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2021년 10월 30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루가 14,7-11)
For 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but the on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이스라엘은 그들의 잘못으로 구원에서 멀어지고 하느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이로써 다른 민족들이 구원을 받게 되었으며, 이스라엘은 조상들 덕분에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받는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것을 보시고,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제 서품을 받고 어느 본당의 보좌신부로 갔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성경에 관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잘 모르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부가 이런 것도 모르냐고 할 것 같아서, ‘아마 이럴 거야’라는 생각으로 설명했습니다. 이분은 계속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제 말도 안 되는 설명을 듣고는 “알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돌아가셨습니다.
인사를 마치고 사제관에 들어와 책을 펼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똑바로 했는지 찾아보았습니다. 그리고 크게 낙담했습니다. 잘못 설명했기 때문입니다. 말도 안 되는 설명으로 그분에게 커다란 혼란을 드렸을 생각에 너무나 미안했고, 괜히 아는체했던 저 자신이 미웠습니다.
그 뒤, 저는 모르면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제가 잘 모르는 부분이라 연락처를 주시면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했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습니다. 저 역시 오류의 틀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면, 오히려 세상에 잘못된 지식을 전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저마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자기 과시를 위해, 또 자신의 위치를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솔직히 일반적인 우리 모습입니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척 그리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척하면서 자리싸움의 우위를 가지려고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자기 자리를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세상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종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분 앞에서 과연 주인 행세를 하면서 맨 윗자리에 스스로 앉을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그래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도 낮아지셨음을 기억하면서, 이 세상 안에서 나를 드러내려는 교만의 삶에서 벗어나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지위나 명예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인정받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주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조슈아 벨이라는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가 있습니다. 그의 명성은 대단해서 공연하면 좌석 하나에 11만 원이나 하는 티켓이 금세 매진될 정도입니다. 그런 그가 아침 러시아워 시간에 워싱턴 DC의 어느 지하철 역사에서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버스킹을 했습니다. 40억짜리 명품 바이올린 ‘스트라디바리우스’를 들고서 말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평소 듣기 힘든 어려운 곡들을 연주했습니다. 자그마치 45분 동안 말이지요.
이 45분 동안 음악을 듣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명연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었음에도 멈춰서 듣지 않았습니다. 바쁜 출근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 음악이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바쁘다 바빠’를 외치는 우리입니다. 바쁜 직장인만이 아니라 공부하는 청소년들까지 모두 예외 없이 바쁨을 호소합니다. 어쩌면 어린이들까지 ‘바쁨’ 속에서 힘들게 사는 것은 아닐까요?
바쁘면 소중한 것을 들을 수도 또 볼 수도 없음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여유를 갖고 작은 것의 소중함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기쁨을 간직하게 됩니다.

진정한 교리는 가난한 이들에게서 살아난다
-전삼용신부-
또한 ‘가난한 자’들을 초청하라고 하십니다. 부자끼리 어울리니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돈이 많으면 가난한 자들에게 다가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러면 교리가 어려워집니다. 교리가 어려워졌다는 증거는 ‘비유와 상징’의 뜻을 잊어버리고 이론적으로만 가르친다는 것에서 증명됩니다.
사실 진리는 부유하고 배운 이들을 향할 때 그 생명력을 잃고, 오히려 가난하고 철부지 같은 이들을 통해 생명을 얻습니다.
최고야 상담가의 『벼랑 끝, 상담』 첫 사례로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처음 최 원장은 힘든 사람들의 이야기만 들어주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다는 것에 큰 괴리감과 피곤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다 미술치료와 명상최면 등을 접목하여 내담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밤늦게까지 일을 하고 퇴근하려고 길을 나서는데 한 남자가 최 원장을 막아섰습니다. 최 원장은 여성입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상담을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최 원장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예약을 잡아주겠다고 했지만, 그 청년은 지금이 아니면 너무 늦어진다는 것입니다.
최 원장은 아무도 없는 상담실에 그 사람을 맞아들였습니다. 그 사람은 신문지에 쌓인 칼을 최 원장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무섭지 않으냐고 물었습니다. 최 원장은 이미 자신을 찾아왔다면 희망이 있다고 여기고 무섭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 청년은 지금 지하철로 마구잡이로 사람을 찌르러 가던 중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 도망쳤고 아버지는 심한 구타로 아이를 키웠습니다. 아버지는 물이 나오지 않는 옥탑방이기에 어쩔 수 없이 변을 집 안에다 볼 수밖에 없었는데 4살짜리 아이를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누나는 가출했지만, 그 청년은 아버지를 견뎌냈습니다. 아버지는 동네 형들과 싸움을 시켜서 이기지 못하면 또 때렸습니다.
