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9. 23. 07:27

2021년 9월 23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사제 기념일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로 널리 알려진 비오 성인은 1887년 이탈리아의 피에트렐치나에서 태어났다.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가 된 그는 끊임없는 기도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을 섬기며 살았다. 비오 신부는 1918년부터 그가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았다. 곧, 그의 양손과 양발, 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던 것이다. 이러한 비오 신부를 2002년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이 시성하였다.

☆☆☆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만나 보려고 하였다.

(루가 9, 7-9)

 

But Herod said, 
“John I beheaded.

Who then is this about whom I hear such things?”
And he kept trying to see him.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현대인의 많은 질병 가운데 하나가 신경 정신 의학에서 말하는 불안 장애나 공황 장애, 강박 장애 등 불안과 스트레스 관련 질환이라는 연구 논문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러한 어려움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 이웃 가운데 있을 수도 있고 또는 내가 그런 사람 가운데 한 명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에서 끊임없이 들어오는 요구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병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며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함께 나누고 이해하며 사랑함으로써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 낼 수 있습니다. 유독 나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충돌이 많다면, 스스로 성찰하여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성숙시킬 수 있습니다. 이기주의자나 배려 없는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처럼 “하느님도 당신을 사랑하시는데, 왜 당신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까?”라는 물음과 같은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의 부귀와 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는 헤로데를 만납니다. 일찍이 요한을 죽인 헤로데는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고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만나려고 합니다. 헤로데는 자기 자신도 요한도 몰랐기에 예수님도 어떤 분이신지 모릅니다. 하느님과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에 두려움에서 빠져나올 수도 없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헤로데와 같이 자기 자신 안에 갇혀 사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찾아 자신을 사랑하며 다른 이들에게도 열린 존재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외부 식당에 가는 것이 꺼려집니다. 그래서 신부 모임이 있으면 사제관에서 고기를 구워 먹거나 몇 가지 요리를 직접 해서 함께 먹곤 합니다.

얼마 전에도 신부 몇 명이 갑곶성지를 찾아왔고, 이 신부들을 위해 양고기 요리를 했습니다. 신부들의 만족도는 아주 높았고, 너무 맛있다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맛있는 양고기를 어디에서 샀어?”

좋은 양고기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사실 굽기 전에 미리 해놓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핏물을 제거하고 고기 손질도 해야 합니다. 그리고 올리브기름과 소금 그리고 마늘 다진 것을 올려놓아 밑간한 뒤에 랩에 싸서 냉장고에 5시간 정도 숙성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 뒤에 만족도 높은 양고기 요리를 먹을 수 있게 됩니다.

신부들은 이런 전 단계가 있는지를 전혀 모릅니다. 단순히 고기 상태만으로 이런 양고기 요리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전 단계 없이는 만족도를 높일 수도 없고 맛을 제대로 낼 수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면서 결과만을 말하는 우리의 모습을 삶 안에서 종종 발견합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인해 지금을 잘 사는 것이 아닐까요?

헤로데 영주가 몹시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죽은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소문이 들렸기 때문입니다. 그는 헤로디아의 춤 값으로 아무런 죄가 없는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내어 준 커다란 죄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가 이렇게 했던 이유는 눈에 보이는 체면 때문이었습니다. 체면 때문에 자신이 원하지 않는 행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헤로디아가 춤추는 것을 보고서 사람들 앞에서 어떤 소원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자 헤로디아는 요한의 머리를 요구했고, 자신의 체면 때문에 그 소원을 들어주었던 것이지요. 눈에 보이는 많은 사람 앞에서 했던 약속을 스스로 철회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유한한 사람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커다란 잘못을 저질러서는 안 됩니다. 체면은 그 순간에 손상된 것처럼 느낄 수 있지만, 하느님과의 관계가 손상된다면 다시 이를 회복하기란 너무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것을 바라보며 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당황하며 두려워하는 헤로데 영주의 삶이 아닌, 참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모두를 믿지 말고 가치 있는 이를 믿어라. 모두를 신뢰하는 것은 어리석고, 가치 있는 이를 신뢰하는 것은 분별력의 표시이다(데모크리토스).

물고기도 우울증에 걸릴까?

