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2021년 9월 28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루가 9,51-56)
On the way they entered a Samaritan village
to prepare for his reception there,
but they would not welcome him
because the destination of his journey was Jerusale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신다는 말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마을로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야고보와 요한은 마치 구약의 엘리야가 적들에게 벌을 내린 것처럼(2열왕 1,10-12 참조)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여쭙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두 제자를 꾸짖으시고는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신비를 이루시고자, 사람들을 멸망시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오셨기 때문입니다. 물론 뒤에 필리포스를 통하여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복음의 선포(사도 8,5-25 참조)가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아직 당신의 사명을 이해할 때가 되지 않았음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대할 때 흔히 상대방을 이해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고는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때로는 화를 내기도 하고, 거친 표현을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때 상대방과의 관계는 가뭄에 땅이 갈라지듯 메마르게 됩니다. 단비로 다시 땅이 촉촉하게 젖어 들 듯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이럴 때 어떻게 생각하시고 행동하실까?’라고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기도가 될 수 있으며, 그 기도의 응답은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 줄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며 살아간다면 오늘 복음의 두 제자처럼 예수님의 생각과는 동떨어진 매정한 마음이 아닌,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자비롭고 사랑 가득한 마음은 우리가 세상의 빛이며 소금임을 드러나게 합니다. 우리는 세상 안에서 주님을 드러내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한 달에 한 번 미용실에서 이발합니다. 미용실에 가는 기간을 줄이기 위해 짧게 커트를 하지만 워낙 뻗치는 머리카락이다 보니 지저분해 보여서 한 달에 한 번꼴로 이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제가 가는 미용실은 어떤 곳일까요?
굳이 찾아가는 곳은 없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다시 가지 않는 곳은 있습니다. 말을 많이 하는 곳은 다시 찾아가지 않습니다. 이발을 잘 하는 곳이어도 잘 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호구조사를 하는 곳이 있습니다. 어디에 사느냐? 평일인데도 이발할 시간이 있느냐? 이런 머리는 파마하는 것이 최고라면서 파마의 장점을 내내 들은 적도 있습니다. 여기에 정치 이야기까지 등장하면, 이발하고서 개운한 기분이 아니라 머리가 지끈지끈 아플 정도입니다.
그에 반해서 별 이야기를 하지 않는 미용사는 너무 좋습니다. 처음에 이렇게 대화하고는 끝입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짧게요.”
저는 주님이 너무 좋습니다. 왜냐하면 침묵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잘 못 살아도 침묵 속에서 저 스스로 반성할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저의 모습을 보시면서 얼마나 답답하실까요? 당장 벌을 내려도 당연할 것 같은데, 침묵 속에서 기다려주십니다.
누군가는 이 침묵에 불평불만을 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자신에게 사랑을 주시지 않는다고, 또 주님께서 과연 계시기는 하냐고 원망합니다. 그러나 침묵 안에서 주님의 사랑과 은총을 분명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비장한 마음으로 예루살렘에 가시기로 마음을 정하십니다. 바로 수난과 죽음을 위한 길을 직접 선택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마을을 보면서,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능력이라면 그 어떤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더군다나 스승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길을 가로막는 그들은 어떻게든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과 화합을 목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다고 결심하셨는데, 제자들은 정복과 통치를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차이를 보이는 것은 주님의 뜻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침묵에 정반대의 생각을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뜻을 보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도 주님과 정반대의 생각과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냉장고를 열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냉장고 깊숙한 곳에 사과 몇 알이 있었는데 모두 썩은 것입니다. 문득 썩은 사과 이론이 생각났습니다. 썩은 사과 3개로 한 박스 안의 모든 사과가 썩는다는 이론으로, 직장 안에서 썩은 사과처럼 부정적인 생각과 비판을 일삼는 동료의 행동은 일터 전체를 오염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스트레스와 고통, 낮은 생산성을 유도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썩은 사과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자기만의 편리만을 생각하고 욕심과 이기심을 드러내게 될 때 썩은 사과가 되고 맙니다. 나 하나 썩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조직 전체에 큰 상처를 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주님의 뜻을 더욱 더 새길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 긍정적인 마음이 주님을 따르는 마음이고, 이런 마음을 통해서만 썩은 사과가 되지 않는 유일한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복되는 죄에서 벗어나는 길: 죄 책감이 아닌 죄의식의 길을 가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전에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 마을에도 복음을 전했던 일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사랑에 배신하는 것입니다.
