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10. 6. 07:10

2021년 10월 6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루가 11,1-4)

 

 When you pray, say:
Father, hallowed be your name,
your Kingdom co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우리는 지난 월요일부터 제1독서를 통해서 요나 예언서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요나서는 다른 예언서들과는 달리 이야기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요나 예언자의 모습도 여느 예언자들과 매우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다른 예언서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거부하지 않고 백성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였지만, 백성은 그들의 선포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오히려 탄압하였습니다. 반면에 요나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피하여 도망가기도 하였으며, 단 한 번의 선포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 3,4) 더욱 놀라운 것은 예언서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예언자의 선포를 들은 사람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임금까지, 모두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의 시간을 가진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요나 예언서가 3장에서 끝났다면, 모든 것이 행복하게 끝나는 결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4장에 이르러, 너무나 당황스럽게도 하느님 말씀을 선포하였던 요나 예언자가 불만을 터뜨립니다.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도,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도 마음에 들지 않아 투정을 부리는 요나 예언자의 모습이 오늘 제1독서에서 그려집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선민의식’과 하느님 구원의 ‘보편성’이 충돌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셨으니,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되셔야 한다는 인간적 고집이 드러납니다.
반면에, 요나서의 중심에는 인간의 편협함을 뛰어넘는 하느님의 크신 사랑과 자애가 있습니다. 요나 예언서는, 우리의 편협한 시선과 생각이 하느님의 자비를 방해할 수 있음을 경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만의 하느님이 아닌, 세상 모든 이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떤 지식인이 가톨릭에 입교했습니다. 그의 입교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는 친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가톨릭 안에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지 않나? 이렇게 문제가 많은데 왜 가톨릭에 입문했는가?”

그러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 역시 가톨릭에 너무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은 교회 초창기 때부터 계속 있었지. 그런데도 계속 존속해 오는 것을 보면 이 안에 하느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을 수 있었네.”

교회 안에 무능함과 한계는 예수님의 제자들로부터 시작해서 계속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종종 교회 안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교회 나가지 않는 이유를 말씀하시는 분을 만납니다. 그러나 이는 진정한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2,000년 이상 계속되고 있었으니까요. 교회 안의 문제를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엄청난 특권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보면, 제자들에게 직접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이 하던 기도와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 역시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의 관계와 똑같은 관계에 들게 하시는 것입니다. 엄청난 특권이 아닙니까? 예수님과 같은 위치에 서게 되었는데 이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교회 안에서 특권을 받습니다. 그러나 조건 없는 특권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커다란 책임도 동시에 주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 마지막에 ‘용서’에 대해 말씀을 하시지요.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차마 내치지 못하시는 동정이 담긴 사랑을 가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도 동정이 담긴 사랑으로 모든 죄를 용서해주십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용서를 받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희에게 잘못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루카 11,4)

다른 이들을 용서해주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속되는 한 늘 되풀이되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특권만이 아닌 책임도 주어지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어떻게 내 이웃에게 전달하고 있습니까?
99도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온도를 올려두어도 마지막 1도를 넘기지 못하면 물은 영원히 끓지 않는다. 물을 끓이는 것은 마지막 1도, 포기하고 싶은 그 1분을 참아내는 것이다(김연아).

성공의 비결

옛날 어느 나라의 왕이 나라 안의 현자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명령을 내립니다.

“우리 백성들이 잘살 수 있는 성공의 비결을 연구하라.”

현자들은 세상의 모든 지혜를 찾아서 성공의 비결을 12권의 책으로 정리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은 너무 많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시 이 12권의 책을 정리해서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임금은 “바쁜 백성에게는 한 권의 책도 너무 부담스럽다.”라면서 더 간단하게 정리할 것을 명령했습니다.

현자들은 오랫동안 토의했고 결국 한 줄로 성공의 비결을 요약해서 임금에서 보고했습니다. 그 비결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공짜는 없다.”

‘공짜 치즈는 쥐덫에만 있다’라는 러시아 속담이 생각납니다. 공짜를 좋아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공짜에 대한 우리의 책임도 분명히 요구됩니다. 그래서 공짜는 없습니다.

