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2021년 7월 13일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코라진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야,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기적들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들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잘 들어라. 심판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 20-24)
"Woe to you, Chorazin! Woe to you, Bethsaida!
.For if the mighty deeds done in your midst
had been done in Tyre and Sidon,
they would long ago have repented in sackcloth and ashes.
But I tell you, it will be more tolerable
for Tyre and Sidon on the day of judgment than for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어둠 속에 오래 있다 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차츰 보이게 됩니다. 그 어둠이 지속되다 보면, 생활하는 데 그리 불편함이 없습니다. 이때 갑자기 밝은 빛이 들이닥치면 오히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을 찌푸리고 빛을 가리며 어둠을 찾아 스스로 눈을 감아 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아마도 그곳에 사는 모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잘못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고자 하느님께 청하였을 때(창세 18,16-33 참조), 열 명이라도 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자비로우신 하느님처럼, 예수님께서도 아무리 타락한 도시라 하더라도 전체가 아닌 개인의 회개를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개인의 잘못된 행동과 의도를 비판하지 않으시고 마을 전체를 꾸짖으시는 것일까요? 그 도시들은 대체 어떤 도시였을까요?
이 세 도시는 갈릴래아 지방에서 큰 규모의 도시들이었습니다. 동북으로 연결된 큰 도로가 지나가던 도시였기에 상업과 무역이 발달하였고, 호수와 맞닿아 있어 경제적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도시들의 문제처럼 빈부의 차가 극심하였고 사회적 부조리도 만연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느님보다 물질을 더 믿었고, 탐욕과 방탕의 삶이 사랑과 배려를 집어삼켰을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양식에 그들은 차츰 적응하고 타협하며 그것이 자신의 목표인 양 살아갔을 것입니다. 어둠과 악에 적응하고, 물질과 방탕의 우상에 자신의 영혼을 팔아 가면서 말입니다.
우리에게도 무서운 것은 악에 대한 ‘적응’과 ‘순응’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 혼자만 그리 살지 않으면 바보가 되고 뒤처지니까, 적당히 타협하고 스스로 위로하며 어느새 그런 태도가 습관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좀 더 시간이 지나면 이제는 오히려 어둠을 사랑하고 빛을 멀리하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둠에 얼마나 적응하셨나요? 물질의 어둠, 탐욕의 어둠에서 벗어나 예수님의 빛으로 나아가십시오. 처음에는 힘들 수도 있겠지만, 견뎌 내면 그 빛 안에서 모든 것을 제대로 보고 바르게 행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초등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개인의 인적 사항을 기록하는 신상 명세서를 쓰게 했었습니다. 한 학년 올라갈 때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종이를 나눠주며 빈칸을 채우게 하셨지요. 여러 가지 항목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난감했던 항목은 ‘취미’였습니다. 즐기는 일이 무엇인가를 곰곰이 생각해도 별다른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친구들이 쓰는 것을 슬쩍 보고는 저도 그것을 그대로 썼습니다. 바로 ‘독서’입니다. 앞으로 열심히 책을 읽겠다는 다짐을 하고 말이지요.
지금은 취미로 무엇을 쓸까요? 참으로 다양한 취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즐길 수 있는 일들이 많아졌다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과거를 그리워합니다. 저 역시 그때가 그립습니다. 부족한 것이 많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 힘듦이 그리움이 되고 기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때문입니다.
부족한 것이 무조건 나쁘지 않았습니다. 또 힘든 것 역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었습니다. 후회할 때를 보면 어렵고 힘든 것도 아니었고 또 나의 부족함도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았을 때, 그때 후회가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 세 도시에 대한 저주 말씀을 하십니다. 심판 날에 티로와 시돈이 이 도시들보다 구원의 길이 열려 있음을 이야기하시고, 소돔보다도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순히 이 도시의 사람들이 모두 악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일까요?
이 세 도시는 당시에 상업적으로 크게 발전한 도시였기에 많은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많은 사람이 있기에, 주님의 핵심 말씀인 이웃 사랑을 실천할 기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를 모아준다는 이방의 신을 섬겼고, 자신을 희생하기보다는 남을 희생시키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있으므로 주님으로부터 따끔한 충고의 말씀을 듣게 된 것입니다. 이제 너희 본래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즉, 하루빨리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지금의 나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을까요? 해야 할 것은 하지 않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면서 주님으로부터 멀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 20세가 되면 무조건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물론 법적으로는 어른이 맞습니다. 그런데 20세가 훨씬 넘었음에도 어른 같지 않은 사람도 많은 것 같습니다. 직업을 갖고 있으며 돈을 번다고 무조건 어른이 아닙니다. 어른답지 않게 사는 사람도 많습니다.