그렇게 그 청년은 대인기피증을 넘어서 사람에게 말을 걸 수 없는 정도까지 이르렀고 특별히 엄마 때문에 여자들을 증오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아버지를 구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기는 이렇게 힘든데 다른 사람들은 잘도 살아가는 것이 너무 싫어서 참다 참다 칼을 들고 나섰다가 상담실에 불이 켜진 것을 보고 잠깐 멈춰 섰는데 원장이 나왔던 것입니다.
최 원장은 돈이 없는 이 청년에게 돈을 받지 않고 상담을 해주겠다고 하고 자신이 아는 모든 치료방법을 써서 도와주었습니다. 특별히 그림 그리기를 하고 그 그림을 최면상태에서 태워버리거나 다시 액자에 끼우는 등의 상징기법을 이용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비유는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 청년은 사회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여자와 영화까지 함께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접하면 어떨까요? 누군가가 상담에 대해 이론적으로 많은 이야기를 하고 홍보하는 것보다 최고야 원장이 하는 상담실을 찾아보고 싶은 마음이 더 생길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한 교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렇게 이미 잘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못 배우고 가난한 이들의 변화를 통해서 증명됩니다. 어렵게 교리실에서 가르치는 것이 교리가 아니라 그들의 새로 태어남이 곧 교리 자체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고 철부지들에게 진리를 드러내 보이신다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십니다.
저는 꾸르실료 교육을 받게 된 것이 유학에서 돌아와서 본당의 주요 봉사자들이 모두 꾸르실리스따들임을 알게 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을 하려면 우선 인정을 받아야 할 텐데 그 방법은 저도 꾸르실료를 받는 방법밖에 없다고 느낀 것입니다. 하지만 3박 4일간의 꾸르실료 교육은 저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방금 신학박사를 따고 온 사람에게 평신도들이 알려주는 교리와 영성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고 심지어 틀린 것도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 꾸르실료 지도신부를 맡고 있고 할 수 있다면 전 신자들이 다 꾸르실료 교육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피정과 교육을 받은 사제에게는 재미가 없을망정 들어온 대부분의 신자분은 큰 깨달음을 얻고 많이 배워서 나가고 하느님을 체험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만약 꾸르실료가 사제나 수녀님들에게 맞추어져 있다면 그 가르침이나 교육 내용이 나무 고차원적이라 오히려 평신도들은 그 안에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점점 내용이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꾸르실료 운동은 그 맛을 잃게 되고 점점 사그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꾸르실료 기본사상 책에는 교회에 열심한 사람들보다 오히려 교회에서 떠난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게 하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교리가 매력 있으려면 그 내용이 많이 배우지 못한 이들에게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비유가 사용될 수 있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할 수 있습니다. 너무 고학력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면 교리가 어려워지고 실생활과 괴리된 교리를 가르쳐 결국 인도의 불교처럼 일반 사람들에게 외면받게 될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세상을 3부분으로 나누는 이론이 있습니다. 하나는 빛의 속도보다 느린 세상입니다. 뉴턴의 법칙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두 번째는 빛의 속도와 같은 세상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양자역학이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빛의 속도보다 빠른 세상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통합되는 세상입니다. 인드라의 세상이고, 홀로그램 우주를 이야기합니다. 이런 세상을 인간의 의식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일상을 살아가는 의식의 세계가 있습니다. 감성, 이성, 오성으로 질문에 답을 하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깨달음의 세계가 있습니다.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또 다른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타볼 산에 오르셨을 때 제자들이 보았던 놀라운 모습입니다. 무의식 또는 초의식의 세상이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셨습니다. 동굴 속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동굴 밖의 세상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모든 번뇌에서 자유로워지는 삶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모든 성인과 성녀들이 원했던 세상입니다.
