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Margaret K 2021. 9. 2. 06:45

2021년 9월 2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못 잡았습니다.

그러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니 그물을 치겠습니다.”

(루가 5,1-11)

 

“Master, we have worked hard all night

and have caught nothing,
but at your command I will lower the net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군중이 예수님께 몰려듭니다. 그분께서 들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에 목말라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십니다. 그렇게 하여 많은 물고기를 잡은 시몬 베드로는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라고 두려움에 휩싸여 자신도 모르는 말을 내뱉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베드로뿐 아니라 그의 동생과 동료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모두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우리는 평소에 얼마나 예수님을 그리워합니까? 얼마나 보고 싶어 합니까?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신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우리도 곧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와 같이 자신도 모르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더러운 영이 들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불신을 버리고 주님께 도움을 청하며(마르 9,24 참조), 신랑을 맞으러 나간 슬기로운 다섯 처녀처럼 애덕을 통하여 등잔에 기름을 준비하고(마태 25,4 참조),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많은 민족들의 믿음의 아버지가 된 아브라함처럼(로마 4,18 참조) 어떠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믿음을 바탕으로 한 희망을 주님께 두어야 합니다.
믿음, 희망, 사랑은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우리가 준비해야 할 자세이며, 신자들이 살아가는 ‘덕’입니다. 언젠가 주님을 만났을 때 베드로 사도처럼 두려워하지 말고 이렇게 말합시다. “주님, 이 순간을 위하여 제 삶의 등불을 밝히고 주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 제 기도만 들어주시면 성지에 큰 봉헌을 하겠습니다.”


갑곶성지를 처음 개발을 할 때,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저에게 어떤 분이 와서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많이 안 좋았습니다. 자신이 커다란 봉헌을 해야지만 성지가 개발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각은 하느님을 멸시하는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능력 부족으로 성지개발을 직접 못 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뜻이라면 불가능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봉헌을 통해서만 성지개발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초창기에 경제적으로 너무나 힘들어서 이분께서 봉헌을 해주셨으면 하는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의 기도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봉헌은 없었고 또 그 뒤로 뵐 수도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자신의 의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 사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느님의 일은 하느님 뜻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인데도 말이지요. 어쩌면 스스로 하느님 영역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기에, 자신이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겸손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듯이, 이 땅을 사는 우리 역시 겸손한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하느님 앞에 겸손의 모습으로 엎드려서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합니다.

마귀들이 그랬듯이,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임을 알아봅니다. 그래서 죄인의 몸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있음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주님을 알아본다는 것은 두려워하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많은 성인·성녀들은 주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감히 머리를 들어 올릴 수 없었습니다. 그에 반해 마귀들은 어떠했습니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루카 4,41)라고 소리만 지릅니다.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래서 소리를 질러서는 안 되는 대상을 향해 감히 소리를 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않는 마귀를 향해서는 함구령을 내리시지만, 두려워하며 겸손의 모습을 갖춘 베드로를 향해서는 사람을 낚는 큰 사명을 내려주셨음을 기억해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있을까요? 혹시 하느님을 내 밑에 두고서 명령을 내리는 하인 취급을 하는 것이 아닐까요? 두려워하며 겸손한 모습을 갖춘 사람만이 하느님의 특별한 사명을 받을 수 있습니다.
도전에 성공하는 비결은 단 하나, 결단코 포기하지 않는 일이다(디어도어 로빈).

새로운 삶으로….

코로나 사태가 생기기 전, 강의가 참 많았습니다. 외부로 나가서 하는 강의도 있고, 성지에서 하는 강의도 있었습니다. 또 신학교, 방송국까지 눈코 뜰 새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강의하면서 하느님께서 제게 주신 탈렌트를 더 키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몇 년 전, 평소 존경하는 분에게서 들었던 말이 기억납니다.

“나이 50이 넘으면 강의하는 것 아냐.”

이 말을 들었을 때가 딱 50세였습니다. 더 이상 강의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그래도 내가 잘하는 것인데….’라는 생각과 함께 서운한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하다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는 것도 없는데, 마치 많은 것을 알고 깨달은 듯 강의를 했었구나. 세상에 어렵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강의한답시고 내 공부만 하고 있었구나.’

그 뒤 신학교와 방송국 강의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로 외부와 성지에서의 강의도 저절로 멈춰진 것입니다. 역시 새로운 삶을 살라는 주님의 메시지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자기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설교자의 포인트: 거기가 정말 물 반, 고기 반인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첫 제자들을 부르시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그물을 씻는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라 설교를 하시고 다시 그물을 쳐볼 것을 권하십니다.