만 20세가 넘고, 주어진 일이 있어도 어른 같지 못하다는 소리를 듣는 이유는 ‘책임감’이 없기 때문입니다. 책임을 지지 않고 도망치려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어느 책에서 ‘책임감’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책임감이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
하고 싶지 않지만 해야 하는 일은 참고 하는 것.
하고 싶지 않은 일 중에 안 해도 될 일은 하지 않는 것.
하고 싶지 않지만 거절하기 어려운 일은 거절하는 데 용기 내는 것.
하고 싶지만 두려운 일은 해보는 것.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은 포기하는 것.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일에 따른 결과는 책임지는 것.
(김신회, ‘가벼운 책임’ 중에서)
우리는 얼마나 어른답게 책임지며 살고 있을까요?

기적이 주는 회개란? 아빠가 걷는 것도 아기에겐 기적이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수많은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는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질책하십니다. 유황불에 멸망한 소돔도 그 많은 기적을 보았다면 회개하였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도대체 ‘기적’과 ‘회개’의 관계는 무엇일까요?
기적은 이 세상에서 보면 초자연적인 현상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입니다. 얼마 전에 본 뉴스인데 강풍에 나무가 쓰러져 아기가 자는 방 위를 덮친 것입니다. CCTV에 찍힌 아기의 모습은 나무가 창문 위로 쓰러지며 유리창이 깨져 자신 위로 떨어지고 있는데도 아기는 눈만 크게 뜨고 있을 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어른이었다면 그 순간 빨리 피했을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아기는 어른들이 하는 행위 자체가 기적입니다.
다른 비디오도 있는데 아이가 혼자 놀다가 주방의 에어프라이어에 불이 난 것을 발견합니다. 아이는 자기 머리를 잠시 두드린 다음 빨리 다른 방에 있는 아빠에게 달려갑니다. 아빠가 달려와 아기를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큰 불이 날 수 있는 상황을 수습하였습니다. 아기는 이런 아빠의 모습을 보며 기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런 일은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이유는 이런 어린이들처럼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우선 이 세상을 뛰어넘는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아빠와 아기가 같은 공간에 있더라도 분명 사는 세상은 다릅니다. 아빠는 바깥세상에서 생활하며 돈을 법니다. 아기는 아빠처럼 기적을 행할 수 있다면 자신도 그 세상으로 나갈 수 있음을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빠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며 지금의 세상을 버릴 줄 알아야 합니다. 계속 기어 다니려고만 하고 말도 안 하려 한다면 아빠의 기적을 보고 아기가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기적은 이런 회개를 이끄는 용도입니다.
일본의 한 초등학교에서 운동회가 열렸습니다. 뜀틀 시간에 반별로 대표가 한 명씩 나와 가장 높이 뛰는 학생을 가립니다. 한 소년이 압도적인 실력을 뽐냈고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최고 높이의 10단 뜀틀에 도전했습니다. 소년은 전력을 다해 뛰었습니다. 하지만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뜀틀을 뛰어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습니다. 두 번, 세 번 더 뛰었지만 아이는 실패했고 눈물을 흘립니다. 이때 어른들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해. 넌 최선을 다했어. 이게 한계야!’
그러나 그때 같은 반 아이들이 뛰어나와 그 아이를 빙 둘러싸고 할 수 있다고 함께 응원해줍니다.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은 아이는 다시 도전했고 거짓말처럼 멋지게 뜀틀을 뛰어넘었습니다.
[출처: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때, 이것을 생각하세요’, 유튜브 채널 ‘체인지 그라운드’]
회개란 기적과 같은 일을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이미 기적을 하는 분을 믿는 데서 나옵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수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리스도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기가 부모 없이 걸을 수 있었을까요? 아기가 부모 없이 말할 수 있었을까요? 아기가 부모 없이 사랑하는 법을 스스로 깨우칠 수 있었을까요? 절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부모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떤 누구도 인간다울 수 없었습니다. 본성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 의해 태어나야 생깁니다.
