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Margaret K 2021. 9. 18. 07:02

2021년 9월 18일 연중 제24주간 토요일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은 길바닥에 떨어져서

발에 밟히기도 하고 하늘의 새가 쪼아 먹기도 하였다.

(루가 8,4-15)

 

“A sower went out to sow his seed.
And as he sowed, 
some seed fell on the path and was trampled,
and the birds of the sky ate it u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통하여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 ‘신비’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드러내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 자체이시며, 당신 스스로 하느님 나라를 보여 주신 분이시고, 그 신비를 몸소 지니신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는 은총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예수님께 달렸으나,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습니다.
말씀의 씨앗이 길에 떨어진 경우처럼,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악마가 그 말씀을 마음에서 앗아가 버려 올바로 믿지 못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위에 떨어진 말씀처럼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합니다. 짧은 인생이라고 하지만,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상황과 마주하며 울고 웃고, 때로는 낙담하고, 때로는 희망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좋은 토양을 가지고자 마음의 밭을 잘 가꾼다면,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간직하고 신앙의 항구함을 간직하는 방법을 오늘 복음의 마지막 부분과 복음 환호송은 이렇게 가르쳐 줍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체중계에 올라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제 몸무게 숫자의 앞자리가 바뀌기 직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만큼은 도저히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매일 하루 2만 보 이상을 걷고, 무거운 덤벨과 바벨을 들면서 근육운동도 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운동했어도 체중의 변화가 별로 없습니다. 여기서 조금만 폭식을 하면 앞자리가 휙 바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예 ‘단식’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저를 보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몸이 좋아졌는데?”라고 말씀하십니다. 체중을 크게 줄이지는 못했지만, 몸이 좋아졌다는 말에 다시 힘을 얻어 계속해서 운동합니다.

지금의 몸을 갖는데 거의 6개월이 걸렸습니다. 6개월 꾸준히 하니 조금 티가 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의 근육을 단련하는 데는 얼마나 걸릴까요? 몸의 근육을 단련하는 것도 이렇게 오래 걸리는데, 마음의 근육은 더 많은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와 묵상, 미사, 사랑의 실천 등을 통해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킬 수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이 단련되어야 그 크신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여 더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묵상해 보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좋은 씨를 심으셨습니다. 그런데 그 씨를 받아들이는 마음의 상태를, 길, 바위,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표현합니다. 아무리 좋은 씨라 할지라도 길이나 바위, 가시덤불에 뿌려지면 어떤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결국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우리의 마음은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꼭 필요합니다.

좋은 땅을 만들기 위해서 농부는 거름을 주고 땅속에 묻혀 있는 자갈도 골라냅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을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으로 변화시킬 우리의 노력은 무엇입니까? 앞서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키는 기도와 묵상, 미사, 사랑의 실천 등을 말씀드렸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주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것으로 우리 마음을 좋은 땅으로 만들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좋은 땅으로 표현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를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은 세상의 돈이나 지위에 연연하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세상의 것이 아닌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백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됩니다.

백 배의 열매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신앙인이라면 모두 원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진정한 구원의 큰 선물을 받는 것입니다. 이 선물의 주인공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 좋은 땅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용기란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고, 두려움의 정복이다. 두려움이 없는 게 아니다(마크 트웨인)


어떤 삶을 사는가?

사람은 일반적으로 4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1) ‘모든 사람이 나에게 빚을 졌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부모의 책임을 강조하고, 하느님께도 당연히 자신에게 다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하지 못하고 요구만 하는 사람입니다.

2) ‘나는 나고 너는 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지극히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철저하게 자신 속에 갇혀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줄 모르고, 또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외면합니다.

3) ‘내가 받은 만큼만 베푼다’라고 생각하는 사람.
계산적인 사람으로 소위 ‘빚지고 못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받은 것을 알고 또 받은 만큼 베풀려고 노력합니다.

4) ‘나는 모든 사람에게 빚지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늘 감사하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참된 인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유형에 속하는 것 같습니까? 4번 유형이 너무 소극적이 아닐까도 싶지만, 감사의 이유를 찾는 사람이 늘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며 지금을 기쁘게 산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4번 유형의 모습이 적극적으로 이 세상을 사는 방법이 아닐까요?

