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나해

Margaret K 2021. 10. 31. 06:58

2021년 10월 31일 연중 제31주일 나해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르코 12,28ㄱㄷ-34)


"The first is this:
Hear, O Israel!
The Lord our God is Lord alone!
You shall love the Lord your God with all your heart,
with all your soul, 
with all your mind,
and with all your strength.
The second is this:
You shall love your neighbor as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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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한다(제1독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분이 되신 대사제이시라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신다(복음).

나의 제물로 지어진 하늘 나라의 나의 집

-키엣대주교-


아주 부유한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성처럼 멋진 집을 가지고 있었고 해변과 경치좋은 산에도 고급 별장과 고급스런 호텔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녀 주위에는 언제나 구걸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느님보다 자신의 사업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녀의 운전기사가 있었습니다. 깊은 신앙심과 효성을 가지고 있는 그는 언제나 열심히 미사를 가고 성경을 읽고 자신도 가난하지만 주변의 불쌍한 사람들을 지나치지 않는 따뜻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어느날 부인을 태우고 가던 차가 사고가 나서 두 사람 모두 사망하였고 두 사람은 모두 하늘나라에 올라가게되었습니다. 그들을 맞이 한 베드로 성인과 천사들은 고층 빌딩으로 가득 찬 거리를 지나 일꾼들이 열심히 벽돌과 시멘트를 나르며 집을 짓고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베드로 성인은 지금 이집은 3층집인데 앞으로 모든 편의시설이 갖춰질거라고 하며 이 집이 바로 운전기사의 집이라고 했습니다.

부인은 은근히 기뻤습니다. 기사 집이 이렇게 좋다면 자기 집은 훨씬 좋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성인과 천사는 부인을 데리고 시내를 벗어나 한참을 가다 아주 허름한 시골에 도착했습니다. 그곳에는 일꾼들이 시멘트와 벽돌이 아닌 대나무와 짚으로 오두막을 짓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성인이 여기가 바로 당신의 집이라고 말하자 부인은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왜 기사보다 나쁜 이런 초라한 집에 있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베드로 성인이 대답했습니다. “하늘 나라의 집은 각자 자신의 하늘나라로 보낸 제물로 집을 짓습니다.” 부인은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그러면 기사는 어떻게 그렇게 많은 벽돌과 시멘트를 그렇게 빨리 하늘로 옮겨 놓았죠?” 베드로 성인이 대답했습니다. “한 순간에 모두 옮겨놓은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에 제물을 옮기는데 그는 자신의 일생을 바쳤습니다. 미사에 참석하면서 철 한 묶음씩을 보내고 묵주기도 한번을 바치면서 한 주먹의 시멘트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때마다 대리석 하나씩을 하늘에 올려보냈습니다. 이웃을 위해 희생할 때 마다 어둠을 밝혀줄 불빛 하나씩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평생동안 천국에 제물을 보냈으니 이제 그만큼 받는겁니다. 그런데 부인은 평생을 세상에만 집을 지었고 성경을 읽지도, 사랑을 베풀지도 않았으며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지도 않았기때문에 단지 대나무 몇 그루만으로 집을 지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변하지만 사라지지 않습니다”는 진리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영육이 머무는 곳은 언젠가 변할 것입니다. 죽은 육체는 차갑고 어두운 지하에 누워있겠지만 영은 하느님 앞에서 심판을 받고 이 세상에서 이룬 공복에 의해 영이 머무는 곳이 정해지고 세상의 운명 그대로가 아닌 새로운 운명으로 다시 태어날것입니다. 아무리 부유하고 권세를 가진 부자라 해도 죽은 후 그가 받을 집은 이 세상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따라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비우며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며 가진 것을 나눈 사람은 천상에서 다시 돌려받고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현명한 사람입니다.

영의 삶을 돌보는 것이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진정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초겨을이 시작되었습니다. 스산한 바람이 불고 나뭇잎이 떨어지기 시작하면 세월의 빠름을 느낍니다. 11월 첫날, 교회는 모든 성인을 기리며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합니다. 우리와 같은 나약한 인간이신 그분들이 어떻게 하늘 나라의 영광을 누리게되셨는지,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있는지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해야하는 일을 ‘다음’으로 미루면 그 ‘다음’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이 그것을 시작해야 하는 순간입니다. 세월은 내가 준비하고 때를 기다리도록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영원한 생명을 지향하고 그 길을 가야합니다.

주님, 저희에게 영원한 생명의 나라가 있음을 알게 하여주소서. 언제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을 찾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까지 하늘 나라에 보낸 제물로 지은 나의 집은 어떤 모습일까요?

2. 11월이 되었습니다. 11월은 나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3. 돌아가신 가족과 성인들을 되새기고 기리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람들이 저를 싫어해요. 성당 다니는 사람들이 어떻게 왕따를 시킬 수 있죠?”