주님께 청원 기도를 많이 바칩니다. 그런데 자신이 할 것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공짜만을 청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삶, 진정한 성공의 비결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것을 청할 때 일어나는 일; 다 주신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을 알려주십니다.

제자들은 자발적으로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것을 알려달라고 합니다. 여기서 특이한 것은 스승마다 기도하는 내용에 차이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세례자 요한대로 기도문을 가지고 있었고 예수님은 예수님대로 기도가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기도하는 내용이 우리 ‘수준’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수준을 자녀들이 본받습니다. 만약 내가 세속적인 것을 청하며 기도한다면 자녀들은 부모를 닮아 세속적인 것을 원하는 어른으로 성장합니다. 만약 다른 스승을 만나 부모가 전해준 욕구를 바꾸지 않으면 말입니다.

     

    나는 어떤 욕망을 갖기를 원합니까?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가지신 바로 그 욕망을 욕망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자녀가 가져야 하는 것을 욕망하셨습니다.

    그 내용이 ‘주님의 기도’에 있습니다. 따라서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을 청하고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자녀가 욕망해야 하는 것을 욕망하기에 하느님 자녀입니다.    

 

    하지만 자녀가 부모 외에 부모가 주는 돈만을 매일 청한다면 어떨까요? 부모는 필요 없고 먹을 거 차려놓고 사라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 어떨까요? 부모는 주고 싶었던 것까지 주지 않게 될 것입니다.

     

    기도를 해도 응답이 없는 경우는 자녀로서 당연히 청해야 하는 ‘주님의 기도’의 내용이 아닌, 주님의 기도를 통해 돈이나 명예, 자녀의 성공 등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이용당하는 느낌을 느끼고 그 사람을 자녀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무언가 얻어내려면 먼저 부모가 원하는 것을 청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자녀가 청할 때 가장 기뻐합니다. 먼저 그렇게 청하고 나면 받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부모가 자녀가 자신에게 청하기를 바라는 모든 것이 ‘주님의 기도’에 들어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영국군과 우세했던 프랑스군이 전투를 벌인 적이 있습니다. 크레시 전투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열세였던 영국군이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당시 영국군은 18세밖에 되지 않았던 에드워드 왕자가 선봉 부대를 지휘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아버지인 국왕은 강한 친위대를 높은 지대에 배치하고, 필요시 즉각 왕자의 부대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필요한 준비를 마치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어린 왕자는 심한 공격을 받고 위험에 처하여 그의 아버지에게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왕은 즉각 구조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구조가 더뎌지자 왕자는 또 다른 사자를 보내어 다시 즉각적인 구조를 요청했습니다. 왕은 왕자가 보낸 사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왕자에게 가서 나는 언제 구조가 필요한지 모르는 그런 미숙한 지휘관도 아니고 또 구조대를 보내지 않을 만큼 무관심한 아버지도 아니라고 전하게.”   

 

    왕은 적의 진영에 혼란이 생기는 것을 간파하고 왕자가 조금만 더 견디면 유리하게 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왕은 그날의 영예가 그의 아들의 것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왕은 아들에게 명성이 돌아갈 수 있을 때 지원부대를 투입할 작정이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나에게 바라는 것이 곧 나도 아버지께 바라는 것이 되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적진에서 싸우기를 원하십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아버지는 자신의 자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십니다.

    

    전교 1등 하면 스마트폰 사달라는데 안 사줄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먼저 스마트폰 사주면 전교 1등 해보도록 노력하겠다니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 뜻을 따라주는 자녀에게 아버지는 목숨까지 바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모가 가장 사랑스러워하는 자녀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청하는 자녀입니다. 만약 자녀가 축구선수가 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는데, 자녀가 갑자기 “아빠, 나 세계 최고의 축구선수가 되게 해 주세요.”라고 한다면 아빠는 재산은 물론이요, 가진 모든 것을 다 털어 자녀를 도울 것입니다.

