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2021년 8월 22일 연중 제21주일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요한 6,60-69)
“Master, to whom shall we go?
You have the words of eternal life.
We have come to believ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투덜거립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은 열두 제자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벳자타 못 가에서 서른여덟 해나 앓던 사람을 치유해 주신 기적을 보고 갈릴래아 호수 건너편까지 그분을 따라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신 기적을 체험하고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려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빵”(요한 6,41)이라고 말씀하실 뿐 아니라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만 살 수 있다.’(요한 6,53 참조)고 하시자 많은 이가 투덜거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을 먹는다.’고 하실 때 ‘씹어 먹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셨기에, 그들은 ‘우리가 식인종인가?’라고 듣기 거북해하며 더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게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하고 물으십니다. 이 말은 ‘걸려 넘어지다’라는 뜻으로 “내 가르침이 너희를 걸려 넘어지게 하느냐? 이 가르침 때문에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그분처럼 살고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이신 삼위일체 하느님을 보여 주실 뿐 아니라, 사랑은 고통이 함께 따르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시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사랑의 길이지만, 영광의 길이 아니라 고난의 길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목숨까지 바치신 그 길은 부활하신 뒤에도 끝나지 않고 다시 시작하는 지극한 사랑의 길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 앞에서 우리는 묻습니다. “아니 죽기까지 하라고요?”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그래. 나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했고, 부활한 다음에도 갈릴래아에 가서 다시 시작했단다. 너는 어떻게 할래?”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부님! 나쁜 사람 되기 참 쉬운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인가 했습니다. 그 사연은 이렇습니다.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하다가 정치 이야기가 나왔고, 어느 정당이 싫다고 말했더니 “나쁜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 같이 있던 사람들도 자신을 나쁜 사람 보듯이 보더라는 것입니다.
이분의 말씀에 큰 공감이 되었습니다. 이 사회를 보면 아군 적군으로 나눠서 사는 커다란 전쟁터처럼 보일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보와 보수라는 이름으로 나눠진 그 모습에서 함께 사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민주주의 사회에 산다고 말합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신의 자유와 의지를 지키는 동시에 타인의 자유와 의지도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요?
다름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너무나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입니다. 다름이 있기에 함께 사는 것이지, 다름이 없다면 무엇 하러 함께 살겠습니까? 그냥 자기 맘 편하게 혼자 사는 것이 낫겠지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던 사람들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만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 중에서도 있었음을 오늘 복음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모습은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 보여줬던 모습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집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를 따르던 제자들도 자기 영광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세상에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부귀영화하고는 정반대의 길에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지금 병으로 아파하는 사람들, 마귀에 사로잡혀 힘들어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만 했습니다.
말씀이 듣기 거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그 말씀을 따르기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을 제외하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살 수 없었습니다. 결코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이제 우리도 베드로처럼 주님께 이런 기도를 바쳐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이런 기도를 통해서 올바른 삶, 영원한 생명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공지사항 한 가지 말씀드립니다. 제 아버지(조남중 베드로)께서 어제 오후 8시 47분에 하느님의 품으로 선종하셨습니다. 제 아버지의 천상영복을 위해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인해 가족장으로 조용히 진행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기도로만 함께 해주시길 바랍니다.
참, 장례를 치루기 때문에, 새벽 묵상 글은 내일 없다는 말씀드립니다. 죄송합니다.


많은 사람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나름의 보물을 가지고 있었지요. 배 안에서 사람들은 서로 자신의 보물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보물을 자랑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있는 한 노인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노인에게는 아무런 보물이 없었습니다.
밤늦게 태풍이 밀려왔습니다. 이 태풍으로 인해 배는 침몰하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랑스러운 보물을 챙길 시간이 없었습니다. 겨우 목숨만 건졌지만,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무도 없는 무인도였습니다.
이곳에서 노인은 자신의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지혜로 구조가 되기 전까지 생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 노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내 보물을 자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제 보물은 머리와 마음에 저장한 지식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잃거나 빼앗기지 않을 보물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요?

성체를 떠나는 사람들의 공통점: 육에 대한 분노와 적대감 부재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체험한 이들이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자 그 말씀이 너무 어렵다며 결국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갑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영적인 인간이 아니라 육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당신을 떠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성체성사의 본래 의미를 알게 되면 육적으로 사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살아오던 삶을 포기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도 바쳐야 하고 사람도 판단할 수 없으며 육체도 절제하여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성체는 육체를 파괴하려고 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까지 미워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육체를 사랑한다면 성체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해할 수 없다고 떠나버릴 것입니다. 오늘 유다인들이 보인 반응입니다. 그들은 계속 육체를 배 불리는 빵만 원했던 것입니다.
