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Margaret K 2021. 9. 20. 07:02

2021 9 20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이 세대 사람들을 무엇에 비기랴?

그들은 무엇과 같은가? 
32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

(루카 7,31-35)

 

 “To what shall I compare the people of this generation?
What are they like?
They are like children who sit

in the marketplace and call to one another,
‘We played the flute for you, but you did not dance.
We sang a dirge, but you did not wee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2세기 테르툴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라고 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헛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 고백은 교회가 성장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박해가 끝난 뒤 순교자들의 피로 심은 교회의 씨앗에 물을 주고 자라게 한 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는 신자들의 믿음과 일상 속 신앙의 증언입니다. 오늘 제2독서를 통하여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를 주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 기념하는 한국의 첫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동료 순교자들은 살아서는 부끄럽지 않은 삶, 그리고 죽더라도 영원히 사는 삶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교자들의 신앙을 우리도 간직할 수 있도록 하느님께 도움의 은총을 청하여야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오늘날 교회에 가장 큰 신앙의 걸림돌을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으로 보셨습니다. 물질주의와 세속화 현상은 우리에게 좀 더 편하게 신앙생활을 하라고 속삭입니다. ‘지금 같은 시대에 뭘 그렇게 열심히 하니?’ ‘요즘 시대에 이 정도는 괜찮아!’ 또한 교회의 가르침이나 교리가 나의 사고와 맞지 않으면, 합리적, 이성적, 일반적이라는 이유를 들어 ‘나의 하느님’을 만들고 추종하게 합니다. 이러한 삶의 자세로는 순교자들의 신앙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쉽고 편안한 길을 가기보다 옳은 길, 주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을 갈 때, 가장 안전하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상에는 자신의 힘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 순간 희망이 보이지 않으면서 절망과 좌절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라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힘든 순간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살아야 합니다. 실제로 시간이 지난 뒤에는 그 힘든 시간을 버텼음에 뿌듯함을 느끼지 않았습니까?

저 역시 그런 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분명히 지나갔고 지금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힘든 순간을 보내고 이렇게 전혀 다른 삶을 사는 데에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저를 잡아주는 누군가의 손이 있었습니다.

제 편이 되어 주었던 가족이 있었고, 힘차게 응원해 준 친구도 있었으며,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자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힘은 침묵 속에서 제게 필요한 것을 주신 주님이었습니다. 이런 만남 안에서 저는 성장해왔고 새로운 내일을 만들어가며 지금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손길은 종종 실망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는 어떠할까요? 주님의 손길 역시 커다란 실망으로 다가오기는 합니다. 문제는 나의 욕심과 이기심이 담겨 있을 때, 주님의 손길을 실망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실망하지 않으면서 지금을 힘차게 살아갑니다.

우리나라의 성인·성녀들을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그들은 모두 주님의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위협에서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는 말씀에 희망을 간직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의 믿지 않는 사람은 배교하지 않는 순교자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고, 세상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항상 우리의 시선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순교자들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영광의 자리에 올라가실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 절대로 실망하지 않는 순교자들의 믿음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지금은 과거와 같은 박해가 없습니다. 그러나 현재에도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많은 유혹이 많습니다. 그 모든 유혹을 단호하게 끊어버리고 철저히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현대의 새로운 순교자로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혀를 다스리는 건 나지만 내뱉어진 말은 나를 다스린다. 함부로 말하지 말고 한번 말한 것은 책임져야 한다(유재석).

감사의 이유 찾기

어느 군부대에 저녁 식사 때 특식으로 돈가스가 나왔습니다. 병사들은 맛있는 돈가스에 큰 기대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잠시 뒤에 또 좋은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글쎄 돈가스를 하나가 아닌 두 개씩 배식한다는 것입니다. 병사들 모두 신이 났습니다. 그런데 배식하면서 돈가스 소스를 주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부식 담당 병사가 실수로 돈가스 한 상자, 소스 한 상자가 아닌, 돈가스 두 상자를 가지고 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저기서 불평이 쏟아집니다. 소스 없이 어떻게 퍽퍽한 돈가스를 두 개나 먹냐는 것이었지요. 그러자 한 선임이 말합니다.

