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Margaret K 2021. 9. 7. 06:46

2021년 9월 7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

(루가 6,12-19)

 

 Jesus departed to the mountain to pray,
and he spent the night in prayer to God.
When day came, he called his disciples to himself,
and from them he chose Twel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는 자주 혼자 기도하셨는데, 특히 중요한 일을 앞두시고는 밤을 새우며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워 기도하신 뒤 열두 제자를 뽑으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의 증인이 된 사람들이지만, 우리 눈에는 제자로서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고 보이지 않습니다. 겉보기에는 부족해 보이지만, 그들은 부족하기에 겸손하고, 죄를 용서받은 이들이기에 충실하고 거룩합니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느님 아버지와의 대화이며, 성령과 함께 머무르시는 시간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고 권고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통하여 주님 안에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시간이 나면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도를 위하여 시간을 내야 합니다. 또한 누군가를 위하여 기도해 주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러한 기도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 청하고, 주님을 찾고, 주님의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청하는 것을 주시고, 찾는 것을 얻게 하시며, 문을 두드리면 은총으로 당신을 열어 주십니다(마태 7,7-8 참조).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 5,16-18)라고 말합니다. 기도 안에서 주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며 믿음을 굳게 하는 이들에게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흘러넘칠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성인이 되어서도 남의 눈치만 보면서 힘들게 사는 자신이 너무 싫었던 형제님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프로이트의 책을 통해, 특히 유아기를 비롯한 과거가 현재 자아 형성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내용을 통해 어렸을 때의 기억이 떠올려졌습니다.


어머니에게 자주 맞은 기억이었습니다. 일주일에 두세 번을 맞으며 대성통곡하며 우는 아이의 모습이, 맞지 않기 위해 눈치 보는 아이의 모습이, 함부로 자기 생각을 말하지 못했던 아이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지금의 자기 모습이 어머니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를 찾아가 화를 냈습니다. 왜 나를 때렸냐고, 왜 나를 학대했냐고 따졌습니다.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지만,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아주 힘든 상태였습니다. 일과 양육을 도맡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행동을 그냥 놔둘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아들을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폭언을 들으니 너무나 가슴이 아팠습니다. 사실 과거의 기억은 종종 조작됩니다. 이 형제님처럼 사랑의 행동은 지워지고 폭력의 무자비함만 기억될 수도 있습니다.

종종 과거에 의해 나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지금의 내가 과거를 정의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모든 것이 틀렸기에 현재가 고통스러운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우리는 이 선택을 보면서 배신자 유다 이스카리옷은 왜 뽑았을까를 생각합니다. 배신할 것을 미리 알고서 뽑으신 것일까요? 아닐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데 필요한 제자들이었고, 그들을 뽑아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이 선택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산에 가셔서 밤을 새워 기도까지 하십니다.

이 과거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서 주님의 뜻에서 멀어진 유다 이스카리옷의 잘못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역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과거에 연연하는 삶이 아닌, 지금에 충실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잘못으로 지금에 문제가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아닌, 지금의 충실함으로 과거를 새롭게 정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을 잘못된 선택인 것처럼 만드는 것은 우리의 지금 모습 때문입니다. 주님의 선택이 최선이었음을 자신의 삶으로 증명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위대한 일을 위해서 대단한 도전이 필요하지 않다. 단지 순간순간의 작은 도전이 모여 위대한 일을 이루어 간다(모션 코치).

미래를 향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희망.

한 회사 사장님이 신입사원들을 모아 놓고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왜 현실에 안주하려고만 합니까? 애플의 스티브 잡스나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를 보십시오. 모두 자기 집 차고에서 시작해 세계적인 기업을 만들었습니다.”

사장님의 긴 훈화가 끝나고 잠깐 쉬는 시간에 한 신입사원이 동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차고라고? 우리 집에는 차고 없는데?”

이 말을 듣고 다른 동료는 “차고는 무슨, 차도 없는데…. 아 맞다. 집도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장님은 희망을 품으라며 과거의 이야기를 했지만, 현실은 과거를 아는 것만으로 희망을 품기 힘듭니다. 사실 희망은 과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또 남의 삶을 보는 것도 아닙니다. 미래를 향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이 희망이었습니다.

