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6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2021년 9월 6일 연중 제23주간 월요일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악한 일을 하라고 하였느냐?
사람을 살리라고 하였느냐?
죽이라고 하였느냐?
(루가 6,6-11)
“I ask you,
is it lawful to do good on the sabbath
rather than to do evil,
to save life rather than to destroy 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는 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여야 하는지 복음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배웁니다. 많은 이가 예수님께 찾아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 하였습니다. 그 수가 오천 명이 넘는 때도 있었고, 길을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몰려들 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아이가 봉헌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기꺼이 받으시고 당신을 찾아온 오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십니다(요한 6,1-15 참조). 또 예수님께서는 나무 위에 올라가 당신을 바라보는 세관장 자캐오를 찾아내시고, 그와 그의 집안에 구원을 선사하셨습니다. 이에 자캐오는 가난한 이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여, 그들을 현실의 어려움에서 구해 줍니다(루카 19,1-10 참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실 수 있으셨을까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지금 내 주변의 힘들고 어려운 이들을 쉽게 지나쳐 버리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당신을 고발할 구실을 찾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날카로운 시선 속에서도, 오그라든 손을 가진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그 병자는 오그라든 손으로 말미암아 오그라든 마음까지 치유받았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삶을 실천할 때, 우리는 진리로 나아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음”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성을 쏟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여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금 이 자리에서 실천할 때, 우리는 그 안에서 그리스도의 은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지금 이 시대를 ‘불편함의 시대’라고 말하는 어떤 학자의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인터넷을 보면서 많은 정보를 획득하지만, 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데 익숙합니다. 그 이유가 스스로 그 내용을 불편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욱 더 불편할수록 더 잘 아는 사람이고 더욱더 남을 잘 비판할수록(깎아내릴수록) 똑똑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착각입니다.
남을 비판하는(부정적으로) 사람은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이 없을 때가 많습니다. 집단의 목소리에 이끌려서 아는 것 같은 기분이 들 뿐이지요.
세상은 더 나은 곳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좋은 곳이 되어야 하며, 더 나은 곳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변화가 외부에서만 이루어질까요? 나 자신의 변화에서부터 세상의 변화는 시작됩니다. 부정적인 변화를 통해서는 긍정적인 변화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나는 맞고 상대는 틀렸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부정적인 비판은 변화의 가능성 자체를 없애 버립니다. 따라서 이제 어떤 경우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변화하는 우리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부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보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 자체를 부정적인 생각으로 바라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큰 사랑을 당연히 볼 수 없었습니다. 그저 못된 사람이고, 그저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 있는 예수님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는지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고쳐 준다면 안식일 법을 어기는 것이라서 절대로 하느님 편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안식일 법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사랑이 안식일 법보다 먼저였습니다. 당시에는 병을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었지요. 따라서 병의 치유는 죄가 깨끗하게 사라지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하느님은 죄를 깨끗하게 사라지게 하는 사랑 그 자체임을 보여주시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치유는 안식일에 대한 바리사이들의 부정적이고 악의적인 해석 모두를 꾸짖고 있습니다. 이 꾸짖음은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우리를 향해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사랑을 기억하면서, 사랑의 삶을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이 사랑이라는 긍정적인 행동을 통해 우리는 가장 최고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입니다.


도파민이라는 호르몬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행복 호르몬이라고도 불리며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기능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주어지는 보상 호르몬이 바로 도파민입니다. 이 도파민이 부족하면 우울증, 하지 불안증, 파킨슨병을 앓게 됩니다.
그렇다면 도파민 생성을 위한 노력만 하면 될까요? 도파민이 과다하면 중독문제가 일어납니다. 도파민은 자극적인 활동에서 더 많이 분비되는데, 이로 인해 더 자극적인 행동을 찾는다는 것이지요. 도박, 마약, 쇼핑 중독 등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도파민 과다로 집중력 저하, 과잉행동 등이 나옵니다.