“너희들 그런 소리 하지 마라. 분명히 어떤 부대는 지금 돈가스 없이 소스만 2인분 먹고 있을 거야.”

조금만 생각하면 감사한 일투성입니다. 그런데 왜 감사하지 못한 이유만을 찾고 있습니까? 작은 것에 감사하지 않는 자는 큰 것에도 감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따라서 일상 안의 작은 감사를 계속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커다란 감사의 일도 받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의 초점: 잠과 죽음의 순간에 느낄 행복

-전삼용신부-

 

오늘은 한국의 순교 성인들을 기리며 본받기 위해 다짐하며 노력하는 날입니다.

한국의 성인들은 모두 순교자들입니다. 순교를 생각할 때 믿지 않는 이들에게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이것입니다.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뭐죠?”

믿음이 없는 이들에게 순교자들의 죽음은 자살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는다면 거기에서 많은 열매가 맺힙니다. 그 죽음이 어떤 열매를 맺느냐에 따라 순교와 자살의 차이가 구별됩니다.

     

    2014년 11월 생활고에 시달리던 일가족 세 명이 자살을 선택한 일이 있었습니다.

10월 30일, 50대 이모 씨와 그의 부인, 그리고 12살 딸이 안방에 나란히 누워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그들 옆에는 타다 남은 연탄재가 있었습니다. 딸 이모 양이 계속 학교에 빠지자 담임 교사가 집으로 찾아왔고 문이 잠긴 걸 이상하게 여겨 경찰에 신고한 것입니다.

     

    경찰은 부인과 딸이 먼저 목숨을 끊고, 귀가해 이를 발견한 남편이 뒤따라 자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씨는 지난 수년 동안 뚜렷한 직업 없이 주택경매에 매달리다 실패를 거듭해 큰 빚을 진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아파트에서 일하던 부인도 두 달 전 직장을 그만둬 마이너스 통장으로 근근이 생활해오던 상황이었습니다. 이웃 주민은 집도 다 빚으로 산 것이라 이자 내기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이들 곁에는 부인과 딸이 남긴 유서만 놓여 있었습니다. 먼저 부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살아서 발견되면, 응급처치는 하지 말고 그냥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딸의 유서는 이렇습니다.

    “그동안 부모님 말씀 안 들어서 미안하다. 우리 가족은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 나는 슬프지 않다. 행복하게 죽는다.”

    이 양은 힘든 가정형편에도 성실히 학교생활을 해와 주변을 더욱 안타깝게 했습니다. 숨진 채 나란히 누운 이들 가족 옆에는 아빠가 딸과 먹으려고 사 온 가리비만 덩그러니 남겨져 있었습니다.    

 

    자살은 살인입니다. 물론 죽어가면서 회개했다면 모를까, 마지막에 살인하고 죽어서 천국 가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 양이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좀 특별합니다. 분명 자살이지만 “행복하게 죽는다.”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가족이 영원히 함께할 거라서.”입니다.

    그녀의 죽음 안에는 행복도 있고 가족의 소중함에 대한 믿음도 있고 영원한 삶에 대한 믿음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자살은 자살이기는 하지만 순교에 가까울 수도 있다는 생각을 조심스럽게 해보게 됩니다. 죽음이 행복이 되려면 믿음이 바탕이 되어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돌아가시면서 마지막으로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순교자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 이후에 올 부활의 영광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후대에 남겨 본받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죽을 때 행복하고 행복한 이유를 전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교입니다. 믿었고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기 때문입니다.    

 

    고 김수환 추기경도 “감사합니다. 서로 사랑하세요.”라고 하시며, 당신 삶에 만족하셨고 그 이유가 이웃사랑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웃사랑은 순교입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죽음 앞에서 감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저는 결국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하며 돌아가셨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 행복하고 자기 삶을 뒤따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순교의 삶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대비해 지금 자살로 가고 있는지, 순교로 가고 있는지 자신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는 그날 ‘잠자리’에서 결정됩니다.

