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29일 연중 제22주간

Margaret K 2021. 8. 29. 23:16

 

2021 years  8 Mon  29 days a year the 22 weeks 

 

'This people honors me with their lips,

That heart is far from me.

( Marco  7,1-8.14-15.21-23 )

 

This people honors me with their lips,
but their hearts are far from me;

 

Today's Gospel: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today's meditation

-Father Seocheol-

 

 Some Pharisees and some scribes come to Jesus and see some of his disciples eating with unwashed hands. “Why do your students not follow the traditions of their ancestors and eat with dirty hands?” “You are forsaking the commandments of God and keeping the traditions of men.” The handwashing issue the Pharisees and scribes are talking about is not the law. Since it is not mentioned anywhere in the Pentateuch, they refer to it as 'the tradition of the ancestors'. Israel is a desert country, so there is a lot of dust and wind and water is scarce. Therefore, washing your body after returning from going out or before eating is a very helpful rule for hygiene. But why would this rule be a means of attacking Jesus and his disciples?

법의 자구 하나하나를 잘 지키는 것보다 그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율법이 존재하고 지켜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을 죽음의 땅에서 구출하시고 생명의 땅으로 들어가 살게 해 주신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과 함께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고자 함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그 정신이 아니라 문자를 제 나름대로 해석하여 규칙을 더해 가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며 백성에게 강요합니다. 이 규칙들은 몇백 년의 시간을 거치며 ‘위대한 조상들의 전통’이 되어 백성을 옥죄입니다. 규칙을 지키지 않는다고 백성을 차별하고, 죄인 취급하며 폭력을 휘두르게 된 것입니다.
모든 규정과 율법은 그 기본 정신에 따라, ‘죽음의 땅에서 울부짖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께서 다가가시어 그들을 살리셨듯이’, 고통으로 울부짖는 이들에게 다가가고 그들을 살리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당이나 사회에서 지키고자 하는 것들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영혼이 깃든 진실된 의식

-키엣대주교-

 

두 수도승이 산에서 내려오다가 깊고 큰 웅덩이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소녀를 만났습니다. 한 수도승이 소녀를 벌떡 안고 웅덩이를 건너주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수도승이 그를 비난하며 말했습니다. “스님은 어찌하여 소녀를 안았습니까?” 그러자 다른 수도승이 답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안아 웅덩이를 건너주고만 왔는데, 스님은 어찌하여 그 소녀를 여기까지 데리고 왔습니까?”

형식과 계율만 따르는 믿음, 마음에 따른 실천을 중시하는 믿음 중 나는 어떤 사람입니까?

계율만 따른 수도승은 감히 소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지만 그의 영혼은 이미 그 소녀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계율을 지켰다고 위안하며 수행을 어긴 다른 승려를 비난했습니다. 남에게 보여지는 외형적인 계율만을 지키다 보니 자신의 내면은 보질 못한 것입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역시 외형적인 믿음만을 존중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은 곧 계율이고 계율을 지키는 것이 곧 믿음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러한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나환자와 출산한 여성, 이교도들을 더럽다고 생각했고 더러운 것과 접촉한 사람 역시 더러워진다고 믿었습니다. 더럽다는 것은 곧 죄를 지는 것이기에 더러워지지 않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손을 씻고 그릇도 열심히 닦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위선입니다. 겉만 닦을 뿐 내면의 더러움을 닦지 않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손만 닦았지 양심은 닦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더러워지는 것이 두려워 환자와 접촉을 꺼리면서도 자신들의 마음 속의 사악함은 여전히 감춰두고 있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율법에 기록된 그 많은 계율을 지키기에 급급하여 자신의 믿음이 사랑과 영혼이 없는 믿음이 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의례적으로 성경을 읽고 외우고 기도하였습니다. 몸 속의 나쁜 것을 버리기 위해 금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계율이기에 금식을 했습니다. 소외된 사람들과 나눔의 사랑을 실천하기보다 가진 것을 과시하기 위해 자선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진실된 마음이 없었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외형적인 의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의례가 가치를 지니려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진실된 행동이어야 합니다. 진실된 마음으로부터 시작된 행동만이 가치가 있습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의식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사랑이고 그 사랑은 마음 깊은 곳에서 시작된 진실된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없이 형식만을 따르는 것은 올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룩한 일을 한다 해도 사랑이 없다면 바오로 성인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무의미한 일입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모든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1코린 13,1-3)

그러므로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마음을 충실히 따르는 태도와 진실된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말입니다.

자선은 형제애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자녀로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금식은 내 몸 속의 나쁜 것을 버리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세례는 참회의 마음이 근원이 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루어질때 성경을 읽는 나의 입술과 마음이 진실되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금식을 통해 영혼에 쌓인 죄가 씻겨지고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박애를 통해 허영이 사라질 것입니다. 손을 닦음으로써 나의 영혼도 같이 정결해 질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시작된 행동이야말로 영혼이 깃든 진실된 의식으로 주님께 드리는 사랑의 미사가 될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과 믿음이 있을 때만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습니다.

주님, 저희가 더욱 더 가까이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온 마음을 다해 주님을 사랑하게 하여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남에게 보여지는 놀라운 일을 하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가치있는 일입니까?

2. 신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주님을 만나기 위해 미사에 참석하고 있습니까?

