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021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라우렌시오 성인은 스페인의 우에스카에서 태어났다.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였던 라우렌시오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호하는 일이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갔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하였다. 258년 무렵이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인이다
☆☆☆
정말 잘 들어두어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Amen, amen, I say to you,
unless a grain of wheat falls to the ground and dies,
it remains just a grain of wheat;
but if it dies, it produces much frui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수도였던 ‘라벤나’에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라는 건물이 있습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십자가형 건물의 벽과 천장은 모두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곳에 낯선 그림이 하나 있었습니다. 창문을 중심으로 한쪽에는 네 복음서가 놓인 열린 서가가 있고, 반대편에는 성인으로 보이는 사람 앞에 장작불이 피워져 있으며, 그 위에 큰 석쇠 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궁금증은 점점 커져 이를 계기로 성화에 대하여 공부하게 되었고, 어떤 성인을 그릴 때 그와 관련된 대표적 일화나 그의 순교 장면을 묘사하여 그 성인을 나타내고 교육에 이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파하고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하였기에 손에 성경과 칼을 쥐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식스토 2세 교황을 도와 일하였던 부제들 가운데 수석 부제로, 교회 재산을 관리하고 구호품을 나누어 주는 일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는 교황을 체포하여 참수한 뒤, 교회 재산을 관리하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재산을 모두 내놓으라고 협박합니다. 그는 3일 뒤에 주겠다고 한 뒤, 교회의 모든 보물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줍니다. 그리고 3일 뒤 많은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황제에게 가서 “보시오,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에 격분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석쇠에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립니다. 순교의 순간, 그가 “이쪽은 다 구워졌으니 다른 쪽도 마저 구워라.” 하였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옵니다. 그래서 그의 상징물은 석쇠입니다.
오늘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도 질문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우리 성당의 보물은 무엇인가? 나의 가장 큰 보물은 무엇인가?’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제3차 세계 가난한 이의 날 담화 중에서).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분은 전혀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는지 옷도 낡은 체육복 차림이었고 머리는 산발이었습니다. 딱 봐도 ‘예술 하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실제로 이분은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지금까지 대중에게 크게 알려진 책을 쓰지 못했지만, 매일 멈추지 않고 글을 쓰며 살고 있었습니다. 이분과 대화를 하면서, 얼마나 즐겁게 살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비록 돈은 없지만 즐겁게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었지요.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정치적인 싸움도 만들어내지 않았습니다. 또 대단한 명예나 부를 쫓지도 않습니다. 단지 순수한 열정을 가지고 남에게 상처 주지 않으며 매일 기쁘게 사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걱정이 많다는 것입니다. 글만 써서 어떻게 먹고사느냐고 말한답니다. 혀를 차며 사람 구실을 못 하는 것처럼 말한답니다. 남에게 해도 끼치지 않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좋은 일을 하고 있는데, 남들은 한심한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 같다고 고백하시더군요.
세상의 기준이 곧 행복의 기준인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세상의 기준이 행복의 기준이 될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예수님 스스로가 당신 삶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성인성녀들 역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밀알과 같은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자기희생을 통해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이를 위해 세상의 기준처럼 자기 사랑에 집중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이 부분은 약간의 이해가 필요합니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라는 의미로 생각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배경을 이루는 셈족의 언어 관습에 따르면, ‘미워하다’가 ‘사랑하다’와 관련해서 쓰일 때에는 흔히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를 뜻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더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기준보다 주님의 기준이 먼저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주님의 기준이 곧 행복의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현재는 신학교 입학 후 군대 기간까지 포함해서 거의 10년이 되어야 사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아주 빨리 사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특히 세례를 받고 주교품까지 받는데 최단 시간을 기록한 인물이 있더군요. 그 시간이 딱 일주일이었습니다. 바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멘토였던 성 암브로시오 성인이십니다.
밀라노 지역의 집정관으로 왔다가 아리우스 이단과 가톨릭교회의 대립을 해결했고 이를 통해 비산자였던 그가 주교품까지 일사천리로 받게 된 것입니다. 이 결정이 잘못된 것일까요? 아닙니다. 왜냐하면 기원후 374년의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직 교회의 틀이 완성되기 전이어서, 당시의 필요 때문에 암브로시오 성인께서 나타나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활동은 늘 그때 가장 적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때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이 역시 주님의 커다란 활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서도 주님께서는 활동하십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만 활동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존재 소멸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법: 창조의 도구로 쓰이는 것
-전삼용신부-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당시 교황청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었고, 황제가 재산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자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주고 자신은 뜨거운 석쇠에 순교하는 영광을 받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어 많은 열매를 맺으면 영원히 살 것이라 하십니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 목숨을 미워해야 한다고 하십니다.