 신앙인과 제자의 차이: 믿으려는 사람과 알려는 사람의 차이

-전삼용신부-


일단 그리스도를 찾는 이들에게 ‘비유’로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모든 비유는 항상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현상’들입니다. 일종의 ‘법칙’입니다. 그래야 모든 사람이 공감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밭에 보물이 묻혀 있다면 그 밭을 사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판다는 것이라든지, 물고기를 잡아먹을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한다는 식입니다.

    

    이렇게 모든 이들에게 공감을 끌어낼 비유는 어떤 효과를 줄까요? 그런 법칙을 만든 ‘하느님의 존재를 믿게’ 만듭니다. 집단 카드섹션 하는 것을 보면 그 안에 어떤 법칙이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러면 자연적으로 그 법칙을 만든 사람이 있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사람은 ‘설’(說)을 믿는 사람과 ‘론’(論)을 믿는 사람, 그리고 ‘법’(法)을 믿는 사람으로 나뉩니다.

    설을 믿는 사람은 어떤 개인의 주장을 믿는 것이고, 론을 믿는 사람은 어떤 집단의 이론을 믿는 것이며, 법을 믿는 사람은 세상에 존재하는 변하지 않는 법칙이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 모두가 다 지식이고 믿음입니다.

     

    그러나 ‘법칙’만이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이끕니다. 따라서 ‘비유’는 이런 법칙에 해당합니다. 사람들을 유일신에 대한 믿음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비유 말씀으로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먼저 세상의 이치를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이 계심을 이미 믿는 사람들에게 이 세상의 이치나 법칙은 더는 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이미 주님이 계심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들은 그 이치를 통해 ‘왜?’를 묻습니다. 왜 그런 이치를 깨닫게 하셨는지를 묻습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처럼 그 이치를 통해 당신을 드러내십니다. 존재를 드러내시는 것을 넘어서서 그런 법칙을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잘 만들어진 카드섹션을 보며 그 그림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감독한 사람의 의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유를 통해 그 비유를 만든 이를 ‘알게’ 됩니다.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 말씀을 설명해주신 이유는 당신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짧은 애니메이션 단편영화를 소개해 드립니다. 제목은 ‘도시에서 그녀가 피할 수 없는 것들’(2008)입니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주인공인 여자는 도시에서 가장 싼 집을 구하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의 집은 도시의 철거 작업으로 거대한 크레인에 의해 공중으로 들려져 버립니다. 설상가상으로 철거 회사의 파업으로 철거가 중단되어 결국 그녀는 그 공중의 집에서 살게 됩니다. 

 

    바람만 불어도 위태위태한 공중에 들어 올려진 그 집에 찾아오는 사람은 고양이로 변해버린 전 남자친구입니다. 사실 그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도시는 온통 고양이들의 세상입니다. 여자는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사람인 전 남자친구를 위해 매번 파이를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파이를 먹으며 생선을 구워주는 다른 여자를 생각하고 떠납니다. 그러다 또 파이가 먹고 싶으면 다시 찾아옵니다. 여자는 이 관계를 지속하다가 결국 고양이 남자친구에게 잡아먹힌다는 내용입니다.

     

    이게 무슨 내용일까요? 달동네로 이사 온 한 여인은 도시에 살지만 도시 사람들과 동화되지 못하는 동떨어진 삶을 삽니다. 도시 사람들은 고양이로 보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줄 때는 다가오지만 언제 할퀴고 달아날지 모릅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나마 자신을 찾아오는 유일한 전 남자친구도 욕망에 사로잡힌 고양이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끝내 거부하지 못하고 남자친구에게 먹히고 맙니다. 자신도 이젠 도시의 고양이들 중 일부가 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욕망과 벗어난 존엄성 있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돈과 성욕, 힘의 법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노예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도시에 살면 어쩔 수 없이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자신도 그런 고양이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는 내용입니다. 매우 공감이 가는 애니메이션이니 한 번 보시기를 추천해 드립니다.    