참다운 회개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고 분명 이 세상을 뛰어넘는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직감하고 그 기적을 일으키는 분을 부모로 삼아 ‘나도 그분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그분처럼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하는 것입니다. 나도 그분처럼 할 수 있다는 믿음, 이것이 그다음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힘이고 그 노력을 시작하는 첫 순간이 회개의 순간입니다.
1950년대 중반 하와이 카우아이 섬에서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를 실행하였습니다.
1950년대까지 카우아이 섬 주민들은 대대로 지독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렸고, 주민 대다수가 범죄자나 알코올 중독자 혹은 정신질환자였습니다. 연구자들은 1955년에 이 섬에서 태어난 모든 신생아 833명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가정환경과 사회 환경이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추적 조사하는 대규모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했습니다.
그 후 20여 년간에 걸쳐 추적 조사한 연구 성과들이 책으로 출간되었지만, 그 결과는 상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 가족 구성원들이 가정불화, 이혼, 알코올 중독, 정신질환 등으로 시달렸습니다.
그들은 일찍부터 학습 부진에 시달렸으며, 약물중독에 빠지거나 정신질환을 앓았고, 범죄에 빠지거나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습니다. 18세가 되었을 때는 많은 아이가 전과자나 미혼모가 됐습니다.
정상적인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자녀들 또한 온전한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당연한 결론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연구에 참여한 심리학자 에미 워너는 예외적인 사례들을 발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전체 연구대상자 중에서 가장 열악한 환경에 놓였던 201명의 성장 과정에 대한 자료를 다시 분석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아이들 대부분이 문제아로 성장했을 거란 예상과 달리 약 3분의 1에 해당하는 72명은 별다른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강한 자신감과 긍정성을 지닌 훌륭한 젊은이로 성장한 예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오래 고심한 끝에 그들에게는 삶의 어떠한 역경에도 굴하지 않고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공통된 속성이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에미 워너는 이것을 ‘회복탄력성’이라 불렀는데, 잊혀져갈뻔했던 연구에서 그녀는 전혀 의도치 않았던 엄청난 발견이었습니다.
이렇게 에미 워너 교수가 40년에 걸친 연구 성과들을 정리하면서 터득한 회복탄력성의 핵심적인 요인은 결국 ‘인간관계’였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꿋꿋이 성장한 아이들은 예외 없이 ‘자신의 처지를 조건 없이 이해하고 받아준 어른이 적어도 한 명은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될 수도 있고 할머니가 될 수도 있고 누군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부모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조: 『회복탄력성』, 김주환, 위즈덤하우스]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세상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도 기적에 가깝습니다. 이 기적은 그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누군가가 너도 할 수 있다며 믿어주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 나라에 사는 것이 불가능함을 아시고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러 오셨습니다.
아빠가 걷는 모습을 보며 아기가 자신도 할 수 있다고 믿듯, 우리도 그리스도처럼 할 수 있다고 믿어야 그분이 속한 세상에 살 자격을 얻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 믿고 그리스도가 하신 것은 다 할 수 있다고 믿읍시다. 이것이 오늘 비난을 받아 저주를 받게 될 고을들을 닮지 않는 방법입니다.

-조재형신부-
축일을 맞이하는 엠이 대표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런데 옆 좌석에 있던 형제님이 식사비용을 대신 지불하였습니다. 제가 사제복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았습니다. 처음 보는 분이셨는데 제가 사제라는 이유만으로 기꺼이 식사비용을 내 주셨습니다. 돌아보면 세상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며칠 전에는 잃어버린 안경을 직접 가져다주신 고마운 분도 있었습니다. 평화신문에 ‘사랑이 피어나는 곳에’라는 지면이 있습니다. 매주 도움이 필요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많은 분들의 도움을 모아서 한국의 본사로 송금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이지만 적지 않은 금액을 송금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려운 이웃을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도 착한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것은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사제와 레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것은 강도당한 사람을 치료해 주고, 여관까지 데려다 준 사마리아 사람이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에게도 백신을 나눠주어야 한다고 권고하였습니다. 이번 G7 정상회의에서 교황님의 권고를 받아들였는지 가난한 나라를 위해서 10억 회 분량의 백신을 나눠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미국은 5억 회 분량의 백신을 나눠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번 회의에 초청받았던 한국도 기꺼이 백신의 나눔에 동참하기로 하였습니다.
