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8월 18일연중 제20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8. 18. 07:07

2021 8월 18연중 제20주간 수요일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마태오 20,1-16)

 

  Am I not free to do 
as I wish with my own money?
Are you envious because I am generou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 복음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한 시간 일한 일꾼과 똑같은 품삯을 받게 된 맨 먼저 온 일꾼들이 자비한 포도밭 주인에게 투덜거리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를 하늘 나라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 포도밭 주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시며, 품삯은 하느님을 믿고 따른 신앙생활에 대한 하느님의 선물인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투덜거리는 일꾼들처럼 우리도 하느님께 불평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 저는 당신 마음에 드는 신앙인이 되고자 평생을 얼마나 조심하며 살았는데, 죽기 바로 전에 세례 받았다고 똑같이 천국에 간다니 말이 됩니까?”
그런데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물로 받게 되는 ‘영원한 생명은 관계의 문제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는 생명이신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통해 살아 있는 이가 될 뿐 아니라, 죽음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2』, 114면 참조). 따라서 죽기 바로 전에 하느님의 이름만 알고 죽은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한평생 하느님 안에서 울고 웃으며 그분과 함께 살아온 사람이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는 너무나 다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과의 친교로 이루어진, 그분을 알고 그분을 닮고자 내어 주는 삶을 통하여 맛보게 되는 행복의 크기와, 마침내 이 세상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나서서 그분과의 일치로 얻게 되는 영원한 행복의 깊이는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지만, 우리가 받아들이는 선물의 크기와 깊이는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한 시간의 양이 아니라, 하느님과 얼마나 깊은 인격적 관계를 맺었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학생을 만나 대화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제게 “신부님, 아저씨 같아요.”라는 것입니다. 솔직히 이 말을 듣고서 순간적으로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판단이 되지 않더군요. 제가 스스로 잘 꾸미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제가 하는 말투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저씨 같다’라고 말이 그렇게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말을 듣고서는 기분이 좋아야 합니다. 할아버지로 본 것은 아니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아저씨로 봐야 합니다. 50대 중반을 향하는 저는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아저씨입니다. 이 학생은 신부니까 다른 아저씨처럼 고리타분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별 차이가 없으니 이런 말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한 말에 기분 상할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중요함을 깨닫습니다. 당연한 말에 기분 나빠할 필요가 없고, 이 말에 나를 변화시켜야겠다는 마음이 들면 그렇게 노력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역시 당연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리고 나를 변화시키는 노력을 하면 그만입니다.

포도원 일꾼의 비유 말씀입니다. 하루 중 서로 다른 시간에 불린 일꾼들이 똑같은 품삯을 받는다는 비유이지요. 이에 대한 많은 교부들은 서로 다른 시대에 태어나 의롭게 산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루’는 역사 전체를 뜻하며, 아담의 죄 이후 예수님께서는 그 ‘하루’의 저마다 다른 때 의로운 사람들에게 그들의 행실에 대한 보상을 약속하시며 그들을 훌륭한 일로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공정하게 성령의 은총을 주심으로써 모든 성도들이 하느님과 완전하게 하나 되게 하시고 그들의 영혼에 하늘 나라의 인장을 찍으시며 그들을 생명과 불멸로 인도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때를 채우지도 않았는데 하느님 나라에 들게 하시니 하느님의 정의가 잘못되었다고 투덜대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관대함을 불평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편견에 빠져서 자신이 불공평한 대접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실제로 하느님의 선하심은 엄청납니다(자신이 오후 다섯 시에 불림을 받은 일꾼이라 생각해보십시오. 그리고 똑같은 은총을 받았습니다. 공평하지 않으십니까?).

결국 우리를 향한 주님의 모습에 대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단지 우리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일하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원칙에 맞춰서 자신을 변화시키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베풀어주기를 기뻐하면서 죽음을 근심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남이 네게 구할 때, 네가 줄 수 있다면 주고, 줄 수 없다면 그 까닭을 알려 주어라. 그렇게 하면 주지 않더라도 그 사람이 성내지 않을 것이다. 교활한 꾀를 피워 거절해서는 안 된다(성 예로니모).