이에 야고보와 요한이 분개합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이 말씀 안에는 이런 뜻이 들어있습니다.
“너는 안 그랬냐?”
그러면 아마도 “제가 언제요?”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일곱 번의 주님의 기도’를 바쳐보면 안 걸려 넘어지는 죄가 없습니다. 생각과 말과 행위, 그리고 마음으로 우리는 모든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뜻을 거부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적이 없을까요? 분명 있습니다. 우리가 다만 주님께 짓고 있었던 죄를 기억해내지 않을 뿐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죄를 짓고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 죄책감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서로에게 핑계를 대고 판단함으로써 죄책감을 합리화하고 소멸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하느님께서 나타나셨을 때 그들은 두려워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남을 판단하며 죄책감을 소멸시키는 것은 소용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건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것은 다 ‘죄책감’에서 나오는 ‘자기 합리화’입니다.
유튜브에서 ‘죄책감’을 쳐보니 수많은 해결책이 나옵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 업보로 남을 것은 남는 것이니 굳이 신경 쓸 게 없고, ‘나’라는 것도 무릇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니 흐르는 물에 죄책감을 새기지 말라는 식입니다. 알 듯 모를 듯합니다.
명상하는 사람들은 죄책감은 또 죄를 짓기 위한 자아의 술책이기 때문에 죄책감으로 자기에게 벌을 주며 또 죄를 짓지 말고 그냥 자아와 함께 흘러가게 두라고 합니다. 모두다 죄책감을 무시하고 놓아두고 없는 것으로 하면 해결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죄책감이 사라질까요?
일본영화 ‘텐텐’(2007)의 앞부분은 이렇습니다.
대학교 8학년인 후미야는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무려 84만 엔의 빚을 갚아야 하는 신세입니다.
최악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후미야에게 어느 날 빌려준 돈을 받기 위해 후쿠하라가 찾아오고 후미야는 그에게서 빚을 청산할 수 있는 사흘이란 최후의 기간을 선고받습니다. 만약 사흘 안에 갚지 못하면 몸을 팔게 하겠다고 말합니다.
약속한 시각이 되기 하루 전 후쿠하라는 다시 후미야를 찾아오고 그는 후미야에게 놀라운 제안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함께 ‘도쿄 산책’을 하는 대가로 현금 100만 엔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목적지는 카스미가세키. 기간은 후쿠하라가 만족할 때까지... 돈을 마련할 별다른 방법이 없던 후미야는 결국 후쿠하라의 ‘도쿄 산책’에 동행하기로 합니다.
산책을 하던 후미야는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아내가 젊은 놈들이랑 바람이 나서 아내와 싸우다 쳤는데 아내가 죽은 것입니다. 이젠 하던 일을 다 접고 자수를 하려는데, 그 전에 그냥 자신과 아내의 추억이 담긴 길을 걷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며 묻습니다.
“자네도 유부녀와 잔 적 있나?”
후미야는 찔리는 것이 있었습니다. 후쿠하라의 아내가 한 젊은 대학생과 호텔까지 갔는데 자지 않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미야도 그런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후미야는 후쿠하라가 자신이 그 남자인 줄 알고 자신과 함께 걷자고 했는지 내내 불안해합니다.
그러다 결국 그의 아내의 사진을 좀 보여달라고 용기를 냅니다. 아주 천천히 사진의 여자를 봅니다. 다행히도 자신이 아는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이후부터는 후쿠하라가 조금씩 좋아집니다. 물론 ‘꼰대’라고 부르기로 합의는 하지만, 후쿠하라를 거의 아버지라 부르게 됩니다.
