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2021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금요일
때가 오면 너희가 해야 할 말을 일러 주실 것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성령이시다.
(마태오 10,16-23 )
You will be given at that moment
what you are to say.
For it will not be you who speak
but the Spirit of your Father speaking through you.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최종훈신부-
강론과 강의를 하며 신자들에게 미안할 때가 많습니다. 나누라고, 견디고 참아 내라고, 가난하고 없는 이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과 사랑을 보이라고 하는 것이 신자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제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 신자들에게는 한 번 더 고민해야 하는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제는 기꺼이 내어 놓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안녕과 안위를 걱정하지 않고 투신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자들은 신념만으로 살아가기가 쉽지 않습니다. 책임지고 의무를 다해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불의와 타협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기도 하고 세상의 가치에 따라서 살아야 하기도 합니다. 옳지 않은 일을 보고 침묵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와 복음의 가치는 같지 않습니다. 복음의 가치대로 살아가다 보면 세속적인 면에서 대개는 부족하게 받을 것입니다. 성공보다는 후퇴와 실패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며 주위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숙명입니다. 박해의 삶, 스스로 손가락질과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삶, 아무것도 모르는 순박한 아이의 모습으로 살아가면서도 예수님의 가치를 위해서는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용기와 강단 있는 삶, 그러한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은 아파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 살아왔다는 죄책감으로, 고통받고 아파하시는 예수님을 일상에서 외면하였다는 미안함으로 스스로 미워하고 박해합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그 박해와 미움은 우리의 몫이기에 이 아픔을 두려워하지도 멀리하지도 않았으면 합니다. 주님께서 비워진 자리는 채워 주실 것이며 상처 난 자리에는 약을 발라 주실 것입니다. 서로 함께 용기를 주며 보듬어 안아 주십시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영국 수필가 찰스 램의 일화입니다. 그는 33년의 직장 생활을 마치는 정년퇴직 날이 너무나 기뻤습니다. 직장 때문에 이제까지 퇴근 후에나 글쓰기가 가능했기에, 이제 구속받지 않고 글쓰기에만 몰두할 수 있다는 생각에 행복했던 것입니다. 그로부터 3년 후, 찰스 램은 옛 동료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한가하다는 것이 이렇게 괴로운지 몰랐습니다. 매일 할 일 없는 시간이 반복되고 많아지다 보니 어느새 자신을 학대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좋은 생각도 삶이 바쁜 가운데서 떠오른다는 것을 3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이 말을 가슴에 새겨 부디 바쁘고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기를 바랍니다.”
신앙생활도 한가해지면 하겠다는 분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은 한가해질 때 나오지 않고, 반대로 정신없이 바빴을 때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삶과 신앙이 일치하면서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해지면 오히려 삶이 지루해지고 동시에 신앙도 무료해지고 맙니다.
“바쁘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습니다. 한가할 것만 같은 초등학생도 “바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까? 그 어떤 사람도 한가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이 바쁘다면서 지금의 어려움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바쁘다는 것은 그만큼 신앙생활에 집중할 때라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제자들을 보내십니다. 위험이 가득한 세상이기에 주님께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말씀하시지요. 박해의 위협에서도 걱정하지 말 것이며,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견뎌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래야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박해의 위협이 없습니다. 그만큼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을 하기 힘들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더 많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를 포함한 많은 이유가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해야 할 일도 많고, 마음의 여유도 없습니다. 이렇게 죄 많은 내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냐는 마음의 가책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어떤 순간에서도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쁠 때가 더 열심히 신앙생활에 집중할 때이고,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가 더 주님을 바라봐야 할 때이고, 죄책감에 쌓여 있을 때는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위로와 힘을 얻어야 할 때인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선물은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물 한 병을 사러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음주 차량이 편의점을 향해 돌진합니다. 몸에 이상 증상을 느껴서 코로나 검사를 받았는데 확진 판정이 나왔습니다.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 무차별 폭행을 합니다. 코로나 백신을 맞았는데 뇌출혈 부작용 증세가 나옵니다. 길을 가는데 차가 내 발을 밟고 지나갑니다.
