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1월 23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11. 23. 07:40

2021년 11월 23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가 21,5-11)

 

 Jesus said, 
“All that you see here?

the days will come 
when there will not be left
a stone upon another stone 
that will not be thrown dow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다니엘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꿈을 풀이하며, 하느님께서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려 주신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다 허물어질 것이라고 하시며, 그 전에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 커다란 슬픔에 빠진 사람에게 “시간이 약이야.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라고 위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솔직히 시간이 지나도 괜찮아 지지도 또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위로를 건네는 사람에게 “감사합니다”라는 대답만 하고 속으로는 ‘그런 말은 전혀 위로가 안 됩니다.’라고 속삭이게 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정말로 시간이 약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슬픔이 무뎌지고 힘차게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시간이 약일까요?


시간이 흐르면서 단단해진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단단해진 상태의 나로 문제를 바라보고 처리하니 슬픔을 너머 새로운 일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잊으려고 할수록 더 기억나게 됩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더 기억하면서 단단한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요? 실제로 고통과 시련으로 더 단단해지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성공을 이룬 사람에게 고통과 시련이 전혀 없었을까요? 수많은 아픔을 기억하면서 단단해졌기에 성공도 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픔을 동반하는 순간, 나의 단단해짐을 떠올려 보십시오. 또 하나의 희망을 만들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가 단단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을 보면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을 구경시켜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 출신이 갈릴래아라는 시골 출신이었기에, 그 성전의 위상에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저도 어렸을 때, 서울에 가서 높은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서울이 다르긴 다르구나.’라면서 두리번거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자들도 그러했겠지요. 그런데 이렇게 아름답고, 웅장한 이 성전이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더군다나 하느님이 거처하시는 곳으로 알고 있었던 성전이 무너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말씀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웅장한 성전 역시 영원한 것이 아님을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것은 주님뿐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것에만 연연하면 할수록 고통과 시련에 흔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함으로 그 시간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단단합니까?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면, 주님 안에서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시는 삶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주는 희망을 보게 될 것입니다.
내 삶의 규칙은 일을 즐거움으로 만들고, 즐거움을 내 일로 만드는 것이다(에런 버).

 


모닝콜

 


새벽 다섯 시. 휴대전화 벨이 울립니다. 받으면,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축일 날, 가장 이른 축하의 인사를 늘 부모님께 이렇게 받았었습니다.

연로한 부모님 걱정에 매일 부모님과 통화할 생각으로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이제 새벽에 잘 못 일어나요. 5시에 모닝콜 좀 해주시면 안 될까요?”

그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모닝콜을 해주셨고, 이를 무척이나 즐거워하셨습니다. 아들 신부 도와주고 또 새벽에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너무 좋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4시 전에 일어나기에 5시에 굳이 모닝콜을 받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좋아하시니 계속하실 수 있도록 부탁을 했었습니다.

작년 4월 15일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고, 올해 8월 21일에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새벽의 모닝콜 전화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지난 9월 21일 축일 때 괜히 서글퍼졌습니다. “신부님! 축일 축하해요.”라는 부모님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부족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그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더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해봅니다.

 인간만이 지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심판의 에 대한 제자들의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제자들은 마지막 때의 표징을 묻습니다예수님은 당신이 나타났다고 해도 신경 쓰지 말고 전쟁이 일어나도또 전염병이 돌아도 신경 쓰지 말라고 하십니다때가 되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하늘의 표징이 있으리라는 것입니다이 말씀 안에는 왜 죽음의 때를 알려고 하느냐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물론 지금 일어나는 일들을 보면 마지막 때가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미래의 그때가 아닙니다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입니다

    예수님은 종말이나 죽음이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해 주는 은총으로 여기길 바라십니다누구에게나 있을 죽음은 정말 잘만 사용하면 진정 동물과 구별될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은총입니다.

  

    세상 모든 동물 중에 죽음 때문에 지금의 삶의 태도를 결정하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습니다다른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살다가 죽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면 순응하고 죽습니다죽음을 미리 생각하며 지금의 삶을 변화시키려 하지 않습니다그래도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죽기 싫어서 발버둥 치는 동물은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죽음이라는 것 앞에서 수많은 삶의 태도들을 취합니다인간은 죽음의 결과가 다 똑같지 않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그래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여러 형태의 삶의 모습을 보입니다저는 인간의 삶의 선택이 근본적으로 각자의 죽음에 대한 반응이라 생각됩니다죽음은 분명 지금 삶의 선택을 하게 만듭니다.

