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10. 8. 06:29

2021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 게 와 있는 것이다
(루가 11,15-26)

  

If it is by the finger of God 
that I drive out demons,
then the Kingdom of God 
has come upon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 어느 나라가 더 크고 힘 있는 나라일까요?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의 나라가 사탄의 나라보다 더 크고 힘이 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세상을 살아가며 마주치는 모습들에서 하느님의 손길보다 사탄의 힘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제 착각일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힘이 아니라 사탄의 힘으로 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였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의 나라로 바라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보고 들은 사람들의 반응도 그러하였는데, 하느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이야기를, 그분의 가르침보다 성공하는 방법을 더 좋아하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우리가, 하느님의 손가락이 펼치시는 능력을 바라보기는 더욱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구나 사탄이 지닌 힘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보다 사탄의 유혹이 더욱 부지런하게 우리에게 손짓합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향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해서든지 멀리 떨어뜨려 놓으려고 더욱 부지런하고 달콤하게 다가옵니다. 또한 유혹에서 한 번 벗어났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더 악하고 강한 영이 우리를 위협합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은 하느님과 사탄의 투쟁 속에서 전개됩니다. 분명 하느님의 힘이 사탄의 능력보다 더 강하고 위대합니다! 그분의 힘을 믿으면서 오늘 우리 자신에게 다가오는 작은 유혹 하나를 이겨 낸다면, 날마다 우리 안에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요즘에는 인터넷에 요리 레시피를 쉽게 찾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레시피를 따라 요리를 하는 분도 많은 것 같습니다. 레시피에서 제시하는 재료들을 일일이 구합니다. 그리고 정량에 맞게 손질하면서 준비합니다. 그 뒤에 요리를 따라 하며 만듭니다.


저 역시 이런 방법을 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종종 발생합니다. 재료를 사다가 1~2개를 빼놓고 구매하지 않은 것입니다. 다시 마트까지 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걸리기에 때로는 포기하기도 합니다.

지금도 레시피를 보기는 하지만, 무조건 있는 재료로만 합니다. 음식을 만들어 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끼 식사인데, 고기가 없으면 어떻고 감자가 없으면 또 어떻습니까?

대충 흉내만 내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습니다. 진짜 원하는 맛이 무엇인지 알면 다른 부수적인 것들을 포기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점만 확실히 알면 모든 재료를 갖추고 있지 않아도 나의 만족도를 충분히 채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한다면서 많은 것으로 가지려고 합니다. 그 순간 가지지 못한 몇 가지로 가장 불행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인 몇 가지에 집중할 수 있다면, 가지고 있음 자체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무척 놀랍니다. 그러나 이를 별것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며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요구합니다. 자신의 만족을 채울 수 있는 모든 조건을 다 보이라는 요구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는 너무나 헛된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인지,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인지가 문제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됩니다. 당신께서 사탄과 한편이라면 사탄의 하수인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이라 불리는 성령으로 마귀를 쫓아내십니다. 그분이 하느님의 나라를 가져오시는, 모세보다 위대한 새로운 예언자이심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뜻에 집중하면 절대로 헛된 요구를 할 수 없습니다. 주님만으로도 하느님 나라가 이미 우리 곁에 와 있음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고 있으며, 무엇을 주님께 청하고 있었을까요? 정말로 중요한 주님만을 바라고, 하느님의 영광을 청해야 합니다.
두려움의 종류가 위험의 종류보다 더 많다. 우리는 현실보다 상상 속에서 더 크게 고통받는다(세네카).

무엇이 중요한가?

1973년 어느 신학대학에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까지’라는 실험이 있었습니다. 장차 성직자를 꿈꾸는 신학생에게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라는 질문을 주고 자료로 성경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나눠주었습니다. 신학생들은 자신이 발표할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 때, 담당 교수는 발표는 다른 곳에서 하겠다며 지금 당장 강의실을 옮기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빨리 다른 강의실로 옮긴 학생에게는 가산 점수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신학생들은 서둘러 강의실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복도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힘든 표정을 지으며 벽에 기대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람은 교수가 고용한 배우였습니다. 신학생들의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지요. 신학생들은 과연 어떻게 했을까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읽었음에도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모습이 아닌, 성경에 나오는 사제나 레위의 모습처럼 몸을 돌려 피해서 강의실로 향했습니다.

