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6일 연중 제26주일

Margaret K 2021. 9. 26. 06:51

2021 9 26일 연중 제26주일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마르 9,38~43.45.47~48 )

 

"Whoever causes one of these little ones 
who believe in me to sin,
it would be better for him if a great millstone
were put around his neck
and he were thrown into the sea.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짓지 않고 살기를 바라십니다. 그래서 우리 육신의 한 부분이 죄를 짓게 하면 그 부분을 잘라 던져 버리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알아듣고 죄를 지은 육신을 잘라 낸다면, 우리는 정화되고 자꾸 반복되는 죄를 짓지 않게 될까요? 아닙니다. 의식과 생각이 바뀌지 않고서는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나약함 때문에 유혹에 빠져 죄를 짓게 됩니다. 죄를 지으면 가슴 위에 돌덩이를 하나 올려놓은 듯이 답답하고 힘들며 고통스럽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나약함을 탓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용서를 믿고, 주님의 은총과 자비에 의탁하여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러면 우리는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을 더 많이 가져야 합니다. 교회의 성사, 특히 고해성사와 성체성사에 자주 참여하며 우리의 영혼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록 죄인이지만 용서받은 죄인으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깨끗하게 치유받은 나병 환자(마르 1,40-42 참조), 시력을 되찾은 바르티매오(마르 10,46-52 참조), 죽음에서 되살아난 라자로(요한 11,1-44 참조)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풍성합니다. 오늘 제2독서의 말씀을 기억하며 나의 것을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더 쉽게 알게 될 것입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자비는 하느님의 또 다른 이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의 이름은 자비입니다』, 35면 참조). 하느님을 알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자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점점 죄에서 멀어지고, 우리의 나약함 안에서 우리의 강함이신 하느님의 도우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선택과 결단

-키엣대주교-

 

죄를 지을 때마다 수족을 잘라버려야 한다면 이 세상에 성한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너무나 단호한 말씀이지만 그 이면에는 ‘선택과 결단’에 대한 가르침을 담고 있습니다. 선택에 따라 나의 길이 달라질 것입니다. 잘못에 대한 단호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손발을 자르고 눈을 빼낸다는 것은 죄를 짓게 하는 사람들과 장소, 물건들로부터 벗어난 완전한 격리, 완전한 평화, 완전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미 내 삶의 일부분인 그들과의 단절은 많은 고통이 따를것입니다. 마치 전쟁에서 패배한 부상병과 같은 모습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과 평화,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죄의 단죄는 나를 파괴하는 모든 악한 것을 없애는 것입니다. 악을 멀리하여 내 몸 안에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합니다. 영혼을 파괴하는 나쁜 습관과 생각들을 버려야 합니다. 죄를 단죄하는 고통 뒤에는 크나 큰 기쁨과 행복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이 세상의 짧은 행복과 영원한 참 행복 중 어떤 것을 선택하겠습니까?

아마 모든 사람이 영원한 행복을 선택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만지면서도 제대로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는 우리의 손과 발과 마음을 고쳐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되새겨야 합니다.

목적과 수단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수단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방법과 도구일 뿐입니다. 수단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수단과 목적이 전도되어서는 안됩니다. 만일 수단이 목표를 향해 가는 길에 방해가 된다면 주저없이 버려야 합니다.

하늘 나라는 우리의 목표입니다. 지금 이 세상은 하늘나라를 가기 위한 수단이며 육체는 수단이며 영혼은 목적입니다. 지금의 삶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위한 것이고 육체는 영혼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지금의 희생은 하늘나라에 받을 것입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세상의 것에 의지하지 말고 욕심을 버리십시오. 지금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마지막 순간은 예고하지않고 어느 한 순간 닥칩니다. 그러므로 하루 하루 미루지 말고 어서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께 돌아가기를 미루지 말고 하루하루 늦추려 하지 마라. 정녕 주님의 분노가 갑자기 들이닥쳐 너는 징벌의 날에 완전히 망하리라. 부정한 재산을 믿지 마라. 정녕 재난의 날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리라. (집회 5,1-8)”

수단인 육체를 위해 영혼을 잃지 마십시오. 물질 때문에 하늘나라를 잃지 마십시오. 영혼을 얻기 위해 육체를 희생해야합니다. 하늘나라를 얻기 위해 지금 내가 가진 것을 나누십시오. 이것만이 하늘 나라를 얻는 가장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주님, 저희가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악을 단절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나에게 버려야할 것이 있습니까?