성체와 육체의 관계를 따지자면 떠오르는 상징이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에 나오는 동상입니다.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는 꿈을 꾸고서 마음이 불안하여 잠을 자지 못합니다. 그는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입니다. 그래서 현자들을 모아 그의 꿈을 맞추고 해석하라고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다 죽이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다니엘도 있었습니다.
다니엘이 죽기 직전 하느님께서는 환시로 그 꿈을 알려주십니다.
그 꿈은 이렇습니다. 머리는 황금이고 가슴과 팔은 은이며, 배와 허벅지는 구리이고, 종아리는 철, 그리고 발은 철과 흙이 섞인 동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산에서 떨어져 나온 돌이 쇠와 진흙이 섞인 발을 때려서 동상이 무너져 가루가 되는 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석합니다. 금으로 된 머리는 바로 지금 세상을 지배하는 네부카드네자르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올 나라들은 은과 같고 동과 같고 철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나라들을 지탱하는 발은 철과 흙이 섞여 있어서 매우 약합니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 순으로 그 금속의 상징을 볼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돌이 무엇인지는 모르는데 그 나라들을 모조리 허물어버립니다. 그리고 그 돌은 산처럼 커집니다. 그 돌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어떠한 나라들을 무너뜨리고 영원히 성장할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허물어져야 하늘나라가 세워질까요? 육체의 나라입니다. 동상은 육욕이 지배하는 나라임이 틀림없습니다.
그 돌의 역할을 하러 하늘에서 떨어져 나오신 분이 누구이시겠습니까?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발을 당신 피로 씻어주심으로써 우리 육체가 다 허물어지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 위에 당신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러나 내가 무너지기를 원치 않는다면 나를 허물러 오시는 그리스도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럴 때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라고 하게 됩니다.
요한복음은 성체성사의 제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으로 대체한 것입니다. 성체가 그 사람 안에 들어가면 하느님께서 겸손하게 나의 발을 씻어주시는 예식처럼 여겨집니다.
교황님이 오셔서 나의 더러운 발을 씻어주시고 발바닥에 입을 맞추신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제자들은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배신하고 도망갑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내리시자 이젠 도망치지 않습니다. 이전의 육적인 삶을 완전히 벗고 그리스도만을 위한 삶을 삽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성체라는 돌로 내 육체를 허물려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면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핑계로 성체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믿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내 육체의 모든 욕구가 허물어질 것을 직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체를 영하려는 이는 그 성체가 내 안에서 무엇을 허물어뜨리기 위해 날라오는지 알아야 합니다. 나를 영적인 나라로 만들기 위해 육체적인 나라를 허물러 날라오는 돌과 같습니다.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헐크’라는 푸른 괴물의 이야기를 TV나 영화로 보아왔습니다. 성격은 괴팍해도 약해빠진 본래의 브루스 배너라는 박사가 죽지 않으면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사는 자신이 사라지고 헐크가 날뛰는 것을 좀처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헐크의 최대 적은 자기 자신인 배너 박사입니다. 헐크가 열이 받을수록 배너 박사는 사라집니다. 그리고 헐크가 나타나 모든 일이 해결됩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 나를 죽이고 내 안의 거인을 깨워 이 세상에서 하시려는 일을 방해하는 브루스 배너 박사에게 열이 받아야 합니다. 그럴 줄 알아야 친구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인 발을 때리는 돌이 성체입니다. 성체가 나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그 어떤 것도 나를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내 안의 우상인 나 자신을 허물어 당신 나라를 만들기 위해 오시는 성체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 모십시다.