 

     ‘씨네몽땅’에서 이 영화를 논평했습니다. 제목이 ‘욕망의 도시에서 가장 싼 집에 사는 여자가 겪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이 작품의 감독에 대한 소개가 나옵니다. 결국, 이 작품은 감독의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이 혼자 서울에 정착한 지 7년이 되었던 2008년에 제작한 애니메이션입니다. 서울에 살게 된 뒤 도시에 관한 특별한 정서를 갖게 된 감독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내면세계를 이미지화해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 작품은 박지연 감독의 개인적인 이야기의 상징입니다. 이렇게 이 작품을 박지연 감독의 삶으로 이해한다면 모든 사람은 단순히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서 박지연 감독을 더 알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듣는 그리스도의 비유는 제가 하는 강론과 같습니다. 이 묵상들을 들으시는 분들은 비유를 먼저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저를 아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묵상들은 제가 저에게 하는 말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들은 제 묵상이 좋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신부님은 참 솔직해서 좋아요.”

저는 제가 솔직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묵상을 보시는 분들은 묵상을 통해 저를 해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묵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시는 것이겠지만 결국 당신 자신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묵상할 때 그리스도를 조금 더 알게 되는 것까지 가지 않는다면 아직 군중의 수준에 머무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야 합니다.

     

사람들이 묻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9)

그러나 요한복음은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합니다. ‘아는 것’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을 넘어서서 아는 수준까지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어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따라다니는 몸뚱이입니다. 몸만큼 머리를 아는 것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제자들이어야 그분께서 더 깊은 묵상을 하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더 드러내 보이시고 제자들은 하느님을 더 이해하는 만큼 세상을 더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따라서 더 깊은 묵상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를 머리로 여겨 먼저 매사에 그분의 몸이 되어드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당신에 대해 다 알려주십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것보다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야 할 더 가치 있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어린왕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를 다니면서 사막에 샘이 있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황무지에 폭포수처럼 샘이 넘쳐나는 것을 보았습니다사막에 숨어있는 샘을 오아시스라고 부릅니다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모습으로 전하였습니다.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예수님께서도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이 있기 때문이듯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아름다운 것은 지친 이들에게 샘물이 되어주는 이웃이 있기 때문입니다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강도를 당한 사람에게 사마리아 사람은 거친 세상에서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발라드린 여인은 십자가의 길을 준비하시는 예수님께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십자가의 길에서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갔던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께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예수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드린 베로니카도 예수님께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 2달 동안 신문사에 머물면서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고정성껏 돌봐주신 80이 넘으신 노사제도 귀한 샘물이 되었습니다코로나 시대를 지내는 신문사에도 귀한 샘물이 되어주시는 분들이 있습니다신앙은 이웃에게 위로와 나눔의 샘물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사막에는 신기루도 있습니다. ‘유토피아라는 말이 현실에는 없다는 뜻인 것처럼 신기루는 인간의 욕망과 욕심이 만들어내는 허상입니다신기루를 만나면 사람은 결코 갈증을 채울 수 없습니다그것은 그림의 떡과 같기 때문입니다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습니다그러나 선악과는 하느님과 같아질 수 없는 신기루였습니다선악과를 먹어서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이 아닙니다하느님을 닮은 모상을 찾아서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이 하느님과 같아지는 것입니다바벨탑은 하느님나라로 갈 수 없는 신기루였습니다성공명예권력이라는 바벨탑은 결코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할 수 없습니다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렇습니다탑을 쌓는 것이 아니라 섬김희생나눔의 삶을 살 때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십자가 없는 부활도 신기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막의 샘이 되어주는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씨 뿌리는 이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그리고 제자들에게 친절하게도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셨습니다씨는 하느님의 말씀성서 말씀이라고 이야기 하십니다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의 밭에서 좋은 결실을 맺으려면 우리들 마음의 밭이 좋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어떤 밭이 좋은 밭입니까잡초가 무성하고자갈이 많은 밭은 아닐 것입니다사람들이 다니는 길가는 아닐 것입니다여러 가지 양분이 가득하고토질이 좋으며잘 다듬어진 밭이 좋은 밭입니다우리들 마음의 밭도 그렇게 가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우리가 주님을 믿고주님과 함께 한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상의 샘을 만들 수 있습니다하느님의 말씀이 우리들 마음에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내 마음의 잡초들을 뽑아내야 합니다하느님의 말씀이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내 마음의 밭에 기도의 거름나눔의 거름을 뿌려 주어야 합니다추석 연휴가 시작되었습니다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말씀과 삶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

 -양승국신부-

 

대선 후보로 나서겠다는 분의 계속되는 망언이 세간의 화제입니다. ‘손발 노동? 그것은 이제 인도도 안한다. 아프리카나 하는 것이다.’ 신성한 육체노동을 향한 그의 천박하고 저급한 시각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에게는 정치지도자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덕목인 이웃 국가들에 대한 존중과 배려, 보편 인류애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낸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까지 나자렛의 목공소에서 손과 발을 이용해 열심히 가구를 제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는 틈나는 대로 육체노동의 고귀함을 강조해왔습니다.