 <우리 관계가 바람 앞의 촛불과 같은 이유는?>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산에서 밤새 기도하시고 내려오셔서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밤새 아버지께서 교회의 열두 주춧돌로 누구를 원하시는지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면서도 당신 뜻대로 사도들을 정하시지 않고 아버지 뜻을 물으셨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아버지 때문에’ 만들어진 관계가 되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내가 제자들을 뽑으면 내 의지로 사랑해야 합니다. 하지만 내 의지는 한계가 있습니다.

반면 아버지가 뽑아주셨으면 아버지 때문에 그 사랑이 식지 않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그만큼 헤어지며 삽니다.

그 이유는 그 관계가 하느님이 맺어주신 것인지 밤새 기도할 수 있는 자세가 안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주관대로 관계를 맺고 자기 주관대로 관계를 정리합니다. 혹은 상황이 불안할 때 쉽게 상황 탓을 하며 헤어집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을 위하여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지 그 고리가 너무 약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관계의 고리를 ‘아버지의 뜻’에 두신 것입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는 1차 세계 대전과 볼셰비키 공산 혁명의 배경하에 쓰였습니다.

내용이 정치적이고 상징적이어서 혁명 후 핍박을 받기도 하였지만, 오늘은 그런 상징은 배제하고 줄거리만

간단히 살펴보겠습니다. 

 

유리 지바고는 부모를 일찍 여의고 부유한 친척 집안에서 키워집니다.

그리고 소꿉친구인 그 집안의 딸 토냐와 결혼을 약속합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 의대를 나와 의사이고 시인으로서 전도유망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온 토냐와 결혼하여 파티를 즐기는 삶을 살던 도중 운명의 여인 라라와 만나게 됩니다. 

 

라라는 어머니의 정부와 같았던 꼬마로프에게 추행을 당합니다.

그녀는 핍박받는 민중이 대변인으로 혁명에 가담이라도 하듯 자신을 그동안 괴롭혀 왔던 로마노프에게 총을 쏩니다.

다행히 큰 부상이 아니어서 지바고가 치료해주고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첫눈에 반하기는 했지만, 토냐와 약혼한 사이였기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짧은 만남은 끝이 납니다. 

 

라라도 애인이 있었는데 구소련을 지지하는 파샤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라라와 결혼하였지만, 꼬마로프에게 그런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에게 온 것을 알고는

군입대를 하여 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합니다.

 

라라는 자신의 남편을 찾기 위해 간호사로 전쟁에 참여하는데 이때 군의관으로 참전 중인 지바고와

운명적으로 다시 만나게 됩니다. 파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라라와 지바고는 사랑에 빠집니다.

라라는 평민 출신으로 귀족의 딸인 파샤가 줄 수 없는 무언가를 지바고에게 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둘은 헤어져 모스크바로 돌아옵니다.

볼셰비키 혁명으로 부유층인 지바고는 숙청 대상자 명단에 올라있었습니다. 그가 발표한 감성적인 시들 때문이었습니다.

지바고는 모스크바를 떠나 아내와 함께 우랄 지방의 오지 바르키노에 은둔합니다.

그곳에서 가난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인간 도서관에서 책을 찾으러 간 지바고는 또 운명처럼 그곳에서 사서로 일하는 라라를 만납니다.

그 넓은 러시아에서, 그것도 시골 은둔지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라라의 집에서 둘은 또다시 만납니다. 

 

하지만 아내가 임신하자 그의 생각은 바뀝니다. 프랑스로 가족과 함께 망명하려고 결심하고 헤어지자는 말을 하러

라라의 집으로 향합니다. 그런데 의사가 필요했던 빨치산에게 납치되어 강제로 근무하며

오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타샤는 지바고가 자신을 떠난 줄 알고 아이를 데리고 프랑스로 망명합니다.

가까스로 탈출하여 바르키노로 돌아온 지바고는 유일하게 라라를 만나게 됩니다.

