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9. 22. 07:23

2021 9 22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병자를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시었다.

(루가 9,1-6)


He sent them to proclaim the Kingdom of God
and to heal the sick.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열두 제자에게 주시며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파견하십니다. 그리고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하고 당부하십니다.

가까운 곳으로 잠깐 여행을 갈 때도 짐이 많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은 물론이고 휴대폰 충전기, 화장품 등등 …….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가져갔다가 꺼내지도 않고 도로 가져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준비성이 투철한 사람들입니다. 미래를 철저하게 대비하는 유비무환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생각이 다르신 것 같습니다.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정은 우리의 여행과는 분명히 다르고, 세상 것에 애착을 보이면 이룰 수 없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하느님의 은총만을 의지하라고,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것 가운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필요 없는 짐일 뿐입니다. 결코 제자들이 잘나서 예수님께 뽑혔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 주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사명은 오로지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과 힘은 주님을 따라 살아가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웃과 나눔으로써 우리는 하느님께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저는 스포츠 경기를 좋아합니다. 예전에는 몸으로 직접 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체력도 안 되고 또 여건도 되지 않아서 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응원하는 팀이 생겼습니다.


며칠 전에도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고 있었습니다. 여유 있게 이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판에 실수가 계속 터져 나오면서 역전되어 지고 말았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습니다. 그냥 신경질적으로 텔레비전 전원을 껐습니다.

원래 어떤 경기든 승자와 패자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이길 수도 있고 반대로 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졌다고 해서 신경질을 내는 것은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나의 욕심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이기심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요?

자기 뜻대로 되기를 바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면 불평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 뜻을 내려놓으면 삶 자체를 즐길 수가 있습니다. 자기 뜻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을 따르면 세상의 눈으로는 어렵고 힘든 삶처럼 보이지만, 분명히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참으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서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히 그렇게 해줘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오는 주님의 말씀은 조금 고개를 갸웃거리게 합니다. 글쎄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합니다.

조그마한 유혹에도 금방 흔들리는 제자들이 아닙니까? 제자들이 예수님 없이 처음으로 세상에 기쁜 소식을 전하러 나가니까 부족함 없이 챙겨줘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고, 오로지 주님께서 주신 권한만을 간직할 것을 명하십니다.

세상의 관점이 담겨 있는 자기 뜻을 내려놓고 대신 주님의 뜻을 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도 있어야 하고 저것도 있어야 할 것 같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주님께서 주시는 권한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이를 직접 체험하게 됩니다.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든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줄 수 있었습니다. 성공적인 전교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사는 우리는 많은 것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얼마나 많은 청원 기도를 바치고 있습니까? 그런데 정작 가장 필요한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은 청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만 청하면서, 점차 주님을 내 삶에서 제외합니다.

만족의 삶이 아닌, 불평불만의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삶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정으로 행복할 수 있는 만족의 삶은 주님의 뜻을 품을 수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존경이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사람이 유일무이한 개인임을 아는 능력이다(에리히 프롬).

일상 안에서의 감사

저는 오랫동안 비염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한 번은 이 비염으로 인해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마스크까지 써야 하니 미칠 지경이었지요. 그때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만 뻥 뚫리면 정말로 행복할 텐데….’

이렇게 코가 꽉 막힌 날은 1년 중에 며칠 되지 않기에 위와 같은 생각을 자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평소에는 잘 모르다가 코가 막혔을 때 비로소 코의 뚫림이 얼마나 행복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일상 안에 행복한 일이 전혀 없을까요? 아닙니다. 행복해서 감사할 일이 너무 많은데 이를 보지 않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전신 마비로 유일하게 눈꺼풀만 움직일 수 있어서 눈의 깜빡거림으로 ‘잠수종과 나비’라는 책을 쓴 장 도미니코 보비는 말합니다.

“끊임없이 입속에 과다하게 고이다 못해 입 밖으로 흘러내리는 침을 정상적으로 삼킬 수만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된 기분일 것 같다.”

