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10. 26. 06:41

2021년 10월 26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어떤 여자가 누룩을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 덩이가 부풀어 올랐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런 누룩과 같다.

(루가 13,18-21)

 

 “To what shall I compare the Kingdom of God?
It is like yeast that a woman took
and mixed in with three measures of wheat flour
until the whole batch of dough was leaven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말씀의 초대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자라서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이는 겨자씨와 밀가루를 온통 부풀어 오르게 하는 누룩에 비유하신다(복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새 모이만큼 먹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적게 먹는다’라는 의미로 주로 사용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새는 적게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의 몸집에 비해 엄청난 양을 먹는다고 하더군요. 몸무게가 3kg인 왜가리는 0.4kg짜리 물고기를 삼킬 수 있습니다. 이는 45kg인 사람이 음식 6kg을 먹는 것과 같습니다.


새는 신진대사가 활발하고 체온이 높아서 많은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이는 많은 먹이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들은 하루 중 대부분을 먹이를 찾고 소화하는데 보냅니다.

결국 ‘새 모이만큼 먹는다’라고 말하면 무엇일까요? 사실대로 말한다면, 매일 커다란 피자를 27개씩 먹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적게 먹는다는 말이 절대 아닙니다.

오랜 시간 알고 있는 지식도 이렇게 거짓일 수 있습니다. 하물며 내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이 진실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을 말하고 거짓된 행동을 하곤 합니다. 따라서 늘 겸손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낮추고 또 낮추어야 합니다. 내 말보다 남의 말을 듣는 데 집중하고, 판단하고 단죄하기보다 인정하고 지지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주님을 온전하게 따르는 모습이고, 주님과 함께 하는 모습이 됩니다.

주님과 함께하면 엄청난 가치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엄청난 힘을 가지신 주님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그마한 겨자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듯이, 또 누룩이 빵을 크게 부풀어 오르게 하듯이, 주님께서는 아주 작은 것을 크게 변화시키시는 전지전능하신 힘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이런 분과 함께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그 주님의 힘을 의심하고 거부합니다. 주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이 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셨던 겸손의 삶을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시면서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의 육체를 취해서 이 땅에 오신 주님의 겸손을 우리도 배우고 익혀서 삶 그 자체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때 도저히 변화되지 않을 것도 변하게 됩니다. 특히 주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 불가능한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 사실에 받아들이면서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하는 데 집중하시길 바랍니다.
커다란 가짜보다 작지만 진짜 삶을 키워 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다(김이율).

우정을 키워야 합니다.

과학 저널리스트 리디아 덴워스는 60세가 넘으면 배우자보다 친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친구가 있는 사람은 노화에 따른 고난을 잘 견디고, 인지 능력도 오래 유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나이 들어 연인을 잃어도 우정에 기대어 살 수 있게 진화되었음을 말합니다.

공감이 가는 말이었습니다. 연인이 없어서(신부이기에 그렇다는 것을 굳이 쓰지 않아도 아시죠?) 잘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친구의 자리가 무척 크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신부 친구들 뿐 아니라 사회 친구들과도 요즘에는 자주 연락하고 만나게 됩니다.

예전에는 혼자 지내는 것이 편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함께 우정을 키워야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과학적으로도 노화를 줄이고 인지 능력을 더 오래 유지한다고 하니,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친구가 있다면 이번 기회에 연락 한번 해보면 어떨까요?

 하느님 나라와 파스카: 겨자씨는 양의 살, 누룩은 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전하려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해 비유로 설명해주십니다우선 겨자씨와 같다고 하십니다겨자씨는 나무로 자라서 하늘의 새들이 깃들이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하늘의 새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우선 쉴 곳을 찾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그렇다면 겨자나무는 그 사람을 맞아들이기 위해 내가 참아내야 하는 무엇일 것입니다그냥 그 사람을 받아들이기 위해 내가 져야 하는 그 사람의 십자가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참사랑은 사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십자가를 내 심장에 박게 하는 것입니다. 

