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2년 4월 17일 예수 부활 대축일 '''

Margaret K 2022. 4. 17. 06:18

2022 4 17 예수 부활 대축일 '''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요한 20,1-9)

  
 “They have taken the Lord from the tomb, 
and we don’t know where they put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베드로 사도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라고 한다(제2독서). 시몬 베드로와 다른 제자가 달려가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지만,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한다(복음). 

주님과 함께 부활하라(파스카 성야)

-키엣 대주교-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 날 아침,

사람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는 마음은 같았지만 그들의 태도는 저마다 달랐습니다. 여인들은 무덤의 돌이 흩어지고 시신이 사라진 것에 놀랐습니다. 사도 요한은 무덤 안에 수의가 잘 개켜져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습니다.

수의는 시신을 묶는 쇠사슬과 같습니다. 수의에 감싸져있다는 것은 다시는 회복될 수 없는 지하 세계에 매몰된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무덤 안에 수의가 가지런히 정돈된 것은 더 이상 수의가 필요 없는 부활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의를 벗어버림으로써 인간을 구속하는 속세의 사슬, 공간과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나 영광스러운 부활을 하셨습니다.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닫혀있는 문도 통과하시고 같은 시간에 여러 곳에서 발현하셨습니다.

무덤의 돌은 사람의 모든 것을 과거로 묻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이루신 모든 것들이 과거로 사라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에 의해 매장되었던 무덤이 부숴졌습니다. 무덤을 나온 예수님은 과거를 논하지 않으셨고 자신을 죽인 제사장과 집행관, 잔인한 판결을 내린 빌라도를 공격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유다와 베드로뿐만 아니라 당신을 배신했던 제자들을 책망도 심판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여러 곳에 나타나시어 ‘주님의 평화’만을 빌어 주셨습니다.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보이지 않자 탄식하며 울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미 수의를 벗어버리고 부활하셨지만 그들의 영혼은 아직 그 속에 묶여 오직 예수님의 시신에만 집착하여 절망했습니다. 무덤을 막았던 돌들이 흩어지고 절망과 죽음이 문이 열렸는데도 그들은 보이지 않는 돌무덤 속에 자신들의 영혼을 꼭꼭 닫아버리고 있었습니다.

과거만 보는 그들은 부활의 기적 앞에서도 절망하였습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지요? 스스로를 수의에 꽁꽁 묶어 증오와 미움, 탐욕, 욕망에 빠져들고, 과거라는 무덤속에서 점점 시들고 죽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지은 것을 후회하면서도 자꾸만 죄를 더 해가고 한 조각 희망도 잡지 못해 삶을 포기하고 죽음에 동화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도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라”는 말씀입니다.

병자성사의 기름 향기는 죽은 육체에 스며들어 영혼이 육체를 떠나 편안한 새로운 세계로 떠나도록 합니다. 그러나 영혼이 죽은 육체에 매어 있으면 그 향기가 더 이상 스며들지 못해 그 사람을 과거의 죽음에만 가두어버립니다. 여인들은 시신이 없는 무덤을 보았을 때 처음에는 불안하고 안타까웠지만 그 빈 무덤이 바로 희망찬 미래가 열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잃어버림으로써 우리는 더 할 수 없이 기쁘고 영광스러운 주님 부활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삶과 풍부한 삶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부활을 위하여 수의를 풀어버리신 예수님과 같이 우리도 나의 죄와 나의 육체를 묶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십시오.

미래를 위한 희망과 축복을 위해 과거를 묻는 돌무더기를 부숴버리시고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으신 예수님처럼 우리도 더 이상 서로를 비판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어디서나 “주님의 축복”만을 빌어주신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과 하나되고 가정과 이웃과 사랑을 나누고 교회와 사회와 화합하십시오. 함께 하나된다는 것은 과거와 자신을 뛰어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저희를 참된 영혼을 지닌 사람으로 거듭 살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마음 속에서 강한 죽음의 힘을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 죽음의 힘을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습니까?

2. 나에게 주님 부활의 은총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3. 주님 부활의 신비로운 삶에 대해 묵상해 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스스로 만든 절망과 구속의 수의와 돌 무덤에서 벗어나십시오. 그리고 주님과 함께 다시 태어나 새로운 희망의 삶을 시작해보십시오.

2. 주님 부활의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도 알릴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주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40일간의 사순시기를 모두 지내고 우리는 예수님의 기쁜 부활을 맞이했습니다. 정말로 기쁘신가요? 혹시 반복되는 또 하나의 일처럼 생각하는 것은 아니시겠죠?


매년 주님 부활 대축일을 맞이합니다. 가톨릭 신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부활’은 우리가 기쁘게 신앙생활 하는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과연 기쁘게 부활을 맞이합니까?

매년 맞이하는 것이니 힘들지 않겠냐고 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생일을 기억해보세요. 매년 맞이하는 생일인데 왜 의미 있는 시간으로 생각하십니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의 생일은 어떻습니까? 사랑하는 사람과 갖게 된 기념일은 또 어떻습니까?