3. 코로나로 점점 어려운 세상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암울한 세상에 점점 소외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주변에 있는 이웃들에게 따뜻한 사랑의 말을 전하는 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학창 시절에 시험 볼 때를 생각해보시길 바랍니다. 문제를 풀다 보면 ‘1번 아니면 2번인데….’라는 식으로 알쏭달쏭할 때가 있습니다. 고민 끝에 답을 썼습니다. 그 뒤에 문제를 모두 풀고 나서 답을 다시 점검하던 중에 갈등이 생겼던 문제를 봅니다. 한참을 다시 보면서 생각하다가 답안을 바꿨습니다. 그렇다면 바꾼 답은 정답일까요? 오답일까요? 확률적으로 어떤 것 같습니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면서, 답을 바꿔서 늘 틀렸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확률적으로 정답이었다가 오답으로 바꾼 경우는 25%이고, 오답이었다가 정답으로 바꾼 경우는 50%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나머지 25%는 오답이었다가 바꿔도 오답인 경우입니다.

이 결과를 보면, 다시 생각해서 답을 바꾸는 것이 정답일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생각했기 때문에 정답을 찾을 확률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시험에서만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다시 생각하기’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데도 많은 이가 과거에 내린 결정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인지, 결정을 쉽게 바꾸지 못합니다. 바꾸면 오히려 더 나쁜 결과가 다가온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택에 대한 후회에 대해 아쉬움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다시 생각하기에 더 좋은 선택을 할 확률이 높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제자 몇 사람이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는 이유는 단순히 위생상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보다 제의 법규의 준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평상시에 식사할 때까지 굳이 제의 법규를 준수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반대하는 마음에 이것을 굳이 지적합니다.

이들 역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마음으로 이런 지적을 하고 있었는지, 과연 이런 지적이 올바른 것인지를 다시 생각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들을 향해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통해서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부정적인 마음이 생기게 될 때,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게 될 때, 남을 판단하려고 할 때, 모두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나쁜 것들을 조금씩 줄여나갈 것입니다.
모든 일이 뜻대로 되고, 하느님께 청하여 성공하게 되더라도, 기뻐하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워해야 한다. 성공에는 하느님을 잊고 그분을 거스를 위험이 많기 때문이다(십자가의 성 요한).


어떻게 신경 쓰지 않고 살까요?

지금까지 산 삶의 경험을 통해 깨달은 분명한 한 가지가 있다면, ‘누구든 나를 싫어하는 사람은 생기기 마련이다’입니다. 이는 누구나 예외 없이 경험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단 한 번도 마주한 적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누군가로부터 미움을 받는 것’은 분명히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싫어하는 감정을 품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 사람의 감정도 엉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신경이 쓰여서 제대로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이 점을 기억하면 미움을 받는 나뿐 아니라, 미워하는 감정을 갖는 상대 역시 힘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차피 싫어하는 사람은 있는 법입니다. 괜히 신경을 써서 지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오히려 사랑하는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더는 신경 쓰지 않으면서 지금에 충실할 수 있습니다.

 '막연히' 사는 사람은 죽음도 '막연해서' 두렵다

-전삼용신부-

 

루카는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구원 소명을 선포하는 사건이 나자렛에서 일어난 것으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나자렛 사람들은 자신들이 아는 요셉이 메시아가 되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선입관에 사로잡힌 교만을 지적하시고 그들은 그런 예수님을 절벽에서 떨어뜨리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가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메시아로서의 소명을 선포하는 것과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은 하나의 사건으로 이어집니다.

     

    누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삶을 살 수 있을까요? 하루하루를 주님 뜻에 따르며 자신을 버린 삶을 사는 사람일까요, 아니면 그냥 조금 더 살고 싶어 하는 사람일까요?

    말기 암 환자들을 많이 접한 경험을 책으로 쓴 김범석 의사가『어떤 죽음이 삶에게 말했다』라는 책에 소개한 죽음을 받아들이는 두 분의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70세의 노인 암 환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살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의사로서 볼 때 6개월 이상은 힘들 거 같다는 말을 해 주었습니다. 그 환자는 담대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남은 시간 동안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다 해보고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 후로 그는 정말 매주 하나씩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해보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 거창한 일이 아닌 아내와 바닷가로 여행 가서 해산물 요리 먹기, 종일 바다 보기, 좋아하는 노래를 모아 자식들에게 선물하기, 손주들에게 편지 쓰기, 고향 친구들에게 밥 사주기, 예전에 싸웠던 친구에게 연락하기 같은 일상적이면서도 소소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는 매주 병원에 올 때마다 지난주에 자신이 했던 일들을 소상히 늘어놓으며 즐거워했습니다. 진작에 그렇게 살았어야 했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갑자기 할 일이 많아졌고 사는 게 즐거워졌는데 얼마 남지 않아서 몹시 아쉽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그는 남은 시간을 즐겁게 보내며 떠났습니다. 

 

    김범석 선생을 찾아온 다른 노인 환자도 있었습니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기대수명을 듣고는 딱 10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건 지나친 기대였습니다. 평균적으로 그는 당해 추석도 넘기기 힘들다고 판단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꾸만 ‘10년만 더’를 말했습니다. 물론 모른 척하고 하는 데까지 해보자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다 환자가 의식이 없어지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의사로서 환자가 현실을 직시하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남은 시간도 인생의 귀중한 일부로 만들고 떠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10년 더 사시면 뭘 하고 싶으세요?”

