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13일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Margaret K 2021. 9. 13. 06:15

2021년 9월 13일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4세기 중반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현재 터키의 안타키아)에서 태어나 독실한 어머니의 신앙을 물려받았다. 수도자들과 함께 엄격한 극기 생활을 하던 그는 은수자를 본받아 광야에서 기도와 고행의 시간을 보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은 자선과 저술 활동에 전념하다가 사제품을 받고 주로 설교자로 활동하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주교로 임명된 그는 개혁을 부르짖으면서, 악습에 젖어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심지어 황제나 황후에게도 잘못된 점을 거침없이 지적하였다. 그 때문에 성인은 유배 생활을 하다가 407년 무렵에 선종하였다. 탁월한 설교로 ‘금구’(金口: 황금의 입)라고도 불리는 그는 설교자의 수호성인으로 공경받고 있다.

☆☆☆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한 사람이 못되며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거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루가 7,6-7)

 

I am not worthy to have you enter under my roof.
Therefore, I did not consider myself worthy to come to you;
but say the word and let my servant be heale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로마 백인대장의 이 겸손한 고백은 우리가 성체를 받아 모실 때마다 바치는 기도입니다.

천주교 신자에게 영성체는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생명의 양식으로 주셨고, 미사를 통하여 날마다 임마누엘 하느님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사랑의 성사를 통하여 우리와 일치하시고, 우리가 당신 안에 함께 살기를 바라십니다. 우리는 늘 주님 안에서 살 수 있도록 오늘 복음의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백인대장의 확신에 찬 말은 예수님께는 믿음에 대한 감탄으로, 그리고 그 종에게는 치유의 은총으로 다가갑니다.
세상의 수많은 방해와 불신 속에서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요. 우리의 눈은 한계가 있어 실지로 많은 것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뇌는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왜곡하고 조작하기도 한다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우리가 본 것, 우리가 경험한 것만을 진실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백인대장이 보여 준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 삶을 성찰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되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믿음을 통하여 하느님의 영원의 시간, 신비 안으로 초대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신부가 미사를 하는데 곁에서 복사를 서던 소년이 실수로 포도주와 물이 담겨 있는 주수병을 떨어뜨려 산산조각을 냈습니다. 그 순간, 이 신부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성당에서 나가! 그리고 다시는 복사 서지 마!”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소년은 눈물을 흘리며 성당을 나갔습니다.


이와 비슷한 일이 다른 성당에서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괜찮아. 나도 어렸을 적에 복사 서다가 그런 일이 있었어. 너는 이미 잘하고 있단다.”라고 따뜻한 말을 해주었습니다.

첫 번째 이야기의 소년은 그 후 성당에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커서는 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 그는 37년간 독재자로 있으면서 많은 사람을 탄압했던 주인공이었습니다. 두 번째 이야기의 주인공은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주교 ‘풀턴 쉰’이 되었습니다.

내가 하는 말의 힘은 정말로 대단합니다. 그런데 용기와 힘을 주는 말이 아닌, 순간의 내 기분을 푸는 말에 멈춰있는 것이 아닐까요? 자신의 기분이 제일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변화를 위한 말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말하는데 늘 조심해야 한다고 옛 성인들은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어떤 말이었을까요? 죽이는 말이 아닌 살리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말씀 한마디로 백인대장의 노예를 깨끗하게 치유해주셔서 죽음에서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믿음’이었습니다. 주님께 대한 강한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을 보시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복음의 다른 부분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일관된 모습이었습니다.

말씀 한마디로 치유될 것이라 믿는다는 것이 쉬웠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직접 보고 직접 들어야 또 직접 만져봐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이지요. 그런데 보이지 않은 말씀 한마디에 믿음을 둔다는 것이 어떻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백인대장의 믿음이 대단한 것입니다. 그는 말씀 한마디로 분명히 치유될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었기에, 굳이 힘들여 오실 필요가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어떻습니까? 주님의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께서는 말씀 한마디로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의심 없이 믿을 때, 주님의 커다란 은총과 사랑은 우리 곁에서 멀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말이 가진 힘이란 죽은 이를 무덤에서 불러낼 수 있고, 산 자를 땅에 묻을 수도 있다. 소인을 거인으로 만들 수도 있고, 거인을 완전히 망가뜨려 없애 버릴 수도 있다(하인리히 하이네).