어떤 분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다면서 눈물로 호소하십니다. 그래서 이분들에 직접 물어보았냐고 여쭤보니, 자신이 나타나면 시선을 돌리고 말도 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다시 한번 직접 그 이유를 물었는지 여쭤보니, 자기들끼리만 따로 모임을 하면서 자기를 왕따시킨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번 분명하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이유를 ‘직접’ 물어보셨어요?”

직접 물어본 적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보여준 것을 보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물어본 뒤에 이야기를 다시 해보자고 했습니다.

며칠 뒤, 이분은 환한 미소를 띠며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서로 오해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제 모두 풀었다는 것입니다. 눈치를 보는 자매님 모습을 보며 그 공동체 분들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힘들어하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을 걸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눈도 잘 마주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또 사적인 모임이 갑작스럽게 생겨도 이런 자리를 힘들어 할 것 같아서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십니다.

지레짐작은 서로 간 오해를 낳고 서로 힘들게 하는 시작점이 됩니다. 여기서 잘못된 판단이 나오고 부정적인 생각과 행동으로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모습을 낳게 됩니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사랑’입니다.

율법 학자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당신 몸으로 보여주셨던 ‘사랑’은 지레짐작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떻게든 인정하고 지지하면서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을 향해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지레짐작하면서 불평불만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진정한 사랑을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사랑’이 우리의 삶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지레짐작으로 하느님을 판단하고 나의 이웃을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으로 하나를 이룰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사이에 불신과 오해가 가득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지지하는 가운데 사랑은 점점 커져서 우리의 진정한 삶이 될 것입니다.
길을 잃어보지 않고는 나를 발견할 수 없다(매튜 존스톤).

여유있는 삶

일주일 중 이틀(화, 수)은 성지에 함께 생활하는 다른 신부님께서 성지 미사를 합니다. 그래서 이 이틀 동안 그중에 밀린 일들을 몰아서 하곤 했습니다. 글을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하거나, 또 그동안 못 만났던 지인들을 만나는 시간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날도 이렇게 못다한 일을 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온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불안했습니다. 이것들을 하지 않으면 한 주를 너무 바쁘게 보낼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실험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어서, 글도 안 쓰고, 강의 준비도 하지 않고, 외출도 하지 않고 방안에만 있으면 음악을 들으며 책만 읽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종일 빈둥거리기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또 한 주를 그렇게 바쁘게 지낸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망할 것 같은 불안감이 생깁니다. 그러나 세상은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주님 뜻에 따라 흘러가는 세상이기에 내 생각이 이루어질 확률은 너무나 낮습니다.

여유 없이 힘들게 살기보다, 주님의 뜻을 따르며 사는 여유 있는 삶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창조자만이 당신을 위해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율법 학자는 하느님의 계명 중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이냐고 예수님께 묻습니다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간단하게 대답하십니다당신을 사랑하니까 당신이 창조한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계명은 어떻게 살아야 하나?’입니다우리는 누구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습니다이 해답은 왜 살아야 하는가?’와 일맥상통합니다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묻다 지쳐서 그냥이라는 해답으로 마무리합니다그렇게 살다가 중년에 들어서면 이렇게 사는 게 맞나?’라는 생각도 하고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삶에 공허함도 느낍니다.

  

    우리가 왜 살아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해답을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그러나 그런 해답을 지금까지 명확하게 주는 인물들은 거의 없습니다그리고 이 질문은 역사상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인류 최초의 소설이라는 길가메시 서사시가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주인공 길가메시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돈도 많고 힘도 세고 나라도 다 정복한 영웅이었습니다이 영웅이 언젠가 징그럽게 생긴 훔바바(Humbaba)라는 괴물과 싸우게 됩니다물론 길가메시가 승리하였습니다하지만 이 과정에서 엔키두라는 친구가 죽습니다. 

 

    길가메시는 심각한 고민에 빠집니다자신도 언젠가 죽을 운명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자기가 이렇게 유명하고 성공하고 돈과 권력이 많아도 죽으면 다 의미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그는 먼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생하고 고생하다 결국 어느 먼 곳에 우트나피슈팀이라는 아주 유명한 산신령 같은 분이 계신데 그분은 죽음을 초월하였다는 말을 듣습니다그를 찾아간 길가메시는 그가 어떻게 불사신이 되었느냐고 묻습니다우트나피슈팀이 대답합니다.

    “나는 신들에게 잘 보여서 불사신이 되는 약을 하나 선물 받았는데 그것을 먹었더니 불사신이 되었소.” 

 

    길가메시는 저에게도 그 약을 하나 줄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그랬더니 그 노인은 약을 줍니다.