열매를 맺으려면 밀알은 필연적으로 썩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생명을 소비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생명을 내어주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만 영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에서 창조자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요르단강 계곡에 두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곧고 훌륭히 자랐고 다른 하나는 볼품없었습니다. 두 나무는 예루살렘 성전의 일부분이 되고 싶어 했고 그 것이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 여겼습니다.
드디어 다 자란 두 나무는 잘려져 각자 필요한 곳으로 갔습니다. 곧고 잘 자란 나무는 정말 예루살렘 성전을 짓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매일 사람들에게 경배를 받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볼품없었던 나무는 말 먹이통으로 쓰였습니다. 매일 더러운 음식을 받아내야만 하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추운 겨울밤에 한 아이가 구유 위에 놓였습니다. 아기가 놓였고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경배하였습니다. 성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기뻤습니다. 그 아기가 성인이 되었고 성전에서 이 성전이 완전히 허물어질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영광을 받던 나무는 기분이 나빴습니다. 그리고 자기 소원대로 사람들이 그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몇 년이 흐른 후 로마 군사들이 쳐들어와 성전을 완전히 허물어버렸습니다. 그 나무는 불에 타서 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구유를 들고 로마로 가져갔습니다. 싼타 마리아 마죠레 성당이 지어졌고 그 볼품없는 구유는 성당 제단 밑에 모셔졌습니다. 2천 년이 흘렀지만, 그 볼품없었던 나무는 여전히 사람들에게 공경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다인들이 지은 성전엔 하느님 법이 없었습니다. 공경을 받는 것을 즐기며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나무는 여전히 피조물로 남은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소멸합니다. 열역학 제2 법칙에 의해서입니다. 모든 존재는 쓰레기가 되어가고 사라져가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구도 소멸할 것이고 태양도 소멸할 것입니다.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이고 지금 50억 년을 살았으니 이제 50억 년 남은 것입니다. 모든 별이 그렇듯 지구도 소멸해 가고 있습니다. 지구 내부의 열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것이 다 빠져나가면 부스러기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인간 때문에 먼저 사라질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에너지’를 조금씩 잃어갑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 건물은 허물어지고 기계는 낡고 사람은 땅이 됩니다. 그리고 그 땅도 언젠가는 사라집니다. 따라서 피조물의 위치에 있다면 누구든 소멸합니다.
그렇지만 그리스도를 모셨던 나무는 자신을 소멸하여 누군가에게 포근함을 선사하였습니다. 이처럼 나를 죽여 타인에게 생명과 행복을 주는 일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은 창조자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면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모기처럼 살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자녀를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창조자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창조자의 것입니다. 사랑이 곧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를 생각해봅시다. 자동차는 가만히 놓아두면 흙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인간이 기름을 넣고 고치며 잘 사용하면 그 차는 아주 오래 사용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 협력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삽이 있어야 농사를 지을 수 있다면 농부는 그 삽을 소멸하도록 내버려 둘까요, 아니면 잘 보존할까요? 당연히 하나의 피조물이지만 자신의 창조 활동에 협조하기 때문에 자신이 창조 활동을 하는 한 그 삽은 보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습니다. 피조물과 창조자입니다. 모기와 예수입니다. 생존하려는 자와 죽으려는 자입니다. 사랑이 없는 자와 있는 자입니다.