책을 읽다가 ‘물고기도 우울증에 걸릴까?’라는 내용의 글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인간의 말을 하지 못하기에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호르몬 검사, 과학적 연구와 행동 관찰로 물고기 우울증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우울증과는 다르지만, 우울증 걸린 사람처럼 활기가 떨어지고 수조 상부에서 지내던 어종이 수조 바닥 쪽에서만 돌아다니는 등의 소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 학자들은 물고기도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짐작한답니다.

자극이 없을 때 이런 증상을 보였습니다. 사람 역시 그렇지 않습니까? 자극이 있을 때 우리는 활기차게 생활하게 됩니다. 이 자극은 나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것도 있지만, 정반대로 부정적 감정으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자극 역시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 문제 없는 삶을 원하십니까? 이런 삶은 주님께서도 원하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자극이 없으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통과 시련도 나를 위해, 즉 나의 성장과 건강을 위해 필요합니다. 어떤 순간에서도 좌절하고 포기하지 않는 새로운 시작이 필요합니다. 

 세례자 요한은 죽이면서 예수님은 만나려는 사람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복음을 전할 때 임금을 회개시키면 그 나라 전체가 회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만나보려는 헤로데는 무시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가 먼저 세례자 요한을 죽임으로서 당신의 초대를 무시했기 때문입니다.

     

    현대의 세례자 요한은 누구일까요? 세례자 요한을 죽이며 그리스도를 만나려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바로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를 만나겠다는 이들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세례자 요한입니다.

    예를 들면 나주 율리아는 교회는 거부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만나주신다고 말합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요한을 죽이는 이들을 절대 만나주지 않으십니다. 

 

    혹은 냉담자들입니다. 그들은 교회를 떠났습니다. 그러면서 힘들 때면 왜 자신들도 신앙인인데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시지 않느냐고 불만을 표출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에 머물지 않으면서 당신이 주시는 은총을 기대하는 이들을 만족시키지 않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가 아무것도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들을 둔 40대 남편이 희귀암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은 암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저기 전이된 암은 그 뿌리가 깊어서 면역항암제를 투여해도 줄어들지 않았고 방사선 치료로도 더 커지기만 했습니다.

    아내는 1년 동안 미국에서 연수하던 김범석 교수가 9월에 돌아온다는 말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꿈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 의사가 큰 등산 가방을 메고 뛰어오면서 “방법이 있어요! 방법이!”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넷에서 사진으로만 본 얼굴이었는데도 꿈에서는 너무 생생했습니다. 

 

    그러나 1년의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의사는 환자의 상태를 보고 더는 희망이 없음을 알아차렸습니다. 미국에서 보고받던 것보다 훨씬 안 좋은 상태였습니다. 항암제도 말을 듣지 않고 방사선 치료도 무용지물인 상태에서 더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만 오래전부터 눈 빠지게 기다렸다는 가족의 기대를 갑자기 무너뜨리기 뭐해 항암제는 계속 투여해 보겠다고 말하며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고, 외부로 드러난 암 덩어리의 크기를 매일 스마트폰으로 찍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커지는 것을 보며 그들도 마음을 접을 것이라 여겼던 것입니다. 의사는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나름대로는 모진 말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부산으로 내려갔다가 3주 만에 다시 서울로 올라온 환자를 보고 의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에 의사로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해버렸습니다.

    “참 기적 같은 일이네요!”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암이 반으로 줄어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뒤로도 암은 계속 줄어들었습니다.

 

    환자의 아내는 의사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기다렸던 선생님께서 군더더기 없이 말씀해주신 첫 회진 덕분에 이렇게 감사의 편지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그날 ‘모진 말’을 하셨다고 했는데 아니었어요. 온 가족이 엉뚱한 기도로 새는 힘을 모아 더 격려하고 기도하며 단단해졌어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셨던 의도를 그때도 지금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제 꿈에 나타나서 외치신 그 ‘방법’이 정말이었다는 게 저희 가족의 생각입니다.” 

 

    특별한 처방도 한 것이 없고 이전에 해오던 치료와 다를 바가 없는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가족의 믿음이 큰 역할을 했을 것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또한 의사도 그 가족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형식적으로나마 치료를 포기할 수 없었던 것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구구절절 쓴 편지 곳곳에서 남편과 가족에 대한 사랑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새삼 이들을 죽음의 나락에서 건져낸 것은 의사의 처방도 아니고 면역항암제도 아니라 그 사랑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암 투병은 환자도 가족도 모두 지치는 일입니다. 매우 어렵고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이 이어져가다 보면 그나마 남아있던 사랑도 남루해지기 쉽고 희망도 쉽게 잃습니다. 어쩔 수 없이 긴 투병의 모든 끝이 상처만 가득한 폐허로 남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그러니 희망 없는 속에서도 그 사랑을 잃지 않았다는 것은 암 덩어리가 줄어든 것만큼이나 기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왜 그 가족의 믿음을 직접 들어주시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운 의사를 기다리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별다른 처방도 아닌 그동안 맞아왔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던 면역항암제 처방을 내리는 의사에게 순종하게 하셨을까요?

