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2일 연중 제24주일
2021년 9월 12일 연중 제24주일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마르코 8,27-35)
“Whoever wishes to come after me must deny himself,
take up his cross, and follow me.
For whoever wishes to save his life will lose it,
but whoever loses his life for my sake
and that of the gospel will save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곧이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어떤 일을 겪게 될 것인지 가르쳐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입니다. 베드로가 이에 반박하자,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꾸짖으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고백합니까? 그저 어렵고 힘들 때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 날마다 은총을 내려 주셔서 우리가 잘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으로만 믿고 있지는 않은가요? 하느님의 뜻보다는 이기심이 바탕이 된 사람의 뜻만을 찾고 있지는 않은가요? 우리도 베드로 사도와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 기도할 때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고백하면서, 삶에서는 우리 마음대로 할 때도 많이 있으니까요.
오늘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우리의 믿음이 ‘실천’을 통하여 드러난다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따라 다른 이들을 돕고 믿음과 기도가 실천으로 이어지는 사람은 하느님의 영광에 초대되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깨닫고 고백할 것입니다.
실천하는 삶
-키엣대주교-
예수님과 제자들의 생활을 기록한 분들이 있기에 주님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우리와 같은 인간입니다. 결점이 있는, 욕심인 줄 알면서도 세상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인간입니다, 우리와 같은 인간의 눈으로 기록한 복음이기에 더 깊은 느낌과 깨달음을 받게 됩니다.
그 옛날 사람들은 구세주는 세상 모든 권능과 권위를 가진 분일거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자신과 다름없이 평범한 여성의 몸에서 태어나셨고 너무나 겸손한 분이셨습니다. 세상을 호령하는 위엄을 기대했건만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치욕을 받으며 마치 죄인처럼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이 생각했던 구세주와 너무 달랐습니다.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주님을 믿기만하면 은총을 받고 주님의 나라에 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서 큰 일을 한 사람은 반드시 주님의 나라에서 존중받고 섬김을 받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주님을 따르는 사람은 행운과 성공, 부유함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을 따르는 사람에게 행복을 주겠다고 약속하는 데 왜 주님께서는 행복이 아닌 고통의 길을 가야한다고 하신걸까요? 왜 당신의 십자가 길과 고난만을 약속하신 것일까요?
주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행복은 이 세상의 짧은 행복이 아닌, 영원한 하늘 나라의 행복입니다. 그러한 참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고난을 참고 감내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을 버리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그 길을 가셨고 보여주셨습니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어렵고 실천은 더욱 더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입니다. 영원한 생명과 행복의 길로 이르는 유일한 길은 진정한 용기를 갖고 옳다고 생각하는 정의를 실천하는 것, 비록 그 길이 힘들지라도 주님께 의탁하며 끝없이 행동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참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오직 하나의 길입니다.
주님, 저희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아멘

1. 주님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습니까?
2. 주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을 해야한다는 것입니까?
3. 자신을 버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과연 이 말을 지키고 있는 지 앞으로도 계속 지킬 수 있는지 묵상해 보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런 고민으로 힘들어할 때, 여름방학 중에 혼자 산에 갔습니다. 정상까지는 길을 따라 쉽게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이제 하산하는데, 남들이 가지 않는 길을 가고 싶은 것입니다. 숲속으로 들어가 저의 감각만을 믿으면서 아래로 내려갔습니다. 숲을 헤치며 한참을 내려갔지만, 사람도 보이지 않고 길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가자니 그 힘든 길을 다시 간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습니다. 또 무작정 내려가다가는 길을 잃어서 금방 어두워져서 난처한 일을 당할 것만 같았습니다.
바로 그 순간 물소리가 들렸습니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니, 이 물길만 쫓아가면 아래로 내려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실제로 무사히 하산할 수 있었습니다.
하산할 때 들었던 물소리가 주님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싶었습니다. 주님 말씀만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간다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만두지 않고, 지금 이렇게 신부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이제 기도를 싫어하지 않고, 또 공부를 너무 좋아하는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예언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반대를 던집니다.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이라는 고통을 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33)
주님의 말씀대로 살았어야 했습니다.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니 주님의 뜻이 보이지 않고, 주님의 뜻과 정반대의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고 있었을까요? 사람의 일일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일일까요?
