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5월27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2. 5. 27. 06:41

 2022 5월27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너희의 마음은 기쁨에 넘칠 것이며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0-23ㄱ) 

 

Your hearts will rejoice, 

and no one

will take your joy away from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코린토에서 선교하다가 시리아로 떠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근심이 어떻게 기쁨으로 바뀔지를 알려 주신다. 그 기쁨은 아무도 빼앗지 못할 것이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아주 어렸을 때, 집에 손님이 오시면 어린 저를 보고는 꼭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어?”

그때는 되고 싶은 모습이 너무 많았습니다. 과학자, 의사, 판사, 대통령, 경찰, 소방관…. 그래서 매번 다른 대답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어른이 되면 그중에 하나는 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는 이렇게 신부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신부가 되기 전, 신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이렇게 글을 매일 같이 쓰고 또 책도 출판하리라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본당 신부가 되어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신부가 될 것으로 생각했지, 특수 사목 신부로 오랫동안 살지도 몰랐습니다. 남 앞에 서서 말하는 재주는 전혀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저곳에 가서 강의하는 강사 신부가 되었습니다.

미래는 자기가 생각한 데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대신 주님의 뜻에 따라 지금의 내 모습이 된 것이 된 것이 아닐까요?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절망하고 좌절해야 할까요? 주님 계획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내 모습이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이를 위해 지금에 충실해야 합니다. 세상이 말하는 순간의 만족을 위한 삶이 아니라, 주님의 계획에 동참하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 노력을 통해 주님 계획이 더 빨리 내 안에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느끼고 함께 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분명 그 안에서 커다란 기쁨을 얻을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곧바로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하시지요.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우리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커다란 기쁨이 됩니다.

이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세상의 편이 아닌 주님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주님의 패배에 기뻐하지만, 주님께서는 절대로 패배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패배처럼 보여도 결국 진정한 승리를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주님 편이 되어 주님 계획에 동참해야 우리도 승리의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물론 이 기쁨은 곧바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과 시련 후에야 부활의 큰 기쁨이 있는 것처럼, 때로는 아픔과 시련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승리의 주님이시기에 주님과 함께라면 분명히 승리의 기쁨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주님 계획에 철저히 동참하는 주님 편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기쁨의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말입니다
기둥이 약하면 집이 흔들리듯 의지가 약하면 생활도 흔들린다(에머슨).

 기쁨의 씨앗: 희망하는 고통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hrTJg3qDd3g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다시 보는 기쁨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관상의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리기도-묵상기도-관상기도에서 느끼는 기쁨은 그 수준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요한 16,22)

 

    제자들이 느끼는 근심은 하느님께서 자신들과 함께 계신다는 평화를 빼앗겼을 때 가지는 근심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잃는 고통과 같습니다. 제자들은 그리스도를 만나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사랑하신다는 기쁨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분이 보이지 않고 말씀하지 않으시면 다시 부모를 잃은 고통과 같은 어둠을 견뎌내야 합니다. 

 

     인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를 만나 자신이 인간이고 부모처럼 성장하기만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불안의 고통에서 벗어납니다. 

  

    이 근원적인 불안을 잘 표현한 영화가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A.I’(2001)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영화 속 ‘데이빗’은 사람이 아닌 로봇입니다. ‘하비’ 박사는 죽은 자기 아들의 모습을 닮은 감정을 지닌 인공지능 로봇, 데이빗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감정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려고 한 가정에 입양시킵니다. 그 가정의 아이는 몸이 아파서 의술이 더 발전할 때까지 냉동상태로 보관되고 있습니다. 