며칠 전입니다. 생생한 꿈을 꾸었습니다. 길을 가는데 앞에 경찰들이 있었습니다. 자연스럽게 걸어가면 좋은데 약간 주춤했습니다. 그러자 경찰이 저를 불렀습니다. 신분증을 보여주었고, 지갑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가려하는데 경찰이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그릇된 욕망, 헛된 욕망으로 사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치 사도행전에서 에티오피아의 내시가 필립보 사도에게 질문했던 것 같았습니다.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위로와 고독’을 이야기합니다. 악으로부터 오는 위로도 있고, 선으로부터 오는 고독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위로와 고독이 어디에서 오는지 ‘식별’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그릇된 욕망, 헛된 욕망은 넓고 화려해 보여도 결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이끌지 못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그것을 두 개의 깃발로 이야기합니다. 사탄의 깃발은 멋지고, 웅장하고, 강해 보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따라야 할 깃발은 그리스도의 깃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좁은 문이기 때문입니다.
200년 전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당신이 천주교인이요?’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신부님은 당당하게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대답은 고통과 죽음을 의미하였지만, 천국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얻는 희망의 대답이었습니다. 생각하니 예수님과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닮은 점이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박해를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친구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에게 박해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회광이가 목을 잘 칠 수 있도록 협조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라고 하였습니다. 환난의 때이니 믿음을 더욱 강하게 가지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3살의 삶을 사셨지만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25살의 삶을 살았지만 수선 탁덕으로서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는 것은 화려한 깃발이 아닙니다. 그릇된, 헛된 욕망이 아닙니다. 낮은 데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나는 천주교인이요.’라고 말했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당당함입니다. 10월을 보내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어느 깃발을 향하고 있을까?

겸손은 모든 덕행의 최고봉이자 기초입니다. 겸손은 천국 문을 열수 있는 열쇠입니다!
-양승국신부-
어느 만찬에 초대받으신 예수님께서 참으로 볼썽 사납고 눈꼴신 장면을 목격하십니다. 탄생 때부터 시작해서 나자렛에서의 숨은 생활, 그리고 역동적인 사목활동기간,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자신을 극도로 낮춘 겸손의 삶을 사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그 장면이 참으로 가관이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상석을 차지하려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예수님 보시기에 얼마나 웃겼을까요. 그 상황이 참으로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였을 것입니다.
제일 높은 자리에 앉으려고 서둘러 걸음을 옮기다가 한명이 뭔가에 걸려 쓰러집니다. 뒤따라가던 사람이 쾌재를 부르면서 자리를 차지하려는 순간, 또 다른 사람이 비호처럼 달려와 간발의 차이로 상석을 차지합니다.
넘어진 사람은 분을 참지 못해 씩씩대고,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빼앗긴 사람은 핏대를 올리며, 내 자리니 얼른 일어나라고 소리를 치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복음 14장 11절)
자꾸만 까마득히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위태위태한 심정으로 바라봅니다. 높이 올라갈수록 내려오기 힘들고, 떨어질 때 충격이 엄청날 텐데...하는 걱정을 하게 됩니다.
요즘 저는 이제야 좀 철이 드는지, 예수님 말씀을 따라 어떻게 하면 끝자리, 낮은 자리에 앉아볼까 늘 고민하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그랬더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해지고 넉넉해지는지 모릅니다. 가장 낮은 밑바닥에 있으니 가끔씩 넘어져도 상처나 충격이 훨씬 덜합니다. 낮은 자리가 주는 축복과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겸손은 모든 덕행의 최고봉이자 기초입니다. 다른 덕들은 겸손의 덕이란 기초 위에 건설됩니다. 겸손이 생략된 신앙, 겸손이 사라진 기도, 겸손이 결여된 권력처럼 위험한 것은 다시 또 없습니다. 겸손은 천국 문을 열수 있는 열쇠입니다.
탁월한 인품을 갖춘 분으로서 학자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존경하는 교수님께 한 제자가 한 가지 질문을 던졌답니다. “스승님,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느끼신 가장 소중한 깨달음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그 겸손하고 훌륭한 스승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깨달음은 내가 큰 죄인이라는 깨달음, 그리고 이런 큰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랑해주신다는 깨달음입니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나야 나! 나정도 되면 괜찮은 거 아니야? 나 말고 누가 있겠어? 그거 내가 다 했어!” 이렇게 겸손이 사라진 우리에게서 하느님께서도 떠나가십니다.
반대로 “이 세상에 내가 가장 큰 죄인입니다. 나처럼 보잘 것 없는 존재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우리를 보시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우리를 통해 당신 사랑의 기적을 펼쳐나가십니다.