베드로처럼 자신에게 고통과 시련이 없어야 한다면서 예수님을 붙들고 반박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느님의 일보다는 사람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기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짜 자신의 목숨을 구하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입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선생님께서 미술 시간 준비물로 찰흙을 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막 학교에 입학한 저로서는 찰흙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옆 짝궁에게 물어보니, 그것도 모르냐는 표정을 지으며 “흙인데 끈기가 있는 거야.”라고 말해주는 것입니다.
솔직히 찰흙을 문방구에서 살 생각은 전혀 못 했습니다. 흙이란 것은 길거리에 널려 있는데, 이 흙을 돈 주고 산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어느 밭의 언저리에 있는 흙의 상태를 보고 ‘찰흙이다’라고 확신했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니 끈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음 날, 저는 직접 채취한 이 흙을 라면 봉지에 넣어갔습니다. 그런데 제 주위의 친구들은 모두 투명 비닐에 쌓인 네모반듯한 찰흙을 꺼내는 것입니다. 겉 비닐에 큼지막하게 ‘찰흙’으로 쓰여있더군요.
친구들이 저를 엄청나게 놀렸습니다. 흙을 사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뿐인데 말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남들은 체험하기 힘든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실수, 실패…. 당시는 부끄럽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시간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게 됩니다.
하느님은 늘 좋은 시간을 주셨습니다. 실수, 실패도 제게 좋은 시간입니다. 어떤 시간도 감사한 시간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전할 때 벌어지는 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러 세상에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십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오신 기쁜 소식을 왜 전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일까요?
예수님은 당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해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이때 베드로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박합니다. 아마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이것이 당신이 누구인지 아는 믿음이 있어도 복음을 전해서는 안 되는 이유입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은 진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그리스도 때문에 자기 목숨에 영향이 가지 않는 사람이란 아직 참 복음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사탄, 마귀들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며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압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죽일 마음이 없으므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게 오히려 도와주는 것입니다.
영화 ‘파운더’(2016)는 밀크셰이크 믹서기를 판매하는 외판원 ‘레이크록’과 맥도날드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믹서기 하나 파는 것도 힘든데 어느 한 시골에서 8개나 주문한 것입니다. 도대체 어느 매장이기에 그 많은 믹서기가 필요한지 궁금해졌습니다. 당시에는 햄버거 하나를 주문하면 30분은 기본으로 기다려야 하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 가게에서 햄버거를 주문한 레이크록은 자신이 주문한 것이 30초 만에 나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이것은 맥도널드 형제들이 수십 년간의 비법을 집대성하여 최대한 빨리 햄버거를 만들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나이가 들도록 아무 성과도 없이 믹서기나 팔러 다니던 레이크록은 이 매장을 프랜차이즈로 운영하면 떼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들에게 자신이 가맹점을 늘리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약속을 합니다. 사장인 맥도널드 형제는 자신들이 만드는 음식의 품질과 고유한 시스템을 손상하지 않는다면 손해 볼 것이 없다고 믿고 그 규정만 지켜준다면 그가 가맹점을 늘리게 해도 좋다고 허락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이 실수였습니다.
레이크록이 가맹점을 늘리다 보니 자신에게 돌아오는 수익이 너무 적었습니다. 그래서 맥도널드 형제들 몰래 부동산 회사를 맥도널드 이름으로 설립합니다. 그는 가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부동산을 매입해 가맹점을 모집하고 그 사람들이 내는 돈으로 또 땅을 사서 가맹점을 모집했습니다.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값싼 밀크셰이크 파우더로 대체합니다. 그렇게 이윤이 남는 것으로 또 땅을 삽니다.