엄마 ‘모니카’는 로봇 데이빗에게 피노키오 동화를 읽어줍니다. 데이빗은 그 동화를 듣고는 자신도 ‘푸른 요정’을 만나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병원에서 냉동상태로 있던 모니카의 아들 ‘마틴’이 치료되어 돌아옵니다. 그러자 모니카는 데이빗이 마틴처럼 자기 자녀가 되기를 원하는 것을 눈치채고는 데이빗을 산에 버립니다. 회사로 돌려주었다가는 데이빗이 분해되기 때문입니다. 데이빗은 왜 엄마가 자신을 버리는지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푸른 요정을 만나 꼭 인간이 되어 돌아오겠다고 말합니다. 모니카는 인공지능 로봇이 자기 아들이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안타깝지만 진짜 아들인 마틴을 위해 데이빗을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데이빗은 인간 사회를 방황하지만, 그곳에서 적응하지 못합니다. 로봇은 로봇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인공지능 로봇을 파괴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갑니다. 이 불안한 세상에서 간신히 ‘조’라는 다른 인공지능 로봇의 도움으로 자신을 만든 아버지 하비 박사를 만나게 됩니다. 하비 박사는 데이빗을 친절히 맞아줍니다. 하지만 데이빗은 하비 박사가 자신과 똑같은 로봇을 이미 수십 개, 수백 개 만들고 있음을 봅니다. 아버지 하비 박사를 통해서는 자신이 특별한 존재임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는 아버지로부터 탈출하여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푸른 요정을 만납니다. 비록 동상이기는 했지만, 그 요정에게 자신을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청합니다. 그렇게 2천 년이 지납니다. 지구는 멸망하여 더는 인간이 살지 않습니다. 외계인들은 데이빗의 기억을 보고 그가 인간이 되고 싶어 2천 년 동안 푸른 요정 앞에서 청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외계인들은 그도 인간이라는 좋은 기억을 가질 수 있도록 엄마 모니카에게 사랑받는 행복한 기억을 넣어줍니다. 데이빗은 이제 엄마의 아들이라는 믿음으로 엄마 품에 잠이 듭니다. 

  

    데이빗은 로봇이면서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이 희망은 먼저 인간이 희망해주지 않으면 가치가 없습니다. 데이빗은 희망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 수 있는 능력자들에 의해 정말 인간이 되는 꿈을 꿉니다. 데이빗은 기쁘고 행복합니다.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은 원한다고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 큰 희망과 믿음, 그리고 사랑을 지닌 이가 먼저 믿어주고 희망해주고 사랑해줘야 합니다. 옥사나 말라야는 개들이 그렇게 하였고 그들만큼 자랐고 개들만큼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누리는 행복에는 도달할 수 없었습니다. 

  

    하느님은 아드님을 보내주시고 죽음을 이기시게 해 주시어 우리도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예수님은 우리도 할 수 있음을 믿게 하시려고 당신이 인간이 되셨고 부활하는 능력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희망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태어난 지 20일 만에 부모에게 버려진 한 아이가 있습니다. ‘키릴’이라는 이름의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4살 된 아이입니다. 이 아이는 여섯 차례나 입양이 거부된 불쌍한 아이입니다. 그 이유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오른팔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캐나다의 한 부부가 한쪽 팔이 없는 아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꼭 그 아이를 입양하고 싶다”라며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 의문은 키릴이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풀릴 수 있었습니다. 

  

    키릴은 오른쪽 팔꿈치 아랫부분이 없어 반소매 밑으로 팔 끝부분이 삐죽이 나온 채로 캐나다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낯선 공항에 어리둥절한 채 나간 키릴에게 다가온 것은 한 할아버지였습니다. 그 할아버지는 입양 부모 더그의 아버지인 크리스였습니다. 크리스 할아버지는 자신에게 다가오더니 환한 미소로 키릴을 반겼습니다. 

키릴은 할아버지의 모습에 깜짝 놀랐습니다. 자신과 똑같이 오른팔이 없었던 것입니다. 키릴은 흠칫 놀라더니 곧 자기의 짧은 오른팔을 뻗어 할아버지의 오른팔을 만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말합니다. 

    “나랑 똑같구나!” 

