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생각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Margaret K 2007. 8. 25. 22:01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1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는 은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

2

이렇게 후련할 수 있을까

마음에 붙은 불을

물 같은 마음으로 꺼 버리고

바다에 나갔을 제

바다는

내가 감추어 둔 슬픔마저

눈치 채고 가라앉혔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나와 함께

답답했던 바다여

이제 욕심을 버리려

바다에 왔을 제

처음으로 내 안에 출렁이는

자유의 바다여

3

바다에 와서

빈 배를 보면

왜 이리 기쁜가

빈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음은

얼마나한 아름다움인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

손에 쥔 몇 개의 조가비가

푸른 음성으로 읊어 대는

바다의 시

해초를 캐듯

시를 캐는

해녀이고 싶어

썰물 때의 바닷가에서

4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가슴이 열린 바다

그는

가진 게 많아도

뽐내지 않는다

줄 게 많아도

우쭐대지 않는다

5

답답한 마음

바다에 내려놓고

탁 트인 마음 들고 온다

가득 찬 욕심

바다에 벗어 놓고

빈 마음 들고 온다

6

숨은 보물을 찾듯

모래밭에 묻힌

조개껍질들을 줍는다

파도에 씻긴

조그맣고 단단한 그 얼굴들은

바다가 낳은 아이들

태어날 적부터

섬세한 빛깔의

무늬 고운 옷을 입고 있다

하얀 모래밭에

모래알 웃음을

쏟아 내고 있다

7

저녁바다에서

내가 바치는 바다빛 기도는  

속으로 가만히

당신을 부르는 것  

바람 속에

조용히 웃어 보는 것

바다를 떠나서도

바다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

8

바다는 온몸으로

시를 읊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어느 날은 거칠게

어느 날은 부드럽게

가끔은 내가 알아듣지 못해도

멈추지 않고 시를 읊는

푸른 목소리의 선생님

9

바다는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푸른빛

때로는 남빛

어느 날은 회색빛

어느 날은 검푸른빛

가끔은 내가 알아보지 못해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아름다운 선생님

10

바다에 가지 않아도

항상 내 안에는

바다가 출렁이네

눈을 들면

수평선

파도로 뛰는 마음

늘 푸르게 살라 한다

물새로 깃을 치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  이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중에서 -

      출처:http://www.catholicspiri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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