    그것은 그들의 믿음이 그 의사를 통해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나의 믿음은 구체적이지 못합니다. 만약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하느님께 대한 나의 사랑이 옳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는 누군가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보이지 않는 분을 믿는 것은 거짓입니다. 따라서 더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는 그리스도의 파견자인 세례자 요한을 죽인 헤로데가 당신을 보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를 믿을 수 없으셨던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눈에 보이는 교회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그리스도께 순종할 수 있을까요? 눈에 보이는 교회는 곧 세례자 요한과 같습니다. 교회를 무시하며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현 시대에 헤로데와 같이 헛되게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김용태 마태오 신부는 성 김대건 신부님의 4대손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순교자 집안의 후손답게 살 수 없는 처지였고, 당연히 형님들 모두 사제가 되다 보니 자신도 신학교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제품을 받기 직전에 자신은 김대건 신부님처럼 순교할 자신이 없어서 사제직을 포기할까 생각도 합니다. 하지만 성체조배를 하며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는 사제품을 받아들입니다. 빛과 성령으로 둘러싸이는 그 체험은 마치 기적과도 같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었습니다. 

 

    보이지 않는 분에 대한 믿음은 항상 보이는 파견된 자에 대한 믿음으로만 증명됩니다. 그 파견된 교회 안에 머무르다 보면 반드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파견된 것에 대한 믿음은 파견하신 분에 대한 믿음의 시작입니다. 보이는 것을 무시하면 보이지 않는 것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가슴이 뭉클해지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어린 날 문구점에서 완구를 훔쳐서 집에서 장난감으로 조립하고 있었다고 합니다그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양복을 곱게 차려입고 어린 아들을 경찰서로 데리고 갔습니다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아이는 가족과는 살 수 없는 죄인입니다그러니 감옥으로 보내 주십시오.’ 어머니는 문구점 주인에게 가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고 합니다아이는 그 뒤로 정직하게 살기로 했고지금은 한의사가 되어서 아픈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합니다한의사로 수련하는 과정에 아버지가 쓰러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가서 침을 놓아 드렸다고 합니다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아버지는 정신을 차렸고다행히 건강을 회복했다고 합니다아이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그것이 아이를 위해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버님을 생각합니다아버지는 말씀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주었습니다자식이 술 때문에 어려움을 겪자 그 순간부터 아버지는 술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문제가 되는 원인 자체를 없애시는 본을 보여주었습니다늘 책을 가까이 하였고서예를 하였습니다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족자에 시편의 말씀을 써서 선물로 주셨습니다지금 생각하니 좋은 가르침이었습니다사제는 책을 통해서 마음의 양식을 얻으라는 뜻이었습니다사제는 기도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나라는 뜻이었습니다사제는 성서의 말씀으로 살라는 뜻이었습니다어머니를 생각합니다어머니는 언제나 자상하였습니다대녀들을 잘 챙기셨습니다집안 어르신들의 기일생일을 꼭 챙기셨습니다사제는 온유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사제는 신자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라는 뜻이었습니다사제는 성사를 거룩하게 집전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말보다는 행동으로 길을 보여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이제는 천상에서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언젠가 읽은 글이 생각납니다. ‘행복이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행복이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기 때문에 참된 행복을 느낄 수 없는 것 같습니다더 많이 소유하려 합니다더 많은 권력을 갖고 싶어 합니다더 좋은 집에서 살고 싶어 합니다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살고 싶어 합니다더 많이 소유하려하는 것더 많은 권력을 가지려 하는 것더 건강하게 그리고 더 오래 사는 것들은 정말 헛된 일입니다하지만 세상에는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분들은 매 순간 삶의 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습니다거리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는 사람의 손은 정말 아름답습니다아마도 그분들은 이 세상을 좀 더 깨끗하게 하였다는 행복을 맛보았을 것입니다형편이 어려운 조카의 등록금을 내준 삼촌이 있습니다본인도 그리 넉넉한 것은 아니지만 감사하는 마음으로 더 열심히 공부할 조카를 보며 삼촌은 이 세상이 좀 더 환해진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오늘은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저는 성지순례를 통해서 신부님이 사목하던 성당을 다녀왔습니다신부님의 삶을 기록한 영상을 보았습니다신부님은 1918년부터 세상을 떠난 1968년까지 50년 동안 예수님의 오상을 몸에 지닌 채 고통 받았습니다양손과 양발옆구리에 상흔이 생기고 피가 흘렀습니다신부님께서는 말보다는 삶으로 예수님 십자가의 상처를 보여주었습니다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결국 꽃이 시들어야 결실을 맺는 것처럼우리들의 삶도 땀을 흘리고자신을 희생해서 누군가를 위한 다리가 되어 줄 때진정한 결실을 맺는 것이라 생각합니다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허무 한 것이 아니라인생은 하느님을 만나는 축복의 시간입니다하고 싶은 일만을 좋아했던 헤로데는 결코 느낄 수 없었던 행복입니다해야 할 일은 좋아하다면 우리 모두는 행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입니다!