 

    몬테팔코의 십자가 글라라 성녀는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예수님을 자신 안에 머물도록 초대하였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슬픈 얼굴로 걸어가시자 글라라 성녀는 어디로 가시느냐고 묻습니다그랬더니 예수님은 요즘엔 내가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이 없구나!”라며 탄식하십니다

    그러자 성녀는 제 심장에 당신의 십자가를 꽂으십시오.”라고 말합니다예수님은 성녀의 심장에 당신의 십자가를 꽂습니다.

    성녀는 20대 초반에 탈혼 중에 돌아가시는데 그녀의 심장에서는 예수님 수난 도구들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800년이 지난 지금도 썩지 않는 이 심장과 몸을 우리는 아직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이뤄진 사람은 이렇게 사람들이 그 사람 안에 십자가를 꽂고 쉴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줍니다사람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 사람이 진 십자가를 꽂을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과 같습니다하지만 나로 가득 차 있다면 공간이 없어 누구도 쉬게 하지 못합니다예수님은 당신 진리와 은총으로 우리를 십자가를 꽂을 굳은 땅으로 만드십니다.

  

    하지만 마음이 내 욕심으로 꽉 차 있다면 어떻게 십자가를 내어줄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그래서 누룩이 필요한 것입니다누룩은 밀가루 서 말에 들어가 그 밀가루를 부풀게 합니다부풀게 만든다는 것은 그 안의 공간을 확장하게 시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받으신 후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광야에서 세 유혹을 이기셔야 했습니다그 유혹은 돈과 육욕과 교만이었습니다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그것을 이기셨습니다그 결과 당신 안에 하느님과 이웃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과 쾌락의 마음그리고 이웃을 심판하고 불평하는 마음이 그 누가 들어올 공간을 주지 못하게 만듭니다이렇듯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역할은 내 안에서 죄를 없애고 하느님과 이웃을 받아들일 공간이 생기게 합니다그러면 행복한 것입니다이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CPBC에서 방영된 향심기도10강 관상에서 김귀웅 신부님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그분은 성탄 때 다문화 가정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고 신자들이 나와서 그 인간 구유에 경배하게 하였다고 합니다신자들은 처음에 왜 우리가 사람에게 경배해?’라는 마음을 갖는다고 합니다그러나 성탄의 참 의미를 알게 되자 모두가 나와서 한 어머니를 성모님처럼한 아기를 예수님처럼 경배를 하고 들어가더랍니다.

  

    만약 사람들 안에 여전히 나는 다문화 가정 어머니와 아이를 성모님과 예수님처럼 똑같이 대할 수 없어!’라는 생각이 있다면 인간 구유를 경배하기를 원치 않을 것입니다그러나 진리와 은총의 누룩으로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자아의 생각을 몰아내면 마음이 넓혀져 모든 이를 그리스도로 보게 됩니다    

 

    사람은 다른 이들을 자신의 수준으로 봅니다본인이 모기면 이웃도 모기고 본인이 사람이면 이웃도 사람이며 본인이 그리스도이면 이웃도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영혼을 확장하는 것이 성령의 역할입니다그렇게 마음을 넓힌 사람만이 겨자나무가 꽂힐 공간을 내어줄 수 있는 것입니다.

  

    김귀웅 신부님은 예도 들어줍니다한춘희 님의 파스카의 주인 – 시어머님이란 글이었습니다간추려보면 내용이 이렇습니다.

    80세이신 시어머니가 서서히 치매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시아주버님은 어머니를 치매 전문시설에 모시자고 제안을 했습니다모두 결정을 내리기 어려울 때 남편이 우리가 어머니를 모시면 어떻겠냐고 제안했습니다한춘희 님은 고3인 쌍둥이 아들들이 있었지만그 의견을 고민 끝에 받아들였습니다.

  

    우선 소리 지르고 문을 두드리는 것 때문에 소음이 걱정되어 아파트 10층에서 1층으로 이사를 했습니다제일 큰 방을 어머니에게 드리고 가족들은 작은 방에 머물렀습니다며느리는 성당 활동에다 제과점을 운영하고 아이들을 돌보며 어머님 식사는 끼니마다 새밥을 지어드렸습니다. 