이 일은 실제로 어제 뉴스에 나왔던 내용입니다. 즉, 누군가에게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 사고가 어제 하루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매일같이 새로운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로 내가 아닌 남이 그 대상자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지만 내게는 잘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분명히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 가지로 운이 좋았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행운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점에 감사를 느끼며 살 때, 행운의 단계를 넘어 행복의 단계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행운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닙니까?

살기 위해 수영을 배우려는 친구가 있거든 물고기가 되는 법을 알려주어라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세상 속에 속한 교회가 가져야 하는 세계관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시며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십니다.
양들이 이리들의 마음에 들려 하고 그들에게 속하려 한다면 결국엔 잡아먹히게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 속에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이렇게 권고하십니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뱀이 사람을 믿으면 될까요? 맞아 죽거나 술에 담기게 됩니다. 비둘기가 사람을 믿으면 될까요? 언젠가는 사람들의 음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이 우리에게 연민을 가진다고 여겨도 절대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하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영화관에서 본 영화 중 기억에 많이 남는 영화가 있습니다. 2004년 밀양 여중생 집단 성폭행 사건을 바탕으로 만든 ‘한공주’란 영화입니다.
한 여학생이 많은 어른에게 둘러싸여 전학을 강요받습니다. 이름이 ‘한공주’인 이 여학생은 그 어른들에게 눌려 이렇게 말합니다.
“전…. 잘못한 게 없는데요……?”
잘못한 게 없지만,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이미 더럽혀져 자기 자녀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 학생일 뿐입니다.
이때 한 젊은 남자 선생님이 한공주를 데리고 자신의 집에 어머니와 함께 살라고 데려다 놓고 갑니다. 그 어머니는 자신이 무슨 잘못으로 전학 온 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와 한집에 살아야 하느냐고 거부를 합니다. 그러나 교육부에서 생활비를 보조해준다고 하니까 받아들입니다. 성질이 사나운 분이지만 한공주는 이 어머니와도 잘 사귀어갑니다.
한공주는 우선 ‘배신자’라고 부르는 자신의 친어머니를 만나러 갑니다. 전화번호까지 바꿔놓았지만, 인터넷을 통해 간신히 어머니가 있는 작은 마트로 찾아갑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딸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지금 간신히 재혼해서 사는 자신도 힘드니 엄마를 위한다면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딸에게 몇만 원을 주며 밀쳐냅니다.
전학 온 학교에서 한공주를 아무 이유 없이 잘 대해주는 친구가 생깁니다. 물론 한공주의 아픔이 어떠한 것인지도 모르는 천주교 신자 친구. 한공주는 그 친구를 통해 세상과 대화를 시작합니다. 이 천주교 친구는 한공주에게 어떤 아픔이 있건 자신이 친구가 되어주겠다고 말합니다.
한공주는 수영을 배웁니다. 물에 뜨는 것은 다 할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배우기 위해서... 그러나 잘은 안 됩니다. 그렇더라도 필사적으로 수영을 배웁니다.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수영을 배우는 것은 바로 비정한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자신의 처지를 상징합니다.
그렇게 큰 아픔을 치유해가며 세상에 다시 발을 붙이려는 순간 그녀의 아버지가 찾아옵니다. 느닷없이 어떤 서류에 사인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재판 중인 그녀의 가해자 중의 한 명에게 돈을 받고 탄원서를 써 주기로 한 것입니다. 한공주는 사인을 해 줍니다. 아빠는 그렇게 그 가해자들이 준 위로금으로 흥청망청 살아갑니다.딸의 아픔을 이용하는 아빠...
그 와중에 어떻게 알았는지 그 수십 명의 가해자의 부모들이 자신들에게도 탄원서를 써 달라고 학교로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일어난 대소동. 아무 죄도 없이 학교에서까지 쫓겨 다녀야 하는 한공주.
교장 선생님은 한공주가 그런 연유로 전학 온 지 몰랐다고 하며 학교에 나오지 말고 집에서 근신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함께 살던 집 아주머니가 사귀고 있던 파출소 소장은 그 아이가 어떤 일을 당한 아이인지 일일이 다 이야기해주고,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그 아이를 내보내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공주는 그 집에서도 발붙이지 못하고 찜질방에 가서 머물게 됩니다. 부모님도, 학교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한공주를 받아주려고 했지만, 그녀의 현실 앞에서는 각자의 길을 가고 맙니다.