     삶이 순교인 사람은 잠자리가 행복이며, 삶이 자살인 사람은 잠자리가 불편합니다. 한 사람에겐 잠이 상이 되지만, 한 사람에겐 잠이 두려움이 됩니다. 그래서 잠을 잘 이루지 못합니다.

     우리가 잠자리에 누울 때,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세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날은 순교의 삶을 산 것이고 믿음의 씨앗을 뿌린 것입니다. 이것을 양심이 심판해 줍니다.    

 

    어느 주말에 서울대병원 종양내과 의사 김범석 씨에게 응급실에서 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그에게 치료를 받던 말기 암 환자의 경동맥이 터져서 응급실로 실려 온 것입니다. 보통 이런 상태라면 수술이나 지혈술을 해야 합니다. 쇼크 때문에 심장이 멎으면 심폐소생술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의사는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그냥 편히 보내주세요.”

그 환자는 이미 치료를 포기할 정도의 상태였고 더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환자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지금 현재에만 충실해지려 했다는 것입니다. 상당히 큰 회사를 운영하는 대표였고 자신의 상태를 아들에게도 알리지 않았었습니다.

  

    이 일이 있기 한 달 전 환자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아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들은 의사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저희 아버지 상태는 좀 어떠신가요?”

    “네? 아버님은 어떻게 말씀하셨는데요?”

    “그냥…. 치료하면 좋아진다고 알고 있는데요….”

  

    아버지는 항상 “나는 이번에 치료받으면 곧 좋아질 거다.”, “바쁠 텐데 병원에 따라올 필요 없다.”, “아버지는 잘 이겨내고 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 말은 자신의 초점이 죽음이 아닌 지금의 삶에 맞춰져 있음을 말해줍니다.

     

    의사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금 혈관이 터져 돌아가셔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현 상황을 말해주었고, 아들은 어린아이처럼 주저앉아 엉엉 울었습니다. 환자는 결국 회사나 대인 관계, 인생 등 정리해야 할 상황이 많았지만 하나도 하지 않고 갑자기 죽음을 맞이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순교자들은 항상 ‘죽음’의 순간에 두었습니다. 그 순간의 행복을 위해 지금을 희생했습니다. 만약 지금의 행복을 위해 죽음의 순간을 잊는다면 그것이 자살입니다.

     잠이나 죽음이나 상을 받으러 가는 순간의 마음이라면 그런 사람의 하루의 삶이나 인생은 ‘순교’였음에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있다면 오늘 하루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 때문에 잠이나 죽음이나 다 부활의 영광을 받는 마지막 발걸음이 됩니다. 기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의 초점을 ‘잠’과 ‘죽음’에 둡시다. 그 순간을 행복하게 하려는 사람이 됩시다. 이것이 순교자의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조재형신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을 맞이하면서 가톨릭평화신문은 2개의 연재를 기획하였습니다하나는 이길재 기자의 신 김대건최양업 전이고 다른 하나는 정민 교수의 한국 교회사 숨은 이야기입니다. 2개의 기획기사를 읽으면서 초대 한국교회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한국 천주교회는 18세기 말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 학문적 연구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입니다어째서 한국의 천주교회는 자생적으로 시작되었을까요저는 그 이유를 가톨릭성가 287번 성 안드레아 김대건 신부 노래에서 찾아보았습니다성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서라벌 옛 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에 짙어 갈 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 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노래를 작사하신 최민순 신부님은 당시 조선의 실학자들의 생각을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불교를 받아들여서 삼국통일일 이루었던 신라가 있었습니다유교를 받아들여서 새로운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그러나 세상에는 불교와 유교이외에 또 다른 깨달음의 길이 있었습니다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진리하느님께서 사랑하는 아들 예수를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진리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사랑과 친교 그리고 나눔의 관계를 보여주시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는 진리하느님께서는 착한 이에게는 상을 주시고악한 이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진리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고그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면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죽더라도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진리입니다새로운 진리를 받아들인 나라들은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였고강한 군사력을 가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이면 국가는 부강하고백성들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습니다.