    “...” 

  

    침묵이 흘렀고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거나, 손주가 학교 들어갈 때 교복 한 벌 해 주고 싶다거나, 아니면 고향에 한 번 다녀와야겠다…. 뭐 그런 거요.”

    “...” 

 

    여러 번의 질문에도 그는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막연히’ 좀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만 있었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는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런 경우가 특별하지는 않다고 합니다. 오히려 일주일에 하나씩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사람이 이례적이라고 합니다. 사실 평범하고 건강한 사람도 자신이 뭘 원하는지, 무엇에 기쁘고 슬픈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모른 채 그저 막연하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의사로서 앞 환자의 예를 들어 그분을 도와주기로 했습니다. 다음 외래에 올 때 하고 싶은 일 열 가지만 생각해오라고 숙제를 내주었습니다.

    하루에 한 번 웃을 일 만들기, 핸드폰 사진 매일 찍기, 일주일에 세 번 산책하기, 자식들에게 하루에 한 통 문자 보내기, 아내에게 매일 고맙다고 말하기 같은 소소한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숙제가 너무 어려웠는지, 너무 평범해서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인지, 그는 다음 외래에도 빈손으로 왔고 그렇게 주저하다 추석을 넘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습니다.

  

    이 두 사례 중 죽음을 덜 두려워한 사람은 누구일까요? 첫 번째 사람이 죽음이 두려워 하루하루 충실히 살려고 했을까요?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오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이 두려워합니다. 삶이 막연하니 죽음도 너무 막연해서 두려운 것입니다.

    반면 삶이 해야 할 일로 채워지면 죽음도 해야 할 일의 일부가 됩니다. 그러니 오늘 해야 할 일 중의 하나가 죽음이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삶이 명확할 때 죽음도 명확해집니다.    

 

    어느 독특한 월터란 물리학 교수의 동영상이 있습니다. 그는 물리 공식에 광적으로 미쳐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월터 교수는 물리학 수업을 하면서 할 수 있는 것들은 강의실 안에서 실제로 보여줍니다.

    그런데 하루는 월터 교수가 살짝 더 이상했습니다. 15kg 되는 추를 자신의 턱에 갖다 대놓고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습니다. 운동에너지 보존법칙을 100% 확신해요. 나 자신은 믿지 못할지라도. 조용히 해 주세요. 장난이 아닙니다.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더니 힘드네요. 셋, 둘, 하나.”

  

    추가 다시 돌아올 때 턱이나 목이 부서질 수 있는 상황인데도 학생들 앞에서 자신이 믿는 물리학 법칙이 틀리지 않음을 증명합니다. 에너지 법칙에 따라 추는 자신이 놓은 그 자리 이상 올라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자신도, 보는 사람도 짜릿합니다.

 

    성령은 이렇게 우리에게 삶의 법칙을 주십니다. 당신 뜻대로 살면 행복할 것이란 법칙입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살다 보면 하루하루가 정말 빡빡합니다. 해야 할 일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것 덕분에 행복합니다.

    그리고 그 법칙대로 삶의 일부인 죽음도 주님 뜻대로 받아들이면 행복으로 끝날 것을 알게 됩니다. 법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월터 교수처럼 하루하루가 짜릿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에 오류가 없음을 체험하며 기뻐합니다.

  

    ‘오늘은 뭐 하며 살지?’라는 식으로 절대 하루를 막연하게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도 성령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분명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따라서 전날 잠들기 전에 다음 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 그래서 꼭 해야 할 일을 두 가지에서 많게는 여섯 가지 정도 정하십시오. 아침에 일어나면 내가 정한 대로 기계처럼 움직이며 먼저 두 가지는 꼭 하십시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법칙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은 항상 기쁨으로 끝난다는 것을. 그리고 죽음조차도 하나의 소명임을. 그리고 그 죽음 뒤에 가장 큰 기쁨이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그렇게 우리는 죽음 앞에서까지 담대할 수 있어서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도 주님 뜻에 나를 맡기고 마지막 날이라고 여기며 기쁘게 살아갑시다. 하느님 뜻에 살짝 미치면 죽음까지 포함한 매일의 삶이 즐겁습니다.

 -조재형신부-

 