끝자리로 가라
-반영억신부-
저는 이런 저런 모임에 가면 제 자리를 확인합니다. 그리고 누군가 와서 그 자리까지 안내해 주기를 바랍니다. 더더욱 낯선 곳에 가면 저를 소개해 주기를 기대하며 한 말씀 해달라는 말을 듣고 싶어 합니다. 본당신부 할 때입니다. 구역 모임에 가면 음식을 나누게 되는데 설거지의 어려움 때문에 일회용 접시를 많이 쓰게 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일반 접시를 사용하도록 해줍니다. 제일 먼저 음식을 챙기고 저만 특별대우 받는 것 같아 죄송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다 어쩌다 똑같이 일회용 그릇을 쓰게 되면 속으로는 누군가가 바꿔주기를 바랍니다. 삶은 따르지 못하면서도 인정받고 칭찬 받기를 원하며, 누군가가 바른 소리를 하면 서운해 하고 오기를 부리기도 합니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도 대접 받기에 익숙해져 있고 또 특별한 예우를 원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루카14,11)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과는 상관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우리가 겸손하다면 그 무엇에도 우리는 초연할 것입니다. 비난을 받는다 해도 낙망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을 듣는다 해도 자만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성 토마스 아 켐피스는 “겸손한 사람은 부끄러움을 당해도 평화를 잃지 않고 잘 있으니, 그는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않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대접 받고 싶은 마음을 떨쳐 버리지 못했으니 겸손의 길은 멀고도 멀게 느껴집니다.
혹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를 청하는 이가 있다면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진대 언제 겸손이 몸에 익을 수 있을까?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 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마라. “이리 올라오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내려가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낫다”(잠언25,6-7).
기회가 되면 더 낮은 자리를 잘 선택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루카 14,1.7-11: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가, 사람들이 모두 상석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라고 하셨다. 잔치의 초대를 받았을 경우의 예를 들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바로 겸손의 덕을 갖추라는 것이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8절)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것은 도둑질하다 붙잡혀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한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은 아무도 그를 헛된 자만에 차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받아 마땅한 명예를 누리게 될 것이다. 이를 두고 예수께서는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 앉게’ 할 것이다.”(10절) 하신다.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마땅히 빛나는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앞서야 한다. 덕행의 법칙은 뽐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겸손한 신앙인이 있고 교만한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자신해서는 안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우리가 만일 참된 겸손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닿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양쪽 장대는 우리의 영과 육이며, 가로대는 겸손과 수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들을 밟고 하느님께로 올라가는 것이다.
그 겸손의 덕을 어떻게 갖추라는 것인가?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인정하는 데 있는 것이다. 즉 자기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 자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였다.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세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삶의 균형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앞에, 복음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들고나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정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한상우신부-
낮추면
길이
보인다.
교만을
씻어주는
주님의
참된
겸손이다.
낮추는 사랑이
깊어지는
참사랑이다.
낮추는 마음에
배신은 없다.
모든 아픔은
높아짐에서
비롯되는
관계의 분열과
파국(破局)이다.
끝까지 낮추면
모든 관계는
조용하다.
우리
모두는 끝내
낮아질 수밖에
없는 낮아짐의
자녀들이다.
낮추고
낮아져야
주님과
함께 갈 수
있다.
가장 높은 곳과
가장 낮은 곳은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다.
복음의
이야기는
낮추는 삶의
모든
이야기이다.
마음을 낮추면
소중한 것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낮추면
하느님을
알게된다.
낮추고
낮아지는
삶의
신비이다.
하느님께서
온전히
낮아지심으로
높아진 우리를
새롭게
치유하신다.
아름다운
단풍이
낮아지신
주님 발아래
떨어져내린다.
아름다운 삶이란
낮추는 삶이며
주님께
내려오는 삶이다.
그래서 구원은
낮추고
또 낮아지신
예수님을
만나고 닮아가는
삶이다.
낮추면 다시
열리는 삶의
선물이다.
겸손된 마음으로
삶의 여정을
다시 걸어간다.
우리의 자리를
아는 것이
참된 지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려 주십니다.