도파민도 슬로우푸드 같은 도파민과 패스트푸드 같은 도파민이 있습니다. 슬로우푸드 같은 도파민은 행동의 결과로 얻어지는 만족감이 늦게 오는 지연 보상이란 특징이 있습니다. ‘고생 끝에 즐거운 일이 있다’라는 의미에서 고진감래형 도파민이라고도 불립니다. 산 정상에 오르기, 오랜 시간의 연습 등을 통해 나오는 것으로 좋은 도파민입니다.
패스트푸드형 도파민은 자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바로 공급받는 도파민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마약입니다.
어떤 도파민을 수용해야 할까요? 슬로우푸드형 도파민을 수용해야 몸과 마음이 건강해질 수 있습니다.

율법이 있는데 "예수님이라면?" 은 왜 또 필요한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율법주의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안식일 법만을 지키려는 이들이 안식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대결합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이를 안식일에 회당 안에서 고쳐주십니다. 안식일 법으로는 일해서는 안 되는데, 환자를 치유하는 것도 일이기 때문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는 그것이 죄로 보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렇게 물으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들 머리 안에는 “안식일에 일해서는 안 된다.”라는 율법만이 깊이 박혀 있습니다. 그래서 이 간단한 물음에도 대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일’은 무조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빠진 오류는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율법이라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오히려 자아만 더 커지게 할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내 뜻과 반대되는 주님의 뜻입니다.
의사 김범석 씨는 이런 환자도 접해보았습니다. 폐암 말기의 환자였습니다. 아주 오래전에 이혼했고 자식도 없었습니다. 동거인이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부인이 아니었고 환자의 병세가 깊어지자 그의 곁을 떠났습니다. 한마디로 보호자가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한동안 혼자 병원에 다니며 항암치료를 받았지만, 암이 진행되며 자신을 돌볼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화장실도 혼자 가기 어려워 간병인을 두어야 했고 급기야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호스피스 상담을 하며 남동생이 한 명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4~5년 전쯤 동생이 사업을 한다며 2억을 꿔갔는데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갚지 못했고 그 뒤로 서먹해져 연락도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것이 그렇게 분하고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호스피스 팀의 노력으로 우여곡절 끝에 동생에게 연락이 닿았고 형의 소식을 모르던 동생은 어느 날 형을 찾아왔습니다. 그 환자를 찾아온 사람은 동생이 처음이었습니다. 놀란 표정으로 문 앞에 서서 형님을 불렀습니다.
“형님….”
의사는 형제간의 상봉을 위해 뒤로 약간 물러섰습니다. 동생은 형에게 다가갔습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피골이 상접한 형의 몰골을 보며 동생은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만 붉혔습니다. 형제는 서로 그렇게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2억 원이라는 돈과 원망과 세월이 할퀴고 간 두 사람 사이의 틈은 생각보다 깊어 보였습니다.
한참 뒤, 형이 동생에게 할 말이 있는지 가까이 오라고 힘겨운 손짓을 했습니다. 숨이 차서 목소리를 크게 낼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동생이 형의 얼굴 쪽으로 허리를 숙였습니다. 그러자 형은 동생에게 있는 힘을 다해 말했습니다.
“너… 내 돈… 2억… 갚아라….”
병실에서 두 형제의 화해를 기대하고 있던 모든 사람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습니다. 훈훈해지던 병실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그는 다시 천천히 말했습니다.
“내 돈… 2억… 갚으라고….”
동생의 눈가에 맺혔던 눈물은 이미 말라버렸고 당황스러워하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이후로 동생은 더는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환자도 동생에 대해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간병인을 보내주었고 그 비용은 본인이 부담했습니다.
며칠 후 환자는 아무도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쓸쓸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돈 갚으라는 말이 환자의 마지막 유언이 되었습니다.