자신의 장기까지 팔겠다는 지독한 사채업자와 동행하던 후미야는 함께 머무는 동안 자신도 누군가에게 큰 잘못을 할 수 있는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살인의 시발점이 될 사람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알게 되어야 자신에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분노가 줄어들고 심지어는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후미야는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이유로 돈을 꾸고 갚지 않고 심지어 유부녀를 꾀며 살았어도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후쿠하라를 만나며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인식하게 됩니다.
이것이 죄책감과 구별되는 ‘죄의식’입니다. 이 죄의식은 후쿠하라만이 없애줄 수 있습니다. 그가 빚을 탕감해주고 아내에게 한 모든 것을 용서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잘못도 용서를 받습니다. 이 역할을 해주러 오신 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처음으로 성당에 나와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그 고통이 바로 자신의 죄를 위한 것임을 깨닫고는 그때부터 시작하여 몇 달 동안 계속 울었다고 합니다. 그 죄가 자신이 여러 번 낙태한 죗값임을 주님께서 깨닫게 해주시고 주님께서 죗값을 치러주셨음을 믿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같은 의미로 봅니다. 그러나 죄책감은 자기 합리화로 갑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거나 이도 저도 아니면 자책하며 자신을 괴롭힙니다.
하지만 죄의식은 주님께서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실 때 갖게 되는 죄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입니다. 죄의식은 자신이 지은 죄의 값이 하느님의 목숨값과 같음을 깨닫는 은총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지은 죄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 자신이 진정 누구에게 죄를 지었고 누구에게 그 죄를 용서받아야 하는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넣어주신 양심으로 생기는 죄책감이 하느님의 자비를 통해 죄의식으로 드러나고 그것이 용서를 받았음을 믿게 되며 비로소 죄책감에서 벗어납니다.
그리스도의 피가 아니면 누구도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서 이제 부끄럽지만, 또한 죄가 용서받았다는 믿음으로 나설 수 있게 되는 용기를 우리는 ‘의로움’이라 부릅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아 그 ‘죄의식’으로 더는 그런 죄에 빠지지 않을 결심을 하게 되며 그런 죄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죄책감을 벗어나기 위한 자기 합리화는 그 죄의 굴레에 가둘 뿐입니다.
따라서 죄와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죄의식’을 갖는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나의 죄의 값으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머리로 깨닫고 가슴으로 느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책을 읽거나 그분의 수난을 묵상하게 하는 기도들, 곧 십자가의 길이나 15기도, 7기도 같은 것들이 이런 효과가 있습니다.
저도 이 기도를 바치지 않았다면 예수님의 수난 속에 저의 죄가 다 들어있음을 깨닫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었냐고 말하며 다른 사람이 나에게 짓는 죄들을 심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기도와 동행하다 보니 단 한 순간만이라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못했다면 그것도 큰 죄가 됨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은 용서받은 자의 감사함과 이웃에 대한 관대함으로 표현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관대해지려면 내가 주님을 얼마나 많이 아프게 해 드렸는지에 대해 묵상할 시간을 꾸준히 충분히 가져야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영성의 전부입니다.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죄에 대한 인식이 더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무조건 죄가 없다는 식의 영성은 또 그런 죄의 굴레에 빠뜨릴 뿐입니다.