사랑하면 그 본성상 창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존재하는 한 창조는 영원히 지속하고 그 창조가 지속하는 한 그 창조를 위해 쓰이는 도구들도 영원할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창조’는 나의 에너지를 내어주는 것이기에 곧 ‘나의 죽음’을 수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명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창조의 협력자가 됩시다. 어차피 다 죽습니다. 그러나 사랑에 투자해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입니다. 영원히 살 수도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독수리는 아주 높은 절벽 위에 둥지를 만든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새끼를 키운다고 합니다. 새끼는 안락한 둥지에서 어미 독수리가 주는 먹이를 먹으면서 편하게 지냅니다. 그러나 어느 때가 오면 어미 독수리는 둥지를 부서 버린다고 합니다. 갑자기 안락한 둥지를 잃어버린 새끼는 당황하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집니다. 날개 짓을 하지만 익숙지 않아 땅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어미 독수리는 새끼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큰 날개로 새끼를 받아 줍니다. 이렇게 몇 번을 거듭하면 새끼는 이내 하늘을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된다고 합니다. 어미 독수리가 새끼를 위해서 둥지를 계속 나두고, 먹이를 가져다주는 것은 참된 사랑이 아닙니다. 새끼의 몸짓이 커지면 둥지는 무너질 것이고, 날지 못하는 새끼는 결국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새끼를 위해 둥지를 부서 버리는 어미 독수리와 같은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독수리가 보금자리를 휘저으며 새끼들 위를 맴돌다가 날개를 펴서 새끼들을 들어 올려 깃털 위에 얹어 나르듯, 주님 홀로 그를 인도하시고 그 곁에 낯선 신은 하나도 없었다.(신명32, 11)”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본적이 있습니다. 혹독한 연습으로 인해 발가락 마디가 기형적으로 돌출되어있는 등 발의 모습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습니다. 시인 고은은 그녀의 발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찬양했습니다. 테니스 선수의 손도 마찬가지입니다. 라켓을 잡고 연습하는 동안 손에는 굳은살이 생겼을 것입니다. 테니스 선수가 받는 상패 뒤에는 몇 번이고 잡혔던 굳은살이 있었을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면 사랑이 완성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공간과 시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랑은 방향만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발레리나의 아름답지 못한 발처럼, 테니스 선수의 굳은살이 생긴 손처럼 부부는 서로에게 관심과 배려를 가져야 합니다. 화목한 가정은, 행복한 결혼생활은 은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소금이 물에 녹아 소금물이 되듯이 서로의 가슴에 사랑으로 녹아들어가야 합니다. 성당의 제단 중앙에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십자가 없는 신앙은 허구라는 가르침입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다는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둥지를 버리지 못하면 결코 하늘 높이 나는 독수리가 될 수 없습니다. 밀알은 어쩌면 우리가 머물고 싶어 하는 둥지일 수 있습니다. 그 둥지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달콤한 먹이가 있습니다. 그 먹이에 취해서 우리가 둥지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리는 높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새끼 독수리처럼 하느님의 사랑에서 멀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둥지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제자들을 다그쳤습니다. 둥지에서 떨어지는 새끼를 어미 독수리가 받아 주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재물이라는 둥지를 벗어났습니다. 모든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진정한 보화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복된 라우렌시오는 하느님을 열렬히 사랑하며 신자들을 충실히 섬기고 순교의 영광을 받았으니 저희도 그를 본받아 사랑을 실천하고 그의 가르침을 따라 형제들을 섬기게 하소서.”
우리가 둥지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어쩌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둥지를 벗어나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때로 시련의 바람이 불고, 고통의 암초가 다가올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믿으며 힘차게 날아야 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영성체의 힘으로 인해 그토록 혹독한 고통도 웃으며 참아 넘길 수 있었습니다!
-양승국신부-
임종을 앞두고 계신 형제님께 병자성사를 드릴 때였습니다. 말기 암으로 인해 물 한 방울도 제대로 못 드시고, 다른 무엇보다도 호흡 곤란 증세로 무척이나 힘겨워하고 계시더군요.
그 순간 저는 깜짝 놀랄 일을 목격했습니다. 위중하신데도 의식은 명료하셨습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시면서도 제게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셨습니다. 힘 드신데 가만히 계시라 해도 힘겹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이렇게 먼 길 와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주님 은총 속에 이 세상 소풍 잘 하고 갑니다.” 그러면서 형제님은 계속 제 걱정을 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서 계시지 말고 여기 앉으세요. 많이 시장하실 텐데, 밑에 내려 가셔서 식사 좀 하세요. 운전해서 갈 길도 멀 텐데, 조심해서 내려가세요. 저 위에 도착하면 신부님 사목 잘 하시도록 열심히 기도할께요.”