  

    영화 올드’(2021)는 시간이 엄청나게 빨리 흐르는 한 해변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혼을 결심한 프리스카는 남편 가이와 어린 자녀 둘과 함께 3일간 외딴섬 휴양지로 마지막 휴가를 떠납니다. 프리스카의 가족 말고도 많은 이들이 휴양지로 모여듭니다. 여기서는 기이한 일이 일어나는데 30분이 마치 1년처럼 시간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들은 휴양지 리조트를 운영하는 제약회사의 초청으로 이곳에 온 이들입니다그런데 이들 가족 중 일부는 간질이나 암정신병 등을 앓고 있었습니다제약회사에서 희귀한 광물로 둘러싸인 시간이 빨리 흐르는 이곳에 그들을 넣어놓고 자신들의 신약을 임상시험하고 있었던 것입니다신약의 임상시험이 시간도 꽤 오래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는 여러 형태의 모습을 보입니다탈출하고 싶어 절벽을 통과하려고도 하고 기어오르려고 하고 바다로 헤엄쳐서 나가려고 합니다그러나 모든 시도는 실패합니다그냥 있으면 며칠은 살 수 있는데 그런 시도를 하다 더 빨리 죽습니다.

  

    또 어떤 이는 이 모든 것이 함께 있는 사람들의 탓이라고 여기고 정신발작을 일으킵니다그래서 닥치는 대로 칼을 휘두르며 사람을 죽입니다그러나 아이들을 지키려는 프리스카와 가이에 의해 그도 죽습니다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어 어른들만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그리고는 아이를 뱁니다아이가 아기를 배고 뭔가 자신들도 큰일을 이뤄낸 것처럼 당당해 합니다하지만 아기는 시간의 빠름을 견디지 못하고 먼지가 되어버립니다.

  

    프리스카와 남편 가이와 두 성장한 아이들만 남은 상황에서 부부는 해변을 바라보며 이런 대화를 나누며 지난날을 화해하고 죽어갑니다프리스카가 노래합니다.

    “사랑의 큐피드가 쏜.”

남편 가이가 말합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싸웠지다 잊어버렸네이유가 뭐였든 나는 당신에게 화 풀렸어우리 왜 이 해변을 떠나려고 했지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들 부부는 자신들에게 남은 짧은 시간을 자녀들을 위해, 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데 썼습니다남은 자녀들은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알고는 그곳을 탈출하여 제약회사를 신고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란 말이 있습니다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뜻입니다이 능력은 오직 인간에게만 있습니다미래에 있을 죽음을 지금이 순간으로 당겨서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래서 단순히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니라 어차피 끝나는 삶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죽음을 현재에 두지 않고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생존을 위해 삽니다그러나 어차피 지금 죽을 수도 있다고 여기면 조금 더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하게 됩니다예수님은 그런데 왜 자꾸 죽음을 미래로 여기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보물들이 있습니다난파된 오래된 배에서 떠내려온 청나라 자기들인데 그것들의 가치는 하나당 수억 원에 이릅니다그런데 처음 발견한 어부들은 그 가치를 모르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하였습니다그러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우리 육체는 그릇과 같습니다그 안에 영혼이 있고 또 그 안에 마음도 있습니다마음에 담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하느님처럼 고귀한 사람이 되고 마음에 미움을 담으면 생존만 생각하는 동물과 다름이 없습니다.

  

    손에 물 한 번 묻혀보지 못한 상류층 유대인 부인이 나치 수용소에서 자신보다 더 힘든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빅터 프랭클이 물었습니다.

    “고생 한 번 못해본 사람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납니까?”

    “저는 평생 남의 도움만 받고 살아서 진짜 인생을 모르고 살았습니다하마터면 인간이 어떻게 싸우고 밥 먹고 살아가는지 모를 뻔했습니다이것을 알게 해 준 신에게 감사합니다.”