소중한 것들은 무엇일까요? 넓은 식탁이 아닙니다. 작은 식탁이지만 그곳에서 정을 나누는 가족들의 만남입니다. 더 빨라진 기차가 아닙니다. 함께 여행을 갈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고마운 마음입니다. 원하는 물건을 살 수 있는 마트가 아닙니다. 먹거리를 키워주는 농부에 대한 감사의 마음입니다. 늘어난 평균수명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오래 사는 것도, 일찍 죽는 것도 받아들이는 신앙입니다. 나무는 생명이 숨 쉴 수 있는 공기를 줍니다. 흙은 생명이 싹틀 수 있도록 씨앗을 품어 줍니다. 물은 생명이 자랄 수 있도록 활력을 줍니다. 이 모든 것들을 무상으로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 또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양의 냄새가 나는 목자’가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비록 진흙탕에 빠질지라도, 옷이 더러워질지라도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라는 울타리에 안주한다면, 섬기려 하기 보다는 섬김을 받으려고 한다면, 오늘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바로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 될 것입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으십니다.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들에게 하느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아는 지도자, 언제나 백성들 한 가운데 서 있는 지도자!
-양승국신부-
이스라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타국 땅에서 노예 살이 하던 백성의 집단적 탈출을 주도한 모세의 인생 여정은 참으로 기구했으며 우여곡절을 거듭했습니다.
모세(Moses)는 원래 이집트 식 이름이지만, 히브리말로는 모셰(Moshe)이며 마샤(Mashah)와 비슷하게 발음됩니다. 이는 ‘끌어내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파라오의 엄명에 의해 죽을 처지에 놓여있던 신생아 모세가 인정 많은 파라오의 딸에 의해 ‘강에서 끌어내지다.’는 의미와 부합합니다. 동시에 억압받던 동족을 ‘이집트에서 끌어낸 자.’라는 의미도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 역사 안에 길이 남게 된 모세이지만, 그에게도 치명적인 흠결이 있었습니다. 젊은 시절 홧김에 살인을 저지른 것입니다. 자기 동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이집트 사람을 본 모세는 그 이집트인을 때려 죽여 모래에 파묻어버린 것입니다.
살인죄에 사체유기죄에 해당되는 중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자신의 죄가 드러나자 모세는 지체 없이 미디안 땅으로 망명을 합니다.
하느님은 참으로 묘하신 분 같습니다. 범죄자로서 망명까지 한 모세였지만, 그에게 크신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의 치명적인 과오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를 부르십니다. 당신께서 총애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 땅에서 탈출시키는 도구로서 그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모세는 참으로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쉽게 분노하고 여차하면 폭력을 행사하던 그였는데, 그런 자신을 부르시고 소명을 주신 하느님을 통해 그는 내적으로 크게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께서 모세를 불러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해내라는 소명을 주셨을 때, 그는 자신의 한계와 부족함을 절실히 알고 있었기에 거듭 사양합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탈출기 3장 11절)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말솜씨가 없는 사람입니다. 어제도 그제도 그러하였고, 지금도 그러합니다.”(탈출기 4장 10절)
하느님께서 수많은 지도자들 가운데 하필 모세를 선택하신 이유는 바로 이 모습, 극진한 겸손, 처절한 자기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도 이런 것이리라 확신합니다. 넘치는 자신감보다는 자신의 한없는 부족함을 잘 인식하는 겸손함.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참된 지도자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모세를 통해 그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완벽한 지도자, 능력 출중한 지도자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의 한계나 부족함을 인식하는 지도자, 자신이 부족하기에 전문성과 도덕성을 지닌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지도자, 양떼의 죄, 양떼의 실수를 하느님께 대신 사죄할 줄 아는 지도자가 요청됩니다.
무엇보다도 언제나 백성들 한 가운데 서 있는 지도자, 백성들을 위해 기도하고, 백성들이 느끼는 고뇌를 깊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지도자, 보잘 것 없는 자신의 힘과 능력을 내세우기보다 하느님 두려워할 줄 아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티로나 시돈처럼 바알우상숭배에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혹은 소돔처럼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도 아니었습니다. 또는 단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도시들이 질책과 경고를 받은 직접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그 이유를 오늘 <복음>의 시작에서는 이렇게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으셨다.”(마태 11,20)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단지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보았는데도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곧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기적을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영적 무지로 가려져 있는 어리석음과 굳어진 완고함이었습니다.
‘회개’(슈브, 메타노이아)란 베풀어진 사랑을 빗나갔음을 깨닫고, 그 사랑으로 바퀴를 돌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영적 무지의 어리석음에 빠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돌아온 탕자이야기’에서, 특은을 받고도 받은 줄도 모르고 죄지은 줄도 모르기에 돌아오지도 않은 큰아들과 같습니다.