하느님의 힘 때문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호가호위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남의 권세를 빌려 위세를 부린다는 뜻으로, 여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호랑이가 사냥해서 여우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여우가 스스로 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그럴 리가 없다면서 자신이 왕이라고 말했지요. 그러자 여우는 자기 뒤를 쫓아오면 모든 동물이 자신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어떠했을까요? 모든 동물은 여우 뒤의 호랑이를 보고 두려워 도망쳤습니다. 호랑이는 이렇게 도망치는 동물들을 보면서 ‘여우가 진짜 왕인가 보다.’라면서 여우를 풀어줍니다.

이 우화를 읽으면서, 우리 뒤에 계시는 하느님을 떠올려봅니다. 하느님 때문에 지금의 내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잘 나서 그런 것으로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지요. 그들이 존경과 사랑을 받았던 것은 하느님을 따라 율법을 지켰기 때문이지, 스스로 잘나서가 아니었습니다.

이 종교지도자의 모습을 따라서는 안 됩니다. 주님도 겸손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우리 역시 겸손해야 합니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살고 있음을 잊지 맙시다.

 믿음이 있으면 법칙을 찾아낸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백인 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십니다. 그것도 보통 칭찬하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도대체 백인 대장이 이런 칭찬을 받을만한 일을 한 게 무엇일까요? 그는 예수님이 굳이 자기 집에 오시지 않아도 종을 치유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죽은 딸을 살렸던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려면 자신의 집으로 꼭 오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도 큰 믿음이지만 성경을 공부한 적도 없는 이방인이 예수님의 능력에 대해 더 잘 알게 된 것은 왜일까요?

  

    그는 세상의 법칙을 묵상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병을 고치는 능력도 하나의 권위입니다. 인간보다 높은 권위를 지닌 힘입니다. 자신도 로마 장교로서 자기 밑에 있는 군사에게 시키면 군사들이 알아서 다 하는 것처럼, 하늘의 권위를 지닌 분도 굳이 당신이 다 하지 않아도 그 능력을 실행해줄 천사와 같은 이들이 있을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굳이 예수님을 공부하지 않았음에도 평생 공부한 사람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 이유는 ‘세상의 법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법칙이 있습니다. 법칙은 시공을 초월해 예외 없이 옳고 반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법칙보다 낮은 것이 ‘론’입니다. 예를 들면 ‘진화론’입니다. ‘론’은 ‘논리’입니다. 그러나 이 논리는 증명이 되지 않습니다. 만약 증명된다면 ‘진화 법칙’이 될 것입니다.

    법칙은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자연계 내에서 스스로 진화 발전하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질서와 에너지를 잃는다.’라는 열역학 제2 법칙처럼 증명이 되고 누구에게나 수긍이 갑니다. 반박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법칙은 하나의 믿음을 형성합니다. 그러나 창조론이나 진화론은 하나의 이론이기 때문에 증명할 수 없습니다. 단지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라 모래가 뭉쳐 스마트폰이 된다는 식의 진화론보다는 스마트폰이 사막에 떨어져 있다면 진화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창조론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론’이 ‘법칙’을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론’보다 하위개념이 있는데 ‘설’입니다. 설은 이론도 없고 그냥 개인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에서 ‘설’에 빠지는 이들은 자기 자신만 믿는 ‘자아 숭배교’라 할 수 있고, ‘론’을 따르는 이들은 인간을 숭배하는 ‘인본주의교’라 할 수 있으며, ‘법칙’을 따르는 이들은 그 법칙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을 믿는 ‘신앙인’이 됩니다. 