눈앞의 과제가 제일 중요하다는 생각에, 주님께서 강조하신 사랑이 제외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사랑을 제외하는 삶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아닌 사제, 레위인의 모습으로 사는 삶입니다.

의식적으로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식하지 않는 나의 일상은 그냥 사는 삶이 될 뿐입니다.

 일을 기쁘게 하면 인격이 닦이고 선교를 기쁘게 하면 신격이 닦인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어떤 이들은 예수님께서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말합니다. 성경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는 말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이나 선교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도 한 팀이고 성령으로 일하는 사람도 한 팀이라고 하시며 같은 팀이 어떻게 같은 팀을 쫓아내느냐고 하십니다.

     

    만약 11명이 뛰는 축구경기에서 한 선수가 못한다고 주장이 그 선수를 쫓아내면 10명만 뛰어야 합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리 못 뛰는 선수라도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명이 서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어떨까요? 차리라 나가는 편이 낫습니다. 그 사람이 해 줄 것으로 믿고 있던 동료들은 멍하니 서 있는 선수 때문에 피해를 봅니다. 차리라 없다면 자신들이 조금 더 뛰며 그 자리를 메울 것이니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버리는 자다.” 

 

    예수님께서 감독이시라면 신앙인들은 선수들입니다. 당신의 목적은 악과 싸워 많은 승리를 거두는 것입니다. 그런데 선교를 하지 않는 신앙인이 있다면 그 신앙인은 뛰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오히려 다른 선수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성령은 능력을 줍니다. 그 능력을 받고 아무것도 안 하면 오히려 더 안 좋은 상황이 됩니다. 세례받고 선교하지 않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은 선교의 능력입니다. 이는 마치 우물을 파고 물을 퍼내지 않으면 말라버려 안 좋은 독충들이 그곳에서 살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물 없는 곳을 찾다가 다시 돌아오는 악령들과 같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하지만 아직도 물이 흐르는 우물이라면 그것들은 그 자리에도 머물지 못합니다. 중간은 없습니다. 흐르던가 말라버리던가, 선교하든지 흩어버리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는 것은 그냥 흩어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선교 열정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습니다. 그냥 나만 신앙생활 잘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왜 지칠까요? 선교의 열정에서 진정으로 나를 지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요? 실패와 비난일까요, 아니면 칭찬과 성공일까요?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와 비난 등이 오히려 자신을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잘 압니다. 그래서 멈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공하고 칭찬받아 현재에 머물려고 하는 마음이 자신을 망칩니다.

  

    일본인이 가장 존경하는 경영의 신이라고 불리는 ‘이나모리 가즈오’는 교토에서 막 작은 중소기업인 ‘교세라’(KYOCERA)를 시작했을 때 기대치 않게 상대 거래처가현 ‘파나소닉’의 전신인 ‘마쓰시다 전기산업’이었습니다. 그런데 대기업이라 그런지 납품기준도 까다롭고 일정도 빠듯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습니다. 그와 비슷한 다른 업체들은 마쓰시다가 갑질을 하고 있다고 불평불만을 자아냈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보통 ‘이 정도만 하면 됐지!’라는 생각과 ‘내가 왜 못해?’라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하게 됩니다. 왜 우리는 더 큰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안정된 지금의 삶을 포기하고 더 큰 성취를 향해 나아가야 할까요? 물론 이나모리는 몇 년 동안 끝까지 마쓰시다의 갑질을 받아 주며 기술력도 성장시키고 생산비도 줄여서 미국의 반도체 회사까지 납품하는 큰 회사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미 다른 회사들보다 기술력도 뛰어났고 심지어 가격도 저렴했기 때문입니다. 교세라는 그렇게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출처: ‘사람을 몰락시키는 것은 늘 00이었다.’, 유튜브 채널, 체인지그라운드]

     