    길가메시는 기분이 너무 좋아 그 약을 놓고 연못에서 목욕했습니다그런데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서 그 약을 훔쳐 가버립니다이 약이 없으면 죽음으로 모든 게 무의미해지는데 뱀이 훔쳐 가버렸으니 엉엉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길가메시는 다시 우트나피슈팀에게 가서 약을 하나 더 줄 수 없느냐고 묻습니다하지만 할아버지는 약은 한 번밖에 줄 수 없다고 말합니다그러니 길가메시가 묻습니다.

    “그러면 나는 이제 죽어야 합니까적어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십시오.”

우트나피슈팀은 말합니다.

    “그냥 집에 가서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아름다운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맛있는 것을 먹고 친구들과 술을 마시면서 재미있게 놀아라.”

    그런데 그 모든 것은 길가메시가 지금까지 해오던 일이었습니다이게 이야기의 끝입니다. 

 

    오천 년 전의 이야기입니다그때나 지금이나 뭔가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삶의 의미에 관한 의문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발견해야 하는 것은 우트나피슈팀이 길가메시에게 주었던 그 약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신들이 줄 수 있는 바로 그 약그것은 나를 사랑하고내가 만든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라는 계명입니다

    우리에겐 그 계명이 주어졌습니다하지만 우리는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서 사탄이라는 뱀혹은 자기 생각에 사로잡혀 그 계명의 중요성을 잃습니다그래서 또 그냥 생존 욕구대로 살아갑니다.

  

    생존 욕구는 그저 태어날 때 생존을 유지하게 하려고 넣어진 욕구이지 삶의 목표가 될 수 없습니다그런데도 여전히 그 불사의 약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돈을 더 많이 벌고 더 맛있는 것을 먹고 더 인정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인생을 허비합니다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은 약을 잃어버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이 창조하신 대상들을 사랑하라고 하는 계명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지 잘 생각하지 못합니다왜냐하면삶의 의미는 창조자만이 줄 수 있는데창조자가 아니시면 우리에게 그런 계명을 주실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나의 생존을 위협하는 욕구입니다그래서 피조물은 누구에게도 생존을 포기하라는 욕구를 줄 수 없습니다혹시 누군가에게 그런 욕구를 주면서 자기까지 사랑하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피조물은 생존을 포기하라는 사랑의 욕구를 줄 수 없다일본 천황은 가미카제 특공대에게 나라를 위해 죽으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느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분명 천황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라는 명령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황이 양심이 있다면 그들에게 진정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을까요자기가 창조하고 다시 생명도 줄 수 없는 이들을 자살로 내몰면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할 수 있을까요인간이라면 그런 명령은 내릴 수 없습니다왜냐하면피조물은 피조물에 다시 생명을 줄 수 없어서 자신이 피 흘려 창조한 무엇이 아니면 자신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줄 수 없습니다타인의 생명을 이용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라이것은 마귀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나마 자신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줄 수 있는 분들은 부모님입니다부모님은 자녀들의 창조를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그런데도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당당히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합니까항상 더 잘해주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지 않습니까그래도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을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자녀를 창조하기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의 영약을 먹은 사람들입니다삶의 의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들입니다그리고 그 영약을 주신 분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또 죽어서 어떻게 되는지도 책임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나를 창조하시고 생명을 주신 분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 뜻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목숨을 바친 당신 자녀에게 다시 생명을 주시지 않을 리 없습니다이 계명으로서 모든 게 해결되는 것입니다 

 

    당신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라는 계명은 오직 창조자만이 당신과 당신이 창조한 것들을 사랑하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임을 명심하고그분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시다그리고 그 영약을 절대 뱀에게 빼앗기는 일이 없도록 합시다그래야 모든 삶이 의미로 가득 찹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연중 제31 주일이고, 10월 31일입니다. 31일은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에는 생각나는 노래가 있습니다감미로운 멜로디와 서정적인 가사로 위로를 주었던 잊혀진 계절입니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잊혀진 계절도 좋지만 윤동주 시인의 서시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한다는 시인의 마음을 생각합니다학생 때 에릭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었습니다우리는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사랑에는 3가지 차원이 있습니다첫 번째는 감성적인 사랑입니다생명의 목적은 2가지입니다하나는 생존하는 것이고다른 하나는 자손을 낳아 번성하는 것입니다작은 나비부터가장 큰 수염고래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까지 이 목적은 같습니다이 감성적인 사랑에는 윤리와 도덕이 개입하지 않습니다본능에 이끌리는 사랑입니다두 번째는 이성적인 사랑입니다철학문학예술건축음악은 이런 이성적인 사랑으로 시작됩니다이성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연습이 필요합니다인류의 문화와 문명은 이성적인 사랑에 의해서 꽃이 피었습니다세 번째는 종교적인 사랑입니다불교에서는 자비와 보시를 이야기합니다교회에서는 희생과 헌신을 이야기합니다자식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주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습니다강도당한 사람을 구해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이 있습니다모든 종교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입니다종교적인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집착을 버려야 하고자기를 버려야 합니다.