또한 파라오처럼, 많은 기적으로 자꾸자꾸 체험시켜주건만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함과 고집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오늘 우리가 하느님과 공동체로부터 많은 사랑과 특은을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영적무지로 어리석고 완고하고 고집스런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충실한 종과 불충실한 종 이야기”(루카 12,41-48)의 말씀이 가슴을 칩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바로 제가 당신의 뜻을 알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이요, 많이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주저하고 망설이며, 이기심과 자애심과 편리와 안주에 사로잡혀 깊이 회개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도시들을 경고하신 것은 그들을 심판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구원으로 이끌기 위한 애타는 사랑의 호소였습니다.
멸망으로 빠져드는 그들에 대한 동정과 애도의 한탄이요 경고였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애타는 호소를 들어야 할 일입니다.
사실, 오늘도 주님께서 저희에게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희에게 그 사랑을 주신 까닭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 저게 많은 것을 요구하시는 것은, 저에게 그만큼 많은 것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전부를 건네주신 우리 주님께 우리도 전부를 건네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주님!
당신의 꾸짖음이 사랑임을 알게 하소서.
사랑을 받고 또 받으면서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함은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어리석음에 눈이 가려 마음이 비뚤어지고 변덕스런 까닭입니다.
많은 사랑을 요구하심은 그토록 많은 사랑을 주셨음을 알게 하소서.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밑에 모으듯 품으신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게 하소서! 아멘.

은총은 풍부하다
-반영억신부-
심판 날이 다가온다는 것은 기쁨인 동시에 두려움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인정받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기대가 됩니다. 열심히 노력하였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았다고 자부하는 이에게는 충만한 행복을 누리는 때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판의 날이 두렵습니다. 살아온 지난날이 허물로 누벼놓은 날이요, 마음이 흔들 비쭉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제키엘서에 보면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 회개하여라. 너희의 모든 죄악에서 돌아서라. 그렇게 하여 죄가 너희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하여라”(에제18,30).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저마다 걸어온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아니 지금, 이순간에 어떤 길을 걸을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자칫 잘 살아왔다고 교만한 마음을 갖게 될 때 그 인생이 올가미에 걸려들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코라진, 벳싸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열심히 활동하신 지역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필립보는 벳사이다 출신입니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 활동의 근거지요,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은총을 거부하였고 결단의 시간을 낭비하였기에 불행합니다. 반면에 티로와 시돈, 소돔은 이방인 도시로써 교만과 사치스러운 부의 표본이 된 곳으로 퇴폐와 음란, 악의 도시로 알려진 곳입니다. 그러나 그곳에 더 큰 구원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기적이 그곳에 있었더라면 그들은 분명 회개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은총이 아무리 많아도 담을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과의 인연을 내세우고 예수님을 자주 모셨다고 해도 그것이 곧 구원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의 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아무나 구원을 받지는 못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걸맞은 삶의 변화를 가져올 때 완성됩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좋든 나쁘든 감추어진 온갖 것에 대하여 모든 행동을 심판하신다”(코헬12,14).고 하셨으니 마음을 다잡아 오늘을 충실히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고 쭉정이는 불 속에 던지는 것은, 정해진 이치이니만큼 알곡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사실 먼저 자신을 잘 살핀다면 심판은 기쁨이요, 곧 하늘을 차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두려워 마십시오. 자신을 갖고 심판을 맞이하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셨으니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입니다. 끝까지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리지 않기를 다짐하며 이 날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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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느님께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대답하신 말씀입니다. 많은 경우에 악에 대해서 하느님이 응답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침묵 중에 계신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말씀하시면서 응답하셨습니다. 그 응답은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은 사랑이요 자비이고 용서의 말씀입니다. 또한 그것은 심판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십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면서 심판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내가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나는 구원됩니다. 만일 내가 그것을 거부한다면 저는 단죄 받게 되는데 이것은 그분에 의한 단죄가 아니라 나 자신이 내리는 단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사랑하시며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2013년 3월 29일 콜로세오 십자가의 길에서 행한 연설).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송영진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이 말을 표현만 보면, ‘기적’과 ‘회개’를 바로 연결해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그 고을들이 회개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과
상관없이, 그들이 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에게 기적을 많이 일으켜 주었으니, 너희는 더 많이
회개하여라.” 라는 뜻으로 꾸짖으신 것은 아닙니다.