  

    고통이 올 때 사람들은 수용소에서 여러 자세를 보입니다탈출하려고 하고 절망하고 미치기도 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귀한 자세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자신이 먹을 것도 없는데 더 배고픈 이에게 주며 자신에게도 이런 면이 있음에 스스로 놀라기도 합니다어차피 죽는데 나의 가치를 생존만이 아닌 더 고귀하게 만들어 보자는 결단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인간만이 줄 수 있습니다그리고 그 도구가 죽음을 기억함입니다이 죽음을 미래에만 두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가장 큰 선물을 썩히게 됩니다그러면 마지막 때 발버둥 칠 것이 분명합니다

    미래의 죽음을 현재로 끌어와 자신의 가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면하느님께서 죽음이란 것으로 인간이 더욱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죽음을 기억할 수 있는 은총을 그냥 흘려버리지 맙시다날마다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고 살면 저절로 자신의 존엄성을 높여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https://youtu.be/5meqW03SIpg

유튜브 묵상 동영상

 -조재형신부-

 

성령대회를 다녀온 날입니다여느 때처럼 산보를 나섰습니다집에 거의 돌아올 무렵입니다횡단보도의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어서 자연스럽게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우회전 하는 차가 저를 미처 보지 못하고 다가왔습니다차를 보고 있으면서도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다행히 큰 사고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병원에 가서 사진도 찍어보았습니다약간의 타박상만 있었습니다물리치료를 받으면 될 것 같았습니다병원에서 혈압을 재 보았고혈압이 높다는 것을 알았습니다한동안 복용하지 않았던 혈압 약을 복용하라는 권고를 받았습니다성령대회를 다녀왔기에 천만다행으로 이 정도 사고로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합니다바다의 별이신 성모님께서 사고의 순간에 저를 위해서 전구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성령대회 때 한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자매님에게는 거동이 불편한 아들이 있었습니다가정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한숨과 원망이 있었습니다어느 날 자매님은 기도 중에 반은 썩어 있는 사과를 보았다고 합니다생각하니 그 사과는 썩어가는 자신의 영혼이었다고 합니다그 즈음 교우들이 주었던 여호수아서의 말씀이 다가왔다고 합니다. “내가 너에게 분명히 명령한다힘과 용기를 내어라무서워하지도 말고 놀라지도 마라네가 어디를 가든지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있어 주겠다.(여호수아 1, 9)” 그리고 20년 전 세례 받았을 때 한 자매님으로부터 받았던 편지도 생각났다고 합니다편지에는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너는 세례를 받으면서 나의 자녀가 되었다그러니 모든 근심과 걱정을 모두 나에게 맡겨다오앞으로도 있을 고통과 근심도 모두 나에게 맡겨다오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돌아보니 그 아들은 한숨과 원망이 아니었다고 합니다하느님께 의탁하고하느님을 따르는 은총이었다고 합니다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아들이 있어서 가족이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아들이 있어서 낯선 곳에서의 생활도 이겨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매일 묵주기도를 봉헌하면서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청하는 자매님께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함께 하시기를 청하였습니다.

 

확실한 암호라는 책을 읽었습니다영원한 생명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암호를 알게 된 사연을 이야기 한 책입니다사제수도자평신도들께서 자신들이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를 꾸밈없이 이야기 합니다그럼에도 감동이 있는 글들입니다숨은 그림을 찾는 것처럼이야기 속의 사람들은 저마다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암호를 이웃 안에서내면의 부르심 안에서때로는 시련과 고통 중에서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찾아내었습니다암호를 발견하기 전의 삶은 무의미하고 허망하였지만암호를 발견 한 후의 삶은 희망과 기쁨이 계속된다고 이야기 합니다우리는 주변에서 확실한 암호를 알고 계시는 분들을 볼 수 있습니다차를 운전하기 전에 성호를 긋고기도한다면 그분은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손에 스마트 폰 대신묵주를 들고 버스틀 타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사랑받기 보다는 먼저 사랑하려고 하고이해받으려 하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려는 분도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불평하기 보다는 그럴 수도 있지라고 받아들이는 사람은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떨어지는 낙엽에서도하늘을 날아가는 구름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다면 또한 암호를 알고 있는 분입니다하느님은 당신의 암호를 참 많은 곳에그리고 쉽게 찾을 수 있도록 남겨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 바다 깊은 곳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놓으신 것이 아닙니다우주의 은하에만 당신의 암호를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철학의 논리 속에수학의 규칙 속에과학의 심오함 속에만 숨겨 놓으신 것이 아닙니다어린아이의 웃음에도작은 들꽃에도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에도 하느님의 암호는 있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암호를 우리들만 간직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누구에게나조건 없이 그 암호를 나누어 주어도 좋아하십니다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언젠가 우리가 만나야 될마지막 순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 하고 말할 것이다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그리고 너희는 전쟁과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더라도 무서워하지 마라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그 끝에서 하느님과 대면할 날을 맞이할 것입니다그러나 걱정은 없습니다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암호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양승국신부-