[출처: 『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 김범석, 흐름출판]
이 이야기를 들으니 임언기 신부님의 이야기도 떠올랐습니다. 냉담하던 어떤 간암 말기 암 환자에게 마지막 고해성사를 권했지만, 그는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는 신부님 등 뒤에서 그는 이렇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누구에게 죄가 없는 것일까요? 자기 자신에게 없는 것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충실했을 것입니다. 누구보다 율법을 잘 지켰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율법을 지켰을까요? 자기 자신을 위해 지킨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은 ‘율법’일까요, ‘뜻’일까요? 율법은 나의 자아를 죽여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율법을 자기를 키우고 교만하게 만드는 무기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그런 부류입니다. 물론 위 예화의 환자도 그렇습니다. 빌린 돈을 갚아야 하는 것은 율법입니다. 자신은 피해자일 뿐 죄가 없습니다. 자신이 살아있으니 빌린 돈을 갚으라 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의 뜻’도 그럴까요?
‘지금 주님의 뜻’이란 ‘예수님이라면 지금 어떤 마음이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셨을까?’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뜻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만약 “오늘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이렇게 기도를 단 한 번만 할 수 있었다면 율법주의자가 아닌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을 것입니다.
자아 숭배교에 빠지지 않기 위해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인 ‘주님의 뜻’을 매 순간 찾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뜻’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에, ‘예수님 뜻’을 따른다는 말은 나 자신을 버리고 ‘그리스도가 된다.’라는 뜻입니다.
어느 교회의 예배 도중 찬양대가 마지막 찬송을 부르려는 순간 한 남루한 복장의 사내가 예배당에 들어섰습니다. 사내는 곧바로 통로를 걸어 강단 앞에 선 후 떨리는 목소리를 말했습니다.
“저는 몇 달 전에는 활자를 뽑아 조판하는 인쇄공이었습니다. 새로운 인쇄기가 도입되자 직장을 잃고 며칠 동안 거리를 헤맸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고 배웠겠지요. 그러나 저를 위로해준 사람은 목사님 한 분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방금 찬송 ‘주와 함께 가려 하네’를 부르셨지요. 과연 그 의무가 무엇인가요?”
사내는 말을 마치자 곧 실신했고 며칠 후 목사의 집에서 이런 말을 하며 운명했습니다.
“예수님이셨어도 당신처럼 하셨을 것입니다.”
이 사건은 교회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 곳의 맥스웰 목사의 설교도 이전과는 달랐습니다. 미사여구도 예화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말했습니다.
“앞으로 1년 동안 우리는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묻지 않고는 어떠한 결정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합시다. 우리도 한번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쓰이게 된 책이 찰스 셸던의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In His Step)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윤리 주의자가 됩니다. 하느님은 윤리 주의자를 구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은 당신 자녀를 찾고 계십니다. 윤리는 사람의 본성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본성은 유일하게 ‘뜻’으로만 변화됩니다. 뜻을 바꾸면 본성이 바뀝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유일한 참 자녀인 그리스도의 뜻으로 나의 뜻을 바꾸지 않는 이상 자아 숭배교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뜻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이 단순한 질문을 할 때만 인성의 문을 닫고 신성의 문을 여는 것입니다.

-조재형신부-
영화 ‘남한산성’을 보았습니다. 남한산성은 2개의 주장이 충돌하는 영화입니다. 하나는 명분이고 다른 하나는 실리입니다. 명분은 오랫동안 사대의 관계를 맺었던 명나라에 대한 외교입니다. 명나라는 조선의 개국과 비슷한 시기에 원나라를 물리치고 개국하였습니다. 명나라는 임진왜란에 군인을 파병하였습니다. 오랜 시간 조선은 명나라를 황제 국으로 삼았습니다. 조선의 왕은 명나라 황제의 인준을 받아야 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명나라를 공격하라는 고려의 명령을 거부하고 위화도 회군을 통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실리는 새롭게 시작된 청나라와의 관계입니다. 명분을 중시했던 대신들은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여겼습니다. 그런 청나라와 외교를 맺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청나라와 외교를 맺는 것은 명나라에 대한 배신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리를 중시했던 대신들은 당시의 정치상황을 판단하였습니다. 