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2021년 8월 1일 연중 제18주일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24-35)
"I am the bread of life;
whoever comes to me
will never hunger,
and whoever believes in me
will never thirst."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 북쪽 끝자락 이방인의 땅으로 가십니다. 갈릴래아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표징을 본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렇게 모여드는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병자가 치유되는 기적과 빵과 물고기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은 이제 예수님을 모셔다 임금으로 삼고자 합니다. 이를 알게 된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에서 카파르나움으로 가십니다. 이튿날 예수님이 보이지 않자 군중은 십육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는 카파르나움까지 예수님을 찾아 나섭니다.
이렇게 군중이 예수님을 애타게 찾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빵을 원합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배불리 먹여 주시고, 자신들을 보호해 주시기를 바라며, 그것을 확신하게 해 주는 더 많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군중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성당에 열심히 다니며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부자가 되고, 시험에 합격하고, 성공하고 싶은 자신의 욕망을 하느님께서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은 아닌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빵을 잘 만드는 메시아가 되고자 하는 마음이 없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와 함께 다른 세상을 만들어 봅시다! 빵에서 벗어나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해 봅시다.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입니다.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기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람을 살리는 빵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나처럼 이웃과 세상을 사랑하는 이가 된다면, 여러분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이신 주님
-키엣대주교-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시절에는 먹고 입을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그것이 충족되면 행복합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풍요로운 세상이 되었는데 행복지수는 점점 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의 물질이 풍요로워지는 만큼 행복의 기준도 점점 커져만 가기 때문에 마음과 몸은 점점 결핍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살아갑니다.
어느 만큼 가지면 행복할 수 있습니까? 물질은 행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늘보다 내일은 더 많이 더 맛있는 것을 먹기를 바라고 걷다가 피곤할 때는 자전거만이라도 있었으면 하고 바라고 자전거가 생기면 그 다음은 오토바이 또 그 다음은 자동차, 그리고 그 다음은 더 럭셔리한 차.. 끝이 없습니다.
갈망 또한 끝이 없습니다. 정신적 허전함을 채워 줄 물질에 대한 갈망, 사랑에 대한 갈망, 행복에 대한 갈망, 삶의 의미에 대한 갈망 등… 갈망이 강렬해질수록 불안해집니다. 내가 추구하는 행복은 언제나 내 것이 아니고 내 손밖에 있기 때문에 나는 결국 소요될 것이라는 생각때문입니다.
예수님께 간절히 양식을 구하는 군중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만든 인간들이기에 가진 것, 성취한 것에 대해 쉽게 실망하고 그 가치를 폄하하는 인간의 기질과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잘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절대적인 가치, 영원한 가치만이 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기에 이르신 말씀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무한한 욕망과 갈망을 채워 줄 가치 있는 것을 찾을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는 어디에서 영원히 배고프지 않을 양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그것을 먹은 사람은 다시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영원히 죽지 않는 ‘참 행복’을 얻을 수 있는 빵, ‘생명의 빵’입니다. 오직 하느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는 양식입니다.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넓은 땅과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알 같이 많은 후손을 주겠다”고 약속하시자 그는 약속의 땅을 찾아 떠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귀한 아들을 바쳐야하는 시련앞에서도 한치의 주저함없이 아들을 제물로 바침으로써 하느님의 진실한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는 선택의 기로에서 그 어떤 환상도 쫓지 않고 오직 하느님의 참 행복만을 선택하고 스스로 물질적인 세상의 구속을 끊었습니다. 이러한 믿음으로 그는 이 세상에서 믿음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덧없는 행복을 추구하지 말고 그 행복의 원천을 찾아야 합니다. 가치없는 재물을 움켜 쥐고 그것을 잃어버릴 까 두려워하지 말고 아무도 나로부터 빼앗아 갈 수 없는 영원한 보물을 구원하여야 합니다. 상대적인 가치가 아닌 절대 가치이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께서만이 우리를 배부르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만이 우리의 갈증을 풀어주실 것입니다.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넘치는 영원한 참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1. 왜 종교를 갖고 있습니까? 매일의 미사가 나에게 무엇입니까? 어떤 가치입니까?
2.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고 합니다. 나는 어떻습니까? 그 동안 진정 만족하고 행복했던 적은 언제였는지 그 때를 생각해봅시다.