2. 방해가 되는 것들을 과감하게 단절하고 있습니까?

3. 익숙한 사람, 익숙한 것들과의 단절은 어렵습니다. 나의 결심만으로는 내 안에 있는 나쁜 것들과 죄를 단절하기 어렵습니다. 과감한 단절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스파게티를 좋아해서 가끔 직접 해 먹습니다. 주로 혼자 해 먹는 것이기에 1인분만 하면 되는데, 사실 그 양 조절이 쉽지 않더군요. 스파게티면 봉지 뒤쪽에 1인분을 알려 주는 동그라미에 맞추면 1인분이라고 하는데 그 양을 보면 너무 적어 보입니다. 실제로 약간 부족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한 줌 더 넣어서 삶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산더미처럼 불어난 면의 양에 깜짝 놀라게 됩니다. ‘적당히 1인분’은 제게 너무 조절하기 힘든 양입니다.

‘적당히’라는 말의 모호함으로 일상 안에서도 어려움을 겪습니다. 최선을 다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저 ‘적당히’입니다. 그러나 ‘적당히’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냥 부족하거나 반대로 많은 것이 더 편합니다. ‘적당히’가 정답처럼 생각되면 ‘대충’하게 될 뿐입니다.

삶에 적당히는 없습니다. 주님의 일도 '적당히'가 안 됩니다. 늘 최선을 다해야 할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데 있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적당히 대충해서 따르는 것일까요? 아니었습니다. '적당히'가 아닌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따르라고 하십니다.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다고 하시지요. 손이 죄짓게 하면 그 손을 잘라 버리라고 합니다. 또 발이 죄짓게 하면 역시 잘라 버리는 편이 낫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눈이 죄짓게 하면 그것을 빼 던져 버리라고 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적당히’의 삶이라 할 수 있습니까? '적당히'가 아닌 최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주님의 뜻을 실천하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도 ‘적당히’에서 멈추고 맙니다.

이렇게 최선을 다하는 사람은 같은 편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도 주님의 뜻을 따른다면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막으려고 했던 제자들의 뜻과 달리, 예수님께서는 막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다함께 사랑의 길을 최선을 다해 걸어가야 할 것을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제시하시는 사랑의 길을 어떻게 실천하면서 걸어가고 있었을까요? 적당히, 대충이라는 모호한 말이 아닌, 최선을 다하는 확실한 우리의 모습이 필요합니다.
사랑은 사람을 치료한다. 사랑을 받은 사람, 사랑하는 사람 할 것 없이 모두(칼 메닝거).

훈수는 그만!

바둑이나 장기를 둘 때 옆에서 훈수를 두면 당사자의 기분은 상당히 좋지 않습니다. 특히 상대편의 훈수를 둬서 불리한 상황이 되면, 내 편이 없는 것 같아서 더 기분이 안 좋습니다.

바둑이나 장기만이 아닙니다. 음식 먹을 때도 훈수 두는 사람이 많습니다. 소고기를 구울 때 땀만 나면 뒤집은 뒤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람, 돼지고기는 땀이 나기 전에 뒤집으면 절대로 안 된다는 사람, 샤브샤브 먹을 때 야채는 숨만 죽으면 바로 먹어야 한다는 사람, 생선회를 고추장 찍어 먹는다고 먹을 줄 모른다고 면박을 주는 사람 등등….

음식에 대한 훈수도 이렇게 많습니다. 그런데 음식에만 그럴까요? 남의 삶에 대한 훈수 역시 차고 넘치는 것 같습니다. 남의 삶을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말이지요. 물론 상대방을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는 데서 감사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지나친 간섭으로는 관계를 더 힘들게 만듭니다.

존경을 받는 사람은 훈수를 두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좋은 삶을 직접 살아서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훈수쟁이가 되지 맙시다!

 친절해야 하는데, 뱅게게까지 친절해야 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이렇습니다. 먼저 제자들이 어떤 사람을 고발합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뽑으신 제자가 아니었는데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킵니다. 이에 제자들은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제자들의 기대와 같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 이는 오히려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며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약간 뜬금없어 보이는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자세히 그 흐름을 보면 친절엔 보상이 반드시 따른다는 뜻이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잔혹하게 굴지 말고 친절하면 그 보상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지만 하나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어느 비바람이 치던 날 밤, 필라델피아에 온 한 노부부가 하룻밤을 머물고자 허름한 호텔에 찾아들었습니다. 도시의 축제 때문에 그 호텔에도 빈방이 없었습니다. 이때 종업원이 노부부에게 말했습니다.