결국, 자신을 그렇게 잘 대해주었던 천주교 신자인 자신의 유일한 친구에게 전화를 겁니다. 하지만 그녀도 전화를 받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한공주를 성폭행을 하며 찍어놓은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 정도였는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렇게 평범하게만 살고 싶었던 한공주는 짐 가방을 들고 한강 다리를 걷습니다. 자신과 함께 당했던 친구가 이미 그렇게 했듯이, 자신도 물로 뛰어드는 것 외에는 세상에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리고 뛰어듭니다. 물 위로 다시 떠 오릅니다. 이때 다시 생겨나는 살고 싶은 욕망. 그래서 그동안 배웠던 수영을 시도해 봅니다. 하지만 한강의 빠른 물살에는 역부족입니다. 다시 물속으로 잠깁니다. 그렇게 다시 떠오르지 못합니다.
이 영화가 한공주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일까요?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는 어쩌면 나도 어느 정도는 세상에서 이런 느낌을 받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있지만 결국 집처럼 나를 맞아줄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세상...
한공주는 수영을 배우기보다는 물고기가 되어야 했습니다. 뱀은 어차피 뱀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인이 뱀임을 인정하고 뱀들이 사는 굴을 찾았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과 화해하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둘기처럼 그들에게 물들려 하거나 그들에게 공격을 당할 때 날갯짓 몇 번으로 그들을 떠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 안토니오 성인은 사막에 살면서 세상에서 복음을 전한 후 지쳐 다시 사막으로 돌아왔습니다. 사막에 함께 머무는 수도자들 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물고기가 뭍에서 너무 오래 있어서는 안 되지.”
세상은 이리 떼이고 우리는 양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이리에서 양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을 데려오기 위해 파견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세계관을 가지지 못하여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면 자신도 이리가 되거나 이리에게 먹히는 일이 발생합니다.
나는 교회에서 물고기이고 세상에 나아가 잠깐 선교하고 다시 물로 돌아와야 하는 처지임을 명심합시다. 그것이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연중 제11주일이었습니다. 강론을 준비했는데 평소처럼 입에 맴돌지 않았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을 이야기하고, 삼국지에 나오는 시를 인용했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습니다. 그날 성서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축복으로 열매를 맺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시들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 넣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생기를 얻어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면 저절로 줄기가 나고, 이삭이 열리고, 열매를 맺는다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아주 작지만 자라면 새들이 와서 쉴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자란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였습니다. 미사 시간은 가까워지는데 생각은 정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문득 텃밭이 생각났습니다. 텃밭에 오이, 상추, 미나리, 쑥갓, 고추, 가지, 피망을 심었습니다. 모종으로 심었는데 지금은 제법 잘 자라고 있었습니다. 미나리, 쑥갓, 상추는 몇 번 먹었습니다. 현실에서 텃밭은 저절로 자라지 않았습니다. 식탁에 오르는 채소는 정성을 기울여야 합니다. 더운 날에는 매일 물을 주어야 합니다. 모종을 심기 전에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물이 잘 스며들도록 고랑을 내어야 합니다. 지지대를 세워주어야 합니다. 늘 입던 편한 옷을 입은 것처럼 생각이 정리되었습니다. 목수였던 예수님께서는 농사일에 대해서는 잘 모르시지 않았나 생각 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날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에게는 따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이 함께하지 않으면 인간의 노력이 헛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인간의 노력이 함께 할 때 더욱 빛이 납니다. 철학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만, 시를 말하지 않았지만 마음이 편했던 강론을 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느님, 네 아버지의 하느님이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 하느님께서는 낯선 땅으로 가는 야곱에게 용기를 주셨습니다.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함께 가겠다고 하셨습니다. 야곱은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으며 먼 길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야곱에게 한 가지 말씀을 더 하셨습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여라. 그러면 너는 길이 살리라.”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디로 가든지, 어디에 있든지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피하고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야곱에게 용기를 주셨던 것처럼 제자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제자들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를 알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환난과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었고, 목숨을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맞습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모든 것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주님을 믿으면서 우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때면 오늘 화답송의 말씀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주님은 올바른 것을 사랑하시고, 당신께 충실한 이들 버리지 않으신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받는다.”

그냥 순박함이 아니라 슬기로움을 토대로 한 순박함입니다. 슬기로움 역시 순박함을 기초로 한 슬기로움입니다!