외과의사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미국은 독립기념일에 불꽃놀이를 합니다제가 사는 동네에도 불꽃놀이가 있었습니다한 청년이 있었습니다특별한 직업도 없고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친구입니다독립기념일에 여자 친구에게 더 멋진 불꽃을 보여주기 위해서 폭약을 더 많이 넣었습니다불법이지만 그렇게 하였습니다드디어 불꽃을 보여주려는데 그만 폭죽이 손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내장이 파열되고손가락이 날아가는 화상을 입었습니다가끔 찾아오던 여자 친구도 떠나고 말았습니다손목만 남은 손에 집게손을 달았습니다극심한 우울증으로 방황하면서 지냈습니다집게손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없었습니다직장을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다음 해에 독립기념일이 되었습니다불꽃놀이는 구경도 보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뉴스에서 초등학생들이 폭죽을 가지고 놀다가 화상을 입었다는 소식을 보았습니다자신의 집게손을 보면서 학생들이 이런 부상을 입지 않도록 알려주고 싶었습니다학교를 찾아갔고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위해서 안전교육을 부탁했습니다집게손을 보여주면서 안전교육을 하니 아이들이 귀담아 들었습니다학교에서는 다른 학교에도 소개해 주었고지금은 학교마다 다니면서 아이들의 안전교육을 위한 강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손을 다치기 전에는 할 일 없이 집에서 놀고 있었는데 손을 다친 후에 직업이 생겼다고 합니다전에는 떠올리기 싫은 화상의 상징인 집게손이었지만지금은 아이들에게 안전을 교육하는 희망의 집게손이 되었습니다안전교육을 하면서 새롭게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2명이 오랜 기간 휴양 중에 있습니다한명은 뇌출혈로 왼쪽이 마비가 왔습니다병원에서 수술을 받았고재활훈련을 하였습니다지금은 지팡이를 가지고 다닙니다. 12년이 지났습니다신부님은 예전의 건강을 회복하지는 못했지만 성경을 읽고책을 읽으며 그 느낌을 인터넷을 통해서 나누고 있습니다신부님의 글은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고용기를 주었습니다다른 한명은 당뇨로 오랜 기간 휴양을 하였습니다노래도 잘하였고강의도 잘하였던 신부님입니다휴양을 하면서 예전처럼 노래를 하지는 못하고강의를 하지도 못합니다그러나 글을 통해서 영적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육체적인 아픔과 고통이 신부님들의 마음까지 아프게 하지는 못했습니다오히려 그런 아픔과 고통이 신부님들에게는 디딤돌이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제자들의 태도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제자들은 유대인들의 예식을 잘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저는 손을 씻는 것을 묵상하면서 몇 가지 손가 관련된 말들이 생각났습니다.

1) 손을 씻었다. : 이 말은 말 그대로 물로 손을 씻을 때 쓰입니다또는 조직에 있거나나쁜 일을 하던 사람이 그 조직을 탈퇴할 때나쁜 일을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 할 때 쓰입니다.

2) 손을 써준다. : 이 말은 곤란한 사람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딱한 사정을 듣고 도와준다거나 또는 누군가의 청탁을 받고 그 일이 성사되도록 도움을 줄 때 쓰입니다.

3) 손을 본다. : 이 말은 약한 아이들을 괴롭히거나 작은 힘을 믿고 까부는 사람을 따끔하게 야단 칠 때 쓰입니다더러는 조직 세계에서 험악한 의미로 쓰이기도 합니다.

4) 손들었다 . : 이 말은 상대방의 끈기와 열정상대방의 강한 힘 앞에 깨끗이 승복할 때 쓰입니다완전히 포기 할 때는 좀 더 강한 표현으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이 하는 말은 틀린 것은 아닙니다코로나 시대에 손 씻기는 물론이고손 소독까지 강조하고 있습니다손만 깨끗이 씻어도 우리는 질병을 어느 정도 예방을 할 수 있다고 말을 합니다. ‘웰빙이라는 측면에서 유대인들이 한 말은 사실입니다건강하게 오래 사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하지만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의미 있는 삶에 대해서 말씀을 하십니다외부에서 오는 것 때문에 힘들 수도 있지만정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우리의 내부에서 나오는 것들이라고 하십니다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불륜도둑질살인간음탐욕악의사기방탕시기중상교만어리석음이 나온다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어느덧 팔월의 마지막 주일입니다이제 곧 자연은 뜨거운 여름을 이겨낸 결실을 맺을 것입니다우리들 또한 신앙의 결실을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험난한 내 삶에 회개용서기도나눔겸손의 거름을 주면 좋겠습니다그래서 사랑희망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하느님 아버지 앞에서 깨끗하고 흠 없는 신심은어려움을 겪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아 주고세상에 물들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 사명의 본질은 이 세상 전체, 인류 전부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사제가 된 후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본당에 가서 처음으로 강론할 때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두렵고 떨렸습니다. 나름 감동적인 강론을 한번 해보려고 얼마나 준비에 준비를 거듭했는지 모릅니다. A4지 한 장 정도의 짧은 강론을 며칠에 걸쳐 준비했고, 그걸 또 거울을 보고 수십 번도 더 예행연습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오늘 복음에서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고향 나자렛 회당에서 첫 강론을 하시는데, 아마 예수님께서도 마음이 비슷하셨을 것입니다. 요즘 미사 때 마다 강론 전에는 성경 말씀이 먼저 선포되듯이, 예수님께서도 강론을 하시기 전에 한 성경 구절을 찾으셔서 읽으셨는데, 정말이지 기가 막힌 성경 구절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은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야서 61장 1~2절)

 

한 문장 한 문장, 글자 한자 한자가 다 예수님 당신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구절을 봉독하심을 통해 앞으로 펼쳐질 공생활 기간 동안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명확히 밝혀주신 것입니다.