3. 물질과 영혼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까? 주님께 다가감으로써 느낄 수 있는 만족과 행복에 대해 묵상해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예전에는 모르는 곳에 갈 때 지도를 보며 길을 공부해야 했지만, 이제는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전혀 걱정하지 않습니다. 알아서 척척 안내해주는,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미리 찾아볼 필요가 없어 운전하는 것도 쉬워졌고 시간도 많이 절약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어느 순간 저의 운전이 무척 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 몇 초라도 빨리 가려고 ‘최단 시간 경로’를 찾고 있습니다.
우연히 제가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에서 ‘운전 습관’이라는 항목을 발견했습니다. 저의 운전 습관 점수는 100점 만점에 31점이었습니다. 고속, 급가속과 급감속으로 인해 이렇게 점수가 낮았습니다.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지요. 그래서 지난 4월부터 철저하게 교통 법규를 지키면서 운전했습니다. 차선도 자주 변경하지 않고, 과속은 절대 하지 않았으며 급감속과 급가속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조금씩 올라가 94점이라는 높은 점수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운전하다 보니 조금 늦게 도착하기는 하지만, 서두르지 않는 여유를 갖게 되었습니다. 전에는 ‘왜 앞 차는 잘 안 가는 거야?’, ‘제대로 운전 좀 하지?’라는 불평을 마음속으로 하곤 했지만, 이제는 여유를 가지면서 오히려 운전의 기쁨을 얻게 됩니다.
조금 빨리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이익을 좇다 보니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삶에서도 그런 적이 너무 많지 않을까요? 순간의 만족, 약간의 이익에 신경 쓰다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목격한 후에 예수님의 권능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중요한 의미는 깨닫지 못하지요. 단순히 자신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만을 바라보면서 관심을 가질 뿐이었습니다. 여기서는 믿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께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라는 말을 합니다.
사람들은 빵을 먹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고, 빵을 많게 하신 분을 보고 열광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안에 담긴 표징을 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바로 주님의 일에 철저하게 협조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사랑을 강조하신 주님의 일에 함께하면서, 사랑을 세상에 드러내는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며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이 주는 약간의 이익에 매달리기보다, 주님께서 주시는 더 큰 이익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군대에서 봤던 연인이 생각납니다. 제 후임병 이야기입니다. 30개월 군 생활 동안 이 연인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매주 만났습니다. 여자 친구가 매주 면회를 와서 만났던 것이지요. 이 후임병은 제가 제대할 때까지 이렇게 사랑을 키우면서 아름다운 만남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제대한 후 사회에서 우연히 이 후임병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후임병 역시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카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여자 친구가 생각나서 잘 있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군대 3년 기간 동안 변하지 않았던 사랑인데 제대 후에 한 달 만에 헤어졌다고 합니다.
군 복무 중에는 매일 볼 수가 없기에 면회 때의 만남 자체가 감사했고 그래서 상대방이 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대 후에는 매일 만나다 보니 상대의 부정적 모습이 보이면서 싸움이 잦아졌고 그래서 결국 헤어졌다는 것입니다.
꾸준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꾸준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주님께서 이 변하지 않는 사랑을 주시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나의 사랑은 어떻습니까? 배신의 아이콘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뭘 해야할지 모를 때 먼저 찾아야 할 유일한 것, 양식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이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한다는 의미로 알아들어야 함을 말씀하시는 내용입니다.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좇아서 오기는 하였지만, 기적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육체적으로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에 신기해서 예수님을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기적에서 ‘표징’을 본다는 의미는 기적을 일으키는 분이 놀라운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그 기적이 보여주는 참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표징으로 얻는 것이 무엇일까요? ‘믿음’입니다. 어떤 믿음일까요? 표징을 보았다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 주시는 ‘생명의 빵’으로 보여야 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일에 대해 물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임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내가 아버지의 자녀라는 정체성을 갖게 되고 그리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뜻을 찾고 따르게 됩니다.
요즘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뭘 좋아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대부분의 사람은 행동부터 하라고 합니다. 이불을 개고 집 정리부터 하면 점점 무엇을 해야 할지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한계가 있습니다.