이제 곧 명나라는 청나라에 의해서 망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러니 새롭게 아시아의 강국으로 등장하는 청나라와 친분을 맺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청나라는 당시 조선에 호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명분과 실리에서 조선은 명분을 선택하였고, 그렇게 병자호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도 명분과 실리 사이에서 고민한 적이 있습니다.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본당이 속한 산을 9미터 정도 깎아야 했습니다. 산을 깎으면서 성당에는 작은 마당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았던 마당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교우들은 마당을 조금 더 넓히자고 하였습니다. 적은 비용으로 마당을 더 넓히면 그 넓어진 마당에서 본당의 행사를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작은 마당으로 만족하자는 교우들도 있었고, 비용을 감수하더라도 더 큰 마당으로 꾸미자는 교우들도 있었습니다. 저는 동창신부들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동창신부들은 모두 비용이 더 들더라도 큰 마당을 만들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본당신부가 책임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넓어진 마당은 공동체의 친교를 위한 공간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창신부들의 조언을 듣고 마당을 넓히도록 결정하였습니다. 마당에 꽃을 심으니 아름다운 정원이 되었습니다. 11년이 지났지만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후임 신부님들은 그곳에 정자를 만들었고, 여름에는 간이 수영장을 만들어서 아이들이 여름을 시원하게 지낼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명분도, 실리도 하나의 기준이 있으면 됩니다. 그것은 공동체의 안전과 평화를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또 다른 명분과 실리의 충돌을 보았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명분입니다. 이유는 하느님께서 안식일에는 쉬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번번이 안식일에 일을 하셨습니다. 한번은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에게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시면서 들을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의 손을 펴 주셨습니다. 그것도 안식일에 그런 일을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안식일의 규정을 어기는 도발이었습니다. 그들의 속마음을 아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안식일의 주인이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명분과 실리에서 예수님의 기준은 확고하였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시련과 고통까지 기꺼이 감수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기존의 관습과 전통을 과감하게 바꾸셨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 오늘 문득 생각합니다. 나는 명분이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더 큰 영광보다는 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닌지, 나는 실리라는 이유로 하느님의 더 큰 영광보다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닌지요.

고통이 커질수록 위축되지 말고, 더 고개를 똑바로 들고, 마음도 더 올곧게 활짝 펴야하겠습니다!
-양승국신부-
때로 행복하고 달콤한 우리네 인생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다양한 고통과 십자가가 끊이지 않고 다가옵니다. 우리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이나 어쩔 수 없는 인간적 한계로 인해 겪는 고통들,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 인해 파생되는 필연적으로 감내해야할 고통들, 주님과 교회를 위해 일하다가 겪게 되는 고통들, 병고와 노화,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으로 인해 겪는 고통들...
하루하루 다양한 고통 속에 파묻혀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바오로 사도는, 고통 앞에서 성숙한 신앙인으로서 어떻게 고통을 바라보고, 수용하고, 대처할 것인지에 대한 멋진 답을 제시해주고 계십니다.
“형제 여러분,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해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새서 1장 24절)
고통이 다가올 때 마다 한사코 회피하고 외면하려고 기를 쓰는 제게 바오로 사도의 생생한 체험에서 나온 권고가 참으로 저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제부터라도 고통이 다가올 때 즉시 주님을 먼저 생각해야겠습니다.
내가 고통을 당할 때 반드시 주님께서 함께 고통을 겪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고통을 견딜 때 마다 나는 그리스도의 환난에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있다고 굳게 믿어야겠습니다. 이런 작업이야말로 진정으로 고통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일 것입니다.