  

회당 안에 있던 청중들은 이제 성경 말씀이 선포되었으니, 길고도 장황한 강론이 이어지겠거니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강론은 딱 한 마디였습니다. 1초밖에 안 걸렸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복음 4장 21절)

  

아마 예수님께서 지금 이 순간 공생활을 하신다 해도, 절대로 강론 길게 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야말로 핵심중의 핵심만, 촌철살인의 한 말씀만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 한 마디 강론 말씀에 대한 반응은 다양했습니다. 짧지만 임팩트 있는 말씀, 권위로 가득한 간결한 강론에 놀라워하고 기뻐하고 감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름 한편으로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도통 예수님을 메시아로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더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화가 잔뜩 나서 그분을 회당에서 내쫓았고,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벼랑 끝까지 끌고 가 절벽 아래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이 얼마나 큰 신성모독이며 반역입니까?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하느님의 아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께 감사하고 박수를 쳐도 부족할 터인데, 노골적인 살의로 그분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한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메시지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지상적 번영, 물질적인 부와 정치적 권력, 이스라엘의 위대함과 관련된 공약의 말씀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빵, 기적, 권세를 다시 한 번 요구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이기적인 바램들과 교만한 허영심을 끝도 없이 충족시켜주시는 기적의 요술방망이 같은 분이 아님을 기억해야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파견되신 가장 큰 이유는 이 세상 전체, 그리고 인류 전부를 하느님 아버지께로 이끌어가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사명의 본질입니다.

 마음을 다스려라

-반영억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우리를 구원에로 부르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은 우리를 위하는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도 주님의 마음으로 변화되기를 바랍니다.

  

언젠가 영화의 한 장면을 보았는데 손 잘린 사람이 발가락을 사용하여 노름을 하더라고요. 그것은 손이 도박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도박을 하기 때문입니다. 가끔 텔레비전을 보면 죄짓고 벌 받으러 가는 사람이 부끄럽다고 손으로 얼굴을 가립니다. 그렇지만 마음이 죄를 지었는데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마음이 가려지지는 않습니다.

  

때때로‘손 버릇 나쁘다’,‘손 크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 말은 마음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고운 손이라도 나쁜 짓을 하는 손은 고운 손이 아닙니다. 아무리 거친 손이라도 좋은 일을 하는 손은 거친 손이 아닙니다. 사실 겉모양도 좋지만 마음 관리를 잘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잠언에 보면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거기에서 생명의 샘이 흘러나온다”(4,23). “평온한 마음은 몸의 생명이고 질투는 뼈의 염증이다.”(마음이 편안 하면 몸에 생기가 돌고 마음이 타면 뼛속이 썩는다)(14,30)라고 적고 있습니다.

  

사무엘 상권16장에 보면 사무엘이 주 하느님의 뜻을 받들어 왕으로 성별한 사람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때 이사이의 아들 중 “엘리압”을 보고 속으로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용모나 신장을 보지 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하느님은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 야훼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다윗에게 기름을 붓게 됩니다. 성경은 이렇게 마음의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1코린4장 5절에서도 주님께서 오시면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사람의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는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 17장9절에서 10절에는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천길 물속이라 아무도 알 수 없지만)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이기도 하지만 무서운 말씀입니다. 살지 않으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도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르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마음을 잘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하고 질문 하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7,6-7)하며 이사야 예언자의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당시 조상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사온 음식, 시장에 다녀온 몸, 그리고 그릇들을 씻었습니다. 오늘날 생각하면 위생상 이유를 댈 수 있겠지만 바리사이들에게는 밖에서 부정탈 수 있었던 것을 씻기 위한 정결례였습니다. 돼지고기 같은 부정한 음식에 손을 대거나 부정한 사람, 즉 나병환자를 만나면 부정을 탄다고 생각했고 이런 부정은 물로 씻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거룩한 신에게 잘 보이려면 그에 합당한 정결함을 지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신의 노여움을 산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성당에 들어올 때 성수를 찍어 기도합니다. 거룩한 하느님 대전에 들어서면서 온갖 악한 생각을 빼어 버리고 거룩해 지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나갈 때는 거룩해 져 나가기 때문에 성수를 찍지 않습니다. 레위기나 민수기를 보면 피해야 할 금기사항, 부정을 탓을 때 회복하기위한 속죄 절차 등을 자세히 기록하게 되었습니다(레위기 민수기5장.9장.19장).

 

그런데 바빌론 유배라는 국가적 재앙을 겪고 자신들을 반성했습니다. 하느님과의 계약에 충실하지 못했던 부정, 하느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부정, 하느님의 거룩함을 더럽힌 부정을 저질러서 재앙을 겪었다고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부정한 죄를 없애기 위해 “거룩한 백성이 되어야 한다”(레위20,7)는 율법의 요구에 따른 정결법은 점점 확산 되었습니다. 그런 추세를 주도한 사람이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알맹이는 빼 놓고 껍데기에 매달린 것입니다. 마음의 정화는 소홀히 하고 손을 씻고 그릇을 씻는 형식에 매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정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적하십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외적인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내면을 깨끗이 하라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근본 의미입니다.

  

사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화장을 하고 예쁜 옷을 차려 입고 멋지게 하느님 앞에 나왔지만 안에 들어 있는 것은 하느님만이 아십니다. 겉은 예쁘게 단장했지만 그 속이 하느님 마음에 드는지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답고 예쁜 모습은 고해성사를 통해서 마음의 정화를 이루는 것입니다. 모든 허물에 용서를 받고 주님의 거룩함을 입는 것입니다. 성무일도 시편에 보면 ‘겉꾸민 우리 위선 흉측하오니 당신의 은총으로 벗겨 주소서…..겹겹이 둘러싸인 어두움 속에 내 마음 거짓으로 가득 하오나 하느님 전능으로 다스리시면 내 마음 백옥같이 희어지리다.”하고 노래합니다. 허물로 누벼놓은 날들이지만 하느님의 권능과 주님의 자비가 있기에 기쁨과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현대인은 ‘얼짱’,‘몸짱’이라는 외면을 가꾸는데 온갖 노력을 다 쏟습니다. 그러나 정작‘마음짱’, 속을 가꾸는 일에는 소홀 합니다. 아니 방치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겉뿐만 아니라 속까지도 보는 분이시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하늘나라 천국문을 지키는 베드로 사도가 요즘 어려움을 겪으신 답니다. 왜냐하면 베드로 사도가 가지고 있는 원본사진과 실물이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랍니다. 젊은이들은 ‘너 방학했니? 너 방학 좀 해라!’ 한답니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방학동안 ‘고칠 것 뜯어 고쳐라’는 얘기랍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숨을 넣어주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작품에 인간이 함부로 손을 대서는 안 되겠습니다. 마음을 고치면 얼굴도 달라지는데 마음을 고치지 않고 얼굴만 고치니 우습잖아요?