라라는 지바고가 떠난 뒤에도 계속 편지를 쓰며 지바고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두 연인은 다시 만나 또 행복한 삶을 삽니다. 

 

그러던 중 꼬마로프가 찾아옵니다. 예전에 라라가 총을 쏜 인물입니다. 그는 라라를 잊지 못하고 거짓말을 합니다.

사실 파샤는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지금 라라도 위험한 상태라는 것이었습니다.

지바고는 어쩔 수 없이 라라의 안전을 위해 그녀를 원수와 같은 꼬마로프스키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얼마 뒤 파샤가 라라를 찾아왔고 그녀가 꼬마로프와 떠나버린 것을 알고는 자살합니다. 

 

지바고는 공산당 간부가 된 이복형의 도움으로 다시 모스크바로 돌아와 마리나라는 여자를 만나 아이도 낳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고생을 너무 한 탓인지 라라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쫓아가다가 죽고 맙니다. 

 

오랜 시간 뒤 유리 지바고의 이복형은 우연히 수력발전소에서 근무하는 한 젊은 여성이

자기 이복동생 지바고의 딸임을 알아봅니다.

이것이 장군과 그의 조카인 타냐의 대화입니다. 장군이 묻습니다.

 

“어떻게 아버지와 헤어지게 됐느냐?” 타냐가 주저하며 울먹거리다가 겨우 대답합니다.

“사실은 불길 속에서 아버지가 내 손을 놔 버렸어요.” 장군은 잠깐 숨을 고른 후에 대답합니다.

“네가 아버지라고 생각했던 꼬마로프스키는 너의 친아버지가 아니다. 너의 친아버지는 닥터 지바고다.

진짜 아버지라면 불길 속에서도 자녀의 손을 놓지 않는 법이다. 아버지란 존재란 그런 것이다.

언제 어떤 상황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손을 놓지 않는 분이 아버지다.”

 

예수님께서 가리옷 유다의 손을 끝까지 잡고 계셨던 이유는 당신이 선택한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맺어주신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설에 나오는 모든 인물은 하나같이 상황이 자신의 사랑을 이어준다고 믿었습니다.

꼬마로프스키는 그 상황에 거짓말까지 사용하며 라라를 차지합니다.

닥터 지바고는 운명 같은 만남이 하늘의 뜻처럼 생각했지만 꼬마로프의 거짓말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 때문에 프랑스로 떠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을 더는 찾지 않습니다.

 

라라의 남편 파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랑보다 자신이 지닌 이념에 충실했습니다.

토냐도 남편 유리 지바고가 자신을 떠나버렸다고 생각하고 남편을 떠나버립니다. 

 

정말 인간 중심적인 사랑은 인간의 욕망에 너무 쉽게 흔들리고 그런 욕망 안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아이들입니다.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살게 되고 또 자신들도 그런 욕망에 끌린 사랑을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관계를 위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밤새워 기도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게 쉽게 만나고 쉽게 떠나고 아이들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성장합니다.

결혼하기 전에 밤새워 성체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의지가 생깁니다. 

 

따라서 더 사랑하기 위해서 내 없는 의지를 짜낼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누구 때문에’ 사랑하는지 생각하고 그 누구를 하느님으로 두어야 합니다.