-조재형신부-
‘최초의 조선인 정도전’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조선을 시작한 사람은 태조 이성계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힘과 신진 사대부의 지혜가 결합하여 고려의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조선을 시작하였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성계의 힘과 신진 사대부의 지혜를 결합 할 수 있도록 길을 닦은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조선의 ‘틀’을 설계한 사람이 정도전이라고 합니다. 정도전이 이루고자 한 세상은 백성이 근본이 되는 나라였습니다. 왕은 국가를 다스리지만 국가는 백성이 주인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왕이 백성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왕의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왕은 백성의 마음을 얻을 수 있도록 어진 정치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신하는 백성들의 고통을 가장 먼저 느끼고, 백성들의 즐거움은 가장 나중에 느끼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정도전의 생각은 ‘군주는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는 17세기 서양의 사상보다 200년 앞선 통찰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유배지에서 백성들의 삶을 보았습니다. 백성들의 고통에 마음이 아팠고, 백성들의 정성에 감사했습니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혁명적인 생각이었습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에서 국가를 운영하는 3가지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재상이 국가를 운영한다는 ‘재상론’입니다. 재상은 청렴하며, 경륜이 높은 자들 중에서 왕이 선택하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왕이 국가를 운영하면 어진 왕이고, 지혜로운 왕이면 좋지만 왕 중에는 어린 왕도 있고, 어리석은 왕도 있고, 무도한 왕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백성들이 큰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국가의 운영은 재상들이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언로가 막히면 안 된다는 ‘언론’입니다. 젊은 선비들이 강직하게 재상의 허물을 비판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물은 고이면 썩기 마련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언론이 막히면 부정과 부패가 생기기 마련입니다. 셋째는 백성들이 배고프지 않을 정도로 먹고,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를 수 있을 정도로 예의를 알도록 ‘토지개혁’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경자유전의 법칙이 지켜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켜지지는 않았지만 토지는 국가가 소유하고, 백성들에게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수익의 일부분을 국가가 세금으로 걷는 방안을 제시하였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오리라.” 즈카르야가 생각하는 주님의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그 나라가 어떤 나라이기에 민족들과 많은 성읍의 주민들이 올까요? 통치자들이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통치자들이 백성을 하느님처럼 섬기는 나라가 아닐까요? 통치자들이 백성들의 소리를 외면하고 강압과 억압으로 다스리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백성들의 고통을 경청하고, 백성들이 바라는 것을 주는 왕이 아닐까요? 소수의 권력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백성들을 가난으로 내모는 나라는 아닐 것입니다. 그 나라에는 더 이상 굶주림도 없고,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나라가 아닐까요? 정도전은 권력의 다툼에서 밀려나 죽고 말았습니다. 정도전이 이루고자 했던 나라는 조선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 국민을 섬기는 정치는 21세기인 지금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부와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 힘을 사용하는 권력자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의 마을’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가진 강한 군사력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가 앞세운 계명과 율법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헤로데와 대사제가 가졌던 권위와 권력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집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듯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외면한 십자가와 희생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용서와 나눔으로 평화를 이루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배반, 권력자들의 힘, 군중들의 야유를 통하여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의 나라’를 세우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 사명은 세례를 받은 우리들에게도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나의 마음이, 나의 가족이, 나의 공동체가 평화의 마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고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우리 주님께서는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 노선, 평화주의 노선을 걸어가십니다!
-양승국신부-
파릇파릇한 수사님들의 선생 역할을 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적당히 했어야 했는데, 지나친 책임감에, 거기다 저도 나름 한 성깔 있었던지라, 틈만 나면 불벼락을 날린 기억이 떠오릅니다. 부끄럽게도 지금 생각해보니 별것도 아닌데, 집합시키고 호통을 치고...
예수님 시대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만 만나면 ‘잡종’이니 ‘정통이 아니니’ 하면서 무시하기 일쑤였습니다. 이에 화가 난 사마리아 사람들 역시 유대인들만 만나면, ‘지들은 뭐 특별한 것인 있을까봐? 괜히 개폼만 잡는 것들’ 하면서 서로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유다 산골 출신 예수님께 대한 사마리아 사람들의 대접이 좋을 리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을로 들어서시는데도 아예 코빼기도 내비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과 자신들을 노골적으로 거부하는 사마리아 사람들 때문에 제자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성질 급하기로 유명했던 야고보와 요한이 참다못해 예수님께 이렇게 아룁니다.
“주님, 저 인간 덜된 것들 정말 예의가 없는데요. 주님께서 도착하셨는데도 쥐새끼 한 마리도 나오지 않습니다.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 복음 9장 54절)
그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그래,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고, 정당히 정신들 차리도록 혼 좀 내줄 필요는 있지.’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꾸짖으시며 ‘그냥 두라,’고 하십니다.