누군가에게는 침을 삼키는 것도 행복의 이유가 됩니다. 평범한 일상의 반복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불행보다는 행복의 이유를 찾아야 합니다. 감사할 일이 너무나 많아집니다.

 자기를 이긴 사람은 사람들에게 호감을 산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제자에게 병을 고치는 권한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소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재물에도 집착하지 말고 애정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집착이 영적 능력을 감소시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줍니다.

  

    따라서 루카 복음의 이 말대로 하면 병을 고치는 능력과 복음을 전하는 능력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능력이 부족한 상태로 말로만 복음을 전해봐야 소용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말보다 사람의 존재를 먼저 믿으려 합니다. 진실한 사람에게서 진실한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중국 역사에서 여자 임금이 딱 한 사람 있었습니다. 바로 당나라의 측천무후입니다. 측천무후는 훌륭한 남자를 늘 곁에 두고 국정에 관한 의견을 듣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주위의 눈총이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좋은 꾀를 생각해 냈습니다. 당대에 덕망 높기로 유명한 두 스님을 궁궐로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한 스님은 당시 국사(國師)로 있던 ‘충국사’였고 또 한 스님은 ‘신수’(神秀) 대사였습니다. 여왕과 함께 있으려면 조금이라도 여색을 탐해서는 아니 되었기에 측천무후는 두 스님 중 여색에 초연한 스님을 고르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님들도 때로는 여자 생각이 나십니까?”

측천무후가 두 스님을 떠보았습니다. 이에 대해 충국사는 “우리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라고 단호해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신수 대사는 “몸뚱이가 있는 한 그런 생각이 없을 수 없겠지만 다만 방심치 않을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측천무후는 두 번째 테스트에 들어갔습니다. 두 스님을 큰 목욕탕으로 안내하여 목욕을 시킨 다음 아름다운 궁녀를 시켜 두 스님의 때를 닦아 드리게 하였습니다. 그래놓고 자신은 목욕탕 꼭대기에 앉아 두 스님을 몰래 관찰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일까요? 절대로 여색에 동하지 않는다던 충국사는 몹시 흥분해 어쩔 줄 몰라 했고 신수 대사는 여여(如如)하여 조금도 달라짐이 없었습니다. 측천무후는 “물에 들어가니 길고 짧음을 알겠더라(入水見長).”라는 시를 짓고 이후 신수 대사를 곁에 두고 늘 국정을 논하였습니다. 

[출처: ‘이 책을 읽으면 유능해지고 부자가 됩니다’, 유튜브 채널, ‘북올림’]

  

    사람이 믿을 수 없다면 말은 아무 소용 없습니다. 그리고 성덕의 길고 짧음은 실제 그런 상황에 다다르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사람은 자신과 싸워본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싸워본 적이 있다면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이길 수 없음을 잘 알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상황이 오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재물을 아예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이유는 재물이 있으면 그것에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집 저집으로 거처를 옮기지 말라는 말도 역시 더 좋은 거처나 사람을 찾기 위해 신경을 분산시키지 말라는 뜻입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세속-육신-마귀’에 사로잡힌 사람은 그 사람 자체가 믿지 못할 사람이 되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사람들이 전하는 복음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먼저 자신을 이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나의 말도 믿게 됩니다.    

 

    영국이 역사상 가장 부강했던 때는 엘리자베스 1세 시기라고 합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여서 눈치 보며 살아야 했던 영국을 무려 40년 동안 세계 최강국으로 만든 여군주가 엘리자베스입니다. 그녀는 특히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함으로써 앞으로 수백 년 동안 전 세계인이 영어를 배워야 하게 만들었습니다. 