     

    손흥민 선수의 꿈은 처음부터 축구선수였습니다. 축구를 너무 좋아해서 형이 선생님께 그냥 교실에 들어오지 말고 밖에서 축구만 하라고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것을 그렇게 부러워했다고 합니다.

    이것을 본 아버지의 마음은 어땠을까요? 손웅정 씨는 두 번이나 진짜 축구를 하려고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이 축구선수로 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삶인지 알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도 축구선수였지만 키가 작고 볼 다루는 기초실력이 부족하여 힘들어하던 중 또 아킬레스건이 끊어져 축구를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이 축구선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하니 아버지는 가진 모든 것을 아들에게 쏟아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근슬쩍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아들이 이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초등학교 운동장에 겨울만 되면 소금을 100포 이상씩 뿌렸습니다. 소금기가 있으면 눈이 와도 빨리 녹고 넘어져도 푹신해서 덜 다치기 때문입니다. 눈이 내리면 아버지는 먼저 와서 흥민이가 운동할 수 있는 공간을 먼저 치워놓았습니다.   

 

    흥민이는 당시 가지고 싶은 게임기가 있었습니다. 아마 플레이스테이션 같습니다. 그러나 집안 사정상 그 게임기를 사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이때 그 게임기를 놓고 슛을 하는 이벤트가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흥민이가 게임기를 탈 수 있도록 데리고 나가서 슛에 대한 속성 과외를 하였습니다. 그렇게 게임기를 탔습니다. 게임을 하면 축구에 방해가 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축구를 위해 게임기가 자극제가 될 수 있다면 아버지는 그것까지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만약 축구는 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데 게임기만 사달라고 조르는 아이였으면 어떨까요? 집안 사정상 절대 게임기를 사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먼저 그분의 꿈과 같아야 하고 더불어 받는 것은 그 꿈을 이루는데 자극제가 될 것들이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만 하십시오. 그러면 필요한 모든 것들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십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는 것과 어긋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 죄에서 벗어남입니다.

  

    디팩 쵸프라는 자녀들에게 ‘어떻게 하면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만을 생각하며 살라고 했습니다. 이웃을 행복하게 하고 싶은 욕망을 원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것만 한다면 나머지는 아빠가 다 책임져주마!”

 -조재형신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따뜻한 햇볕이 강한 바람보다 나그네의 옷을 벗긴다는 동화도 있습니다좌절과 절망보다는 격려와 희망이 우리를 영적으로 더욱 풍요롭게 합니다최근에 저 자신을 칭찬하고 싶은 일들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물론 사소한 일들이고대단한 일도 아닙니다비행기 티켓 예매를 직원에게 부탁하곤 했습니다공적인 업무인 경우가 많았습니다스마트폰을 이용해서 티켓 예매를 해 보았습니다제가 원하는 시간에저렴한 가격으로 예매할 수 있었습니다냉풍기의 이음 파이프가 떨어져서 냉풍기를 틀어도 시원하지 않았습니다테이프를 이용해서 이음새를 고정했습니다시원한 바람으로 쾌적하게 지낼 수 있었습니다.

 