 

    만약 여기저기서 ‘같은 모양의 돈’이 발견된다면 우리는 분명 그 돈을 개인들이 만들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한국은행과 같은 곳이 있어서 같은 모양으로 그 돈을 찍어냈을 것이라 믿습니다. 여러 명이 디자인해서 그 돈이 그렇게 일치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 명의 선수가 일제히 짜 맞춰진 ‘싱크로나이즈’를 한다면 분명 어떤 누구가 그것을 구성한 사람이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연의 일치로 그런 것들이 맞을 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모두 적용되는 법칙이 있다면 그 법칙을 만든 분이 분명히 계실 것입니다. 감독이 여러 명이면 분명 다른 모양의 공연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백인 대장은 ‘법칙’을 추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디서든 모든 힘의 서열이 있는 곳이면 상관이 명령하면 밑에 사람이 그 명령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권능을 지닌 그리스도도 그럴 것이라 믿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더 잘 알게 되었으니 오히려 회당장 야이로의 믿음보다 크다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세상은 그 믿음이 있는 이들이 성공하는 곳입니다. 많은 영화배우가 있지만 오랜 시간 탑으로 군림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처음엔 잘하는 것 같다가 중도에 넘어지는 이들도 있습니다.

  

    ‘유퀴즈 온 더 블록’에 황정민 배우가 나온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누적 관객만 1억 명이나 되는 꾸준한 노력파 배우입니다. 여기에서 그는 자기가 생각해도 연기가 점점 느는 것 같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만큼 많이 노력하는 배우입니다. 캐릭터를 이해하기 위해 직접 그런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노트 한 권을 채우지 않으면 연기를 시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국제시장에서 노인을 연기하기 위해 파고다 공원에서 어르신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인터뷰도 하며 그분들의 말투를 배웠다고 합니다. 노숙자를 연기하기 위해 지하철에서 노숙자로 변장하여 그들과 일주일 동안 살아보기도 했습니다. 곡성에서 무당을 연기한 장면인 무당이 봐도 소름 돋는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가 그렇게 하는 데는 ‘믿음’이 있습니다. 그렇게 노력하는 만큼 자신의 연기를 보는 사람들이 몰입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지 않기가 쉽지 않습니다. 찾아보니 개신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자기관리하고 노력한다면 그의 연기 인생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한 법칙이 진리이신 성자이시고 사용한 노력이 은총이신 성령이십니다. 자동차를 만들 때 만드는 사람이 아버지이고 설계도가 아드님이며 피와 땀이 성령이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만들어진 자동차가 운행되는 법칙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대로 살면 인간은 온전히 창조된 법칙대로 살기 때문에 고장 나는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히 산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주님이 계신다면 이 세상도 법칙대로 움직입니다. 그 법칙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도 잘 살아나가겠지만, 그것 자체가 창조주를 믿는 믿음이 됩니다. 헛된 개인적인 생각이나 증명될 수 없는 이론들을 따르지 맙시다. 시공을 초월하는 명확한 법칙이 있음을 믿읍시다. 그 법칙을 찾아내면 주님께 대한 믿음은 저절로 증가합니다.

 -조재형신부-


오늘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예전에 이 성인의 세례명을 요한금구라고 하였습니다금구(金口)는 황금의 입이라는 뜻입니다주교님께서는 강론을 잘 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습니다주교님께서는 신자들에게도 생활을 윤리적으로 쇄신하도록 가르쳤습니다또 가난한 이들을 위한 여러 구호사업을 진행했습니다그러자 성인의 개혁에 불만을 품은 고위성직자들이 성인을 적대시하기 시작했습니다적대자들은 근거 없는 비난으로 성인을 고발했습니다결국 403년 성인은 면직 후 유배생활을 하게 됐습니다신자들은 성인의 유배에 반발했습니다첫 유배에 신자들은 성인의 유배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켜 잠시 유배를 취소시켰습니다. 404년 성인이 다시 유배되자 성인을 만나기 위해 신자들의 순례행렬이 계속됐습니다이에 황제가 성인을 더 먼 곳으로 유배를 보내자 성인은 새 유배지로 가던 중 선종하고 말았습니다성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은 412년 성인의 명예를 회복시켰고성인의 유해는 1626년 5월 1일 이후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성가대 경당에 안치됐습니다.