내가 죽어야 나도 살고 이웃도 살 수 있음을 모른다면 성체는 영원히 생명의 양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떠나는 사람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육에 대한 적대감도 없고 분노도 없다는 사실 하나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절친한 친구가 길을 가다가 뜻밖에 ‘금 덩어리’를 발견했습니다. 둘은 너무 기뻐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러나 금을 두고 서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금을 먼저 본 사람은 금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금을 들고 온 사람은 금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금을 가지고 하고 싶은 일도 달랐습니다. 한 사람은 금을 가지고 집을 사고 싶어 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금을 가지고 과수원을 사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금을 나누면 집도 사기 힘들고, 과수원도 사기 힘들었습니다. 그러니 서로 상대방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면서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었습니다. 힘들고 어려웠지만 서로가 믿어주고, 함께 했던 시간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금이 생기니 그토록 친했던 친구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강 한가운데에서 둘은 함께 금 덩어리를 버렸습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가졌던 나쁜 마음을 함께 강물에 던져버렸습니다. 둘은 서로 포옹하면서 우정을 확인했습니다.
동화책에서는 이렇게 금 덩어리보다 우정을 택하였지만 현실의 세계에서는 어떨까요? 경매에 나온 건물을 함께 투자했던 사람이 있습니다. 이익이 나오면 반씩 나누기로 각서를 만들었습니다. 건물에서 많은 이익이 생겼습니다. 각서도 있어서 당연히 이익을 반으로 나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나 봅니다. 각서는 강요에 의해서 쓴 것이라고 하면서 모든 이익을 혼자 독차지 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상대방을 고소해서 감옥으로 가게 했습니다. 위증을 했던 법무사는 자신이 돈을 받고 거짓을 말했다고 했지만 세상을 떠났습니다. 18년 동안 억울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은 혼자서 이익을 독차지 한 사람을 상대로 고소를 하였습니다. 법은 공소시효가 있기에 억울하지만 이익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혼자서 많은 이익을 차지했던 사람은 은행 계좌에 숫자는 늘었을 것입니다. 법의 심판을 피해 갈 수는 있겠지만 양심의 법정에서는 대가를 치러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귀와 영화를 누릴지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에 머물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만큼 재물에 대한 욕심과 유혹이 크기 때문입니다. 재물 때문에 친구를 속이고, 하느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에게는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습니다. 계명을 잘 지켰던 부자 청년은 슬퍼하면서 예수님의 곁을 떠났다고 합니다.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집 앞에서 얻어먹던 라자로는 아브라함 품에서 편히 쉬고 있지만 부자는 하느님 나라에 가지 못했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자신의 것을 가난한 라자로에게 나눠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는 것이 더 쉽다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창고를 가득 채운 부자는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썩어 없어질 세상의 창고에 쌓지 말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하느님 나라의 창고에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도 말씀하셨습니다. 전대에 금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들의 꽃도, 하늘의 새도 하느님께서는 살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돌보신다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하느님의 의로움과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선택’입니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와 내 가족은 우리를 이집트에서 이끌어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하느님을 따르겠습니다. 여러분은 누구를 선택하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수아에게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걸어온 그 모든 길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그러자 시몬 베드로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책임지지 않는 선택은 진정한 선택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선택하였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살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맺어진 하느님과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를 사해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습니다. 그 선택은 소중한 것이고, 그 선택은 삶의 방향을 바꾸는 선택이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선택한 우리들 신앙의 집을 아름답게 꾸며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다른 많은 제자들은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고, 예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나의 신앙이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루는 신앙인지 돌아보고, 주님을 충실하게 따를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 당신 말씀은 영이며 생명이시옵니다. 당신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한 인간 존재 안에 영과 육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바입니다!
-양승국신부-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혜성처럼 등장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기 시작했는데, 추종의 주된 이유는 다분히 육적·세속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지니신 강력한 능력과 은총을 바탕으로 세세대대로 무너지지 않을 천년왕국을 건설하시리라 기대했습니다. 오랜 이스라엘 역사 안에 그 어떤 예언자나 판관, 왕이나 지도자도 성취하지 못한 주변 강대국들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자주, 전쟁에서의 승리, 승승장구, 탄탄대로를 예수님께서 이루어주실 것을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 입에서 나온 말씀은 그들을 큰 실망에 빠트렸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요한복음 6장 68절) 모든 것을 걸었던 예수님께서 전혀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 말씀을 하시자, 즉시 수많은 제자들이 그분을 떠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육을 가장 중요시 여기고 영은 뒷전이었던 사람들에게, 육은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영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씀하시니, 사람들은 귀에 거슬려하며 투덜거리며 떠나간 것입니다.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앞뒤 문맥을 잘 고려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 존재는 육으로만 살지도 않지만, 영으로만 살지도 않습니다. 한 인간 존재 안에 영과 육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는 것, 그것이 하느님께서 가장 바라시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영과 육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키셨지만, 이는 육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주시는 분은 성령이심을 강조하기 위한 말씀입니다. 육은 영과 밀접히 결합되어야만 가치가 있듯이, 영 역시 육과 조화를 이루어야 가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육을 통해 이 세상에 나시고 존재하시고, 인류 구원 사업을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쓸모없는 육이란 영혼이 완전히 배제된 채, 오로지 육으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한 인간 존재 안에 영적인 삶이란 조금도 남아있지 않고, 그저 동물적, 감각적, 말초적 삶만 남아있는 그런 사람들 말입니다.