이 사실을 맥도널드 형제들이 알았을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레이크록은 이미 부동산 재벌이 되어있었고 시골 가게 하나만 달랑 가진 맥도널드 형제가 재벌과 싸워 이길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결국, 형제는 목덜미를 잡고서 레이크록에게 맥도널드의 권리를 싼값에 팔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든 것은 맥도널드 형제들인데 그 맥도널드를 널리 퍼뜨리려던 레이크록이 맥도널드까지 집어 삼키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했다가는 어떤 결과가 올 것인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원님 덕에 나팔 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중에 원님을 위해 불던 나팔 때문에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볼 때는 원님 없이 혼자 영광을 챙기게 됩니다.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전하는 것이 이처럼 위험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그리스도가 되려면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나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무리 사람들이 나에게 영광을 주더라도 내가 아닌 그리스도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잊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사는 것이 복음의 내용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로 살기 위해 십자가에 나 자신을 죽이는 삶을 살지 않는 이들은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가 교회에 불이익을 주는 것입니다.
선거에 당선되기 위해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것을 내세워 당선되고는 가톨릭 신자의 모습과 전혀 상반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리스도를 이용한 것이 됩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영화 ‘밀양’에서도 전도연은 아들을 납치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하느님께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며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자신이 용서하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감히 어떻게 먼저 용서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이처럼 자신이 죽지 않고 하느님과 분리된 사람은 결국엔 교회에 폐를 끼치게 만듭니다.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믿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와 내가 죽고 그리스도로 살게 되었다는 믿음입니다. 내가 전하는 복음은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조재형신부-
캠핑을 다니면서 좋은 점이 많습니다. 자연 속에선 편안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주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닥불을 피우면서 아련한 추억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함께하는 신부님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습니다. 캠핑을 하면서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핸드폰이 안 되는 지역이 있는 것입니다. 문자를 확인할 수도 없고, 메일을 보낼 수도 없고, 꼭 연락해야 할 사람과도 소통하기 어렵습니다. 매일 강론 묵상을 올리는데 여의치 않기도 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통신사마다 핸드폰이 가능한 지역이 다른 점입니다. 저의 핸드폰이 되는 지역에서는 신부님들의 핸드폰이 안 되기도 합니다. 제가 안 되는 지역에서는 다른 신부님들의 핸드폰이 되기도 합니다. 다른 신부님들의 핸드폰을 노트북에 연결해서 강론 묵상을 올릴 수 있었습니다.
성서는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전해 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함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아담의 아들 카인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벨탑을 쌓았던 사람은 꺼지지 않는 욕망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려는 욕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고향사람들은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두려움 때문에 소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린아이가 말을 하는 이유는 먼저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소통하지 못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먼저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느님과의 소통입니다. 믿는 이들과의 소통입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첫 번째 조건은 낮아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언어와 하느님의 마음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계시를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자연을 통해서 우리와 소통하시지만, 완고한 우리의 마음은 귀가 닫혀서 하느님의 뜻을, 하느님의 마음을 듣지 못하고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들이 직접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전에 궁궐에 있던 왕도 가끔씩 궁 밖으로 잠행을 나오기도 했습니다. 신하들의 보고를 거치지 않고, 직접 백성들의 고충과 백성들의 아픔을 살피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의 몸도 소통이 중요합니다. 기가 막히고, 혈관이 막히면 건강에 이상이 오기 마련입니다. 동양의학에서 침과 뜸은 막힌 기와 혈을 풀어주는 치료방법입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두 번째 조건은 갈망입니다. 우리 속담에 “우는 아이 젖 준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하느님과 소통하려는 갈망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받아 주십니다. 이집트에서 하느님을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간절함을 보시고 모세를 보내 주셨습니다. 이민족의 공격으로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을 보시고 판관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망이 있는 사람들을 칭찬하셨고, 그들의 소망을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려했던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음식을 받아먹는 강아지의 심정으로 예수님께 딸의 치유를 청했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다윗의 아들 예수님께 눈을 뜨게 해 달라며 간절하게 외쳤던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청하면 받고, 두드리면 열리고, 구하면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세 번째 조건은 회개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눈과 같이 희게 해 주십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니 뉘우치고 회개한다면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십니다.” 우리가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죄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가 복음 15장은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었지만 뉘우치고 회개한 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잔치를 벌여 주셨습니다. 렘브란트는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아버지의 모습을 아름답게 표현하였습니다.