매년 똑같이 맞이하는 것이 힘든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맞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매년 맞이하는 연중행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 있는 사랑에 집중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인간적인 기준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오직 신앙 안에서, 또 사랑 안에서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사람은 끊임없이 의심하고 인정하지 않게 됩니다. 마치 주님께서 세 번이나 말씀하셨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관한 이야기를 아직 깨닫지 못한 제자들의 모습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활을 깨닫지 못하게 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 시신에 향유를 바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갑니다. 여기에 그녀는 큰 문제가 있음을 알았을 것입니다. 향유를 바르려면 무덤을 막아놓았던 돌을 치워야 하는데, 여자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다른 복음에서는 다른 여자들과 함께 갔다고 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자들의 힘으로 치울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덤에 향유를 들고 찾아갑니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을 들고 무덤을 찾았지만,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고 무덤이 비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곧바로 시몬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 말합니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2)

베드로가 이 말을 듣고 요한과 함께 뛰어갑니다.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서 보니 예수님의 얼굴에 쌌던 수건이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는 것입니다. 이는 시신을 도둑맞지 않았다는 표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는 순간입니다.

사랑으로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함께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사랑받기를 원할 뿐 아니라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애덤 스미스).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

-전삼용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youtu.be/zEHy09T3ayo

 오늘은 주님 부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할까요? 바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부활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되살아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1코린 15,16)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한 인간으로서 부활하실 수 있으셨다면 같은 하느님 자녀인 우리도 부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또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의 믿음은 덧없고 여러분 자신은 아직도 여러분이 지은 죄 안에 있을 것입니다”(1코린 15,17)라고 말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부활에 대한 믿음이 우리를 현세적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이 우리를 악인으로 만듭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모기와 예수로 나뉜다고 할 때, 모기가 되는 이유는 현세적 집착 때문입니다. 현세적 집착은 생존과 직결됩니다. 생존하려고 집착하는 것입니다. 

    ‘종말’에 관한 영화를 보면 어떤 이들은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지만, 어떤 이들은 자신만 살려고 기를 씁니다. 부활에 대한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1960년대 초 미국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2차 대전 당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나치의 명령에 복종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고자 일반인을 대상으로 권력에 대한 복종 실험을 시행한 바 있습니다.

    지원자들은 교사와 학생군으로 분류됐고, 교사가 낸 문제를 학생이 틀릴 때마다 전기충격기의 전압을 15볼트씩 올리도록 했습니다. 물론 충격기는 가짜였고, 지원자들은 이를 몰랐습니다. 또한 학습자(학생)는 밀그램이 섭외한 배우였습니다.

  

    실험 결과는 놀라웠습니다. 밀그램의 불합리한 지시와 통제 속에 실험자의 65%가 최고수치인 450V까지 전기충격기를 올린 것입니다. 학습자(배우)가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면 즉각 실험을 포기할 것이란 예측은 빗나갔습니다. 살려달라는 학생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라는 밀그램의 말에 피험자들은 사망에 이를 수 있는 전기를 흘려보냈습니다. 

  

    밀그램은 자신의 저서 『권위에 대한 복종』에서 ‘복종 실험’에 대해 이같이 말했습니다.

    “놀라운 것은 (피험자들이) 실험자의 지시에 너무나 기꺼이 따른다는 점이다. 실제로 실험의 결과는 놀랍고도 당혹스럽다. 많은 피험자가 스트레스를 느끼고 실험자에게 항의하지만, 상당수의 피험자가 전기충격기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한다.”

  

    마찬가지로 1971년에 행해진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 보여주었습니다. 필립 짐바르도(Philip Zimbardo) 교수는 ‘교도소 실험’을 통해 강압적인 특수 환경에서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를 관찰했습니다.

    모의 감옥에서 피험자들은 교도관과 죄수로 나뉘었고, 각각의 역할을 수행토록 했습니다. 어색하던 분위기와 달리 교도관들은 죄수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점점 고압적으로 변해갔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관의 행위는 악랄해졌고, 통제 불능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실험 5일째에는 성적 고문까지 이어졌습니다. 강하게 저항하던 죄수들은 저항력을 상실했고, 간수들의 권위에 굴복하기 시작했습니다. 실험은 6일 만에 중단됐습니다.

  

    인간이 동물적 본성을 통제할 능력이 없는 존재임을 보여준 충격적 결말입니다. 또 이 실험은 그리스도교적 전통에서 자란 독일인들이 어떻게 유대인들을 500만 명이나 비인간적으로 학살할 수 있었는지도 보여줍니다. 이 밖에도 인간 본성이 악하다는 증거는 수없이 많습니다.  

 

    그러나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유대인들을 언젠가는 부활하여 다시 만나게 된다고 한다면 그렇게 학살할 수 있었을까요? 또한 실험이 끝난 뒤에 교도관을 했던 사람들과 죄수 역할을 했던 사람들이 함께 며칠 동안 소풍 가는 프로그램이 계획되어 있었다면 교도관들이 그렇게 악랄하게 변할 수 있었을까요? 

다시 만나야 함을 안다면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전기충격 실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전기충격을 준 그 사람을 나중에 문을 열고 만나는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면 그렇게 끝까지 전기충격을 가할 수 있었을까요? 이 모든 것이 그것으로 끝난다는 생각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에 대한 희망이 있다면 이 세상 것에 집착할 필요가 없어서 죽음 앞에서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할 수 있습니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영화 ‘리스타트’(2019)는 죽으면 매일 아침 7시에 똑같은 삶을 시작한다는 전제의 영화입니다. 아침 7시가 되자마자 킬러들이 들이닥칩니다. 이렇게 수십 번 죽고 나니까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잘 알게 됩니다. 본인도 왜 이런 삶이 반복되는지 모릅니다. 다만 이전의 기억들이 축적되어 킬러들을 소탕할 능력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집과 차와 생명까지도 집착하지 않게 됩니다. 