냉장고에 있는 물이 강으로 해도 그다지 시원하지 않았습니다. 2년 동안 그렇게 지냈습니다가만히 들여다보니 냉장고가 벽에 너무 가까이 있었습니다냉장고를 벽에서 20센티 정도 떨어트려 놓았습니다신기하게도 냉장고의 물이 시원해졌습니다신문사에서 부르클린 한인성당까지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입니다매번 내비게이션을 보고 갔습니다. 1년이 지났습니다매번 가는 길이라서 내비게이션 없이 가보았습니다기억력에 의지해서 갔습니다한 번도 틀리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지팡이에 의지하고 걷던 사람이 지팡이를 두고 걷는 느낌 같았습니다물론 생활하면서 실수도 있고허물도 있기 마련입니다그러나 남이 칭찬하기 전에 본인이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도 좋은 것 같습니다. 2021년 칭찬할 것이 있다면 적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하느님께서도 칭찬을 하셨습니다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루가 지나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시니 좋더라.’ 그렇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하늘태양바다구름많은 생명들 모두 아름답게 창조하셨습니다그리고 하느님을 닮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니 좋더라.’라고 하셨습니다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을 따라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을 칭찬하셨습니다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바다의 모래알과 같이 많은 자손을 축복해 주셨습니다재물과 장수 대신에 지혜를 청한 솔로몬도 칭찬하셨습니다솔로몬에게 지혜와 함께 재물과 권력도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내려왔습니다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예수님께서도 칭찬을 하셨습니다세례자 요한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세례자 요한은 더 용감하게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전하였을 것입니다예수님의 칭찬을 들은 세례자 요한은 더 겸손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을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세리의 기도와 가난한 과부의 봉헌을 칭찬하셨습니다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제가 가진 것 중에 절반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제가 빚진 것이 있으면 4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도 칭찬해 주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울 것이다내가 너에게 천국의 열쇠를 줄 것이다.’ 비록 배반을 했었지만 베드로 사도는 초대교회의 으뜸 반석이 되었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매번 화를 내는 요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오늘 화답송도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당신은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나이다.” 그렇습니다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비록 우리의 죄가 크다 하여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우리를 용서해주시고축복해 주십니다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십니다주님의 기도에서 예수님께서는 용서를 이야기하십니다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하십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요약이요, 그리스도 신자들의 행동 지침인 주님의 기도!

 -양승국신부-

 

언젠가 참석한 연피정의 주제가 ‘주님의 기도’였습니다. 강사 신부님께서는 그 짧고 간단한 주님의 기도를 가지고 10번에 걸친 강의를 준비하셨습니다. 문장 하나로 50분 강의를 하시는데, 정말 감탄 또 감탄이었습니다. 

 

그만큼 주님의 기도는 풍요롭습니다. 문장 한줄, 단어 하나가 다 가치가 있습니다. 수많은 보화가 담겨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삶의 지침이 거기 다 들어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천천히 음미하다보면, 그 안에 별의 별 것들이 다 들어있습니다. 무엇보다도 한 인간 존재가 하느님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신앙인으로서 이웃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간단명료한 지침들도 들어있습니다.

  

초세기 교회는 주님의 기도를 얼마나 중요시 여겼는지 모릅니다. 아무나 이 기도를 바칠 수 없었습니다. 정식으로 교회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 바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였기에,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큰 특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큰 경외심과 ‘삼가 하는 마음’ 감사의 정과 더불어 바쳤습니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미사 경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오니’, 통상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이 표현의 뜻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경건한 몸가짐으로’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던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너무나 황송한 마음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한 기쁨과 더불어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비록 소박하고 간결하지만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복음을 가장 명백하고 포괄적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의 요약’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사용된 ‘아버지’란 표현은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가능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심으로서,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만 이루어졌던 친자(親子)관계를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확대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주님의 기도, 이제부터라도 좀 잘 바쳐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세 살배기 어린이가 부르듯이 신뢰심과 친밀함을 담아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보잘 것 없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로 변화되기를 희망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복음: 루카 11,1-4: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주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가르치심으로써 제자들이 기도를 통해 당신과 하느님과의 관계에 참여하게 하신다. 즉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준 기도이며, 그러기에 그분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자녀로서 또한 큰 책임을 부여한 기도이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2절) 주님은 당신의 영광을 우리에게 주신다. 종들을 자유라는 지위로 들어 올리신다.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아들의 대열에 있게 하신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그분께 맞갖은 삶을 살아야 한다. 그때 우리의 간청을 받아주실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2절), 이 기도의 의미는 ‘그분의 이름이 우리 안에서, 우리 마음과 뜻 안에서 거룩하게 지켜지기를 바란다.’라는 뜻이다. 이 기도는 그분의 이름이 영예롭고 거룩한 것임을 알고 고백하는 마음과 믿음이 자신에게 생기게 해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이 기도가 생명의 근원이며 축복의 원천이다. 구원받아 높이 들어 올려지는 데 더 좋은 기도는 없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2절) 아버지의 나라는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마태 25,34)이다. 이것이 우리의 청원이다. 그 나라는 올 것인데, 만일 우리가 왼쪽에 서게 되면 우리는 그 나라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그 나라에서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우리도 받을 수 있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다.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3절) 일용할 양식은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말한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하셨다. 주님께서는 빵만이 아니라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또한, 영적인 양식으로 단 하루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하신 그리스도의 몸이다. 이 양식을 청하는 것은 그분 안에 살고 그분과 하나 되기를 청하는 것이다.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4절) 우리가 지은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빌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그들이 어떤 잘못을 했든지 용서해야 한다. 이렇게 용서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는 마지막으로 유혹자에게 끌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즉 죄만 용서해 주는 것이 아니라, 죄를 피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기도의 기본이며 정수가 되는 정신을 가르쳐 주십니다.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루카 11,1)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청합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제자들 편에서 이런 청을 드린 것은 처음이 아닐까 합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루카 9,18)라고 복음사가가 기록했지요.