 

사랑에는 4가지 단계가 있습니다첫 번째는 사랑을 받는 단계입니다어린아이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합니다들숨이 있어야 날숨이 있습니다한동안 많이 불렀던 노래가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사랑 때문에 사람이 되셨습니다흙 속에 있는 씨앗은 물과 햇빛을 받아야 싹이 나옵니다사랑 받는 아이는 면역력도 강해지고사랑할 수 있는 능력도 생깁니다.

두 번째는 사랑하는 단계입니다사람들은 어느 순간 자기가 남을 생각하며 감동할 수 있고자신의 애정을 특별한 존재에게 집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그 느낌은 사랑받는 것보다 한결 흐뭇합니다사랑하면 할수록 그것에 엄청난 힘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고난도역경도굶주림도죽음까지도 이 사랑을 막을 수 없습니다세 번째는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입니다자신의 애정을 남에게 투사하고 나면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 쏟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이 단계의 사랑은 받는 사랑과 주는 사랑과 비교할 때 한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사랑을 주기 위해서든받기 위해서든 남에게 의존할 필요가 없습니다따라서 사랑을 주거나 받는 존재에게 실망하거나 배신당할 염려도 없습니다네 번째 보편적인 사랑의 단계입니다이는 무제한의 사랑입니다애정을 받고남에게 투사하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나면사랑을 자기 주위의 사방팔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하기도 하고 사방팔방에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이 보편적인 사랑을 부르는 이름은 생명자연대지우주하느님처럼 문화와 민족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사랑입니다온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같은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이웃을 사랑하라고 합니다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합니다. 10월의 마지막 날입니다지금 나의 사랑은 어느 차원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지금 나의 사랑은 어떤 단계의 사랑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부족해도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사랑이 식어 하느님 아버지를 잠시 외면한다고 해도 끝내 우리를 버리시는 분은 아니십니다그러나 우리의 이웃은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면 기다리지 못하곤 합니다우리의 사랑이 식어 버리면 그들 역시 사랑이 식어버리곤 합니다. 2021년도 이제 2달 남았습니다더 늦기 전에 내가 미워한 이웃을나를 미워한 이웃을 용서하고 넓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느님 아버지께 용기와 힘을 청합시다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저 십자가로 하느님과 우리를 화해시키셨고우리의 이웃과 이웃을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이 전부입니다!

 -양승국신부-

 

나이를 조금 먹고 나서야 사랑에 대해 크게 착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이팔청춘 때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도 아니라면 적어도 서른 안팎까지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 사랑을 알고 난 후 그것은 너무나도 큰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병세가 위중해도, 아무리 인생의 막장 앞에 설지라도, 그럴수록 사랑은 더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목숨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필요한 것이더군요. 이 세상에는 사랑이 필요치 않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사랑하고 사랑받을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만사가 잘 풀릴 때만 가능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내 마음에 드는 사람하고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진정한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랑은 꼬이고 꼬인 인생길을 걸어갈 때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사건건 내 발목을 잡는 지긋지긋한 그 ‘존재’와의 관계 안에서 더욱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면 만사가 OK인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늘 기쁨과 감미로움만 따르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을 시작하면 향기로운 장미꽃 길만 계속되는 줄 알았습니다. 사랑에는 괴로움이 뒤따르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다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고통의 길을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을 희생을 각오한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사랑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십자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는 말과 일맥상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코 복음 12장 29~31절)

  

결국 사랑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전부입니다. 사랑만이 그리스도인 인생의 전부입니다. 사랑이야말로 모든 인생문제의 해답입니다. 사랑은 우리 삶의 최종 기착지입니다. 결론적으로 산다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는 시절입니다. 참 사랑을 실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늘 자신을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혹시라도 내 그릇된 언행, 부족한 사고, 빈약한 가치관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내가 좀 더 사랑스런 존재, 이웃들에게 기쁨이 되는 존재로 서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1요한4,17). 오늘 이 시간 사랑에 대해 생각하는 가운데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을 얻기 바랍니다. 사랑이 살아있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서 많은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사랑은 어떻게 생겼을까?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한 자와 곤궁한 자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비극에 처한 자를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사랑에는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탓입니다” 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새기고 손발로 실천해야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라스머스’ 라는 병을 아십니까? 이 병은 외롭게 자란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병입니다. 증상은 신체발육이 부진하고 온 몸에 힘이 빠져 시름시름 앓는 증세를 보입니다. 그런데 이 병은 영양결핍이나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결핍’이 원인입니다. 사랑을 한창 공급 받아야 할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사랑을 표현하지 못할 때 이 병에 걸릴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이병에 대한 의사의 처방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무엇일까요? 예, “매일 사랑을 고백하세요!”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이 좋은 약이랍니다. 사실 매일 사랑을 고백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부간, 부자간에 고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서로의 관계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질 것입니다. 더군다나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고백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부간에도 “여보 사랑해!” 라는 표현을 자주하시기 바랍니다. 남자들은 대개 ‘그냥 눈빛만 봐도 알지, 그것을 꼭 표현해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러나 여자는 “사랑한다”는 말을 꼭, 그리고 자주 듣고 싶어합니다. 사실 남자들도 “사랑한다”는 말에 무덤덤해 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기뻐합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자녀와 듣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그리고 부모가 자녀들로부터 “사랑한다”는 표현을 듣게 될 때 모든 피곤이 풀립니다.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도 사랑 받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줄 때 삶의 활력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랑합니다” 라는 표현을 자주 하시길 권합니다.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 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사실 사랑은 사랑 그 자체로써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행위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테레사 효과를 아시지요?