  

    주인공은 이혼한 아내가 있고 아들이 있습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마음은 점점 커집니다. 자신이 노력해서 그들에게 도달하는 시간을 단축하지 않으면 아내와 아이는 죽습니다. 결국 주인공은 200번 가까이 죽으며 그들이 죽기 전에 도달하여 아내와 아들을 죽지 않게 합니다. 죽었다 깨어남을 반복할 때 유일하게 가치 있게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가진 모든 것을 잃어도 어차피 죽고 부활하면 아무 상관 없지만 사랑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란 주제를 담고 있는 영화입니다. 

  

    인간은 원죄의 영향으로 자신의 악한 본성을 스스로의 힘으로는 통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자신들이 찌른 상처를 그대로 지니신 채 자신들 앞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어 나타나실 것을 믿었다면 그분을 그렇게 찌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착해지지 못한 이유는 부활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고 안 믿고는 자유입니다. 나의 선택입니다. 착해지고 싶은지, 그렇게 되길 원하지 않는지에 달렸습니다. 다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착해질 수 없다는 것은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집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활을 믿으면 내 죽음엔 무관심해지고 타인의 죽음에 관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부활을 믿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입니다. 착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여, 우리 부활시키소서!

- 이기우 신부-


유튜브 묵상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DltG_hSGAiQ

1. 우리의 부활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 아침에, 우리가 부활 축하 인사를 나누는 것은 우리의 부활도 축하하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사도들이 부활을 체험하고 굳게 믿게 된 경위를 잘 알고 그 경로를 잘 따라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으로 들으신, 빈 무덤의 체험 속에서 발현 체험으로 이어지는 대목은 의미심장합니다. 

 

2. 여인들의 빈 무덤 체험

부활절 이른 아침에 예수님의 시신을 모셨던 돌무덤에 찾아간 여인들이 발견한 것은 뜻밖에도 빈 무덤이었습니다. 시신이 도난당한 줄로 생각하고 충격과 좌절을 겪고 있는 여인들에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해 주었습니다. “놀라지 마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힌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고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러니, 갈릴래아로 가서 그분을 만나 뵈오라고 제자들에게 일러주어라”(마르 16,6-7; 마태 28,5-7; 루카 24,5-7). 

 

3. 제자들의 빈 무덤 체험

여인들의 전갈을 받고 갈릴래아로 간 제자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예전에 하던 대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일인지 밤새 애를 썼지만 허탕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이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온, 그래서 어부로서 잔뼈가 굵은 그들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는데도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이 그분을 알아보게 된 계기는 그분이 배 오른쪽에 그물을 내려 보라고 권하셔서 그렇게 했더니, 놀랍게도 그물이 찢어질 지경으로 물고기가 많이 잡혔던 풍어의 기적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요한 21,6). 

 

4. 풍어기적, 발현 체험

요한 복음사가는 이때 그물에 잡힌 물고기가 153마리라고 기록해 놓았는데, 이 숫자에 풍어기적이 뜻하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1부터 17까지 더하면 153이 됩니다. 또 마지막 숫자 17은 10과 7을 더한 숫자인데, 십진법에서 완전수인 10은 십계명을 뜻하고, 칠진법에서 완전수인 7은 성령칠은을 뜻합니다(아우구스티누스). 그러니까 그물에 잡힌 백쉰세 마리의 물고기는 십계명을 지키며 성령칠은을 받는 신자들로 채워질 교회의 모습이요, 이는 부활신앙으로 무장한 사도들이 전개할 선교 활동의 풍성한 열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로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물고기를 잡는 체험을 하게 하심으로써, 그들이 사도가 되어서 얻게 될 풍요로운 선교 성과를 미리 맛볼 수 있는 기적을 행하셨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밤새 애를 썼어도 성과가 나지 않았던 허탈한 좌절 체험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당신의 본 모습을 드러내어주신 발현 체험이 되었으며, 또한 제자였던 그들이 사도로서 나설 수 있게 한 훈련이기도 했습니다. 

 

5. 부활, 영적인 몸의 현실

이밖에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을 사도로 훈련시키시기 위하여 자유자재로 발현하셨습니다. 육신의 제약을 벗어남은 물론, 영혼이 더 이상 육신의 욕구나 죄로부터 고통을 겪지 않게 되셨으며 나그네나, 동산지기나, 어부로나 자유자재로 그 모습을 바꾸실 수도 있게 되셨습니다. 또 이미 타볼산에서 세 명의 제자가 경험한 것처럼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빛나는 모습으로 변하실 수도 있게 되셨습니다. 또 순식간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하실 수도 있는가 하면 한 번에 여러 곳에서 나타나실 수도 있는 ‘영적인 몸’을 지니시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부활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들 역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보여주신 이 영적인 몸을, 세례 때에 저마다의 영혼에 부여받았습니다. 이 영적 생명은 신앙생활로 성장하는 새로운 몸입니다. 이러한 영적인 몸이 우리가 신앙고백문에서 고백하는 ‘육신의 부활’이 보여줄 미래입니다. 이는 죽고 나서야 온전한 상태가 될 수 있지만, 세례 때부터 신앙의 수준에 맞추어 서서히 성장합니다. 이것이 교리 용어로는, 상하지 못함과 빛남과 빠름과 사무침을 뜻하는 네 가지 은총 즉 사기지은(四奇之恩)입니다. 