     “저희 객실은 모두 다 찼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늦은 시간에 다른 숙소를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밤 한 시에 이렇게 비가 쏟아지는 거리로 선생님 부부를 내보낼 수는 없군요. 그러니 누추하지만 제 방에서라도 쉬었다 가시면 어떨까요?”

  

    노부부는 너무나 고맙게 생각하며 그 종업원의 방에서 하룻밤을 지냈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방값을 내면서 노부부의 남편이 종업원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가장 훌륭한 호텔주인이 될 만한 사람입니다. 언젠가 내가 당신에게 그런 호텔 하나를 지어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종업원은 농담으로 여기고 빙긋 웃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2년 후인 1876년, 그 종업원은 비바람이 치던 날 밤에 만났던 노부부로부터 한번 만나자는 초청장과 함께 뉴욕 왕복 기차표가 동봉된 편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뉴욕을 찾아갔고, 그를 초청한 노신사는 뉴욕 5번가 34거리로 가서 하늘 높이 솟아있는 새 빌딩 하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건물은 무려 1,900개의 객실을 갖춘 거대한 호텔이었습니다. 노인은 그 종업원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말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당신에게 운영해보라고 지어 주는 호텔입니다.”

  

    단 한 번의 친절로 3층짜리 허름한 호텔의 야간 종업원이었던 그가 이제는 1,900개의 객실을 갖춘 뉴욕 한복판의 호텔 지배인이 된 것입니다. 그에게 은혜를 갚은 노인은 ‘존 제이콥 아스터’라는 월토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경영자였습니다. 그 종업원의 이름은 ‘조지 C 볼트’입니다. 그는 원도프 아스토리아 호텔의 첫 총지배인이 되었고 나중에는 ‘호텔왕’으로 불렸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친절을 베풀기 위해 자기 방을 내어주었다는 것입니다. 친절은 분명 자기에게는 불친절입니다. 자기에게 친절하면 남에게 친절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친절의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도 이웃입니다. 자기가 방에서 편안히 쉬면서 손님을 맞이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이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자신에게 아주 가혹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자르고 발이 그러면 발을 자르며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빼버리라고 하십니다. 자기 자신에게 친절한 것은 지나치면 죄가 됩니다. 어쩌면 이는 당신 제자들이 자신들에게 너무 온화하므로 남들에게 차갑게 대하는 것이라는 질책도 될 수 있습니다. 

 

    ‘타인에게는 봄바람처럼 자신에게는 찬 서리처럼.’과 같이 이와 연관된 떠도는 말이 세상에 많습니다. 자신에게 모질수록 타인에게 관대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에게 관대하지 못한 사람은 자신에게는 관대한 것입니다. 너무 관대하여 죄를 짓게 되고 그러면 그 죄책감을 무마하기 위해 타인을 더 나쁜 사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친절을 베풀어도 그 대상이 보답할 줄 모른다면 어떨까요? 그 친절의 대상이 존 제이콥 아스터였기 때문에 호텔을 받은 것은 아닐까요? 만약 강도였으면 더 많은 것을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친절을 베풀어도 무조건 그 보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자칫 호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는 그 내용이 명확히는 떠오르지 않아도 금자씨가 13년 동안 감옥에서 친절을 베풀어 그 감옥에 있던 사람들이 그녀의 복수를 도와준다는 것쯤은 기억이 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절을 베푸는 동안은 금자씨 자신에게는 가혹한 감옥생활이었습니다. 자신이 편하면서 친절을 베풀 수는 없는 일입니다.

 

    반면 금자씨에게 복수를 당하는 백선생은 누구에게도 불친절했기에 자신을 도와줄 친구가 없었습니다. 물 한 잔도 줘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친절은 자신을 가혹하게 대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친절을 베풀어야 끝이 좋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친절할 것인지, 이웃에게 친절하기 위해 나에게 불친절해질 것인지 선택해야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보고 좀 찜찜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자기 복수를 위해 의도적으로 한 친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복수의 맛은 짜릿하지만 결국, 금자씨를 도와준 인물들은 살인자의 공범이 되는 것입니다. 