 

    어느 날 새벽 1시쯤 학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도둑이라며 몽둥이로 내쫓으셨고 또 어느 날은 거실에 보따리를 여러 개 묶어놓고 빨리 한 개씩 들고 따라오라며 6.25 전쟁 당시 배를 타고 피난 온 것을 재현하곤 하였습니다그럴 때면 가족들은 어머님을 따라 보따리를 하나씩 들고 아파트 단지를 몇 바퀴 돌고 난 후 어머니를 업고 들어와 주무시게 해 드렸습니다.

  

    모두가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지만 고아이들에겐 더욱 그랬습니다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혀 고통받으시는 예수님이 바로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신 거야그러니 예수님으로 사랑해드리자.”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이 일은 기적을 만들어내었습니다주위에 시어머니를 모시기를 꺼리던 두 가정도 시어머니를 모셨고 서로 의견을 나누며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신자분들도 많이 도와주었고 신부님은 여러분이 이 세상의 하느님 나라 증가자들이십니다.”라며 힘을 주었습니다

    봉성체 할 때면 어머니는 놀랄 만큼 맑은 정신으로 들어와 기도문을 외우셨습니다시누이들도 어머니를 뵈러 와서 어머님을 끌어안고 즐거워했습니다그리고 갈 때는 고맙다며 냉장고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어머니도 가끔 잠든 아들과 손자들의 이불을 덮어주고 방해가 될까 봐 거실에 혼자 나와계시곤 했습니다.

  

    그렇게 3년 정도 고생하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장례의 모든 일정을 다 마쳤을 때두 아들은 나중에 이 같은 상황이 오면 우리도 엄마 아빠처럼 할 것이라고 해서 지금까지의 모든 어려움이 다 사라지는 것 같았습니다

    돌이켜보면 무엇을 해 드린 것보다 받은 선물이 더 큰 것 같았습니다그 선물이란 바로 어머니가 모시고 오신 예수님!”이었습니다어머니가 파스카의 주인이셨습니다이것이 가정을 하느님의 나라로 만드는 방식입니다.

  

    시어머니는 십자가를 가지고 오셨습니다며느리 가족은 그 십자가를 꽂을 공간을 마련해 주었습니다그 힘은 기도 생활에서 왔습니다시어머니를 그리스도로 보는 진리와 그 힘을 은총의 성사 안에서 채운 것입니다

    이는 마치 피로 문설주를 바르고 집을 죽은 어린 양에게 내어준 파스카와 같습니다피를 문설주에 발라 마음의 문을 열고 영혼을 넓히는 일이 누룩의 역할이고그 안에서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십자가를 거부하지 말게 하는 일이 겨자씨가 하는 역할입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가 된 사람은 모든 이 안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때문에 내 심장을 굳은 땅으로 내어줍니다이 역할이 누룩이 하는 것이고 그 누룩으로 공간을 내어줄 마음이 생긴 사람은 누군가의 십자가를 자기 심장에 꽂게 만들어 그 사람을 쉬게 합니다그곳이 하느님 나라입니다이 신비가 이뤄지면 곧 파스카의 실현입니다그 파스카를 실현하는 나라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45억 년 전에 지금부터 컸던 지구에 화성만한 행성이 충돌하였습니다그 충돌의 결과 지구는 회전축이 기울어졌고지금과 같은 환경이 되었습니다계절의 변화가 생겼습니다충돌의 결과 지구에서 떨어져나간 부분이 달이 되었습니다달은 지구에서 40만 킬로미터 떨어져 있지만 지구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밀물과 썰물을 만들어 냅니다지구의 자전주기가 24시간이 될 수 있도록 해 줍니다밀물과 썰물은 갯벌을 만들어 내고갯벌은 생명의 터전이 되었습니다. 6천 5백만 년 전에는 지름 10킬로미터의 운석이 충돌하였습니다그 결과 지구를 지배하던 공룡이 멸종하였습니다그 빈자리를 포유류가 차지하였습니다. 7만 5천 년 전에는 인도네시아에 큰 화산 폭발이 있었습니다그 결과 북반구에 살았던 호모 에렉투스네안데르탈인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화산 폭발의 영향을 덜 받았던 아프리카에 살던 호모 사피엔스가 아프리카를 넘어 네안데르탈인의 빈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지금 우리가 있습니다몇 번의 우연이 지금의 우리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우리가 인식하지 못하고우리의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이 세상을 설계하신 분이 있다고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그 표현과 방법에 따라서 다양하게 인류의 공동체에 드러난 것이 종교입니다우리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길가의 유리와 구리와 모래가 우연히 수없이 뒤섞여서 스마트 폰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그런 우연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우주의 나이만큼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인류는 문명의 시초부터 삶과 죽음을 설계하는 분이 있음을 인식하였습니다그런 인식의 과정이 신화가 되었고그것이 인류의 도덕과 가치와 제도로 적용된 것이 종교입니다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믿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세상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아픈 사람을 고쳐 주실 때도 믿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우리 모두가 믿음으로 하나가 된다면그런 믿음이 현실이 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 하느님나라는 시작되는 것입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믿음의 가능성을 이야기 하십니다바로 겨자씨와 누룩의 이야기입니다믿음이 행동으로 옮겨지면 큰 결실이 맺어질 것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가능성을 보셨습니다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믿음이 강해졌고희망으로 고통과 시련을 이겨냈습니다그리고 마침내 갈릴래아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하느님나라는 온 세상의 밭에서 결실을 맺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그것을 내 마음의 정원에 심고 잘 가꾸면 나의 몸이 하느님 나라를 향해서 갈 것이라고 합니다우리는 세례를 받으면서 하느님 나라의 겨자씨를 우리 마음의 정원에 심었습니다기도와 희생나눔과 봉사의 거름을 충분하게 주는 분들은 그 마음에 하느님 나라가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그러나 세상의 것들에 관심을 갖고 살다보면 우리 마음에 심어진 하느님 나라의 씨앗은 메마르고썩어가게 될 것입니다우리 마음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을 잘 키워서 하느님 나라가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들 기뻐하며 거두리라.”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십니다!