그러나 육을 하느님께서 육화하신 말씀의 성전으로 이해하고 수용할 때, 그 육은 분명 성화(聖化)와 생명과 구원으로 나아가는 통로가 될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
-송영진신부-
베드로 사도는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주님의 말씀’ 안에서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지만, ‘말씀’을 외면한 사람은 풀과 꽃이 마르고 시들어버리는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집니다.
요한 사도는 그 ‘말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 말하고자 합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셨습니다.
우리가 그 생명을 보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 그 영원한 생명을
선포합니다. 영원한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요한 1,1-2).”
예수님은 ‘생명의 말씀이신 분’이면서 동시에 ‘생명이신 분’입니다.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말씀’이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방법)을 가르쳐 주는
말씀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말하였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두고 투덜거리는 것을 속으로 아시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자들이 누구이며 또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알고 계셨던 것이다(요한 6,60-64).”
여기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라는 말을, 열두 사도가 아닌 제자들과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64절에 배반자 유다가 언급되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열두 사도도 포함하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때까지는 사도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뒤의 66절을 보면, 사도가 아닌 제자들과 신자들은 대부분
예수님 곁을 떠났지만, 사도들은 예수님 곁에 남았습니다.
사도들이 떠나지 않고 남은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이라는 말은, 당신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과
당신의 살과 피를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을
가리키는 말입니다(요한 6,32-58).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 라는 말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뜻과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은 듣기가 거북하고, 이해하기가 어려운
말씀인데, 그래도 우리는 ‘믿음으로’ 그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이 말이 너희 귀에 거슬리느냐?” 라는 말씀은, “너희의 믿음을 흔들어 놓을
정도로 나의 말이 어렵고 거북하다는 것이냐?” 라는 뜻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는 이해할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면서
천주교 신자가 되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게 되면 어떻게 하겠느냐?”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보게 되면,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서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깨달음’은 이해하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우리 교회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믿음’으로 가는 통로 같은 것입니다.
말로 설명하거나 표현하지는 못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믿게 된다면, 그것은 말씀을 깨달은 것입니다.
만일에 ‘안 믿는 사람’이 ‘믿는 사람’에게
“성체성사를 설명해 보아라.” 라고 요구한다면?
그때 ‘믿는 사람’이, “인간의 언어로 알기 쉽게 설명은 못하지만, 그래도 나는
성체성사를 ‘생명의 진리’로 믿는다.” 라고 확신에 찬 태도로 대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적인 지식이나
상식으로만 판단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믿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어도 무조건 믿어라.” 라고 윽박지르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에는, “먼저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해가 되면 그때 가서 믿겠다.” 라고 고집부리면 평생 못 믿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이해가 안 되더라도 믿는 사람은 언젠가는 깨닫게 되고 이해하게 됩니다.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을 지금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어렴풋이 보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 볼 것입니다.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하느님께서 나를
온전히 아시듯,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그래도 좀 더 쉽게 설명하실 수는 없었나? 또 기왕이면 거북하지 않은 표현을
사용하셨더라면 좋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런 의문에 대한 답은, “예수님의 표현 능력이나 설명 능력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입니다.)
사도가 아닌 제자들이 대부분 예수님 곁을 떠난 뒤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고 물으시는데(요한 6,67),
이 말씀은 “떠나고 싶으면 떠나라.” 라는 뜻입니다.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합니다(요한 6,68-69).