"그들의 실패로 다른 민족들이 풍요로워졌다면, 그들이 모두 믿게 될 때에는 얼마나 더 풍요롭겠습니까?"(로마 11,12)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의 계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새 계약을 거부함으로써 이방인들이 구원을 받게 된 사실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이 아직 믿지 않는 상태에서도 세상에 구원이 이처럼 주어진다면, 언젠가 이스라엘까지 믿게 되는 날이 오게 될 때에 구원의 풍요와 영광이 얼마나 클지 미루어 알 수 있지요. 사도는 동족들이 불신하고 배척하는 상황에 절망하지 않고 긍정의 미래를 꿈꿉니다.
"그들은 ... 여전히 하느님께 사랑을 받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은사와 소명은 철회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로마 11,28-29)
하느님은 당신의 첫 백성인 이스라엘이 설령 당신 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도 그들에게서 사랑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그뿐입니까? 그들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았던 축복, 그들에게 거셨던 기대도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은사와 소명은 사라지지 않으며, "주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화답송)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은 혼인 잔치에서 은근히 벌어지기 일쑤인 자리 갈등에 해답을 제시하십니다.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루카 14,10)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는 대부분 신분이나 세력, 중요도가 자리로 표현되기 마련이지요. 마침 혼인 잔치에서 그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오히려 가장 낮은 자리를 선택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높아 보이고 싶은 인간 본능에 도전이 되는 말씀이지요.
복음을 제1독서와의 연관성 안에서 관상하면, 혼인 잔치는 구원 상황을 보여 줍니다. 어쩌면 이스라엘은 먼저 잔칫집에 들어와서 좋은 자리, 높은 자리를 차지한 부류일 것이지요. 그리고 혼인 잔치에 나중에 들어오는 이들, 이제 막 새로운 구원의 길을 배워 익히고 있는 다른 민족들은 철부지에다 낮은 자리가 익숙한 가난한 이들에 비길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초대된 이들의 응답에 따라 전복이 일어납니다. 높은 자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던 이들이 혼인 잔치를 거부하면서 밀려나기도 하고, 가까스로 자리는 보전하더라도 뒷전이 될 수도 있지요.
반면 제도적으로나 신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이들이 뜨거운 사랑과 믿음으로 혼인 잔치의 주인공이 되기도 합니다. 구원에는 사람의 인위적인 의도보다 하느님의 사랑의 섭리가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으로 구원의 보편성이 확장되고, 그분의 가르침으로 사람 사이의 균형이 새로이 정립됩니다. 구원은 제도적 타이틀, 신분적 높낮이, 소유 정도에 기인하지 않고, 가장 작고 가난하고 낮은 곳을 점유하고 계신 예수님과 가까이 있는 이에게 돌아가는 선물이니까요.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이스라엘이 믿음으로 돌아서면 만민의 구원이 이루어지듯, 높은 곳에 있던 이들이 다투어 낮은 자리를 찾을 때도 마찬가지겠지요.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 곁에 머물기 위해, 바로 그분 곁에서 그분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되기 위해 가난해질 용기, 낮은 자리를 차지할 용기를 구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모두가 더 높고 크고 많은 걸 움켜쥐기 위해 내달리는 세상에서 신랑이신 분과 혼인 잔치에 들어갈 희망으로 거센 물살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내가 앉을 자리
-김찬선신부-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산 위에 올라가면 높고 낮은 것을 따지는 것이
다 도토리 키 재기 식으로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느낀다.
하느님 앞에 서면 인간끼리 누가 높은지 따지는 것이 우습다.
이것이 오늘 복음을 읽고 즉시 든 생각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초대받거든 끝자리에 앉으라고 하는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누구의 초대를 받고
어디로 초대를 받아야 할 것인가도 생각되었습니다.
왜냐면 높낮이를 따지는 것은 하느님의 초대를 받지 않고
그래서 하느님 앞에 있지 않은 사람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초대를 받고 하느님 앞에 있으면
앞서 봤듯이 도토리 키재기를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묵상의 결론을 내리면
높은 자리에 오르고 거기에 앉으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느님께 초대받지 않고 하느님 앞에 앉아있지 않은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의 겸손에 대한 권고를
마음에 마음에 더 소중히 새기는 오늘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천하고 무식하며 멸시받을 자로 취급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칭찬과 높임을 받을 때도 자기 자신을 더 나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종은 복됩니다. 사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있는 그대로이지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 의해 높은 자리에 올랐다가,
자기 의지로 내려오기를 원치 않는 그런 수도자는 불행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