‘놀면서 배우는 심리학’이란 유튜브 채널,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이것부터 하세요’에서 어떤 초대손님이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군대 제대하고 자살을 생각하였습니다. 군대에서 제 꿈은 음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군대에서 계획하고 전역하고 제 꿈을 이루려고 하다 보니까, 현실의 벽에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노력은 별로 안 하고 꿈만 꿔 왔던 것입니다. 1년 정도 도전하다가 포기를 했습니다.
내가 잘하는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게 뭔지도 모르겠고, 왜 살아야 하나 싶어 좌절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일은 뭐 해야 하나, 내일모레는 뭐 해야 하나, 이렇게 살다 보니 죽는 게 편하겠구나 싶었습니다.
이때 생각나던 게 가족이었습니다. 나는 그냥 죽으면 그만인데 남은 어머니, 아버지, 동생은 절망적일 거 아니겠습니까 저 하나 때문에.. 그러면서 자살 생각은 접고 어떻게 살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후 6개월 동안 술만 마셨습니다. 술을 마시며 제 생각을 노트에 적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뭘 해야 좋을지 찾지는 못했습니다. 그냥 ‘돈 벌고 싶다.’라는 결과물만 나왔습니다.
그러며 든 생각은 ‘나를 먼저 알아야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부분 사람이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나는 (무엇)이다.’라는 것을 20개 정도 다른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입니다.
나를 알게 되니까 행동에 옮길 일이 생각났습니다. 아버지 출근하면 술 마시고, 집에 계실 때는 잠만 잤는데 시간을 정해놓고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니까 당장 해야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게 될 것 같습니다.”
이분의 말을 정리하자면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니 먼저 자신을 잘 알아가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려면 양식부터 찾아야 합니다. 양식은 부모가 주는 것입니다. 양식을 찾으면 부모 때문에 죽지도 못하고 게을러지지도 못합니다.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양식은 그냥 음식이 아닙니다. 사랑이 담긴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긴 음식 안에는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그 뜻이 들어있습니다.
루마니아의 ‘요람’이란 국가 보육원에서 자란 아이들은 온전히 성장할 수 없었습니다. 걷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심지어 발육도 저하된 상태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먹는 음식에서 표징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서 표징을 발견한다는 말은 음식과 섞여 있는 그것을 주는 이의 ‘사랑’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을 발견했다면 그 사랑 안에는 반드시 그것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기 마련입니다.
일반 가정에서 아이들이 받아먹는 음식에는 부모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그 음식에서 표징을 본다는 말은 그 양식을 주는 이의 ‘뜻’을 알아듣는다는 뜻입니다. 그 뜻이 그 아이를 성장하게 만듭니다.
모든 양식에는 그것을 주는 이의 ‘뜻’이 들어있습니다. ‘요람’이라는 보육원에서 자라는 이들은 그 ‘뜻’을 물을 수 없었기 때문에 오늘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며 자랐기에, 걸어야 할 때 걷지 못하고 말을 해야 할 때 옹알이를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그 양식을 먹으며 ‘오늘은 어떤 뜻을 따라야 하는가?’라는 것을 스스로 질문하고 옹알이와 걸음마를 시작하게 됩니다. 양식이 부모님의 사랑임을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주시는 양식으로 믿게 된다면 우리는 매일 아버지의 뜻을 묻고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개는 주인에게 양식을 먹는 한 뭐 해야 하며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밥을 주는 주인의 뜻을 따라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양식을 먹는 것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먹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인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몰라 몇 년을 같은 자리를 지키는 개들도 있습니다. 양식이 그리운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부모가 주는 음식은 더는 양식이 되지 못합니다. 자녀는 부모의 뜻대로 성장해 버렸고 놀면서 밥을 먹는 자녀에게 음식을 주며 사랑이 담기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줄어들면 정체성도, 뜻도 희미해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양식을 먹으며 그 속에 담긴 하느님의 뜻대로 살면 됩니다.