신앙에서 소통의 네 번째 조건은 행동입니다. 루가복음 19장은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집에 모신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행동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새는 좌우의 날개로 목적지를 향해서 날아갑니다. 신앙은 믿음과 행동의 날개가 균형을 이루어야 영원한 생명에로 날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질문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자들은 들은 대로 이야길 합니다. ‘엘리야라고도 하고, 죽은 요한이 살아났다고도 하고, 예언자 중에 한분’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질문을 다시 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 베드로는 아주 정확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를 칭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이번에 베드로는 또 이야기합니다.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베드로를 야단치셨습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뜻을 따르려 하는구나.’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는 분명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행동이 함께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행동이 없는 신앙은 우리를 참된 진리로 이끌어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던 베드로가 엄하게 질책을 받은 이유는 그 믿음을 실천하는 행동에는 함께 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입니다. 순교자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행동으로 보여준 참된 신앙인입니다. 우리가 순교자 성월을 지내는 것은 믿음을 행동으로 드러낸 순교자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신앙고백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며 구원하십니다.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해 주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래서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이 시간 예수님을 구세주로 모시고 있음을 기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르8,27)하고 물으셨습니다. 바깥 떠도는 소리, 여론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를 물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은 사람들이 1)세례자 요한. 2)구약의 예언자 엘리야. 3)다른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여긴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얘기는 그것으로 하고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말하라는 것입니다. 나의 소신과 확신에 찬 대답을 원하시는 것이지요. 나의 신앙과 다른 사람의 신앙은 확실히 구별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나서서 대답하였습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전에는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소리쳤었는데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면 영적성장을 이루었나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스도’는 1). 그리스어로는 ‘구세주’ ‘구원자’라는 뜻인데 2). 히브리어로는 ‘메시아’입니다. 3). 메시아는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란 말이 ‘구세주’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을까?
메시아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에는 강대국이었지만 그 후에는 쇠퇴의 길을 걷다가 마침내 기원전 587년 바빌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합니다. 그리고 왕족, 사제, 백성들이 바빌론 유배를 가게 됩니다. 약 50년 후 유배가 끝나자 이스라엘 백성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국가를 재건하지만 많은 어려움이 있었고 주변 강대국의 속박으로 겨우 명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주인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두면서 그분께서 언젠가는 구세주를 보내주시어 선택받은 자신들을 구원해 주리라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하면서 미래의 구원자를 상상하게 되었는데 어떤 이들은 1). 다윗과 같은 강력한 임금으로. 어떤 이들은 2). 사제와 같은 인물로 3). 위대한 예언자와 같은 인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임금, 사제, 예언자는 머리에 기름을 부어 임명되었고, 이런 공통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주실 미래의 구원자를 “기름부음 받은 사람, 곧 메시아”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유다인들은 장차 하느님이 보내주실 메시아를 1). 다윗이나 솔로몬처럼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강력하길 원했고, 2). 사제처럼 율법에 충실하며 3). 예언자들처럼 죄인을 단죄하는 인물로 상상을 했습니다. 그래서 1). 이 메시아가 압제세력인 로마인들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2). 원수를 철저히 응징하며 3). 율법을 어기는 죄인을 엄하게 벌주기를 고대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폭력이 아니라 비폭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키고 원수의 죽음이 아니라 회개를 원하시며 죄인에게는 처벌보다는 용서와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대하시는 방법은 지배가 아니라 봉사였습니다. 그분은 하느님의 진리(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요한17,17).를 줄기차게 선포하였고 그 진리의 이름으로 그 진리를 위해 당신의 목숨을 내 놓았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습니다. 유다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 칭호는 예수님의 사명을 올바로 표현하기에는 불충분하고 그래서 오해의 소지기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 구세주이시지만 권력을 휘두르는 군주적 메시아가 아니라 인간을 위해서 스스로 고난까지 감수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삶을 본받고 더 큰 희생과 사랑을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의 물음은 결국 너희에게 있어서 내가 어떤 존재냐? 고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구세주이십니다.. 나를 살려주시는 분이십니다.”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나는 당신의 무엇입니다.’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는 “나는 주님의 손에 들린 몽당연필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분 손에 들려있으니 연필을 사용하고 안 하고는 그분 뜻에 달려 있습니다. 혹 부러져도 그분께서 필요하다면 깎아 쓰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겨드리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내 뜻을 관철시키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뜻에 나를 맞추는 삶이 신앙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소크라테스나 석가모니, 공자와 같이 4대성현 중 한 분으로 생각하시는 것은 아닌지요?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잊고 훌륭한 분으로만 여기는 것은 아닌지요? 나를 살리시는 분, 나의 주인으로 확실하게 모실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합니다. 그분이 주인이시면 나는 분명 종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의 믿음고백에 이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예고’가 이어졌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고 배척을 받고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말씀은 제자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승리와 성공의 메시아관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이 다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급기야 베드로는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였습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였습니다.