고통이나 십자가의 무게가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질 때면 더 노력해야 할 측면이 있습니다. 고통이 커질수록 위축되지 말고 더 고개를 똑바로 들어야하겠습니다. 어깨도 더 활짝 펴야겠습니다. 마음도 더 올곧게 활짝 펴야하겠습니다. 오그라든 마음, 배배 꼬인 마음도 활짝 펴야하겠습니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시어 가르치셨는데, 그 자리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①손이 오그라든 환자가 있었습니다. ② 마음이 오그라든 환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육체적인 질병, 하느님 보시기에 그나마 나은 것입니다. 더 나쁜 것은 영혼의 질병, 마음이 오그라든 것입니다. 마음이 오그라들었다는 것은 한 인간 안에 영혼은 사라지고 육체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오그라든 사람이란 하느님이나 신앙, 이웃 사랑이나 봉사는 완전 뒷전인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하루하루 세상의 쾌락에 흠뻑 빠져,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미래나 죽음, 영생이나 구원은 안중에 없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굽은 마음을 퍼라
-반영억신부-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합니다. 맑고 푸른 하늘은 곡식을 여물게 하는 더없이 좋은 선물입니다. 수확의 때가 되면 수고와 땀의 결실을 맛보게 되는 기쁨이 함께합니다. 우리의 삶의 여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선을 다하고 때를 기다립니다. 약속된 하느님의 나라를 기억하며 지금 여기서부터 수고와 땀의 결실을 기뻐합니다. 기쁨은 희망하는 만큼 확인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시며 당신의 능력을 통해서 오그라든 손을 이전처럼 성하게 하셨습니다(루가6,10). 손을 뻗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무엇인가 주는 행위이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주는 것을 받는 행위이기도 합니다. 손을 뻗어 서로의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손을 편다는 것은 본인뿐 아니라 모두가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 기쁨이라면 더 많이 누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생각하는 안식일의 본질적 의미보다는 규정과 규율에만 얽매여 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 그 사람들입니다(루가6,7).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들어서 예수님의 활동을 방해하고 마침내는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죽일 수 있을 것인지 의논하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이 오그라든 자신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손뿐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시는 분입니다.
자신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골을 부리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손이 오그라든 것은 마음이 오그라든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을 점검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날마다 놀림감이 되어 조롱거리가 되어도(예레15,10) 뼛속에 가두어둔 주 하느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예레20,9) 아버지의 뜻을 따라, 가실 길을 가셨습니다.
혹시라도 사촌이 땅을 사서 배가 아픈 것은 아닌지? 내가 만들어 놓은 하느님 상 때문에 다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아닌지?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을 넣어주며 새 기운을 불어넣어 주시길 청합니다.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주시길 희망합니다(에제36,26). 그리하여 안식일은 물리적으로 쉬는 것보다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더불어 향유하는 것이라는 깨우침을 얻길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씀하십니다. “십계명은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어떤 일에서든 트집을 잡으려고 합니다. 그는 무엇인가 꼬인 사람입니다. 얽힌 것을 풀면 좋으련만 바른 것도 그릇 것으로 보니 그 사람은 불행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울지 않았다”(루카7,32).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어야 하는 것이 삶이고. 움직여야 할 때 움직이지 않고 멈추어야 할 때 멈추지 않는 것이 죽음이다"(이현주). 그러므로 우리는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판단과 사람의 판단에 있어서 어느 판단을 따라야 할까요? 당연히 하느님의 판단입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 우선시 되는 것은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사람입니다.
사사건건 부정적인 태도를 보이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은 부정적인 상황 속에서도 긍정을 찾아내는 삶입니다. 긍정의 주 하느님을 생각하십시오! 행동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잘 가꾸어야 합니다. 무엇이든 주님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굳건히 하여 참 신앙인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불평으로 세상을 더럽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프란치스코). 손을 뻗어 주님의 손을 꼭 잡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송영진신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안식일 논쟁’들을 보면,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관한 바리사이들의 모습은
거의 ‘맹목적인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 ‘집착’을 대하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을 보면,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만 그치거나,
우리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적인 모습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치면서,
‘나’를 반성하지 않고 그냥 지나갈 때가 많습니다.
(혹시 “나는 바리사이가 아니다. 나는 율법주의자가 아니다.
나에게는 그런 집착이 없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지......)
바리사이들의 모습이 ‘어리석은 집착’이라면,
그들을 비판하는 것으로만 그치는 오늘날의 우리의 모습은 ‘교만’이 아닐까?
(‘집착’이나 ‘교만’이나 어리석은 것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옛날 이천 여 년 전의 일에서 교훈을 얻는 것도 필요한 일이지만,
성경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의 나’를 반성하고, 잘못된 점을 고쳐서 바로잡는 것이
더 필요하고, 더 중요한 일입니다.