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철저하게도 비폭력주의 노선, 평화주의 노선을 걸어가십니다. 내가 화난다고 해서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이시키지 않으십니다. 설사 자신이 손해를 본다 하더라도 감정에 휘말려 들어가지 않으십니다. 조용히 사건을 해결하려고 언제나 심사숙고 하십니다. 그리고 최대한 물러나시고, 끝까지 비폭력을 강조하십니다.
우리 인간 내면에는 은연중에 폭력에로 기우는 경향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폭력은 절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제 힘으로 인간이나 세상을 지배되는 시기는 지나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평화롭게 공존하기 위해 늘 심사숙고 하고, 큰 인내로 대화하면서 타협점을 끌어내려는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조금씩이나마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린다 할지라도 앞뒤 정황을 잘 따져본 다음, 물러설 것은 크게 물러서고 양보하면서 대화로 일을 풀어나가려는 노력이야말로 복음적 노선이며 비폭력 노선의 바탕입니다.

품을 키워라
-반영억신부-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사마리아를 통해서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길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가시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기에 앞서 심부름꾼을 앞서 보내셨고,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 간에는 종교적이고 민족적인 적대감이 있었습니다(요한4,9). 사마리아인들은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의 신앙을 받아들였으나 하느님께 대한 예배는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짐산에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신명11,29). 그리짐산에 자기들만의 성전을 건립하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쭙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루카9,54).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태도는 사마리아 사람의 태도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러니 야단을 맞는 것은 당연합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루가6,32-33).
하느님이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시켜 구원 하시려는 것입니다.(요한3,17). 예수님께서는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셨습니다.(루가19,10). 그리고 사도들도 역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파견되었습니다. 사도행전 13장 47절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 사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 땅 끝까지 구원을 가져다주도록 내가 너를 다른 민족들의 빛으로 세웠다.’ 그러므로 그 본분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앙갚음하고 싶은 마음을 거두기 전까지 그들은 결코 꾸짖음을 면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저주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냉대에 개의치 않고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 맞서지 않고 그저 당신의 일을 찾아가실 뿐입니다. 순리를 따라가십니다. 우리도 주변 여건, 환경에 구애받지 말고 해야 할 일을 해야 하겠습니다. 누가 뭐라 하든지 그것이 주님의 일이라면 기쁘게 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무슨 일을 하든 그 일이 주님의 일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활동을 살펴보면, 가끔은 이런저런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예기치 않은 일을 접하게 되면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개의치 말고 주님을 향한 길에 흔들림이 없어야 합니다. 반대하고 배척하는 이들을 거부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주님의 은총을 간구하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다 보면 내 마음이 먼저 커지게 되고,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다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음에 화만 쌓이게 되고 주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먼저 품을 키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다.>
-송영진신부-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예수님께서 미리 보낸 심부름꾼들이 할 일은, 예수님과 사도들을 위해서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고 박해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고,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리짐 산’의 성전을 무시하고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들을 불살라 버릴까요?”입니다.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사람들을 불살라 버린 일은 엘리야 예언자가
한 일인데(2열왕 1장),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그것과 같은 일을
하고 싶어 한 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의 심부름꾼들에게 한 일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이신 분(루카 9,20)”에 대한 모독으로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런 죄인들은 하느님의 심판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들이었다면
자신들이 당한 일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심도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남을 심판하지 마라.
그래야 너희도 심판받지 않는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7,1).
‘심판’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악한 행동을 했더라도,
그것을 심판하는 일은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자신들이 직접 심판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신성 모독죄가 됩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에게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와서
사마리아인들의 마을을 불살라 버릴 능력’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또 그것은 여기서는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닙니다.
마치 하느님이라도 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고 처벌하려고 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점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도 너무 나쁜 악인들을 보았을 때
천벌이 내리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의 심정도 바로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2)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고 가르치셨습니다(마태 5,44).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라는 가르침은,
박해자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가르침입니다.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시지 않고,
악인이 회개해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는 분”입니다(에제 33,11).
하느님께서 악인에게도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불의한 이에게도 비를
내려 주시는 것은(마태 5,45), 그들이 회개해서 구원받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입니다.
3)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5).”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리는 것은,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늦기 전에’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라는 호소이기도 합니다.