미국 하버드 의대생들을 봉사 활동에 참여시킨 후 체내 면역 기능을 측정해 보았더니 면역기능이 크게 증강되었답니다. 또한 마더 테레사의 전기를 읽게 한 다음 인체 변화를 조사했더니 그것만으로도 생명 능력이 크게 향상되고 인체에 도움이 되는 항체가 생기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연구진은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거나 봉사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면역기능이 높아지는 것을 두고 마더 테레사 효과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랑을 하면 할수록 더 큰 사랑을 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을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이신 주님을 차지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더 많이 사랑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오늘 복음은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가는 계명을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은 이웃사랑을 통해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3장34절 이하에서 주님은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바로 우리가 따라야 할 사랑의 방법이 여기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나의 벗이 된다”(요한15,13)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마태5,46) 하시며 끼리끼리의 사랑을 경계하셨습니다.

  

1요한 3,14에 보면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을 벗어나서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라고 말하고 있고 1요한4장20절에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 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적고 있습니다.

  

로마서13장8절에서 바오로 사도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아무리 많아도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요, 사랑은 손발에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사랑에 대해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루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운동 경기에서 골인 한 것과 골을 넣을 뻔 한 것은 분명 다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것과 가까이 있는 것은 구별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구술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머리에 있는 사랑을 가슴으로 끌어내리고 가슴에 담긴 사랑을 마침내 손발로 행해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식의 앎이 아니라 사랑의 삶이 살아있는 곳이 천국입니다.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예수의 성녀 데레사). 진정한 사랑은 이것저것 재지 않습니다. 그저 줄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허물을 보지 않으시고 당신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사랑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은 사랑 그 자체가 보상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많이 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큰 부자의 아들이 탄 경비행기가 사막을 지나다 강한 모래 바람을 만나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그러나 곧 정신을 가다듬고 수색대를 조직해 사막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불행히도 아들의 생존여부조차 알 수가 없었습니다. 끈질긴 수색 끝에 비행기 추락지점을 발견한 것은 며칠 뒤였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비행기의 잔해와 조종사의 시체만 있을 뿐 아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실망하지 않고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아들이 살아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아들을 지켜주십시오.” 기도를 마친 뒤 아버지는 수백만장의 전단지를 사막에 뿌리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뭐라고 써야 할지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사막에서의 생존법? 아니야!” 한참을 고심하던 아버지가 결국 전단지에 적은 글은 단 한마디 였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 아버지의 그 외마디 절규가 사막 곳곳에 뿌려졌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탈진해 가던 아들이 그 전단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 반드시 나를 찾아내실 것이다!” 전단지를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확인한 아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습니다. 사막한가운데서 아들을 찾는 수색작업은 고되고 험난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살아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수색작업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며칠 뒤, 수색대는 사막 한가운데서 아버지가 보낸 전단지를 손에 꼬옥 쥐고 쓰러져 있는 아들을 발견 했습니다. 아버지의 깊은 사랑이 아들을 구했습니다. “아들아, 사랑한다!”는 한마디가 사막의 열기와 배고픔을 이겨낼 수 있는 희망과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일깨워 주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려움 안에서도 아버지의 사랑으로 여전히 다가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언제나 주님을 향한 희망 안에 있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랑 LOVE

L은 웃음(laugh)이니 서로 웃는 모습을 보여라.

O는 OK이니 서로 상대의 말을 옳다고 하라.

V는 빅토리니 힘을 합쳐 승리하라.

E는 엔조이니 서로에게 즐거움을 주는 존재가 되라!

