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3일 제16주간 금요일
2021년 7월 23일 제16주간 금요일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그 말씀을 듣고 잘 깨닫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 사람은 백 배, 혹은 육십 배,
혹은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다.”
(마태 13,18-23)
The seed sown on rich soil
is the one who hears the word
and understands it,
who indeed bears fruit
and yields a hundred or sixty or thirtyfold."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신자들이 저에게 성경에 대하여 질문을 많이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여 답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성경에는 정답이 없다.”라고 마무리하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네 삶을 바탕으로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이 다르고, 그 삶 속에서 해석되고 이해되기에, 매번 다르고 새롭게 드러나야 합니다. 똑같은 말씀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어제의 이해와 오늘의 느낌이 다릅니다. 그러나 다른 것일 뿐, 틀린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의 손으로 쓰였지만 ‘성령께서 지금 우리에게’ 건네시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씨앗은 가능성입니다. 다만 씨앗을 먹는 것만으로는 배부름과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하늘 나라를 실현시켜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말씀과 가르침에 따라 살아갈 때,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자라 먹음직스러운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장애물들을 하나씩 걷어 내야 합니다. 일상의 무게로 지치고 힘들다는 이유로 말씀을 멀리하는 나태함과 게으름을 걷어 내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와 논리를 좇으며 그러한 것들에 익숙해져 깊이 생각하지 않고 습관처럼 판단하는 우리의 익숙함을 버려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둘러보지 않고 자신의 욕심과 꿈만을 뒤쫓아 살아가는 이기적인 마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늘 나라를 실현하려면 말씀의 씨앗을 날마다 다르게 다가오는 삶의 자리에서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그 자리가 언제나 좋은 땅일 수는 없습니다. 많은 장애물과 허물을 제거했다 하더라도, 비옥해진 땅은 다시 딱딱하게 굳어 버리고 돌과 가시덤불이 무성한 불모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씨앗을 싹틔우고자 날마다 삶을 가꾸어 나가며 좋은 열매를 함께 나누는 천국을 맛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남부러운 것 없는 환경에서 자랐지만, 대학에 진학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당당하게 말하지 못해서 아버지의 말을 조용히 따랐던 소극적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 모습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계속되었지요.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원하는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사실 그는 글 쓰는 것을 좋아해서 전문 작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말을 듣고 안정적인 삶을 살아야 할까요?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아야 할까요? 아마 중년 이상의 나이를 사는 분들은 대부분 안정적인 삶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하실 것입니다. 삶이 얼마나 힘든데 좋은 직장을 버리면서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가느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 주변 사람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는 2년 만에 전문 작가의 길로 나갔고, 파우스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을 쓴 대문호 괴테가 되었습니다.
나중의 결과를 아는 우리는 괴테의 이런 결정을 칭찬하지만,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이런 결정을 하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변화를 과감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역사에 이름을 남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 순간은 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역사 안에서 흔적조차 없습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주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능력을 뛰어넘어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이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문제는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땅이 아니라, 길가나 돌밭 그리고 가시덤불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안일하고 나태한 모습으로 주님의 말씀을 무시하며 지금을 살 뿐입니다. 그 순간은 편안하고 쉬운 삶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삶이며 결국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삶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사람이 세상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험난한 세상에서 그렇게 살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주님께서 알아줍니다. 세상 안에서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는 것 같지만, 하늘에는 백 배, 예순 배, 서른 배 이상의 열매를 맺어서 영원한 생명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5+5=10’
이 수식은 참일까요? 거짓일까요? 당연히 ‘참’입니다. 그렇다면 ‘3+7=10’은 5+5가 아니니 거짓일까요? 아닙니다. 이 역시 참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5+5=10’이라는 자기의 수식만 참이라 주장하는 것 같습니다. 즉, 다른 이가 말하는 ‘1+9’, ‘2+8’…. 등의 다른 말을 틀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613개의 율법 세부 조항을 빠짐없이 철저히 지켰고, 단식과 자선으로 평생을 봉헌하며 살았습니다. 이 모습이 잘못된 것일까요? 이 모습도 참입니다. 문제는 자기 모습만 참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먹보요 술꾼이라고 나옵니다. 그 이유는 먹고 마시면서 사랑을 친밀하게 전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거짓이라고 당시 종교지도자들은 말했습니다. 그래서 틀렸다고 생각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나만 옳다는 생각이 결국 나만 틀린 모습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세상에 틀린 사람은 없습니다. 단지 나와 다를 뿐입니다. 이 점을 인정하며 살아가는 것이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하시는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면 깨달음이 오지 않는 이유: 깨달음은 나를 태우는 불이기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씨뿌리는 사람 비유의 해설입니다. 씨는 말씀이고 밭은 우리 마음입니다. 말씀이 아무리 떨어져도 길과 같은 교만, 돌밭과 같은 육욕, 가시밭과 같은 소유욕이 있다면 말씀이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말씀이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말씀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닫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말씀이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삶의 변화’는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내가 옳다고 믿고 사는 삶을 포기하고 그것과 반대되는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제가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을 때 그런 행동이 행복하다 믿었습니다. 이것이 아는 것입니다. 내가 아는 것을 고집하면 깨달음이 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내가 아는 것이 틀릴 수 있다고 마음을 열 때 깨달음이 옵니다.