 

정말 고쳐야 할 것은 얼굴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음에 도금을 입히지 마십시오. 혹 도금이 되었거들랑 하루라도 빨리 벗겨내시기 바랍니다.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 “여러분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새 사람이 되십시오. 이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그분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지를 분간 하도록 하십시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히브 12,14).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 1,22.)

  

예수님께서는 전통을 무시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인가에 마음을 두셨습니다. 사람들은 쇄신을 말합니다. 그러나 쇄신 이라고 다 옳지는 않습니다. 행해야 할 바른 쇄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 가르침, 다시 말하면 알맹이를 찾는 것입니다. 알맹이와 껍데기를 구별하는 지혜안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마음속을 바라보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분의 자비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월요일은 월래 웃는 날, 화요일은 화사하게, 수요일은 수수하게 그리고 목요일은 목을 숙여 웃고, 금요일은 금새 웃고 또 웃고, 토요일은 토실 토실 웃고, 주일(일요일)은 주님과 함께 (일을 만들어) 웃으시길 바랍니다. @@@

  

“비둘기가 콩밭으로 날아가는 것은 비둘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었기 때문이고, 원숭이가 나무위로 올라가는 것은 원숭이 마음이 나무위로 가 있었기 때문이다. 몸은 마음이 가 있는 곳으로 따라가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좋은 곳에 두어야 한다.

 <마음을 씻어라.>

 -송영진신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마르 7,1-2).”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사야가 너희 위선자들을 두고 옳게 예언하였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교리로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마르 7,5-8)”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14-15)”

 

여기서 ‘더러운 손, 씻지 않은 손’이라는 말은,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은 손’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서는 제자들만 언급되어 있는데,

예수님도 평소에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을 무시하셨습니다(루카 11,38).

당시에 바리사이들이 행하던 ‘식사 전의 정결 예식’은

‘율법’이 아니라 그들만의 ‘전통’이었고, ‘관습’이었습니다(3절-4절).

바리사이들은 자기들의 전통과 관습을 율법만큼이나 중요하게 여겨서

그것을 철저하게 지켰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지키라고 강요했는데,

물이 귀했던 당시 그 지역에서는 일반 서민들은 대체로

그 정결 예식을 무시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이 식사 전에 정결 예식을 행하지 않은 것은,

일반인들에게는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는데,

바리사이들은 불경스러운 일로 생각했고,

또 자기들의 전통과 관습이 무시당했다고 생각해서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5절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질문은, 실제로는 질문이 아니라 비난입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정결과 부정’에 관한 율법들을 보면, 그 율법들의 ‘근본정신’은,

“나는 주 너희 하느님이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자신을 거룩하게 하여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레위 11,44).”입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의 계명’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백성으로 살기를 바란다면,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정결에 관한 율법들은 거룩한 사람이 되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거룩하다.’ 라는 말에는 ‘다르다.’ 라는 뜻도 들어 있고,

‘깨끗하다. 완전하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거룩하다.’의 반대말은 ‘세속적이다, 불결하다. 부정하다. 불완전하다.’입니다.>

옛날부터 우리나라 사람들도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려면 ‘목욕재계’를 했습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정결에 관한 율법들’은 ‘목욕재계’와 비슷합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율법에도 없는 각종 정결 예식들을 만들었고,

그 예식들을 지나칠 정도로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아마도 처음에는 하느님 앞에서 ‘거룩한’(깨끗한) 사람이 되려는 순수한 동기로

실행한 일이었을 텐데, 세월이 흐르면서 정신은 잊어버리고 규정만 남아서,

사람들을 괴롭히는 나쁜 전통과 관습으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몸만 씻지 말고 마음을 씻어라.”입니다.

원래 ‘목욕재계’는 ‘몸을 씻는 행위를 통해서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만일에 마음을 씻지 않고 몸만 씻는다면, 목욕재계는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물이 너무 부족해서 마실 물도 없는 상황이라면,

손을 씻는 일은 생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을 씻는 일은 생략하면 안 되는 일입니다.)

8절의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어라.” 라는 하느님의 계명을 잊어버리고,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관습만 중시하고 집착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전통과 관습’이 하느님의 계명을 실행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그것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한다면, 그런 전통과 관습은 버려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의 가르침은 “마음만 잘 씻으면 몸은 안 씻어도 된다.”가 아닙니다.

공동체 생활에는 모든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라는 것이 있습니다.

만일에 미사 참례 하러 성당에 오면서 잠옷 바람으로 온다면,

또는 속옷 바람으로 온다면, 예수님께서도 그것을 꾸짖으실 것입니다.