성경에서 사탄이란? ‘진리를 왜곡하는 사람이며, 진리의 길을 가려는 이를 가지 못하게 막거나 방해하는 이’를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에 대해 무지하거나 말씀을 잘못 알아들어서 말씀과는 다른 삶을 살 때, 또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를 비웃거나 방해함으로써 말씀대로 살려는 의지를 잃게 될 때 사탄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방식대로가 아니라 나의 방식을 고집할 때, 하느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먼저 내세우고 행하게 될 때, 영적인 것보다 육적이 것에 더 관심을 두고 더 중요하게 생각할 때 사탄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사탄의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탄은 돈과 재물, 권력과 명예, 그리고 하느님을 이용한 자기 과시를 통해 백성을 휘어잡으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방패삼아 사탄의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승리와 성공의 메시아상을 고집하면서 수난을 거부하는 베드로의 모습을 사탄의 유혹과 동일하게 여기시고 단호하게 내치십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이 순간은 스승에게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유혹은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올 수 있습니다. 우리도 정신을 바짝 차리지 않으면 본이 아니게 사탄이 되고 맙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말과 십자가를 진다는 말은 같은 뜻을 되풀이 강조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는 말씀은 힘들게 고생하며 따라오라는 말씀이 아니라 순간마다 자신의 뜻을 비우면서 따라오라는 말씀입니다. 자기라는 울타리에 갇혀있지 말고 더 크고 위대한 그리스도께로 나오라는 말씀입니다.
자신을 버린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숭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필리3,7-9). 집자실지(執者失之) 라는 말 이 있습니다. 움켜잡는 자는 그것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움켜잡았기 때문에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명예도 그렇고 재물도 , 목숨도 그렇습니다. 잡으면 잃습니다. 잃기 전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세상에 소유하지 않은 물건을 도둑맞는 법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구세주라면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동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하느님의 일, 사람의 일>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예수님께서는 그 뒤에,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마르 8,29-31).”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라는 질문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또는 “너희는 왜 나를 따르느냐?” 라는 뜻입니다.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는 대답은, “저희는 스승님을 구세주로 믿고
있습니다.”, 또는 “저희는 스승님을 구세주로 믿기 때문에 따르고 있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중한’ 지시는,
바로 뒤에 있는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에 연결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구세주)이신 분”이라는 믿음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믿음과 합해져야 비로소 올바른 믿음이 됩니다.
(수난, 죽음, 부활에 대한 믿음 없이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고 말하는 것은
신앙고백이 아니라, 그냥 들어서 알고 있는 지식을 말하는 것이 될 뿐입니다.
지식은 믿음이 아닙니다.)
1) 당신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지시를, 당신의 부활 때까지
침묵을 지키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당신의 부활을 믿게 될 때까지는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할 자격이
없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의 수난 때에 제자들이 보인 행동은,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했고(마르 14,10-11),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체포될 때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달아났고(마르 14,50), 베드로 사도는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마르 14,66-71).
그런 상태로는 “나는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다.” 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할 자격 자체가 없습니다.)
