멤미우스 기념비( Memmius monument)
로마 공화정 시기 동안 에페스는 과중한 세금 부과로 인해 로마와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이로인해 에페스인들은 로마에 대항하여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폰토스(Potos)의 왕인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6세를 지지하였다. 미트리다테스는 하루만에 무려 이 지역의 로마시민 8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최초의 종신 독재관이며 개혁가인 술라(Sulla)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후 에페스인들은 미트리다테스가 자행한 대학살에 동조한 협의로 막대한 세금을 로마에 내야 했다. 이 멤미우스 비는 이 때 대학살 당한 로마인들의 넋을 달래주기 위해 BC 86년에 술라의 사위 가이우스 멤미우스에 의해 세워졌다. 이 기념비에는 장인인 술라를 칭송하는 말들이 새겨져 있다. 따라서 이 멤미우스 비는 에페스에서의 로마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술라를 칭송하는 기념비임과 동시에 이곳에서 죽임을 당한 로마인들을 위한 추모비이다.
도미티안 신전(Temple of Domitian)
도미티아누스 황제(AD 81-96년)를 숭배하던 신전으로 그는 자신을 '주인이자 신(dominus et deus)'이라고 부르게 했다. 자신의 신전을 곳곳에 세우고 황제 숭배를 강요했다고 한다.
그는 기독교의 가장 무서운 핍박자이다. 그의 통치 말기인 93~96년은 공포정치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사도 요한은 에페스 교회의 감독으로서 당연히 황제 숭배에 대하여 앞장 서서 반대하였다. 그가 황제 숭배를 거역한 결과 밧모섬으로 유배를 가서 약 18개월 동안 살다가 네르바 황제 때에 풀려나 에페스로 돌아왔다.
도미티안 분수대
도미티안 광장 왼쪽에 아치형 문이 있는 곳인데 수로 건설 책임자인 섹틸리우스 폴리오의 이름을 붙여 폴리오(polio)분수라고도 한다. 물을 공급해 오는데 그 당시 수 킬로미터를 수도관으로 이용하였다니 놀랍기도 하다.
니케 여신(승리의 신, Nike)의 부조
왼손에 들고 있는 것은 승리를 상징하는 월계관이다. 이 부조판은 본래 헤라클레스 문의 아치로 장식되었던 것이라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Triumphal Arch)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쓴 헤라클레스 조각을 새긴 좌우 대칭의 기둥이 승리의 아취로 불리우는 헤라클레스 문이다. 이 문은 귀족과 서민생활 터전의 경계 지점으로 보여지며 마차가 드나들 수 없도록 좁게 만들었다.
헤라클레스 문의 반대편.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는 문으로 위쪽은 상류층이 사는 곳이고 아래쪽은 평민들이 사는 곳으로 구분된다.
헤라클레스문 아래 왼쪽에 목이 없는 조각상.
이 조각상은 에베수스를 위해 헌신한 여의사의 상이라고 전해지는데 고대로마는 몸과 머리부분을 각각 조각하여 조립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머리가 없거나 유실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한다..
크레티아 거리(Curetes Street)
헤라클세스 문에서 셀수스 도서관 앞쪽까지 길게 뻗은 이 내리막길이 크레티아 거리(사제들의 길)이다. 승려들의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의 기반부가 이 길에서 발견되어 이 길을 크레티아 거리라 한다. 로마 제국 시절에 종교와 도시 행사를 관장하는 사제(또는 승려)를 Curetes라 한다.
&nbs
에페스의 심장부를 관통하는 쿠레테스 거리는 에페스의 아랫 광장과 윗 광장을 잇는 중심적인 도로였다. 당시 이 거리는 마차가 다닐 수 없는 도보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좌우에 주랑이 있는 부분은 상가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이 주랑의 바닥은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에페스의 부와 아름다움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트라얀 분수(Trajan Fountain)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바쳐진 샘으로 중앙 받침대 위에 서 있던 12m 높이의 황제 동상 발목에서 물이 흘러 나오도록 설계되었다. 물은 수로를 통해 귀족계층 가정과 목욕탕에 공급됐다고 한다. 지금은 받침대와 동상의 오른 발만이 남아 있다.
트라야누스 분수대 정면 중앙에 황제의 동상 중에 오른쪽발과 몸통의 일부분 만이 남아 있는데 그 옆에 동그란 것은 지구를 의미한다나요... 아마 트라야누스 황제는 전 세계를 정복하고 싶었던 것인지......
트라얀의 님파에움 (Nymphaeum of Trajan)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Baths of Skolastikia)
4세기에 부유한 여성 자선가인 스콜라스티키아의 기부한 것을 3층 건물로 확장되었다고 한다. 직접 불을 때지 않고 뜨거운 공기를 순환시켜 난방했다고 한다. 탈의실, 냉탕, 온탕, 증기탕까지 있었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목욕탕 입구 양 옆에는 미술관과 체력 단련실까지 갖추고 있어 그 시대의 종합 복지 시설 같은 역할까지 했단다.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
로마시대 목욕탕은 본래 남년 혼탕이었다가 AD 2세기경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부터 여성은 오전, 남성은 오후로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목욕탕 옆에는 좌변기가 있는 공중 화장실도 있다. 이 화장실은 별도의 칸막이가 없기 때문에 여러 사람이 나란히 앉아 서로 얼굴을 보며 얘기를 나누며 일을 볼 수 있다. 들어 올릴 수 있는 뚜껑 판 위에 열쇠구멍 같은 구멍을 파놓았고 변기 밑으로 물이 흘러 오물을 처리 할 수 있게 되어 있다고 한다.
스콜라스티키아 목욕탕 입구의 문
로마인들은 목욕을 매우 좋아해서 도시마다 목욕탕을 지었다고 한다.
하드리아누스 신전(Temple of Hadrian)
도미티안 신전 이후 두 번째로 로마의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이다. A.D 138년에 지어진 코린트 스타일의 신전으로 에페스 시민들에 의해 지어져 로마의 황제였던 하드리아누스 (하드리안 재위기간 A.D117~138)황제에게 바쳐졌다. 첫 번째 문의 아치위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여신 니케가 두 번째 문의 아치엔 양손을 벌린 메두사의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메두사의 부조
신전 입구 안쪽 문위에 악귀들을 막기 위해 부조되어 있다.
양손을 벌린고 있다.
니케의 두상 부조.
하드리아누스신전의 중앙 두 개 기둥에 도시를 수호하고,
행운을 가져다 獵?승리의 여신 니케의 두상이 부조되어 있다.
하드리아누스 신전의 현재 아치는 새로 만든 모조품이고 원형은 셀축 고고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아치공법은 로마에서 처음 개발된 것으로 벽과 다리를 튼튼하게 지탱하는 건축공법이다.
여러개의 돌을 부채꼴 모양으로 만든후 돌사이에 쐐기돌을 끼워 꼭 맞도록 다듬었다.
출처: http://www.catholic.or.kr/ 글쓴이: 최익곤
'성지순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티아고 길에서 온 편지 - ‘까미노’ 위에 살면서 (0) | 2017.07.27 |
---|---|
두 거장, 화가 미켈란제로와 라파엘로 (0) | 2016.08.05 |
Cappella Sistina (0) | 2013.11.17 |
스페인 똘레도 성당 (0) | 2007.12.23 |
마리아 대성당 (Basilica Di Santa Maria Maggiore) 순례 (0) | 2007.05.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