-양승국신부-
굽이굽이 험난한 산맥들과 다양한 유혹거리들이 산재해있는 인생길을 걸어가는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마음 깊이 새겨둘 정말 필요한 한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이 말씀만 항상 염두에 두고 살아간다면 우리 삶이 훨씬 평화롭고 풍요롭게 될 것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오 복음 10장 16절)
선과 악이 공존하는 요동치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무조건 착해빠져서만은 안될 것입니다. 제가 그런 사람 참 많이 봤습니다.
어디 가나 사람 좋다는 말 듣습니다. 누가 부탁하면 거절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갑니다. 언제나 속아 넘어가고 이용당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뱀처럼 슬기로운 태도입니다. 슬기로움이란 지혜로움입니다. 이상과 현실을 잘 조화시키는 것입니다. 정확한 식별력을 지니는 것입니다. 균형감각을 지니고 상식을 중요시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래서 비둘기처럼 순박한 자세가 또한 필요합니다. 그냥 순박함이 아니라 슬기로움을 토대로 한 순박함입니다. 슬기로움 역시 순박함을 기초로 한 슬기로움입니다.
눈이 휙휙 돌아갈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최첨단 사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선포의 길에서 고유한 매력과 경쟁력을 갖출 필요가 있습니다. 갖은 유형의 적대자들의 무차별 공격 앞에서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강력한 힘과 탁월한 지혜도 필요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지만, 최첨단•글로벌 세상 안에서도 충실해야 하며 전문성을 지녀야겠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도 동료들로부터 찬사와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는 모범사원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학교 안에서도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우등생으로 살아가야겠습니다.
경쟁력과 전문성이라는 개념이 복음 정신과 상충되는 것이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경쟁력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 안에서도 빛나는 삶을 살아, 주님께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것이다. 그런 삶이야말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이며, 삶을 통한 복음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이 깊고 착하기만 하지 성적이나 경쟁력이 떨어지는 학생들은 뱀처럼 지혜로워지라는 주님 말씀에 좀 더 방점을 둘 필요가 있겠습니다. 이런 면에서 바오로 사도의 빛나는 승리의 길, 강한 경쟁력, 불굴의 의지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우리가 착하고 순결하기만 하지 지혜롭지 못하다면, 악한 이리 떼의 먹잇감으로 적락하고 말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도 패배자나 낙오자로 밖에 살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 사랑 받는 사도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사람들보다 더 충실히, 더 열심히 살아가야만 합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너희 아버지의 영이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도 여전히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그들이 박해와 어려움을 당하게 될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미리 무장시키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여기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할 것은 먼저 제자들을 파견하는 것이 마치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결코 이리 떼를 제거해주거나 쫓아주지 않고, 오히려 그들 가운데로 보낸다는 사실입니다. 곧 세상이라는 어장은 결코 환상적이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질곡과 어려움 속에 던져진 것입니다.
사실, 교회도 수도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환상적인 곳이 아닙니다. 때로는 서로가 이리가 되어 헐뜯을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된 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러한 이곳에 우리의 파견지인 것입니다. 그러나 두려워할 것은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그 대처방법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니 너희는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여기서, “슬기롭다”는 말의 성서에 따른 뜻은 “지혜롭다”는 말과 같습니다. “지혜롭다”는 것은 먼저 “하느님을 경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0,19-20)
이는 “슬기로움”이 많이 아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곧 슬기로움은 사랑 때문에 핍박과 박해를 받기도 하고, 끝내는 죽기까지 하는 것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지혜이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순박하다”는 말의 성경에 따른 뜻은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성품인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의 성품과 덕입니다. 이를 오늘 <복음>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나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이는 “순박함”이 그저 화를 내지 않고 온유한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강한 것을 말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순박함’은 끝까지 믿고 참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마지막까지 희망을 꺾지 않는 것입니다. 온갖 굴욕을 받기까지, 끝내는 배반 받고 죽기까지도 믿는 것입니다.
따라서 “뱀같이 슬기롭고 비둘기같이 순박하게 되어라.”는 말씀은, 설혹 이리 떼에게 생명을 노략질 당한다하더라도 “죽기까지 사랑하라.”는 말씀이요, “끝까지 믿고 희망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는 박해를 두고, 산상설교에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마태 5,12)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 5,11-12)
- 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주님!