2) 예수님의 지시를, 뒤에 나오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라는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하면,
예수님의 지시는, ‘자신을 버리고 온 삶을 다 바쳐서’ 예수님을 따르게 되기
전에는 “예수님은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것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은 믿음의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그 다음 단계는 온 마음을 다하여 믿는 것인데, 그것으로는 아직 부족합니다.
‘온 삶을 다 바쳐서’ 믿는 것이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사는 것”, 또는 “믿음과 삶이 일치되어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믿는다면 ‘삶’이 변화되어야 하고, 자기 인생을 전부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이 인생의 전부인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그러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꼭 붙들고
반박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며 꾸짖으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군중을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마르 8,32-35)”
“이 말씀을 명백히 하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수난과 부활 예고 말씀’은 비유나 상징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일을 그대로 예고하신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돌아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이라는 말은, 다른 제자들도 모두
베드로 사도와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알고 계셨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말린 일은 베드로 사도만 한 일이 아니라,
다른 사도들도 모두 그렇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신 것은,
사실은 사도들 모두를 꾸짖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사탄’이라고 부르신 것은,
그의 행동이 ‘사탄의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일’은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것”도
‘사탄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의 일’은 ‘사탄의 일’이 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선의로 그런 행동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사탄의 일’을 한 것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 뒤로 가라.” 라는 뜻이고,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 라는 뜻입니다.
<스승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의 뒤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
신앙인이며 제자인 우리의 본분입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인류 구원 사업입니다.
‘사람의 일’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길을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일을 ‘죄’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말린 것은, “그 길 밖에 없습니까?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지 않습니까?” 라고 자기 의견을 말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너무 힘든 고난과 시련을(십자가를)
만날 때가 많고, 그럴 때 “다른 길은 없을까? 꼭 이 길로 가야만 하는가?” 라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죄가 아니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일상생활의 ‘작은 일’을 하는 경우라면,
좀 더 쉽고 빠른 방법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길이 많다면, 쉬운 길을 놓아두고 일부러 어려운 길을 선택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은 사서 고생하는 생활이 아니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하나 밖에 없는 그 길을 걸어가는 생활입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해서 그 길을 걸어가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그 길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연중 제24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과 내가 어떤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되는 때에도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바로 오늘 복음의 베드로를 보면 그렇다.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비록 죽음의 그늘과 어두움을 거친다 해도 영광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능력이며 그 신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힘없고 지친 자들을 위해 영과 예언을 받으신 야훼의 종으로 나타난다(이사 50,4). 그에게 온순과 겸손과 순명을 주시고(이사 50,5; 참조: 필립 2,8), 모든 것을 아버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따르게 하셨다. 그리하여 모든 고통을 당하게 하신다. 때리고, 수염을 뽑으며 침 뱉음과 수치를 당한다(이사 50,6). 그러나 그는 주님 앞에 단 하나의 도움이 있음을 믿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종과 함께 계시다(참조: 사도 10,38).
복음: 마르 8,27-35: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기 나름대로 느낀 점일 것이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들의 생각을 물으신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던지시는 질문일 수 있다. 베드로가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29절) 답한다. 즉 하느님께 축성된 분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실 분으로 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정치적인 결정적 실현을 기대하고 있다(사도 1,6).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뜻으로 메시아를 알아듣지 않도록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어떤 착각도 하지 않게 하려고 첫 번째로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하신다(31-32절). 이것은 마르 9,31과 10,32-34에서 다시 한번 예고하신다.
여기서 제자들이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도 잘 알지 못하는 반응이 나타난다. 베드로의 모습이 그렇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메시아의 힘없는 무기력한 메시아를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에 죽는 메시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베드로의 모습은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추구하는 모습이다. 그리스도는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으로서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는 것인데 그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 사탄의 일이며, 원수의 일이고 고소하는 자들의 일이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33절) 호통을 치신다. 마치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 사막에서 사탄이 놀라운 메시아적 기적들을 행하도록 했던 것이나, 십자가 아래에서도 그 옆에 있던 이들이 세 번이나 십자가의 고통으로부터 내려오라고 했던 것처럼 베드로의 발언을 사탄의 일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책망하고 계시다(33절).