 

웅장하고 화려하기로 유명한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와 관련된 예수님 예언의 말씀은 참으로 섬뜩합니다. 그 휘황찬란하고 으리으리한 대성전이 어느 날 돌 하나 남아있지 않고 허물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예언대로 예루살렘 성전은 오래 가지 않아 이방인들의 침략 앞에 무참히 파괴되고 훼손되었습니다. 자신들 최후의 보루요 목숨 같던 성전,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었던 성전이 파괴되고 유린됨으로 인해 유다인들이 받았던 충격과 트라우마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예수님께서는 철저하게도 파괴된 그 자리에 새로운 성전, 아버지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아름다운 성전을 재건축하시려는 큰 의도를 지니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지고 보니 비참하고 굴욕적이지만 종종 파괴도 필요합니다. 그 위에 더 이상 무너지지 않는 불멸의 성전 건립을 위해서는 속화되고 타락한 성전의 파괴는 필수입니다.

  

놀랍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몸과 피를 통해, 당신 존재 자체를 통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참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의 이 세상 육화강생, 그리고 수난과 죽음, 부활과 승천을 통해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전을 건설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가장 아름다운 성전이십니다. 그분께서 제정하신 성찬례가 거행되는 모든 곳을 가장 아름다운 성전입니다. 뿐만아니라 매일 그분의 몸과 피를 지극정성으로 영하는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가 또한 주님 마음에 꼭 드는 성전입니다.

  

우리를 너무나도 극진히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옛날 속화되고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셨듯이, 가끔씩 배은망덕하고 불충실한 우리를 향해서도 파괴의 망치를 손에 드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주님께서는 철저히 파괴된 그 자리에 당신 마음에 드는 새 성전을 반드시 재건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어, 성전에서 하신 긴 담화의 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예루살렘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과 세상 종말이 오기 전의 표징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

(루카 21,6)

 

옛 솔로몬 성전은 느부갓네살에 의해 기원전 586년에 파괴되었고, 예수님 당시의 성전은 유배에서 돌아온 이들에 의해 기원전 515년에 즈루빠벨의 치하에서 재건된 제 2성전이었습니다.

이 성전은 헤로데 왕에 의해 기원전 19년부터 확장되고 웅장하고 화려하게 꾸며지면서 그 본래의 의미를 잃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성전의 파괴를 예고하십니다.

사실 성전 파괴에 대해서는 예언자 미카, 예레미아, 에제키엘 등에 의해서 이미 예고된 바 있습니다.

 

이제 그 때와 표징을 묻는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내가 그리스도다.’, 또 ‘때가 가까웠다.’하고 말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말라.”

(루카 21,8)

 

이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에게 속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이비 메시아는 누구일까요?

 

우리는 재물이라는 우상을 사이비 구세주로 따르고 속아 넘어가고 있지는 않는지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세상에는 “돈을 많이 벌게 해주겠소.” 하고 외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결국 우상을 따르고 섬기도록 부추기는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고 있는 꼴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입으로는 주님을 구원자라 고백하지만, 정작 무엇에 목매달고 쫓아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또 재물뿐만이 아니라 세속 정신을 사이비 메시아로 따르고 섬기고 있을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로마 12,2)

 

또 우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고약한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가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녀석입니다.

우리는 곧잘 자신의 욕망과 생각, 자신의 견해와 뜻을 섬기고 추종하기도 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곧 ‘자기 자신’이 거짓 예언자, 거짓 메시아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디모테오에게 말합니다.

“그대 자신을 조심하십시오.

그리고 그대의 가르침의 내용을 잘 살피시오.

이렇게 꾸준히 일을 해 나가면, 그대 자신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그대의 말을 듣는 사람들을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1티모 4,16)

 

그렇습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있어야 할 일입니다.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속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루카 21,8)

 

주님!

속이지도 속지도 말게 하소서.

재물에 속지 않고, 세속에 속지 않게 하소서

또한 제 견해와 편견, 제 생각과 허영에 속지 말게 하소서.