 

    군주는 백성의 신임을 얻어야 하거나, 정략결혼 등을 통해 적을 만들지 말아야 했습니다.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이전의 대부분의 왕은 정략결혼을 통해 세상과의 타협을 추구하였습니다. 특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 헨리 8세도 재혼을 하기 위해 로마 가톨릭을 등졌습니다. 심지어 재혼을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의 어머니인 앤 볼린을 참수하였고, 6번의 결혼을 하는 동안 또 다른 아내도 참수했습니다.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였지만 실제로 세 번째 아내에게 아들을 얻었기에 이것도 핑계로만 보일 뿐이었습니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로부터 딸로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한 사람으로부터 배신당하기도 합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그 사람과 나누었던 편지가 있었고 마지막 때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고도 합니다. 그녀는 결혼하는 대신 독신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짐은 국가와 결혼했노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깁니다.

  

    당시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원동력은 백성을 하나로 집결할 힘이었습니다. 수적 우세에도 제대로 싸움 한 번 해보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군인들을 보며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싸움을 승리로 이끈 엘리자베스 여왕의 힘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영국은 그녀를 중심으로 똘똘 뭉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꼭 종교 안에서만 자신을 절제하는 이가 성령의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어디에나 해당하는 예외가 없는 규칙입니다. 육을 살리려면 영은 죽고 영이 살면 육이 죽습니다. 이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진정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끊어야 하는 것을 끊습니다.

 

    영과 육은 반대입니다. 그러니 육을 끊는 작업을 죽을 때까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나를 믿게 될 것이고 나를 믿게 되면 내가 전하는 복음도 믿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 그다음 하는 말들은 허공의 메아리가 될 뿐입니다.

 -조재형신부-


산보 길에 길 잃은 어린 참새를 보았습니다가까이 가니 아직 잘 날지 못합니다날개 짓을 하지만 1미터를 넘지 못합니다가녀린 날개걷기에도 힘이 부치는 작은 발갈 곳을 몰라 하는 눈망울을 보았습니다어린 참새가 엄마를 찾고친구를 만나서 재잘거리면 좋겠습니다알을 깨고 이 세상으로 나왔으니참새로서 기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2005년 캐나다 연수를 시작할 때입니다추운 겨울 온타리오 호수 주변의 가로등에 외로이 앉아 있던 갈매기를 보았습니다당시에는 외로운 갈매기처럼 저도 외롭고 쓸쓸했습니다겨울이 지나니 봄이 찾아왔고한인성당의 미사를 도와주면서 교우들을 만날 수 있었고여름에 활짝 꽃이 피듯이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지금 생각하면 아련한 추억입니다.

 

지난 8월 23일에는 서품 30주년을 맞이해서 감사한 시간을 가졌습니다. 1년 동안 미사를 도와드리고 있는 부르클린 한인 성당에서 축하해 주었습니다퀸즈 한인 성당에서 동료신부님들과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가톨릭평화신문의 필진엠이 봉사자들부르클린 교우들퀸즈의 교우들이 함께 하셨습니다필라델피아 한인성당에서 서울교구 사제들이 함께 감사미사를 봉헌하였습니다태풍의 영향으로 하루 종일 비가 내렸지만 저를 기억해주고함께 해주신 분들이 있어서 행복한 하루였습니다. 80이 넘으신 신부님께서 덕담을 들려주셨습니다지나온 30년을 감사드리고앞으로 남은 시간도 감사드리면서 지내라고 하셨습니다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우리의 외적 인간은 쇠퇴해 가더라도 우리의 내적 인간은 나날이 새로워집니다. (2코린도 4,16).” 그렇습니다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고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많은 걱정을 하셨습니다. ‘마치 내가 너희를 이리 때 속으로 보내는 것 같구나!’ 제자들이 가는 길이 결코 쉬운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그러면서도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 현실의 삶에서 꼭 필요한 것들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고 하십니다복음을 전하는 것은 사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복음을 전하는 것은 소유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정말 아름다운 모습입니다주님과 함께 지냈고주님의 가르침을 들었던 제자들이 파견되어서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있습니다소유와 욕심을 버릴 때우리는 참된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2달간 뉴욕에 머무시던 신부님은 제게 말은 하지 않으셨지만 행동으로 사제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매일 아침 미사를 혼자 준비하셨습니다미사에 오는 교우들을 위해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80이 넘은 노구에 힘이 들기 마련이지만 신부님을 찾아오는 신자들을 따뜻하게 맞아 주셨습니다허리가 아픈 사람다리가 아픈 사람잠을 잘 못자는 사람말이 어눌한 사람늘 피곤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신부님은 정성껏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고수경침으로 도움을 주셨습니다돌아갈 때는 활짝 웃는 모습을 보았습니다예수님께서 나는 이스라엘의 다른 마을로도 복음을 선포하여야 한다.’라고 하셨던 것처럼 신부님도 뉴욕에서의 시간을 마무리하시고 LA로 가셨습니다그곳에도 신부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처럼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훌쩍 떠나셨습니다내년에도 건강한 모습으로 오시도록 기도합니다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은 무엇인지나의 성인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는지 묵상했으면 좋겠습니다내 뜻이 이루어지기 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먼저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신부-