마당에서 흙장난을 하면서 놀던 어린이들이 손을 씻지도 않고 미사 참례 하면서

영성체를 하겠다고 손을 내밀면, 괜찮다고 말해야 할까?

성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부터 씻으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속은 거룩하지(깨끗하지) 않으면서 겉으로만 거룩한(깨끗한) 척 하는 것은

분명히 ‘위선’인데, “나는 속이 거룩하니까(깨끗하니까)

겉은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라고 주장하고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위선’이나 ‘교만’이나 다 죄입니다.

정말로 거룩한 사람은 내적인 거룩함과 외적인 거룩함이 일치되어 있습니다.

이 말을 ‘깨끗함’으로 바꿔서 표현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겉과 속이 똑같이 거룩해야(깨끗해야) 한다.”가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바리사이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할 때가 많은데,

그것을 비판하려면 동시에 우리 자신의 ‘방종’도 반성해야 합니다.

율법주의도 나쁘고, 아무렇게나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도 나쁩니다.

바리사이들은 너무 지나치게 ‘외적으로만 철저하게 생활을 하는 쪽’으로 가버렸고,

오늘날의 우리는 반대로 너무 느슨해져 있습니다.

교회법과 규정들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지키는 우리 태도와 사고방식에 반성할 점이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겉만 깨끗하고 속은 깨끗하지 않은 자들을 이렇게 꾸짖으셨습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27-28).”

이 말씀에서 ‘죽은 이들의 뼈’ 라는 말을,

‘회칠한 무덤’에는 ‘생명력’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력이 없다는 것은 ‘구원의 힘’이 없다는 뜻입니다.

‘회칠한 무덤’ 같은 사람은 자기 자신도 구원받지 못하고,

남을 구원으로 인도하지도 못합니다.

 

연중 제22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말씀의 주제는 선과 악이란 사물이나 관습에 있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아, 이제 내가 너희에게 실천하라고 가르쳐 주는 계명과 법규들을 잘 들어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신명 4,1) 계명과 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선물로 이해되는 ‘법’을 말한다. 그 법은 ‘생명의 원천’이며, 윤리적 압박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자유의 원천이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 법을 통하여 당신 백성과 가까이 계시며, 당신 백성과 대화를 계속하신다.

 

복음: 마르 7,1-8.14-15.21-23: 모든 죄는 마음에서 나온다.

 

인간은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편의대로 이해하고 해석하여 변질시키고 있다. 논쟁의 시작은 주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는 것에 있다. 씻는다는 것은 위생상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해석에서는 이렇게 된다. 음식은 항상 거룩하다. 그리고 주님 앞에 있으므로 정결하다. 식기를 닦는다. 왜냐하면 어떤 외적인 불결도 거룩한 행위에는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 질문을 한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5절). 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조상들이 율법 해석으로 만든 규칙들이었다. 이 전통 중에는 모세의 율법에는 없는 많은 규정이 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이 아니라,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선과 악의 척도로 삼고 있다.

 

이렇게 된다면 조상들의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의 계명보다도 선악의 척도로 생각하기 때문에,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그들을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이사 29,13을 인용하신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 그들은 사람의 규정을 가르치며, 나를 헛되이 섬긴다.”(6-7절) 그리고 예수께서 전통을 비난하시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전통들이 사람의 계명에 지나지 않는데도 그 전통들을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계명보다 더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8절) 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드러나기보다는 인간의 헛된 생각을 고집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인간 생활을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바리사이적 형식주의가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얼마나 만연되어 있는지를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시대에 맞게 우리 마음을 열고 변화시키려는 마음도 가질 생각을 못 하고 그냥 전통에 물들어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금 우리 교회 안에도, 그리고 나 자신 안에도 이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여야 한다. 나에게서 악습을 어떻게 버려야 할지를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바꾸어 가야 한다. 선과 악은 우리 각자가 행하는 자유롭고 의식적인 모든 선택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마음속에 즉 인격의 심층부에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신다. “너희는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14-15절) 마음 안에, 모든 죄로 가득 차 있는 그 마음에서, 하느님과 이웃을 거스르는 마음으로 더러워진다.

 

예수님의 말씀은(21-23절) 무섭다. 마음에서 나오는 이러한 것들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한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21-23절) 인간을 더럽히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모든 종교적 윤리적 생활을 발견하고, 인간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도록 이끌어 주신다. 인간의 참된 모습은 바로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진실한 태도에 있다. 그러므로 음식이나 외적인 행동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계명은 바로 이웃에 대한 사랑이며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이웃에게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신다.

 

이 모든 것은 하느님 말씀의 법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고 실천함으로써, 즉 우리의 마음 안에서 생활화하고 실행함으로써 이룰 수 있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하느님께로부터는 오로지 선한 것들만 온다고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리의 말씀이 오는데 이제 그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현함으로써 능동적으로 구현시켜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말씀은 우리에게 벌이 되고 말 것이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보 1,22) 말씀을 실천하고 있다는 척도는 특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구체적인 태도이다. 실천적인 신앙에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진실성이다. 믿는다고 하면서 그 신앙을 증거가 되지 않으면, 즉, 살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이러면 신앙 자체가 형식적인 신앙, 바리사이에 불과하다.