다들 두려워 덜덜 떠는 죽음 앞에서도 의연하고 당당하셨던 형제님 얼굴에 감돌던 미소가 오래도록 제 기억 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형제님의 마지막 순간을 뵈면서 언젠가 다가올 내 마지막 순간도 저렇게 품위가 있었으면 좋을 텐데... 하는 희망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 순간을 정말 감동적이고 멋지게 장식한 성인,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합니다.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수석 부제로 임명된 그는 교황님을 도와 교회의 재산 관리와 가난한 사람들의 구호활동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님께서 카타콤바에서 미사를 집전하시던 중에 체포되어 즉각 참수형에 처해지자, 즉시 라우렌시오 부제에게도 박해의 칼날이 다가옵니다.
박해자들은 끝끝내 협조하지 않는 라우렌시오 부제는 불판 위에 얹어 구워죽이는 참혹한 형벌에 처했습니다. 적대자들은 라우렌시오를 마치 생선 굽듯이 불판 위에 올리고 불을 지피니 그의 살이 부글부글 소리를 내며 익어갔습니다.
세상 혹독한 형벌을 당하면서도 라우렌시오 부제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습니다. 그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여유만만한 얼굴이었고, 그 와중에도 사형집행인들에게 계속 유머를 던졌습니다.
한쪽이 쌔까맣게 타고난 것을 확인한 라우렌시오는 사형 집행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이제 한쪽은 다 익은 것 같으니 뜯어 잡수세요.”라고 농담을 던지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의 순교 장면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 교부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영성체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 힘으로 인해 그토록 혹독한 고통도 웃으며 참아 넘길 수 있었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밀알을 죽게 하는 힘은 생명력입니다. 그러니 ‘죽을 수 있는 힘’(살리기 위해)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밀알은 먼저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지고서야 비로소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죽음의 고통이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이요,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곧 ‘죽음’이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니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됩니다. 곧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기보다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거나, 수도자가 집과 가족을 떠나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면, 진정한 따름에도 진정한 섬김에도 이르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될 것입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
-반영억신부-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을, 능력, 재능을, 물질을,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 어찌 열매가 풍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내일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하면 ‘내 나라’가 만들어지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예수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총독에게“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총독이 라우렌시오를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눕혔는데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었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차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 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밀알 하나>
-송영진신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4-26).”
1) ‘밀알 하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관한 말씀입니다.
‘많은 열매’는 인류 구원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류 구원을 위한 희생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죽음이 그냥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신앙인들은 그 죽음이 그냥 죽음이 아니라,
부활로 가는 과정이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들을 구원하고,
사람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한 일이었음을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그 일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심은 일과
같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밀알 하나의 죽음’에 관한 말씀은, 순교자들의 죽음을 설명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순교자들의 죽음은 헛되고 허무한 죽음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얻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입니다.
‘많은 열매’는 일차적으로 순교자 자신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뜻합니다.
<순교는 자기 자신을 바치는 봉헌입니다.>
그리고 새로 신앙을 갖게 된 많은 신앙인들도 뜻합니다.
<순교는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언하는 일입니다.
그 증언은 더 많은 신앙인이라는 열매를 맺게 하는 씨가 됩니다.>
2) 예수님 말씀에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라는 말씀은,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한 씨가 되기를 거부하는 밀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 허무하게 끝난다.”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한 알 그대로 남고’ 라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는 뜻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은 허무하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구원받으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구원받기를 원하고,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만이 구원받게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권고’이고, ‘호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은,
명령에 복종하는 일이 아니라,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계명들을 명령으로 표현할 때가 있긴 한데,
사실 계명들도 엄밀하게 말하면 ‘사랑의 권고’입니다.
따라서 ‘밀알 하나의 죽음’에 관한 말씀도 명령이 아니라 ‘사랑의 권고’이고,
‘많은 열매’를(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선택은 각자 하는 것이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각자에게 있습니다.>
3)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라는 말씀은,
“현세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 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것을
희망하고 추구하는 사람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자기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실제로 미워한다는 뜻이 아니라,
어리석은 집착을 버린다는 뜻입니다.
현세적, 물질적, 육신적인 것들을 가지려고 욕심 부리고, 집착하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들은 먼지처럼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을 보면, 이 말씀 뒤에 다음 말씀이 더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이 말씀은,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온 세상을 얻었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영원한 생명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온 세상도 얻고, 영원한 생명도 얻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허무한 것과 영원한 것은
양립할 수 없기 때문에 두 가지를 다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4)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라는 말씀은,
공관복음에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로 표현되어 있습니다(마태 16,24).