  

##  에덴 동산에 사는 하와가 아담에게 사랑을 확인 받고 싶어 했어요. 그래서 아담에게 “자기 나 사랑해!” 하고 물었지요. 그러자 아담이 “그럼”하고 대답했어요. 하와가 다시”정말 나를 제일 사랑하는 거지?” 물으니 아담이 “그렇다니까?”하고 대답했어요. “내가 제일 이뻐?”하와가 묻자 “야! 여기 너 밖에 다른 사람이 더 있니?” 아담이 대답했답니다.

거듭거듭 확인하려는 하와나 그렇게 멋없이 대답하는 아담이나….

천생연분이야!  ##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송영진신부-


“그러자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슬기롭게 대답하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하고 이르셨다.

그 뒤에는 어느 누구도 감히 그분께 묻지 못하였다(마르 12,32-34).”

 

1)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제물보다 낫다는 율법학자의 말은,

실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사무엘 예언자가 사울 왕을 꾸짖을 때 했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 진정 말씀을 듣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숫양의 굳기름보다 낫습니다.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고집을 부리는 것은 우상을 섬기는 것과 같습니다. 임금님이 주님의 말씀을

배척하셨기에 주님께서도 임금님을 왕위에서 배척하셨습니다(1사무 15,22-23).”

사무엘 예언자의 말에서는 ‘순종’이 강조되어 있고,

복음서에서는 ‘사랑’이 강조되어 있는데, 이 두 가지를 합해서 생각하면,

“사랑은 곧 순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종은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르는 것처럼,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머무를 것이다(요한 15,10).”

요한 1서 저자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라고 말합니다(1요한 5,3).

 

2)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만’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 라는 말은,

하느님만이 한 분뿐이신 참 하느님이시라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세속의 재물과 권력과 명예도 사랑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마음속에 ‘하느님 사랑’이 아닌 다른 것에 대한 사랑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일에만

모든 힘을 쏟고, 다른 일에 헛심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생각’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는 하느님께

기쁨을 드리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사랑은 ‘정성’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다는 말은,

사랑한다면 제사는 필요 없다는 뜻도 아니고,

제사를 안 드려도 된다는 뜻도 아닙니다.

‘전례’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우리 마음의 표현입니다.

사랑하니까 거행하는 일, 즉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례’는 신앙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사랑으로, 또 정성껏 해야 하는 일입니다.

만일에 사랑 없이 행한다면, 그것은 위선이고,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입니다.

그리고 전례를 거행할 때에는 ‘정성’을 다 쏟아야 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정성을 다 쏟는 법입니다.)

사랑 없이 전례를 거행하는 경우에는 정성도 없습니다.

(‘정성의 부족함’에서 ‘사랑 없음’이 금방 표시가 납니다.)

사랑도 없고 정성도 없으니 대충 형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4)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실천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그런데 주님의 계명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 쏟아서 전례를 거행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받은 계명은 이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1요한 4,20-21).”

 

5) <사랑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삶’ 안에서 ‘행동’으로 해야 합니다.>

지금 말하고 있는 ‘사랑’은 세속의 ‘좋아하는 감정’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

즉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행’입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그쳐도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서 실천해야 하는 덕행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요한 1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7-18).”

야고보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5-16)”

(이 말을,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야고 2,17).

그처럼 사랑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니고, ‘죽은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구원을 얻는 데에 아무 쓸모가 없는 것들입니다(야고 2,20).