 -양승국신부-

 

세상 사람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 강한 자기 통제력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과도한 열정이 억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정 역시 성덕의 중요한 요소 중에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열정은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전환된 것이어야 합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성덕으로 나아가기 위한 에너지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영적 열정 안에는 악습과 편견을 물리치기 위한 강력한 힘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열정은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불순물들을 태워버리는 불꽃이기도 합니다. 성인들은 자신 안에 내재되어 있는 열정,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욕구들과 에너지들을 더 가치 있는 곳에 사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면에서 우리가 눈여겨볼 아주 특별한 성인이 한분 계십니다. 피에트릴치나(Pietrelcina: Pietra-돌-이란 단어의 애칭, '작은 돌'이란 의미)의 비오 신부님입니다. 사람들은 이분을 오상(五傷)의 비오 신부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말마디 그대로 쓸모없는 돌밭 투성이뿐인 가난하고 척박한 농촌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1903년 카푸친 회에 입회하여 1910년 사제로 서품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추종하고자 노력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깜짝 놀랄 일이 그에게 발생했습니다. 

 

1918년에 그는 예수님처럼 오상을 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상흔은 5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오상으로 인해 그의 일생은 그야말로 가시밭길이었으며, 십자가의 길이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자 교회당국에서는 그의 삶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1923년부터 그는 공적 성무 활동이 정지되어 작은 수도원 경당에서 홀로 미사를 집전하게 되었습니다.

  

비오 신부님께서 오상을 받으신 후 매일 흘렸던 혈액의 양은 대략 찻잔으로 하나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은 질문했습니다. “신부님, 얼마나 아프세요?” “보십시오. 굵고 네모 난 못을 손에 대고 망치로 힘껏 때려 박은 다음에 그 못을 뺑 돌려보십시오. 꼭 그만큼 아파요.”

  

그는 오상을 자신의 몸에 간직한 그 50년 동안 골고타 언덕 위에서 예수님께서 겪으셨던 고통을 똑같이 느꼈습니다. 오상으로 인한 영광과 기쁨도 컸겠지만 오상으로 인해 그분이 매일 받았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은 오상을 통해 매일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생생하게 묵상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을 성화의 길로 이끌고자 했던 그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비오 신부님은 종종 사람들에게 큰 영적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는 고해자 각자를 다르게 다루었습니다.

  

때로 고백성사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들, 그저 호기심에 한번 찾아온 사람들, 중요한 죄를 고의적으로 빠트리는 사람들에게는 아주 거칠고 엄한 어조로 꾸짖으셨습니다. 때로 고백소에서 내쫒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찾아오는 사람에게는 다정하게 팔을 펼쳐 사랑스런 아들을 맞이하듯이 인사했습니다. 고해가 끝난 후에도 이런 말로 작별인사를 건넸습니다. “잘 가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그대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용서를 통해 자유를 회복하라

 -반영억신부-

 