    실패와 고통은 성장시킵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가장 큰 독은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만약 우물물을 더는 퍼내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대부분 다시 말라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은 마른 우물이 다시 솟아나게 하는 마중물과도 같습니다. 물이 솟지 않고 말라버리면 그 안엔 이전보다 더 안 좋은 것들이 살게 됩니다. 그래서 더는 물을 마실 수 없는 상황까지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복음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왜 일하는가』에서 이나모리 가즈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당신이 일하는 것은 스스로를 단련하고, 마음을 갈고 닦으며, 삶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한 행위이다. 나는 내면을 키우기 위해 일한다고 생각한다. 매일 열심히 일하는 것은 내면을 단련하고 인격을 수양하는 놀라운 작용을 한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80세에 엄청난 적자를 내는 일본항공의 경영을 맡아 13개월 만에 흑자로 전환하고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승려가 되었습니다. 그가 일한 목적은 돈이나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인격수양’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인격수양의 끝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인격수양은 하느님처럼 완전해지지 않으면 끝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일도 끝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나모리 가즈오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몸이 아파 좋은 대학도 나오지 못하고 망해가는 아주 작은 중소기업에서 연구자로 일했습니다. 회사에서 연구비용을 대줄 수가 없어서 자기 돈으로 연구를 위한 기계를 구입하고 책도 사서 읽어야 했습니다.   이렇게 한 것은 그가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일한 목적은 이것이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고 감사하는가!’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선교’로서 인격수양을 시키십니다. 선교를 죽도록 하면서도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는 인격을 갖추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야 물이 계속 나와서 그 안에 악한 것들이 깃들이지 않게 됩니다. 선교하면 주님께서 기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선교하면 하느님 자녀로서의 인격을 갖추어갑니다. 아니 신격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일하며 인격을 닦는다면, 선교하며 신격을 닦는 것입니다.

     

    이나모리는 말합니다.

    “20대 초반 나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특출난 재능도 없었고, 모든 일에 흥미가 없었다. 그런 청년이 어떻게 50년 이상 한 가지 일에 매달릴 수 있었을까? 그것은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참조: ‘왜 일하는가’, 유튜브 채널, ‘2분 독서’]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돈을 주지 않으면 일을 대충하게 됩니다. 성공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성과가 없으면 다른 길을 찾습니다. 하지만 정말 큰 성공은 돈이나 성과가 아니라, 일 자체를 목적으로 할 때, 일을 자신의 인격 수양의 도구로 여길 때, 그 모든 것은 나중에 따라온다고 이나모리는 말합니다.    

 

    하느님 자녀 됨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교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습니다. 결국 선교만한 사랑의 실천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교를 성과를 바라고 한다면 금방 지칩니다. 선교를 하느님 자녀로서 신격수양으로 여기고 한다면 지치지 않고 좋은 성과까지 얻게 됩니다.

    선교를 그리스도를 더 닮은 신앙인이 되기 위한 도구로 여깁시다. 이것이 아니면 세례를 받았어도 일곱 마귀가 들어와 더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세상에서의 성공의 비결은 내가 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인 것처럼, 선교에서의 성공의 비결은 내가 선교하는 일을 좋아하도록 마음을 다스리는 것에서 결정됩니다. 일하지 않으면 인격을 수양할 수 없듯, 선교가 좋은 이유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내 안의 신성이 살아나고 드러나게 할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카뮈의 소설 이방인이 있습니다이방인을 몇 가지 관점에서 생각해 보았습니다공간의 관점입니다지금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낯선 곳으로 가는 것이 수월합니다그러나 예전에는 낯선 곳으로 간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하는 결단이 있어야 했습니다중학생 때입니다고등학교 진학을 위해서 전학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같이 학원도 다녔고친구의 집으로 놀러 가기도 했습니다경상도 말투가 강했던 친구에게 서울을 낯선 곳이었고마치 이방인과 같았습니다시간의 관점입니다그린란드에 살던 원주민들은 시간의 관점에서는 거의 2000년 전의 모습이었습니다생각관념문화가 달랐습니다예전에 부시맨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우리와 같은 시간과 공간에 있지만 부시맨은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공감의 관점입니다대중의 정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군대에서는 그런 사람을 고문관이라고 했습니다대중의 정서를 초월하는 경우가 있습니다성서에서는 그런 사람을 예언자라고 합니다카뮈의 이방인은 어떤 경우인지 생각해 봅니다.

 