 -양승국신부-

 

하루에 셀 수도 없이 세탁기를 돌리고, 세탁물을 널고 개고를 반복하면서, 드는 한 가지 의문입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매일 매순간 끝도 없이 요구되는, 별것 아닌 듯 여겨지는 이 작은 봉사, 오늘 내 손때 묻은 이 보잘 것 없는 봉헌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기나 하려나? 

 

정신적, 영적으로 힘겨워하는 사람들 동반하시는 분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언제나 똑같은 하소연이 되풀이 됩니다. 별로 진전되는 것은 없는 듯, 지루한 과정의 무한 반복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 말씀 들으니 조금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복음 13장 18~1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역동성, 확장성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보잘 것 없는 봉헌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놀랄 정도로 폭발적인 확장세를 보인답니다. 오늘 내 작은 봉사와 희생이 하느님 나라에서는 엄청난 효과를 발휘한답니다.

  

꼬질꼬질 손때 잔뜩 묻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생각하니, 오늘 비록 힘겨워도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작은 봉헌과 선행, 작은 봉사와 사랑의 실천을 계속해나가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씨앗처럼 겸손하셔서 인간으로 나타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나무처럼 커지셨습니다. 고난을 당하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십니다. 시장하실 때는 씨앗이시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나무이십니다.”

  

“그분은 한편으로는 인간이 처한 조건의 메마름을 견디시고 다른 한편으로는 당신의 신성으로 풍성함을 베푸십니다. 매 맞고 조롱받고 모욕당하실 때 주님은 씨앗이고, 눈먼 이를 보게 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죄를 용서하실 때 주님은 나무이십니다.”(토리노의 막시무스 교부)

 <생명력>

 -송영진신부-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8-19).”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0-21).”

 

이 말씀을, “하느님의 나라를 인간의 눈으로 보면, 지금은 작고 보잘것없는

나라로 보이겠지만, 언젠가는 모든 민족들이 깃들일 수 있는 나라가 될 것이다.”

라는 ‘예언’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외적 성장에 초점을 맞춘 비유이고,

‘누룩의 비유’는 내적 변화에 초점을 맞춘 비유인데, 사실상 뜻은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 그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서 말씀하셨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창세 15,5-6).”