가끔 꿈 얘기를 듣습니다. 좋은 꿈을 꾸어서 복권을 샀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반면 무서운 악몽에 시달려 밤잠을 설치고 그 꿈 때문에 마음이 흔들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꿈은 꿈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꿈이고 아무리 험해도 꿈입니다. 그러므로 꿈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좋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또 예언의 성격을 지녔다면 철저히 준비하면 됩니다. 꿈에 끌려다녀서는 절대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꿈대로 안 좋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좋지 않은 꿈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꿈을 다스리지 못하고 그 꿈에 매여 집착하기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꿈을 꿈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물론 때로는 죄를 짓고 그 죄책감 때문에 꿈을 꾸는 사람도 있습니다. 좋지 않은 일을 행하여서 악몽에 시달립니다. 그리고 안 좋은 일이 생기면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보다 본인 스스로 불안한 마음과 죄책감으로 몸을 괴롭히기 때문에 상황이 나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그 원인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저지른 과오나 잘못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해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우리 주님,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23,34). 하고 용서를 넘어 아버지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의 허물에 대해서도 언제나 용서해 주시고 얽매인 것을 풀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을 통해 용서의 은총을 입어야 합니다. 자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죄의 종으로 익숙해져서 그냥 그대로 편안함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 대한 여러 소문을 듣고 몹시 당황하였습니다.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하였기 때문입니다. 헤로데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하면서 예수님을 만나보려고 하였습니다. 헤로데가 불안해하고 당황한 것은 당연합니다. 사람을 죽였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소유한 왕이라 할지라도 죄책감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죄값을 스스로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가 무서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저지른 죄 때문에 예수님이 무서워진 것입니다. 사랑을 전하러 오신 분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를 심판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잘못한 것이 부끄러워서 그렇습니다." 내면에 굳은 심지가 있는 사람은 결코, 당황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뻐합니다.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1요한 1,9).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은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에제33,11). 혹시라도 마음의 불안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굳게 믿고 주님의 품 안에서 자유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혹 두렵습니까? 거짓을 벗어 버리고 진리를 추구하십시오! 용서하시는 주님과의 깊은 만남을 통해 자유를 얻기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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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형씨는 권위와 권력을 설명합니다.

권위는 1)인간적인 매력과 인격에 매어지는 것

2)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따라옴

3)자리에 관계없이 평가가 높아감

4)죽은 뒤에도 없어지지 않음

5)지도자 선택의 첫째가는 기준이 됨

권력은 1)직제상 지위(자리)에 주어지는 것

2)사람들을 덮어놓고 복종시킴

3)자리가 높아질수록 더 강해짐

4)권위가 없는 사람일수록 더 휘두름

5)그 자리를 떠나는 동시에 없어져버림

 

권위와 권력은 분명히 다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 만나는 헤로데는 권력을 잡았지만 권위는 없었습니다. 헤로데는 권력을 가지고도 불안해하였습니다. 권력을 이용하여 많은 사람에게 폭력을 사용했고 특히 당시 유다인들이 최고의 예언자로 알고 따르던 세례자 요한을 죽였는데 그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는 소리도 들렸고 여러 소문이 있었기에 불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어도 ‘도둑이 제 발이 저린다.’고, “때린 놈은 발을 오그리고 자도 맞은 놈은 발을 펴고 잔다’고 합니다. 자기가 한 짓을 알기에 늘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적인 권력이 아니라 권위를 지니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혹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권력의 마음입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식의 마음으로 이웃에게 재물이나 지위를 가지고 대접 받고자한다면 그에게서 권위는 찾을 수 없을 것입니다. 권위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고, 우리는 그 권위에 복종해야 합니다(로마13,1-2). 주님께서 생명을 주관하는 권위(루가12,5)를 가지셨고, 말씀대로 이루시는 힘을 지니셨습니다(요한5,39). 또한 가르침대로 행하심으로써 권위를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삶의 자리에서 각자의 권위를 키워야 하겠습니다(2고린10,8). 아버지는 아버지로서, 어머니는 어머니로서, 자녀는 자녀로서, 아내는 아내로 남편은 남편으로서의 위치기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 걸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권위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직장이든 가정에서든 각기 권위가 살아나기를 기원합니다.

 < 헤 로 데 >

 -송영진신부-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더러는 ‘요한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났다.’ 하고, 더러는 ‘엘리야가

나타났다.’ 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났다.’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헤로데는 이렇게 말하였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하였다(루카 9,7-9).”

 

이 이야기는 23장에 있는 다음 이야기와 함께 읽어야 합니다.

“...... 빌라도는 이 사람이 갈릴래아 사람이냐고 묻더니,

예수님께서 헤로데의 관할에 속한 것을 알고 그분을 헤로데에게 보냈다.