아이들은 사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나무람 속에서 자라면 비난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적개심 속에서 자라면 싸우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비웃음 속에서 자라면 부끄러움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수치 속에서 자라면 죄의식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관대 속에서 자라면 신뢰를 배운다
만약 아이가 격려 속에서 자라면 고마움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공평함 속에서 자라면 정의를 배운다
만약 아이가 보호 속에서 자라면 믿음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인정 속에서 자라면 자기 자신을 좋아하는 것을 배운다
만약 아이가 받아들임과 우정 속에서 자라면 세상에서 사랑을 배운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보게 된, 도로시 론 론트의 글입니다. 우리 아이가 잘 성장하기를 바라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어떤 환경을 어른이 만들어 줘야 할까요? 그리고 이를 위해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복음을 전하는 일이 유일하게 가치 있는 일이고 행복일 수 있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가 첫째가 되고 누가 꼴찌가 되는지를 설명합니다.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이 지상에서 맡겨진 일을 즐겁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일이란 육체적으로는 고된 노동입니다. 오늘 비유 말씀에 따르면 오후 5시에 와서 6시까지 한 시간 일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주님이 맡겨주신 일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일거리가 없어서 아침부터 5시까지 걱정만 하며 서성였던 그 시간이 고통이었습니다.

  

    반면 꼴찌가 되는 사람들은 아침 6시부터 저녁 6시까지 죽도록 고생한 이들입니다. 그만큼 일을 고되게 했다는 뜻입니다. 사실은 마음은 편했으니 몸은 좀 힘들어도 자신을 써 준 포도밭 주인에게 감사했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하늘 나라에서 첫째가 되는 사람은 ‘마음의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고, 꼴찌가 되는 사람은 ‘육체의 행복’을 추구한 사람입니다. 일꾼인데도 노는 게 더 행복해 보인 사람들이라면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몸은 좀 힘들지만, 마음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아니면 마음은 좀 불편해도 몸이 편한 것을 원합니까? 몸도 마음도 다 편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두 의자에 동시에 앉을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만 택해야 합니다.

    내가 어디에 집중하느냐가 하느님 나라의 위치를 결정합니다. 육체를 괴롭힐수록 성령께서 마음의 평화를 증가시켜 주십니다. 반면 육체를 편하게 두면 마음의 평화를 잃습니다.

    리오넬 메시가 파리 생제르맹으로 이적했습니다. 이적하자마자 그의 새 유니폼이 하루에 800억 원어치 팔렸다고 합니다. 많은 나이에도 아직도 건재한 그는 최대한 오래 운동장에서 뛰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리오넬 메시보다 바르샤 1군에 더 빠르게 데뷔했고 메시보다 더 뛰어나리라 예측되었던 선수가 있습니다. 스페인 출신 보얀 크르키치입니다.

    메시가 17세에 데뷔해 17세 10개월 만에 첫 골을 넣었다면 보얀은 메시의 기록을 더 단축합니다. 그가 첫 골을 넣은 것은 17세 53일이었습니다. 17세 때 31경기에 출전에 10골을 넣은 것은 17세에 대뷔한 라울 곤잘레스의 9골을 경신한 신기록이었습니다.

    문제는 정신력이었습니다. 메시보다 기록 면에서 앞섰던 그는 부담을 이겨낼 수 없었습니다. 매 경기가 메시를 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경기는 어느 정도 즐겨야 하는데, 그는 불안함에 발작 증세까지 일으켰고 승승장구하던 그의 행복에 브레이크가 걸렸습니다. 그 이후 그는 그저 평범한 선수로 여기저기를 전전하는 중입니다.

    도대체 ‘적어도 메시’라고 불리는 재능을 가지고 그는 왜 성공하지 못했을까요? 메시는 부담을 이겨냈고, 그는 이겨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골을 넣을 때마다 항상 성호를 긋고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이 말은 자기 영광이 아닌 주님 영광을 위해 뛴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메시를 넘어서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 보얀은 자기 영광을 위해 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 영광을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결국, 자기 영광은 이기심이기 때문에 마음에서 갈등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포도밭은 축구 경기장 같습니다. 일하는 사람은 두 부류입니다. 자기를 고용해 준 주인에게 감사하는 사람과 돈을 벌기 위해서만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은 일하는 게 고됩니다. 그러나 아무도 써주지 않는 자신을 써 준 주인에게 고마운 사람들은 온종일 일해도 한 시간밖에 일한 것 같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늘 나라에서 살게 될 위치를 결정합니다.