가슴 깊이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많이 아는 것이 아니라, 많이 사랑하는 슬기로움을 주소서.
목숨이 노략질 당하는 굴욕 속에서도 믿고 희망하는 순박함을 주소서.
십자가에서 지니신 그 순박함과 슬기로움을 가르치소서! 아멘.

예수님이시라면?
-반영억신부-
‘참는 데도 한계가 있다’는 말을 합니다. 인간이기에 한계를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참다 보면 병이 생깁니다. 그래서 마음속에 쌓아두지 말고 풀어버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더군다나 주님의 이름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가족 간에도 마음이 갈라질 텐데 그 때에 참고 견디라고 하십니다. 서로의 뜻이 다르고 오해가 있을 때 참고 기다려 주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인내가 필요한 때이고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처신할 때입니다.
강한 것은 부러지고 그래서 부드러운 것이 굳센 것을 이깁니다. 그러니 어떠한 처지에서도 더욱이 주님을 증거 하는 자리에서는 예수님께서 취하셨던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어떤 상황이나 처지에 구애됨이 없이 예수님 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묻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지금 당장은 지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은 이깁니다. 감정이나 분위기에 휘둘리지 않고 신앙 안에서 굳건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사에 '예수님이시라면?'이라는 자문이 필요합니다.
열왕기 하권 20장에 보면 히즈키야 왕이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때 히즈키야 왕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울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히즈키야 왕이 마주한 벽은 인간이 절대로 넘을 수 없는 죽음의 벽입니다. 그러나 히즈키야 왕 자신의 한계상황을 하느님께 내어놓고 울며 기도했을 때 그 벽을 넘어설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의 눈물을 보시고 세상에서의 생명을 15년 더 연장해 주셨습니다. 15년을 연장해 준 것이 대단한 의미가 있느냐고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기간에 회개하고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였다면 모든 것을 얻은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벽이 참으로 많습니다. 인간적인 한계상황의 벽이 산 너머 산입니다. 생로병사는 물론이고 고독, 미움과 분노, 죄가 한계상황으로 다가옵니다. 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견디는 것입니다. 특별히 일상 안에서 히즈키야 왕처럼 벽 앞에서 기도하며 주님 이름으로 말미암아 참고 견디면 반드시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공격을 공격으로, 모욕을 모욕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혹 참을 수 없다면 잠시 동안 하느님께서는 ‘나의 결점에도 불구하고 항상 참아주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분은 따지지 않고 참아 주시는 데 내가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서 되겠는가? 은혜를 입었으면 은혜를 베풀어야 함은 당연합니다. 그래도 참을 수 없다면 사랑으로 하느님께 앙갚음하십시오.
참고 견뎌서 모두가 구원을 얻기를 바랍니다. 모함이나 수근거리는 소리에 속상해 하지 말고, 뒤에서 딴소리하는 사람 때문에 억울해 하며 상처 받지도 말고 오직 주님의 이름 때문에 견디시길 바랍니다. 잠잠하게 참고 견디면 의심 없이 주님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이 순간 다가오는 한계를 주님으로 말미암아 극복하시길 기도합니다. 힘들고 지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에 하느님의 모든 사랑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할 때 악, 고통, 죽음은 힘을 잃어버리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과 희망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미움과 실패, 그리고 죽음의 도구에서 사랑과 승리와 영광, 그리고 생명의 표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2013,726세계청소년대회).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박해를 각오하여라.>
-송영진신부-
제자들이 겪게 될 박해와 고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 말씀은,
겁주기 위한 말씀도 아니고, 긴장하게 만들기 위한 말씀도 아닙니다.
“박해와 고난을 겪을 때도 있겠지만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항상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지켜 주겠다.”는 뜻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너희는 인내로써 생명을 얻어라(루카 21,18-19).” 라는 말씀을,
‘박해 예고 말씀’의 결론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박해 자체를 없애 주시겠다는 약속은 아니지만,
박해 때문에 잃는 것이 없도록 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에 대해서 “박해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는 것은 잃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다음 말씀을,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4-25).”
순교자들의 죽음은 목숨을 빼앗긴 일도 아니고, 잃은 일도 아닙니다.
밀알 하나를 심어서 많은 열매를 맺은 일입니다.