 

학자들이 받아들인 진리인 천주교는 이 땅의 중인양인천민들에게도 전해졌습니다그러나 조선의 정부는 천주교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정치적인 이유문화적인 이유사회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정치적인 이유는 당시 천주교를 믿는 양반들을 몰아내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문화적인 이유는 당시 천주교회는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조상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하였습니다이는 유교의 전통에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사회적인 이유는 신분제도가 있는 조선시대에 천주교인들은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면서 신분의 벽을 넘어섰기 때문입니다박해를 받으면서도 기꺼이 순교할 수 있었던 사람들 중에는 천민들도 많았습니다그분들이 박해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 때문입니다복자 황일광 시몬은 당시 천한 신분인 백정이었습니다황일광 시몬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 주니천당은 이 세상에 하나가 있고후세에 하나가 있음이 분명하다.” 1791년 신해박해부터 1866년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희생된 신앙 선조는 1만여 명에 달합니다그중 많은 선조가 황일광 시몬 복자와 같이 신분 세습 없는 평등한 세상을 꿈꿨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8장에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환난입니까역경입니까박해입니까굶주림입니까헐벗음입니까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사실 우리 신앙의 선조들들에게 신앙은 환난역경박해굶주림헐벗음위험을 각오하는 결단이었습니다오늘 우리를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떼어놓는 것들은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나의 욕심이나의 게으름이나의 자존심이나의 이기심이나의 교만이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나 자신을 떼어놓은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천국에서 순교자들이 보시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너무 쉽게 보이곤 합니다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순교자들처럼 목숨을 바쳐야 될 일은 별로 없습니다재산과 가족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일도 별로 없습니다그러나 순교자들이 지켜온 신앙을 보존하고 후손들에게 물려줄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우리의 봉사와 나눔우리의 사랑과 희생으로 순교자들의 신앙을 지켜나가야 하겠습니다. 

 언제나 환한 미소와 극진한 환대와 사심 없는 친절을 통해 매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늦은 밤 귀가 시 마을을 지나칠 때 마다, 언덕 위에 위치한 저희 수도원을 한번 바라보게 됩니다. 건물 외벽 군데군데 설치되어 있는 태양광 조명등이 은은히 빛을 발합니다. 집에 다 왔다는 마음에 편안함과 안도감이 밀려옵니다. 

 

마을에서 수도원을 올려다볼 때 마다 드는 한 가지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 공동체가 산 아래 있는 마을 사람들에게 과연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우리 수도회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의 빛, 위로의 언덕, 구원의 성채가 되어주고 있는가?

  

혹시라도 우리 공동체가 세상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 슬픔과 절망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우리끼리만 알콩달콩, 희희낙락하면서 개념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될 때가 많습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국내 여러 종교들이 전반적으로 심각한 퇴보 현상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도 결코 예외가 아닙니다. 굳이 제시된 지표와 자료를 통해서 확인해보지 않더라도,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심각합니다. 

 