이 말은, “저희는 주님을 메시아로 믿고 있고,
주님의 말씀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이 말에는, “아직 주님의 말씀이 이해가 잘 안 되지만,
그래도 주님만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연중 제21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은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에 대한 군중들의 반응을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을 떠나가는 사람도 있지만, 베드로와 같이 큰 신뢰를 보이기도 한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복음에서 예수님 말씀의 핵심은 당신을 만나려면 무엇보다도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저 눈으로 보고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그분을 실제로 체험할 수 없다면 무엇으로 그분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 체험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몸과 피는(참조: 요한 6,54-56) 확실히 볼 수 있는 빵과 포도주라는 실체를 통한 상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빵과 포도주라는 형상 때문에 믿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복음: 요한 6,60-69: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예수님께 반감을 품었던 유다인들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던 제자들 사이에서도 예수님의 말씀을 수긍하지 못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60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믿음에 대해 집중시키기 위해, 그래서 하느님의 지혜를 다시 입게 하려고 당신의 말씀을 설명해 주신다. 그리스도인들이 육(살) 대신에 영(성령)에 의탁한다면 더 위대한 사실을 볼 수 있다. “영은 생명을 준다. 그러나 육은 아무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63절) 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은 육으로는 하느님의 신비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기서 믿음의 문제가 나온다. “그러나 너희 가운데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있다.”(64절) 하신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다.”(65절) 배반자의 윤곽이 드러났으며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므로 육이 아무 쓸모 없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반발심과 배척감을 불러일으키고, 어떤 이들에게는 신앙의 원인이 되고 있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이루어지는 모든 것은 육에서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왔음을 주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모두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이며, 그 말씀을 통해 생명의 빵이신 당신 자신을 점차 드러내고 계시다. 이 말씀들은 신앙을 통해 받아들여질 때, 영이며 생명이 된다. 즉 성령을 통해 살아있는 그 말씀들은 이미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들이다. 그분의 뜻을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시는 말씀도 성사로 이해한다. 말씀과 성사는 그리스도의 실재 전체를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하고 물으신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당신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반대편에 설 것인지 결정하라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대답하는데 처음에는 자신이 없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68절) 그러나 곧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원천임을 깨닫고는 기쁨과 확신에 차서 확실하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68절) 고백한다. 마침내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69절) 고백한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주는 말씀을 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실 능력을 갖추고 계심을 고백한 것이다. “믿고 알고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믿는 것이 아는 것보다 선행하는 것이며, 그 앎을 생기게 하는 것이다. 사실 믿음은 앎의 최고 형태이다. 그러나 그 인식의 기원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시다.
오늘 복음을 보면 신앙의 위기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신앙의 결핍이 무엇보다도 사랑할 능력이 부족한 데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결단을 촉구하신다.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67절) 우리가 성령 안에 살고 있다면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여호수아는 약속의 땅을 차지하여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나누어주고 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하느님을 저버릴 것인지를 결정하고 선택하게 한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베풀어주신 은총을 기억하고서는 주님을 선택한다. “다른 신들을 섬기려고 주님을 저버리는 일은 결코 우리에게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6.18) 우리도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 구원을 체험하면서 항상 그분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말씀과 성사는 항상 살아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바오로 사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설명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돌아가시고 끝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시듯이 그러해야 한다고 한다.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 요구는 당시의 상황이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한다면 누가 첫째이고 누가 나중인가를 따지지 않는다. 바오로는 첫째가는 사람이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하셨듯이 더 많이 사랑해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이 사랑의 관계에서 둘은 서로 간에 사랑의 대상으로서 남게 될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를 특히 남편과 아내가 상호 신뢰심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모든 형태의 폐쇄적인 태도와 이기주의적인 모든 것을 극복하는 데 필요한 힘을 얻는 원천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혼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위대한 신비가 되어야 한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2) 이러한 혼인생활은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와 교회를 쇄신시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성체성사의 신비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며 언제나 하느님의 편에서 살아가면서 그분의 참된 자녀로서, 사랑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열심히 노력하여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 63)
-한상우신부-
계절의 변화는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다.
생명은
살아계신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진심으로
신뢰한다.
말씀에
뿌리를 내리는
삶이
영적인 삶의
시작이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영적인 자녀로
재창조하신다.
우리가
누군지를
제대로
알게하여
주신다.
우리의
가난함을
보게하신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영적인
사랑의
관계이다.
영적인
하느님 사랑이
우리를
새사람으로
변화시키신다.
영적인 삶이
아름다운
열매이다.
생명은
하느님의
영(靈)을
향해야 한다.
하느님을
알게 하여
주시고
하느님을
사랑하게
하여주시는
영이시다.
생명의
주체는
하느님의
영이시다.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신
주님을 믿고
주님을
따라야 할
우리들이다.