인터넷 게임이 삶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피해를 준다고 깨달았을 때는 어떠한 일이 일어날까요? 게임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안다고 하던 나 자신이 죽었습니다. 이렇게 아는 것은 고집스럽게 만들지만 깨달음은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그렇다면 세속-육신-마귀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요? 말씀을 깨닫지 못하게 만드는 역할을 합니다. 이것들은 ‘자아’에서 솟아나는데 결국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깨닫지도 못하게 됩니다. 그것을 쫓는 것이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깨달음은 자아로부터 탈출하게 만들기에 자아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리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안다는 것을 언제든 포기할 줄 알 때 깨달음이 옵니다.
축음기, 영사기, 전구 등 무려 1천3백여 건이 넘는 발명품을 내놓은 에디슨(1847~1931)도 생애의 말년에는 특유의 외고집으로 인해 실패를 거듭하다가 세상을 뜨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안다고 자신만 믿게 된 것입니다.
많이 아는 사람은 고집스러워집니다. 자아는 자신이 많이 안다고 믿게 만듦으로써 깨달음이 들어오는 것을 막습니다.
그는 “몸은 머리를 여기저기 옮겨주는 데만 필요하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스포츠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70세가 넘어서도 잠자는 시간이 하루 4시간에서 5시간으로 늘었을 뿐 여전히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축음기 회사에 과도한 애착을 느낀 나머지 라디오방송이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의 시장성을 무시한 것이 그의 실책이었습니다.
에디슨은 “사람들은 라디오국이 일방적으로 내보내는 프로그램에 곧 싫증 내고 우리 회사의 축음기로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싶어 할 것”이라고 우겼습니다.
세 아들이 아버지를 설득하다 끝내 고집을 꺾지 않자 몰래 전기식 레코드플레이어 제조에 나셨다가 에디슨의 격분을 사기도 했습니다. 70대 후반이 돼서야 에디슨은 주변의 충고를 받아들여 축음기 생산을 그만두고 라디오 제조에 나섰으나 2년 후 2백만 달러의 손해를 보고 공장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80세가 되자 에디슨은 이번에는 고무 제조에 호기심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내에 자생하는 식물들에서 고무 성분을 추출하는 일이었습니다.
에디슨의 부인은 회고하기를 “그는 고무 생각만 하고 고무 이야기만 하고 고무 꿈을 꾸었다.”라고 했으며 “미국은 5년 이내에 최고 고무 생산국이 된다.”라고 자신했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만든 고무는 천연고무보다 제조과정이 복잡하고 무엇보다도 질이 형편없었습니다.
무엇하나 제대로 풀리는 일 없이 노년을 보내던 에디슨은 결국 1931년 10월 18일 향년 84세로 눈을 감았습니다.
역사상 가장 똑똑하다고 평가받는 아인슈타인도 말년에 양자역학을 받아들이지 않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아는 자신을 버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새로운 깨달음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에디슨도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발명품을 통해 그는 교만해졌습니다. 자신이 다 아는 것처럼 여겨 결국 말년은 고집만 부리다 갔습니다.
우리는 나는 틀렸고 오직 주님만 진리임을 고백해야 합니다. 내가 끊임없이 죽으려 해야 끊임없는 깨달음이 옵니다. 깨달음을 통한 삶의 변화는 언제나 자아의 죽음을 전제하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은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자아를 죽이는 만큼만 들어옵니다.