 

    사탄에게 친절을 베풀면 사탄과 한패가 됩니다. 해적선에서 친절을 베푼다고 그것이 선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절대 친절을 베풀어서는 안 되는 게 딱 하나 있는데 바로 자아(ego)입니다. 예수님은 타인에게는 관대하지만, 자신에게는 혹독하여지라고 하십니다.

    이렇게 나에게 불친절한 사람이 되어야만 친절이 가능한 이유는 나도 하나의 이웃이기 때문입니다. 에너지는 한정되어 있고 나에게 그 친절을 다 베풀면 이웃에게 물 한 컵 줄 힘도 사라집니다. 

 

    내가 친절을 베푸는 자아는 영원한 뱀입니다. 뱀이 나에게 어떤 보상을 줄 수 있을까요? 그래서 자아를 뱀으로 표현한 것은 매우 적당합니다. 해적선에서의 친절은 그냥 해적질의 일부일 뿐입니다. 자아에게 친절하여 베푸는 친절은 받으면 안 됩니다. 나를 공범으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하와가 뱀에 친절하기 위해 베푸는 선악과를 먹어 공범이 되었습니다.

  

    죄를 이길 줄 모르는 사람은 자아와 사탄의 유혹에 친절한 사람입니다. 자아는 자기가 받은 친절을 더 큰 갈증으로 되돌려 줍니다. 어리석은 친절은 우리를 죄와 지옥으로 데려갑니다. 사실 이웃도 자아가 지배하고 있는 사람이 대부분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 한 컵의 친절을 베풀 때도, 나를 위해서거나 이웃을 위해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을 기쁘게 하려고 드리는 친절만이 보상을 받는 것입니다. 

 

    자신과 이웃도 뱀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친절을 투자합시다. 예수님은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친절을 온전한 친절로 되돌려 주시는 분은 하느님밖에 없습니다. 죄짓는 자의 친절을 받거나 그에게 친절하면 그것은 서로의 죄를 무겁게 할 뿐입니다.

 -조재형신부-

 

우리의 신체는 5장 6부가 있습니다우리의 몸에 있으면서 우리가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음식이 들어오면 소화시켜서 에너지로 만들고그 에너지를 온 몸으로 내보내는 역할을 합니다혈액형이 있듯이우리의 5장 6부도 사람에 따라서 8가지 체질로 나눌 수 있다고 합니다저는 그 중에 수음체질이라고 합니다수음체질의 특징은 추위를 많이 타고위장이 약하다고 합니다찬 음식보다는 따뜻한 음식이 몸에 좋다고 합니다생각해 보니 저는 더위보다는 추위에 약한 편입니다갈증이 나면 찬 물도 먹지만 몸에는 따뜻한 물이 좋은 것 같습니다요즘 사람들은 하나를 더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그래서 5장 7부라는 이야기를 합니다그 하나가 무엇일까요맞습니다스마트 폰입니다대한민국은 국민의 95%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고전 세계에는 50억의 인구가 스마트 폰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스마트 폰으로 은행 업무를 하고스마트 폰으로 강의를 듣고스마트 폰으로 쇼핑을 하고스마트 폰으로 예약을 하고스마트 폰으로 검색을 합니다.

 

지금의 인류를 포노사피엔스라고 정의하기도 합니다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회사는 대부분 스마트 폰에 기반을 둔 회사라고 합니다스마트 폰을 세상에 내놓은 애플스마트 폰으로 검색의 시대를 연 구글스마트 폰으로 소통의 시대를 연 페이스 북스마트 폰으로 쇼핑의 시대를 연 아마존이 있습니다스마트 폰을 만들고스마트 폰의 뇌인 반도체를 만들어 내는 삼성전자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습니다어느새 우리 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넷플렉스유트브카카오톡은 모두 스마트 폰을 중심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자동차가 들어오면서 마차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전기가 들어오면서 호롱불은 드라마에서 볼 수 있는 유물이 되었습니다수돗물이 들어오면서 마을의 우물도 사라졌습니다. 50억 명이 사용하고 있고이들이 실시간으로 연결되고 있으며금융과 유통 그리고 소통과 음악이 스마트 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스마트 폰 시대에 적응해야 합니다코로나 시대를 지내면서 우리는 스마트 폰으로 미사를 보았고스마트 폰으로 비대면의 상황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오늘 제독서에서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생각의 틀을 바꾸라고 이야기합니다예언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전유물이 아니라고 합니다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영은 하느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지역이나 신분에 관계없이 함께 할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권위와 독선 그리고 소유와 독점으로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소통과 겸손 그리고 개방과 나눔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을 수 있습니다오늘은 교회에서 정한 난민과 이민자들을 위한 날입니다한국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철수 하면서 한국정부에 협력했던 현지인들을 모두 안전하게 한국으로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한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현지에 남으면 박해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370명 중에는 어린아이가 150명가량 있었다고 합니다한국정부의 이와 같은 결정과 행동은 국제사회에도 모범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막지 마라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늘 새로운 을 말씀하셨습니다안식일이 사람의 주인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사람의 아들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 역시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새로운 세상이 오면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흐르지 않는 물은 썩기 마련입니다모든 물은 흐르고 흘러 넓은 바다로 가야 합니다신학생 때 배웠던 말이 있습니다. “교회는 항상 쇄신 되어야 한다.(Ecclesia est  semper Reformanda!)" 