  

저 역시 요즘 틈만 나면 하는 일이 손과 발을 이용한 육체노동입니다. 청소, 빨래, 건물 관리, 예초, 벌목, 쓰레기 분리수거 등등...

 

 손발 노동을 해보니 육체노동이 우리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얼마나 중요한 일이고 의미 있는 일인지를 실감합니다. 쓰레기 수거하시는 분들 한 며칠 쉬시면 도시 전체가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농사짓는 분들의 노고는 또 얼마나 고마운 것인지 모릅니다. 그분들이 풍성한 소출을 기대하며, 이른 봄부터 좋은 토양을 조성하려고 각고의 노력을 하시는 모습은 정말이지 눈물겹습니다.

  

좋은 토양, 백배의 열매, 말은 쉬운데...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날라리나 사이비 신자들이 신앙생활 안에서 드러내는 전형적인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럴듯한 말뿐이지 실천이나 결실이 없습니다. 반면에 성숙한 그리스도 신앙인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특징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말씀과 삶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 너나 할 것 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인간인지라, 듣고 배우고 익힌 말씀을 있는 그대로 자신의 삶속에서 백퍼센트 적용하며 살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예수님께서 건네시는 경고의 말씀 앞에서는 마음이 찔려 반성을 합니다. 때로 부끄러움도 느끼며 자신의 부족함을 가슴 칩니다. 지극히 작은 것이라도 나누고자 애를 씁니다.

  

이런 분들은 주님께서 칭찬하시는 좋은 토양을 갖춘 분들이니,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언젠가 주님 대전에서 그간의 노력들을 백배 천배로 보상받으실 것입니다. 오늘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우리 영혼의 토양을 갈아엎고 보살펴 주님 마음에 드는 좋은 땅으로 만들어 나가야하겠습니다.

 복음: 루카 8,4-15: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조욱현신부-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5절) 나가 땅에 씨를 뿌린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주님의 섭리에 따라 싹이 돋고 자라나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우리가 들은 말씀은 우리 안에 깊이 뿌리를 내려 행실로 열매를 맺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예순 배, 어떤 것은 서른 배”(마태 13,8)의 열매를 맺는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의 뜻을 물었을 때, 제자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다고 하시며 비유를 설명해 주셨다. 우리도 믿음을 가지고 그 말씀을 실천하려 노력하면 그것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신다. 그 신비는 믿음과 행실을 통하여서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다. “길에 떨어진”(12절) 씨앗은 악마가 쉽게 채간다. 땅이 굳어있기 때문에 씨가 심어지지 않는다. 마음이 굳어있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은 거룩한 말씀의 씨앗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들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을 스스로 더러운 마귀에게 어울리는 짓밟힌 길바닥과 같이 되고 만 것이다. 뿌리를 내릴 수 없게 된 그 씨앗은 악마가 곧 채가고 만다.

 

“바위에 떨어진 것들은, 들을 때에는 그 말씀을 기쁘게 받아들이지만, 뿌리가 없어서, 한때는 믿다가 시련의 때가 오면 떨어져 나가는 사람이다.”(13절) 성당에 나와서는 신자처럼 행동하지만, 교회를 나오자마자 하느님의 거룩한 말씀을 잊고 예전의 습관적인 생활로 돌아가는 사람이다. 더구나 박해가 일어나고, 진리의 원수들이 교회를 공격할 때에는 싸움에 나서기보다 도망치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14절) 말씀의 씨앗이 제대로 자리 잡고 싹을 틔운 것도 있다. 그러나 세상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 그것의 숨을 막아 쓸데없는 부분만 웃자라 말라버리는 현상이다. 세상일에 대한 걱정과 부자 되려는 욕망은 말씀의 씨앗을 숨 막혀 죽게 하는 가시덤불이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 이제 기름지고 잘 가꾸어진 땅에서는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 좋은 땅에서는 백 배의 결실이라는 것으로 보아 그 땅은 기름진 땅임을 알 수 있다. 돌과 가시덤불과 해로운 모든 것을 없앤 마음이라는 밭에 떨어진 말씀은 뿌리를 깊이 내리고, 건강한 싹이 나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나는 이 네 부류 중에 어디에 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이제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나의 삶이 열매를 맺지 못하였더라도, 지금부터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받아들여 실천하면서,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 15)

-한상우신부-


말씀 없이
땅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말씀이

주님이시다.