 

    키릴의 근심은 여기서 끝났습니다. 자신도 남들처럼 성장하여 세상에서 살 자격이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자기를 손자로 받아 준 할아버지도 자신처럼 한쪽 팔이 없기 때문입니다. 키릴에게 한 집안으로 입양되는 것은 죽음과 같은 모험입니다. 한쪽 팔이 없는 자기를 새 부모가 사랑할지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족이 자신을 그들과 같은 모습임을 보여줄 때는 기쁨에 넘칩니다. 

  

    그래서 우리 각자는 우리의 모습을 한 부모님인 하느님께 안기는 모험을 해야 합니다. 처음엔 근심과 고통뿐입니다. 그러나 참고 견디다 보면 키릴처럼 기쁨을 맛볼 순간이 올 것입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희망과 믿음과 의지입니다. 키릴은 이제 절망에서 벗어나 자신도 할아버지처럼 세상에서 온전히 살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할 줄 아는 수준의 사람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사실 희망은 고통스럽습니다. 도파민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은 항상 더 큰 기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성령께서 이 역할을 하십니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보내주시는 양식입니다. 양식은 희망하게 합니다. 믿게 합니다. 

성령강림 때 교회는 성령을 받음으로써 우리가 하느님처럼 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는 죽음도 두렵지 않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기쁨은 바로 이 성령을 받는 기쁨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처럼 될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성장하며 사랑도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수준의 존재가 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하여라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puQpLrnPfHY

부활 제6주간 수요일이었던 그제가 부활 후 40일로서 주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날이었습니다. 승천 후 제3일인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해산할 때에 진통을 겪지만 아이를 낳으면 그 기쁨으로 고통을 잊어버리는 이치를 비유하여, 십자가의 고통이 괴로울 것이나 부활의 기쁨이 이를 능가하리라는 가르침으로 사도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과연 이 가르침대로, 코린토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여전히 현지 유다인들로부터 핍박을 받던 바오로와 그 일행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격려를 받아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공동체를 건설하였습니다. 그가 들은 메시지는,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말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사도 18,9-10)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사도 바오로의 선교 여행에서 가장 오랫동안이나 선교한 에페소에 비하면 꼭 절반 가량의 기간과 노력을 코린토에 들인 셈이었는데, 이는 그의 선교 구상에서 소아시아와 그리스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을 어림잡아 2대1로 나타낸다고 할 것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니신 섭리적 구상에 따른 결과이기도 합니다. 예수 부활 같은 신적 메시지는 다만 고백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그에 담긴 가치가 실현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에서도 또 에페소에서도 큰 공동체를 세웠으며, 로마의 복음화와 더 나아가서 유럽 대륙의 복음화 과업이 이렇게 하여 준비되었습니다. 

 

  복음화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 고백,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대한 증언이라는 가치가 실현된 결과입니다. 바오로와 그 일행이 신앙과 증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서 치루어야 했던 희생이 컸고, 그 희생은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끝내 생명까지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알지도 못하는 신들에게까지 예배를 드릴 정도로 신에 대해 무지하던 그리스인들에게는 창조주 하느님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우쳐 주어야 했고, 이미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계시된 신앙을 물려받았으나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던 유다인들에게는 예수님께서 오해받으시고 끝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길을 고스란히 걸으며 십자가를 보여줌으로써 그 메시지의 진정성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참된 영과 거짓 영을 식별해 주고 참된 영을 보내주시는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는 일이었습니다. 