그 열매는 순교자 자신의 영원한 생명을 뜻하기도 하고,
새로 신앙인이 되어서 구원을 받게 된 수많은 사람들을 뜻하기도 합니다.
박해는 우리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못합니다.
(종말과 재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어차피 누구나 한 번은 죽게 됩니다.
믿는 우리에게는, 지상에서의 육신의 죽음은
하늘나라의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과정일 뿐입니다.
목숨을 빼앗기는 일도 아니고, 잃는 일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죽음이란 인생이 그것으로 그냥 끝나버리는 허무한 일입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 10,16-17).”
여기서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리 떼 가운데에 있는
양들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제자들을 그 위험 속으로 밀어 넣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한 15,19).”
신앙인들은 세상 속에서 살지만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과 박해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점은, 예수님 말씀에 있는 ‘양들’은
‘버려진 양들’이 아니라, ‘목자와 함께 있는 양들’이라는 점입니다.
비록 이리 떼 가운데에 있긴 하지만,
‘착한 목자이신 예수님께서 목숨 바쳐 지켜 주시는 양들’입니다(요한 10,11-15).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라는 말씀은,
‘지혜와 온유’로 박해를 극복하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이 박해하더라도 신앙을 잃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마태 10,18-20).”
이 말씀은,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뜻인데,
신앙을 증언하는 일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말’과 ‘삶’으로 신앙을 증언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넓은 뜻으로 생각하면, 박해를 포함해서 우리가 겪는 모든 고난과
시련을, 자신의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이 고난과 시련에 대처하는 모습 자체가 선교활동이 됩니다.
우리는 힘든 일을 겪어도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 모습,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 모습, 아무리 힘들어도 사랑 실천을 중단하지 않는 모습을
통해서 ‘신앙의 힘’을 드러내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일입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스라엘의 고을들을 다 돌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마태 10,21-23).”
“그래도 가족인데, 설마 식구들이 ‘순한 양 같은 신앙인’을
잡아먹으려고 하는 이리 떼가 될까?” 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많이 있었고, 요즘에도 있는 일입니다.
(가정에서의 박해가 세상의 박해보다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4).”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미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사랑이고, 박해를 참고 견디는 방법은 기도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이교인들 가운데에 살면서 바르게 처신하십시오. 그래야 악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여러분을 중상하는 그들도 여러분의 착한 행실을 지켜보고,
하느님께서 찾아오시는 날에 그분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1베드 2,12).”
“아내들도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여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남편들도 아내인 여러분의 말 없는 처신으로 감화를 받게 하십시오.
그들은 여러분이 경건하고 순결하게 처신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그리될 것입니다(1베드 3,1-2).”
“악을 악으로 갚거나 모욕을 모욕으로 갚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 주십시오.
바로 이렇게 하라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복을 상속받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3,9).”

복음: 마태 10,16-23: 너희는 나 때문에 끌려가 재판을 받으며
-조욱현신부-
하느님의 백성은 역사적으로 박해를 당해왔다.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지만 미움을 받으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박해를 면치 못했고(요한 3,17; 15,18), 수난에서 절정을 이룬다(마태 23,31-32). 마찬가지로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도 같은 운명에 처하게 된다.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요한 15,20) 이 박해는 사도들로부터 교회 역사 안에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과 다른 대접을 받을 수 없다. 그들 역시 주님을 따라서 그분과 함께 그분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요한 15,20; 16,1-3). 그들 역시 그분이 마신 잔을 마셔야 하고 그분이 받으신 세례를 받아야 한다(마르 10,38-39; 마태 20, 22-23).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통하여 박해를 다시 체험하신다(사도 9,4-5; 콜로 1,24). 그리하여 제자들은 박해를 당하는 것을 은총으로 여기며(필립 1,29) 기쁘게 생각하였다(1베드 4,12-14).