 

6. 사기지은(四奇之恩)

첫 번째는 ‘상하지 못함’의 은총으로써, 영적인 몸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은 세례로 인해 다시 살아난 몸으로서 죄와 죽음의 위협을 당하지 않습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오로도, “썩을 몸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2)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죄로 인한 상처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용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상하지 못함’의 은총은 사랑을 실천할 용기를 뜻합니다. 

 

  두 번째는 ‘빛남’의 은총으로써, 영적인 몸은 더 이상 육신의 본능에 지배당하지 않고 영혼이 이끌기 때문에 천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닦은 덕행과 실천한 선행 덕분에 빛납니다. 사도 바오로도,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3) 하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은총은 덕행과 선행의 품위를 말합니다. 

 

  세 번째는 ‘빠름’의 은총으로써, 영적인 몸은 육신 본능의 한계에 굴복하는 미약한 모습을 지나 이를 넘어섭니다. 사도 바오로도, “약한 자로 묻히지만 강한 자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3) 하고 증언한 바 있습니다. 수고나 피곤함을 모른 채 정의와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아주 민첩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은총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조직력과 기동력을 뜻합니다. 

 

  네 번째는 ‘사무침’의 은총으로써, 영적인 몸은 시공의 제약에 갇혀있지 않고 이를 넘나드는 통공의 자유로움을 구사합니다. 무덤을 비워놓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문을 잠가놓은 방을 자유로이 드나드신 데에서 볼 수 있는 이 은총은, 사도 바오로도 이렇게 증언한 바 있습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1코린 15,44).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은총은 두려움으로 움추러든 마음을 넘어서는 통공과 연대의 힘을 뜻합니다. 

 

7. 오늘날 우리는 어디서 발현 체험을 할 수 있는가 

그 옛날 여인들과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들이 발현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지 물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성령의 네 가지 놀라운 은총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실 곳은 어디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곳은 주님의 현존이 나타나는 다섯 가지 표지가 있는 곳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역대 교황들, 특히 프란치스코 현 교황께서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현존 양식을 다섯 가지로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십자가 죽음의 충격과 좌절에 빠져 엠마오로 가고 있을 때 나그네 차림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메시아의 수난이 이미 기약되어 있었음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루카 24,27. 受難旣約). 그제서야 제자들은 마음이 뜨거워져서 그 충격과 좌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루카 24,32). 이처럼 말씀은 반드시 실현되고야 만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둘째는 성체성사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앞두고 축성하신 빵과 포도주는 십자가에서 못박히실 당신의 몸과 그 몸에서 흘러나올 피를 뜻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체성사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자기자신을 봉헌하신 제사를 봉헌하는 것이고, 우리도 그분처럼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기운을 얻습니다. 그분의 뜻을 기억하고, 그분께서 하신 일을 기념함으로써,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을 행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셋째는 사랑의 섬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 전날 저녁에 최후의 만찬을 드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손수 씻어 주시며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고 상호 섬김의 윤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이 섬김의 사랑을 행하면 그것이 바로 당신에게 베푸는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최후의 심판 때에 누구도 예외없이 이 기준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일러주셨습니다. 

 

  넷째는 서로의 신앙감각을 존중하는 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6년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에게 보내신 문서에는 세례 받은 모든 신자에게는 성령께서 머물고 계시므로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 직분을 넘어서서 서로를 존중하는 일이야말로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이라는 가르침이 들어 있었습니다. 

 

  다섯째는 공동합의성의 구조를 이룩하는 일입니다. 서로의 신앙감각을 존중하며 사랑의 섬김을 행하는 사도직에 있어서, 서로에게 성령께서 이끌어주시는 지혜를 공유하고 나누어서 공동으로 합의할 수 있는 구조, 그래서 세상의 질서보다 더 인격적이고 더 민주적인 구조로 마음을 일치시킬 수 있을 때,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믿음이 약하고 용기도 부족했던 당신 제자들을 끝까지 기다려주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가 존속할 수 있었고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2018년에 교황께서 발표하신 문서의 주요 내용이 이것입니다. 

 

  교우 여러분, 여기에 우리의 부활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빈 무덤 체험의 좌절을 딛고, 발현 체험의 기쁨으로 용약하는 부활절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여, 우리 부활 시키소서!”(성가 134번. '거룩하다 부활이여, 4절)

 -조재형신부-


한국의 자동차에는 대부분 있는데 미국의 자동차에는 대부분 없는 것이 있습니다. ‘Black Box'입니다한국에서는 블랙박스가 있으면 자동차 보험료를 할인받습니다저도 블랙박스를 설치하였고그것을 사진으로 찍어서 보험사에 보낸 적이 있습니다. 3년간 미국에서 살면서 블랙박스가 있는 차를 거의 보지 못하였습니다블랙박스가 있으면 자동차 사고가 났을 때 서로 언성을 높일 일이 거의 없습니다블랙박스에 사고의 영상이 녹화되어 있기 때문입니다보험사나 경찰이 와서 운전자와 이야기할 것도 거의 없습니다영상을 보고 확인하면 되기 때문입니다미국은 사고가 나면 경찰이 오고경찰에게 사고 경위를 설명해야 합니다.