전쟁이 일어나 피난을 가는데 가난한 농부는 보리쌀 한 가마니를 지고, 부자는 금화 한 자루를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부자는 농부를 보고 “이 급한 피난길에 왜 몇 푼어치 되지도 않는 그 무거운 보리쌀 가마니를 지고 가느냐?”고 비웃었습니다.
피난길 동안 농부는 가지고 간 보리쌀로 조금씩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하지만 부자는 금화 외에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으므로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피난길이니 음식을 사 먹을 만한 곳도 없었습니다.
하루를 굶주린 부자는 농부에게 말했습니다.
“금화 한 닢 줄 테니 보리쌀 가마니를 내게 파시오.”
보리쌀 다섯 가마니 값은 되는 금화였습니다. 부자는 선심이라도 쓰듯 제안했지만, 농부는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그러자 부자는 벌컥 화를 냈습니다.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다섯 배나 되는 값을 치르겠다는데도 싫단 말이오?”
이틀이 지나자 부자는 배가 고파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금화 두 닢을 줄 테니 보리쌀 반 가마니라도 파시오.”
이번에도 농부는 들은 척도 안 했습니다.
“아니,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욕심이 너무 과하지 않소. 도대체 얼마나 더 받겠다는 거요?”
또 하루가 지났습니다. 부자는 도저히 배가 고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가진 금화 절반을 줄 테니 보리쌀 한 말만 파시오.”
하지만 농부는 역시 말이 없었고 부자는 불같이 화를 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부자는 더 이상 걸을 수가 없을 만큼 쇠약해졌습니다. 굶주림으로 곧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 지경이 되니 신주 모시듯 했던 금화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일 뿐이었습니다.
결국, 부자는 길에서 쓰러지며 농부에게 간절히 하소연했습니다.
“이보시오, 내가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소. 죽기 전에 물이라도 배불리 먹고 죽게 저기 물 한 사발 떠다 줄 수 있겠소?”
그제야 농부는 밥을 지어 굶주린 부자에게 먹였습니다.
[출처: 『깨달음: 내 눈 뜨기』, 법륜스님, 정토 출판]
나 자신이 추구하는 세속-육신-마귀가 아무 쓸모 없고 오히려 나를 죽이고 있음을 먼저 깨닫지 못하면 더는 아무런 깨달음도 얻을 수 없습니다. 깨달음은 결국 나 자신을 죽이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초에 불을 붙여주려는데 자기 초가 타들어 가는 것이 아까워 초를 등 뒤로 숨기는 것과 같습니다.
깨달음은 빛과 같습니다. 그러나 나를 태웁니다. 내가 태워지기를 원치 않으면 깨달음은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26년 전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있었습니다. 당시에 생존했던 분이 ‘저는 삼풍 생존자입니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2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당시의 순간과 고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고 합니다. 딸과 손녀를 잃었던 분은 마치 어제 일처럼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를 경험하면서 삶의 의미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착하게 살았던 사람도, 옳은 일을 했던 사람도, 남을 도왔던 사람도 순식간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붕괴 직전에 밖으로 나왔지만 건물의 파편에 맞아서 의식을 잃었다고 합니다. 살고 죽는 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장소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대학을 다니는 것도, 직장을 구하는 것도, 결혼하는 것도, 아이를 낳은 것도 부질없는 일 같았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살아서 다행이라고 하지만 사는 것이 너무 힘들었다고 합니다. 무너진 백화점에서 나오는데 26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마음이 따뜻한 이웃의 공감과 위로였다고 합니다.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책을 썼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 주셨습니다. 씨는 하느님의 말씀이고, 밭은 우리들의 마음이라고 하십니다. 좋은 땅은 건강한 외모가 아닙니다. 좋은 땅은 학벌과 가문이 아닙니다. 그런 곳에서도 하느님의 사랑은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을 자주 보았습니다. 저는 ‘눈물로 씨 뿌리는 사람, 기쁨으로 곡식을 거두리라.’라는 시편의 말씀을 서품 성구로 정했습니다. 허황한 꿈, 노력하지 않는 성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복권을 과도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래서 복권구입 한도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푸는 의미로 복권을 사거나, 주택복권처럼 내가 사는 복권이 무주택자에게 주택마련의 꿈이 이루어질 수 있다면 약간의 복권을 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일확천금을 노리는 과도한 복권구매는 바람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또 하나, 저의 사제생활을 지탱해주는 말씀은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감사하십시오.’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시련이 다가와도 저를 일어서게 해 줍니다. 저를 긍정적으로 만들어 줍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기뻐하면 기쁠 일들이 생기고, 기도하면 주님께서 응답을 해 주신다는 믿음은 저에게는 많은 재산보다, 권력보다, 명예보다 더 큰 힘이 되고, 위로를 주고, 용기를 줍니다. 