    독일의 고백 교회를 창설했던 ‘마틴 니묄러’(1892∼1984) 목사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히틀러의 나치 정권하에서 목사들로 구성된 긴급동맹을 결성했습니다. 그리고 조직적으로 히틀러의 나치 정권이 교회 일에 간섭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또 나치가 무고한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것도 항거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비밀경찰인 게슈타포에 의해서 체포당했습니다. 8년 동안 감옥 속에서 옥고를 치렀습니다. 그러다 1945년 세계 제2차 대전이 거의 끝나갈 무렵 연합군에 의해서 가까스로 구출을 받았습니다.

    이때 밤에 잠을 자면서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번만 꾼 것이 아니고, 똑같은 꿈을 무려 일곱 번이나 반복해서 꾸었습니다. 꿈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니묄러 목사가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줄을 서서 자기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니묄러 목사도 끼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뒤에서 나지막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목소리로 탄식하고 있었습니다.

    “아무도 나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서 니묄러 목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어디에선가 귀에 익은 듯한 음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요즘 세상에 복음을 전해 받지 못해서 믿지 못했다는 것이 이해가 잘 안 되었습니다. 목사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다름 아닌 아돌프 히틀러였습니다.

    그는 아찔했습니다. 목사는 사실 지금까지 히틀러를 엄청나게 미워했습니다. 조직적으로 항거했습니다. 심지어 히틀러를 암살하려고까지 계획을 세웠습니다. 똑같은 꿈을 마지막으로 일곱 번째 꾸던 날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니묄러야! 너는 목사로서 히틀러를 미워하고 손가락질하기만 했지, 한 번이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하며 또 그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생각했었느냐? 너는 어찌 그도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너의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느냐? 왜 사랑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려고 생각하지 못했느냐?”

    니묄러 목사는 깊이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로서 그를 위해 진심 어린 기도를 해 주지 못하고 그에게 복음을 전해 주지 못한 나에게 더 큰 책임이 있구나!”

    그렇게 해서 니묄러 목사는 참회하는 심정으로 『전쟁 책임 고백서』라는 책을 써서 “전쟁의 책임은 히틀러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목사인 나에게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독일은 물론이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목사로 있으면서 내 생각이 옳음을 입증하기 위해 히틀러에 저항했을 뿐 진정 하느님을 위해 히틀러에게 무엇을 해야 했는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지막 심판 때, 평생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가 편한 자리를 택하며 복음을 전하는 일을 힘겨워했는가, 아니면 차라리 복음을 전하는 것이 다른 모든 삶보다 더 가치가 있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는가로 심판받게 됩니다.

    포도밭 밖에서 놀고 있는 것보다 비록 힘은 들지만, 복음전파의 일을 하는 것이 더 행복하다 여길 때 하늘 나라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복음을 전하는 일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그래서 온종일 복음을 전하고도 복음을 전하기 위한 시간이 항상 부족해야 합니다. 그 일터로 불러주신 분께 충분히 감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항상 감사하기 위해서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닌 주인에게 보답하기 위한 일이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높이 올라갑니다. 이것이 어디에서건 나를 죽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조재형신부-

 

