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2021년 7월 2일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동물을 잡아 나에게 바치는 제사가 아니라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이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
(마태오 9,9~13)
"Those who are well do not need a physician,
but the sick do.
Go and learn the meaning of the words,
I desire mercy, not sacrific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초종훈신부-
하루를 살아가며 수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들을 전부 알지는 못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자신이 가진 간단한 정보로 타인을 받아들이고 판단합니다. 그가 어디 출신이며 어떤 일을 하는지, 나이는 어떻게 되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어느 학교에 전공은 무엇인지 등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또한 그 사람이 어디에서 살고 생활 환경이 어떠한지, 어떤 사람들과 어울리는지에 따라 미리 그를 판단합니다. 누군가를 깊이 알아 가며 인격적인 만남을 바라기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으로 만남을 이어갑니다.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도 그러한 시선으로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고 만납니다. 바리사이들은 세리인 마태오를, 민족을 배신하고 돈만을 쫓아 살아가는 파렴치한으로 판단합니다. 그와 함께하는 사람들 또한 죄인이며 배신자로 결론 내립니다. 그러한 선입관에 사로잡힌 바리사이들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하시는 예수님조차도 그들과 같은 부류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들의 선입관에는 자신은 깨끗하고 의인이라는 자만심이 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도, 마태오도, 그리고 다른 세리와 죄인도 진정으로 만나지 못합니다. 그 선입관과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도, 그리고 그들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서슴없이 마태오에게 다가가시어 그와 함께하십니다. 색안경 너머로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들 각자의 가난함에 함께 자리하십니다. 슬픔과 두려움, 고민과 갈등에 휩싸인, 그리고 병들어 있는 그들의 아픔에 다가가십니다. 그것이 그분의 자비이며, 아버지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고 있습니까? 그가 가지고 있는 무엇인가로 그를 쉽게 판단하고 그가 나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를 따져 가며 그와 함께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만남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두 명의 기업 대표가 있는데 이들의 경영 방식은 정반대인 것으로 늘 대조되었습니다. 불경기 때 대처하는 방식만 봐도 알 수 있었지요. 한 대표는 불경기에는 인원을 줄이거나 현행 유지를 합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불경기니까.”
다른 대표는 불경기가 되면 오히려 인원을 많이 뽑습니다. 그 이유 역시 간단합니다.
“불경기니까.”
불경기에는 더 좋은 직원을 합리적인 연봉으로 채용할 수 있기에 이때 더 회사를 확장하는 기회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기업이 더 잘 나가는 회사일까요?
두 기업 모두 잘 나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각 대표가 자기만의 철학을 가지고 임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해괴한 선택이라 해도 남들도 이해할만한 합리적인 철학을 가지고 있으면 긍정의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많은 이가 남 따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는 절대 잘 될 수가 없습니다. 남의 철학을 따라 하는 것이니 여기에 대한 믿음도 부족하고, 따라서 특별한 변수에 대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근동 특히 팔레스티나에서 식사는 사람들 사이의 일치를 가장 강하게 드러내는 때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 준수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는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은 율법을 알지도 지키지도 못하는 ‘세리와 죄인’을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피했습니다. 더구나 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죄인 곧 부정한 자의 초청을 받아들이시어, 다른 많은 죄인과 함께 식사하십니다. 이로써 그분께서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중요한 규정을 의도적으로 깨드리십니다.
그들이 봐야 할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은 오늘 복음의 마지막 구절에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랑이 아닌 규정의 준수만을 외쳤던 바리사이를 비롯한 당시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꾸짖음이었습니다. 그들이 만약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면, 주님을 이해할 수 있고 또 함께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구원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철저히 잘못된 철학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주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원한 생명이라는 가장 큰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는 남들보다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듭니다. 10시만 되면 눈이 저절로 감기고 그래서 10시를 전후해서 침실로 향합니다. 잠을 꾹 참으면서 해야 할 일을 해도 눈꺼풀이 감기면서 능률이 전혀 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선후배 신부를 만나서 술 한 잔을 마신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시계를 보고서 깜짝 놀랐습니다. 10시가 훨씬 넘은 것입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전혀 졸리지 않았습니다. 눈이 더욱 초롱초롱해지면서 더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만약 그 신부들이 반갑지 않고, 그 자리가 즐겁지 않았다면 평상시와 마찬가지로 졸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리를 즐기니 이제까지와 다른 모습을 갖게 된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도 즐겁고 유쾌한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치 의무감에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습니다. 즐거운 신앙생활이 아닌 어쩔 수 없이 하는 신앙생활이 되고 맙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늘 지루하고 힘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즐거운 신앙생활이 되시길….