지혜의 말씀, 생명의 말씀이 메말라서 황폐하게 되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작은 씨앗이 자라나서 열매를 맺는 것도 우리 선택의 결과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에 떠밀려가는 나뭇잎처럼 살기를 바라시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강물을 힘차게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살기를 바라십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우리들의 마음을 3가지 유형의 사람으로 설명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것들에 관심이 있기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지만 유혹이 다가오면 넘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을 참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유혹은 바이러스와 같습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고, 쉽게 전파되며, 계절이 바뀌면 다시 찾아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유혹이 찾아올지라도 이겨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이러스는 백신을 맞으면 이겨낼 수 있습니다. 항체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백신을 맞으면 바이러스에 대한 집단 면역이 생긴다고 합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고, 교회를 통하여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하느님의 말씀이 삶을 통해서 열매 맺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악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백신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에게 주셨던 10계명입니다. 마스크 착용, 손 씻기, 거리두기, 백신 접종을 통해서 우리는 바이러스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습니다. 10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악의 유혹에서 벗어 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10계명을 넘어서는 새로운 계명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도 택할 수 있고, 건강한 것보다 아픈 것을 택할 수 있고, 부유한 것보다 가난 한 것도 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지금 내 마음의 밭은 하느님의 말씀이 풍성하게 열매 맺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영의 눈, 생명의 눈,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경이로움과 축복의 대상입니다!
-양승국신부-
이스라엘은 아시아에 속해 있지만 여러 면에서 유럽과 더 가깝습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기에 지중해성 기후가 강합니다. 우기(10월~3월)와 건기(4월~9월)의 구분이 명확합니다.
예수님 시대 농부들은 11월 경 이른 비가 내리고 나면 적당한 때를 골라 파종을 했습니다. 우리처럼 비료를 뿌리고, 땅을 갈아엎고, 이랑을 만들어 골을 파서, 골 사이에 씨를 묻고 흙을 덮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밭으로 나가기 전 농부들은 씨앗이 가득 담긴 주머니를 허리에 찼습니다. 이리저리 다니면서 적당히 대충 씨앗을 흩뿌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쟁기질을 하여 씨가 땅에 묻히게 했습니다.
씨앗 입장에서 보면 생명을 건 하나의 도박 같은 파종방식이었습니다. 운이 좋아 좋은 땅에 떨어지면 사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재수 없는 돌밭이나 길바닥,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지면 씨앗으로서의 인생 종치는 방식의 파종이었습니다.
이런 특별한 파종 방식을 바탕으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생명과 구원의 메시지를 담은 말씀의 씨앗이 지속적으로 뿌려지는데, 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태도는 여러 유형을 보이고 있습니다.
길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듣지만 그 말씀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돼지발에 진주 격입니다. 그들은 말씀의 가치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기에 아무리 소중한 생명의 씨앗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돌밭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마음이 돌처럼 단단히 굳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이나 복음 말씀이 좋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이 너무나 완고하다보니 말씀이 뿌리를 내리지 못합니다.
생명의 씨앗을 적극적으로 가슴에 안고자 하는 수용성, 감성이 부족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너무나 피상적이어서 하느님께서 계속해서 그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지만 조금도 열 기색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가시덤불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듣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귀로 듣지만 다른 쪽 귀로 흘려버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에 몸과 마음이 온전히 쏠려 있어 말씀이 파고들 틈이 없습니다. 육체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으며 지상의 것들이 천상의 것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희망으로 시작했지만 절망으로 끝나고 맙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 그들은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자신 안에 소중히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복음 안에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있음을 깨달은 사람들입니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깨달음을 이뤄낸 이들에게 하느님께서는 놀랄만한 선물 한 가지를 선사하시는데, 그 선물은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맛보는 것입니다.
영의 눈, 생명의 눈,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경이로움과 축복의 대상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꽃봉오리들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다 은총의 선물입니다.
이런 생명의 이치를 한번 깨달은 사람의 삶은 점점 더 넉넉해지고 하느님의 은총과 축복이 더욱 풍성하게 내릴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서른 배, 예순 배, 백 배 열매 맺는 삶입니다.