 〈 그것을 잘라 버려라. 〉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마르 9,41-42).”

 

이 말씀에서 ‘마실 물 한 잔’은 ‘아주 작은 일’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그 일이 선행과 사랑이라면,

그 일 덕분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틀림없이 ‘하느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심판 때에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라도” 라는 말은, “한 사람이라도” 라는 뜻이기도 하고,

“한 번이라도”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한 사람이라도 다른 사람을 죄짓게 하는 자”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을 한 번이라도 죄짓게 하는 자”이기도 합니다.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라는 말씀은,

지옥벌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차라리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낫겠다는 심정이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만큼 ‘남을 죄짓게 하는 죄’가 ‘큰 죄’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평생 죄만 짓고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선행을 한 번 실천했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까?

그러면 그가 지은 죄들은 어떻게 되나? 또 평생 착하게 살던 사람이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했다면, 그것만으로 지옥에 떨어지게 될까?

그러면 그가 평생 실천했던 선행과 사랑들은 어떻게 되나?”

 

이 의문의 답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입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도 답입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에제키엘서에 있는 다음 말씀들도 답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내 생명을 걸고 말한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나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

돌아서라. 너희 악한 길에서 돌아서라.

이스라엘 집안아, 너희가 어찌하여 죽으려 하느냐?(에제 33,11)”

“의인이 자기 의로움을 버리고 돌아서서 불의를 저지르면, 그는 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악인이 자기의 악을 버리고 돌아서서 공정과 정의를

실천하면, 그는 그것들 때문에 살 것이다(에제 33,18-19).”

‘심판과 멸망’이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따라서 평생 죄 속에서 살았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마실 물 한 잔’을 주는 것과 같은 작은 선행이라도 실천한다면,

지옥으로 떨어지는 일은 피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은 해야 합니다.

(살아서 다 못하면 연옥에 가서.)

만일에 선행을 실천한다고 해도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은 상태라면

그 일은 선행이 아니라 위선이고, 그러면 그 일은 선행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반대로, 평생 착하게 살다가 어쩌다가 한 번 실수해서 다른 사람을 죄짓게

했다면, 그 한 번의 실수 때문에 지옥에 가지는 않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실수에 대해서는 회개하고 보속해야 합니다.

(평생 진심으로 착하게 살았던 사람이라면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곧바로 회개하고 보속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어떤 이유로 변절해서, 자신의 ‘과거의 삶’을 내세우면서

자신의 실수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다면?

그러면 과거에 잘 살았던 것이 모두 쓸모없는 일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심판 시점에서 ‘현재 상태에 대한 심판’입니다.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가?”가 아니라,

“지금 어떤 사람인가?”를 보는 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긴 한데, 과거에 지은 죄에 대한 보속은 모두 마쳐야 합니다.)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 9,43-48).”

 

이 말씀은 실제로 손, 발, 눈을 잘라 버리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유혹들을 단호하게 물리쳐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잘라 버려야 할 것은 손, 발, 눈이 아닙니다.

유혹이 왔을 때 그 유혹에 넘어가는 ‘마음’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을 어떻게 잘라 버려야 하나?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로마 7,15.19.24-25ㄱ).”

바오로 사도 같은 위대한 사도도

죄를 짓게 하는 마음을 잘라 버리기 위해서 무척 애를 썼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잘라 버리는 방법은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 밖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께서는 고난을 겪으시면서 유혹을 받으셨기 때문에,

유혹을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가 있습니다(히브 2,18).”

