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2022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간 월요일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이를 받아들이면
곧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또 나를 받아들이면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루가 9,46-50)
“Whoever receives this child in my name
receives me,
and whoever receives me
receives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주님께서 욥의 모든 소유를 치셨지만, 욥은 죄를 짓지 않고 하느님께 부당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야말로 가장 큰 사람’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들과 함께 운동하는 것이 제 소원이에요.”
종종 자기 자녀와 함께하는 꿈을 이야기하는 부모를 봅니다. 이 꿈대로 어렸을 때는 부모와 함께할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함께하는 시간이 줄어들게 되지요. 그런데 자녀 역시 성장하면서 부모에 대해 이런 생각을 하더군요.
죽이 척척 맞아 정치에 대해 함께 토론하고, 부모와 문화 활동도 같이하고, 또 세계여행도 함께하는 상상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상상에 충족하는 자녀 부모의 관계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정치에서는 서로 정반대 견해를 보여서 토론할 수 없으며, 먹고 살기 힘든데 무슨 문화 활동이고 여행이냐며 화를 내는 부모와의 다름에 거리를 둘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부모와 자녀는 이렇게 다릅니다. 살았던 시간이 다르고, 생활했던 공간이 다른데 어떻게 같을 수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다른 생각과 다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해야 부모와 자녀의 만남이 가능합니다. 이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면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다름을 인정한다는 것이 바로 겸손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에서 사랑을 받는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일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어린이 하나를 데려오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누구든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어렸을 때, 동네에 찾아온 약장수 무리가 기억납니다. 그들은 약을 팔기 전에 관심을 끌 수 있는 차력쇼를 했습니다. 그래서 동네의 모든 아이가 약장수 근처에 모입니다. 그때 약장수 무리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약을 사지 않으니, 굳이 있을 필요가 없었겠지요. 애들을 무시하는 당시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불과 4~50년 전에도 그러했는데, 예수님 시대는 어떻겠습니까? 아직 미성숙한 존재로 사람도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역시 다름의 차이인데 말이지요.
어린이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린이를 주님의 이름으로 받아들이는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런 다름을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성공하고 싶다면 봉사하라. 그것이야말로 인생에 있어 불변의 법칙이며 그것이 당신을 성공으로 이끄는 왕도이다(헨리 밀러).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이기우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WtKp8fHLY2M
-조재형신부-
치유와 치료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치유(Healing)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몸이 가지고 있는 면역력으로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몸은 강력한 면역체계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질병은 우리 몸의 면역체계가 물리 칠 수 있다고 합니다. 반면에 치료(Treatment)는 외부에서 들어온 질병을 약을 가지고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의사와 약사는 병이 든 우리의 몸을 치료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몸을 의사와 약사에게 의지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예전에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라는 광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나 약사에게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 몸의 면역력을 잘 지키고 보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 몸의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잘못된 습관들을 먼저 개선해야 합니다. 지나친 음주와 흡연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과도한 업무와 그에 따른 긴장은 면역력을 약하게 합니다. 욕심과 욕망 그리고 분노와 원망 또한 면역력 약하게 합니다. 규칙적인 식사와 적당한 운동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나눔은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독서와 명상 또한 면역력을 강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지 않으셨습니다. 아픈 사람들의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스스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시몬의 장모가 열이 났을 때도 손을 대셨고 시몬의 장모는 열이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으로 나병환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눈이 먼 사람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중풍병자도 치유시켜 주셨습니다. 죽은 라자로와 소녀도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에게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낮기를 원하느냐? 치유 될 것을 믿느냐?’ 사람들은 예수님께 자신들의 갈망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주님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픈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면역력을 키워 주셨습니다. 하혈하는 여인은 하혈이 멎었습니다. 중풍병자는 잃어나 걸었습니다. 걷지 못하는 사람도 걸었습니다.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았던 사람도 앞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직접 치료하시는 적이 없었습니다. 치유 될 수 있도록 용기를 주셨습니다. 치유 될 수 있도록 기도 해 주셨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영적인 면역력이 강했던 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욥은 사탄으로부터 많은 시련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가지고 있던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배도 바다에서 침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르던 양도 모두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인들도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사랑하는 자녀들도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좌절하고 절망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욥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겸손의 3단계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건강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도 있고, 부귀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장수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영적인 면역력을 3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이야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는 모든 유혹을 굳건하게 뿌리치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면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먼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기도해야 합니다. 항상 기뻐해야 합니다.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나의 영적인 면역력은 어떤 상태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작음을 무시하고 푸대접하며 등 뒤로 내던져버리는 폐기의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존경하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이름으로 반포된 권고나 회칙, 강론들을 열심히 읽고 있는데...틈만 나면 수시로 강조되고 있는 표현이 있습니다.
작고 가난한 이들을 찾아 교회 밖으로 나가는 가난한 교회!
2013년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대교구장 호세 베르골료 추기경님이 교황으로 선출되자, 누구보다도 기뻐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부에노스아이레스 외곽 빈민가 주민들이었습니다.