노아의 홍수를 생각합니다사막과 같은 광야에서 홀로 커다란 배를 만들고 있는 노아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환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예전에는 이방인이었을 것입니다그러나 기후 위기를 체험하는 요즘 환경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예언자였음을 알게 됩니다미국의 서부는 꺼지지 않는 산불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동부는 갑작스러운 폭우로 많은 피해를 입었습니다무분별한 남획으로 함께 살아야 할 많은 생명이 사라졌습니다즈카리야는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즈카리야 예언자를 죽였습니다자신들의 뜻과 달랐기 때문입니다헤로데는 세례자 요한을 죽였습니다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뜻을 전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폭행을 당했다고 이야기 하셨습니다포도원 소작인들이 하느님께서 보낸 사람들을 때리고쫓나낸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보내신 하느님의 아들마저 죽인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방인고아과부세리가난한 이들을 잘 돌보라고 하셨습니다그들도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예언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보내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고단식을 하면 좋은 날 사람들에게 불안을 준다고 비판합니다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복음을 전하고표징을 보여주었더니 사람들을 선동한다고 비판합니다오늘 복음도 그렇습니다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지고소경이 눈을 뜨고갇힌 이들이 자유를 얻고아픈 사람들이 치유되는 현장을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습니다나자렛에서 저렇게 멋진 예언자가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합니다완고함이 하느님의 아들까지도 마귀의 힘을 빌린다고 이야기 합니다그와 같은 완고함은 2021년에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기도하지 않으면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무질서한 삶을 살게 된다고 하십니다아무리 잘 지은 집도 3년만 사람이 돌보지 않으면 먼지가 쌓이고엉망이 되곤 합니다집 앞의 텃밭도 한해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하기 마련입니다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여러분은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 버린다고 하셨습니다그리고 나는 착한 목자라고 하셨습니다.’ 양들은 목자와 함께 있어야 안전하다고 하셨습니다.

 

악한 세력은 힘들고 어려운 일 속에서도 우리를 넘어트리지만즐겁고 기쁜 일을 통해서도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힘들고 어려운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중요합니다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받아들이는 믿음이 중요합니다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은 아닙니다율법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이 아닙니다우리에게 주어지는 일들 속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뜻을 찾고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살아가는 우리들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에로 이끄는 것입니다. “주님은 영원히 좌정하여 계시고심판하시려 어좌를 든든히 하셨네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심판하시고겨레들을 올바로 다스리시네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 

 파괴하시고 멸망시키시는 주님이지만, 울부짖는 당신의 자녀들을 가련히 여기시는 주님입니다!

 -양승국신부-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인간의 배신과 반역을 못견뎌하십니다. 인간이 당신 말고 다른 곳으로 더 많은 눈길을 주는 것을 분노하십니다. 끝까지 돌아서지 않는 인간, 타락과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인간을 보고 마침내 파괴와 멸망을 선포하십니다.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 어둠과 암흑의 날, 구름과 먹구름의 날이다. 여명이 산등성이를 넘어 퍼지듯, 수가 많고 힘센 민족이 다가온다. 이런 일은 옛날에도 없었고, 앞으로 세세 대대에 이르도록,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요엘 예언서 1장 15절, 2장 2절)

  

그러나 파괴하시고 멸망시키시는 주님이지만, 울부짖는 당신의 자녀들을 가련히 여기시는 주님입니다. 엄청난 시련을 보내시지만, 시련을 보내는 그분의 마음 저변에는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는 마음, 끝까지 보살피시려는 애틋한 마음이 깔려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에서는 창조-타락-파괴-재창조의 순환이 되풀이 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가끔씩 완전한 파괴와 멸망은 아니지만, 삶 속에서 작은 파괴와 멸망을 경험합니다.

  

견딜 수 없는 수치와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그런 순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겠습니다. 그 작은 파괴와 멸망, 고통과 죽음은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고자 하시는 주님의 손길이요 배려라는 것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는 대체로 나태해진 우리를 향한 충격요법 가운데 하나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따라서 갑작스런 외부로부터의 충격이 다가올 때,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충격을 우리를 향한 극진한 하느님 사랑의 표시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재창조하기 위한, 우리를 더욱 성장시키기 위한 하느님 은총의 표시로 보시면 정확합니다.

  

다양한 형태의 고통과 십자가, 상처와 실망이 다가올 때 마다 한번 생각하십시오. 인간의 삶은 절대로 완전하지 않습니다. 완벽할 수 없습니다. ‘불완전한 삶의 축복’을 깨닫도록 노력하십시오.

 

부족해야, 불완전해야, 병약해야, 거기에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다가갑니다. 미숙하고 불쌍함으로 인해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미성숙이 하느님의 축복을 불러옵니다.

