에 있다. 음식은 이차적이다.
심리적인 갈증과 굶주림이 일차적이다. 이 심리는 영혼이
풍부한 사람만이 극복할 수 있다. 니체(독일, 1844~1900)가
말하는 초인이 그런 존재다. 황제라면 구걸하지 않을 것이
다. 그의 왕국에는 부족함이 없으니까, 안달할 이유가 없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적어도 영혼만큼은 황제가 되어야 한다.
악마의 달콤한 속삭임은 우리 내면의 갈등과 유혹이다.
부처님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사뿐히 이를 넘으셨다.
삶에 무슨 대단한 비결이 필요하랴. 음식이 없으면 하루
굶으면 될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탐내는 마음(貪).화내는 마음(嗔).어리석은
마음(痴), 이 삼독(三毒)이 모든 재앙의 문이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곧 유가에서 말하는 ‘근신(謹愼)’인데, 공자님은
“현명한 사람은 어지러운 세상을 피하고(世), 어지러운
땅을 피하고(地), 나쁜 태도를 피하고(色), 좋지 않은 말을
피한다(言)”고 했다(<논어> ‘헌문’).

‘피()’는 ‘피(避)’의 옛 글자다.
이 ‘네 가지 피함’은 소극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적극적으로 뜻을 펼 시기를 기약하며 궁구하고 수양하는
자세다. 이 도리를 실천한 사람이 당신의 삼천제자 중에
일곱에 지나지 않았다고 공자님은 술회했다. 유학의
골간이 “불가능한 줄 알면서도 하는” 것이니 이 비장함
이 천고의 진리로 이끈 힘이 아닐까.
어려움을 헤치고, 인내하면서 흔들림 없이 무소의 뿔처럼
자신의 길을 가라 하신 부처님, 우리 곁에 오셔서 감사합
니다.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