양식이 부모가 주는 것임을 믿게 된다면 복잡할 것이 없습니다. 그저 ‘내일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를 생각하고 두 개만 아침에 해치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독서가 될 수도 있고 운동이 될 수도 있고 기도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 친절을 베푸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렇듯 양식을 통해 아버지를 찾은 사람들이 자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내일 일어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 주님께 묻는 것입니다.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찾을 수 있을 때 그것을 죽을 때까지 지치지 않고 밀고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절로 생기는 뜻은 없습니다. 내 안에서 뭘 해야 하는지, 그 뜻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무리 뒤져도 안 나옵니다. 내 안에 있는 뜻은 그저 내가 생존하면 된다는 욕구와 그동안 타인들에 의해 주입되어온 것들뿐입니다.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욕구는 ‘양식’으로 들어옵니다. 사랑이 담긴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인이 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양식은 부모도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지닌 양식을 찾아야만 합니다. 양식을 먹으며 그것을 주는 이 때문에 사는 게 인간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큰 사랑이 담긴 양식, 그것이 성체입니다. 성체를 먹으면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고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명확해집니다.
성체를 영하는 이들은 하루에 무엇을 하며 지내야 할지 타인에게 묻지 않습니다. 잠들기 전에 하느님께 묻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뜻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2~3개를 정하고 그것을 성취하며 살아갑니다.
양식을 먹는 사람은 아침에 ‘개구리 두 마리’(오늘 실천해야 할 주님 뜻)를 삼킬 힘이 있습니다. 내일 하느님 뜻을 실천하기 위해 명확하게 해야 할 일이 나오지 않는다면 성체를 양식으로 영한 게 아닙니다. 아기는 부모에게 양식을 먹으며 시키지 않아도 옹알이와 걸음마 연습을 합니다.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히 모른다면 먼저 그 뜻이 들어있는 양식을 찾으십시오.

-조재형신부-
텃밭에 물을 주면서 생각합니다. 잎이 노랗게 타들어가기 때문에 물을 줍니다. 그러나 잎에 물을 준다고 잎이 생기를 되찾지는 않습니다. 잎이 노랗게 타들어가는 것은 뿌리에서 양분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뿌리가 젖도록 흠뻑 물을 주면 비로소 잎은 생기를 얻게 됩니다. 우리의 몸에도 겉으로 드러나는 질병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암이 있습니다. 다양한 합병증으로 건강을 위협하는 당뇨가 있습니다.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비만이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대부분의 증상은 마치 나뭇잎이 가뭄에 노랗게 타들어가는 모습과 같습니다. 증상을 완화하기 위해서 약을 먹는 것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메마른 잎에 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뿌리에 물을 주면 나뭇잎은 생기를 얻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증상은 삶의 질을 개선하면 대부분 좋아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운동, 긍정적인 생각, 타인을 위한 봉사, 충분한 수면, 가족과 친구와의 깊은 대화, 삶의 지혜를 얻는 독서, 내면의 자아를 찾는 명상, 영적인 힘을 주는 신앙은 뿌리에 물을 주는 것과 같이 우리의 지친 몸에 활력을 줄 것입니다. 증상을 원망하고, 불평하기보다는 내 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건강에 더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가을이 되면 저렇게 풍성한 나뭇잎들이 하나둘 낙엽이 되어 떨어지는 것을 봅니다. 일전에 ‘나이를 숫자로 생각하면 주름이 늘고, 나이를 경험으로 생각하면 연륜이 쌓인다.’는 말을 읽었습니다. 낙엽이 되어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봄이 되면 다시 피는 새 잎을 위한 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나무의 지혜입니다.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에 나뭇잎이 떨어지지 않고 계속 있다면 잎도 죽고, 나무도 죽을 것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거치기 마련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가족의 축하를 받았음을 감사한다면, 이 세상을 떠나는 것도 또 다른 탄생으로 알고 감사하면 좋겠습니다. 모든 생명이 그렇듯이 삶은 이어달리기입니다. 나 또한 또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이 될 수 있음을 받아들인다면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창고에 가득 쌓아 놓고 좋아하는 부자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우리가 쌓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의 창고가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소유의 삶을 살았던 부자는 하늘나라에 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빚진 것은 4배로 갚아 주겠다고 했던 자캐오를 칭찬하시면서 ‘오늘 이 집은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계명을 충실하게 지킨 부자청년을 칭찬하시면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를 오늘의 성서 말씀을 통해서 한번 알아보았으면 합니다. 한 인간이 일생을 살아가는 데는 오늘 이스라엘 민족과 같이 많은 시련을 겪기 마련입니다. 인간이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 이르자면, 즉 성숙한 자유로운 신앙인이 되려면 극복해야 할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파라오의 정치적 권력이나 거짓된 마술사 같은 사기꾼들 그리고 물과 바다와 같은 자연의 재난, 인생의 사막과 광야를 건너는 동안 겪게 되는 뜨거운 열기와 뱀 그리고 갈증과 허기, 또는 이방인들로부터의 학대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극복하기 어려운 것은 이와 같은 외적인 요인이 아니라, 오늘 모세가 겪는 것과 같이 우리의 내부에서 오는 삶에 대한 끊임없는 불평입니다. 