    

    베드로는 그물까지 다 씻었고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자존심상 그렇게는 못 하고 자기주장을 펼쳐야 당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배에서 예수님께서 설교하시는 내용을 들어서인지 그는 순종해봅니다. 그러자 놀랄 만큼 많은 물고기가 잡혀 깜짝 놀랍니다.

    

    그물을 칠 때는 그저 한 번 속아본다는 마음으로 친 것이 분명합니다. 그만큼 예수님의 설교가 설득력 있었다는 뜻도 됩니다. 모든 설교자가 지향해야 하는 방향은 ‘일단 한 번’ 해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확신하지 못하는 일을 해보도록 설득할 수 있을까요?

부모가 “난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너는 한 번 읽어봐!”라고 하면 아이가 “훌륭한 가르침입니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라고 할까요?

    내가 해보고 확신이 생긴 것만 설득력을 가집니다. 설득하는 사람의 기본은 본인이 먼저 설득당했어야 합니다.

    

    저는 한동안 물을 적게 먹는 것이 좋다는 것에 설득당한 적이 있습니다. 토끼는 풀을 먹으며 그 안에서 수분을 충분히 흡수한다고 합니다. 오히려 물을 마시면 병에 걸려 죽는다는 것입니다.

    아기는 몸 안에 90%의 수분이 들어있어서 병균에 매우 취약하다고 합니다. 어른은 70%이지만 죽기 직전에는 50%까지 수분이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그러면 같은 용적 안에 백혈구와 같은 면역 세포들이 더 많이 활동할 수 있어서 모든 병균을 다 잡아먹는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럽 인구의 1/3을 죽인 페스트가 창궐했을 때, 그냥 관에 넣고 묻은 사람들이 죽고 나서 관속에서 다시 깨어나 관을 긁다 죽은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묘지를 옮길 때 관속에 많은 시체가 손톱이 빠지고 피가 묻어 있는 것을 보고 ‘드라큘라’로 여겨 심장에 말뚝을 박는 일까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도 채소를 통해 수분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어서 굳이 소화액도 묽게 만드는 물을 마실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도 신학생 때 유학할 때 4년 동안 거의 물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그랬더니 체중도 줄고 감기와 같은 것도 단 한 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제가 사제서품을 받았을 때 살 때문에 무릎이 좋지 않은 한 은퇴한 의사 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몸이 아프다기에 건식식사를 제안해 드렸습니다.

    물을 마시지 말아야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자신 있게 말씀드렸고, 그분은 사흘 동안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아 탈수증으로 구급차에 실려 갔습니다.

    후배 의사들은 도대체 어떤 놈이 물을 마시지 말라고 했느냐고 추궁했지만, 그분은 함구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물을 적게 마신 덕분에 나중에는 통풍이 걸리게 되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물을 많이 마셔야 좋다고 확신하지만, 그때는 나의 확신이 의사 선생님까지도 전염시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먼저 확신하면 많은 사람을 확신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확신이 물을 마시지 않는 게 좋다는 식이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낚시하는 사람이라면 물고기가 많은 곳을 압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전하는 이라면 하느님을 만나게 할 수 있는 포인트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아일랜드에 영어를 배우러 갔을 때 고마우신 분들의 초대로 한 가정에서 두 달 동안 머문 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저를 당신들 지인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는데 그분은 낚시에 도사셨습니다.

    바닷가에서 낚싯줄을 던지기만 하면 바로바로 커다란 돔들이 걸려 올라왔습니다. 그곳은 전복과 굴, 해초들이 많아서 밀물 때 돔들이 몰려든다는 것입니다. 그냥 던지면 올라오는 포인트였던 것입니다.

    그것들을 잡아서 바로 바위 위에서 회를 쳐서 양주를 섞은 맥주와 함께 먹었는데, 그 맛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냥 우러러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이런 포인트를 아시는 설교자셨습니다. 설교는 하나의 ‘도움의 은총’입니다. 도움의 은총은 생명의 은총을 지향합니다.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만남이 생명의 은총입니다.

    예수님은 설교로 베드로를 설득하고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기적을 통해 하느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물고기가 많이 잡히는 그 포인트를 아셨기 때문에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바꾸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은 사람들을 어떤 포인트로 이끌어야 할까요?