그 무렵 헤로데도 예루살렘에 있었다.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오래전부터 그분을 보고 싶어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헤로데가 이것저것 물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곁에 서서 예수님을 신랄하게 고소하였다.

헤로데도 자기 군사들과 함께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한 다음,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돌려보냈다. 전에는 서로 원수로 지내던

헤로데와 빌라도가 바로 그날에 서로 친구가 되었다(루카 23,6-12).”

앞의 9장 7절에 있는, “헤로데 영주는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 라는 말만 보면,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일 때문에

헤로데가 죄의식과 양심의 가책에서 비롯된 두려움에 사로잡힌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23장 8절에 있는,

“헤로데는 예수님을 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라는 말을 보면,

그에게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느낀 두려움은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이 아니라

‘미신적인 불안감’ 같은 것, 즉 세례자 요한의 귀신이 나타나서

해코지하지나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불안감이었을 것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한 것은 ‘불순한 호기심’ 때문입니다.

23장 8절에 있는, “그분께서 일으키시는 어떤 표징이라도 보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라는 말은,

헤로데는 그저 어떤 신기한 기적 같은 것을 보고 싶어 했을 뿐이고,

종교적인 이유로 예수님을 보고 싶어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앞의 9장 9절에 있는, “요한은 내가 목을 베었는데,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라는 헤로데의 말은,

자기가 세례자 요한을 죽였음을 확인하는 말이기도 하고,

죽은 사람의 ‘부활’을 믿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을 보면 루카복음과는 달리

세례자 요한이 되살아났다고 헤로데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14,2; 마르 6,16).

그러나 세 복음서를 전부 합해서 생각하면, 요한이 되살아났다는

헤로데의 말은 ‘세례자 요한이 부활했다.’는 뜻으로 한 말이 아니라,

‘죽은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했을 것이다.’ 라는

뜻으로 한 말로 해석됩니다.

(부활과 환생은 완전히 다른 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환생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이 예수라는 사람으로 환생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헤로데가 생각했더라도,

그는 그런 생각 때문에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는 않았던 것 같고,

‘미신적인 불안감’을 느끼는 것으로 그친 것 같습니다.>

 

헤로데는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군중의 여론만 두려워했던 사람입니다(마태 14,5).

(아마도 그는 하느님에 대한 신앙도 없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와 헤로디아의 결혼 문제를 비판한 것 때문에,

헤로데가 요한을 죽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백성에 대한

요한의 영향력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해서 죽였을 것입니다.

뒤의 13장을 보면, 헤로데는 예수님도 죽이려고 했습니다.

“바로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루카 13,31-33)”

번역문만 보면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위해서’

헤로데의 계획을 미리 알려 준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실제로는 헤로데가 바리사이들을 보내서, “어서 이곳을 떠나라.

떠나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 라고 협박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헤로데가 그 바리사이들을 보냈음을 나타냅니다.)

 

헤로데가 예수님도 죽이려고 한 것은,

예수님이 왕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가 나중에 실제로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예수님이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을 업신여기고 조롱했습니다(루카 23,11).

도대체 권력이란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려고 그토록 애를 쓰고, 차지하면 잃을까봐

두려워서 전전긍긍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비참하게 밀려나고......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버린 다른 권력가의 말로를 보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채로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나는 그 길을 똑같이 걸어가고......

(신약성경에 세 명의 헤로데가 등장하는데, 세 명 다 비참하게 끝났습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욕심을 부려도 얻지 못합니다. 살인까지 하며 시기를 해 보지만

얻어 내지 못합니다. 그래서 또 다투고 싸웁니다. 여러분이 가지지 못하는 것은

여러분이 청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청하여도 얻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욕정을 채우는 데에 쓰려고 청하기 때문입니다. 절개 없는 자들이여,

세상과 우애를 쌓는 것이 하느님과 적의를 쌓는 것임을 모릅니까?

누구든지 세상의 친구가 되려는 자는 하느님의 적이 되는 것입니다(야고 4,1-4).”

인류 역사에서, 하느님을 등지고 살면서 세속의 권력과 재물만 욕심내다가

허무하고 비참하게 끝난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복음: 루카 9,7-9: 헤로데가 예수님에 대해 묻다.