백성들을 구원의 땅으로 인도하던 모세는 자기 백성의 저항에 부딪혔고, 광야를 통과하는 동안 하느님께 반항하며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에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하는 불평이 모세와 아론에게 쏟아집니다. 그러나 야훼 하느님은 신비스러운 음식인 만나를 내려 주심으로써, 당신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항상 함께하심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염불보다는 잿밥에 관심이 있기는 예수님 시대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영광스러운 예수의 변모를 보고 초가집 짓고 한평생 살자고 했다가 혼쭐이 났습니다. 제베대오의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께 오른편과 왼편에 앉게 해달라고 조르다가 창피만 당했습니다. 가리웃 사람 유다는 잿밥에 눈이 어두워 스승 예수를 팔아넘기기도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오늘 사도 바오로는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길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는 진리가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이 그의 가르침을 그대로 듣고 배웠다면 옛 생활을 청산하고 정욕에 말려들어 썩어져 가는 낡은 인간성을 벗어 버리고 마음과 생각이 새롭게 되어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새 사람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새 사람은 올바르고 거룩한 진리의 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잿밥보다는 염불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위해 시간과 정열을 투자하기보다는 영원히 썩지 않는 그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우리의 시간과 정열을 바쳐야겠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희망하며 나 자신의 비참함을 인내롭게 견뎌내는 신앙!
-양승국신부-
초자연적이거나 신비한 현상, 특별한 기적이나 표징을 한번 맛본 사람들이 보이는 특징이 하나 있습니다. 그 맛을 잊지 못하고 또 다른 기적, 더 크고 대단하고 특별한 표징을 추구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게으름과 불성실로 인해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지 시시각각으로 놀라운 기적이나 표징들을 우리에게 건네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놀랍게도 크신 하느님께서 작고 나약한 우리들 한명 한명과 개별적으로 접촉하시고 동행하시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각자와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하십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통해서 만왕의 왕이요 세상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께서 작고 비천한 우리 인간 존재 안으로 들어오신다는 것, 사실 이것보다 더 큰 기적과 표징이 어디에 있을까요?
자비하신 하느님께서 부당한 죄인인 우리를 수시로 용서하시고 정화시켜주시고 새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지속적으로 베풀어주시니, 이것보다 더 큰 표징이 어디에 있을까요?
예수님과 동시대를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강생을 통해서 그토록 궁금했던 하느님께서 당신의 얼굴을 명백히 백성들 앞에 드러내셨으니 말입니다. 하느님의 얼굴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 그보다 더 큰 기적은 다시 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의 욕심을 끝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또 다른 무엇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분께서 어쩌면 이 암담하고 부조리한 이스라엘의 고통스런 현실을 순식간에 뒤엎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세속적인 기대 말입니다. 이런 군중의 심리를 잘 꿰뚫고 계셨던 예수님이셨기에 정곡을 찌르는 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요한복음 6장 26절)
우리 인간 측의 입장에서 볼 때는 꽤나 아쉬운 일이 되겠지만, 특별한 기적이나 신비스런 현상들은 반복되거나 지속되지 않습니다. 한번, 두 번, 많게는 세 번이면 충분합니다. 우리는 평생 단 한 번의 그 특별한 체험으로 인한 감동과 기쁨을 마음에 깊이 담고 되새기며, 그 체험으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계속 우리가 신비 체험이나 기적에만 혈안이 되고, 우리 신앙생활의 방향이 그런 쪽으로만 흘러갈 때, 우리는 정말이지 웃기는 신앙인으로 전락하고 말 것ㅎ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육적이고 물질적인 만족 때문에 당신을 쫓아다니는 군중을 꾸짖으시며 한 단계 앞으로 더 나아가라고 초대하고 계십니다. 먹어도 먹어도 허기가 지는 육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는 불멸의 양식을 찾기 위해 힘쓰라고 권고하십니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복음 6장 27절)
오늘날에도 뭔가 특별한 것, 뭔가 신기한 현상을 쫓아 멀리까지 다니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거기서 구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특별하고 황홀한 신비 체험, 마치 거짓말처럼 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한 순간에 벗어나는 것...이런 것들은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꾸짖으신 세상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부탁드리는 말씀입니다. 굳이 멀리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본당 성당 안에 하느님 아버지께서 현존하십니다. 우리 공동체에서 매일 봉헌되는 성체성사를 통해 우리는 영원한 빵을 선물로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본당 고백소 안에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모든 죄를 용서해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을 만나 뵐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람직한 신앙이 어떤 것일까, 묵상해봅니다. 