부모 때문에 사랑하는 형제들은 아무래도 부모가 다 돌아가시면 그 인연이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바로 손을 놓아버립니다.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살아계신 한,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 한 그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만남이 참 하느님 뜻인지 여쭤보기 위해 밤새워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끝나지 않는 참사랑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우연도 계속 이루어지면 하나의 법칙이 될 수 있습니다저는 그런 우연을 몇 번 경험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더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휴가를 간 신부님을 대신해서 장지에 가서 기도를 하였습니다유족들도 고마워했고봉사자들과 식사하면서 평화신문 이야기를 하였습니다봉사자들은 기꺼이 신문구독을 하겠다고 하였습니다돌아오니 독자 분께서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부금을 가져오셨습니다휴가를 다녀온 신부님들을 위해서 저녁을 사드렸습니다다음날입니다정확히 저녁식사 비용만큼의 예물을 주신 분이 있었습니다후배신부님들과의 여행 경비를 내 드렸습니다그날 저녁에 한 형제님이 그만큼의 비용을 축하카드와 함께 주셨습니다걱정하고조바심을 낼 때는 그런 우연은 생기지 않았습니다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남에게 주어라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너희가 남에게 되어 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영화 반지의 제왕은 3부작으로 제작되었습니다. ‘반지 원정대두 개의 탑왕의 귀환입니다웅장한 규모의 무대와 박진감 넘치는 전투신비한 이야기가 보는 이를 즐겁게 하였습니다반지의 제왕을 신앙의 눈으로 보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예수님의 공생활을 묵상하게 합니다두 개의 깃발을 묵상하게 합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묵상하게 합니다영신수련의 끝에 사랑을 얻기 위한 명상을 전해 줍니다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것을 묵상하게 합니다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는말씀과 표징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이유는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른 이유는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이유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예수님의 죽음은 나의 죄를 위한 희생이셨습니다죽음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오셔서 성령을 주셨습니다평화를 주셨습니다이제 제자들은 절망에서 희망으로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부활하였습니다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12명의 제자를 선발하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3가지 사명을 주십니다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것마귀를 쫓아내는 것병자를 고쳐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주시는 사명은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된 우리에게도 똑 같이 주어지는 사명입니다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개의 탑두 개의 깃발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가르침을 받은 대로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 조심하십시오그런 것은 사람들의 전통과 이 세상의 정령들을 따르는 것이지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연을 필연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매일 들에 나가서 씨앗을 심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10년 20년 시간이 지나면서 황폐해졌던 들에 개울이 생기고울창한 숲에는 새들이 놀았습니다신앙은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을 그럴 수도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베들레헴에서나자렛에서 구세주가 나올 리 없다고 하였지만 그곳에서 구세주가 나셨고자라셨습니다세상의 기준으로 주는 것은 분명 손해입니다행복할리 없습니다그러나 신앙의 기준으로 주는 것은 분명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 바칠 때, 온 삶과 정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지요?

 -양승국신부-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의 파격적인 모습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매료되었습니다.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크게 환호하고 박수를 쳤습니다. 많은 청년들이 그분의 적극적인 추종자로 따라나섰는데, 당시 12 사도단뿐만 아니라 72제자단도 존재했습니다. 아마도 더 많은 숫자의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따랐습니다. 

 

산으로 올라가셔서 밤새워 기도하신 예수님께서는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불러 모으신 다음, 그들 가운에 12사도를 뽑으셨습니다. 초대 교회 때 이루어진 일종의 주교 서품식이 막 끝난 것입니다. 영광스럽게 간택된 열두 사도, 그리고 수많은 제자들을 앞세운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는 장면이 참으로 감동적입니다. 평지로 내려서시니 수많은 인파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구름처럼 몰려온 수많은 사람들 앞에 서신 예수님께서 이윽고 복음을 선포하십니다. 이어서 은혜로운 치유의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불치병에 시달리던 사람들, 영혼의 질병, 마음의 질병, 정신적 병고를 앓던 이들이 예수님을 통해 그 자리에서 즉각적인 치유의 은총을 입었습니다. 사람들은 잠시나마 하느님 나라의 실체를 목격했습니다. 

 

이 모든 배경에는 밤을 꼬박 샌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가 있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너무나 간절하고 절박해서 밤새워 기도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지금 너무 힘든 분들, 꼭 한번 시도해보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놀라운 은총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밤샘 기도 앞에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최선책이 아니더라도 차선책을 알려주실 것입니다. 그도 아니라면 지금 처한 힘겨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실 것입니다. 적어도 고통과 십자가를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과 이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잔잔한 마음의 평화를 선물로 주실 것입니다. 

 

기도의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냥 기도하지 않으시고 밤샘 기도까지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기도에는 어느 정도 열정과 마음이 담겨있는지요? 우리는 기도 바칠 때, 온 삶과 정신,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는지요?