죄 속에서 살면서도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꾸짖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어떤 고을에서는 기적을 더 많이 일으키시고,
어떤 고을에서는 덜 일으키시거나 안 일으키신 것은 아닙니다.
(불공평하게 차별하신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분이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풍성한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입니다.
여기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이라는 말은, 단순히 기적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신 일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고,
그래서 이 말은, “당신이 주로 활동하신”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복음 선포입니다.
그 선포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마태 4,17).
(기적은 복음 선포의 일부입니다.)
지금까지 한 말을 다시 정리하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고, 또 회개를 선포하시는데도,
사람들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도 않는 것을 꾸짖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 고을들을 언급하신 것은, 유대인들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하느님의 계명들을 알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똑같은 죄를 지어도, 이미 하느님을 믿고 있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들은
사람들의 죄가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님의 복음 선포를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의 죄보다 더 큽니다.
“주인의 뜻을 알고도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거나 주인의 뜻대로 하지 않은
그 종은 매를 많이 맞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많이 주신 사람에게는 많이 요구하시고,
많이 맡기신 사람에게는 그만큼 더 청구하신다(루카 12,47-48).”
이 말씀은, “너희에게 많이 주었으니, 너희도 많이 내놓아라.” 라는 뜻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은 더 엄한 심판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렇다면, 안 믿고 살다가 덜 엄한 심판을 받는 것이 낫겠다.”
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 텐데,
일부러 안 믿는 것은 알면서도 죄짓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많이 주신’이라는 말과 ‘많이 맡기신’이라는 말은,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많이 주신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 쪽에서 많이 청해서 많이 받아간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뭔가 아쉬운 일이 있을 때에는 주님께 간청하다가, 청한 것을 받은 다음에는
감사드릴 줄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인의 뜻을 모르고서 매 맞을 짓을 한 종은 적게 맞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알 기회도 없었고,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도 없었던 사람들의
경우에는 정상참작을 해 주시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무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4).”
이 말씀은, “지금 하느님을 모르고서 우상 숭배에 빠져 있는 사람들도
하느님을 믿고 회개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하느님을
믿고 있고 하느님의 계명을 알고 있으면서도,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지 않는 너희는 심판 때에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티로와 시돈 지역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믿고 있다는 유대인들의 죄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언급하신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 회개하였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그들이 회개한다면”으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은
“소돔이 회개했더라면”으로 해석됩니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믿고 있고 하느님의 계명을 알고 있다는 너희는, 하느님을 몰라서
우상을 숭배했던 사람들보다 더 엄한 심판을 받을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소돔에 관한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이 말씀은, 12장에 있는 ‘니네베 사람들에 관한 말씀’과 비슷합니다.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그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마태 12,41).”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 예언자의 한 번의 선포만 듣고서 바로 회개했습니다.
“요나는 그 성읍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하룻길을 걸은 다음 이렇게
외쳤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그러자 니네베 사람들이
하느님을 믿었다. 그들은 단식을 선포하고 가장 높은 사람부터
가장 낮은 사람까지 자루옷을 입었다(요나 3,4-5).”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요나 3,10).”
여기서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라는 말에는,
“회개하지 않으면”이라는 말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나중에 취소할 일을 하지 않으십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라는 예수님 말씀도,
확정된 일을 말씀하시는 예언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이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어떻든 니네베 사람들은 죄 속에서 살고 있었고, 하느님의 심판과 처벌을
받아야 했지만, 회개해서 그 심판과 재앙을 피했습니다.
하느님은 ‘과거의 죄’를 보지 않으시고 ‘회개한 현재 상태’만 보시는 분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과거의 신앙생활’을 보지 않으시고
‘죄 속에서 살고 있는 현재 상태’만 보시는 분입니다.

복음: 마태 11,20-24: 회개하라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그리고 카파르나움 사람들이 언어장애인들이 목소리를 찾아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치유되어 뛰어다니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 것을 보았지만 믿음도 회개도 하지 않는 것을 염려하여 애태우는 슬픔이 서린 탄식의 말씀을 하신다.