복음: 마르 12,28-34: 주님이신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인간에 대한 사랑의 동기와 이유로 제시하실 만큼 밀접히 결합하신다. 즉 인간이 위대한 존재로서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존재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죽는 곳에서는 인간도 죽게 된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다. 신명기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이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되기 위해 필연적으로 그 무엇보다도 그들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하느님의 백성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에 찬 의지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계명을 준수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는 어떤 계명이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인지 묻는 율법학자에게 신명기의 말씀을 상기시키시면서, 그 계명에 다른 계명, 즉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가까이 놓으신다. 이 계명도 구약성서에 나타나지만 ‘동족’만을 가리킨다(레위 19,18). 마태오는 첫째 계명에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한다(22,39). 루카는 두 계명을 종속관계로 보지 않고(10,27),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모두 이웃으로 간주하고 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바로 그것이다(10,30-37). 그러나 마르코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첫 자리에 놓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두 번째 자리에 놓은 것을 보면 유일신론적 배경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첫 자리에 계셔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위대성이나 품위도 올바로 갖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랑이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두 사랑은 서로 교차하며 서로를 요청한다. 즉 우리는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내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 종교이다. 오로지 이웃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통해 사랑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31절) 하시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마태 22,40)라고 하신다. 이 두 계명은 다시 율법학자의 말로써 강조되고 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32-33절). 즉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을 다 같이 사랑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우리가 잘못하기 쉬운 것은 하느님께 드리는 전례행위가 하느님께서 필요로 하시는 것처럼 국한해 그 의미를 빈약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랑을 형제들에게 펼 때, 하느님은 사회적인 분이시며 위대한 창조를 하시는 분임을 증거 할 수 있다. 이렇게 될 때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형제들에 대한 봉사가 되고, 또한 구체적인 필요에서 구현되기에 참된 예배가 된다. 우리가 주일을 지내는 의미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하느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는 주일미사는 바로 우리의 삶 속에서 바쳤던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제대에 봉헌하는 것이다. 봉헌예물은 바로 우리의 삶인 것이다. 이것을 항상 잊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들은 율법학자는 예수님께 “너는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34절)라고 칭찬을 듣는다. 율법학자에게서 ‘하느님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하느님의 나라는 현재 이 자리에서 가까이 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하나의 실체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통해 즉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가까이 와 있다. 예수께서는 누가 당신 가까이 있는지를 아시고 또 명백하게 규정하신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히브리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대한 신학적 사고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도의 사제직은 십자가에 못 박힌 사제직이라고 하였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자발적으로 봉헌하신 당신의 희생으로 무엇이 참된 예배인지를 확실히 가르쳐 주셨다. 즉 형제들에 대한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든 것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내용이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하느님께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본성이며,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게 하는 요청이다. 이 요청은 이제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는 나의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작은 일에서부터 이러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고, 그리스도께서 드리신 참된 예배를 우리도 이제 이 미사를 통하여 하느님께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일미사가 더 기쁘고 하느님 앞에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몸만 왔다 갔다 하는 타성적인 신앙생활 그래서 아무 맛이 없는 신앙생활, 전례생활이 아니라, 기쁘고, 감사하며 더 앞으로 나아가는 적극적이고 활기찬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하겠다.

 "첫째는 이것이다."(마르 12, 29)

-한상우신부-


첫째도 둘째도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과
마주하는
사랑의
주일이다.

첫째로
지켜야 할
사랑이다.

사랑이 있기에
우리의
삶이 있다.

사랑이
삶이다.

사랑을
전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십자가로
사랑을 뜨겁게
배우는 사랑의
여정이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뿐이다.

그래서 삶이란
하느님 사랑을
찾아가는
여정이다.

하느님
사랑으로
사랑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된다.

진실한 사랑은
언제나
하나이다.

그래서 사랑이
삶의 중심이 된다.

사랑의 순간이
나눔의 순간이며
거룩한 순간이다.

하느님 사랑과
상관없는 것은
하나도 없다.

사랑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

사랑을
만나는 것이
만남의
복음이다.

우리 사랑을
가장 먼저
드려야 할 분또한
하느님이시다.

사랑이
구원이다.

다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참된 회개이다.

사랑을
채우는 것도
언제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

우리또한 본래
사랑이었음을
깨닫게된다.

하느님 사랑이
영원하기에
생명도 영원하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빛이
있다.

하느님 사랑보다
더 중요한 사랑은
없다.

줄수록 더욱
커지는 사랑의
힘이다.

서로
사랑하는
내어주는
사랑만이
모두를 위한
살길이다.

첫째는
이것뿐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정립해 주십니다.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신명 6,4; 마르 12,29)
이 말씀은 제1독서와 복음에서 동시에 울려퍼집니다. 첫째 가는 계명에 대해 묻는 율법 학자에게 예수님께서 신명기에 나오는 모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들려 주셨지요. 한 분이신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입장은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가 다르지 않습니다. 시공간을 초월한 진리니까요.

"이스라엘에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4-5)
제1독서에서 모세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분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영원히 지켜야 할 근본 정신을 들려줍니다.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의무를 앞서지요.

제2독서는 사람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히브 7,25)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은 새로운 계약으로 옛 계약을 완성하십니다. 사랑하는 외아드님을 내어 주신 사랑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증거입니다. 늘 우리를 위해 빌어 주시는 중재자 예수님의 사제직은 그분이 항상 살아계시기에 "영원"하며, 단 한 번의 제사로 구원을 가져오셨기에 "완전"합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가장 탁월한 중재자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향한 우리의 사랑이 어떠해야하는지 강조하십니다. 하느님과 사람 사이는 사랑으로 엮여 있습니다. 사랑이신 그분께서 사랑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동행하시니, 그 사랑으로 살아가는 우리도 사랑으로 응답하는 것이 본능이고 도리입니다.