그 포인트는 반드시 물 반, 고기 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고 또 다른 복음 전파자가 됩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추천하는 것은 ‘기도-단식-자선’입니다. ‘마귀-육신-세속’을 이기기 위해 주님께서 추천하는 방식입니다.

    자아를 벗어날수록 주님과의 만남이 가까워지니 설교자는 일단 한 번 믿어보고 기도-자선-단식을 실천해보도록 유도하는 일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자선에 대해서는 ‘십일조’를, 절제에 대해서는 ‘단식’을, 그리고 기도에 대해서는 ‘성체조배’를 강조합니다. 왜냐하면,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외도한다는 자매들에게 성체조배를 하루 한 시간씩 하라고 했더니 남편이 돌아오던가 자신이 남편을 용서할 수 있게 되는 등의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사자들이 더 큰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단식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먼저 간헐적 단식으로 살을 빼니 주위의 많은 분이 따라 하고 좋은 결과를 얻었습니다. 무엇보다 정신이 맑아지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반만 먹으면 두 배로 오래 산다는 책도 있습니다.

    

    십일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저는 신학생 때부터 십일조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흘려보냈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부족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십일조는 모든 것이 주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의 시작입니다.

    

    제 유튜브에 ‘신 소화 데레사’란 분이 자신의 체험을 공유한 것이 있어서 함께 나눕니다.

    “신부님 말씀처럼 십일조를 봉헌하니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 주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것 같고, 가진 것을 다 팔아 땅속에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사고 있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영적 서적구매나 성경공부, 성지후원 등을 할 때도 그런 것 같고요. ^^)

    

    열등감을 채우려고 아이들 학원, 예쁜 옷, 더 큰 집, 좋은 차, 맛집 인증샷, 여행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땐 십일조를 내가 굳이 내야 하나, 내가 부자도 아닌데 하는 무분별한 상태였고 그땐 시기 질투로 늘 불안했고 화도 났고 성당에 가도 부담스러웠었습니다.

    

    그런데 십일조를 봉헌하고부터는 주님께 받은 은혜가 많아 십일조를 낼 수 있는 게 감사하고 건강한 것도 감사하고 아이들이 공부 못하면 어떠냐 건강한 것만도 감사하다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덤으로 아이들도 하느님께서 지혜롭게 잘 자라게 해주실 거란 믿음까지 키워주셨습니다. 제가 이쁜 옷을 하나 사 입어도 십일조를 봉헌하고 나서 사 입으면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말씀으로 주님을 만나게 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말씀으로 할 수 있는 한계는 바로 순종의 문 앞까지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 문을 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입니다. 손해 봐야 얼마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의 말씀이 옳은지 시험해 보도록 부추겨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도-자선-단식에 대해 설교하는 이부터 확신을 지녀야 합니다. 나를 설득하지 못한 것으로는 누구도 설득할 수 없습니다.

    