매일 아침 일어나면서 어떤 느낌이신지요예전에 신학교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면 함께 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Laudate Dominum!(주님을 찬미합니다.) Deo Gratias!(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도 아침에 일어나면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합니다물론 몸이 아프거나피곤하거나과음을 한 날에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그러나 대부분은 4시면 일어납니다며칠 전에는 3시 45분에 눈이 떠졌습니다. 4시까지는 15분이 남았습니다. 15분이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신학교에서 15분이면 묵주기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매일 저녁 7시 15분에 묵주기도를 시작하였고, 7시 30분이면 성당으로 들어가서 저녁기도를 함께 하였습니다요즘은 묵주기도 하는데 30분 정도 걸립니다. 15분이면 주일미사 강론을 할 수 있습니다저는 10분 정도 하지만 15분이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예전에 선배 신부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짧은 강론은 마음을 움직이지만긴 강론은 몸을 움직이게 합니다.” 잘 준비된 강론은 15분이면 깊은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세바시(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라는 프로가 있습니다세바시는 프로그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여러분은 15분이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고 계십니까복잡한 도심한 번 놓친 버스를 다시 기다리느라 15분을 보낼 때도 있습니다어떤 때는출출한 늦은 밤에 라면을 하나 끓여먹는 시간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또 어떤 때는 15분은 빈둥거리며 잡지를 뒤적이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여기 여러분이 가장 소중하고 보람 있게 15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합니다바로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15분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입니다짧은 시간일지라도 그 시간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합니다불평과 불만을 채우는 시간이라면남을 험담하고 비난하는 시간이라면욕심과 욕망을 채우는 시간이라면 15년이 아니라 150년이 있어도 하느님께 갈 수 없습니다그러나 15분이면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합니다그렇습니다하느님께 가는 것은 시간이 길이가 아닙니다하느님께 가는 것은 시간의 의미입니다.

 

15분이면 지하철역에서 시를 한편 읽을 수 있는 시간으로도 충분합니다간발의 차이로 지하철이 떠났을 때입니다스크린 도어에 제게 감동을 주는 시가 있었습니다제목은 늦었다고 원망하지 마라.’였습니다. ‘늦었다고 원망하지 말라그래야 하늘을 보고뺨을 스치는 바람을 느끼고춤추는 꽃을 볼 수 있다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는다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짧은 시였지만 지하철을 놓친 것이 오히려 감사했습니다그 뒤로 시간을 내서 스크린 도어에 있던 시를 읽곤 했습니다지하철은 곧 다시 오지만 시를 다시 만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그때 제게 감동을 주었던 시가 더 있었습니다. ‘꽃잎과 낙엽녹차가고 오지 않는 사람입니다. 15분이면 부모님에게 문자를 보낼 수 있습니다. 15분이면 사랑하는 가족에게 안부 전화를 할 수 있습니다. 15분이면 성무일도를 바칠 수 있습니다오늘 입당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보소서저희 방패이신 하느님그리스도의 얼굴을 굽어보소서당신 뜨락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천 날보다 더 좋사옵니다.” 시편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천 년도 당신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 마치 한 토막 밤과도 비슷하나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이야기하십니다하느님의 시간은 자비와 연민의 시간입니다하느님의 시간은 절대평가입니다인간의 시간은 성과와 능력의 시간입니다인간의 시간은 상대평가입니다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머물 곳이 많습니다그러니 힘들고 수고하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오십시오나의 멍에는 편하고나의 짐은 가볍습니다.” 오늘 하루 시간의 길이를 생각하기 보다는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양승국신부-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4~15절)

 어떤 일이든 사랑을 담아서 하라

 -반영억신부-

 