 

저는 신학교에서 논문을 쓸 때 설교학을 선택했습니다감동을 주는 신부님들의 강론을 들으면서 저도 강론을 잘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길고 지루한 강론을 들으면서 저라면 다른 방법으로 강론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사제가 되면 매일 강론을 하는 저를 위해서저의 강론을 듣는 교우 분들을 위해서 설교학을 선택했습니다학사논문은 현대인을 위한 설교라는 제목으로 준비했습니다제가 논문을 쓸 당시에는 주일학교에 학생들이 많았습니다초등부 주일학교중고등부 주일학교 미사에 학생들이 참 많았습니다보좌신부에게 주일학교 미사는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이었습니다어린이와 학생들을 위한 강론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학생들의 눈높이에 맞게 강론을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석사논문도 설교학을 선택했습니다. ‘현대인을 위한 설교라는 제목으로 준비했습니다논문을 지도하는 신부님께서 설교는 곧 선교라고 하시면서 설교와 선교라는 제목으로 수정해 주었습니다. 30년 사제생활을 하면서 매일 강론을 준비하면서 제가 준비했던 논문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하면서 신학교에서 후배들에게 설교학을 가르치면서 강론에 꼭 필요한 4가지 요소를 강조했습니다첫째는 말씀입니다음식에는 늘 주된 재료가 있기 마련입니다케이크에는 크림이 필요하지만 주된 재료는 빵입니다집에는 창문과 문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람이 머무는 공간인 방입니다말씀이 중심이 되는 강론이 되어야 합니다말씀이 빠진 강론은 진정한 강론이 될 수 없습니다둘째는 기도입니다예수님께서는 바쁘신 중에도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제자들에게도 늘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기도하는 사제는 말씀이라는 밭에서 보물을 찾을 수 있습니다기도하는 사제는 말씀을 통해서 참된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셋째는 시대의 표징입니다허리가 아픈데 다리를 주무르면 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현대인들이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신문을 정독하고책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교우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합니다넷째는 실천입니다감기약을 파는 사람이 늘 감기를 달고 살면 사람들이 그 감기약을 신뢰하지 못할 것입니다사제가 선포한 강론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모래 위에 지은 집이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백인대장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율법과 계명을 몰랐지만 마음은 이미 하느님과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삶은 참된 신앙인이었습니다유대인들을 위해서 회당을 만들어 주었습니다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습니다병든 종을 내치지 않고 정성껏 돌보아 주었습니다주님께서 한 말씀만 하시면 종이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믿음은 피부색신분학식에 따라서 커지는 것이 아님을 늘 말씀하셨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시로페니키아 여인백인대장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분들의 믿음을 칭찬하였습니다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 해도교만과 욕심에 사로잡혀있으면 사탄아 물러가라!’라고 야단치셨습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 

 저는 성전(聖戰)을 치러 냈습니다. 달려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양승국신부-

 

유럽의 한 교구 신자들은 사제들의 강론을 듣는 것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겨웠던지, 이런 식으로 계속 할거라면 강론을 없애자는 제안서를 교구청에 전달되기도 했답니다.

  

저도 가끔씩 하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잘 준비되지 않은 강론, 그날 성경말씀의 주제와는 관계가 없어도 너~무 관계가 없는 강론, 담화문 발표식의 강론, 신자들과의 교감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방통행식 강론, 이야기가 계속 가지를 쳐서 원줄기로 돌아오지 않는 길고도 긴 강론을 들으면서, 때로 강론도 고문, 혹은 폭력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은 신자들의 영성생활에 너무나 큰 의미가 있고, 큰 기여를 하기에 제1순위에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님의 살아있는 강론과 삶은 큰 경종을 울리며 다가옵니다.

  

주교님의 강론은 언제나 군더더기가 없고 명쾌했습니다. 거기다 재미와 감동이 더해졌습니다. 자연스레 수많은 사람들이 멀리서부터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의 강론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의 강론은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꿨습니다.

  

주교님의 강론은 결코 추상적이거나 구름 잡는 식의 애매모호한 강론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펼쳤던 강론의 특징은 핵심 키워드에로의 몰입이었습니다. 날카로움과 균형감각을 동시에 지녔습니다. 풍부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한 스토리텔링으로 언제나 청중들을 압도했습니다.

  

그의 설교가 얼마나 감동적이었던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 눈물과 탄성으로 인해 자주 설교가 중단되곤 했습니다. 환호와 박수, 눈물과 탄성은커녕 하품과 졸음, 분심과 분노를 유발시키는 오늘 우리들의 강론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주교님의 설교는 때로 쌍날칼보다 날카로웠습니다. 나누지 않는 부자들에게 강력한 경고장을 던졌습니다. 왕실의 부유하고 사치스런 생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물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 뇌물을 상납한 주교들을 가차 없이 면직시켰습니다.