 

 

하느님의 법은, 하느님의 규정은 인간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규정을 어기면 죄가 된다는 것으로 규정 지키기에만 급급해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사랑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뜻으로 마음이 무장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마음에서 악한 것들이 나와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의식이나 전통만을 중요시할 때 이웃을 거스르게 되며, 결과적으로 하느님을 거스르게 된다. 불결한 것은 바로 이것이며 인간을 더럽히는 것이다. 전통이나 규정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하면 그것을 더럽히는 결과가 되고 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은 어떠한 모습인가를 반성하면서 항상 주님의 뜻으로 충만한 우리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 23)

-한상우신부-


아름다운 창조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생명이다.

우리 내면을
아름답게
가꾸는 것이
올바른
신앙이다.

올바른 신앙은
하느님을
황급하게
되찾는 것이다.

하느님을
되찾는 것이
내면의 성찰
그 시작이다.

관계를 더럽히는
우리의
오만과 독선
이기적 욕망과
지나친
경쟁심을
다시 보게된다.

가슴 치는
성찰을 통해
깨닫게되는
것은

관계의 파괴
자연의 파괴
그 주범이
우리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관계의 파괴는
무분별한
자연의 파괴로
이어진다.

우리 마음도
다시 태어나야
본래의 빛깔을
되찾게된다.

마음과 실천은
분리될 수 없다.

깨어있는 마음이
깨어있는
실천이 된다.

아름답고
진실한 마음이
서로를 위하는
살아있는
마음이다.

나 중심으로
살아온
어두운
시간이

하느님 중심의
살리는 빛의
시간으로
나누어져야 한다.

우리의 내면이
하느님을
향할 때이다.

시간은
참으로
빠르다.

지금을 놓치고
내일을 이야기
할 수 없다.

사람을 더럽히는
죄에서 벗어나
사람과 환경을
위해 기도하는
거룩한 주일이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삶은
사람을 더럽히는
악한 삶에서
우리가 벗어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더럽힌 사람을
하느님께서
다시 깨끗이
씻겨주는
사랑이다.

우리 삶에
모셔야 할
하느님이시다.

살아계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

그 하느님께
우리 내면의
악한 모든 것을
봉헌한다.

봉헌은
위선을
치유하는
회심이다.

하느님
마음으로
돌아가는

마음의
주일이다.

사람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통합의 영성으로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어디 또 있느냐? 또한 ...이 모든 율법처럼 올바른 규정과 법규들을 가진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신명,4,7-8)
제1독서의 대목은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님의 명령을 전달하는 대목입니다. 모세는 그들 민족이 자존감을 가져도 되는 이유를 잘 설명해 주지요. 누가 뭐래도 이스라엘 민족은 주위 다른 이방인들과는 달리 첫째, 하느님께서 곁을 내어주신 백성이고, 둘째,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이 두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 두 조건이 어떻게 완성되어야 하는지 들려 줍니다.

"여러분 안에 심어진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이십시오. 그 말씀에는 여러분의 영혼을 구원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야고 1,21)
당신을 부를 때마다 언제라도 달려와 가까이 계셔 주시는 하느님께서 몸소 사람이 되셔서 사람들 가운데로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분은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 당신을 씨앗으로 뿌리셨습니다.

이 말씀은 살아계셔서 그저 사람의 마음 안에 간직되는 것으로 멈추지 않으시고, 그 말씀을 품은 사람과 함께 성장하십니다. 그가 실천으로써 열매를 맺게 되면 말씀은 이 세상에서 더욱 풍요롭게 현존하시게 되지요. 

야고보 사도는 고아나 과부처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고 자신을 세상의 유혹에서 지키라고 독려합니다. 하느님의 자녀에게는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수덕적 노력과 이웃을 돌보는 자선이 저마다 방향이 다른 두 갈래 길이 아닙니다. 

복음은 정결례에 대한 논쟁을 다룹니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마르 7,6)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은 채 음식을 먹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항의하자 예수님께서 이사야서의 한 대목으로 그들의 오류를 깨우쳐 주려 하십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동시에 사람을 사랑하고 돌봅니다. 겉으로도 속으로도, 입술로도 마음으로도 그렇게 하지요. 하느님은 개인적 수덕은 물론 경신례, 그리고 자선을 통해 사랑과 섬김을 받으십니다.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런 악한 것들은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마르 7,23)
사람의 더러움은 하느님만 아십니다. 그의 한계와 실존적 어두움을 아시는 하느님만 판단하실 수 있지요. 오히려 더러움은 사랑이 고갈된 마음으로 이웃을 단죄하고 심판하며 어려움에 처한 이웃을 외면하는 자를 놓치지 않고 포착해 일순간 물들입니다. 식사 전 손을 씻는 관습을 지키지 않아서 생기는 외적 문제와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지요.

예수님은 인간이 만든 전통이나 관습의 외적 준수에 앞서 율법 안에 깃든 하느님의 사랑이 존중되기를 바라십니다. 이를 통해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존중받으시니까요.  

dear friend! I pray that we, who have been called as Christians, will be able to fill in the content of love in the form we have been given by God and the Church today. I bless you on the journey of existential unity as you love and serve Him with your mouth, heart, and body.

 Sharing the Word - The 22nd Sunday of the Year - Are you not on earth but only in heaven? (ofmkorea.org)

-Priest Chanseon Kim-

 

 

View Past Daily Gospel Meditations: 

 September 2, 2018 22nd week of the year

 

Today's Adults: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Franciscan Saints: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 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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