주님의 뜻인
주님과 함께
해야 할
우리들 삶이다.
완전하고
온전하신
주님 사랑을
받아들여 할
영적인 삶이다.
영적인 성장은
하느님 말씀을
듣는 참된
겸손이다.
들판의 벼가
정성껏
영글어간다.
고개를
숙인다.

-오상선신부-
김대건 신부님의 탄신 200주년을 경축하는 오늘 주일 미사의 말씀에서는 주님을 향한 신앙 고백이 들려옵니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며 생명이다."(요한 6,63)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요한 6,51)이라고 하신 뒤 유다인들 사이에서는 말다툼까지 벌어집니다. "제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도 이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거북해하지요.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영으로 알아들어야 합니다.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살점을 베어내거나 물질적인 빵으로 둔갑하는 마술이 아니라, 사람에게 영육의 생명을 부여하기 위해 자신을 내놓으시겠다는 뜻이니까요. 그리고 인간에게 가장 기본이 되는 생명 유지 활동이 먹는 행위이니, 그분은 당신이 먹거리가 되어 주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베드로가 예수님께 고백합니다. 제자들 가운데 "생명의 빵"이라는 말씀에 불편함과 거북함을 느낀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떠난 뒤입니다. 그들의 귀와 마음이 영적으로 열리지 않은 까닭에,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수용하는 데 한계를 느낀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는 예수님을 떠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어쩌면 베드로 역시도 아직 "생명의 빵"에 대한 확신이 부족할 수 있습니다. 그저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반복해 보여주실 것으로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르지요.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9)
하지만 베드로는 적어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예수님에게서 등을 돌리지는 않습니다. 그의 말대로 그분을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고, 또 알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그래도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이때 믿는 이는 억지로 이해하려 애쓰기를 멈추고 믿음에 안착해서 그저 기다리며 머무르는 자세로 전환합니다. 이 인내가 종종 신비로 이어지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는 걸 알기 때문입니다.
제1독서는 가나안 땅 분배를 마친 뒤, 여호수아가 스켐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모아 야훼 신앙을 확인하는 대목입니다.
"나와 내 집안을 주님은 섬기겠다."(여호 24,15)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8)
이집트를 나온 뒤 광야에서 보낸 40년의 세월 동안 첫 세대는 이미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나안 땅 정탐을 다녀와서 백성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려 했던 칼렙과 여호수아만 약속의 땅을 밟게 되었지요.
지금 스켐에 모여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야훼 하느님을 불신하다 죽어간 이들의 후손으로 이집트의 재앙이나 갈대바다의 기적을 경험하지 못한 세대입니다. 그들은 눈으로 보거나 직접 체험하지 않은 하느님의 위대한 업적을 누누히 듣고 믿음으로 수용하여 기억의 체계로 다음 세대에 전달해야 하는 중요한 징검다리 세대인 것입니다. 직접 체험이 아니더라도 믿음을 작동시켜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야 하는 이들이지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혼인 관계의 신비로 이야기합니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됩니다. 이는 큰 신비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를 두고 이 말을 합니다."(에페 5,31-32)
사도 바오로는 혼인한 부부가 서로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남편과 아내의 모범, 본보기, 원형은 그리스도와 교회입니다.
남편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듯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듯 남편에게 그리 해야 합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스도와 교회, 둘 사이는 종속이나 차등 관계가 아닌 신비적 일치의 관계입니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시고 교회 모든 구성원은 그 지체이니, 결국 그리스도와 교회는 뗄 수 없는 한 몸입니다. 남편과 아내도 그렇습니다.
혼인 관계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영으로 알아들어야 하는 신비입니다. 자칫 문자 그대로 누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하는지, 머리가 높은지 몸이 중요한지 따지고 든다면 결론 없이 맴도는 거북하고 불편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서로서로 얼마나 사랑하고 섬기는지 영으로 감지하고 믿고 관상하는 이는 어렵잖게 그 일치의 신비로 들어갑니다.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을 말씀하신 뒤 이천 년이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믿음으로 그 사랑의 진리를 받아들이고 실제로 성체성사를 통해 생명을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명의 빵을 이 세상에서 현존케 하시는 분은 바로 "말씀"이시지요.
말씀과 성체 안에서 나날이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으며"(화답송) 이 믿음을 구원의 역사 안에서 계승하고 전하는 우리 모두는 참으로 복됩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아멘.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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