  

세상을 해결해야할 ‘문젯거리’로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의 신비에 마음을 활짝 여십시오. 하느님께 새로운 눈을 청하십시오. 머지않아 그 모든 문젯거리들이 하느님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  

 -반영억신부-

 

마귀라는 말은 ‘중상자’, ‘고자질쟁이’ 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마귀는 하느님에 대적하는 이 세상의 왕 또는 악한 세력입니다(루카4,6. 2고린4,4). 그래서 하느님을 사칭하고(2테살2,4) 하느님 일에 반대하며(마태16,23), 악인을 조종(에페2,2)합니다. 인간을 모함(욥기1,9-11)할뿐 아니라 유혹(2코린11,3)하고 심지어 예수님을 유혹(루카4,5-7)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벙어리 마귀를 좆아 내셨는데 그에 대한 반응이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은 “저 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느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표징을 요구하기도 하였습니다”. 군중의 반응은 이렇게 좋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일을 하고도 뺨 맞는 격입니다. 바로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마귀의 속성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지만 마귀는 선한 것 안에서 악한 것을 고의적으로 만들어 냅니다. 악한 영은 더 큰 악을 불러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권능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자리가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참과 거짓의 대립을 놓고 심판관을 자처한다면 아마도 그곳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 중상, 모략의 마음을 버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는 상태는 이미 천국입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번 만이라도 천국을 생각하면 이 지상의 집착과 애정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를 알게 될 터인데 그렇지 못함이 안타깝습니다. 우리 가슴 안에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지 내 뜻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루카4,1-14) 물리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12장 28절에는 “성령의 힘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해질 때가지 화를 풀지 않으면 안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에페4,26-27)…... “속임수를 쓰는 악마에 대항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주시는 무기로 완전 무장 하십시오”(에페6,1)하고 권고합니다. 묵시록에서는 “우리 형제들은 어린 양이 흘린 피와 자기들이 증언한 진리의 힘으로 그 악마를 이겨냈다. 그들은 목숨을 아끼지 않고 죽기까지 싸웠다”(묵시12,11)고 말합니다. 결국 마귀를 물리치는 방법은 말씀과 성령 안에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힘과 위로가 되고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며 살고 있다면 그를 천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미워하고 흉보며 헐뜯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분명 마귀에게 지배당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과 함께하지 않으면 생각이 다른 사람을 배척하게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이 선을 선으로 볼 수 있고 악을 악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뜨길 희망하며 마귀를 물리치는 사람 되시길 빕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마 귀 >
-송영진신부-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 그때에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그러고는 가서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면 다시 나와,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하여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4-26).”

이 말씀은,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다가 예수님 덕분에 마귀에게서 해방된
사람의 경우에 관한 말씀입니다.
(마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는 말은, 마귀 들린 상태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상태와 마귀의 영향력에 물들어 있는 상태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마귀의 지배와 억압에서 벗어났다면
곧바로 성령으로 자신을 가득 채우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텅 빈 상태로 방치하면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전염병에 걸렸다가 나은 사람이나 그 병을 예방하기 위한
백신을 맞은 사람은 몸에 항체가 생겨서
그 병에 대한 면역력을 갖게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인데,
마귀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의 경우에는 마귀에 대한 항체 같은 것은
생기지 않고, 그래서 마귀에 대한 면역력도 생기지 않습니다.
마귀의 공격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나 면역력 자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으면
누구든지, 또 언제든지 마귀의 공격을 ‘반복해서’ 받을 수 있고,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지 않으면 그것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더러운 영이 사람에게서 나가면”은
“마귀가 예수님에 의해서 사람에게서 쫓겨나면”입니다.
“쉴 데를 찾아 물 없는 곳을 돌아다니지만 찾지 못한다.”는
“사람 없는 광야에서 방황한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실 때에는
어떤 한 사람에게서만 쫓아내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세상에서 쫓아내십니다.
그래서 쫓겨난 마귀는 처음에는 ‘사람 없는 곳’으로,
즉 광야나 사막이나 황무지 같은 곳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에서 ‘광야’는 주로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 장소’를 상징하는데,
실제로는 ‘마귀의 공격과 유혹을 심하게 받는 장소’입니다.
그 공격과 유혹에 맞서 적극적으로 싸워야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내가 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하고 말한다.” 라는 말씀은,
마귀는 항상 사람들을 공격하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존재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완전히 멸망하기 전까지는 계속 그럴 것입니다.)
그 집이 말끔히 치워지고 정돈되어 있다는 것은, 여기서는 ‘깨끗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니라, 무방비 상태로 방치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라는
말씀은, 실제로 그렇게 된다는 말씀이 아니라,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루카복음 8장에 나오는 이야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남자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를 돌려보내며 말씀하셨다.
‘집으로 돌아가, 하느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을 다 이야기해 주어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일을
온 고을에 두루 선포하였다(루카 8,38-39).”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에게 시달리다가 예수님 덕분에 해방된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맡기신 임무를 잘 수행했는데, 그것은 그가 ‘텅 빈 채로’ 있지 않고
성령으로 가득 찬 생활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마귀들에게 다시 사로잡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반면에 그 지역 사람들은, 즉 게라사인들은 예수님께
자기들에게서 떠나 달라고 요구했습니다(루카 8,37).
그들도 분명히 마귀들 때문에 고통을 겪었을 텐데, 그들은 자기들 지역에서
마귀들이 제거된 것을 기뻐하지도 않았고, 예수님께 감사드리지도 않았습니다.
만일에 나중에 다른 마귀들이 그 지역에 들어갔다면,
게라사인들은 처음보다 더 나쁜 상태로 떨어졌을 것입니다.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루카 11,23).”