사람들은 자기의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온갖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는 수고와 땀을 흘리지 않은 채 좋은 열매만을 기다릴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인 줄을 알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할 때가 많아 큰일입니다.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럼에도 자신은 예외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앉아서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아갑니다. 가정을 방문하여 기도해 드리고 사업장을 방문하여 격려해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하면서도 손발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지나는 길에 들러 생색만 내고는 그만입니다. 환자들을 돌보고 봉성체를 해 드리는 것을 일상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그저 미사 봉헌하는 것으로 하루의 의무를 다한 것처럼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 삶이 풍요로워지고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느끼면서도 정작 그런 기회를 자주 마련하지 못하는 게으름을 부끄러워합니다. 복음을 전하는데 코로나19가 핑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하셨습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의 선포는 우리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여기서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사는 곳이 하느님의 나라요,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그리고 오그라든 마음을 주님의 마음으로 회복하도록 하는 것이 고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소명을 잊고 세상 것에 더 집착하고 마음을 빼앗길 때가 많습니다. 천상의 축복보다는 현세적인 축복에 목을 매는 것이 현실입니다. 천상은 나중의 일이니 지금 즐기고 인정받고 싶습니다. 가끔은 이렇게 하늘의 문이 이 지상에서 열린다는 것을 잊고 삽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옷도 지니지 마라”(루카9,3).하시면서 한 눈 팔지 말 것을 신신당부하신 주님의 말씀을 일깨워야 하는 오늘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을 잃으면 아무리 많은 것을 차지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소용없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 하시며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 하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분은 오로지 하느님뿐임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세상 것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을 선택하는 순간들에 기쁨이 넘쳐나길 기도합니다. 우리가 세상 것에 의지하는 동안 하느님의 힘의 가능성을 상실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약속을 믿고 그대로 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힘이 신앙에 있습니다. 믿음에 따르는 실천과 활동을 위해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누구든 만나십시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과 필요한 것을 구분하지 말고,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의탁하는 일을 방해하는 것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말고,

‘빈 마음’과 ‘빈 손’으로 떠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서 ‘빈 마음’이라는 말은,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마음인데, 그냥 비어 있기만 한,

공허한 마음이 아니라 “영적인 에너지로 가득 차 있는 마음”입니다.>

이 말씀을 ‘무소유’를 강조하신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무소유’가 아니라 ‘올바른 소유’입니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상태’이고, ‘올바른 소유’는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신앙인으로서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믿음, 사랑, 희망, 열정 등입니다.

버려야 하는 것은 의심, 걱정, 탐욕 등입니다.

 

1)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습니다(마르 6,7).

(바오로 사도도 항상 다른 사람과 함께 다녔습니다.)

‘복음 선포’는 곧 ‘신앙을 증언하는 일’이고,

증언은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한 일입니다(신명 19,15).