 

워낙 강경한 노선을 고수했던 주교님이었기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결국 그는 황실과 반대파 고위성직자들에 의해 파문되어 2차례나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유배지에서 그는 238통이나 되는 보물 같은 편지를 남겼습니다. 407년 9월 14일 유배지에서 선종했습니다.

  

유배를 떠나기 전 남긴 말씀입니다.

  

“저는 성전(聖戰)을 치러 냈습니다. 달려야 할 길을 끝까지 달렸습니다.”

  

힘겹게 살아가는 가난한 백성들을 향한 위로의 말씀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넘실거리는 큰 파도와 높은 풍랑이 우리를 위협하고 있지만 결코 우리를 삼켜 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란 반석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바다가 아무리 화를 낸다 해도 그리스도의 바위를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파도가 큰 탑처럼 하늘 높이 치솟는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배를 삼켜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송영진신부-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그런데 백인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셨을 때, 백인대장이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님께 아뢰었다.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 사실 저는 상관 밑에 매인

사람입니다만 제 밑으로도 군사들이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또 제 노예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

이 말을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백인대장에게 감탄하시며,

당신을 따르는 군중에게 돌아서서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심부름 왔던 이들이

집에 돌아가 보니 노예는 이미 건강한 몸이 되어 있었다(루카 7,6-10).”

 

이 이야기에서,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라는 말은 백인대장의 ‘겸손’을 나타내고, “그저 말씀만 하시어” 라는

말은 그의 ‘믿음’을 나타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나 가족의 치유가 아니라

‘종’의 치유를 예수님께 간청한 것은 그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의 ‘믿음’입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인간 세상에서 이런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다.”입니다.

(그때까지는 이스라엘 안에서도, 이스라엘 밖에서도,

백인대장과 같은 믿음을 고백한 사람은 아직 없었습니다.)

“이 사람에게 가라 하면 가고 저 사람에게 오라 하면 옵니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병이라는 것’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시면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에 복종하고 떠날 것이라고 믿는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백인대장의 믿음은, “예수님은 병을 잘 고치시는 분”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은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고 이 믿음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은 권능을 가지고 계시는

주님이신 분”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께서 백인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만 있고,

그의 종을 고쳐 주시는 ‘치유의 말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의 말씀’을 하셨지만

복음서 저자가 백인대장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려고 생략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예수님께서 ‘치유의 말씀’을 하시지 않고,

당신의 의지만으로 병을 고치신 것일 수도 있습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말을 하는 행위’가 아니라,

병자를 고쳐 주시려는 예수님의 자비와 의지입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하시지 않아도 당신이 고쳐 주기를 원하시는 병자는

의지만으로도 고쳐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분명히 ‘백인대장의 믿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께 청하기만 하면 병이 낫는다.” 라고

이 이야기를 단순하게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권능’만 가지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권한’도 가지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능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권능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권한은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을 권한, 즉 결정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병을 고쳐 달라고 주님께 간청했지만,

주님께서는 그 청을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2코린 12,7-9).

예수님께서 누구의 병은 고쳐 주시고, 누구의 병은 고쳐 주지 않으시는지,

그 기준이 무엇인지 우리는 모릅니다.

(“모르니까 포기할 수밖에 없다.”가 아니라, “모르니까 믿어야 한다.”가

신앙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1) 예수님은 ‘주님이신 분’으로서 우리 인생을 주관하시는 분이고,

‘착한 목자이신 분’으로서 우리에게 행복과 생명을 주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그 사랑을 믿고, 끝까지 포기하지 말고,

예수님께 간청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께서 주신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들이 많습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청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청하지 않는 것은 은총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2) 믿고 청한다고 해도 자신이 할 일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합니다.

병원에 가야 한다면 병원에 가고, 약국에 가야 한다면 약국에 가야 합니다.

수술이 필요하면 수술을 받고, 약을 먹어야 한다면 약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알아서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또 자기가 할 수 있는 일도 안 하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3) 가장 중요한 것은 ‘모든 것’을 주님께 맡겨 드려야 한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8).”