게라사인들이 마귀들 편에 선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 편에 서지 않고 예수님께 떠나라고 요구함으로써
예수님을 반대하는 쪽에 섰습니다.
그것은 결과적으로 마귀들 편에 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마귀들을 쫓아내신 일에 대해서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라고
비방하는 말을 한 자들도(루카 11,15)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은
사실상 마귀들 편에 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마귀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루카 11,21-22).”

여기서 ‘힘센 자’는 마귀를, ‘더 힘센 자’는 예수님을,
‘전리품’은 예수님 덕분에 마귀에게서 해방된 사람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과 권한을 가지고 계신 분이기 때문에
피조물인 마귀들은 예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마귀를 쫓아내는 방법을 물었을 때(마르 9,28),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기도’가 마귀를 쫓아내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말씀은,
예수님(하느님)만이 마귀를 쫓아내실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그것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겪는 모든 유혹, 고난, 시련들에도 모두 적용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로 우리를 데리고 가시는 분이고,
동시에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끊임없이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신앙생활은 모든 것을 예수님과 함께하는 생활이고, 함께 해야 하는 생활입니다.

 

 복음: 루카 11,15-26: 내 편에 서지 않는 사람은 나를 반대하는 사람이며...

 -조욱현신부-

 

군중들은 예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 가운데는 그분이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는 하늘의 표징을 보이라고 하는 자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냐 아니면 베엘제불에게서 온 것이냐 하는 것이었다. 그분의 답은 상식적으로도 알 수 있는 답이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이 하느님의 능력으로 사탄을 짓부순다는 사실을 알라는 말씀이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라면”(20절) 여기서 하느님의 손가락은 성령을 뜻한다. 그러면 팔은 누구를 말하는가? 아드님이시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모든 일을 하신다. 몸-팔-손-손가락은 한 몸이다. 그러므로 마귀를 쫓아내시는 일은 하느님한테서 오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행위이다.

 

그분은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을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분이시다.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신 분이 인간으로서 하느님의 영 안에서 마귀를 쫓아낸다면, 인간 본성이 그분 안에서 먼저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 것이다. 인간 본성이 사탄의 힘을 꺾고 더러운 영들을 꾸짖음으로써 빛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20절) 라는 말씀의 의미이다.

 

“힘센 자가 완전히 무장하고 자기 저택을 지키면 그의 재산은 안전하다. 그러나 더 힘센 자가 덤벼들어 그를 이기면, 그자는 그가 의지하던 무장을 빼앗고 저희끼리 전리품을 나눈다.”(21-22) 예수께서 오시기 전에 사탄은 막강한 힘을 가지고 하느님의 것인 양들을 멋대로 끌고 다니며 자기 우리에 가두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자 사탄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전리품이 되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사탄에게 매여 불경과 잘못을 저지르던 자들을 구원하시어 진리 안에서 아들에 대한 믿음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주셨다. 이 때문에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 편에 서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23절) 사탄은 예수님 편이 아니고, 그분을 반대한다. 예수께서 모으신 것을 흩어 버리려 하는 사탄이 예수님을 도와 자기를 무너트릴 수 있겠는가? 어리석은 자들이다.