아들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별들처럼 많은’ 후손을 약속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은

‘겨자씨의 비유’와 비슷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이 그렇게 많아지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는데,

그래도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믿음’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지금의 모습만 보고 실망하지 말고,

나중에 언젠가는 큰 나라로 자라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는 가르침.

(믿음이 없으면 씨를 심지 못하고, 씨를 심더라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두 비유에서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생명력’입니다.

사실 겨자씨가 자라서 겨자나무가 되는 것 자체는 놀라운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입니다.

놀라운 점은, 작은 씨 안에

큰 나무로 자랄 수 있는 생명력이 들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말은 겨자씨뿐만 아니라 모든 씨앗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르침을 좀 더 생생하게 주시려고 겨자씨로 표현하셨지만,

다른 씨로 표현하셨더라도 뜻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씨가 작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작은 씨든지 큰 씨든지 그 안에 들어 있는 생명력은 언제나 놀라운 일입니다.

이 생명력의 원천은 하느님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도대체 아폴로가 무엇입니까? 바오로가 무엇입니까? 아폴로와 나는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정해 주신 대로, 여러분을 믿음으로 이끈 일꾼일 따름입니다.

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나 같은 일을 하여,

저마다 수고한 만큼 자기 삯을 받을 뿐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협력자고,

여러분은 하느님의 밭이며 하느님의 건물입니다(1코린 3,5-9).”

우리가 어떤 일에서 놀라운 결과를 만들어냈다고 해도,

또 놀라운 업적을 쌓았다고 해도 잘난 체 할 것이 없습니다.

일은 하느님께서 하시고 우리는 협력자일 뿐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은, 예수님의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루카 17,10).”

‘쓸모없는 종’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낮춘다고 해서

정말로 쓸모없는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겸손하게 낮추는 사람은 진짜로 하느님의 ‘쓸모 있는 일꾼’이 되고,

자기가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잘난 체 하는 사람은 ‘쓸모없는 종’이 됩니다.

<이 말은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일’에 그대로 적용됩니다.

좋은 예가 예루살렘 성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나가실 때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한 돌들이고 얼마나 장엄한 건물들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너는 이 웅장한 건물들을 보고 있느냐?

여기 돌 하나도 다른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마르 13,1-2)”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가 재건축한 것이었는데,

그 자신이 자랑했던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성전은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대로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도대체 위대한 업적이 무엇입니까?

하느님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업적은 허무하게 무너질 바벨탑일 뿐입니다.>

 

‘겨자씨의 비유’는 ‘작은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힘이 없어서 많은 일을 하지 못하고, 가진 것이 없어서 하느님께 많이 바치지도

못하는 ‘작은 이들’도 누구나 하나의 겨자씨와 누룩이 될 수 있습니다.

동전 두 닢을 봉헌한 가난한 과부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헌금함에 예물을 넣는 부자들을 보고 계셨다.

그러다가 어떤 빈곤한 과부가 렙톤 두 닢을 거기에 넣는 것을 보시고 이르셨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저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 저들은 모두 풍족한 데에서 얼마씩을 예물로 넣었지만, 저 과부는

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넣었기 때문이다.’(루카 21,1-4)”

가난한 과부가 보여 준 모범은, 사람들을 내적으로 변화시키는 누룩과 같습니다.

(물론 ‘작은 이들’의 경우에도,

일은 주님께서 하시고, ‘작은 이들’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의 협력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빵 다섯 개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신 것처럼

‘작은 이들’이 바친 동전 두 닢으로도 성전을 지으실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자신이 하는 일이 보잘것없다고 부끄러워할 것도 없고,

열등감에 빠져도 안 됩니다.

자기보다 작고 힘없는 이들이 하는 일을 비웃거나 무시해도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작은 사랑 실천 한 번이, 우리가 바치는 기도 한 번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누룩이 될 수 있고,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하는 겨자씨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유명한 사람이 아니어서 역사책에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인정해 주신다면,

그 사람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위대한 사람’입니다.

하느님께서 알아주시지 않는다면,

인간 세상에서 떠받들고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은 전부 다 부질없는 일이고,

그런 것을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복음: 루카 13,18-21: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 수 있을까!