무엇보다도 제 자신과 제 뜻에 속지 않게 하소서.

아멘.

 복음: 루카 21,5-11: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감탄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성전이 돌 위에 돌이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파괴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로마가 성전을 무너뜨리고 예루살렘을 불태울 것이며 이스라엘은 주님을 살해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뒤 이 모든 일을 겪어야 했다.

 

성전이 언제 무너질 것이며 당신께서 오시기 전에 어떤 표징들이 나타날 것이냐는 질문에, 주님께서는 그 표징들에 대해 일러 주시며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려주시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많은 사람이 오류에 빠져 참된 믿음을 버리고 떠나갈 것이다. 그러면 마침내 주님의 날이 올 것이다. 주님께서 첫 번째 오심은 속죄를 위해서였고 두 번째 오심은 더 많은 이가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세상 종말에 일어날 일을 알려주시며 그들에게 경계하라고 하신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들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 뒤를 따라가지 마라.”(8절) 하신다. 두 번째로 오실 때에는 비밀리에 오시지 않고 무시무시하고 화려하게 오실 것이다. 세상을 정의로 심판하기 위하여,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려오실 것이다.

 

하느님은 참으로 진실하신 분이시다. 그분은 이 모든 것을 미리 말씀해 주셨다. 또 우리는 모든 말씀을 읽고 들었다. 우리는 언제 종말이 오는지 우리 모두 들었다. 그때에는 전쟁과 지진과 환난과 기근이 일어날 것이다.(마르 13,7-8) 그러므로 우리는 모순된 행동을 하고 있다. 이런 일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는 그 말을 믿다가 막상 그 일이 일어나면 불평을 늘어놓곤 한다.

 

마지막 날에 민족과 민족이 맞서고 나라와 나라가 맞서 일어날 것이다. 너희가 전쟁과 지진과 기근을 보게 되거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줄 알라고 하신다. 주님께서는 종말이 가까웠을 때, 일어날 표징들을 알려주신다. 곳곳에 기근과 전염병이 생길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에서는 무서운 일들과 큰 표징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하신다. “별들은 하늘에서 떨어지고 하늘의 세력들은 흔들릴 것이다.”(마태 24,19)

 

‘예루살렘’ 하면 하느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셨고 당신 백성들과 만나신 얼마나 유서 깊은 곳인가? 그런데 그토록 파멸했다는 사실은 당신의 어느 한 마디도 헛되지 않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며, 또한 예루살렘처럼 회개하지 아니하고 자기중심적으로 하느님을 따른다고 할 때, 이러한 파멸을 우리 자신도 당하게 될 것을 경고하시는 것이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시는 분이시다. 벌주기를 원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뜻을 역행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그 길을 가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뜻에 귀 기울이고 그분 안에 기쁨의 삶을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 9)

-한상우신부-


하느님께서는
아신다.

시작도 끝도
사랑의
신비안에
있음을 아신다.

이제 산(山)은
겨울 숲으로
바뀌고 있다.

비워내고
떠나보내는
겨울 숲의
자연스러운
모습이다.

비워내야
사랑할 사람이
보인다.

삶이란
우리자신을
제대로
보게하는
모든 은총이다.

삶과 죽음
이 모두를
다시
생각한다.

거스를수 없는
구원의 여정이
우리들 삶의
모든 여정이다.

허물어지고
사라지는
우리들
시간에서
하느님을
찾는다.

허물어지고
사라져야
잃어버린 방향을
다시 찾게된다.

하느님이라는
사랑의 방향을
다시 만나는
것이다.

실상 하느님께서
없는 방향이란
없었다.

하느님의 뜻과
어긋나 있는
우리들이
다시 소중한
사랑을 만난다.

참된 사랑이
참된 방향이며
참된 구원이다.

사랑은 늘
끝이 아니고
시작이다.

이 끝과 저 끝또한
내 것이 아니다.

시작도 하느님의
것이며 끝도
하느님의 것이다.

종말은 하느님을
알게되는 구원의
가장 분명한
사랑의
선물이다.

사랑하기 위해
허물어짐도
부서짐도
필요한
은총이 되었다.

하느님
사랑 안에
삶의 의미와
삶의 목적이
있다.

끝은
하느님이시며
끝은 사랑이다.

그래서 끝은
끝이 아니라
영원한 사랑이다.