그래서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것으로 해석하는데, ‘두 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돕고 서로 의지하는 ‘형제애’입니다.

‘사랑’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뜻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5).”

사랑 자체가 곧 증언입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혼자서 가야 했다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혼자라는 점 때문에 더욱 힘들었을 것이고, 금방 지쳤을 것입니다.

선교활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동체와 떨어져서 혼자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힘든 일이기도 하고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믿음을 잃거나 흔들릴 위험이 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혼자서는 사랑 실천을 할 수가 없고,

사랑 실천 없이 신앙생활을 하면 금방 힘을 잃어버립니다.)

 

2) 사도들의 ‘빈 마음’과 ‘빈 손’은,

그들의 ‘믿음’을 증명하는 강력한 증거가 됩니다.

그래서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음으로써 너희의 믿음을 증명하여라.” 라는 명령이 됩니다.

반대로, 가지고 있는 것이 많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이것은 누구든지 경험을 통해서 얻게 되는 교훈입니다.

그동안 우리 교회의 역사를 보면, 가진 것이 많았을 때에는,

즉 부유했을 때에는 하느님에게서 멀어졌고, 부패했고,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박해를 받을 때나 가난했을 때에는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습니다.)

‘믿음’은 곧 ‘걱정하지 않음’입니다.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1-33).”

<믿음 없는 사람들은 많이 가지고 있어야 걱정을 안 하게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가지고 있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걱정도 늘어납니다.

신앙인은 믿음을 통해서 걱정에서 해방되는 사람입니다.>

 

3)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일은, 희망을 전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희망은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될 것들,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입니다.

사도들의 ‘빈 마음’과 ‘빈 손’은 그 희망이 막연한 기대감이 아니라

틀림없이 이루어질 확실한 희망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가 됩니다.

영원한 것에 대한 희망으로

허무한 것들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빈 마음’과 ‘빈 손’이 아니라면, 그러면서 “이것들은 꼭 필요한 것들이다.

어쩔 수 없이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변명한다면,

사람들에게 세속과 물질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고

하느님 나라만 추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말을 하려면 자기 자신부터 애착심을 버리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모든 신앙인이 수도자가 될 수는 없고,

그래서 완벽하게 ‘빈 마음’과 ‘빈 손’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모든 것으로부터 떠날 준비는 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1티모 6,7).”

사실 하느님께서 부르시면 모든 것을 놓아두고 떠나야 한다는 것을,

즉 인생이란 ‘공수래공수거’ 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알면서도 실제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4) 선교활동도 그렇고, 신앙생활도 그렇고, 꼭 필요한 것은 ‘열정’입니다.

‘열정’은 한 가지만 생각하는 것이고,

그 한 가지를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열정’에 초점을 맞춰서,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라는 말씀을

“너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해도 본래의 뜻과 다르지 않은데,

그래도 “복음 선포에 필요한 것은 모두 챙겨 가라.” 라는 뜻이 들어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빈 마음’과 ‘빈 손’으로 가지만,

그러나 복음 선포와 신앙을 증언하기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모든 것을 가져가서 다 쏟아 부으라는 것.

 복음: 루카 9,1-6: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의 자세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당신의 예언적 가르침과 치유 기적의 능력을 주신다. 즉 악한 영들과 질병들을 제압하는 권한을 주셔서 영광스럽게 하셨다. 이러한 권한은 그들에게 필요했다. 이러한 권능으로 사도들은 사람들을 신앙과 의화로 초대하여 구원과 생명으로 가는 길을 일러줄 수 있었다. 또한, 그 능력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씀을 믿을 수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무것도 지니고 가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이 먹을 양식마저도 걱정하지 않고 세상의 온갖 염려와 세상일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롭기를 바라신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일 외에 다른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영광은 아무것도 지니지 않는 데 있다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복음을 전하는데 방해되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는 말씀이다.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양식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말라고 하심으로써, 제자들이 쓸데없는 염려로 마음이 산만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신다. “네 근심을 주님께 맡겨라. 그분께서 너를 붙들어 주시리라.”(시편 55, 23)라는 말씀대로 먹을 것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마태 6,24)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 6,21) 하셨다.