“나를 섬기려면”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서 내가 주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이라는 뜻입니다.
지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일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일의 시작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은
지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면서 사는 신앙생활의 완성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냥 뒤따라가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그대로 뒤따라가는 일이고, 그 일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일입니다.
자신을 버리지도 않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가지도 않으면서 그냥 따라가는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을 구경하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은 구경하는 생활이 아니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 믿는 사람도 성당 안에 들어와서 미사를 ‘구경’할 수 있는데,
그것은 미사 참례가 아닙니다.
미사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총을 받으려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미사를 함께 드려야 합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하느님 나라를 구경할 수는 있지만,
구경만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서 함께 살아야 합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자기를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충실하게 따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당신과 함께 살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5)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누리시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그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목표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고, 그 영광이 얼마나 황홀하고 행복한
것인지를 체험했고, 그 영광 속에서 영원히 살고 싶어 했습니다(루카 9,32-33).
그 일은 우리가 정말로 희망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는 일입니다.>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조욱현신부-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가난한 이들을 섬기다가 목숨까지 잃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섬김의 본보기를 보여 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자신이 죽어 무수한 열매를 맺는 밀알의 본보기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과 앞으로 하실 일을 알고 계셨기에 결연히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으십니다. 그분께 "형제를 살리는 죽음"은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 실제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분 주위로 몰려든 이들은 그분을 섬기면서 동시에 섬기는 법을 배워갑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어떻게, 왜 섬기실까요?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 병자와 허약한 이들, 마귀에 시달리는 이들, 죄인이라 손가락질 받고 소외당하는 이들을 섬기십니다. 그들에게 다가가 고쳐 주고 함께 밥을 먹고 이름을 불러 주시면서 친구가 되어 그들을 섬기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장 작고 보잘것없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그들 안에 당신이 있고, 그들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당신에게 해 준 것이라 말씀하실 정도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사람은 누구나 존중받아 마땅합니다. 누구나 각자 얼마간의 부족함을 지니고는 있지만, 그래도 하느님의 모상이고 하느님이 사람이 되셔서 함께하실 만큼 귀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섬기고 따르면서 그분의 섬김을 배워가는 이들을 존중하십니다. 그들의 마음의 바람, 영혼의 열망을 눈여겨 보시고 이루어 주십니다. 그들의 바람과 열망이 이미 아들 예수님을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섬김의 고리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그분을 섬기는 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나눔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희사와 나눔은 섬김의 한 방식입니다. 나누는 것이 무엇이건 그건 하느님께서 미리 마련해 주신 것이고, 나눔의 수혜자가 곧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가난한 이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2코린 9,9; 시편 112,9 참조)
성도들을 위한 희사를 독려하며 사도는 시편의 한 구절을 인용합니다. 나눔도 믿음처럼 하느님 앞에서 위로움을 얻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나눔이 하느님에게서 받은 것을 도로 하느님께 되돌려 드리는 행위이기 때문에, 그 또한 믿음의 열매입니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의 계획에 우리를 참여시켜 주십니다. 그분 홀로 하실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도 사랑을 실천하여 의로움을 이룰 기회를 주시고자 사랑이 흐르는 세찬 물줄기 중간 어디쯤에 우리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겁니다. 이 또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자신이 받은 유형 무형의 모든 것이 하느님에게서 온 것임을 진정으로 깨달을 수 이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받은 쪽은 덜 받은 이들을 돌보라고 불리운 것이고, 또 덜 받은 이들은 더 가진 이들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요. 오늘 우리가 경축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그런 하느님의 의도를 명확히 꿰뚫은 분있었습니다.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극에 향해 치닫는 요즘, 믿지 않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믿는 이들에게도 이런 담론이 얼마나 무색한지 우리는 모르지 않습니다만, 말씀 안에 깃든 진리를 믿고 고백하며 따르는 우리로서는 힘 내어 우리가 선택한 섬김과 따름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정말입니다! 이 말씀이 진실인 줄 저도 알고 또 여러분도 이미 잘 아십니다. 그러니 지치지 말고 사랑의 길을 걸어갑시다.
성 라우렌시오,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아멘.

말씀 나누기 -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자기 그릇만큼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8월 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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