하느님께서 주신 본디부터 가지고 있는 애정이나 남을 동정하는 마음을 인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또한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어떤 사람은 따뜻한 마음을 지녀서 인정미 넘치는 사람으로 부르고 어떤 사람은 야박하여 인정머리가 없다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바로 몰인정한 사람입니다. 몰인정한 사람은 세상에는 좋은 것이 많은데 좋지 않은 것을 더 많이 얘기하고 그것으로 마음에 화를 담기도 합니다. 물론, 더 좋은 것을 만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자꾸만 부정적으로 생각하여 봐야 할 것을 올바로 보지 못하게 됩니다. 자기는 잘하고 있다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 남들이 보면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또한 잘한다고 하는 것이 자기모순에 빠진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인정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포도원 일꾼과 품삯에 대한 비유입니다. 9시, 그리고 12시와 오후 3시, 그리고 오후 5시쯤에 일꾼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일꾼들의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하였습니다. 주인이 품삯을 계산하는데 5시에 온 사람을 먼저 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일찍 와서 일하던 사람들은 약속과 다른 더 많은 기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대가 무너지자 실망하였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주인이 약속을 어긴 것도 아닌데 상대적인 박탈감, 시기심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정의를 강조하는 모습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다른 이가 좋은 것을 얻는 모양새를 두고 내 안에서 악을 꺼내는 감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상대의 좋은 것을 파괴하고 싶어 하는 못된 욕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생각을 바꿔보면 어떨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이 그 시간에 일해서 당당하게 그만큼을 벌었다고 한다면 그는 남에게 손을 벌려 동정을 받지 않았기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절박함에 처한 사람이 그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겠습니까? 내가 그들의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하였는데 누군가 챙겨주었다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정의보다는 사랑이 먼저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포용하지만 정의는 결코 사랑을 포용할 수 없습니다. 사실 불평불만도 습관이 됩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것에서 만족하고 더 나은 내일을 위해서 노력할 것이지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불평할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후하다고 해서 시기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비에 감사하고 나도 크게 베풀 줄 아는 인정을 지녀야 합니다. 주인이신 하느님의 것을 세상의 것처럼 생각하는 우리가 잘못이 아닐까요?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선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일을 많이 하고 적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성을 쏟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얼마나’가 아니라 ‘어떻게’가 먼저입니다. 그러므로 매사를 긍정으로 생각하고 정성을 쏟았으면 좋겠습니다. 하늘나라의 관점은 정말, 일의 성과가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잘 가꾸어야겠습니다. 아무리 많은 일을 하였어도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한 것처럼 보여도 사랑이 담기면 많은 일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떤 일을 하든지 사랑을 담아서 하기 바랍니다. “네 눈이 성하지 못하면 온몸도 어두울 것이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면 그 어둠이 얼마나 짙겠느냐?”(마태6,23)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송영진신부-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한다면,

누구나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의 경우, 만일에 사람에 따라 ‘구원’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 차이에서 차별이 생기고, 그러면 그것은 구원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의 경우, 만일에 사람에 따라 ‘생명’에 어떤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생명이 아닌 것이 되어버립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는 ‘생명’에 어떤 차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 자체도 절대적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보다 ‘더 긴 영원’이나, ‘더 짧은 영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더 긴 영원, 더 짧은 영원’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입니다.

내용이나 질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보다 ‘더 깊은 영원’이나, ‘더 얕은 영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하느님과 맺는 관계, 일치, 친교, 행복으로

표현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맺는 관계나 일치나 친교, 또 그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도 역시 절대적이고 유일한 것이어서, 사람에 따라 다를 수가 없습니다.

외적으로도 그렇고 내적으로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과 맺는 ‘친교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고,

그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의 깊이’에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 또는 있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는데,

그런 생각은 ‘교만’에서 비롯된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그런 교만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버리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9-15)”

 

‘맨 먼저 온 이들’의 불만을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자들에게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 말은 “일을 적게 한 자들에게는 품삯도 적게 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자기들이 받은 품삯에 대해서가 아니라,

‘맨 나중에 온 이들’이 받은 품삯에 대한 불만입니다.)

2)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에게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자들과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앞의 말과 비슷하지만, 이 말은 “일을 많이 한 우리에게는

품삯을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맨 나중에 온 이들’이 받은 품삯에 대해서가 아니라,

자기들이 받은 품삯에 대한 불만입니다.)

3) “품삯을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간에, 일을 많이 한 사람에게나

일을 적게 한 사람에게나 똑같은 품삯을 주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다.”

(이 말은 ‘불공평함’을 비난하는 말입니다.

어떻든 ‘맨 먼저 온 이들’의 불만은 이 세 가지가 모두 합해져 있는 불만입니다.)