죄를 짓게 하는 유혹들을 넓은 뜻으로 ‘사탄의 유혹’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물리치는 방법은 하나뿐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것은 기도가 아니면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나가게 할 수 없다(마르 9,29).”

 연중 제26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모세는 여호수아를 꾸짖으며, 하느님의 영을 인간의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하는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지극히 자유로우신 하느님을 인간이 멋대로 지배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고, 또 우리가 다른 형제들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인 듯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형제들의 응답 능력을 우리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 마르 9,38-43.47-48: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

 

오늘 복음을 통해 주님께서는 그리스도 신자는 아니더라도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받아들일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하신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신앙이 올바로 성숙하지 못하면 나와 다른 사람들을 구분하려고 하는 바리사이적 위험이 있다. 예수님은 이런 벽을 허물고 모든 진리의 씨앗들을 받아들이라고 하신다. 그것은 복음을 올바로 선포하기 위해 그들과의 접촉점이 무엇인지 발견하여야 한다. 우리의 신앙은 논쟁적이거나 배타적인 성격을 띠지 않고 모아들이고 너그러이 받아들여야 한다.

 

복음에서는 구마 행위를 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께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도록 막아 보려 하였습니다.”(38절) 말씀드린다. 이것은 어떤 차별을 나타낼 뿐 아니라, 예수님을 많은 사람이 함께 나누어야 할 선물로서가 아니라, 질투심에 의한 소유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예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 하신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사려는 듯한 것 같지만, 이 말씀은 사도들에게 자신들을 진리의 소유주와 같이 자처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 주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는 우리와 어떤 신앙의 공통점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우리를 개방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대화와 또한 그리스도인들 간의 일치운동 근거를 주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와 함께하지 않는 자는 나를 반대하는 자고, 나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는 자는 흩어 버리는 자다.”(마태 12,30) 하신다. 그분을 알아보는 사람은 그분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으며, 만약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면 그분을 해치게 되고 그 결과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이다.

 

진리와 선은 부분적으로는 다른 곳에도 존재하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다가갈 수 있는 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러한 미세한 것을 통해서도 인간에게 다가오시는 분이시다.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성령은 교회라는 테두리는 물론 교회 신앙의 영역을 훨씬 넘어서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요한이나 여호수아처럼 다른 사람들이 주님의 성령을 받거나 주님의 이름을 부르거나 공경하는 데 대해 질투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뻐해야 할 것이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기 때문에 너희에게 마실 물 한 잔이라도 주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41절). 우리의 신앙은 어떤 형식이 아니다. 때로는 그리스도 신자가 아닌 사람에게서도 발견되는 실천적 생활이다. 사도들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은 유다인들이나 이교인들이었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신뢰를 받기 위해서는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해 처음부터 권위의 태도가 아니라 봉사의 태도를 보여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하여 공동체 내의 어떤 사람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죄를 짓지 않도록 하라고 하신다. 이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신앙의 위기에 놓일 수 있는 사람이다.

 

물에 빠진 사람의 목에 달린 연차맷돌은 예수의 시대적 배경에서 볼 때 무덤도 갖지 못하게 되는 버림받은 인간의 최고의 불행을 상징하는 표현이다. 죄를 짓게 하는 인간 신체의 세 가지 상징적 표현은 아주 소중한 것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치명적으로 영원한 파멸을 초래할 죄로 인한 벌에 비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참조: 43-48절). 지옥이라고 번역된 게엔나(Geenna)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남서쪽에 있는 힌논(Hinnon) 계곡을 말하는데 버림받은 자들이 버려져 화장되던 곳이다. 그곳은 항상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악한 이들을 벌하는 장소의 대명사가 되었던 곳이다.