너희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새겨들어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를 설명해주십니다.
그런데, 정작 “씨 뿌리는 사람”에 대해서는 말씀하지 않으시고, ‘뿌려진 씨’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말씀”이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뿌려진 씨’는 사람으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뿌려진 씨’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뿌려진 하느님의 씨앗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말씀이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뿌려졌듯이, 사람도 열매가 아니라 ‘씨앗’으로 뿌려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선사 된 선물일 뿐만 아니라, 열매를 맺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는 우리에게 결실을 맺어야 할 소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 소명은 자신이 원하는 열매가 아니라, 씨앗(말씀)이 원하는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곧 우리 자신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말씀)을 이루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를 도구로 하여 당신의 뜻을 이룹니다.
그런데. 그 소명은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세상이라는 환경(조건)과의 관계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곧 ‘길’, ‘돌’, ‘가시덤불’, ‘좋은 땅’과의 관계 안에서 맺는 결실입니다.
예컨대, 씨앗을 물어가는 새(악한 생각)와, 씨앗이 뿌리내리지 못하게 막는 돌(시련과 박해)과, 씨앗을 숨 막히게 하는 가시덤불(재물과 유혹) 등과의 관계 안에서 맺게 되는 열매입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형제와 더불어 구원의 길을 함께 가도록 짝 지워진 구원의 동반자요, 동행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협조자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형제나 공동체가 열매를 맺도록 자신이 거름이 되는 것, 죽어 거름이 되는 것, 그리스도처럼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내어놓는 일입니다.
한편, 우리는 밭이 씨앗을 일구는 줄로 알지만, 사실은 씨앗이 밭을 일굽니다.
씨앗이 밭을 규명하는 것이지, 밭이 씨앗을 규명하지는 못하기 때문입니다.
곧 밀 씨가 뿌려지면 밀밭이 되고, 콩이 뿌려지면 콩밭이 됩니다. 돌이 깔려 있으면 돌밭이 되고, 가시덤불이 덮고 있으면 가시덤불 밭이 됩니다. 쓰레기가 가득하며 쓰레기 밭이요, 똥이 뿌려지면 똥밭입니다.
그러니 결코, 밭이 스스로 밀밭이 되거나 콩밭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자라고 있는지, 내가 어떤 밭인지를 알게 해 줍니다.
곧 내 안에 말씀이 자라고 있으면 향기를 뿜는 좋은 밭이요, 쓰레기로 쌓여 가고 있으면 온갖 악취가 뒤범벅이 된 오물 밭일 것입니다.
옛 교부들은 “그리스도인은 한 권의 책, 곧 한 권의 복음서다.”라고 표현했으며, 특히 “성모님을 말씀의 도서관이다.”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그분 안에는 말씀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내 안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고, 무엇이 자라고 있을까요?
말씀이 자라고 있는 ‘말씀의 도서관’인가요?
아니면 자신의 욕망이 자라는 잡초 밭인가요?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마태 13,23)
주님!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하늘을 쳐다보며 땅의 노래를 부르는
땅을 지배하지 않고 윽박지르지 않고
보살펴 매만지며 뿌려진 씨앗을 소중히 여기는
뿌린 씨를 거부하지 않고 지지하며 북돋우는
열매를 맺어야 하는 씨앗의 소명을 도와주는
마음 안에 사랑이 부어졌음을 받아들이는
그래서 누구에게나 사랑하기를 마다하지 않고, 결코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는
그런 좋은 땅의 사람 되게 하소서.

열매를 맺으려면
-반영억신부-
몇 개의 작은 화분을 한 바구니에 담았습니다. 보기는 좋은데 물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고 물을 싫어하는 화초가 있습니다. 햇빛을 좋아하는 화초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한 바구니에 담았더니 관리가 쉽지 않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 화초가 있어 물을 주고 강한 햇빛을 가려 주면 옆에 있는 화초가 힘들어 합니다. 옆에 있는 화초를 위해 햇빛에 내 놓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 조화를 이룬 겉모양은 아름답고 좋은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너무도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의 성격과 취향이 같지 않아서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로 자기 기준에 맞춰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편하게 내 방법을 선택하면 상대방이 그만큼 양보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입맛에 맞으면 최고요, 내 스타일에 맞지 않으면 모두가 잘못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겉모양은 모두가 멋진데 속을 보면 멀미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나 자신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정말 다양성 안에 일치를 이룬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할 길입니다. 성령께서는 다양성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백배가 될 수도 있고 예순 배, 서른 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서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열매가 달라집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개별적으로 보면 우리 마음의 밭이 다 좋은 땅인데 열매를 맺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그것은 마음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말씀을 들어도 듣는 사람 마음에 따라서 결과가 달라집니다. 말씀을 듣고 힘써 그대로 행하는 사람만이 진짜로 말씀을 듣는 사람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더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영혼과 정신을 갈라놓고 관절과 골수를 쪼개어 그 마음속에 품은 생각과 속셈을 드러냅니다”(히브4,12).하고 말했습니다.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앞에서 거저 얻으려 하니 부끄럽습니다.