 

  보편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 더 나아가서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겪어야 했던 이 길이 한국 초대교회에서도 그대로 되풀이되었습니다. 이벽과 이승훈, 권철신과 권일신, 정약전과 정약종과 정약용 등 한국교회의 초기 사도들 역시 무신론적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눈이 가린 유림들과 조정에 대해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생명을 바침으로써 증거하고자 했고, 무신론적 풍조에 억눌려 다신교화되어 버린 전통 신관에 대해서는 참된 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삼위일체 하느님에게서만 오는 것이고 나머지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조상을 공경하는 영일 뿐이므로 무분별하게 신의 이름을 붙여서는 미신으로 떨어지는 것임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 신자들이 ‘무군무부’(無君無父), 즉 임금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는 무리라는 터무니 없는 유림측 주장에 대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야말로 ‘대군대부’(大君大父)의 참종교, 즉 임금 중의 임금이시오 큰 아버지이심을 증거하며 생명을 바쳤습니다. 또한 단군이든 또 다른 조상이든 사람을 신으로 섬기는 무속과 역술에 대해서도 냉철하게 영적으로 식별하였습니다. 즉, 조상은 공경의 대상이지 숭배의 대상일 수 없으며, 단지 그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하느님을 숭배해 왔으며 그 제천의식과 천손의식을 올바로 계승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한국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신자들이 수행한 영적 식별 작업이었으며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려던 노력이었습니다. 

 

  개인에게든 민족에게든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고대에서 행해진 그리스인들과 유다인들의 역사적 사례와 조선 시대 유림들의 역사적 사례에서 확인되었듯이, 그릇된 영에 이끌리면 마귀의 지배를 받게 되어 멸망을 초래합니다. 하지만 보편 초대교회의 희생어린 노력으로 로마의 복음화를 이룩했듯이 올바른 신성을 증거하면 한국 초대교회의 희생에서 시작된 노력도 머지않아 성령의 이끄심으로 민족 복음화의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의 식별과 신성의 증거라는 사도직 활동은 우리 신앙 선조들을 이어 받아서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선교 활동입니다. 

 

  승천하시어 하느님 오른편에 앉으신 예수님께서 사도 바오로와 그 일행에게 내려주신 격려의 말씀은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여 활약하시는 성령께서 우리 교회에 주시는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잠자코 있지 말고 계속 하여라. 내가 너와 함께 있다. 아무도 너에게 손을 대어 해치지 못할 것이다.” 

 -조재형신부-

 

사제서품을 받기 전에 전통적으로 서품성구를 정하고 있습니다서품상본 앞면에는 서품성구에 맞는 그림이 있고뒷면에는 서품성구서품일자첫 미사서품자 이름이 적혀있습니다저는 31년 전에 서품을 준비하면서 서품성구를 정하였습니다저의 서품성구는 시편126장 5절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였습니다다른 많은 성경말씀이 있지만 왜 제게 그 시편의 말씀이 가슴에 와 닿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다만 운명처럼 그 말씀은 저를 사로잡았고저의 사제생활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었습니다비슷한 의미의 말을 군대에서 자주 들었습니다. ‘훈련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땀은 실제 전투에서 흘리는 한 방울의 피와 같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평소에 훈련을 열심히 하면 전쟁에서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의미였습니다비슷한 의미의 애벌레 이야기도 들었습니다고치에 있는 애벌레가 불쌍하다고 고치를 밖에서 열어주면 애벌레는 결코 나비가 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애벌레는 고치 안에서 스스로 날개를 만들어야만 하늘을 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삶을 기록한 것입니다사도들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했는지사도들과 초대 교회 공동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쁨과 희망이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사도들도 때로는 의견이 달랐던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어떻게 지혜롭게 문제를 해결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였고주님의 뜻을 생각하면서 문제들을 해결하였습니다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기적삶을 보았던 제자들이 기록한 것입니다복음서의 저자들은 제자들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그것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성서는 아름다운 이야기희망찬 이야기행복한 이야기만 기록하지 않았습니다성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배반한 인간의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형제들이 서로 다투고죽이는 이야기도 기록하고 있습니다인간의 교만과 허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자신의 잘못을 아내의 탓으로 돌렸던 아담이 있었습니다동생을 시기해서 죽인 카인이 있었습니다동생을 팔아넘긴 형제들이 있었습니다부하를 시기했던 왕도 있었습니다스승을 팔아넘긴 제자도 있었습니다스승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었습니다성서는 어째서 인간의 나약함을인간의 잘못을인간의 교만을 숨기지 않고 기록하고 있을까요그럼에도 인간을 사랑하시고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기쁜 이야기만 하시지 않았습니다행복만을 이야기 하시지 않았습니다제자들에게 다가올 위험과 고통을 가감 없이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내가 진실로 말합니다여러분은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 것입니다여러분은 근심하겠지만그러나 여러분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해산할 때에 여인은 근심에 쌓입니다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아이를 낳으면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립니다.” 고통과 시련이 있겠지만박해와 순교가 있겠지만 주님께서는 함께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심은 불통입니다하느님과 함께 하지 못하고말씀과 함께 하지 못하고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착한 목자의 비유에서 소통을 이야기 하셨습니다착한 목자는 양들의 목소리를 알고양들도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포도나무와 가지에서도 이야기 하셨습니다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는 싱싱하게 열매를 맺을 거라고 하셨습니다하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가지는 말라 버릴 것이고버려질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 이야기 하시는 근심과 기쁨의 기준은 바로 소통입니다.