 

주님께서는 사도들을 돈도, 금이나 은도, 신발도 없이 보내신다. 선을 행하는 사람들이 칭송을 듣는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들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뛰어다니며 가져다주는 은총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산 위에 서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의 저 발! 평화를 선포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며 구원을 선포하는구나.”(이사 52,7) 우리의 발은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어야 한다.

 

또 그렇게 돌아다닐 때 그들은 손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풍습에서 나그네를 마치 ‘하느님의 천사’처럼 대했다. 즉 필요한 것, ‘먹고 자는 것’을 무료로 제공할 줄 알았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행위로 알았고 또한, 이를 통해 축복을 받았다. 이집 저집 옮겨 다니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음식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5절)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곳에서 묻은 먼지는 하느님의 백성을 더럽히지 않고 하느님의 집에 더러운 것이 묻어 들어가지 않도록, ‘새 성전’으로 들어갈 때 그 먼지를 털어 버려야 한다.

 

뛰어나지도 않고 갖춘 것도 별로 없는 이 제자들을 통해 이제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정복하실 수 있다. 나 자신도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만, 주님의 제자로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임을 감사하며 앞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를 되살려 주시는 주님을 만납니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에즈 9,5)
제1독서에 등장하는 에즈라의 기도는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 돌아온 유배자들이 성전을 다시 지어 봉헌하고 파스카 축제를 지낸 뒤의 일입니다. 이후 예루살렘에 도착한 에즈라는 아론 가문 출신으로 모세의 율법에 능통한 학자였는데, 유다인들이 이민족들과 혼인하여 그들의 풍습과 우상을 따라간다는 말에 충격을 받아 망연자실 있다가 주님께 기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에즈 9,8)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에즈 9,9)
에즈라는 나라의 멸망과 유배, 귀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백성의 흥망성쇠의 원인을 자신들의 죄악과 잘못에서 찾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희망이 없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느님이 "되살리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온 세상을 지으시고 사람을 빚어 코에 숨을 불어넣어 주실 때부터, 하느님은 살리는 분이십니다. 죄악으로 넘어지고 죽어가는 인간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분도 주님이시지요. 그리고 언젠가 마지막 날이 오면 당신을 믿는 모든 이들을 영원히 살게 하실 분도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하느님은 살리고, 되살리고, 마침내 영원히 살게 하는 분이시지요.

복음에서는 되살리시는 하느님의 활동이 성자 예수님을 거쳐 제자들에게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루카 9,1-2)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당신의 능력을 나눠 주시고는 세상으로 보내십니다. 구마와 치유, 하느님 나라 선포 등등, 그들에게 원래부터 그런 능력이 있었을 리 만무하지만, 주님께서 권한을 부여하시고 파견하시니 믿고 가야 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 머물러라. ... 떠날 때에 먼지를 털어 버려라."(루카 9,3-5)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지침은 소유와 머무름, 떠남에 대한 것들입니다. 구마나 치유, 선포 등 내용에 대한 것은 애초부터 그들의 것이 아니었으니 필요한 순간에 그분께서 친히 채워 주실 겁니다.

이제 제자들에게 필요한 건 믿음입니다. 교통이나 지역 정비가 잘 되어 있지 않은 시대에 길을 떠나면서 식량과 옷, 생필품과 무기 등을 챙기지 않는 것은 안전은 물론 목숨까지도 내어맡기는 결단입니다. 미지의 고장에서 신세지거나 떠나는 일조차 일면식 없던 사람들의 호의에 맡겨야 하니, 그 호의나 배척 뒤에 자리한 하느님의 섭리를 철저히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6)
제자들은 자기들을 파견하신 예수님을 믿고 되살리는 일에 전념합니다. 그들이 전하는 말씀이 어둠에 갇힌 이들을 희망으로 되살리고, 구마와 치유로써 악령과 질병에서 그들을 되살립니다. 제자들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나라의 현존이 억울하고 지치고 절망스런 영혼들을 되살립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단 한 번의 단발적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눈조차 떼지 않으시고 지켜 주시는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죄와 질병과 두려움으로 스러져갈 때마다 지치지 않고 반복해서 되살려 주십니다.