(어쩌면 ‘나 자신’이 어리석은 바리사이일지도 모릅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로만 생각하면서 받아들이고 있는 것들이
정말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율법주의일 수도 있습니다.
또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해왔던 일들이
사실은 나 자신도 모르는 나의 집착일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꾸짖으신 것은
그들을 어리석은 집착에서 해방시켜 주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만일에 나 자신도 그런 율법주의와 집착에 사로잡혀 있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그런 나를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 그가 일어나 서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 그러고 나서 그들을 모두 둘러보시고는 그 사람에게,
‘손을 뻗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그렇게 하자 그 손이 다시 성하여졌다.
그들은 골이 잔뜩 나서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서로 의논하였다(루카 6,6-11).”
여기서 “합당하냐?” 라는 질문은, “하느님의 뜻에 합당하냐?”,
즉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과 같은 말이 마르코복음 12장에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 12,33).”
이 말은 어떤 율법학자가 한 말인데,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실천이 곧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이 없으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율법학자를 칭찬하셨습니다(마르 12,34).
율법학자의 말에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동등하게 표현되어 있는 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느님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서 실천되고,
‘이웃 사랑’ 실천은 ‘하느님 사랑’으로 완성됩니다.
두 사랑은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제대로, 올바르게 섬기려면
‘이웃 사랑’ 실천을 제대로 해야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강도당해서 초주검이 되어 있는 사람을 보았으면서도 그냥 지나가 버린
사제와 레위인의 경우를(루카 10,31-32)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두 사람이 그냥 지나가버린 이유가 비유에는 안 나오는데,
부상자를 도와주다가 피가 묻으면 부정을 타게 되고, 부정을 타게 되면
성전 제사에 참례할 수 없게 되고,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냥 지나가 버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하느님을 좀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이웃 사랑’ 실천을 포기한 것이 됩니다.
과연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하기를 바라실까?)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그 두 사람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실행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따라서 그들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일을, 즉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것이
아버지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마태 7,21).>
예수님의 질문에는, ‘좋은 일’(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과 같고, ‘목숨을 구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죽이는 일’을 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 나오는 사제와 레위인은 분명히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도 하지 않았고, 죽이는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고 그냥 지나가버린 것은,
그 사람을 죽인 것과 같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 수 있는데, 예수님의 기준으로는 명백하게 ‘악’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큰 죄’입니다.
신앙인은 신앙생활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서
이웃의 사정에 관심 갖지 않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서 기도만 열심히 한다면,
그 기도는 기도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안식일에’ 라는 말이 들어 있어서,
‘안식일에 관한 가르침’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선행과 사랑을 실천하는 일과
목숨을 구하는 일은 요일과 상관없이 날마다 해야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가르침은 넓은 뜻으로,
‘종교생활과 신앙생활 전반’에 관한 가르침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묻겠다.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무엇을 하는 생활이냐?
무엇을 위한 생활이냐? 너 혼자서만 구원받으면 그만인 생활이냐?
남을 살리는 일을 하는 생활이냐? 남을 죽이는 생활이냐?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종교생활과 신앙생활은 어떤 생활이겠느냐?”

복음: 루카 6,6-11: 손이 오그라든 병자의 치유
-조욱현신부-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행위는 율법에는 분명히 금지된 사항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판단은 달랐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과 규칙에 매여 있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이 현재보다 더 자유롭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해주시는데 그 판단의 기준이 있었다. 예수님은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그들 앞에 두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신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남을 해치는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 죽이는 것이 합당하냐?”(9절)
이 말씀은 사람을 제도라는 법에 묶어놓으려고 하는 그들을 공박하시는 말씀이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행하기보다는 인간적인 규례를 중요시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명심해야 할 것은 관례와 규칙보다 사람의 생명을 돕는 일과 사람에게 선행을 베푸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기적을 행하신 것은 그들을 자비와 동정으로 이끌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질문은 저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참으로 지혜로운 질문이다. 만일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치 않고, 생명을 구하는 일이 법에 금지되어 있다고 대답한다면, 그들은 스스로 율법을 비난하는 자들이 되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가 안식일에 한 사람의 온몸을 건강하게 만들어준 것을 가지고 나에게 화를 내느냐?”(요한 7,23) 그분은 아담이 금지된 열매를 따기 위해 내밀었던 손(창세 3,6)을 선행의 건강한 힘으로 회복시켜주셨다. 범죄를 저질러 마비된 손이 선행으로 치유되었다. 우리도 주님께 우리의 오그라든 손을 뻗게 해 달라고 청하여야 한다.