 

한국의 길거리에는 대부분 있는데 미국의 길거리에는 대부분 없는 것이 있습니다. ‘CCTV'입니다한국의 길거리에는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어서 범인을 찾기에 용의하고실종된 사람의 이동경로를 찾기도 수월합니다미국은 카메라가 거의 없기 때문에 범인을 찾는 것이 쉽지 않고실종된 사람의 이동경로를 찾기도 어렵습니다미국과 한국 사회의 차이는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개인의 자유보다는 사회의 안전을 우선하는 문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은 주님 부활대축일입니다초대교회는 주님의 부활을 증거나 증인의 관점에서 바라보지 않았습니다주님의 부활을 믿음과 변화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그래서 주님의 부활은 신앙의 신비가 되었습니다믿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은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내가 변하지 않으면 주님의 부활은 그저 지나간 이야기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그래서 초대교회는 빈 무덤을 이야기합니다믿음이 없으면 빈 무덤은 텅 빈 무덤으로 남습니다그곳에서 주님의 부활을 찾을 수 없습니다내가 변하지 않으면 빈 무덤은 텅 빈 무덤으로 남습니다그곳에서 주님의 부활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에 기고한 이호자 수녀님의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약함 안에서 드러나는 힘그리스도의 희생의 힘살아있는 실재인 그분의 희생적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한다는 것은 십자가가 종착점인 양그리스도의 삶과 희생이 더 이상 아무 영감도 줄 수 없는 절망적인 낭패이고 무의미하고 부조리한 패배인 양 살아가는 것입니다.(토마스 할리크의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에서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마음의 문을 꼭꼭 잠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영의 눈이 어두웠고 아직도 비몽사몽 비참한 죽음의 골짜기만을 응시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가 감옥에서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입니다. “자네내가 감옥에 갇혀서 마음이 부서졌을 거라고 걱정했지마음은 부서지게 되어있는 거라네우리가 살아간다는 것은 마음을 부서지게 하는 과정이지내가 이 감옥에서 괴로워하는 이유는 부서진 마음이 아니라 절대로 부서지지 않겠다고 감옥 담보다 더 지독한 콘크리트 담을 마음에 쌓은 이곳 사람들의 부서지기를 거부하는 마음 때문이라네우리의 마음이 절대로 부서질 수 없게 무장되었을 때 우리의 삶은 그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네.” 세상에는 부서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과 스스로 부서져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무덤으로 향해 달려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봅니다실망하여 낙담하며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이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면서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날이 이미 저물었으니 함께 머물고 가면 좋겠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벅찬 감격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무덤으로 달려간 두 제자는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그러나 아직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근심과 걱정이라는 담을 높이 쌓았기 때문입니다그래서 주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토마스 머튼은 오직 하나의 참된 기쁨은 자기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아라는 무덤 속에서 나와야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그렇습니다마음에 근심걱정두려움욕심교만함이 가득한 사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도 믿지 못합니다마음을 비우고 믿으면 봄에 피는 꽃을 보듯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사제가 사제답게수도자가 수도자답게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는 것이 곧 그분의 부활을 믿고선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부활성야 -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이영근신부-


이는 유대인들의 '세다 예식' 중에 있는 질문입니다.

'세다 예식'이란 파스카 축제 첫날 밤, 온 가족이 식탁에 둘러앉아 하는 가족 식사를 말합니다.

이 식사에서 아버지는 가족들에게 '출애굽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이 질문을 던집니다.

“오늘 밤은 왜 다른 밤들과 다른가?”

 

오늘 우리도 이 질문을 던져 봅니다.

대체 이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지금 우리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톨스토이가 쓴 글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나운 임금님이 사제들에게 명령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있도록 해 달라."

그러나 사제들은 임금님에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 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양치기가 그 문제를 해결해주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임금님께서는 눈이 좋지 않아서, 하느님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말했습니다.

"하느님을 볼 수 없다면 하느님이 무엇을 하는 지만이라도 알고 싶구나."

 

그러자 양치기는 말했습니다.

"그 질문에 대답하려면, 임금님과 제가 서로 옷을 바꾸어 입어야만 합니다."

임금은 서슴지 않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자 마침내 양치기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느님은 이런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하느님은 이처럼 ‘거룩한 바꿈’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늘 밤 우리에게 ‘거룩한 바꿈’을 이루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죽음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당신의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랍고, 이 얼마나 고귀한 교환입니까?

 

이제 우리의 몸은 거룩한 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그리스도를 입었습니다.’(갈라 3,27).

‘새 인간’을 입었습니다(골로 3,10; 에페 4,24).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죽음을 취하시어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습니다. ~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는 까닭입니다.”(콜로 3,1-3 참조)

 

이 교환을 가리켜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의 죽음은 그분의 것이 되었고, 그분의 생명은 우리의 것이 되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으로 부활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밤 우리에게 일어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오늘 우리에게 이루신 사랑입니다.