 

죄를 짓게 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의미로 육신의 일부를 잃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은 우리 인간의 윤리적 영적 의무의 차원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 나라의 차원에서 근본적인 선택을 하도록 요청받고 있다. 우리가 선택을 잘못하면 우리가 잃는 것은 일부가 아니라 모든 것을 영원히 잃게 될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불의한 방법으로 부자들이 쌓았던 그 재물은 실제로 마치 녹이 쇠를 부패시키듯이 그들 자신을 갉아먹을 녹이 될 것이라고 한다. 그들의 재물은 생명을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지만, 영원히 그 생명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탐욕을 생기게 하는 눈을 빼어버릴 용기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마르 9,47). 오늘의 말씀은 대단히 준엄한 가르침이다. 진정으로 자신을 잃는 것이 곧 자신을 찾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공동체 안에서나 공동체를 넘어 다른 사람들과도 사랑 안에 올바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변화가 나로부터 시작하여 이 사회가 변화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교회가 "세계 이주민과 난민의 날"로 정한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의 경계를 어디에 두고 있는지 물으십니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마르 9,40)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마 기적을 일으키자 제자들이 나서서 막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보고를 들으신 예수님은 "막지 말라"고 오히려 제자들을 제지하십니다.

제자들은 자기들과 같이 다니는 이들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데, 예수님은 당신을 반대하지 않는다면 누구라도 당신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일을 할 수 있다고 여기십니다. 두 견해의 차이는 "우리"의 범위입니다. 제자들의 "우리"의 범위는 아직 닫혀 있고 편협합니다. 예수님의 "우리"는 무한히 열려 있기에 경계조차 희미합니다.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마르 9,42)
당신을 믿는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예수님께는 귀하고 소중합니다. 제도 안에서 어떤 신분으로 타이틀이 부여된 이들뿐만 아니라 영과 진리 안에서 당신께 믿음과 사랑을 고백하는 모든 이들, 작고 미소해서 눈에 띄지조차 않는 이들까지도 혹여 누군가로 인해 죄를 짓게 될까봐 염려하고 안타까워하시지요.

제1독서는 광야에서 일흔 원로에게 영이 내린 일화입니다.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민수 11,29)
주님께서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 원로들에게 나눠 주신 일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 모세의 시종인 여호수아가 걱정합니다. 원로들이 주님의 영으로 충만해져 사사건건 주님의 뜻이라고 나서면 모세의 입지가 불안해질까 염려해서 그랬을지 모르지만, 모세는 오히려 이를 반깁니다.

모세는 자기 혼자 탁월한 지도자로 군림하기보다, 모든 백성이 하느님 뜻을 알아듣기를 바랍니다. 겸손한 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명예나 위치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것이니까요.    
   
제2독서에서는 부자들에 대한 경고가 울려퍼집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고 소리 높여 우십시오."(야고 5,1)
야고보 서간의 저자는 부자들이 쌓은 재물과 옷, 금과 은 등이 썩고 좀먹고 녹슬었으며, 바로 그 녹이 부자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리라고 일갈합니다. 썩고 좀먹고 녹슬었다는 건 필요도 없는 잉여의 것들을 쌓아두고 다시 찾지도 않았다는 의미이까요.

"품삯 가로채기, 사치, 쾌락, 기름진 마음, 의인을 단죄하고 죽임"(야고 5,4-6 참조)
여기서 부자라 일컫는 이들은 단순히 재물이 많은 이들이라기보다, 스스로 규장해 놓은 "우리"의 범위가 좁디 좁아서 주위의 가난하고 곤고한 이들의 절박한 생존은 아랑곳없이, 차라리 썩고 좀먹고 녹슬어도 자기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기를 좋아하는 부류를 가리킬 것입니다.

그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꾼들의 정당한 삯을 가로채고 사치와 쾌락으로 제 몸뚱이만 섬기며 마음에는 기름기가 가득 차 사람된 도리에 무뎌졌습니다. 가난한 이들 편에 서서 하느님의 정의를 외치는 의인들을 단죄하고 죽이기까지 하는 이들이지요.

다시 복음으로 돌아가서 보면, 후반부는 죄를 지은 지체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잘라 버려라, 빼 던져 버려라."(마르 9,43.45.47)
죄를 지은 주체는 그 사람이고, 엄밀히 보자면 죄는 그의 마음에서 시작된 거지요. 그런데도 단지 행동에 옮겼을 뿐인 손이나 발, 눈을 제거하라시는 건, 결국 그것들이 없으면 처참해지는 존재는 그 자신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만큼 죄를 엄중히 생각하고 전인적으로 단속해야 한다는 의미를 반어적으로 하신 듯합니다.