 

우리 몸의 건강도 소통이 중요합니다혈액순환이 잘 되면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하게 됩니다신선한 공기와 양분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노폐물이 걸러지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섭취하는 음식도소화가 잘 되어야만 합니다소화가 안 되고배변이 안 되면 음식을 잘 먹을 수도 없고우리의 건강은 점차 나빠질 것입니다.

 

오늘은 제가 좋아하는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오늘 옷을 적시지 말고내일 내릴 비 때문에 오늘 우산을 펴지 마십시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입니다!

 -양승국신부-

 

근본적으로 결핍 투성이요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 인간이기에, 이 한 세상 살아가는 동안 끊임없이 찾아오는 것이 근심 걱정이요, 진통이요, 고통입니다. 그저 아무런 고통 없기를, 무탈하고 승승장구하기만을 바라는 것은 너무 얌체 같은 바람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고통 중에 가장 큰 고통은 의미 없다고 느껴지는 고통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자신에게 다가온 고통의 의미를 파악하게 되고 나서는, 신기하게도 그토록 극심했던 고통의 완화되고 해소되는 체험을 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 고통은 견딜만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고통은 기쁨으로 승화됩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산고(産苦)입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쌓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요한복음 16장 21절)1 

 

그뿐이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가 길고 긴 코스의 반환점을 돌고 나서 느끼는 육체적 고통을 상상을 초월합니다. 결승점을 앞두고 느끼는 신체적 피로도는 엄청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잠시 후 1등으로 골인하고 영광의 월계관을 받아쓰게 된다는 희망으로 가득 찬 기쁨과 환희의 고통입니다.

  

무자비한 폭력과 감금이 난무하던 군부독재 시절, 수많은 청춘들이 더 나은 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가 투옥되고 고문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재판정을 드나드는 그들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의미 있는 고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고통에 대한 의미 추구입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고통, 반드시 의미와 가치가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 당장에는 파악하기 힘들겠지만, 이 참혹한 고통을 겪게 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이 반드시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도무지 이유를 모르는 고통 앞에서는 별 도리가 없습니다. 어렴풋이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월이 필요한 고통입니다.

  

동료 인간들의 더 따뜻한 연대와 동반이 필요한 고통입니다.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더 집중해서 바라봐야만 조금이라도 이해가 되는 고통입니다.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이영근신부-

 

오늘날에는 아파하고 고통 받는 이들이 유난히도 많아 보입니다.

슬픔과 외로움에 지친 이들, 부당한 처사로 괴로움을 당하는 이들과 근심걱정과 절망에 빠진 이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누군들 슬픔에서 해방되고 싶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누군들 고통과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원하지 않는 이가 있을까요?

기쁨을 향해 달려가지 않으려 하는 이가 있을까요?