 

부활한다는 것은 단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 생명을 연장해 간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화된 생명,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의미합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 우리는 새로이 탄생되고 변화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정한 의미의 '생일'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의 사랑으로 이루어진 참으로 거룩한 생일, 거룩한 변화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 내가 여러분에게 신비 하나를 말해주겠습니다.

우리 모두 죽지 않고 다 변화할 것입니다.”

(1코린 15,51)

 

이토록 부활은 단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바꾸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 밤은 참으로 기묘한, 참으로 거룩한 교환의 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만들어낸 참으로 기묘한, 하늘과 땅이 결합되고 하느님과 인간이 결합된 밤입니다.

하느님의 끝 모르는 사랑이 이루신 빠스카의 밤입니다.

 

그렇습니다.

거룩한 이 밤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임이 바로 부활입니다.

이처럼 부활은 신앙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부활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것이 곧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바로 지금 거룩한 교환이 일어납니다.

바로 지금 새로운 창조와 새로운 탄생의 대전환의 삶이 피어납니다.

바로 지금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밤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다름 아닌 숨겨져 있던 우리의 생명이 다시 살아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알렐루야!

「지금 여기서 살아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이 기쁜 날을 경축하면서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 기쁨이 여러분 가정과 온 세상에 충만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부활축하의 인사를 나누시지요.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부활이 기쁘십니까? 왜? ‘나도 부활할 수 있기 때문이죠.’ 영원생명에 대한 희망을 안겨준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사순절이 끝나서 기쁘답니다!!!!” 절제와 희생을 하는 것이 만만치 않았었나 봅니다. "스스로 깨면 병아리, 남이 깨면 후라이!"랍니다. 매일 매 순간의 삶이 부활이길 희망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삶의 결과라면 부활은 사랑의 승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실패와 저주의 상징인 십자가를 희생과 속죄, 구원의 십자가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 십자가를 구원 받을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드러내 주셨습니다. 십자가를 통한 사랑이 결코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셨고 아울러 주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부활하리라는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역사의 절정이자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우리 기쁨의 원천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은 온 인류에게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5-26) 하고 선포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로 죄와 죽음의 지배는 사라지고 영원한 세계로의 희망이 열린 것입니다. 인류는 주님의 부활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부활소식은 우리 신앙의 토대이며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부활의 생명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합니다.“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코린15,14)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으면 우리의 가르침도 헛되고 믿음도 헛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조건 없는 사랑의 삶이 결코 헛되지 않음을 드러내주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의 죽음이 결국 사랑의 승리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주님의 부활은 또한 우리의 부활을 보증합니다. 당신 친히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하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우리에게 부활이 선물로 주어졌다는 것은 더없이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여기서부터 부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의 기쁨을 누리려면 먼저 ‘해묵은 내가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합니다. 인간적인 욕심과 교만, 시기질투, 이기심에 죽고 절제와 겸손, 온유와 사랑으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의 무덤에서 나와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활을 살지 못하는데 어찌 훗날의 부활을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

우주 비행사 ‘가가린’이 지구에 돌아와 “아무리 우주를 돌아보아도 하느님은 안 보이더라”하였습니다. 그러자 한 신부님이 “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보지 못하면 아무리 우주를 많이 돌더라도 하느님은 볼 수 없다.”라고 하였답니다. 부활의 기쁨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부활의 위대한 진리는 우리가 죽은 뒤에 새롭게 사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부활의 능력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사는 것보다 우리가 영원히 살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 여기서 고귀하게 살아야 하고, 또 살 수 있는 것이 부활의 큰 진리입니다”(미국 필립스 브룩스주교).

오늘 복음을 보면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습니다.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거기 계시지 않았습니다. 무덤이 비었기 때문에 부활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비었습니다. 죄와 죽음의 힘도, 무덤을 막았던 육중한 돌도, 무덤을 지키던 병사들도 주님의 부활을 막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좌절과 절망을 가져왔지만 부활로 희망을 안겨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덤의 삶에서 나와야 합니다. 어둡고 침침한 부정적인 생각에서, 미움과 분노에서 맑고 밝은 긍정적인 생각, 희생과 봉사, 사랑의 삶으로 나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운 기억에서 나와서 영원한 천상행복의 약속된 미래를 보고 오늘을 주님의 사랑으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수난은 현세 생활의 수고와 고통과 죽음의 운명을 가리킵니다만, 주님의 부활과 그 영광은 우리가 받을 영원한 생명”(성 아우구스티노)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하느님께서는 지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도구삼아 이 세상을 사랑하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께서 약속한 영원한 생명을 ‘오늘 여기서’ 살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시길 성모님의 전구를 청하며 다시 한 번 부활을 축하드립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부활』

 -송영진신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부활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몹시 바쁘게 돌아다니신 것처럼 보입니다.

제자들에게 잠깐 나타나셨다가 금방 사라지시는 일을 반복하는 모습이

그렇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무덤에서 나가신 뒤에,

무슨 일로, 어디를 그렇게 바쁘게 다니셨을까?

당시 제자들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예수님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분,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일은,

그들이 예수님을 찾아다녀서 발견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에 이루어진 일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뒤에 어딘가를 바쁘게

돌아다니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줄곧 제자들과 함께 계셨는데,

제자들 쪽에서 알아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것을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입니다.

그 두 제자는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데도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루카 24,16).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자마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루카 24,31).