좋은 열매를 기대하면서도 그만한 정성을 기울이지 않으면 결과는 너무도 뻔합니다. 수고와 땀을 남에게 미루지 말고 서로의 조화를 이루는 가운데서 풍성한 열매를 맺길 기도합니다. 우리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커가고 그 사랑이 이웃으로 향할 때 비로소 열매가 생성되는 것입니다. 포도원지기가 “주인님, 이 나무를 금년 한 해만 더 그냥 두십시오. 그 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고 거름을 주겠습니다”(루가13,8).하였듯이 다른 이에게 거름을 주는 포도원지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이 길에 떨어졌다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다 해도 세상의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사로잡혀 그 말씀을 무시하고 배척하는 것을 말합니다. ‘신앙이 밥 먹여 주느냐?’하는 태도입니다.
돌밭에 떨어졌다는 것은 처음에는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만 시련이 오면 말씀에 의지하기보다 세상 것들에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수능이 가까워 오면 점집을 간다든지, 혼사를 앞두고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사주팔자를 보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경우는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여러 가지 욕심 때문에 말씀을 따르려는 생각을 뒤덮어 버립니다. 한 편으로 가시덤불은 상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세상의 오만가지 근심걱정, 과거의 상처와 모욕으로 자신 안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하는 경우를 말합니다.
좋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열매를 맺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들은 말씀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이고 삶의 기반과 지침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살아가면서 말씀을 더욱더 깊이 깨닫게 되고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말씀을 새기고 행하는 만큼 주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야말로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송영진신부-
“누구든지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 길에 뿌려진 씨는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돌밭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들으면 곧 기쁘게 받는다.
그러나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 오래가지 못한다. 그래서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 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
그런 사람은 열매를 맺는데, 어떤 사람은 백 배, 어떤 사람은 예순 배,
어떤 사람은 서른 배를 낸다(마태 13,19-23).”
1)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는 신앙인들을 여러 가지 모습으로 분류한
비유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에 관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신앙인들을 길, 돌밭, 가시덤불, 좋은 땅으로 분류한 비유이기도 하고,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겪는 어려움들을
길, 돌밭, 가시덤불로 표현한 비유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그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어려움들을 다 겪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시려고 하는 것을 말리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하고 혼났을 때에는(마태 16,22-23)
그는 ‘길’의 상태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을 때에는(마태 26,69-74) ‘돌밭’이었습니다.
사도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가 바오로 사도로부터 공개적으로
비판을 받았을 때에는(갈라 2,11-14) ‘가시덤불’이었습니다.
그랬었는데, 끊임없이 노력해서 그런 어려움들을 모두 극복하고
최종적으로는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길’이 될 때도 있고, ‘돌밭’이 될 때도 있고,
‘가시덤불’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다면,
누구든지 ‘좋은 땅’이 되어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2) “하늘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은, “말씀을 믿지 않으면”,
즉 “말씀이 생명으로 이끈다는 것을 확신하지 않으면”으로 해석됩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는,
“마귀와 세속과 육신에서 오는 유혹에 넘어간다.”로 해석됩니다.
특히 마귀의 유혹은 끊임없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왜 그렇게 재미없게 사는가? 왜 꼭 그 길로만 가려고 하는가?
힘들면 신앙생활을 잠시 중단해도 된다.” 같은 유혹들.
그 유혹들을 물리치는 방법은 ‘기도’뿐입니다(마르 9,29).
세속도 끊임없이 우리를 유혹하고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생활필수품이 되어 있는 오늘날에는
‘유혹’의 수준을 넘어서 신앙인들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영적으로 잘 무장되어 있지 않다면, 그 공격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과 종교에 대한 확신, 그리고 충실한 신앙생활이
세속의 공격을 막아내는 방법입니다.