복음화율에 비해 실제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교우들의 숫자는 미미합니다. 미사를 비롯한 각종 성사 참여 빈도는 극히 저조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 젊은 층의 신자들을 찾아보기가 하늘의 별따기입니다. 사제나 수도자들이 노령화, 청소년들과 청년들, 주일학교의 급격한 위축...전반적인 지표들이 급격한 하락세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때 우리 가톨릭교회가 잘 나갈 때가 있었습니다. 돌아보니 그때가 봄날이었습니다. 신자수가 급격히 증가하며, 동시에 사제나 수도자들의 수효도 증가했습니다. 밀려드는 예비자이나 수도회 지망자들을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습니다. 종교 선호도 조사를 하면 언제나 1등이었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 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의 대변인이 되어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불의한 현실 앞에서 침묵하지 않고 정확히 할 말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사회가 중차대한 기로 앞에 섰을 때, 머뭇거리지 않고 복음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제 다시 우리 교회가 잃어버린 매력을 회복할 때입니다. 매력이란 것은 절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끝도 없는 자기 성찰과 각고의 노력 끝에 조금씩 얻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면 아이러니하게도 교회가 가장 부유할 때, 사실은 가장 바닥을 쳤습니다. 반대로 극단적 청빈을 살고자 노력할 때, 거지 중의 상거지 집단이 될 때, 그 바닥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 교회가 제왕처럼 군림한다든지, 까마득히 높은 위치에 좌정한 관리자로 남아있는 시대는 지나갔습니다. 언제나 환한 미소와 극진한 환대와 사심 없는 친절을 통해 매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양떼와 세상을 향한 진심어린 헌신과 봉사로 좋았던 시절의 매력을 되찾아야겠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와 우리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천상 예루살렘의 거룩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강렬한 빛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연중 제25주간 월요일(루카8,16-18)

등경 위에 놓은 등불

 -반영억신부-

 

신앙의 열매는 손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바를 가슴에 담고 가슴에 담은 것을 실행함으로써 비로소 열매가 맺어지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믿음을 고백하지 않고 생활화하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요, 죽은 믿음(야고 2,17)입니다.

 

등불은“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합니다”(루카8,16). 당연합니다. 마찬가지로 빛을 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은 그 빛을 다른 사람에게 비춰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믿는 이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으로 봉사하고 섬겨야 합니다. 촛불이 자신을 녹이지 않으면 빛을 드러낼 수 없는 것처럼 희생이 없는 이웃사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직 믿음이 약하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합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읽고, 미사참례를 하고 영적성장을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서 주님의 은총을 희망하는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사실, 복음의 지식을 생활화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오히려 지식과 믿음이 더욱 성장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실천하지 않고 살지 않으면 이미 받은 믿음의 은총도 시들해집니다. 마음이 완고해지면 빛이 들어갈 틈이 없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8,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수 하지 않으면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제대로 간수 하지 않고 하느님께서 은총을 거두어가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은총이나 선택의 은총은 다시 거두어가지 않습니다”(로마11,29). 다만 내가 잃어버릴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여러분이 받은 은총의 선물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가지고 남을 위해 봉사하시기 바랍니다”(1베드4,10).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당신의 보화를 담아 주셨고”(2고린4,7), 당신의 빛을 나를 통해서 드러내시길 원하십니다. 부디 우리의 관심사와 모든 행동이 주님을 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주님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면 할수록 더 견고한 믿음의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등경 위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등불의 비유>

 -송영진신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6-18).”

 

이 말씀은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라는 명령입니다.

복음은 죄와 죽음의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등불과 같습니다.

신앙인은 이미 그 등불의 인도를 받아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혼자서만 가면 안 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갈 수 있도록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기도 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마태 7,21).

또 바오로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1코린 13,1-3).

(사랑 없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지 않는 신앙인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라는 말씀은,

“등불을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마라.” 라는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감추지 말라는 뜻입니다.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일부러 감추지 않는다고 해도,

적극적으로 나의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내가 신앙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것은 나의 신앙과 복음을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스테파노 순교 후에,

박해를 피해서 각지로 흩어졌던 초대 교회 신자들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당시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서 흩어지긴 했어도

숨어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스테파노 순교와 종교 박해는

오히려 복음이 더 널리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신앙인의 능동적인 응답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만일에 당시의 신자들이 박해가 무서워서 숨어 있기만 했다면,

‘복음의 등불’은 그냥 그대로 꺼져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 라는 말씀도 명령입니다.

이 말씀은,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놓아라. 그래서 집으로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하여라.”인데, “적극적으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여라.