 품이 커서 스승이다

 -반영억신부-

 

저는 가끔 저의 신상에 대해 생각합니다. 신부가 아니었다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죄도 허물도 많고, 뛰어난 능력도 없고, 잘난 것이 없는데… 그럼에도 주님께서 도구로 쓰고 있다고 생각하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감사하고 새 힘을 얻게 됩니다. 그분의 자비가 크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웁니다. 나를 고집하지 않고 주님께 의탁할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며 기도하시고(루가6,12)나서 제자들을 선택하셨는데, 그중에는 야고보와 요한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천둥의 아들이라고 부를 정도로 격정적인 성품을 지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총에 의해 온화해질 것입니다. 겁이 많은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입니다. 성격이 우울하고 회의적인 토마도 있습니다. 세리 마태오와 열혈당원 시몬이 섞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제강점기의 독립군과 친일파로 비유할 수 있는 사이입니다. 그리고 후에 배반자가 된 유다 이스카리옷도 있었습니다. 사도들중에도 배교자가 있었습니다. 뽑힌 이들 조차도 합당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중요한 일이기에 밤을 새워 기도하시고 뽑은 결과입니다.

 

저 같으면 그들은 쏙 빼놓았을 텐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당신의 대리자로 지정하셨습니다. 정말이지 예수님의 품이 아니라면 도저히 그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기준과는 전혀 다르십니다. 남들보다 많이 알아서 스승이 아니라 품이 커서 스승입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특별히 기도하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꼴 보기 싫은 사람들을 옆에 두고 속 끓일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밥맛 떨어지고 꿈에 나타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많은 허물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 자격입니다. 그리고 부족하지만 응답한다면 주님의 능력이 함께하는 것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자비가 없다면 어떻게 감히 저 같은 죄인이 주님의 일을 하겠습니까? 주님의 크신 자비가 저를 지탱하게 합니다. 오늘날 우리 사제들도 다양성을 가지고 공동체를 이룹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사제들을 일치시키는 끈입니다. 주님께서는 악 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분입니다.

 

예수님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는 모두를 껴안을 수 있는 큰 품과 온유함이 있었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능력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언제나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것만 말하고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요한 8,28-29). 거기에서 기적의 힘이 나왔습니다. 기적의 힘은 사람의 유능이 아니라 철저한 무능, 온전한 의탁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것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광고를 하지 않아도 온갖 살아있는 것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 생명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여든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매 순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기꺼이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응답은 곧 능력이라는 것을 생각하며 나의 부족함을 무릎 쓰고 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면 주님께서 몸소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10,1).고 말씀하십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는 당신이 필요로 할 때 우리에게도 언제든지 당신의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도구 삼아 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그분의 부르심에 기쁘게 응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기도해야 한다는 것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님과 군중>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고,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도 듣고 질병도

고치려고 온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더러운 영들에게 시달리는 이들도 낫게

되었다.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루카 6,17-19).”

 

여기서 “군중은 모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군중은 예수님에게서 사람들을

고치는 ‘치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믿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손을 댔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에게 손을 댄 사람들뿐만 아니라, 당신에게 온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마태 4,24).

(‘애를 썼다.’ 라는 말 때문에,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썼지만 손을 대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으로, 또 손을 대지 못해서 병을 못 고친 사람이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말은 “손을 대려고 애를 썼다.” 라는

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고쳐 주셨다.” 라는 말입니다.

병을 고치기 위해서 꼭 예수님을 만져야만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져서’ 병을 고쳤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고쳐 주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표현만 놓고 보면, 사도들이 아니라 ‘아픈 사람들’이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아픈 사람들’을 고쳐 주실 때,

사도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멀리 떨어진 곳에서 구경만 한 것은 아닐 것이고, ‘예수님과 아픈 사람들’의

주변에서 예수님을 도와드리거나, 사람들을 도와주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아픈 사람들이 좀 더 쉽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했을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연결해 주는 일도 사도들의 임무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사도들이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가로막다가

예수님에게 혼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들을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시고 언짢아하시며

제자들에게 이르셨다. ‘어린이들이 나에게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어린이들과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마르 10,13-14)”

여기서 ‘쓰다듬어 달라고 하였다.’ 라는 말은,

‘안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설교를 하시는 중이었다면,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설교를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이고, 예수님께서 쉬시는 중이었다면

예수님의 휴식을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어떻든 제자들이 사람들을 꾸짖은 것은

결과적으로 어린이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막은 일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언짢아하시며’를 원문대로 직역하면 ‘화를 내시며’입니다.