육신의 본능에서 생기는 어려움들도
마귀와 세속의 유혹과 결합되어서 신앙생활을 방해하는 큰 걸림돌이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런 유혹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기도, 극기, 절제를 말하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영성생활이 주는 참 기쁨과 참 평화를 얻어 누리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3) ‘돌밭’에 관한 말씀에서, “그 사람 안에 뿌리가 없어서”는,
“말씀을 삶으로 실천하지 않아서”(말씀이 곧 삶이 되지 않아서)로 해석됩니다.
여기서 ‘뿌리’는 실천을 뜻합니다.
“오래가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신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데, 신앙만 있고 생활이 없으면
가지고 있던 신앙마저 금방 잃게 됩니다.)
“말씀 때문에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그는 곧 걸려 넘어지고 만다.”는,
산상설교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마태 7,26-27).”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과 믿는 대로 사는 것은 완전히 다릅니다.
뿌리가 없는, 즉 실천하지 않는 신앙생활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사실상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매주 성실하게 주일미사 참례하고, 교무금과 봉헌금 잘 내고,
신심 단체 활동도 잘하고, 여러 가지 성사와 전례에 잘 참여한다고 해도......)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 신앙생활은 바로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4) ‘가시덤불’에 관한 말씀에서, ‘세상 걱정’은
‘먹고사는 일과 세속 일에 대한 걱정들’을 가리킵니다.
그 걱정들은 유혹이 아니지만, 유혹보다 더 강하게 신앙생활을 방해합니다.
사실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들과 세속 일에 대한 걱정들은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에게는 무시할 수도 없고, 외면할 수도 없는 현실적인 문제입니다.
어쩌면 그런 걱정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런 걱정들에서 해방되기를 바라고 종교를 찾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인생살이가 무거운 멍에이고 짐인 사람들에게는
‘안식’을 주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이 큰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걱정거리들을 모두 예수님께 맡겨야 합니다.
자신이 할 일은 최선을 다해서 하되, 결과는 예수님께 맡기는 것,
그것이 올바른 믿음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숨이 막힐 정도로 걱정만 하고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입니다.
걱정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걱정만 하면서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지 못하는 것은 죄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재물의 유혹’은 사실상 ‘마귀의 유혹’입니다.
광야에서 단식기도를 하시는 예수님을 유혹했던 악마의 세 번째 유혹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미끼로 삼아서 자기에게 경배하라는 유혹이었는데,
‘재물의 유혹’도 같은 유혹입니다.
유혹을 받는 것 자체도 죄는 아닌데, 유혹에 넘어가면 그때부터 죄가 시작됩니다.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믿음’과 ‘기도’입니다.

복음: 마태 13,18-23: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의 열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이 마치 씨앗처럼 모든 이의 마음의 밭에 뿌려지지만, 그가 내는 결실은 그 마음 토양이 어떠냐에 따라 모두 다르다고 하신다. 즉, 우리는 모두 하늘나라에 관한 말씀을 다 받았지만, 그 말씀이 잘 성장하고 결실을 볼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어떻게 가꾸느냐는 각자의 바탕과 노력과 열의와 능력에 달린 것이다.