그리고 이어서 충실한 제자의 모습을 말씀하신다. 즉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끊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며, 자신의 십자가를 매일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분을 따라야 한다고 하신다. 자기 자신의 목숨을 즉 자기의 존재를 그분과 복음 때문에 잃어야 한다는 것이다(34-35절 참조). 그렇지 않으면 헛되이 망할 것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구원하게 되며, 단지 인간적인 의지는 은총이 함께 하지 않으면 확실한 죽음만이 있을 뿐임을 말씀하시고 계시다.
야고보 사도는 신앙이 있다고 하면서, 그 신앙이 요구하는 행위를 실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강하게 말하고 있다. 믿음만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에 응답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야고보 2,14). 만일 어떤 사람이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다(야고보 2,15-16). 진정 이 믿음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로 살아있지 않다면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17). “만일 믿음이 자비를 통해 실천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아무것도 가치가 없는 것이다”(갈라 5,6; 참조: 에페 6,25; 1테살 1,3).
믿음은 하느님의 거룩한 은총이다. 이 은총이 나에게 진정한 은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이 항상 현실과 일치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즉 믿음은 외적인 환경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는 영적인 행위와 태도를 통해서 가장 확실하게 입증된다. 우리 신앙인들도 복음에 충실하다면 형제애를 통하여 불의와 불평등으로 가득 찬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켜야 한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란 좋은 말만 늘어놓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믿음의 “행동”을 이루어나가야 한다. 믿음은 결코 자신의 이기주의 바람막이가 아니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편하지 못한 생활환경에서도 믿음을 실천적으로 실현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십자가 위에서 입증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베드로가 가이사리아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 고백한 것이나, 또는 궁핍한 형제들에게 위로의 말만 해주는 것과 같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위로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고통을 우리의 생활을 통해 때로는 육체적으로도 함께 짊어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신앙의 구체적인 실현을 살아가는 용기와 은총을 주님께 청하여야 하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선 우리의 운명이 명백히 드러납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마르 8,29)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십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이나 엘리야, 다른 예언자 중 하나라고 여겼다고 하지요. 제자들은 이 질문을 통해 그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각자의 마음속에 맺혀진 상을 직면하고 구체화하는 때에 이른 것입니다. 그들은 각자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 지식과 믿음과 사랑을 총동원해 고백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베드로가 그분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곧바로 사람의 아들이 겪어야 할 고난과 죽음을 예고하시지요. 이에 놀라고 실망한 베드로가 예수님을 반박했다가 사탄이라고 꾸중을 듣습니다. 예수님 신원에 대한 각자의 의식은 그분 소명에 대한 이해도와 직결되는데, 그 중심 키워드는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고통은 싫고, 예수님을 따르고 싶지만 가난은 지긋지긋하며, 예수님을 닮고 싶지만 작고 낮게 섬기는 일이 딱 질색이라면 혹시 제자들은(우리는) 예수님 아닌 어떤 허상을 만들어 섬기고 있는 건 아닌지 돌아봐야 합니다.