앞뒤 따져보지도 않고 광적이고 무조건적으로 믿는 그런 신앙은 점검이 좀 필요한 신앙인 듯합니다. 한 지도자가 지나치게 신격화되고 과장되게 포장되는 신앙은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의 가치나 존엄성이 훼손되는 그런 신앙 역시 진지한 자기 성찰이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 인간의 이성이 잘 조화된 신앙, 인간 사회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기본 상식과 예의가 존중되는 신앙, 단 한 번에 모든 것이 다 성취되기보다 돌탑 쌓듯이 오랜 세월을 두고 꾸준히 쌓아 올라가는 그런 신앙,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꾸준히 희망하며 나 자신의 비참함을 인내롭게 견뎌내는 신앙...이런 신앙 어떤가요?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이영근신부-
연중 18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의 주제는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입니다. <제1 독서>는 이집트를 탈출해 홍해를 건너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에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인 메추라기 떼와 만나를 먹은 이야기이고,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양식”으로 선포하시며, <제2 독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고, 옛 인간을 벗고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에 대해 말합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빵과 물고기로 많은 이들을 먹이신 후에 군중을 피하여 호수 건너편으로 오자, 그곳까지 몰려 온 군중의 세 가지 질문과 한 가지 청원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군중이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요한 6, 25)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찾은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요한 6,26-27)
군중들은 이미 예수님을 만났고 빵을 배불리 먹었지만, 여전히 배고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현세적 음식에 매달릴 뿐, “참된 생명”인 표징을 알아보지는 못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하루를 사는 양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 양식을 “사람의 아들”이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에 나오는 ‘양식’(브로시스)이란 단어는 사마리아의 우물가에서 사용되었던 단어입니다. 곧 예수님께서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다.”(요한 4, 34)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하느님의 일을 완성하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참된 양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어서, 군중들이 다시 “우리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요한 6,28)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요한 6,28)
여기서, ‘일’(에르가)이란 단어는 ‘음식의 소화’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 마치 양식이 눈앞에 두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입에 넣고 잘 씹어 삼켜야만 비로소 양식이 되듯, “하느님의 일”은 그분의 뜻을 우리가 실천할 때, 비로소 “하느님의 일”이 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일’은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여 우리 안에서 흡수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양식을 얻는 ‘하느님의 일’인 것입니다. 곧 ‘믿음’이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소화시켜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요한 6,27)으로 믿지 않는 이들은 표징을 요구합니다. 또다시, 그들이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요한 6,30) 하자,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인간이 만든 빵이 아닙니다. 선물로 주어진 은총의 빵입니다. 그러나 이 빵은 더는 하늘에만 차려져 있는 빵이 아니라, 이미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 안에 우리 가운데 있는 빵입니다. 그러니, 이 빵은 하늘에 올라가서 먹게 되는 빵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먹어야 할 빵으로, 이 세상에서 하늘을 살게 하는 빵입니다. 곧 이 세상을 하늘로 만드는 빵입니다.
동시에, 이 빵을 먹는 사람도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 됩니다. 곧 자신을 세상에 빵으로 내어 주게 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생명이 이 세상에서 살아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마지막에서, 군중이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요한 6,34)하고 간청하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결코 굶주리지도 목마르지도 않을 양식’으로 내어놓으십니다. 사실, 물질의 빵과 생명의 빵인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물질의 양식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살과 피로 바뀝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의 생명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의 생명이 되게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종께서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에서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의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주님!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눈앞에 두고 바라만 보고 있지 않게 하소서.