    저희 고모는 불교를 믿어 종교가 다른 저희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임종 직전에 제가 대세라도 드리려고 했더니 거부하셨습니다. 그래서 신자들을 들여보냈더니 그때는 대세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내가 먼저 확신만 가지고 있으면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부터 기도-자선-단식을 실천하며 나 자신을 설득시킵시다. 그러면 나중에 그 경험으로 많은 이들을 설득시켜 신앙을 갖게 만들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어려서 형님이 부러운 것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형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전문적으로 배우지는 않았지만 재능을 타고 난 것 같았습니다글을 잘 썼습니다물론 필체도 좋았습니다그림을 잘 그리는 것은 사물을 보는 집중력이 좋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글을 잘 쓰는 것은 책을 가까이 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지금도 형님이 그렸던 고궁의 수채화가 기억납니다형님의 필체가 정갈하게 적혀있던 편지가 생각납니다요즘 하는 말이 있습니다. ‘부러우면 지는 거야.’ 하느님께서는 제게는 또 다른 재능을 주셨다고 생각합니다며칠 전에 읽은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의 원칙은 2가지가 있습니다첫째는 모든 사적인 일은 공적인 업무에 우선합니다그러니 꽃피는 봄에는 꽃구경을 가세요둘째는 모든 회식은 회의에 우선합니다그러니 좋은 날에는 회식을우울한 날에도 회식을 하세요.’ 맞습니다아직 오지 않을 불안 때문에 걱정하기 보다는오늘을 즐겁게 지내는 것도 삶의 지혜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도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마십시오무엇을 먹을까무엇을 입을까무엇을 마실까도 걱정하지 마십시오하늘의 새도 하느님께서는 다 먹이시고들판의 꽃도 하느님께서는 다 입히십니다여러분은 하늘의 새보다들판의 꽃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그러니 걱정하기보다는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을 생각하십시오.” 사람들도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동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유대인들도 단식하고요한의 제자들도 단식합니다그런데 왜 당신들은 단식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신랑이 와서 혼인잔치를 하는 동안에는 단식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보와 발전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가치와 다름을 이야기하셨습니다진보와 발전은 낡은 것과 새것을 구분합니다낡은 것의 자리에 새것들이 들어옵니다가치와 다름은 비틀즈의 음악과 BTS의 음악이 공존하는 것입니다상대평가가 아니라 절대평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문혈연능력재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밭에 묻혀있는 보물을 이야기하십니다땅에 떨어진 씨앗을 이야기하십니다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이야기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 닮음을 보셨습니다우리 안에 있는 가능성을 보셨습니다그것이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가치와 다른 모습입니다예수님께서는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던 어부 시몬에게 그물을 다시 던지라고 하셨습니다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물을 던진 시몬은 그물이 터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경험과 기술로 고기를 잡던 시몬은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그것은 말씀으로 고기를 잡는 것이었습니다두려워진 시몬은 예수님께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두려워하는 시몬에게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인생 머 있습니까새로운 것을 보았던 첫 번째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이런 묘비명이 있다고 합니다. “우물쭈물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그런가 하면 이런 묘비명도 있다고 합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나는 자유다,” 우물쭈물 하는 사람은 배와 그물을 버릴 수 없습니다자유로운 사람은 기꺼이 배와 그물을 버릴 수 있습니다자유로운 사람은 욕망이라는 배를 버릴 수 있습니다걱정이라는 그물도 버릴 수 있습니다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던 바오로 사도는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영적 지혜와 깨달음 덕분에 하느님의 뜻을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으로써 모든 면에서 그분 마음에 들고 온갖 선행으로 열매를 맺으며 하느님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기를 빕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양승국신부-

 

참담한 실패의 새벽녘, 갈릴래아 호숫가, 허탈해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조용한 해결사로 다가오신 예수님,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시어 당신의 신성을 거침없이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게 비교되고 있습니다.

  

이 한 세상 살아가다보면 너무나도 높은 벽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앞에 너무나 캄캄해 그저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마치 산산조각 난 유리조각처럼 깨어지고 망가져 더 이상 손써 볼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신기하게도 인간의 끝에서 주님께서 시작하십니다. 놀랍게도 우리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솔직히 인정할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따라서 한쪽 문이 완전히 닫혔다 할지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다보면, 주님께서 조용히 우리에게 다가오시오 슬그머니 다른 쪽 문을 열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비참한 내 인생, 더 이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내 인생은 이제 끝났다!’고 외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 조용히 다가오십니다. 나즈막한 목소리로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열어주십니다.

  

‘철저한 실패로구나. 쫄딱 망했구나.’라며 좌절하고 울부짖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다가오십니다. 그저 함께 현존하십니다. 딱 한 말씀으로 그간의 어려웠던 국면을 180도 전환시켜주십니다.

  

다 끝난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조금 기다려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거짓말처럼, 기적처럼,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끝까지 희망해야겠습니다.

  

때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의 삶에 대해 너무 쉽게 포기해버립니다. 너무 쉽게 체념해버립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뿐만 아니라 주은 우리의 상상이나 능력 밖의 일들, 조금도 예상치 못했던 일들을 이루시기를 즐기십니다.

  

우리 삶이 아무리 하찮아보일지라도, 우리가 아무리 죄 속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우리 나날이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결코 낙담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주께서는 이런 우리 삶에 기꺼이 참여하셔서 당신의 뜻을 이루십니다. 당신 뜻의 성취를 통해 우리에게 희망과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십니다

 버리고 떠나기

 -반영억신부-


어디로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희망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향한다는 것은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어려움이 있지만, 더 좋은 것을 기대하면 희망을 이루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길을 떠났던 아브라함, 주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길 바랐던 성모님의 모습에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로마4,18) 해야 한다는 믿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많은 수고와 땀을 통해 일구어 자리를 잡은 삶의 터전을 떠난다는 것은 많은 미련과 아쉬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명을 받았으면 후회가 없어야 합니다.