제1독서는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의 한 대목입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 50,7)
주님의 종은 세상이 퍼붓는 온갖 모욕과 수모를 회피하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거역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고역이나 그런 일을 당하는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일 수는 있지만 당하는 주님의 종 자신과, 그와 함께 견디어 내시는 주님께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 한 수치가 아닙니다. 주님은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일들을 치워주시지 않고, 주님의 종이 부끄러움과 움츠림 없이 견디어 낼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제2독서는 믿음과 실천에 대해 이야기하십니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야고 2,18)
신자라면 십자가의 신비를 믿습니다만, 대개는 각자가 감수해야 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서 두려움 내지 반감, 거부감까지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지요. 쉽고 만만하다면 십자가가 아니니까요. 십자가는 편하고 흥하고 승승장구하고 싶은 인간 본성을 반하기에 어렵고 무겁고 불편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껴안아야 하는 동반자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믿는 것"과 실제로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 "실천" 사이의 거리가 바로 그 사람과 주님 사이의 거리일 겁니다. 영광의 허상만 좇는 이는 삶의 실제적 고통을 마주하려 하지 않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자신을 구원하셨다고 믿는 이는 그 십자가까지 감사하게 됩니다. 그에게 주님이 누구이신지가 십자가의 실천으로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거친 인생길을 헤치고 나오면서 십자가가 버겁고 고통스러워 눈물 훔쳐보지 않은 이가 있을까요! 내적으로는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 때문에, 외적으로는 숨어있다 튀어나와 주저앉히고 무너뜨리고 해체시키는 복병 같은 어려움들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고 뒷걸음질도 치면서 우리는 여기까지 왔습니다. 십자가 때문에, 그리고 십자가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나는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지 않으리라."(복음 환호송)
그토록 징한 십자가지만, 이 고백이야말로 우리가 올려드려야 할 진실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그 십자가 때문에 주님을 만나고, 십자가 덕분에 사랑을 체득한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천상에서도 자랑할 것이란 오직 십자가뿐일 겁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물으십니다.
"나는 너에게 뭐니?"
"나는 너에게 어떤 존재니?"
묻고 또 물으시는 그분께 진심을 다해 응답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과 우리는 공동운명체, 운명공동체이니, 그분에게서 십자가를 빼버릴 수 없다면 우리에게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지요. 피할 수 없다면 즐기고 또 자랑하는 것이 우리 운명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김찬선신부-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야 한다."
연중 제24주일은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가 주제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해 이사야서는 하느님 말씀을 거역하지 않는 자,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수난을 피하거나 거부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수난을 각오하는 자,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수치를 당하지 않는 자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분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물리적인 귀를 닫지 않고 열어놓는
그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실천하는 것 곧 순종하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는 정면으로 거부하거나 수락하기 어려울 때 못 들은 척 하는데
그리스도는 귀를 활짝 열고 하느님 말씀과 뜻을 적극 수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뜻의 수용은 모욕과 수모와 고통의 수용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반감이 들고 반발이나 반박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꼭 이렇게 죽어야 하고 모욕당해야 하고
고통당해야 하는 우울한 거냐고. 즐겁고 유쾌할 수는 없냐고.
그렇습니다.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참행복을 위해서라면 죽음도 모욕도 고통도
수용할 수 있어야 하고 편식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제가 자주 주장하지요.
참행복은 무조건이어야 한다고, 돈이 있어도 행복, 없어도 행복,
웃어도 행복, 울어도 행복, 모욕을 받아도 행복, 칭찬을 들어도 행복해야지
돈과 웃음과 칭찬만 있어야 행복하고 가난과 슬픔과 모욕은 없어야 한다면
그것은 조건이 있는 행복이요 쉽게 무너지는 행복이니 참행복이 아니지요.
그뿐 아닙니다.
이 세상에서 칭찬과 즐거움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천상 지향적이지 않고
이 세상에서 받을 상을 다 받는 것이고 그래서 육적입니다.
프란치스코는 육의 영과 주님의 영의 이끌림 차이를 이렇게 얘기합니다.
"육의 영은 사람들에게 겉으로 드러나는 신앙심과 성덕을 원하고 열망하는데
이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습니다. 이와 반대로 주님의 영은 육이
혹독한 단련과 모욕을 당하기를 원하며, 멸시받고 수치당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항상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신성한.....사랑을 얻기를 갈망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주님의 영으로 수난을 각오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처럼 수치와 모욕을 줘도 수치와 모욕을 당하지 않습니다.
당하는 것은 원하지 않을 때 당하는 것이지
스스로 원하면 당하지 않고, 더 나아가 사랑으로 원하면 사랑을 받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인 사람인데 수난을 거부하는 사랑을 하면
오늘 베드로 사도처럼 사탄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는 스승 예수를 사랑하였지만
수난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음으로써 사탄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그리스도적인 사람과 사탄적인 사람 중에
나는 어떤 사람인지 돌아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