 -조욱현신부-

 

어제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하여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이 지켜야 할 규칙을 간단히 말씀해 주셨다. “길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마태 9,3-5) 하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제자들은 스승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께서 지시하신 대로한 선교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헤로데 왕의 동요가 그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요한 세례자가 다시 살아났다고 하기도 했으며, 또는 예언자 엘리야가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닌가? 혹은 신명 18,15에서 말하듯이 다른 위대한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았는가 하는 여러 가지 소문이 나돌자 헤로데 왕은 가뜩이나 세례자 요한을 죽인 것에 대해 가책을 느끼고 있었기에 “소문에 들리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9절) 물었다. 그래서 예수님을 한번 만나고 싶어 했다. 예수께 대한 소문은 꽤 영향이 컸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현상은 헤로데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도 이러한 모습은 계속 이어져 왔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가르침을 계속 가르쳐 왔으나, 자기가 원하는 예수님을 만들어 놓고, 하느님을 만들어 놓고 믿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올바로 주님을 따르지도 못하고 그분의 뜻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서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다. 이런 것은 진실이 드러나면 헤로데와 같이 당황하고 동요하며, 없어지고 말 것이다.

 

이 일을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에 연결 지어 볼 때 그렇다면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데 어떠한 자세로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먼저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사심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이때 많은 사람이 우리의 삶을 보고 진리를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것이며, 하느님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 참된 삶을 통하여 복음의 향기가 이웃으로 퍼져 나가도록 열심히 노력하자. 여기에 우리의 참 행복이 있을 것이다. 복음을 통하여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하여야 한다. 내가 신앙을 가지고 행복하지 못하다면 어떻게 그 신앙을 가지라고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있을까? 진정으로 내가 먼저 행복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는 기쁘고도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본질을 잡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헤로데 영주는 예수님께서 하신 모든 일을 전해 듣고 몹시 당황하였다."(루카 9,7)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헤로데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그가 몹시 당황합니다. 자기가 목을 벤 세례자 요한이 다시 살아난 건 아닌지 걱정하는 것으로 보아 두려움이 영 없지 않은 것 같기도 하지요. 예수님의 인격과 가르침, 구마와 치유에 대한 백성의 놀라움, 기대, 희망이 헤로데에게는 썩 달갑지 않아 보입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을 만나보려 하였다."(루카 9,9)
헤로데의 물음은, 하지만 진정한 앎을 향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알고 싶고 또 만나고 싶다는 건, 그로 인해 자신이 변화되기를 허락하는 모험을 감수하겠다는 용기에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헤로데에게서는 그런 지향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두려움이 더해진 얕은 호기심일 뿐이지요.

제1독서는 주님께서 하까이 예언자를 통해 성전 건립을 재촉하시는 대목입니다.

"너희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아라."(하까 1,5.7)
이 말씀이 두 차례나 반복된 이유는, 성전 건립이라는 절대 과제 앞에서 백성들에게 먼저 지난 삶을 성찰해 보라는 강조하시기 위함입니다. 유배에서 돌아온 뒤 나름 사명감과 열정을 가지고 시작한 성전 건립이었지만, 그리 넉넉지 않은 귀향민들의 재정 형편과 사마리아 주민들의 방해로 중단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성전 건립의 재개를 차일피일 미루면서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과 같은, 먹고살기 위한 일상에 매몰되어 버렸지요. 주님은 살아온 길을 돌이켜 보라고 하시면서, "씨앗을 많이 뿌려도 얼마 거두지 못하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으며, 마셔도 만족하지 못하고, 입어도 따뜻하지 않으며, 품팔이꾼이 품삯을 받아도 구멍 난 주머니에 넣는 꼴"(하까 1,6)이지 않았느냐고 아주 구체적이고 적나라하게 일깨워 주십니다.