입에 넣고서 잘 씹어 삼키게 하소서.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완성하는 것이 제 양식이 되게 하소서.
말씀을 이루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사랑하는 일, 바로 그 일을 하게 하소서. 아멘.

연중 제18주일: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성체성사로써 만나의 새로운 선물에 대한 것이다. 요한 묵시록에도 이러한 기다림을 표현하고 있다. “승리하는 사람에게는 숨겨진 만나를 주겠다.”(묵시 2,17) 만나의 기적은 모세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느님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다(탈출 16,4.12 참조). 모세는 만나를 보고 놀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에 대해 알려준다(탈출 16,15 참조). 여기서 모세는 기적의 중개자일 뿐이다. 모세 역시 하느님의 선물을 받는 자들 가운데 한 사람일 뿐이다. 이로써 모세와 예수님의 차이가 어떤지를 보여 준다(요한 6,32.35 참조).
복음: 요한 6,24-35: 나를 믿는 사람은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오늘 복음은 지난 주일의 빵의 기적과 연결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는다. 그들이 예수님을 찾은 것은 감사와 찬미보다도 호기심과 어떤 이익을 바라는 마음, 그리고 흥분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신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줄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을 인정하셨기 때문이다.”(26-27절)
군중들의 잘못은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의 자비와 사랑을 주시는 분 대신에 선물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참조: 마태 12,28; 사도 10,38; 에페 1,13; 4,30; 2코린 1,22). 이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쓰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주려는 것이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된 양식이시다.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28절) 묻는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앞에 신뢰를 얻도록 하라고 하시며, 하느님께 절대적으로 의탁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29절) 즉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 그리스도, 하느님의 일을 우리 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당신의 가르침을 따르고 당신의 뜻을 따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이루어 주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이것이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을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27절 참조).
그런데 그들은 아직도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면 무슨 표징을 일으키시어 저희가 보고 선생님을 믿게 하시겠습니까? 무슨 일을 하시렵니까? ‘그분께서는 하늘에서 그들에게 빵을 내리시어 먹게 하셨다.’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30-31절) 이렇게 말하면서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빵의 기적을 벌써 잊어버리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볼 수 있고 확인할 수 있는 빵을 위한 빵만을 찾고 있으므로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이 없을 때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기적보다도 만나의 기적이 더 위대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2-33절)
여기서 만나는 참된 빵이 아니며, 빵의 상징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기 위한 현세적 양식이었고, 빵의 기적도 현세적인 배고픔을 면해준 것으로 이것 또한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이 빵의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33절) 말씀을 상기시켜 주시고 계시다. 여기서 이 빵은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주시는 구체적인 인격체로서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34절) 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행동을 통해 주시는 영적인 빵보다는 물질적인 빵을 택하고 있다. 이에 예수님은 당신을 참된 빵과 동일시하신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의 빵이며, 하느님의 선물 그 자체이시다. 신앙만이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로서 모든 사람을 위한 생명의 빵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접근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나 우선 그리스도를 자신 안에 생명의 선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능력을 갖춘 사람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새 인간”(에페 4,24)이다. 그리스도를 택한다는 것은 죄로 물든 “옛 인간”(에페 4,22)을 벗어버리는 것과 또한 성령에 힘입어 끊임없이 새롭게 변모될 수 있도록 죄를 끊어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2코린 5,17에서도 그리스도 신자를 “새 인간”이라 한다. 이는 신앙을 통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꾸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의탁하는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생명을 주는 빵”(요한 6,33)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는 끊임없이 변모되는 것이다. 참된 신앙으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오신 생명의 빵으로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따르고 실천하며 그분을 담고, 닮으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 35)
은총의
8월이
시작되었다.
매순간이
은총이며
믿음이다.
성체성사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믿음은
하느님의
힘이며
생명이다.
믿음을
잃어버리면
삶은 언제나
목마르다.
믿음과 마음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마음이 목마른
우리들 삶이다.
마음이
목마른 것은
마음에
있어야 할
믿음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주님을 향한
믿음뿐이다.
믿음은
빵이 된다.