그러면 무엇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보다도 더 악하다고 코라진과 베싸이다를 꾸짖으셨는가? 갈릴래아 지방에 있는 이 코라진과 베싸이다 지방은 띠로와 시돈, 소돔과 고모라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던 많은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면서도 그리스도를 배척함으로써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를 거절한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가 하느님의 백성,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면서 우리의 잘못된 삶으로 주님을 배척하게 된다면, 우리도 유대인들과 똑같은 말씀을 하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은 이렇게 참으로 중요하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23절). 이 말씀은 그들이 주님의 예언을 거역했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질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과 행적으로 하늘까지 들어 올려지는 특혜를 받았건만, 그들은 믿지 않았기에 더 큰 벌을 받을 것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사람들이 회개했더라면 이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 나아가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이들의 사악함을 드러낸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24절). 이 고을들은 예수님의 행적을 보고서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언어장애인들이 목소리를 찾아 주님을 찬양하고 눈먼 이들이 보고 귀먹은 이들이 듣고 다리 저는 이들이 걸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났지만, 그처럼 놀라운 기적들로도 믿음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은 티로와 시돈에서도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발견된다.
코라진과 벳사이다가 비난을 받는 이유는 주님께서 몸소 그곳에 가셨는데도 그분을 믿지 않았지만, 티로와 시돈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었기 때문에 용서를 받았다. 예수께서 소돔에 대해 말씀하신 데는 이유가 있다. 소돔에 빗대 이 고을들의 죄를 강하게 따져 묻기 위해서이다. 에제키엘서에서 예루살렘을 질책하실 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저지른 그 모든 역겨운 짓으로 너의 자매들이 오히려 의롭게 여겨지도록 만들었다.”(에제 16,51)
이 고을들은 예수께서 사랑하시어 오래 머무신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주님께서는 강하게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서든지 그들을 회개로 부르시고자 하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그러기에 올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지 못하면, 주님께서는 이 고을들에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도 하실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 20)
-한상우신부-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우리의 참된
회개이다.
회개는 우리를
새 사람이
되게한다.
새 사람은
하느님을
진심으로
믿는 이들이다.
가장 큰
은총과
기적은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비참한
우리의
회개이다.
이와같이
회개와
구원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회개를 통하여
우리의 삶은
거저 받은
사랑의
선물임을
알게된다.
회개는
사랑이신
하느님을
알게되는 것에서
뜨겁게
시작한다.
하느님 사랑은
우리를
살게하시는
힘이시다.
삶의 열매는
마음의
눈을 뜨는
회개이다.
마음에
눈을 뜨야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회개는
기쁨의
실천이다.
가장 소중하고
가장 귀한 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임을 안다.
회개의 삶은
행복한 삶의
본질이다.
우리의
신앙이란
회개하는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하느님의 생명은
하느님 안에서의
회개이다.
영원한 생명의
시작은 우리의
회개이다.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가장 큰 은총과
기적인 회개를
선물로 주셨다.
모든 것이
되시는
하느님의
영광이시다.
서로를
빛나게하는
회개이다.
하늘 나라는
회개의
나라임을
믿는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오늘 호명된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은 예수님께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연민의 사랑을 움직일 만큼 질병과 마귀로 고통 받는 가난한 이들이 많았으리라 짐작해 봅니다.
그런 도시들과 우등비교된 티로, 시돈, 소돔은 역사 안에 만만치 않은 이력으로 기록된 곳들입니다. 당시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인 티로와 시돈은 상업이 활발하여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곳이었지요. 하지만 그만큼 빈부의 격차가 컸고 부자들은 재물을 축적하려 사람을 착취하며 부를 늘려갔습니다. 소돔은 아브라함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의인 열 명이 없어 멸망한 죄의 도시고요. 그렇다면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카파르나움은 왜 이곳들보다 더 큰 벌을 받으리라 질타의 대상이 되었을까요?
성경은 그들이 가장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믿지 않은 때문이라고 전합니다. 사실 믿음을 거부하는 이들의 유형은 다양합니다. 아무리 대단하고 놀라운 일이 일어나도 스스로의 힘이라 여기는 교만에서, 기적에 놀라기는 하지만 감사에는 둔한 완고함에서, 죄 중에 머무르는것이 너무 익숙해서, 죄를 떨쳐버리기에 스스로가 너무 약하다고 자포자기해서, 이도 저도 아니면 그저 영적 사정에 게으르고 무관심하기 때문에 그럴 것 같습니다.