“손을 뻗어라.”(10절) 손을 뻗는다는 것은 탐욕과 불경으로 오그라든 손을 편다는 것이고, 이제는 자주 손을 뻗어야 한다. 구걸하는 가난한 사람에게 손을 뻗고, 이웃을 돕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불의하게 모욕당하는 사람이 해를 입지 않도록 손을 뻗어야 한다.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십사고 하느님께 손을 뻗어야 한다(이사 1,15.17 참조). 손을 내밀어 뻗으면 치유를 받는다. 손을 뻗는다는 것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실천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삶의 모든 표준을 예수님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서로의 인격 존중과 자유와 선행에 기초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제도와 규칙에 앞서 이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위하는 일인가, 괴롭히는 일인가를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나올 것이며 그 사랑이 이웃에게로 전해진다.
내가 율법주의자가 될 때, 나 자신만을 규례와 규정에 매어놓는 것이 아니라, 바로 다른 사람들까지 불필요하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을 것이고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듯이 지금 오늘을 사는 나도 그분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그분이 현존하시는 것을 방해하고 죽이는 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잘못을 우리는 범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 즉 하느님의 모습임을 항상 기억하며 이웃을 대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손을 뻗어라."(루카 6, 10)
-한상우신부-
가혹한
이시간
속에서도
손을 뻗으면
우리의 손을
잡아주실
주님이 계신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우리들
만남이다.
살면서
삶의 교훈을
얻게된다.
오그라든
마음을
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복음은
오그라든
삶에서
손을 뻗는
삶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손을 뻗는
삶이란
자신을
사랑하는
용기있는 삶을
이제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
손을 뻗는
내면의 힘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오그라든
마음에서
시작된다.
자기감정과
요구사항을
표현할 때
오그라든
관계는
회복될 수 있다.
손을 뻗어
자신을 돌보고
만남을
돌보아야 할
우리들 시간이다.
손을 뻗으니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우리가 있다.
손을 뻗는
기쁨이 삶의
기쁨이다.
영혼이
다시
살아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신비이심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에 서라.' 하고 이르셨다."(루카 6,8)
안식일 회당 안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그를 미끼로 예수님을 걸려넘어지게 하려는 이들이 섞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당신의 영으로 이 상황 전체를 꿰뚫어 보고 계십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을 하는 것이 합당하냐? ...목숨을 구하는 것이 합당하냐?"(루카 6,9)
예수님 질문 안에는 안식일의 본질, 즉 사람에게 쉼을 허락하신 하느님의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본위적으로 완고해진 인간들이 그 마음 읽기를 중단하고 메뉴얼화, 도식화해 버린 문자적 규범 안에 숨겨진 진짜 정신입니다.
안식일에 경제 행위나 노동 등 무언가를 하지 말라는 이유는 그것을 하지 않는 대신 해야 할 좋은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찾는 일이고, 그분 마음을 헤아려 함께 움직이는 것이겠지요. 그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좋은 일"이고 "목숨을 구하는 것"입니다.
"손을 뻗어라."(루카 6,10)
예수님은 도움이 필요한 이를 가운데로 불러 세우신 뒤 손을 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오직 말씀으로만 치유를 일으키십니다. 그분의 말씀과, 참으로 곤혹스럽고 난감하면서도 예수님 말씀에 따라 움직인 환자의 용기가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은 어떤 행동도 하지 않으셨지요. 그저 말씀을 하셨을 뿐입니다. 그러니 율법 학자나 바리사이들은 눈에 띄는 불법 치료 행위를 포착하지 못했습니다. 안식일 법에 회당에서 말을 하지 말라는 조항은 없으니까요.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못 잡은 그들은 예수님께 "골이 잔뜩 나서" 모의를 하게 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할까 의논했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신 사실을 그들이 인정했기 때문일 겁니다. 놀랍고도 경외로운 신비를 눈앞에서 체험한 것이지요. 어떤 물리적 의료행위 없이 앓는 이를 회복시킬 수 있는 분은 하느님뿐이시니까요. 하지만 완고하게 오그라든 마음은 신비 앞에서도 눈을 멀게 만듭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신비이심을 고백합니다.