살아있는
모든 것들은
빵처럼
믿음을
필요로한다.
믿음은
실천이다.
주님의 빵은
배고픔과
목마름을
채워주는
실천으로
우리를
살리신다.
예수님의
한 생애가
오늘도
빵으로
우리에게
전달된다.
믿음은
빵을 모시는
은총이다.
목마른
우리를 위해
믿음의
빵으로 오시는
믿음의
주님이시다.
믿음은
우리또한
예수님처럼
빵이 되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새로운 양식과 새로운 생명 이야기입니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요한 6,27)
빵을 많게 하신 기적을 보고 군중이 예수님을 쫓아옵니다. 식민지 상황에서 식량과 재산을 수탈당하는 이들에게 빵은 매우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생명과 직결되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육신의 빵 때문에 당신을 따라온 이들의 시선을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돌리고자 하십니다.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요한 6,31)
군중은 예수님의 빵 이야기에 당장 만나를 떠올립니다. 조상들이 40년 동안 굶어 죽지 않고 황량한 광야를 통과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만나 덕분이었음을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지요. 그들에게 만나는 주님의 보호와 돌봄의 표징입니다.
제1독서는 이스라엘에게 만나를 내리시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5)
파스카와 같은 삶의 커다란 변화를 체험하고 나서 또다른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면 사람들은 곧잘 변화 이전의 과거를 미화하고 이상화하기 일쑤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이집트 시절을 노예살이과 영아 살해 등의 기막힌 고통으로써 보다 고기 냄비와 배불리 먹던 빵의 추억으로 소환하였지요.
구해준 입장에서 들으면 분통이 터지는 일일 터인데도, 주님은 모세와 아론에게, 그리도 결국 당신께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또다른 구원의 손길을 펼치십니다. 먹을 양식으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주신 것이지요.
"백성은 날마다 나가서 그날 먹을 만큼 모아들이게 하여라."(탈출 16,4)
그런데 분명 만나가 하느님께서 내려 주신 음식 맞지만, 이 만나조차도 또한 "썩어 없어질 양식"이었음을 성경이 전합니다. 그날 먹을 먹을 만큼만 거두라는 주님의 명령을 어기고 좀 더 챙겨서 다음날까지 비축해 둔 사람의 만나는 썩어서 "구더기가 꾀고 고약한 냄새가 났"지요.(탈출 16,20) 인간적 탐욕과 불신으로 주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기를 주저하며 뒷주머니를 차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만나도 썩을 양식에 불과했던 겁니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요한 6,33)
"내가 생명의 빵이다."(요한 6,35)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세상에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인데, 바로 당신이 그 빵이라고 밝히십니다. 그저 배를 불리고 몸을 지탱하는 먹거리로서의 빵에서, 영혼을 살찌우고 영원히 살게 하는 양식으로서 당신의 존재를 내어 놓으시는 겁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복음 환호송)
예수님은 말씀으로, 성체로 당신 자신을 우리의 양식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 양식은 그저 몇 시간의 에너지로 산화되는 육적인 빵을 넘어서, '이제와 항상 영원히' 생명의 근원이신 분과 함께 그 생명을 누리게 해주는 빵입니다.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육의 생명 너머 영의 생명으로 초대된 이들의 모습을 제시합니다.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에페 4,23-24)
우리가 취하는 영원한 생명의 빵, 곧 말씀과 성체는 썩어 없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받아 모신 우리에게까지 썩지 않는 불멸의 생명을 보증하십니다. 창조 때 우리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이 더욱 충만해지는 새 인간이 되기 때문입니다.
주님 백성의 양식은 노예살이의 빵에서 광야의 만나로, 그리고 말씀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몸으로 이어져왔습니다. 이 변천의 과정에서 인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이 더,더, 더 극대화되면서 "자기 증여"의 절정에 이르렀지요. 이것이 아무리 현실에서 맞닥뜨리는 어려움이 크고 힘겨워도 노예살이의 빵을 되짚어 기웃거려서는 안되는 까닭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나날이 새 인간이 되도록 초대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성체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는 고통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말씀께서 늘 우리 곁을 지켜주고 계시니 힘을 내시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 다 함께 주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간절한 바람을 아룁시다.
"주님, 더디 오지 마소서."(입당송)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