 -조욱현신부-


하느님의 나라가 겨자씨에 비유되는 까닭은 씨앗이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는 모습이 믿음이 커가는 것과 똑같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하느님의 말씀 한마디로 왔기 때문이다. 그 나라는 들으므로 받아들여지고 믿음으로 씨가 뿌려진다. 믿음을 통하여 뿌리내리고 희망으로 자란다. 그 나라는 신앙고백으로 퍼져나가고 덕행으로 넓어진다. 그러면서 많은 가지로 뻗어 간다. 그리고 그 가지들을 하늘의 새들의 보금자리로 내어 준다.

 

하느님 나라가 겨자씨와 같고 믿음이 겨자씨와 같다면, 믿음이 곧 하느님 나라이며 하느님 나라가 곧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음을 지닌 사람에게는 하느님 나라가 있다. 그 나라와 믿음이 우리 안에 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17,21) 말씀하셨다. 신앙을 고백한 베드로는 사람들을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 주는 열쇠를 받았다(마태 16,19 참조).

 

겨자씨는 그리스도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겨자씨처럼 아주 작고 낮게 겸손한 모습으로써 인간으로 태어나셨고, 하늘에 오르심으로써 나무처럼 커지셨다. 고난을 겪으실 때는 씨앗이시고 부활하실 때는 나무이시다. 시장하실 때는 씨앗이시고 빵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실 때는 나무이시다. 복음에서 그분은 당신을 씨앗으로 표현하신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누룩은 조금만 넣어도 금세 반죽 전체에 퍼져 제 역할을 한다. 하느님의 말씀도 우리 안에서 이렇게 작용한다. 우리가 말씀을 받아들이면, 말씀은 우리를 거룩하고 흠 없게 만든다. 머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고루 배어들어 영적인 인간이 되게 한다. 우리는 이성적이며 거룩한 누룩을 마음에 받아들인다. 이 값지고 거룩하고 순결한 누룩 덕분에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적인 누룩이시다. 반죽 속의 누룩이 겉모양이 아니라, 그 능력으로 반죽을 능가하듯이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으로서 모든 인간을 능가하신다. 복음에 나오는 여인은 교회를 의미한다. 우리는 이 여인의 반죽이며, 여인은 하늘 지혜의 빛이 우리의 영을 속속들이 모두 덮을 때까지 우리 마음속 깊숙한 곳에 주님을 숨겨 둔다.

 

우리 인간의 뜻과 욕망이 성령을 거스르지 않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이 육을 거스르지 않을 때(갈라 5,17 참조), 우리 안에 변화, 즉 발효가 일어난다. 우리가 하느님의 뜻에 반대되는 행위를 죽이면(로마 8,13 참조), 우리는 하느님의 숨을 통해 생명의 숨을 얻었음을 알게 되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잘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여 살게 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희망으로 초대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 자라서 너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루카 13,19)
"그것은 누룩과 같다. ...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루카 13,21)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겨자씨와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둘 다 이스라엘 가정에서 쉽게 접하는 흔하디 흔한 물질들이지요. 둘의 공통점이라면 너무 미소하고 흔해서 그다지 눈에 띄지도 않고 귀하게 취급되지도 않는다는 점, 그리고 자기 혼자서는 성장할 수 없다는 점, 또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유익이 된다는 점입니다.

겨자씨는 흙 안에서, 누룩은 밀가루 안에서 열과 수분과 양분을 만나 변형됩니다. 겨자씨는 상상할 수 없이 커다란 나무가 되어 새들까지 깃들이는 거처가 되고, 누룩은 빵을 부풀게 하여 여럿에게 생명을 선사합니다.

모든 이는 하느님의 모상으로서 내면에 선하고 고귀한 인격을 소유하고 있지만, 극도의 죄악에도 쉬이 노출되어 탐욕과 욕정의 노예로 타인을 짓밟고 파괴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 안에서 주된 체험이 무엇이었는지, 어느 면에서 사람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인간관과 세계관, 신관의 기울기는 상당히 달라지지요.