 

이 비유에서, 밭 임자는 하느님이고, 포도밭에서 하는 일은 신앙생활이고,

품삯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신앙생활을 언제 시작했든지, 얼마나 오래 했든지 간에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1) 여기서 ‘맨 먼저 온 이들’을 이스라엘인들로,

‘나중에 온 이들’을 이방인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자기들은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민족이고, 자기들이

긴 세월 동안 하느님을 믿었다는 것을 내세우면서 나중에 하느님을 믿게 된

이방인들보다 더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선민사상과 특권의식을 버리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2) ‘맨 먼저 온 이들’을 남들보다 먼저 신앙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더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로, ‘나중에 온 이들’을 신앙생활을 늦게 시작해서 신앙생활

기간이 짧은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활동 초기에 사도로 뽑은 사람들과 부활 승천 후에 사도로 뽑으신

바오로 사도를 예로 들어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에서,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느님과 맺은 ‘친교의 깊이’와 ‘일치의 깊이’, 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행복의 깊이’에서, 열두 사도와 바오로 사도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차이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유아 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과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차이가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3) ‘맨 먼저 온 이들’을 우리가 신앙의 모범으로 공경하는 성인 성녀들로,

‘나중에 온 이들’을 평범한 보통 사람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진짜 성인 성녀들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품지도 않고,

하느님께 항의하지도 않겠지만...)

지상에서는 신앙과 신앙생활의 깊이에서 성인 성녀들과 보통 사람들 사이에

차이가 있지만, 그것은 개인의 차이일 뿐이고,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는 보편적인 차이가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은 전부 다 성인 성녀입니다.

그리고 ‘지금’ 누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는

사람이 함부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4) 신앙생활은 노동이 아니라 은총이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품삯이 아니라 은총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은총을 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5)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과 행복을

누린다는 것만 생각하면서, “그러면 사는 동안에는 마음대로 막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면 되겠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말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말이고, 임종 시점을 자기가 정하겠다는 어리석은 말입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실행한다면, 그런 회개는 진정성 없는 회개이고,

회개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포도밭은 하느님의 계명들이고, 이곳에서는 온갖 덕이 포도나무 가지처럼 늘어져 있다. 즉 친절, 순결, 온유, 인내, 고결함 등이다.

 

교부들은 이 비유를 설명하면서,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그들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6절) 라고 묻는다.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한다. 그들은 모두 포도원에 가서 일하였다.

 

저녁에, 즉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내주라고 한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그러기에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그래서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이렇게 말함으로써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 보수, 노임이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하겠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5)

-한상우신부-


가장 비참했던
그 때를
기억해본다.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가
간절했던
그 때를
떠올려본다.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픈
모든 이들에게
후하게
구원의 문을
열어젖히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지나치는
모든 시간이
은총이고
선물이었다.

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가혹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내
후하시다.

연민의 길을
걸어가신다.

조건과
무조건 사이에
하느님과
우리가 있다.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를
찾기 위해
직접 길을
나서시는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갈 곳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욕심과 시기를
내려놓고
감사와 찬미를
배워야 할
우리들 삶이다.

허망한 삶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는
내려놓아야 한다.

한순간도
은총 아닌 것이
없었다.

한없이 주시는
하느님 앞에
시기와 원망을
내려놓는다.

가장 좋은
하느님의 때를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임금이 어떤 존재인지 물으십니다.

"그 무렵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판관 9,6)
어제 제1독서에서 만난 기드온은 판관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며 마흔 해를 평온히 다스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임금이 되어 달라고 했지만 "여러분을 다스릴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 8,23) 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아닌, 봉사하는 판관의 자리를 지켰지요.

하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으로 자기 집안에 올가미가 될 죄를 짓게 되니(판관 8,27 참조) 일흔 명의 아들들 사이에 살육이 일어나고 맙니다. 기드온의 아내 중 스켐 출신 소실이 낳은 아비멜렉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스켐 지역 지주들을 등에 업고 건달들과 함께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한 것입니다. 막내 요탐만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져서, 오늘 제1독서 대목에 나오는 '임금의 비유'로 스켐의 지주들의 양심을 일깨우려 합니다.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판관 9,9.11.13)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 인간에게 이로운 열매를 내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임금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가치를 잘 알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그것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려 하지요. 그들에게 임금이란 고작 타인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무게중심(줏대) 없이 흔들거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신정에서 사람이 임금으로 등극하는 왕정으로 넘어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판관 9,15)
그런데 가시나무의 반응은 상당히 다릅니다. 언급된 나무들 중 가장 그늘이 빈약하고 쓸모도 적은 식물이면서 당장 허세와 위협으로 으름장부터 놓습니다. 고문 도구나 땔감 외에는 별 쓸모가 없던 가시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그 첫 마디가 파괴와  죽음의 겁박입니다. 인간 역사 내내 곳곳에서 출현한 불의하고 무자비한 임금들의 행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이지요.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 20,14)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다섯 차례나 장터에 일꾼을 구하러 나섭니다. 그리고 삯을 치를 때, 하루종일 고생한 일꾼이나, 짧은 시간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지요. 사실 이 값은 일꾼들과 처음부터 합의한 금액입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했음에도, 짧게 일한 이들이 그 금액을 받는 걸 보자 자기들은 응당 더 받으려니 기대했다가 결국 김이 새고 말지요.