예수님께서 제자단을 구성하실 때 기도부터 가르치신 것은 아니었나 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더불어 살면서 먼저 그분의 마음과 지향과 삶을 배우고 익혔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기도하시는 스승을 보며 그들 안에도 기도에 대한 갈망이 차츰 생겨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아버지와 나누는 은밀하고 친밀한 사랑의 친교인 기도는 누가 시키고 강요한다고 될 일이 아니니까요.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스스로 기도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려 주신 건 아닐까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루카 11,2)
예수님은 흔쾌히 '주님의 기도'라 불리우는 기도문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 기도는 아버지의 이름과 나라를 청하고, 이어서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들, 즉 영육의 생명을 위한 양식과 용서와 악, 유혹에서의 보호를 청하는 내용으로 구성됩니다.

"저희에게/ 저희의/ 저희를"
그런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바를 청할 때 "저"가 아니라 "저희"라는 표현을 쓰셨습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 일인칭의 존재들이니 각자 저마다 하느님과 내밀한 친교를 주고받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가 바치는 모든 기도가 "우리"를 지향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나만을 위한 기도, 내 가족과 내 단체, 내 편만을 위한 기도는 기도라기보다 편향적 주술이나 청구서 문구 정도일 겁니다. 기도는 근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우리"를 위한 공동선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내용이 보편적 선을 향하고 또 모두에게 축복이라면, 앞서 청한 아버지 이름과 아버지 나라는 이미 내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제1독서는 요나 예언서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 4,11)
놀랍게도 요나라는 캐릭터는 우리가 아는 예언자의 전형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첫 부르심에 도망친 것도 그렇고, 두 번 째 부르심에 따른 결과로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하여 구원받은 것을 도리어 못마땅해하니 말입니다. 그는 니네베 사람들이 살아난 것을 기뻐하기보다, '성읍이 멸망하리라'는 자기 예언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불쾌히 여깁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다르십니다. 그분은 누군가 제 길을 돌이켜 당신께 돌아온다면 당신 말씀이 백 번 천 번 공수표가 되더라도, 영 실없는 존재처럼 되어도 괜찮으십니다. 사람에 대한 그분의 갈망과 염원이 모든 이의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나"를 잊은 아버지시라서 그 아버지의 기도는 "우리'만을 향합니다.  

주님의 기도로 우리는 아버지와 하나가 됩니다. 이 기도에 우리에 대한 그분의 바람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바람이 하나로 녹아 있는 까닭입니다. 우리 각자가 저마다의 실존 안에서 주님과 나누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기도들이 주님의 기도라는 프리즘을 거쳐 이 세상에 빛의 향연으로 펼쳐지고 있다면, 우리 기도는 그분께서 바라시는  대로일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의 바람과 사랑을 주님의 기도에 합하여 정성껏 바쳐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아버지께서 당신 마음에 깊이 머무르는 우리에게 모두를 구원하시려는 당신 뜻을 알아듣게 해 주실 것입니다. 아버지, 아드님, 성령과 하나 되어 "우리 모두"를 위해 사랑의 기도를 바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7주 수요일-요나처럼 될까, 말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