사랑,
허물어지고
부서지는
구원의 힘찬
새로운 시작의
이름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실로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십니다.

"그 상의 머리는 순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고 배와 넓적다리는 청동이며, 아랫다리는 쇠이고, 발은 일부는 쇠로, 일부는 진흙으로 되어 있었습니다."(다니 2,31)
다니엘이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앞에 불려나와 꿈을 풀이합니다. 임금의 꿈 속에 등장한 순금, 은, 청동, 쇠, 진흙으로 된 거대한 상은 앞으로 올 나라들을 상징하지요. 바빌론에 이어 세상의 패권은 페르시아, 그리스를 비롯한 헬레니즘 세계, 그리고 로마 제국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스라엘은 열강들의 틈바구니에서 하느님 백성의 정체성에 극심한 도전을 받으며 식민지의 현실을 살아갈 것입니다.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돌 하나가 떨어져 나와, 쇠와 진흙으로 된 그 상의 발을 쳐서 부수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쇠, 진흙, 청동, 은, 금이 다 부서져서, ...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상을 친 돌이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웠습니다."(다니 2,34-35)
그런데 어디선가 돌이 날아와서 이 거대하고 무시무시한 상을 부수어 버립니다. 거듭 출현한 악의 세력들이 잠시 세상을 뒤흔들며 한분이신 하느님과 그분 백성에게 대적하더라도 결국 그들에게 남김없는 심판이 예고됩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한 나라를 세우실 터인데, 그 나라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 영원히 서 있을 것입니다."(다니 2,44)
인간적 감각으로는 그 돌이 어디서 왔는지 근원을 알 수 없지만, 모든 악의 세력을 부수고 거대한 산이 되어 온 세상을 채웁니다.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우시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인간의 욕망과 폭력이 세운 권력은 힘없이 무너져 사라지지만 하느님의 나라는 영원합니다.

"너희가 보고 있는 저것들이,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질 때가 올 것이다."(루카 21,6)
복음에서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위용에 감탄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실제로 기원후 70년에 예루살렘 성전은 침략자 로마 제국의 군대에 의해 불타고 허물어졌지요.

하느님은 변치 않는 분이시지만 그분을 모신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에 따라 심한 부침을 겪습니다. 아무리 외형을 아름답게 꾸민들 성전을 지탱하는 백성의 신앙의 뿌리가 부실해지면 언제든 하느님 현존을 잃기 마련이지요. 

"무서워하지 마라. 그러한 일이 반드시 먼저 벌어지겠지만 그것이 바로 끝은 아니다."(루카 21,9)
민족과 민족,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나 반란은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사람들이 서로 죽이고 무너뜨리고 빼앗고 짓밟으며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역사를 창출해 나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실 간담을 더 서늘해지게 만듭니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더한 무엇이 온다는 뜻이니까요. 실제로 지진이나 기근, 전염병, 하늘의 무서운 일들, 큰 표징 등은 인간이 벌일 수 있는 비극의 한계치를 넘어섭니다. 일단 벌어지만 강자든 약자든, 선인이든 악인이든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통제 영역 밖의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날은 영원히 서 있을 하느님의 나라로 이어지는 날이 될 것입니다. 제1독서의 예고에서처럼 한치 앞도 모르고 오만하게 구는 각종 악의 각축장이었던 세상이 하느님께서 보내신 어떤 힘에 의해 새로운 역사를 맞이하는 날이지요.

그날이 누군가에게는 내내 기다려온 사람의 아들을 맞이하는 날일 수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끝까지 두려워 피하고픈 세상 종말의 날이 될 겁니다. 세상 모든 이에게 차별없이 선물로 주어진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모습이 쌓여 그 날을 맞이하는 준비가 될 겁니다.

"너는 죽을 때까지 충실하여라."(복음 환호송)
이는 한 치 앞도 모르면서 두려움과 근심으로 종종대는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당장 눈앞에 악이 득세하고 어둠이 장악한 듯 보여도, 우리는 그 모두를 부수시고 당신 나라를 건설하실 주님께 대한 믿음과 희망을 충실히 지켜나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 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시니 고개 들어 하늘을 바라며 영원을 희망합시다. 그때가 언제 어떻게 오더라도 우리에게는 반드시 구원의 날이 될 것이니까요. 아멘. 

말씀 나누기 - 연중 34주 화요일-잘 속지 않으려면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1월 26일 연중 제34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