“유다인들은 주 예수님을 죽이고 예언자들도 죽였으며, 우리까지 박해하였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계속 쌓아갑니다.”(1테살 2,15-16). 자기 동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주님의 제자들을 박해할 것이다. “사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이들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2티모 3,12).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당하시면서도 아버지께 신뢰하셨으며(마태 26,53; 요한 16,32),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셨다(루카 23,34). 예수께서는 박해를 참아 견디는 최고의 표양을 보여주셨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보여주신 태도를 제자들에게 권하신다. 스승처럼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마태 5,44; 루카 6,27-28; 로마 12,14), 이겨내야 한다. 박해가 일어나면 피할 줄도 알아야 한다(마태 10,23; 사도 13,50-51). 그러나 감옥에 갇히고 고문당하며 죽임을 당할 것을 항상 각오하여야 한다(마태 10,16-39; 요한 16,1-4). 이것은 하느님의 뜻 때문에, 하느님의 일 때문에, 하느님의 말씀을 선택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끊고 죽일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운명 앞에서 두려워할 것이 없다. 이미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요한 16,33).
제자들이 법정으로 끌려갈 때,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다. 그러므로 재판을 받을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참조: 마태 10,19-20). 중요한 것은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지금도 항상 우리가 깨어 있는 자세로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며, 하느님의 일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할 때는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지혜를 당신의 성령을 통하여 알려주실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 사는 삶이 중요하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마태 10, 17)
-한상우신부-
조심해야 할
사람들이 아닌
행복한
사람들이기를
기도드린다.
사람은
사람에게서
배우고
사람은
사람에게서
받아들여짐을
체험한다.
우리자신은
조심해야 할
사람인지
우리자신은
힘이 되어주는
사람인지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된다.
사랑이
빠져버린 삶은
아프고 위험하다.
말씀은 들어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도
자기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한
아픈 사람들이다.
새로움에는
언제나 진통이
뒤따른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사람다운 사람은
삶의 새로운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혜롭게
펼쳐나간다.
떠나보내는
아픔 없이는
새로워지는
성장의 기쁨도
없다.
지혜는
아프지만
하느님을
향한다.
하느님을
향하기에
서로를 살리는
사랑이 있다.
사랑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받은 상처는
사람이
되어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아물게 된다.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
제자들의 삶이며
선교이다.
사람을
맞이하는 것은
사람이다.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참된
지혜이며
다시 돌아갈
사람의 길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길 떠나는 이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격려를 담고 있습니다.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마태 10,16)
사도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의 심정이 잘 드러난 말씀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예수님 곁에 머물며 보호와 가르침을 받던 시간을 잠시 멈추고 직접 세상과 부딪히며 복음을 선포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선량하고 호의적인 이들도 물론 많지만 이 세상에 빛이 들어오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어둠의 세력 또한 반드시 존재하지요.
"그러므로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마태 10,16)
사도들에게는 슬기와 순박함이 동시에 요구됩니다. 권모술수나 잔꾀가 아닌 "지혜", 그리고 무지나 아둔함이 아닌 "순박함"입니다. 예리하면서 부드럽고 단호하면서 포용적인 다가섬과 소통은 상대의 귀를 열고 마음을 두드리며 등짐의 무게를 덜어 주지요. 성령께 의지할 때 발휘되는 사도적 자질입니다.
"걱정하지 마라."(마태 10,19)
"피하여라."(마태 10,23)
복음을 거부하는 것도 모자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까지 박해하고 해치는 이들과 맞닥뜨리더라도 주님께서 보내신 이는 두려워하지 않고 맞서지도 않습니다. 그때 필요한 언변은 아버지의 영께서 알려 주실 것이니 있는 힘껏 믿어야 하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폭력에 폭력으로 대응하는 것은 제자의 길이 아닙니다.
제1독서에서는 야곱이 이집트에 들어가 요셉을 만나는 대목입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그리고 내가 그곳에서 너를 다시 데리고 올라오겠다."(창세 46,3-4)
요셉의 소식을 듣고 채비를 차리는 야곱 안에 떠오르는 여러 감정들을 하느님께서 너무 잘 헤아려 주시지요. 죽었다고 생각한 최애 아들의 소식에 기쁘기 그지없으면서도, 하느님 축복으로 키워온 한 가족 공동체가 어떤 보호 장치도 없이 이방 민족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일도 만만치않은 모험이기 때문입니다. 당장이야 요셉의 치적으로 이집트인들이 호의적일 수 있지만, 혈연이나 종교, 지향에서 공통분모가 없는 이들 사이에서는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게 잇권 관계이니까요.