"너희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그러면 나는 그 집을 기꺼이 여기고 그것으로 영광을 받으리라."(하까 1,8)
주님께서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말고 성전을 지으라고 촉구하십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성전을 짓는 일은 자기들의 정체성을 다시 세우고 그분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이 본질을 외면한 채로는, 아무리 세상사에 혈안이 되어 애를 쓴들 손에 바람을 잡듯 헛수고일 뿐이지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가져다가 집을 지어라."
이 말씀을 재차 음미해 보면, "산"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를, "나무"는 생명의 나무인 십자가를 떠올리게 해 줍니다. "집"은 문자적 해석으로는 당시 건립이 시급한 실제의 성전이지만, 그 이면에는 성령의 성전인 우리 존재를 담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좋고 인간 관계도 중요하고 신분과 스팩, 커리어도 필요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게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존재의 주인이신 분, 그 정수로 들어가는 과정 곳곳에 쌓여 있는 여러 층의 껍질들 정도일 듯합니다. 우리의 과제는 그 껍질들이 주는 풍요와 안위에 취해 거기서 멈추기보다, 그것들을 뚫고 본질로 들어가 거기 계신 주님을 알고 만나고 사랑하고 하나 되는 것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심리적 두려움이나 기복적 청탁, 얕은 호기심이나 체면치레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세례를 받고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의 갈망 없이 신앙과 데면데면 거리두기를 하고 있다면, 행여 신앙에 물들어 세속적 성공 대열에서 이탈하게 될까 봐 선을 긋고 있다면, 자칫 신앙 때문에 자신이 변화될까 봐 경계하고 있다면 아직 헤로데 차원의 헛된 물음만 남발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아직 영혼의 성전 건립은 시작조차 못한 거지요.

사랑하는 벗님! 이렇게 날마다 말씀을 중심으로 모이는 우리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진심으로 궁금하고, 그분을 만나 그분 인격에 맞닿고 싶고, 그분과 일치하여 사랑이 되고픈 이들입니다. 이 사랑의 갈망이 나날이 뜨거워지고 열렬하지고 성숙해지길 기원합니다. 생명의 근원이시고 목적이시며 본질이신 분께 매일 조금씩 더,더,더 가까워지고 있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오상의 성인, 피에트렐치나의 성 비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아멘.

 < 주님의 집의 파괴자들 >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는 하까이서입니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 상태인데도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집을 다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에 대해 나무라는 것이

오늘 얘기인데 프란치스칸인 우리는 이 말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특히 지난 9월 1일부터 프란치스코 축일인 10월 4일까지 교황님이 제정하신

"창조의 시기(Season of Creation)"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가 받은 소명은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허물어진 주님의 집이 무엇이냐 그것입니다.

프란치스코도 처음에는 그야말로 허물어진 성당들이었지요.

 

그러나 프란치스코에게 허물어진 주님의 집은 고작 성당건물이 아니라

하느님 백성들의 모임으로서의 교회이고, 더 나아가

가톨릭 신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뿐 아니라 이슬람 신자나 무신론자까지 

하느님의 자녀인 모든 인류를 포함하는 거라고 깨달음이 확장되었지요.

 

그런데 깨달음의 확장과 주님의 집의 확장은 이제 인류를 넘어섭니다.

프란치스코의 형제애는 지구뿐 아니라 우주 끝까지 가고,

인류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갑니다.

 

프란치스코는 "가서,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는 사명을 받을 때

"가서"라는 말은 지나치고 "나의 집을 고쳐라."는 말만 중시했는데

깨달음이 확장되면서, 주님의 집을 고치되 "가서" 고치라는 말씀으로

알아 듣게 되었고, 그래서 형제애는 우주까지 그리고 피조물에게까지

가게 되었으며 주님의 집은 인간을 포함한

모든 피조물이 함께 이루는 것이 되었지요.

 

그래서 교황 프란치스코도 우리가 사는 지구를 <공동의 집>이라고 하고,

이 공동의 집을 우리가 함께 잘 가꾸어야 한다고

회칙 <찬미받으소서>에서 얘기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찬미받으소서>는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의 태양의 찬가 <Laudato Si>에서 가져온 거지요.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 공동의 집을 보살피기는커녕 오히려 마구 파괴하고,

프란치스칸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이에 대해 별 의식이 없이 살아갑니다.

 

이런 우리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하까이서처럼 말씀하십니다.

"'이 백성은 ‘주님의 집을 지을 때가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주님의 집이 무너져 있는데 너희가 지금 판벽으로 된 집에서 살 때냐?"

 

그런데 우리도 그리고 프란치스칸들도 다른 환경 파괴자들처럼

공동의 집을 파괴한다는 말에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발끈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노력하는 분들은 더 그러실 겁니다.

 

이해합니다.

그래서 길게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지구를 살리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그런 적극적인 의식 없으면 파괴하는 것이며,

깨달음과 의식이 프란치스코처럼

모든 피조물에게 가지 않으면 파괴하는 것이고,

소비를 지금보다 현격하게 줄이지 않으면

저를 포함하여 모두 파괴자들이라고 저는 오늘 말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26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