 

그런데 대체 참된 기쁨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오늘날 세상의 슬픔과 고통에 대하여 누구보다도 가장 깊이 공감하며 함께 아파하고 계신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문헌인 <복음의 기쁨> 제1항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참된 기쁨’을 예수님에게서 만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되는 기쁨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요한 16,20)

제자들은 주님이 죽음에 처했을 때 슬퍼했지만, 그분께서 부활하신 것을 알자 그 슬픔은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제자들은 지금 신음하며 해산중입니다.

해산을 마치면 그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고통이 사라질 뿐만 아니라, 기쁨이 너무 커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고 하십니다.

그때에는 '슬픔이 기쁨으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이 기뻐하는 것은 한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의 아기’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기쁨은 아기가 ‘내 안에서’ 태어나야 오는 기쁨입니다.

 

그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됩니다.

그것은 내가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자신이 새로 탄생하는 것이 곧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그렇습니다.

부활이 ‘내 안에서’ 탄생하는 이 기쁨은 빼앗겨지지도, 빼앗겨질 수도 없는 기쁨입니다.

사실 내가 기쁨을 낳은 것이 아니라 기쁨이 나를 낳은 것입니다.

이것야말로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참된 기쁨’입니다.

 

이 기쁨은 예수님의 죽음은 패배가 아니라 승리임을, 죽음이 아니라 생명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고별담화의 마지막을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세상을 이겼다.”

(요한 16,33)

 

<오늘의 말 · 샘 기도>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요한 16,22)

주님!

저에게는 자랑할 것이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자랑하고 또 하고 또 해도 다하지 못할 자랑입니다.

방에 들라치면 먼저 들어와 있고, 일어날라치면 내 안에서 먼저 일어나고, 기도할라치면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임의 사랑입니다.

바로 이것이 저의 기쁨입니다.

아멘.

「고통을 품어 안는 힘」

 -반영억신부-

 

성 아우구스띠노는 “주님 안에서의 기쁨이 세상을 두고 누리는 기쁨에 승리를 거두게 하십시오.” 하고 권고합니다. 사실 “주님은 기쁨이십니다. 당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 할지라도 주님은 언제나 기쁨이십니다. 하찮은 우리의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까롤로 까레또). 그러므로 기쁨이신 주님을 차지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를 듣고 근심에 싸인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아가지 못할 것이다”(요한16,2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보게 된다는 말씀은 곧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부활은 완전한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의 승리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죄악의 어둠에 죽고 거듭나는 일상의 새 삶을 통해서 부활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기쁨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기쁨에 앞서 괴로움을 크게 겪었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도 세상의 것에 맛들이지 않고 주님을 희망하고 천상의 것에 마음을 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실 주님을 갈망하면 처음에는 갈등이 생깁니다. 할 일도 많아집니다.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고 괜한 일을 시작하였다는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남들은 편히 사는데 사서 고생한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께 가까이 가면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조금만, 더! 또다시 참아 내고 이겨내면 하느님의 위로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산할 여자가 어여쁜 아기를 기다리는 진통의 시간을 겪듯이 우리 또한 아픔의 시간을 이겨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고통은 없어질 것이 아니라 품어서 극복되어야 할 고통이라는 사실이고 진통이 끝난 뒤 새로운 생명의 기쁨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의 상처를 극복하는 사건이지 그것을 없던 일로 만드는 사건은 아닙니다. 인생 여정에서 겪는 고통과 시련은 부활의 기쁨을 향한 디딤돌이지 없애야 할 절대악은 아닙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7).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혼돈과 실망과 눈물의 순간에 그리스도의 눈물은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기도가 됩니다. 기도는 우리의 고통의 진정한 치료제입니다. 기도에서 또한 우리는 하느님의 현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분의 자애로운 눈길이 우리를 평안케 합니다. 그분 말씀의 힘은 우리를 지지하고 희망을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의 무덤 옆에 서시어 기도하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요한 11.41-42).

 

참된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위로를 얻기 전에 하느님을 애타게 기다리고 찾아나서는 일부터 해야 하겠습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을 차지하여 고통을 감당하고 기쁨을 만드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예레15,16).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파스카의 신비』

 -송영진신부-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요한 16,21-23ㄱ).”