4)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고 봉사하는 것은,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중요한 ‘사랑 실천’이고,

이 실천은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앓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교회의 원로들을

부르십시오. 원로들은 그를 위하여 기도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그에게

기름을 바르십시오. 그러면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 또 그가 죄를 지었으면

용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 죄를 고백하고

서로 남을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의인의 간절한 기도는 큰 힘을 냅니다(야고 5,14-16).”

 

믿음으로 병을 고치고 건강을 되찾는 것은 ‘좋은 일’이고 ‘선한 일’입니다.

그러나 ‘몸의 건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건강’입니다.

현세에서 ‘무병장수’를 누리는 것보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이 더 중요하고, 그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희망입니다.

우리는 현세에서의 인생은 우리 인생의 아주 작은 일부일 뿐이고,

진짜 인생은 하느님 나라에서의 영원한 인생이라는 것을 잊으면 안 됩니다.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19).”

“우리의 이 지상 천막집이 허물어지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건물

곧 사람 손으로 짓지 않은 영원한 집을 하늘에서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2코린 5,1).”

늙고, 병들고, 죽는 우리의 현실은 그 자체로 우리가 받아들여 할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은 짧고, 그 길 끝에 있는 생명과 영광은 영원하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복음: 루카 7,1-10: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만 한 자격이 없습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로마의 백인 대장이 자기 종을 고쳐 주십사고 청한다. 그 종은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 병은 예수님만이 고쳐 주실 수 있는 병이다. 영적인 의미로 보면 이 종은 치명적인 욕정으로 병들었거나 세속의 노예로 묶여 주님께서 깨끗하게 해주고 계시다. 하느님을 모르는 그래서 하느님과 거리가 먼 이방 민족들의 구원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유대인들은 백인 대장을 칭찬하고 있다. “그는 선생님께서 이 일을 해 주실 만한 사람입니다.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회당도 지어 주었습니다.”(4-5절) 주님께서는 그 백인 대장의 정신을 인정해 주셨다. 아직 교회가 탄생하기 이전에 회당을 지어 주었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쓸 교회도 더욱 잘 지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회당을 지었지만,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들과 함께 백인 대장의 집으로 가신다. 그러나 백인 대장은 사람을 보내어,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제 지붕 아래로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님을 찾아뵙기에도 합당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주십시오.”(6-7절) 이 말을 들으신 주님께서는 감탄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9절)

 

백인 대장의 이 말은 “저는 주님을 제 집에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저는 의로움의 태양을 받아들일 능력이 없습니다. 한 줄기 작은 빛살도 어둠을 물리치듯이 이 병도 주님의 한 말씀으로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유다인의 원로들과 그 친구들에게 모두 백인 대장과 같은 믿음이 없다고 꾸짖고 계시다. 백인 대장의 믿음은 이방 민족들에서는 첫 번째의 신앙인이라는 것이다. 만일에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 참 신앙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이 동쪽과 서쪽에서 모여와, 하늘나라에서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함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마태 8,11) 말씀하셨다. 백인 대장은 스스로 자격이 없는 자라고 고백함으로써 합당한 사람으로 바뀌고 있으며, 그의 종이 치유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이 사화는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면 국적을 불문하고 구원하시는 구원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

 

백인 대장이 주님께 자기 종을 위해 간청한 이 말은 우리가 미사 중에 성체를 영하기 전의 기도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가 곧 나으리이다.” 한 이방인의 예수님께 간청한 말이 기도가 되었다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는 우리의 믿음은 어떠한지 생각해보고 우리도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로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하여야 하겠다.

"그저 말씀만 하시어 제 종이 낫게 해 주십시오."(루카 7, 7)

-한상우신부-

믿음은
끝없이
주님을
향해 있다.

믿음은
우리를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한다.

간절함이
믿음이다.

우리 마음을
깨어나게 하는
믿음이다.

백인대장과
노예를
소중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는
사람의
믿음이다.

믿음 안에
우리가 있다.

힘들고 아픈
현실은
믿음을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된다.

믿음은
사랑을 위해
살아야 할
우리의
삶이다.

믿음과 삶은
말씀과 치유로
깊어간다.

믿음은
삶을
뒷받침하는
삶의 힘이다.

믿음의 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를
변화시킨다.

투명한 믿음
겸손한 믿음을
백인대장의
믿음에서
만나게된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님을
가리키는
믿음이 된다.

다시
간절해지는
믿음이다.