사도들이(신앙인들이) 할 일은,
안 믿는 사람들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그들이 심판받고 멸망을 당하는 것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4)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그 자신이 한때 박해자였기 때문에,
이 말에는 그만큼 더욱 절실한 심정이 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스테파노 순교와 종교박해 당시에
신자들이 복수심에 사로잡혀서 박해자 사울을 죽였다면?
그러면 우리에게는 바오로 사도라는 위대한 사도는 없었을 것입니다.
5) 이 일을, 사마리아인들의 입장에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마리아인들도 하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다른 성전에서 믿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사실 당시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박해자는 유대인들이었고, 사마리아인들은 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당한 일은, 유대인들에게 당한 일들에 대한
‘사마리아인들의 작은 앙갚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했던,
또는 박해하고 있는 일들을 먼저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최후의 심판은 ‘하느님의 정의’가 완전히 실현되는 때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들이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께서 참고 기다리시는 ‘자비의 시간’입니다(2베드 3,9).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우선 먼저 ‘자비’부터 실천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정의의 실현’을 위해서도 노력해야 하지만,
그 ‘정의’는 ‘무자비한 정의’가 아니라,
모두가 함께 사는, ‘자비를 바탕으로 한 정의’이어야 합니다.>

복음: 루카 9,51-56: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리게 하여...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서의 죽음을 향한 길을 나서신다. 하늘로 올라가시어 아버지 하느님과 함께 계실 때가 다가왔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사마리아 마을로 보내신다. 예수님을 맞을 준비를 시키셨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제자들을 배척하였다. 주님께서는 이미 그럴 것을 알고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수난을 당하시게 된다. 유대인들의 경멸과 조소를 견디어야 하고,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온갖 폭력과 고통을 받아들이셔야 할 몸이었다. 이러한 고통 앞에 제자들이 상처받지 않고, 심한 냉대를 받아도 불평하지 않고 참아 내기를 바라셨다. 이 사마리아인들의 냉대를 예행연습의 도구로 삼으셨다. 그들은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위해 그들을 꾸짖으셨고, 그들을 벌주고 싶어 하는 제자들의 분한 마음을 풀어주셨다. 이것은 앞으로 제자들이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참고 견디며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도록 제자들을 단련시키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제자들을 위하여서 하신 일이었다. 제자들은 이제 온 백성을 가르칠 사람들로서 방방곡곡을 다니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여야 한다. 그 사명을 행하는 과정에서 복음을 거부하고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는 무리도 만나게 된다. 사마리아인들에 대해서 분개했던 제자들을 오히려 꾸중하신 것은 그들을 위해서였다. 복음의 전달자로서 앙갚음하려는 마음보다는 온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신 것이다. 진노와 앙갚음으로 대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 주님께 받은 능력을 잘못 사용하려 했던 제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을 주님의 뜻에 맞도록 사용하도록 힘써야 한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해서 또 봉사를 많이 한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나의 기준에 맞추려고 한다면 그것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뜻과는 먼 행동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의 선입견이나 부족한 판단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을 우리가 거절하는 예도 많다. 그리고 또 내가 사랑을 베풀려고 하였을 때, 거절을 당하거나 무시당하는 때도 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상황을 통하여 내가 보였던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이제 주님의 모범을 본받아 이웃에게 더욱 관용을 베풀며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과 도움을 청하여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 51)
-한상우신부-
예수님의
마음을
만난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예수님께서는
결심으로
화답하신다.
마음을
바치신다.
너와 나를
살리는
복음의
결심이 있다.
구원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절망을
치유하는
결심이며
어리석음을
치유하는
결심이다.
믿음은
결심이다.
다시
일어서는
결심의
마음이다.
결심 뒤에는
언제나
하느님이
계신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마음을 전하고
마음을 나누신다.
십자가는
새마음이다.
자기를
버려야
얻게되는
새마음이다.
삶속에서
복음의
마음을
만난다.
마음을
굳히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깨어있는
마음이다.
깨어나야 할
우리들
마음이다.