하늘 나라의 임금님은 이 선한 포도밭 주인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하는 분십니다. 그분은 받는 만큼 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계산하는 분이 아니라 아낌없이, 목숨까지 내어주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줄을 세우고 자격을 정해 순위를 매기고 더 탐하는 이는 받는 쪽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싶으면 불편해서 못 견딥니다. 세상이 정한 질서에 하늘 나라가 맞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태도는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늘 임금님께, 군림하고 지배하고 줄 세우는 인간 임금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서에서 벗어나면 시기와 질투로 자기와 타인을 해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겉으로는 혜택을 받는 이에게 불쾌감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의 선하심이 못마땅해서 그분께 대적하는 것이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선하고 공정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분을 반하는 처사이기 때문이지요.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화답송)
인간의 임금은 사실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온 세상과 하늘 나라의 주인께서 이루시는 업적의 지상 협력자로 충실히 일하면서, 그분께서 이루시는 업적에 경탄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라고 뽑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백성에게 군림하고 다스리려 하면 세상이 몸살을 앓지만,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면 하늘 나라는 성큼 다가옵니다. 지도자는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늘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약속한 상급을 반드시 주시는 의로운 분이시며, 자격과 가치를 따져 홀대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늘 임금님께서 이처럼 자비롭고 관대하며 선한 분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주인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누구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

주님 포도밭, 곧 하느님 나라에서는 일찍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상급을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게 일했음에도 똑같은 상급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 인간의 공정인 데 비해

하느님의 공정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사랑의 공정이기에

옛날에도 이것은 문제고 지금은 더더욱 예민한 문제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정의나 평화나 사랑보다도 공정에 더 예민하기에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지금까지 오늘 독서에 대한 강론은 한 적이 없기에 오늘은

판관기의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얘기는 왕이 다스리지 않고 판관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왕이 있는 주변 나라들과 비교하며 왕을 세우려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안정과 질서를 위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필요하기는 한데 문제는 그 필요한 지도자가 악인 경우가 많지요.

 

가끔 아버지가 없는 사람과 아버지가 폭군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불행한지 비교하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하고,

아버지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차라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낫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도 아버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폭군인 경우에는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왕들도 마찬가지로 필요악입니다.

 

그래서 오늘 판관기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기를

거부하는데 가시나무만 자기가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하며 수락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시나무는 남을 찌르고 아프게하는 나무잖습니까?

 

우리의 현실에서도 남을 이롭게 할 것같은 사람은 장의 자리를 피하고,

남을 아프게 할 사람들이 장이 되고자 하며,

사람들은 속아서 그런 사람을 자기들의 장으로 뽑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대선 후보들이 출마를 하고

누가 적합한지 많은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제가 대답할 리 없지만 신자들이라면

신앙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식별해야 한다는 정도는 얘기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식별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정파성에 따라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겁니다.

 

구약에서 왕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판관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그 차이점이 판관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데 비해

왕은 자신이 바로 왕들의 왕인 하느님인 양, 다시 말해서

하느님 밑이 아니라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다스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적인 시각이란 정파와 나의 이익을 떠나서 이 복음 말씀에

비추어 현재의 지도자들도 판단하고 미래의 지도자도 식별하는 것입니다.

 

부디 어느 정치가의 똘마니가 되지 마시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가지고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식별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8월 21일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