세상을 너무 순진무구한 눈으로만 보는 것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도 회피일 따름입니다. 사람이 선하기만 하지도 않고 악하기만 하지도 않듯이 세상도 마찬가지니까요.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쉬이 눈에 띄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미소하고 무가치해 보이는 작은 것들, 작은 이들 안에서 볼 수 있는 시선을 지닙니다. 탐욕과 폭력이 난무하는 세상 속에서 모두 안에 숨겨진 겨자씨 같고 누룩 같은 하느님 나라의 씨앗에 희망을 거는 이들이지요. 실패와 어둠과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고 기다리는 능력자여야 합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 신비를 명료하게 표현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로마 8,24-25)
구원 역시 하느님의 나라와 같이 쉽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자판기처럼 즉각적인 결과물을 내주지도 않지요. 구원은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않은 채 사력을 다해 믿고 기다리는 이 안에서 차츰 완성되어 갑니다. 희망할 수 없는 상황에서 희망할 줄 아는 이는 구원의 여정 안에 있습니다.

지금 사방이 온통 어둠에 둘러싸여 희망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더라도 온 힘을 다해 희망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없는 게 아니니까요. 희망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디며 믿음의 다해 희망하는 여러분,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온 존재를 걸고 나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희망의 차례

 -김찬선신부-


로마서의 바오로 사도는 지금까지 믿음으로 구원받음을 얘기하더니

오늘은 희망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얘기합니다.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그러니까 믿음만 구원의 요소가 아니라 희망도 구원의 요소라는 얘기인데

믿음과 희망만 구원의 요소이겠습니까? 사랑도 구원의 요소이고 사랑이 

제일 중요한 요소이지만 오늘은 희망과 구원을 얘기하는 것일 뿐이지요.

 

'희망은 있어'라는 말과 '어디에 희망을 걸고 있다'는 말을 쓸 때

우리는 언제 이런 말을 씁니까?

 

정말로 희망이 있을 때가 아니라 오히려 희망이 없을 때 쓰지요.

희망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때 그리고 대부분에게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희망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이지요.

 

사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고,

대부분 그런데도 희망을 보는 사람에게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희망을 보는 사람도 보이기에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지 못하는 대부분에게처럼 그에게도 보이지 않지만

그래도 희망은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이 보는 것이고

이 때 희망이 있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희망을 보고 가능성을 봅니까?

그도 과거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절망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때도 오늘 바오로 사도 말씀처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보니,

다시 말해서 인내의 시간이 지나니 희망이 나타난 경험이 있는 사람,

이런 절망 체험과 희망 체험을 모두 한 사람이 희망을 또 보는 거지요.

 

이것이 인간적인 체험이라면 신앙 체험도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았고 없었지만

그런데도 인간에게 희망이 없기에 오히려 하느님께 희망을 걸었더니

인간적으로 전혀 불가능하던 것이 이루어진 체험을 말하는 것입니다.

 

암이 너무 전개되어 서양 의학에서는 손을 들면

우리 인간은 어쩔수없이 한의나 자연 치유에 희망을 걸게 되고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하느님께 희망을 걸게 되지요.

 

의사가 희망이 있다고 하면 의사에게 희망을 걸지만

의사에게 희망이 없을 때 하느님께 희망을 거는데

의사에게 절망할 때 그때서야 희망의 차례가 하느님께도 간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의 차례가 있습니다.

 

가까이 믿었던 사람에게서 시작하여 멀리 믿을만한 사람에게로,

그 사람에게서 더 유명하고 그래서 더 믿을만한 사람에게로,

그리고 마침내는 인간에게서 하느님께로 희망의 차례가 있는데

실망과 절망의 차례에 따라 희망의 차례가 있는 것이고,

차례차례 다 절망한 끝에 하느님께 희망의 차례가 가는 겁니다.

 

이것을 오늘 복음 얘기와 연결시킬 수도 있을 겁니다.

겨자씨가 아무리 작아도 거기에 큰 나무의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사람,

믿기에 자기 정원에 정성껏 심는 사람에게 겨자씨는 큰 나무가 되듯이

하느님 나라도 겨자씨와 같음을 믿고 자기 정원에 심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하느님 나라 건설이 지금은 비록 겨자씨처럼 작고 형편없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면 이 미미한 시작이 큰 결실을 거두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희망의 씨앗을 자기 정원 곧 마음에 심는 사람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29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