가을꽃이
더더욱
향기롭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갈라진 세상을 하나로 일치시키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묻어납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루카 9,51)
"때"는 인류 구원을 위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성, 소명이 하느님의 뜻 안에서 완성되는 유일하고 완전한 시간을 의미합니다. 이 "때"의 도래를 의식하신 예수님께서 죽음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결단을 내리십니다. 사랑에서 우러나온 순종이 결단으로 표출된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루카 9,53)
사마리아인들은 북 이스라엘 왕국이 아시리아에 정복되면서 이방인과의 혼혈이 늘고 종교까지 뒤섞이게 되자 유다인들의 무시를 받아왔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구원자이심을 모르지 않지만(요한 4,1-41 참조) 그분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라는 사실이 못마땅해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지요.
이 일은 그저 여행 중에 일어날 수 있는 사소한 갈등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이루시려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이유와 목적이 잘 드러난 복선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 제사가 하느님과 인류, 유다인과 이민족의 화해를 위한 결정적 사건인 까닭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5-56)
제자들이 구약의 엘리야처럼 불을 내릴 능력이(1열왕 18,20-40 참조) 마치 자기들에게 있는 듯이 분노하며 흥분하지만, 예수님은 발끈하는 그들을 꾸짖으시고 담담히 다른 길을 택해서 걸어가십니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에서 환대받지 못해 손상된 스승의 체면 때문에 분노한 것처럼 포장하지만, 실상 구겨진 것은 제자들의 허영과 숨은 야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느님 백성 안에서 계속 반복되는 이 소모적 적대관계를 다시 한 번 확인하시면서 당신의 계획을 더 굳히시지 않으셨을까 헤아려 봅니다.
제1독서에서는 민족들 사이에 대동단결의 판이 활짝 펼쳐집니다.
"한 성읍의 주민들이, 다른 성읍으로 가서, '자, 가서, 주님께 은총을 간청하고, 만군의 주님을 찾자. 나도 가겠다.'"(즈카 8,21)
경계하고 구분하고 차별하던 선민의식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모든 민족이 한 분이신 주님을 향해 나아옵니다. 자기들만의 하느님이라는 독점적이고 배타적인 구원관에서 서로를 진리와 구원으로 이끌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한 판 화합과 일치의 장이 열리고 있지요. 참으로 흐뭇하고 흥겨운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말로 예수님께서 목숨 바쳐 이루시려는 화해의 잔치일 것입니다.
"나는 라합도 바빌론도 나를 아는 자로 여긴다. 보라, 에티오피아와 함께 필리스티아와 티로를 두고, '그는 거기에서 태어났다.' 하는구나."(화답송)
시편 저자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사 안에서 때로는 이스라엘과 불화하고 적대했던 원수들까지도 주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포용하심을 노래합니다. 구원은 이스라엘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든 민족에게 내리신 주님의 선물입니다.
서로 다른 이들이 어울리고 조화를 이룬다는 것, 서로에게 입힌 상처에도 불구하고 용서와 화해로써 거리를 좁히려 애쓰며 하나 되기 위해 다가가는 것, 근거 없는 무시와 우월감의 폭력을 멈추고 상대를 "우리"로 바라보는 것. 사실 이런 과정들이 쉽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정과 공동체, 사회에서는 물론 자기 존재 안에서도 나날이 미세하고 복잡한 진동과 분열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를 오늘도 말씀으로 일깨우시며 담담하고 초연히 가실 길을 가십니다. 죽음을 각오한 발걸음에 분노나 억울함, 서운함이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여정에서 무질서하고 애먼 감정일랑 그저 흔연히 떠나보내고, 주님께서 이루실 화해의 제사를 향해 그분과 함께 담담하고 초연히 나아가시길 기원합니다. 얕고 얇고 가벼운 우리 성정만으로는 불가능할 터이지만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오신"(복음 환호송) 주님께서 우리 존재의 중심을 묵직히 잡아주시면 가능하리라 믿습니다. 그리하면 우리도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는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을 테니까요. 평화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6주 화요일-하늘에 오르기 위해 내가 가야할 곳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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