좋은 땅은
인내를
가르치고

열매는
인내를
먹으며
자라난다.

말씀 안에서
우리 마음을
숨길 곳이 없다.

말씀은
모든 곳에
있다.

받아들일
마음이
없는 것이지
말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말씀은
마음에
늘 목마르다.

우리 마음이란
말씀에
머물러야 할
말씀의
마음이다.

이렇듯
말씀과
결합되어야 할
삶이다.

먼저
우리 마음에서
가장 좋은
말씀을
자라나게
해야 한다.

주님 말씀이
우리 삶을
떠받치고 있다.

말씀이 있어
아름다운
마음이다.

말씀과
마음은
통해야 한다.

우리 마음을
헤아려주시는
말씀이시다.

마음을 빼앗긴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갈 때이다.

따뜻한 마음은
가을 햇살보다
더 귀하다.

우리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말씀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말씀의 인내로써
말씀의 열매를
맺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어떻게 열리는지 보여 주십니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러 나갔다."(루카 8,5)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씨 뿌리는 이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씨를 뿌리러 나간 사람"에게서 이 세상에 강생하신 성자 예수님이 보입니다. 이는 인류를 위한 첫번째 오심입니다.

"악마, 시련,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
신앙 여정에서 우리에게 가장 크게 위협이 되는 걸림돌들입니다. "길"에 떨어진 씨는 "악마"가 앗아가 버리고, "바위"에 떨어진 씨는 "시련"의 때가 닥치면 말라버립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씨는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으로 숨이 막혀 버리지요. 사람의 아들이 정성껏 하느님 말씀을 뿌리시지만, 75%의 씨들은 열매를 내지 못하고 스러져 버립니다. 

"좋은 땅에 떨어진 것은,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다."(루카 8,15)
좋은 땅은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된 이들입니다. 그들은 말씀을 듣고, 말씀에 머물러 말씀과 하나되고, 실제 삶에서 말씀을 적용해 실천하는 이들이지요. 말씀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그들을 통해 말씀이 백 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하니, 땅이 아무리 척박하고 냉랭해도 결국에는 그냥 스러져버린 씨앗의 수량과 비교할 수 없을만치 엄청난 수확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셈법이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성자의 두 번째 오심을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1티모 6,14)
우리가 걷고 있는 인생 여정에 "악마와 시련과 걱정과 재물과 쾌락"이라는 복병이 도처에 널려 있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결정적인 구원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내내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살아가는 일이 과연 가능할까요?

사도는, 우리에게 말씀의 씨를 뿌려 주신 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그분을 맞이하려면 "계명을 지키라"고 권고합니다. 이 계명이 바로 하느님의 말씀이지요.

"홀로 불사불멸하시며,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 어떠한 인간도 뵌 일이 없고 뵐 수도 없는 분"(1티모 6,16)
사실 주님은, 죄로 기울어져 있는 나약한 인간으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이 무한한 거리를 좁히려 해도 우리 쪽에서 그분께 올라갈 수 없으니, 그분께서 육을 취해 내려오신 거지요.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그분은 우리와 온전히 하나로 일치하시고자 말씀으로 현존하십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만이 우리가 주님의 날까지 그분께 맞갖는 영혼으로 깨어 있을 수 있습니다.

가진 것도 적고 많이 배우지 못했고 그럴싸한 신분도 아닌 변두리 인생이어도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간직하여 인내로써 열매를 맺는 이들은 행복합니다."(복음 환호송)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고, 그리로 이르는 길은 단거리가 아니라 장거리 코스지요.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다가오시는 말씀을 환대하여 머물다 보면 결국 하느님 나라의 신비는 미소하고 부족한 우리에게까지도 열릴 것입니다.

말씀을 품고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착하고 성실한 말씀의 종이 되어 나날이 더 행복해지시길 기원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4주 토요일-내 장애의 중증 정도는?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9월 23일 토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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