빈민가 주민들은 자신들을 향한 베르골료 추기경님의 아버지 같은 모습과 따뜻한 마음에 언제나 큰 감동을 받고, 깊은 감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베르골료 추기경님은 럭셔리한 관용차가 아니라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 수시로 빈민가 주민들을 찾아가 그들의 고충을 듣고 위로했습니다.
부활이나 성탄 때는 빈민가 사람들과 기쁨을 나누려고 방 한칸짜리 자신의 서민 임대 아파트에서 직접 음식을 만들어 날랐습니다.
곰곰이 따지고 보니 교황님의 노선은 작고 연약하며 가난한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신 예수님의 노선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시 유다 사회 안에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하던 어린이들을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 역시 한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성과 가치를 인정해주셨습니다.
교황님의 큰 걱정 중에 하나가 이 시대 냉혹한 폐기 문화입니다. 모든 잣대가 생산성, 효율성 위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생산성 면에서 뒤쳐지는 노인들, 장애인들, 환자들, 약자들, 어린이들이 무참히 짓밟히고 폐기되고 있음을 안타까워 하십니다.
작은 것도 분명 가치와 의미가 있음을 세상에 외쳐야겠습니다. 작음을 무시하고 푸대접하며 등 뒤로 내던져버리는 죽음의 문화, 폐기의 문화와 결연히 맞서 싸워야겠습니다.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가장 큰 사람'에 대한 말씀이고, 후반부는 어제 복음과 병렬구문으로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너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말씀을 전해줍니다.
오늘은 전반부만 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둔지 이 어린이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너희들 가운데 가장 작은 사람이라야 가장 큰 사람이다.”
(루카 9,48)
이는 가장 작은 사람이 ‘가장 큰 사람’이요, 동시에 작아질수록 커진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작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며, 작은 이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시 말해서, ‘작은 큰 사람’이란?
단지 ‘작은 이’를 받아들이기만 한 것이라기보다 ‘작은 이’를 받아들여 같이 작아진 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크기 때문에 큰 사람인 것이 아니라 ‘크면서도 작은 이인 사람’이 ‘진정 큰 사람’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작은 이’를 사랑하여 그를 위하여 큰 것을 비우는 바람에 ‘작은 이’가 된 이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우리는 전능하신 하느님이심을 비우고 낮아져 인간이 되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린이’는 돌보아주지 않으면 곧 죽게 되는 무능하고 힘없는 약한 사람을 표상하며, 예수님께서는 발가벗고 나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러니 이는 ‘자신을 타인보다 위에 두지 않는 사람, 곧 높이 있어 우러름 받는 이가 아니라 아래에서 천대받는 이’로 오셨습니다.
따라서 ‘어린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력함과 낮아짐, 동시에 사회에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는 미천하고 버려진 이, 천대받고 소외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겸손은 큰 이, 지위 있는 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작은 이, 무능하고 비천한 이를 받아들이는 능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필리 2,3)
사실 ‘어린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상대방을 받아들이되 허물과 허약함이 있는 채로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니, 나아가서 허물을 함께 지는 이가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모두가 높아지고 커지고 첫째가 되고자 안달인 이 시대에, 작아지고 낮아지고 꼴찌가 되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 앞에, 그리고 형제들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작아지는지가 진정한 큰 사람임을 말해줍니다.
아멘.
<오늘의 말 · 샘 기도>
“막지 마라. ~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마르 9,39)
주님!
다른 이들이 저를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들이 하는 좋은 일을 막지 않게 하소서!
마치 좋은 일은 나만이 해야 될 것인 양 독점하지 않게 하소서!
오히려 그들이 더 좋은 일을 더 많이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감사하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서 당신을 따르지 않는 것으로 여기지 말게 하소서!
‘우리’라는 이름으로 당신을 제외시켜버리는 일이 없게 하소서!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은 되고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 사람은 안 된다는 독선을 부리지 않게 하소서!
‘우리’는 해도 되지만 너희는 해서는 안 된다고 편 가르지 않게 하소서!
‘우리’라는 특권으로 다른 이를 무시하거나 배척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그들이 ‘우리’의 양떼가 아니라 당신의 양떼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스스로에게 갇히는 일 없이 누구에게나 열려 있게 하소서!
스스로를 가두는 울타리를 거두고 오히려 손짓하여 부르게 하소서!
비록 생각이 다르다 해도, 우리에게 속해 있지 않다 해도, 그들을 위하고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게 하소서!
우리의 이기와 이해타산을 떠나 손해 볼 줄을 알게 하소서!
우리를 따르지 않는다 해고 거부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오히려 형제로 여기고 사랑하게 하소서!
불신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신뢰를 지키고, 긴장과 대립이 있는 곳에서 오히려 친교와 통교를 이루게 하소서!
타종교인이거나 타국인이거나 내치는 일 없이 반겨 끌어안게 하소서!
제가, 바로 그러하셨던 당신의 사람인 까닭입니다.
그러하셨던 당신의 제자인 까닭입니다.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26주 월요일-사탄도 이용하시는 하느님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