 

성직자나 수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더 있고 싶은데 떠나라는 명을 받고, 빨리 떠났으면 좋겠는데, 더 있으라는 명을 받기도 합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그러면서도 내일 당장 떠날 것처럼 살아야 하는 것이 성직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때가 되면 자기가 움켜잡고 있던 모든 것을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떠났으면 미련을 두지 말아야 합니다. 안주하면 더 이상 성장할 수 없습니다. 가장 좋을 때 떠나야 합니다. 영광까지 누리려 한다면 욕심입니다.

 

엉뚱한 생각을 해 봤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으로서 교황으로 선출되리라고 생각을 하셨을까? 교황으로 선출되면 다시 그리로 돌아가지 못하시는데 짐정리는 다 해놓고 오셨을까? 소지품들은 어떻게 처리하실까? 아니 추기경관저에서 살지 않으시고 방 한 칸의 아주 검소한 아파트를 임대하여 간단한 저녁식사를 직접 해 드셨고, 버스로 출퇴근을 하며, 근검한 선교사들에게 추기경관저를 내놓으셨다 하니 아예 정리할 것도 버릴 것도 없이 사신 것은 아닐까? 세상의 권력은 다 버리고 주님의 권위와 겸손으로 만족하셨음에 존경과 사랑을 드립니다.

 

시몬 베드로는 고기 잡는 어부였습니다. 어부가 고기를 잡는 이유는 생계를 유지하고 더 나은 윤택함을 누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밤새 고기를 잡으려 애썼지만 잡지 못했습니다. 실망 속에 그물을 정리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는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말씀대로 그물을 내렸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했더니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말씀대로 했더니 차고 넘쳤습니다. 순명이 기적을 낳았습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기쁨보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어부가 많은 고기를 보고 두려워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지만 현실입니다. 전에는 고기만 봤는데 이제는 능력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이 뜨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하고 고백합니다. 그는 주님을 가까이 모시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또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하시며 죄 많은 자의 고백을 기쁘게 받아들이셨습니다. 마침내 주님의 능력과 자비를 체험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자기의 어부로서의 지식과 경험, 상식, 그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부가 배를 놓고, 고기를 놓고 떠난다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두려움을 없애주시고 사람을 낚을 사명을 주시니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간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고기 잡는 어부가 아니었습니다.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바뀌는 제자로서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로 살게 된 것입니다.

 

떠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떠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내가 잡고 있는 모든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지식이나 경험, 업적, 애착…. 인정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을 만나는 데 걸림돌이 되는 하나를 버리는 가운데 새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거듭나고 싶은 만큼 버려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버림과 따름 >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시몬이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스승님의

말씀대로 제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자

그들은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되었다(루카 5,4-6).”

 

예수님께서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기 전에 먼저 기적을 행하신 이유나

목적이나 의도는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의도를 어느 정도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1) 어부들은 기적을 통해서 예수님의 권능을 생생하게 체험했고,

예수님을 주님으로(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그 체험과 믿음에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는 소망이 생겼을 것이고,

그래서 부르심에 곧바로 응답했을 것입니다.

어부들이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일”은,

자기들의 힘만으로는 인생에서 아무것도 얻을 수 없음을 깨달은 것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해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된 일”은, 예수님과 함께라면

못할 일이 없음을 믿게 된 것을 상징하는 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깨달음과 믿음 때문에 어부들은 기꺼이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섰을 것입니다.

 

2)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어부들의 모습을,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예수님을 따랐다면,

11절의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과 모순됩니다.

(가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버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해 주신 일은,

그들이 능동적으로 ‘버림’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일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3)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적은 ‘버릴 것’을 주신 일인가?”

겉으로만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신 것이다.” 라는

깨달음을 주신 일이라고 생각하면, 단순히 ‘버릴 것’을 주신 일이 아니라,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에 대한 애착심을 버릴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일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버리다.’ 라는 말은, 쓰레기를 버리듯이 버리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는 일, 소유물에서 자유롭게 되는 일,

세상일을 초월하는 일 등을 뜻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린다는 말은,

‘예수님만을’ 따르기 위해서

다른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버림’이란 ‘뒤를 돌아보지 않음’입니다(루카 9,62).

 

“시몬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사실 베드로도, 그와 함께 있던 이들도 모두

자기들이 잡은 그 많은 고기를 보고 몹시 놀랐던 것이다(루카 5,8-9).”