"그 말씀은 과거의 모든 시대와 세대에 감추어져 있던 신비입니다. 그런데 그 신비가 이제는 하느님의 성도들에게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 그 신비는 여러분 가운데에 계신 그리스도이시고, 그리스도는 영광의 희망이십니다."(콜로 1,26-27)
하느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을 열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 표징을 요구하고 문자의 잣대를 들이대는 이들로서는 알 길 없는 하느님의 신비, 사랑과 겸손과 자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그 신비를 깨달을 수 있는 열쇠는 믿음이지요.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여러분과 그들이 마음에 용기를 얻고 사랑으로 결속되어, 풍부하고 온전한 깨달음을 모두 얻고 하느님의 신비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갖추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물이 숨겨져 있습니다."(콜로 1,2-3)
사도는 자신이 "교회의 일꾼"으로서 헌신하고 노력하는 목적을 분명히 밝힙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느님의 신비 안으로 성큼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으시고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그분의 마음으로 들어가 그분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과 함께 사랑이 되도록 돕는 것. 이것이 말씀을 선포하는 모든 이들의 지향점입니다.
"손을 뻗어라."
오늘 우리에게 다가오신 말씀께서 우리 존재의 오그라들고 접힌 부분, 취약하고 부끄러운 부분을 힘껏 내뻗으라고 이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그 신비에 온 존재를 맡겨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은 그래서 신비이시니, 그저 믿는 이만이 그 신비를 은혜로이 입게 될 것입니다.

<내가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수난?>
-김찬선신부-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이 있다는 말씀,
자기가 대신 채우겠다는 말씀은 이해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고난에 정말 부족함이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있어서 우리가
구원받지 못하기라도 한다는 뜻입니까?
우리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고난에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고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남은 고난은 어떤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그리스도에게는 남은 것이 없지만
바오로 사도에게 남은 고난은 있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하는 얘기지만 누가 아플 때 저도 아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아파하지도, 대신 아파하지도 않으면서 생각은 그리하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아파하거나 대신 아프지 않은 것이 미안합니다.
사랑이 그리 크지 않은 저도 이런 부채감이나 미안함이 있는데
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교회의 아픔, 공동체의 아픔, 이웃의 아픔에 대한 부채감이 컸을 것이고,
이 고난에 자기가 어떤 식으로든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뿐이라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채우려는 것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그리스도를 생각지 않고 인간적인 사랑만 하는 사람도
저처럼 이 정도의 사랑은 가지고 있기 때문이지요.
바오로 사도의 생각 안에서 그리스도는 한 번의 수난으로 당신의 수난은
끝났다고, 당신이 하실 것은 이제 더 이상 없다고 하실 분이 아니지요.
어머니의 사랑만 생각해봐도 알 수 있지요.
어머니의 사랑은 출산할 때 한 번 겪는 고통으로 그치지 않고,
눈을 감는다고 그치지 않으며 자녀들이 고통을 겪는 한 고통은 계속되지요.
어머니에게 자식으로 인한 고통이 멈추면 사랑도 멈추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인간 고통의 역사가 끝나지 않는 한
끝나지 않고 그래서 계속될 것인데 그 계속되는 그리스도의 수난이
바오로가 채워야 할 남은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계속되는 수난과
그리스도의 계속되는 수난이 바로
교회의 일꾼인 바오로 사도의 남은 수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남겨진 그리스도의 수난,그래서
내가 채워야 할 그리스도의 남은 수난은 무엇인지 무겁게 성찰하며
교회의 고통과 이웃의 고통을 돌아보게 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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