그때 그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갑자기 사라지셨는데도 놀라지 않았고,

아쉬워하거나 서운해 하지도 않았고, 슬퍼하지도 않았고, 곧바로 사도들에게

가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루카 24,35).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살아 계신다는 것을

확신했을 것입니다.

그것을 ‘예수님 현존 체험’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바라시는 ‘부활 신앙’은

바로 그 두 제자들이 갖게 된 것과 같은 믿음일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공을 초월해서, 또 인간의 감각을 초월해서,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입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가서

보니,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에게 달려가서 말하였다. ‘누가 주님을

무덤에서 꺼내 갔습니다. 어디에 모셨는지 모르겠습니다.’(요한 20,1-2)”

 

여기서 ‘아직도 어두울 때’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 때문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져 있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심리 상태를 상징하기도 하고,

마리아가 아직은 부활 신앙이 없었음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지금 마리아가 찾고 있는 예수님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아니라,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신’입니다.

마리아는 무덤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없게 되자

‘더 큰 상실감’에 빠지게 됩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박해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훼손하거나 모독하려고

옮겨 간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큰 슬픔에 빠져서 울고 있었던 것으로(요한 20,11) 생각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예수님의 죽음 때문에 큰 충격과 슬픔에 빠진 것과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져서 더 큰 슬픔에 빠진 것을 탓할 이유는 없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사도들과 신자들 모두에게

대단히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부활 신앙’이 없었던 것을 탓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부활 신앙’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슬프고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사별의 슬픔’은 믿음에 관한 일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성입니다.

그렇다면 ‘부활 신앙’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

부활과 내세를 안 믿는 사람은 죽음 앞에서 절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나 부활과 내세를 믿는 사람은 이별을 슬퍼하면서도

언젠가는 다시 만날 것이라는 희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바로 그 희망과 절망의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은 ‘희망’입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는 밖으로 나와 무덤으로 갔다. 두 사람이 함께 달렸는데,

다른 제자가 베드로보다 빨리 달려 무덤에 먼저 다다랐다. 그는 몸을 굽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기는 하였지만,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시몬 베드로가 뒤따라와서 무덤으로 들어가 아마포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예수님의 얼굴을 쌌던 수건은 아마포와 함께 놓여 있지 않고,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 그제야 무덤에 먼저 다다른 다른 제자도 들어갔다. 그리고 보고

믿었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요한 20,3-9).”

 

베드로 사도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다는 마리아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으로 그쳤는데,

‘다른 제자’의 경우에는 ‘보고 믿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보고 믿었다.’ 라는 말은,

‘빈 무덤’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베드로 사도와 마리아 막달레나는

‘빈 무덤’을 보고서도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루카복음을 보면, 베드로 사도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루카 24,12).”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다는 ‘다른 제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혼자서만 간직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아직 ‘확신’의 단계가 아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기 전의

제자들의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어수선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기대감과 믿어지지 않는 마음과 믿고 싶은 마음 등이

섞여 있는 혼란스러운 분위기.

그것은 의심, 또는 기대가 믿음으로, 믿음이 확신으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겪는 일입니다.

<사도들과 신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게 된 것은,

‘빈 무덤’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그 순서가 바뀌어서,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예수님 현존 체험’을 하게 됩니다.>

"되살아나셨다."(루카 24, 6)
-한상우신부-


되살아나는
부활의 열쇠는
다름아닌 삶의
십자가이다.

삶을 삶으로
풀어가는
십자가이다.

떨리는
십자가는
주님의 참된
사랑이며

어김없는
하느님의
약속이었다.

얼어붙은
겨울의 십자가
여기 저기에서
봄꽃이 향기롭게
가득 피어난다.

연두빛
새순도
돋아난다.

연두빛으로
빛나는
생명의 물결이
바로 부활의
힘찬 물결로
다가온다.

십자가와
부활은 늘
함께있다.

어둠과
빛 또한
함께있다.

십자가를
다시
보게되는
부활의 감격이다.

희미해져가는
십자가의 믿음을
되살려놓는
엄청난 부활의
힘이다.

무엇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따라가면
반드시
부활이 있다.

예수님께서
목숨을 지불한
부활이다.

십자가의
뜨거운 발자국이
부활의
빛나는 풍경이
되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함께하신다.

사랑하는 법을
모르는
우리들에게
십자가로
가르치시고
부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하신다.

십자가로
소통하시고
부활로 참된
삶의 아름다움을
되찾아주신다.

삶이 따뜻하고
아름다워지는
사람의 길이
부활의 길이다.

예수님의 부활로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되었다.

하느님을 믿기에
십자가에
감사드리며
가장 중요한
사랑을
나누게 된다.

사랑의 실천이
되살아나신
부활의
참된 핵심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십자가로
살아가며
십자가로
부활의 문을
여는 사랑을
믿는 것이다.

되살아나는
뜨거운 십자가
사랑의 부활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외면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진실한
사랑이다.

진실한 사랑
부활하신
사랑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이다.

십자가로
지켜내신
사랑의 승리
쏟아져내리는
부활의 일상이다.

예수님께서
참으로
되살아나셨다.

우리 삶의
한가운데에서
만나는 삶의
부활이다.