그래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희망하는 이들이 그것을 얻는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어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 선포 활동을 하다 보면 배척당하기도 하고, 박해도 받겠지만,

기뻐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만나게 됩니다.

배척당하는 것이 싫고, 박해받는 것이 무서워서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으면,

복음을 갈망하는 사람들을 어둠 속에 버려두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그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은 알려져 훤히 나타나기 마련이다.” 라는

말씀은, “복음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복음을 감추지 말고 널리 알려라.” 라는 명령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다음 말씀이 나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이 말씀은, 승천하시기 전에 하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라는 명령과 같은 명령입니다.

<이 말씀을 표현되어 있는 그대로 읽으면, “너희가 드러내지 않아도

언젠가는 복음이 온 세상에 드러날 것이고,

너희가 알리지 않아도 언젠가는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훤히 알려지게

될 것이다.”로 해석되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이 완료되는 날이 오면, 복음 선포

활동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날 받을 몫이 없다.” 라는 경고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지 잘 헤아려라.” 라는 말씀은,

당신의 가르침을 명심하여 듣고 잘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을 알고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알고 있는 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라는 말씀은, “말씀에 성실하게 응답하고

잘 실천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탈렌트의 비유’를 보면, 주인의 뜻을 제대로 알고 실천한 종들에게

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23).”

(여기서 ‘많은 일’은 ‘큰 기쁨’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지상에서 주님의 뜻을 성실하게 실행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큰 기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실행했더라면 받을 수 있었을 은총을 못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미 받은 은총마저 모두 잃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빼앗길 것이다.’는 뜻으로는 ‘잃게 될 것이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잃는 일입니다(마태 7,21).

전에 무슨 은총을 얼마나 받았든지 간에 그 은총에 응답하지 않아서,

마지막에 하느님 나라에서 그 은총이 완성되지 않으면,

그것은 받은 것이 하나도 없는 것과 같게 되고,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바로 지금’ 실행해야 합니다.

복음: 루카 8,16-18: 감추어 둔 것은 나타나게 마련이고

 -조욱현신부-

 

“아무도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침상 밑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16절). 이는 어두움을 밝히고 다치거나 헤매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 빛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고, 또 거기에서 제 구실을 하여야 한다. 등불의 존재 이유는 방에 들어오는 사람을 비추어주고 어둠을 밝혀주는데 그 존재 이유가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두움을 밝혀주는 그 빛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다. 이러한 구원의 빛을 받은 우리 신앙인들이 다른 이들의 마음속에 삶의 빛을 비춰주는 등불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이들 앞에 나의 믿음의 등불을 가리거나 덮어두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삶의 길을 비추어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또한 거룩한 교회를 “등경”이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비추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운다고 오리게네스는 주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삶이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것이라 해도, 그것을 받아들일 만한 믿음이 없는 집안에 어느 누가 처음으로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보여주자면 시련과 고통이 으레 따르게 되고 인간적인 정마저 금이 갈 수 있다.

 

이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사고와는 전혀 다른 그 무엇을 수용하기 힘든 우리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자기 자신의 가치관을 전도시켜야 하는, 그리고 새로이 모든 것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마 이러한 방어적인 본능이 인간에게는 일반적인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는 항상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어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진정 우리에게 기쁨과 평화를 느끼게 하고 하느님 안에 살아가는 삶이 진정한 자유와 구원을 체험하게 해주는 삶임을 우리의 삶을 통하여 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올려놓는 삶을 사는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들에게 작은 등불이 되는 것이다.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18절)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는 사람들은 계속 더 큰 하느님의 체험을 하게 될 것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가 실천하지 않으면 그 말씀의 중요성도 모르고 그러한 말씀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말씀을 잃어버려도 잃어버린 줄도 모른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 11,15)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노력하자.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빛이 되는 방법을 안내하십니다.