어린이든지 어른이든지 간에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오는 것을 막는 것은

‘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막지 말고 그냥 놓아두어라.” 라고 표현되어 있긴 하지만,

뜻을 생각하면, 소극적으로 그냥 놓아두기만 하면 안 되고,

적극적으로 예수님에게로 인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선교활동입니다.)

여기서 ‘어린이’를 소외계층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소외계층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은 특별히 더 열심히 해야 하는 일입니다.

<승천 전에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활동하실 때에는,

사도들은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을 했지만,

예수님 승천 후에는 예수님께서 하시던 일을 이어받아서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도 사실상 사람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들도, 또 모든 신앙인들이 하는 일들도 같습니다.

신앙인은 누군가의 인도를 받아서 예수님을 만난 사람이고,

예수님을 만나서 함께 사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또 누군가를 예수님에게 인도하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신앙인이 예수님과 사람들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기는커녕

가로막는 장벽이 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큰 죄’가 됩니다.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것은 사탄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있거나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런 장벽과 같은 일을 하는 장면들이 있습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루카 5,17-19).”

이 상황은,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이 조금도 비켜주지 않아서

중풍 병자가 예수님에게 접근도 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중풍 병자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 덕분에 병을 고친 그 병자는 자기가

누워 있던 평상을 들고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서 집으로 돌아갑니다(루카 5,25).

처음에는 없었던 통로가 열린 것인데,

사람들은 왜 처음부터 통로를 만들어 주지 않았을까?

아주 조금만 옆으로 비켜 앉으면 될 일이었는데......

 

어떤 눈먼 이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의 일이다. 어떤 눈먼 이가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군중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사람들이 그에게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 하고 알려 주자,

그가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 앞서 가던 이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루카 18,35-39).”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고 알려 주면서 예수님과 그 눈먼 이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으면서

그 눈먼 이와 예수님 사이에서 장벽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통로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모르면 장벽이 될 것입니다.

그 장벽은 예수님과 다른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이 예수님에게로 가는 것도 막는 장벽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예수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고, 그러면 자기 자신도 장벽에 갇혀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복음: 루카 6,12-19: 열두 제자를 뽑으시다.

 -조욱현신부-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12절) 열두 제자를 뽑아 사도로 이름 지어 주시기 위해서 외딴곳으로 가시어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당신을 위해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 모두를 위해 기도하신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가 본받아야 할 본보기이다.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날이 새자 제자들을 부르시어 그들 가운데에서 열둘을 뽑으셨다.”(13절) 주님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믿음의 씨를 뿌리는 사람들로 임명하셨다. 그분은 지혜롭다고 하는 사람들, 부유하고 지체 높은 사람들을 뽑지 않으시고 어부들(마태 4,18 참조)과 세리들(마태 10,3 참조)을 뽑으셨다. 하느님을 믿는 것이 재물과 권력과 명예 때문에 신앙을 갖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셨다. 사도들은 논쟁 실력이 아니라, 진리로 세상을 이겨야 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께서 항상 사람들과 사귀시며 함께 일하시고 하시는 일에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는 뜻이다. 마르 3,14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택하신 이유 중의 하나가 ‘당신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셨다. 즉 제자의 신분은 당신의 일을 함께 생각하고 염려하고 기쁨을 나누는 친구의 신분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렇게 죄 많고 부족한 사람을 부르시고 택하시고 친구로서 대하시는 것을 볼 때 참으로 큰 은총이다.

 

이미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주심으로써, 우리 인간이 모두 하느님과 같이 될 수 있도록 하셨다. 하느님의 아들이 당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인간의 신분으로 당신을 낮추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아들과 동등한 자격에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이것이 이미 하느님의 크신 은총인데, 그것이 제자들을 선택하시는 것으로 증명이 된 셈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임명하신 다음,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시고, 당신께 가까이 오는 환자들을 모두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 권능으로 당신이 하느님이심을 알게 하셨다. 그분은 영광을 지니신 ‘말씀’이셨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주었기 때문이다.”(19절) 하고 있다.