우리의 어둠이 아무리 짙고 절망이 커도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님께서 반드시 다시 일으키러 오실 것이니, 언제라도 온 힘을 다해 그 손을 붙잡을 수 있도록 깨어 기다려야 합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에게 유일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아멘.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복음 환호송)

 <후회와 참회 사이에서 나는?>

 -김찬선신부-


오늘 독서는 에즈라기이고 복음은 열두 사도를 파견하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에즈라 예언자는 단식을 마치고 나서 제사를 드리러 하느님 앞에

나와 먼저 참회를 하고 이어서 하느님의 구원 업적을 찬미합니다.

 

그런데 독서와 복음을 읽고 난 뒤 어리석게도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에즈라처럼 단식과 참회를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복음의 제자들처럼 복음을 선포하는 삶을 사는 것이 좋을까?

 

우리는 둘 다 살아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하다니 참 어리석지요.

그런데도 제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요즘 제가 종종 과거와 현재를 비교하곤 하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그러니까 10대에서 20대까지는 반성과 참회를 많이 했는데

이때 저는 거의 매일 반성과 참회가 주조인 일기를 썼습니다.

그리고 이때의 반성과 참회는 상당히 자기 비하적이었습니다.

 

이런 제가 30대를 지나 40대와 50대가 되자 반성과 참회는 현저히 줄고,

피정 지도니 강의니 북한 선교와 해외 선교와 같은 복음 선포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으며, 일기는 가끔가다 쓰는 정도였지요.

 

그러다 지금은 그마저도 아예 쓰지 않고 있으며 대신 영적 일기를 쓰는

마음으로 매일 복음 나누기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부족하지요.

 

그런데 세상을 복음화하려면 먼저 자기 복음화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회개와 참회 없이 어떻게 자기 복음화를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도 복음 선포를 시작하시며 하신 말씀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거였잖아요?

 

그러니 가까이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나도 들어가고 너도 들거가기 위해서

우리는 복음을 믿어야 하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와 있다는 것이

복음이 아닌 사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참행복이라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부터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야겠지요.

 

그런데 오늘 저는 에즈라의 참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회개悔改를 위해 꼭 참회懺悔를 해야 하나?

후회後悔 정도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왠지 참회하기 싫었던 것이고 그래서

참회가 아닌 후회 정도만 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한 것인데

참회와 후회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요?

 

제 생각에 참회와 후회, 둘 다 과거 자신의 삶이나 행위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하고 마음 아파하는 것까지는 같지만

그런데 후회는 후회로 끝나고 회개로 이어지지 않는 데 비해

참회는 진정한 뉘우침이고 그래서 반드시 회개로 이어지지요.

 

그리고 둘 사이의 또 다른 차이점은 관계성 여부입니다.

후회는 혼자서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참회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뉘우침이며

그래서 죄 의식을 반드시 동반하고 그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그런데 이 참회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그칠 수가 있고,

하느님과의 관계까지 가서 이루어질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야를 죽인 다윗이 우리야 가족 앞에서 참회할 수 있는데

다윗은 굳이 하느님께 죄를 지었다고 하고 하느님 앞에서 참회를 합니다.

 

아무튼, 후회는 사랑 없이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고,

부정적인 감정일 뿐 진정한 뉘우침이 아니기에 회개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참회는 자신과 이웃과 하느님 사랑을 부수고 깬 것이 너무도

마음 아파 그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래서 회개로 이어집니다.

 

이런 후회와 참회 사이에서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