마음, 목숨, 정신, 힘은 인간 전체를 가리킵니다. 어느 한 부분만으로 아니라 존재 전체로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지요. 사실 사랑은 부분이 나뉘지 않습니다. 마음은 사랑하는데 행동은 안 따라가고, 생각으로는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랑을 자기 욕정 채우는데 이용하고 있다면 감히 사랑이라는 말을 붙여도 되는지 숙고해야 합니다. 사랑은 립서비스가 아니라 전체를 쏟아붓는 것이니까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0)
그래서 하느님과의 사랑은 사람 사이로 흘러가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지요.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특히 사랑을 가장 필요로 하는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이들 안에는 반드시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면서 우리의 사랑을 갈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도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가서 그와 함께 살리라."(복음 환호송)
이 말씀이 바로 놀라운 사랑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성 삼위 하느님 안에 머물러 사랑이 되어 갑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이 세상에 하나의 사랑을 이루어가게 되지요. 한 분 하느님의 하나의 사랑 안에 모든 사람, 모든 피조물이 하나가 된다니, 참으로 놀랍고 신비롭지요!

사랑하는 벗님! 묵주기도 성월의 마지막 날인 오늘, 하느님 사랑 안에 푹 잠기시길 기원합니다. 반갑기도 하고 걱정되는 위드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사랑으로 분별하고 사랑으로 나아가는 우리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면서 사랑이 되어 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10월 한달도 수고 많았습니다. 

 마음에 새기고 마음을 다하는

 -김찬선신부-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말을 마음에 새겨 두어라."

 

오늘 신명기는 거듭 명심하라고 그러니까 마음에 새기라고 합니다.

잊지 않고 기억키 위해 우리는 간단한 것은 손바닥에다 적어 놓고,

수첩이나 비망록에 적기도 하고 더 중요한 것은 돌판에 새기기도 하지요.

 

제가 북한에 갔을 때 참으로 한탄을 했던 것이 곳곳에 김일성 우상화 글귀,

곧 "우리의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글귀를 돌에 새겨놓은

것이었는데 그것은 김일성을 마치 하느님처럼 여기는 것이었지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돌에 새겨야 할 것은 하느님의 계명이고

모세도 자기가 받은 하느님의 계명을 그래서 돌판에 새긴 것인데

오늘 신명기는 그것을 돌이 아니라 마음에 새기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라는 것은 또한 머리와 생각 이상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머리와 생각에만 있지 않고 마음에 새겨져 있어서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머리로만 알지 않고

마음을 다하여 사랑하게 되는 것이니 아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차이입니다.

 

사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아는 것만도 대단하지요.

그것을 모르기에 다른 것, 예를 들어, 돈을 더 중요시하다가

건강 상하고 인생 망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인생에 있어서 무엇이 제일 중요한지 아는 것은

생활의 지혜를 넘어 인생의 지혜이며 행복의 첫걸음입니다.

이리 가야 할 것을 저리 가지 않게 하는 것이며

방향을 잡았기에 비로소 첫걸을 뗄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걸음이란 그야말로 가야 할 걸음의 첫 번째일 뿐입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이 제일 소중함을 알았다면 이제 사랑해야 하고,

그것도 마음을 다해 사랑해야 하는데 마음을 다해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마음에 새겨져 있어야 하고 분심 곧 마음의 갈림도 없어야 합니다.

 

마음에 갈림이 있다는 것은 사랑하는 다른 것이 있다는 말이고,

하느님과 하느님 계명 외에 다른 것에도 관심이 있다는 거지요.

 

이 분심 중에 가장 흔한 것이 하느님 사랑이 중요하다는 걸 머리로 알지만 

욕망이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좋아하고 소유하고 싶어 하여

마음이 갈리고 사랑이 갈리는 것입니다.

 

욕망은 좋아하는 것을 내가 소유하게 하지만

사랑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하는 이를 위해 봉헌케 하고,

좋아하는 것 곧 소유물뿐 아니라 자신마저 봉헌케 하지요.

 

이것이 마음과 목숨과 정신과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다음 말을 오늘 묵상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충만한 선, 모든 선, 완전한 선, 참되시고 으뜸선이신 하느님 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원하지도 말고 바라지도 말며, 다른 아무것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즐거워하지도 맙시다."(미 인준 회칙 23장)

 

"당신을 항상 생각함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당신을 항상 갈망함으로써 넋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며,

우리의 모든 지향을 당신께 두고 모든 것에서 당신의 영예를 찾음으로써

정신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

우리의 모든 기력과 영혼의 감각과 육신의 감각을 당신 사랑의 봉사를 

위해서만 바치고 다른 데에 쓰지 않음으로써 우리의 모든 힘을 다하여 

당신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

 

그리고 우리의 힘이 닿는 대로 모든 이를 당신의 사랑으로 이끌고,

다른 이들의 선을 우리 것처럼 즐거워하며 불행 중에 있는 이들의 고통에 

함께 하고, 누구에게도 해를 입히지 않음으로써 우리 자신과 같이

우리 이웃을 사랑하게 하기 위함이나이다."(주의 기도 묵상)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11월 4일 연중 제31주일 나해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