 

예수께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란 예수님에 대해서 언제나 더욱더 배우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뵐 때까지 언제나 신앙의 진리를 들으려고 하는 배우고자 하는 제자의 자세를 항상 가져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여 실행하여야 한다. 주님의 제자로서의 삶이란 바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는 것이다. 항상 하느님을 믿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제자로서의 신앙인이 되기를 힘쓰며 노력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닮을 수 있고,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되고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딸이 될 것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선택하신 이유이다. 항상 그분의 참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 12)

-한상우신부-


기도로
아침을
맞이한다.

기도는
새날처럼
하느님의
것이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이다.

기도로
다시 돌아가는
사랑의
시간이다.

기도가
사랑의
첫마음이다.

기도가
아름다운 것은
기도 자체의
거짓없는
진실함이다.

어려운
상황에서의
최상의 방법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이다.

기도의 자세가
삶을 대하는
삶의 참된
자세이다.

기도의 의미가
삶의 의미로
이어진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었다.

기도는 삶의
모든 시작과
모든
마무리로
드러난다.

예수님의
기도 안에
예수님의
간절한
삶이 있다.

예수님의 삶은
기도의 삶이셨다.

간절한 기도는
우리의 삶을
다시 깨운다.

하느님과의
일치로
우리를
깨운다.

기도로
사도(使徒)들을
뽑으신다.

기도로
닮아가는
우리들
관계이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기도로 더욱
깊어진다.

기도는
내적교감이며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사랑은
진실한 기도로
간절하게
이어진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 하는
기도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영적 삶의 리듬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나가시어, 밤을 새우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루카 6,12)
복음의 대목은 크게 세 부분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기도, 열두 사도의 부르심, 백성과의 만남이지요. 장소적 배경은 산에서 평지로 이어집니다.

하느님 현존 장소인 "산"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깊이 머물 수 있는 "밤"에,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십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기도하셨다"고 표현하지요. 이로써 우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단 한 문장으로 이루어진 설명이지만, 이 행위는 후에 이어지는 모든 활동들의 도화선이고 근간이며 핵심입니다.

하느님과 깊은 일치에서 오는 바로 그 힘으로 예수님께서 협력자들을 부르십니다. 열두 사도는 예수님께서 앞으로 펼쳐나가실 하느님 나라 운동의 주춧돌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열두 명은 신앙과 사랑의 엘리트들이라기보다 부족하고 나약하며 악하기까지 한 온갖 인간 군상의 집약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과를 이미 알고 복음을 읽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기대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모두를 끌어안고 나아가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루카 6,17)
산과 평지, 이 두 장소는 하강과 확장이라는 변화를 동시에 보여 줍니다. 높으신 하느님의 현존 장소인 "높은 산"에서 하느님과 일치를 나누고, "낮은 평지"로 내려와 세상 한가운데 계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동선이 펼쳐지고 있지요. 그야말로 장터에 계시는 하느님, 삶의 질곡의 현장에서 움직이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제 당신 백성과의 만남과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목자로서의 활동이 이어집니다. 병들고 마귀에 시달리며 가르침과 말씀에 목마른 이들이 예수님을 에워쌉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손을 대려고" 애를 쓰고 예수님은 그들을 돌보아 주시려고 애를 쓰십니다.