 

여기서 베드로 사도가 한 말은,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을 뵙고서 했던 말과 비슷합니다.

“큰일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이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살면서 임금이신 만군의 주님을 내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이 말은 하느님의 ‘거룩하심’과 자신의 ‘보잘것없음’을 동시에 표현한 말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라는 말은,

진짜로 자기에게서 떠나 달라는 요청이 아니라,

“저 같은 사람은 감히 함께 있을 수 없을 정도로,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십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은 자신이 주님의 권능에 압도되었음을 고백하는 말이기도 하고,

주님에 대한 경외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 라는 말은, 실제로 죄가 많다는 뜻이 아니라,

“위대하신 주님에 비하면 저는 정말로 보잘것없는 존재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고백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일반적인 스승과 제자의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물론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르치고 배우는 일을 하긴 했지만,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일은 어떤 학문을 배우기 위한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인생의 주인이신(주님이신) 분으로 믿고,

자기 인생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 드린 일”입니다.

“너희가 나를 ‘스승님’, 또 ‘주님’ 하고 부르는데,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

나는 사실 그러하다(요한 13,13).”

제자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 드린 것은,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면서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께 모두 맡겨 드린 사람들입니다.>

 

“...... 예수님께서 시몬에게 이르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그들은 배를 저어다 뭍에 대어 놓은 다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10-11).”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물속에(죽음 속에) 있는 사람을

물 밖으로(생명으로) 끌어낸다는(구원한다는) 뜻입니다.

1) 예수님 말씀을 좀 더 풀어서 표현하면,

“너는 이제까지는 물고기를 낚아서 먹고사는 어부의 인생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을 하는 사도로서 살게 될 것이다.”입니다.

2) 사도들이 첫 번째로 낚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생명 속에’ 있어야

‘죽음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모든 신앙인에게 똑같이 적용됩니다.)

3)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 ‘모든 것’을 버린 일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필요 없는 것들과 걸림돌이 되는 것들을 버린 일입니다.

버려야 하는 것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을 방해하는 것들을 버리는 것은

모든 신앙인이 실행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 루카 5,1-11: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라

 -조욱현신부-


예수님은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셨는데, 회당에서 예수님을 쫓아내자 이제는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배에 앉으시어 가르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복음 전파는 회당이라는 어느 장소에 한정되지 않고 필요하다면 어디에서나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시몬 베드로의 배를 빌어 육지에서 배를 조금 떼어 그 배에서 군중들을 가르치신다.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4절) 하신다. 베드로는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5절) 하고 대답하였다. 즉 인간적인 경험, 지혜, 노력을 다 써 봤지만 기대하던 결과는 이 경우에는 헛수고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일생을 고기 잡는 일로 잔뼈가 굵었고, 고기 잡는 일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 앞에 모든 오만을 버리고 자신을 낮출 줄 알았다.

 

그는 “스승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니 그물을 내리겠습니다.”(5절) 하고 실행에 옮겼다. 베드로는 전능하신 분의 말씀을 따랐다. 그 결과 그물이 찢어질 정도였다고 하였다. 고기 잡는 일에 그렇게 경력이 있고 능력 있던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따른 결과는 지금까지 자기 생애에 보지 못했던 엄청난 것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예수께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8절) 하였다.

 

베드로는 자신의 모습이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님을 느낀다.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불결한 인간으로서 순결한 분을 감히 모실 수 없다고 생각하여 두려워한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10절) 하셨을 때,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새로운 임무를 주신다.

 

베드로가 자신의 오랜 경험 등에 대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랐을 때, 커다란 체험을 하였듯이 때로는 우리도 우리 자신의 고집을 버려야 할 때가 많을 것이다. 더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이 우리 자신을 비워야 하는지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는 하느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살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항상 말씀이 강생하는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강생시키는 삶, 여기에서 근본적인 우리의 변화를 가질 수 있다. 베드로와 같이 자기 생각이나, 고집, 고정관념을 주님의 말씀 앞에 모두 버렸을 때, 기적을 체험했듯이, 하느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느님을 체험케 하고 하느님 안에 자녀로서의 기쁨과 구원을 체험하게 해줄 것이다. 우리 안에 강생하시는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삶을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루카 5, 11)

-한상우신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벗어나야
제대로
볼 수 있다.

버려야
길을
제대로
만나게된다.

따르면서
진리를
만나게되고

버리면서
진리를
깨닫게된다.