여기서 결실을 보지 못하는 나쁜 땅은 길가, 돌밭, 가시덤불이 자라는 곳이 있고, 좋은 땅도 백 배를 내는 곳, 예순 배를 내는 곳, 서른 배를 내는 곳이 있다. 길에 뿌려졌다는 것은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이며,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아 간다.”(19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인내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뿌리가 없어서 오래 가지 못한다고 하신다.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곧 넘어지고 마는 사람이다.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려 열매를 맺지 못한다.”(22절) 이 말씀은 쾌락과 이 세상의 걱정 때문에 자신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거룩한 빵과 참된 양식을 가시덤불 가운데서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세상 걱정”이 “그 말씀의 숨을 막아”버리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씨앗’이란 새로운 생명과 새로운 삶을 지닌 것이며 지금의 상태, 지금의 모습보다는 더 많은 결실을 향해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씨앗이 그렇게 잘 자라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과 물과 빛과 기후와 환경 조건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씨를 뿌리고 길바닥이나 돌밭에서 그리고 가시덤불 속에서 곡식의 결실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농사를 짓더라도 그러한 곳에서 결실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곳에 씨를 뿌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각자의 마음의 밭은 진정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씨앗이 잘 싹트고 잘 자라서, 많고 좋은 결실을 낼 수 있도록 그 바탕과 여건을 갖추고 있는가? 아니면 길바닥이나 돌밭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건성으로 받아들이고 곧 외면하고 마는지? 아니면 들을 때는 기쁜 마음으로 흥분하고 감격도 해가면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가시덤불 속에 빠져 하느님 말씀을 숨도 못 쉬게 가두고 뒷전으로 미뤄 놓는 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말씀의 씨앗은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기쁨을 누리게 해주는 것으로, 조금씩 우리의 삶 속에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 바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 안에 살아있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이제 우리에게 뿌려진 씨앗을 잘 성장, 큰 결실을 낼 수 있도록 언제나 좋은 마음,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도록 하자. 여기에 그리스도를 닮는 큰 결실을 얻게 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풀어 주십니다.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관한 말을 듣고 깨닫지 못하면"(마태 13,19)
씨는 뿌려집니다. 말씀이신 분께서 끊임없이 우리에게 당신을 내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영혼의 상태가 어떠하든 그분은 인내하시며 관대히 당신을 증여하십니다.
관건은 "깨달음"입니다. 아예 깨닫지 못하여 말씀을 악한 자에게 그대로 빼앗기고 마는 길바닥 같은 영혼도 있고, 당장은 말씀을 깨달은 것 같지만 뿌리가 없어 오래 가지 못하는 돌밭 같은 영혼도 있지요. 그리고 어느 정도 깨달아 신앙의 궤도에 들어선 듯 하지만 걱정과 탐욕으로 말씀이 질식되어 버리는 가시덤불 같은 영혼도 있습니다.
"좋은 땅에 뿌려진 씨는 이러한 사람이다. 그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다."(마태 13,23)
매일 매 순간 다가오시는 말씀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경청하고 그 안에 머무르는 이는 말씀 안에 깃든 주님의 모습을 관상히면서 그 말씀을 하시는 주님의 뜻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관상을 통해 점점 더 주님을 알아가고, 알아가는 만큼 사랑이 깊어가지요. 그렇게 되면 사랑하는 바를 나누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까지 와야 진정한 깨달음입니다.
그렇다면 말씀을 듣고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토양은 어떻게 마련될까요? 그 해답은 제1독서에 들어 있습니다.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땅에서 이끌어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탈출 20,2)
주님께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십계명을 주십니다. 첫 말씀에서 당신이 누구이신지를 이스라엘과의 관계성에 기인해서 밝히고 계시지요. 이 계명들은 주님의 백성으로 살아가기 위한 규범입니다. 거룩하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 마련된 지침들이지요.
유일하신 하느님을 흠숭하고 하느님의 이름과 안식일을 존중하며, 부모를 공경하고, 살인과 간음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탐욕을 금지하는 명령들로 이루어진 십계명은 하느님 백성에게 자유와 책임의 문을 동시에 열어 줍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은 이 계명을 613개의 조문으로 세분화했고, 예수님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골자로 요약하셨지요. 하지만 영원한 생명에 대해 묻는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 예수님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율법을 무시하거나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그 정신이고 골자인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하러 오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이에게 계명은 기본 바탕이 될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고 싹 틔워 열매 맺는 신비는 이러한 토양에서 이루어집니다. 복음에서 말씀하신 "좋은 땅"은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는 가운데 비옥해진 마음밭이지요. 아직 하느님을 경외하거나 사랑할 줄 모르고, 사람을 존중하거나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마음은 아직 길바닥이고 돌밭이며 가시덤불 상태일 겁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복음 환호송)
우리 신앙인의 삶은 계명 따로, 말씀 따로, 행실 따로가 아닙니다. 이 모두가 하나로 녹아들어 하느님 자녀다움, 그리스도의 신부다움, 만인의 형제다움을 형성합니다.
각자에게 허락하신 삶의 자리에서, 의롭고 선한 마음마음의 좋은 땅에 말씀을 품어 싹 틔우고, 인내와 희생으로 맺은 열매를 나누며 살아가는 벗님을 축복합니다. 약하고 부족한 탓에 종종 삐걱대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다시 또 분연히 일어서서 씨 뿌리는 이를 향해 힘껏 마음을 여는 이는 참으로 복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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