"등불을 ... 등경 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빛을 보게 한다."(루카 8,16)
등불은 숨기거나 감추지 않습니다. 등불의 역할이 공간에 빛을 비추는 것이니 일단 그 목적으로 불을 붙였다면 감출 이유가 없지요. 게다가 빛은 아무리 꽁꽁 덮어두어도 물리적으로 아주 미세한 틈이라도 있을라치면 여지없이 새어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특별한 목적이 아니고서는 빛을 완벽히 감추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지요.

한 영혼 안에 들어오신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말씀을 듣고 머무르면 내면에 빛이 차오릅니다. 말씀이 세상 고통과 시련으로 어둑해져가는 마음에 빛이 되어주기 때문입니다. 우리와 하나가 되려고 다가오시는 주님께서 바로 말씀이시고 빛이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줄로 여기는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루카 8,18)
이 말씀은 신앙인이면서 실천 없이 사는 이들에게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경고문과 같습니다. 다가오신 말씀을 품고 내면화하여 말씀에 비추어 삶을 살아가는 이에게서는 빛이 새어나오기 마련입니다. 억지로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렇게 됩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이 밖으로 나오기 때문이지요. 들은 말씀을 삶으로 표현하는 이들은 그래서 더 받게 됩니다. 그들이 말씀을 지식이나 지혜로써만 아니라, 빛으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소유하는 까닭입니다.

반면 다가오신 말씀을 듣고도 삶과 연결하지 않으면 결국 말씀을 잃어버립니다. 언젠가 들은 그 말씀과 인격적으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면 본인이 지식창고에 고이 간직한 줄로 착각해도 쉬이 휘발되고 말지요. 내면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귀와 그의 마음에서는 아무리 좋은 말씀도 빛이 되지 못합니다. 말씀과의 관계는 기억력이 아니라 삶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방인 "주님의 종"이 등장합니다.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임금 키루스의 마음을 움직이셨다."(에즈라 1,1)
북 이스라엘 왕국은 아시리아에, 남 유다는 바빌론에 패망하였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폐허가 되고 백성들은 비참하게 유배생활을 하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빌론의 뒤를 이어 통치한 페르시아의 임금 키루스를 통해 당신의 일을 하셨습니다.

"주 하늘의 하느님께서 세상의 모든 나라를 나에게 주셨다. 그리고 유다의 예루살렘에 당신을 위한 집을 지을 임무를 나에게 맡기셨다."(에즈 1,2)
이방인인 키루스의 통찰이 놀랍습니다. 그는 이 세상의 주인이 누구이신지, 자기에게 권력을 맡기신 분이 누구이신지 정확이 알고 있습니다. 알 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하신 주님의 그 말씀을 기민하게 실천에 옮기고 있지요. 이스라엘 민족이 간절히 기다리던 해방은 이렇듯 밖으로부터 도래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마음을 움직여 주신 이들이 모두 떠날 채비를 하였다."(에즈 1,5)
키루스뿐만 아닙니다. 이미 바빌론에서 자리를 잡고 적응해 살던 이들 중에 주님의 메시지에 귀기울인 이들이 이에 협력하기 위해 당장 이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들 역시 말씀을 경청하고 실천함으로써 민족적 구원 여정에 앞장선 이들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듣고 흘려버리거나 의식 저편으로 묻어두지 않고, 자기 인격 안에서 내면화한 뒤 삶에서 역동적으로 표현하는 이들을 통해 말씀은 빛이 됩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큰일을 하셨네."(화답송)
귀양살이를 마치고 기쁨에 차 예루살렘을 향하는 무리의 환호소리가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분 말씀을 놓치지 않고 포착해 삶의 언어로 번역해 내는 이들을 통해 "큰일"을 이루십니다. 말씀이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는 빛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여기에 존재하기까지 우리 각자의 삶에서 역동을 일으키셨던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곰곰이 되짚어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말씀이 우리 각자의 인격과 영혼을 통해 빛이 되셨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이지요.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경청하고 머무르는 우리를 통해 그분께서 세상에 빛을 비추시니, 두려워 말고, 움츠리지 말고 말씀에 우리를 내어맡깁시다. 말씀의 사람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20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