밤에 산에서 하느님과 만나 충만히 채우신 사랑의 기운이 세상의 장터에서 한량없이 터져나옵니다. "그분에게서 힘이 나와 모든 사람을 고쳐" 주지요. 이 힘은 기술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신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가르쳐 줍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였으니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가르침을 받은 대로,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자신을 굳건히 세우고 믿음 안에 튼튼히 자리를 잡으십시오. 그리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콜로 2,6-7)
사도는 먼저 예수님 안에 머무르길 권고합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내려 그 사랑의 양분으로 충만해져야 그분께서 쓰실 사랑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당장 먼저 해야할 것처럼 시급해 보이는 눈앞의 현안들이 유혹해도,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우선입니다. 먼저 그 샘의 원천에 닿아야 샘물을 길어올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십시오."
그 다음은 감사입니다. 복음 선포와 치유와 구마 등의 모든 활동은 이 감사의 표현입니다. 제아무리 많은 걸 누리는 사람이라도 불평불만과 험담과 자기 자랑에 중독된 이들은 감사를 모릅니다. 감사하지 않는 영혼에게서는 하느님과의 관계성이 감지되지 않지요. 감사는 하느님  안에 머물러 그분과 통교하는 사람의 습성이니까요. 

영적 삶은 하느님과 함께 고요와 역동, 정과 동의 리듬 안에서 출렁이며 나아가는 파도타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 안에 깊이 머무르고, 그 사랑의 힘으로 형제를 만나, 받은 사랑과 은총에 대한 감사를 표현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와 더 깊어진 사랑을 고백하고, 또다시 나가... 이렇게 반복하다 보면 어느새 모든 것이 사랑으로 통합되어 굳이 기도와 활동을 나눌 이유조차 없는 경지까지 이르게 되겠지요. 예수님처럼 말입니다. 

고요히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을 차지하고, 그 사랑으로 도움이 필요한 형제를 보살피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어디에 있든 무엇을 하든 주님과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헐떡이는 나는 아닌지.>

 -김찬선신부-

 

오늘 콜로새서는 주님 안에서 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님 안에서 사는 삶'으로 주제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주님 안에서 살라고 하는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주님 안에서 살지 않아도 되겠지만 주님으로 받아들인 한

주님 안에서 살아야 된다는 것인데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요.

 

말로는 주님이라고 하면서 사는 것은 주님과 무관하게 살거나

프란치스코가 그래서 추궁받았듯이

다른 것들을 주인으로 섬기며 살면 안 되겠지요.

그렇다면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바오로 사도는 우선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살라고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살기는 하는데 늘 불평불만이거나 원망하며 살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그렇게 살면 주님께 불충인 것이 아니라 자기가 불행한 것이고,

그러므로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야 하는 것은 주님이 아니라 날 위해서지요.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는 것은 그릇으로 치면 물이 차고 넘치는 것이고,

이것은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 대만족인 것이고

그러기에 이렇게 사는 것이 참행복이요, 요즘말로 하면 찐-행복이며,

이런 사람이라야 참으로 찐-사람이지요.

 

사실 넘치게 행복한 사람에게서만 감사가 나오는 법이고,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어서 "여러분은 그분 안에서

충만하게 되었습니다."라고 얘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음으로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그분 안에서 육체를 벗어 버림으로써,

사람 손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받아 사는 거라는 뜻인데

그리스도의 할례란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묻히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과 함께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할례란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바오로 사도는 또한 얘기합니다.

 

극단적으로 얘기하여 사람의 손으로 이루어진 할례는 포경수술에 불과하고,

이런 포경수술은 건강이나 청결의 의미 외에는 다른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례의 의미도 머리에 물을 뿌리거나 물속에 잠기는

그런 외적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아나는 것이지요.

 

이것은 물고기로 치면 물 밖에서 살지 않고 물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 밖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특히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 연명하는 것이고

생기와 활기 있게 사는 것이 아니라 꾸역꾸역 사는 것이겠지요?

 

물 밖의 고기처럼 헐떡이며 사는 나는 아닌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간 화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께서는 기도하시려고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하느님께 기도하셨다. 날이 밝자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그중에서 열둘을 뽑아 사도로 삼으셨다.(루가 6,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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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하기 전에 밤새워 성체 앞에서 하느님의 뜻을 물을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의지가 생깁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면 바로 손을 놓아버립니다.

하느님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살아계신 한, 그리고 자신이 하느님을 믿는 한 그 관계를 쉽게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만남이 참 하느님 뜻인지 여쭤보기 위해 밤새워 기도한 적이 있습니까?

어쩌면 이것이 끝나지 않는 참사랑의 시작일 수 있습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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