작은 부활

-김찬선신부-

 

제가 늘 생각하고 주장하는 것은 주님 성탄이건 부활이건

2천여 년 전 베틀레헴과 예루살렘의 그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의 나에게서 발생해야 그것이

참으로 내게 의미있는 성탄이고 부활이라는 겁니다.

 

물론 2천 년 전 베틀레헴의 그 첫 성탄이 없었다면

유다인의 하느님을 대한민국의 내가 믿을 이유가 없어서 믿지 않을 터이니

2천여 년 전에 주님 탄생은 너무도 중요하고 의미가 있으며 부활도,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예루살렘의 그 첫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의 믿음이 근본적으로 헛된 것이 되니 역사적인 부활이 무엇보다 의미 있지요.

 

그런데도 주님의 성탄과 부활은

여전히 우리 안에서 발생해야 우리에게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천하의 명약이 2천 년 전에 발명이 됐어도

먹어야 그 약효가 내 안에서 효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명약이 발명되지 않아도 문제지만

약을 먹지 않아도 문제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안에서 주님께서 부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뭣 때문일까요?

그것을 저는 어제 새벽에 묵상하다가 깨닫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제 안에서

부활하시지 못하는 이유가 아이러니하게도 한 번도 주님이 제 안에서

죽으신 적이 없기에 다시 살아나시지도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부활이란 말이 다시 살아난다는 뜻이니

부활은 죽음이 있어야 다시 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주님께서 제 안에서 돌아가신 적이 있어야 다시 사시는데

주님께서 제 안에 아니 계신 적이 없고 늘 함께 계시는 분이기에 그리된 것입니다.

 

문제는 제 안에 늘 계시는 그분이 살아계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죽어 제 안에 안 계셨다면 저도 어떤 식으로든 주님을 살려냈을 텐데

비록 가죽음 상태로라도 계시기에 그것만 믿고 문제의식 없이 살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이번 성삼일 제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깨달온 것이고,

그래서 한편 부끄러웠지만 다른 한편 참으로 기뻤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번에 제가 체험한 주님 부활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깨달음은 가죽음 상태의 주님을 확실히 죽이고

참생명의 주님이 내 안에서 다시 살아나게 해야겠다는 깨달음이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가죽음 상태의 주님을 죽여야 할까요? 방법이 뭘까요?

이제와서 니체처럼 신은 내게서 죽었다고 선언하면 그것으로 될까요?

 

그것은 안 될 일이고, 억지춘향입니다.

내 안에 엄연히 계신 주님을 사형 선고 내린다고

그 주님이 죽지 않음은 물론 그러고는 제가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다시, 어떡해야 합니까?

어떻게 주님을 죽이고 어떻게 살려내야 합니까?

 

잘 생각해보니 주님께서 제 안에서 가죽음 상태로 계신 이유가

내가 살아있기 때문이니 내가 죽으면 되겠습니다.

 

원래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시기에 나도 사는 저이어야 하는데

내가 살아서 주님이 기죽어 계시는 상태가 바로 저였습니다.

그러니 내가 죽어야 죽어 계신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그런데 나를 죽여야지 하고 마음먹는다고 내가 죽지 않습니다.

마음먹은 것이 한두 번 아니고 노력 안 한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러므로 마음은 먹되 주님께서 죽여주실 때 그 죽음을 거부하지 않음이 하나요.

죽여주실 때 그것을 잘 알아채고 순순히 죽는 것이 다른 하나입니다.

 

왜냐면 우리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내가 죽어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산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스스로는 죽지 못하는 것이 보통의 우리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사관을 스스로 따지 못하여 따주는 다른 사람이 필요하고,

스스로 죽지 못하기에 안락사를 돕는 다른 이가 필요하듯

죽여주는 존재가 필요한데 하느님께서 우리를 죽여주시고

그때 우리는 죽여주시는 주님의 그 은총을 은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해서 돌아가신 주님이 제 안에서 살아나는 부활 체험은

일생일대의 큰 체험이고 이런 부활을 우리는 큰 부활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큰 부활 체험을 하고

그래서 저처럼 주님께서 내 안에 늘 계시지만

가죽음 상태로 계신다면 작은 부활도 있어야겠습니다.

말하자면 일상의 부활이요 그때그때의 부활 말입니다.

 

살다 보면 깜빡깜빡 주님을 까먹어

주님께서 죽어 계시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수녀원에 오면서 부활 선물로 돼지고기와 저희가 키운 콩나물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고 잊지 않으려고 며칠 전부터 신경 썼습니다.

 

그런데 와서 보니 돼지고기만 가지고 오고 콩나물은 안 가져 왔으며,

한심하게도 수도자가 정작 수도복을 안 가지고 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광야 체험을 하고 돌아오면서 수도복과 콩나물을

가지고 와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또 와서 보니 콩나물만 가지고 온 것입니다.

 

이처럼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도 그보다 하찮은 것에 신경 쓰다가 까먹는 것이

인간이고 특히 저인데 하느님도 종종 이렇게 하찮은 것들 때문에 까먹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님을 까먹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은 부활하십니다.

 

기도하는 대신 걱정하고 있는 것을 깨닫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갈망하는 대신 욕망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사랑해야 하는데 일하고 있는 자신을 보는 순간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십니다.

 

이렇게 까먹은 주님을 다시 살려내는

일상의 부활이요 작은 부활을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이번 부활절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4월 21일 예수 부활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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