 

우리가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더러운 영이 우리 안에 살았다. 다른 신을 섬기고 온갖 죄를 지으며 살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비로 우리를 받아 주셨고, 우리 마음의 집은 모든 죄가 깨끗이 치워졌다. 그 안에는 성사들이라는 가구로 채워졌다. 이제 그 집은 어떤 집이 되어야 하느냐? 하느님께서 사시는 성전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의 성전이 되지 못하면 또다시 더러운 영이 “자기보다 더 악한 영 일곱을 데리고 그 집에 들어가 자리를 잡으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26절) 어떻게 할까?

 ."그 사람의 끝이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루카 11, 26)

-한상우신부-


안타까운
분열의
모습이다.

하느님 앞에서
작아져야 할
우리들 삶이다.

작아지는 것이
깨어있는
참된 삶이다.

깨어있지 않으면
금세 분열로
치닫는 우리들
어둠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모순을
지적하시며
깨우쳐주신다.

외적인 정화보다
내용의 변화가
더욱 중요하다.

하느님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갈등과
대립 그리고
불행으로
처음보다
더 나빠진다.

하느님으로
비우고
하느님으로
채워지는
영적인 우리들
삶이다.

싹 비워낸
자리에
자아가 다시
들어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비워낸 자리에
들어서는 것이다.

비워낸다는 것은
우리마음을
하느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내어드리는 것이
변화의 삶이다.

변화의 삶이란
다시는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각오이며
실천이다.

더 나빠지지
않도록
삶의 방향을
분열이 아닌
통합으로
바꿀 때이다.

잘 산다는 것은
올바른 방향이신
하느님으로
가득 채워진다는
것이다.

비움과 채움
성찰과 참회의
중심엔 우리의
자아가 아닌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셔야한다.

하느님을 위한
정화와 회개가
결국 우리를
살리는 참된
변화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변화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힘과 마귀의 힘 안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물으십니다.

"저자는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낸다."(루카 11,15)
예수님께서 벙어리 마귀를 쫓아내신 기적을 보고 어떤 사람들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린 구마라고 수근댑니다. 분명 자기들 눈앞에서 좋은 일이 일어났는데 왜 그렇게 곡해를 하는 걸까요?

어쩌면 자기들이 생각하는 예언자나 메시아의 자격이 예수님에게 부족하다고 느낀 게 아닐까 싶습니다. 소속도 없고 학문적 계보도 없는 가난한 꿈쟁이에 불과한 청년이 과연 하느님과 닿아있기나 할까 의심하고 또 의심했겠지요.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언감생심 하느님과 연결되었을 리는 만무하니, 마귀 우두머리와 연결된 사람이라고 결론을 지은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루카 11,20)
예수님께서 이루신 놀라운 일에 경탄하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들은 이미 하느님 현존 안에 있습니다. 그동안 답답하고 불편한 장애로 고통을 겪던 형제가 이제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 건 이 세상에 하느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증거니까요. 그러니 함께 기뻐하고 축복할 겁니다.  

"더 나빠진다."(루카 11,26)
반면 마귀, 더러운 영이 개입하는 사람은 영육으로 더 나빠질 뿐입니다. 살리는 일은 창조주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손가락이 하시는 영역이니, 더러운 영이 하는 일은 사람을 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더럽히고 파괴합니다. 

제1독서에서는 주님의 날이 선포됩니다.

"아, 그날! 정녕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 전능하신 분께서 보내신 파멸이 들이닥치듯 다가온다."(요엘 1,15)
"주님의 날"은 단순히 이스라엘 백성에게 닥쳤던 기근이나 메뚜기 떼의 재앙을 넘어서는 종말의 날을 가리킵니다. 그날에 이스라엘 백성은 그동안 주님께 불충하고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이용해 농락했던 죄악에 대해 심판을 받을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고 가난한 이들을 포용했던 하느님의 백성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날은 마지막 날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는 날이 됩니다.

영적 삶에서는 하느님의 힘과 마귀의 힘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그 둘은 아주 달라서 얼른 구별이 될 것 같지만, 마귀의 속임수가 워낙 교묘하고 교활해서 선하고 단순한 이들의 꿈을 짓밟아 무너뜨리기 쉽습니다. 이 두 힘의 긴장 안에서 성령께 의지해 영의 질서와 균형을 회복하고 귀한 소명을 지켜나가는 것이 영성생활을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일 겁니다.

하느님의 일을 알아볼 수 있는 선하고 맑은 지혜와, 악의 속임수를 식별해 물리칠 수 있는 단호한 용기를 청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안에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를 믿으며 우리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손가락을 꼭 붙잡고 저마다의 소명을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7주 금요일-서 있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듯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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