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 이해인-
1
처음으로 사랑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하늘색 원피스의 언니처럼
다정한 웃음을 파도치고 있었네
더 커서 슬픔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실연당한 오빠처럼
시퍼런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네
어느 날 이별을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남빛 치마폭의 엄마처럼
너그러운 가슴을 열어 주었네
그리고 마침내 기도를 배웠을 제
내가 뛰어가던 바다는
파도를 튕기는 은어처럼
펄펄 살아 뛰는 하느님 얼굴이었네
2
이렇게 후련할 수 있을까
마음에 붙은 불을
물 같은 마음으로 꺼 버리고
바다에 나갔을 제
바다는
내가 감추어 둔 슬픔마저
눈치 채고 가라앉혔네
내가 너무 욕심이 많아
나와 함께
답답했던 바다여
이제 욕심을 버리려
바다에 왔을 제
처음으로 내 안에 출렁이는
자유의 바다여
3
바다에 와서
빈 배를 보면
왜 이리 기쁜가
빈 마음으로
떠날 수 있음은
얼마나한 아름다움인가
수평선을 바라보며
내 굽은 마음을 곧게
흰 모래를 밟으며
내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
손에 쥔 몇 개의 조가비가
푸른 음성으로 읊어 대는
바다의 시
해초를 캐듯
시를 캐는
해녀이고 싶어
썰물 때의 바닷가에서
4
아이를 달래는 엄마처럼
가슴이 열린 바다
그는
가진 게 많아도
뽐내지 않는다
줄 게 많아도
우쭐대지 않는다
5
답답한 마음
바다에 내려놓고
탁 트인 마음 들고 온다
가득 찬 욕심
바다에 벗어 놓고
빈 마음 들고 온다
6
숨은 보물을 찾듯
모래밭에 묻힌
조개껍질들을 줍는다
파도에 씻긴
조그맣고 단단한 그 얼굴들은
바다가 낳은 아이들
태어날 적부터
섬세한 빛깔의
무늬 고운 옷을 입고 있다
하얀 모래밭에
모래알 웃음을
쏟아 내고 있다
7
저녁바다에서
내가 바치는 바다빛 기도는
속으로 가만히
당신을 부르는 것
바람 속에
조용히 웃어 보는 것
바다를 떠나서도
바다처럼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
8
바다는 온몸으로
시를 읊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높게
때로는 낮게
어느 날은 거칠게
어느 날은 부드럽게
가끔은 내가 알아듣지 못해도
멈추지 않고 시를 읊는
푸른 목소리의 선생님
9
바다는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는 나의 선생님
때로는 푸른빛
때로는 남빛
어느 날은 회색빛
어느 날은 검푸른빛
가끔은 내가 알아보지 못해도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그림을
쉬지 않고 그리는
아름다운 선생님
10
바다에 가지 않아도
항상 내 안에는
바다가 출렁이네
눈을 들면
수평선
파도로 뛰는 마음
늘 푸르게 살라 한다
물새로 깃을 치는 마음
늘 기쁘게 살라 한다
- 이해인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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