이집트에 살던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서 데리고 올라오실 때까지 사백삼십 년이란 시간이 걸립니다.(탈출 12,40 참조) 그 사이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과 함께 이집트로 내려오신 하느님의 동행과 현존을 어떻게 체험하고 누렸는지 알 수 없지만, 극한의 위기가 닥쳤을 때 그분은 반드시 오셔서 이스라엘을 데리고 올라가실 것입니다.
"의인들이 주님께 몸을 숨겼으니, 그분은 그들을 도와 주시고, 악인에게서 빼내 구원하시리라."(화답송)
이스라엘 집안은 주님 말씀을 믿고 대 이주를 감행합니다. 우리가 알기에도 흠 많고 탈 많은 야곱과 그의 아들들을 의인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결단과 떠남이 오직 믿음이란 나침반에 의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의탁하는 이들을 주님은 결코 외면하실 수 없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원체험이 될 이집트 탈출 사건이 이를 증거하고, 우리 삶의 구비구비마다 새겨진 각자의 파스카 여정이 또한 증명하고 있습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우리 저마다에게 주어진 삶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지요. 선을 바라고 진리를 추구하며 영의 세계를 향해 나아갈수록 어둠은 더 기승을 부리고 탐욕과 절망의 카드를 번갈아 내밀며 끝 모를 나락으로 끌어내리려 합니다. 악에 익숙한 세상은 그리스도를 품고 사는 이들을 이물질처럼 불편해하기에 좁은 길을 가는 이에게는 인내가 더더욱 필요합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위로입니다. 이 말씀들로 용기를 얻고 새로운 발걸음을 준비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슬기롭고 순박한
-김찬선신부-
오늘 주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위해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네 가지 지침을 주시는데 명령어 형태입니다.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하게 되어라.“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어떤 고을에서 너희를 박해하거든 다른 고을로 피하여라."
요약을 하자면 이제 파견되어 복음을 잘 선포하기 위해서는
뱀처럼 슬기롭고 비둘기처럼 순박해야 하는데
사람을 조심하는 것이나 걱정하지 않는 것이나 박해 시 피하는 것이
바로 슬기롭고 순박하게 복음을 선포하는 거라는 얘기인데
그렇다면 이제 왜 이런 것들이 슬기롭고 순박한 복음 선포인지 보겠습니다.
슬기로운 복음 선포는 우선 사람들을 조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람을 조심하라고 할 때는
그 사람이 사기꾼인지 강도인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고,
사기나 강도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선포함에 있어서 사람을 조심한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한다는 것은
박해받게 되는 것을 기본으로 상정하십니다.
사실 복음은 모두에게 듣기 좋은 복음이 아니고,
특히 세상의 지배자들에게 듣기 좋은 복음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이지 이 세상의 복음이 아니기에 근본적으로
이 세상 지배자들에게는 도전일 수밖에 없고 그래서 박해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이런 박해 때 박해자는 말할 것도 없고 밀고자도 조심해야 합니다.
며칠 전 김대건 신부님 축일을 지냈는데 김대건 신부님 가족을 밀고하여
아버지가 순교하고 어머니를 실성케 한 것이 바로 이집 사위였지요.
다음으로 이런 박해 때는 피할 수 있으면 피하는 것이 슬기로운 것입니다.
순교의 열망으로 밀고할 테면 해보라며 조심하지 않거나 심지어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천주학쟁이라고 신앙을 증거 할 수도 있지만
주님께서는 무모하게 그러지말고 박해를 피하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조심도 하고 박해를 피했는데도 붙잡히게 되면
그때는 오히려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고 담담할 것이며
순박하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당당하고 담담하라는 말은 이해가 되는데
순박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순박한 어린이처럼 걱정하지 않는 것이고
이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머리를 굴리지 않는 것인데,
그러는 이유가 성령께서 다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순박하게 걱정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같은 뜻에서 오늘 창세기 하느님은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그곳에서 너를 큰 민족으로 만들어 주겠다.
나도 너와 함께 이집트로 내려가겠다."
우리가 하느님을 믿어서 박해를 받게 되었다면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어야 할 것이고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얼마나 믿는지는 이때
걱정하거나 두려워 하지 않는 만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꼭 박해 때 뿐이여야겠습니까?
일상의 어려운 순간에도 마찬가지여야겠지요?
아무튼 조심은 하되 걱정은 하지 않고,
슬기롭되 순박한 우리가 되어야 함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