우리가
갈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다.

따르는 길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이다.

새로운
삶의 전환이
간절히
필요한 때이다.

새로운
삶의 전환은
주님과 함께
주고받는
삶으로 우리가
바뀌는 것이다.

하느님을 위한
버림이며
하늘 나라를 위한
따름이다.

버리지
않고서는
하느님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도
버리고 떠나는
삶으로
우리에게
복음이 되셨다.

영원한 생명은
버리고 떠날 때
주어지는
새로운 생명이다.

새로워지기 위해
버리고 떠나는
새로운 만남이다.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어리석고
나쁜 삶을
멈추는 것이며

깨끗한 삶으로
다듬어지는
것이다.

이끄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복음이다.

모든 것을
버리고
따라야 할
하느님의
생명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 받기 전 우리가 어떤 처지였는지 일깨워 주십니다.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마태 5,4)
예수님께서 겐네사렛 호숫가에서 당신께 몰려든 군중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시는 중에 베드로의 배 위에 올라 계속 가르치십니다. 이윽고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은 밤새도록 물고기를 한 마리도 못 잡고 허탕 친 어부들에게 이렇게 조언을 하시지요.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고기잡이 전문가들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그리고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지요.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많은 고기가 잡힌 겁니다. 베드로가 자신의 자아와 고집, 지식과 경험을 내려놓았기에 예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 저는 죄 많은 사람입니다."(루카 5,8)
베드로가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합니다. 그는 엄청 놀란 데다 두려움까지 느낍니다. 그저 평범한 어부에 불과한 자신과, 기적을 일으키시고 하느님 말씀을 가르치시는 존재가 나란히 설 수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듯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자각은 하나의 선물입니다. 이는 지나친 죄책감이나 죄의식으로 짓눌리지 않으면서 스스로의 실존을 겸손하고 건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은총이지요.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루카 5,10)
예수님은 베드로의 "죄인"이라는 자기 고백을 만류하거나 부인하지 않으시고, 지워버리지도 않으신 채 그 위에 소명을 얹어 주십니다. 죄인이라는 진실이 부르심을 회피할 사유는 되지 못합니다.

베드로는 실패를 아는 사람입니다.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밤새도록 빈 그물만 끌어올리다가 피곤에 절어 새벽을 맞아본 이는 허탈감과 절망만 배우지 않고 그에 더해 만물의 주인 앞에서 응당 지녀야 할 두려움까지도 소유하게 됩니다. 한 인간으로서 겪어낸 이 나약함과 부족함, 어두움의 깊이 때문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선택하신 건 아니었을까 묵상해 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콜로새 신자들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축복과 기원을 나열하면서 우리가(그들이) 본시 어떤 존재였는지를 일깨웁니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콜로 1,13-14)
원죄에 물든 우리는 본시 어둠에 속했었고 죄에 갇혀 있었습니다. 빛이신 분께서 오셔서 우리를 빛 한가운데로 불러내셨고, 죄인인 우리를 대신해 희생 제사를 올리심으로써 우리를 구원하셨지요. 우리는 주님을 만남으로써 어둠에서 빛으로, 죄에서 구원으로 건너온 이들입니다.

영적 삶에서 빛과 어둠, 죄와 구원은 생략 불가, 월반 불가한 요소들입니다. 원죄에 물든 인간이기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지요. 그런데 악은 욕구를 충동질하고 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며, 그 수치심으로 사람을 무너뜨려, 결국 절망으로 주님을 떠나게 만들지요. 그저 송구하고 겸양한 말뿐이 아니라, 진짜로 주님께 "떠나 주십시오." 하게끔 조장하는 겁니다. 악은 하느님과 인간 관계를 분리하고 끊어내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 앞에 죄인이라는 겸손하고 건강한 인식은 우리를 그분과 더 가깝고 친밀하게 이어줍니다. 바로 그 이유로 그분께서 우리를 부르셨고 사랑하시며 도구로 쓰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주님께서 말씀으로 다정히 우리를 어루만지십니다. 우리가 끌어안고 있는 실패와 결핍의 빈 그물 앞에서 주님이 무어라 하시는지 귀담아 듣고 따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미소함과 어둠, 죄와 실패가 우리를 주님께 이끌었으니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어 그분께 나아갑시다. 겸손한 죄인인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22주 목요일-만족의 방향 틀기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9월 5일 연중 제22주간 목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