 

이 말씀은, ‘파스카의 신비’를 풀이해서 설명해 주신 말씀과 같습니다.

(‘파스카의 신비’는 ‘전화위복’도 아니고, ‘새옹지마’도 아닙니다.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파스카’는 ‘지나가다.’ 라는 뜻이고, ‘파스카의 신비’는

“죽음을 지나서 생명을 얻는 일로 드러나는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이 말은, 반드시 죽음을 ‘지나가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해서 말할 때,

“반드시 해야 한다.” 라는 말을 사용하면 안 됩니다.

하느님은 절대자이신 분이고,

그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 일은 하느님의 섭리였다.” 라고 깨닫는 것은,

어떤 일의 결과를 본 다음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시고, 죽음을 맞이하시고,

결국 무덤에 묻히셨을 때, 아직 부활 신앙이 없었던

제자들의 눈에는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난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랬는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죽음을 지나서 생명으로 오신 일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파스카의 신비’이고,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왜 그런 방식으로 일하실까?

우리에게는 그것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그래서 그 일을 ‘신비’ 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경우에는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우리 경우에도 대부분 그렇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반드시’ 죽어야만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엘리야 예언자는 죽지 않고 승천했습니다(2열왕 2,11).

살아 있는 동안에 ‘예수님의 재림’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살아 있는 채로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1테살 4,17).

이 말은, 우리가 살면서 겪는 고난과 시련에도 적용됩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똑같이 고난과 시련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얻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분명히 사람마다 크게 다른 과정을 거칩니다.

(고난과 시련을 안 거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에는 불공평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불공평함’도 ‘신비’입니다.

이 경우에 ‘신비’ 라는 말은,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일,

그래서 우리는 이해하기 어려운 수수께끼 같은 일”이라는 뜻입니다.

 

‘모든 일’에 ‘하느님의 섭리’가 작용한다는 것을 믿는다 해도,

눈앞에 닥친 일의 결과를 전혀 알 수 없을 때,

또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요한 16,12) 일이 닥칠 때,

그 일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무조건 ‘믿음으로’ 정면 돌파를 해야 하는가?

예수님의 다음 말씀이 해답입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2-23).”

박해를 견딜 수 있으면 견디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견디든지 피하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끝까지’ 신앙을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난과 시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견딜 수 있으면 견디고 피할 수 있으면 피하면 됩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흔들림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을 출산의 과정으로 표현하신 것은,

해산하기 전의 산모의 근심 걱정과 출산 후의 기쁨이,

당신의 죽음 때문에 제자들이 슬퍼하고 당신의 부활 덕분에 제자들이

기뻐하는 일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이 출산과 같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두려워하고 슬퍼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 아니고,

“슬퍼하지 마라.” 라는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은 “내가 부활하면”입니다.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는 “너희는 모든 슬픔과 두려움에서

완전히 해방될 것이고”입니다.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는

“너희는 그 기쁨을 영원히 누리게 될 것이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즉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난 사도들과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모든 슬픔과 두려움에서 해방되었고,

기쁨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들은 그 체험에 대한 증언을 들었을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부활을 직접적으로 체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오늘날의 우리가

옛날의 사도들보다 더 어려운 상황 속에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도들은 보았기 때문에 믿었던 사람들이고,

오늘날의 우리는 보지 않고도 믿어야 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요한 20,29).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의 부활을 체험하고, 각자 자기 자신의 부활을 확신하게 되면,

더 이상 이해하지 못할 일이 없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아직도 이해 못할 일이 많이 있고, 오직 ‘믿음으로만’

그 일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많은데, 어떻든 우리는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려고 오신 분”이라는 것, 그리고 “고통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기쁨이 하느님의 뜻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6주 금요일-하느님 없는 기쁨과 두려움에 관하여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22일 부활 제6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