아픔을
치유하는
믿음이다.

사람을 살리는
믿음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의 보편성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사람이었다."(루카 7,2)
한 백인대장이 병들어 죽게 된 노예를 위해 예수님께 도움을 간청합니다. 이방인인 자기가 예수님을 직접 찾아뵙기에 합당치 않다고 여겨 유다인 원로들을 보낸 것입니다.

백인대장은 유다인 입장에서 보면 구원에서 제외된 이방인이지만, 실상 그의 겸손과 믿음, 통찰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거기에 더해, 종에 대한 사랑 역시 놀랍게 다가옵니다. 당시 신분제도와 관습으로 보면 종은 소유물로 취급해도 되는 존재이지만 백인대장은 그를 인격적으로 대하고 소중히 여기며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발벗고 나섭니다.

"당신 자신을 모든 사람의 몸값으로 내어 주신 분이십니다."(1티모 2,6)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소개합니다. "모든 사람"의 범주에는 자유인과 종, 유다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계급이나 지위나 신분을 막론하고 하느님의 존재를 나누어 받은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됩니다. 예수님은 구원 대상을 가리지 않고 모두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모든 이가 그분께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모든 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합니다.

"나는 이스라엘에서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루카 7,9)
예수님께서 "그저 말씀만 하시"라는 백인대장의 믿음을 보고 감탄하며 칭찬하십니다. 백인대장과 같은 이방인도 당연히 하느님의 모상을 나누어받은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게다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백인대장은 이미 예수님을 꼭 닮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 2,4)
이것이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바람입니다. 서로를 구분하고 차별하고 소외시키는 태도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이 아님은 명백합니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은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네."(복음 환호송)
믿는 사람은 "누구나"라고 하십니다. 오늘 믿음을 칭찬받은 복음 속 백인대장처럼 사실 우리도 역시 믿음으로 구원받은 이방인이지요. 믿음 덕분에 우리는 인간이 규정지은 구원의 기준, 범주, 조건에 솔직히 그리 부합하지 않는 처지면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벗님! 소박하고 단순하나마 우리가 지닌 믿음을 주님께 보여 드리는 오늘이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 자신을 규정하는 온갖 조건이 그리 합당하거나 찬란하지 못해도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귀하게 반기시지요. 각자 소중히 여기는 바를 믿음과 겸손한 기도로 지켜내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기도로 돌리기

 -김찬선신부-

 

요즘 제가 영적으로 노력하고 있는 것이 <기도로 돌리기>입니다.

 

우리는 신선처럼 이슬만 먹고 살 수 없고,

티브 프로그램에 많이 나오는 자연인처럼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고 도사처럼 동떨어져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서로 비비며 살다보니 자주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며 살고,

특히 정치가들에 대해서 더 많이 판단하고, 비판하고, 욕하며 사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사랑하지 못하는 제가 괴롭고,

수도자라는 자가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이 한심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화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못하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 면에서 괴롭기도 하지만

기도하지 않고 판단하거나 비판하는 것

특히 욕하는 것은 그들을 초월치 못하고 그들과 같은 수준에서

뒹구는 것이기에 그런 제가 한심하고 그런 저에 대해 화가 나는 겁니다.

 

그러니 판단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비판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

더욱이 욕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내가 기도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이 될 뿐 아니라

같은 수준의 한심하고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거지요.

 

그러므로 기도로 돌리기를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를 위한 것, 곧 기도하고 사랑하는 내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오늘 바오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권고하는데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청과 기도와 전구와 감사를 드리라고 권고합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여 우리가 

아주 신심 깊고 품위 있게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십시오."

 

기도하는 나는 그들과 같이 똥구덩에서 뒹굴지 않아 품위 있고,

인간적으로만 상대하지 않고 하느님께로 향하니 신심 깊으며,

욕하고 화를 내지 않으니 마음이 평온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이렇게 <기도로 돌리기>를 하기로 했지만

아직은 열 번에 한두 번밖에 성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나에 실망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이런 나에 겸손하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저의 전 삶이 의식화와 성사화가 될 것입니다.

 

한 술에 배부르려는 또 다른 욕심쟁이가 아닌

삶의 의식화와 성사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겸손한 노력가가 되어야겠다고 마음 다잡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16일 연중 제 4주간 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