어쩌면 사람 사이의 죄는 "우리"의 범위를 축소하고 폐쇄시키는 데서 오는 게 아닐까 합니다. "우리"의 범위를 자기와 가족, 뜻이 맞는 사람들 정도로 한정한 이들은 그 경계 밖에 존재하는 이들을 외면하거나 적대하고, 심지어 해를 입혀도 죄책감조차 가지지 않으니까요. 그 역시 나와 함께 "우리"라면 절대 하지 않을 짓들을 서슴없이 하는 그 자체가 곧 죄일 겁니다. 야고보서에서 언급된 부자들이 바로 그런 부류지요.

필요 이상으로 움켜쥐고 닫고 밀쳐내는 손, 도움이 필요한 이웃과 형제들을 짓밝고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즐기며 불편한 진실 앞에서는 질끈 감아버리는 눈이야말로 예수님께서 없애버리라 하신 지체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정치와 종교, 이념과 환경, 생계와 차별 등의 문제로 무수한 이들이 고국을 떠나 삶의 터전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적잖은 이들이 더 지독한 사고와 질병, 폭력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어가고 있지요. 동방 끝에 자리한 우리나라도 어느새 이 현실을 마주한지 꽤 되었습니다.

인권과 환대, 평화의 지향이 우리 안에 단단히 또아리를 틀고 있는 두려움과 차별의 벽을 허물고 함께 "우리"에 대한 아버지의 뜻을 찾는 데 마음을 모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범위를 한없이 확장하시는 예수님을 따라 손을 펴고 발길을 내디디며 눈을 여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홀로'가 아니라 '함께' 하느님 나라를 꿈꾸는 작은 자들이니까요. 오늘 특별히 우리 주위에 있는 이주민들과 난민들을 위해 기도하고 따뜻한 손길과 눈길을 보내도록 합시다.

 <영의 독점, 가장 나쁜 소유욕>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점은 제자들의 독점 시도입니다.

민수기에서 여호수아는 모세를 추종하지 않은 원로 둘이

모세와 일흔 원로에게 내렸던 같은 영을 받아 예언을 하자

그들이 예언을 못하게 해야 한다고 모세에게 요구합니다.

"저의 주인이신 모세님, 그들을 말리셔야 합니다."

 

복음에서도 요한은 주님의 제자단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자 막으려 했다고 말합니다.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모세와 주님의 대응은 내버려두라는 것입니다.

아니, 내버려두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고 모세의 경우는

좀 더 적극적으로 모든 백성에게도 영이 내리면 좋겠다고 합니다.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그런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영이 내리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는 것입니까?

영이 나의 것이나 또 누구의 것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영은 주님의 것이기에 영이 내리고 안 내리고는

주님께 달린 것인데 주님이 아닌 누가 어찌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럴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인데

우리 인간은 종종 주님의 사랑/은총과 심지어 주님의 영까지

나에게는 주어지고 다른 사람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도 가장 나쁜 소유욕이고

시기나 경쟁과도 관련이 있으니 이웃 사랑이 아니며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니니 하느님 사랑이 아닙니다.

 

우선 영에 대한 독점욕은 소유욕 중에서 가장 나쁜 소유욕입다.

좋은 물건을 나만 가지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이고,

부모의 사랑을 독점하려는 것도 나쁜 소유욕인데

주님의 영을 독점하려는 것이니 정말 나쁜 소유욕이지요.

 

다음으로 영의 독점은 시기심이나 경쟁심에서 비롯된 것이고,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이니 남의 불행에 기댄 나의 행복이며,

사랑이 눈꼽만큼도 없고 미움뿐이기에 결국 자신도 불행합니다.

 

끝으로 영의 독점은 자기 욕심이지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니

결국 하느님께 대한 감사도 사랑도 영광 드림도 없고 그래서 불행합니다.

 

주님의 영이나 영의 은사는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이니 이 하느님의 소유권을

인간이 침범할 수도 없고 그리해서도 안 되는 것이며,

우리 인간이 해야할 것은 그 모든 은사를 공짜로 주심에

감사와 영광과 사랑으로 돌려드리는 것뿐이고 그때 인간은 행복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나와 마찬가지로 받은 은사로 하느님께

영광과 사랑을 돌려드릴 때 시기와 경쟁은커녕 같이 기뻐할 것이며

그때 인간은 같이 행복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권고 8번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사도가 말합니다. '성령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예수님은

주님이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주님께서 자기 형제 안에서 

말씀하시고 이루시는 선을 보고 그 형제를 시기하면,

모든 선을 말씀하시고 이루어 주시는 지극히 높으신 분 자신을

시기하는 것이기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9월 30일 연중 제26주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