그런 그들을 위해 더 많이 마음을 쓰시며 사랑을 베푸신 예수님의 심정이 참 안타까우실 것 같습니다. 오죽하면 불행을 선언하기까지 하셨을까요...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모세의 출생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탈출 2,10)
사내아이를 물에 던져 죽여 버리라는 파라오의 명령에도 아기는 부모와 누이의 기지로 목숨을 건집니다. 물에서 건져낸 아이 모세는 갈대바다를 건너 새 생명으로 나아간 이스라엘 백성의 운명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세례를 통해 죄에서 해방되어 죽음의 물을 건넌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의 예표입니다.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탈출 2,15)
이집트의 왕자로 성장한 모세가 죄를 짓고 도망자의 신세가 됩니다. 동족을 괴롭히던 이집트인을 때려죽인 사건이 들통나면서 벌을 피해 이방 지역으로 도망친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은 언젠가 그를 그곳에서 끌어 내셔서 당신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어떠한 죄도 용서하시고 새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니까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세 고을을 그토록 안타까워하시는 겁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움직입니다. 모든 죄는 스스로 생각하기에 무거울 뿐, 속량을 위해 바치신 하느님 아들의 목숨보다 가볍디 가볍습니다.
"오늘 너희는 주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너희 마음을 무디게 하지 마라."(복음 환호송)
회개의 때는 "오늘"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회개는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성 행위가 아니지요. 마음을 기울여 살펴보면 우리 삶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의 기적이 담겨 있는지 모를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인식은 감사로 이어지고 회개를 동반하지요. 더 많이 사랑받고 더 많이 보호받은 이들의 외면과 불신은 주님의 마음을 더,더,더 슬프고 안타깝게 만들 겁니다.
사랑하는 벗님! 각자에게 베푸신 주님의 사랑의 기적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돌이켜 주님께 돌아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을 때 우리 영혼은 생기를 되찾게 될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아, 하느님을 찾아라. 너희 마음에 생기를 돋우어라."(화답송)

기적이 기적이 못되는 사람에게
-김찬선신부-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꾸짖으시는데
주님께서 기적을 많이 일으키셨는데 어찌 회개를 하지 않을까요?
결론적으로 얘기하면 기적이 하늘의 표징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복음을 보면 <기적>이라는 표현과 <하늘의 표징>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악하고 절개 없는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구나!"와
"바리사이들과 사두가이들이 와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와 같은 것들이지요.
복음에서 두 말은 대체적으로 같은 뜻으로 쓰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표징>에서처럼 표징은 기적과는 좀 다르게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가 묵상한 것은 하늘의 표징이 되지 못하는 기적입니다.
성사와 관련하여 우리는 사효성과 인효성을 얘기합니다.
사제가 적법하게 미사를 거행하면 사제가 거룩하건
죄를 지었건 성사의 유효성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성사를 이루는 분은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 인간은 성사의 주관자인 하느님을 보기보다는
인간의 성과 속을 보기에 죄인인 사제의 미사는 참례하지 않으려 하지요.
언제고 하느님을 봐야 하는데 언제고 인간을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사가 사효적으로는 유효해도 인효적으로는
효과가 없거나 아예 무효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이때 가장 흔히 드는 예가 성체를 쥐가 먹으면
성체를 먹은 것이냐 밀가루를 먹은 것이냐지요.
어떻습니까? 쥐는 성체를 먹은 것입니까? 밀가를 먹은 것입니까?
분명 가가 먹은 것이 사효적으로는 성체이지만 쥐에게는 밀가루지요.
같은 맥락에서 주님께서는 하늘의 표징으로서 기적을 많이 일으켰지만
바리사이나 율법 학자 중에서는 그것이 하늘의 표징이 아니라
베엘제불의 힘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도도 하고 앞에서 봤듯이
하늘의 표징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 생각에 코라진 사람들은 주님께서 일으키신 것이
기적인지 아닌지 아예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온 표징이니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기적에 관심이 있을 때 자기가 본 것이 기적일까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 세상 것에 온 관심이 쏠려 기적에 관심이 없으면
주님께서 아무리 기적을 많이 일으켜도 아무 소용 없겠지요.
회개는 하늘의 표징을 본 사람, 하느님을 체험한 사람이
하늘로 향하여 돌아서는 것이고, 이것이 주님께서 말씀하신 회개입니다.
제 생각에 코라진이나 벳사이다에도 도둑질하다가 그만둔 회개자,
도박을 하다가 그만둔 회개자,
아내를 두드려 패다가 이제는 안 패는 회개자는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회개이긴 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신 회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일으키신 기적들을 볼 수 있어야 하며,
그리고 태양을 기적으로 공기도 기적으로 오늘 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