마태오가 필요로 하는 예수, 유다가 필요로 하는 예수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예수님으로부터 제자로 불림을 받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와 같은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것을 보고 바리사이들은 기분이 상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예수님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들과 함께하십니다. 그렇다고 유다 지도자들에게 예수님이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자신들을 해방해 줄 왕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중에 마태오도 예수님이 필요했고 가리옷 유다도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이 차이는 무엇일까요? 필요하다는 말은 어떤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같은 예수님이 필요했지만, 마태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와 유다에게 예수님이 필요한 이유는 서로 다릅니다. 부모가 아이를 낳는다면 분명 아이가 필요해서일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오처럼 아이가 필요한 부모와 유다처럼 아이가 필요한 부모가 다릅니다.
영화 ‘4등’(2015)의 내용입니다. 준호는 만년 4등을 하는 수영선수입니다. 준호 엄마는 어떻게든 준호를 1등으로 만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왕년에 아시아 신기록까지 경신한 한 코치를 소개받습니다. 그런데 코치는 돈은 받으며 아이는 가르치지 않습니다.
아이가 놀다가 지쳐서 코치에게 수영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아이의 성화에 못 이겨 아이 수영하는 모습을 본 코치는 가르칠 재능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코치의 가르치는 방식은 ‘구타’였습니다. 코치도 사실 선수 시절 맞는 게 싫어서 선수를 그만둔 것이었는데 지금은 아이의 성적을 올릴 수 있는 자신이 아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뿐이었던 것입니다.
엄마는 준호가 몸에 멍이 든 상처가 나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알지만 엄마는 밤에 살짝 아이의 몸을 들춰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자인 아빠가 이것을 알아버렸습니다. 이때 아이는 대회에서 2등을 합니다. 그렇더라도 아빠는 아이를 계속 구타하면 기사를 내버리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아이의 아빠는 선수시절 코치가 맞을 때 기사를 내어달라고 부탁하자 맞을 짓을 했으니까 맞는 거 아니냐며 그 청을 거절했던 바로 그 기자였던 것입니다. 코치는 아빠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이를 때립니다. 아이는 더는 못 버티겠다며 수영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엄마는 크게 화를 내며 준호를 본척만척합니다.
준호의 어머니는 이제 준호 동생에게 기대를 겁니다. 동생이 엄마의 희망이 된 것입니다. 준호는 자신이 맞은 대로 자기 동생을 때립니다. 그리고 자신도 다시 수영하겠다고 코치를 찾아갑니다. 코치는 엄마 생각하지 말고 혼자 하면 금메달을 딸 수 있다는 말을 남기고 떠납니다. 아이는 죽을 힘을 다해 1등을 합니다. 엄마는 기뻐합니다. 그런데 준호는 2등 했을 때는 기뻤지만 이상하게 1등을 했는데도 기쁘지 않습니다. 영화는 이렇게 끝이 납니다.
준호와 엄마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엄마는 준호를 통해 수영 잘하는 아이의 엄마가 되고 싶어 준호가 필요합니다. 이 필요함은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 것과 같습니다. 필요로 한 대상이 그 필요한 대상이 아닌 그 대상을 통해 얻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다 지도자들이나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을 통해 민족의 해방이나 돈과 권력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준호에게 엄마가 필요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자기를 경쟁이라는 고통 속에서 구해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냥 엄마만 있으면 되는 그런 필요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마태오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 이유입니다. 마태오는 돈과 권력, 쾌락에 물들어있는 자신으로부터 구해줄 예수님이 필요했습니다. 유다가 돈을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다면, 마태오는 그 욕심을 버리기 위해 예수님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과연 누구와 함께 식사를 하시겠습니까? 우리는 세상에서 돈과 명예에 대한 욕심을 채우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아니면 그 욕심들을 없애기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지 생각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다 그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지는 않으십니다.
어떤 유튜브에 한 영재 아이가 아버지에게 파리채를 던지는 충격적인 장면도 있습니다. 똑똑했던 명이라는 아이가 그렇게 부모와 동생에게까지 문을 닫아버리고 공격적인 행동을 보인 이유는 아이에게 보살핌을 주어야 했을 때 부모가 그렇게 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집안이 어려워져 부모는 장남인 명이에게 공부를 강요하였습니다. 성적이 좋지 못하면 몸에 상처가 날 때까지 때렸습니다. 그것에 대한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출처: ‘아버지에게 파리채 던지는 영재, 그 이유는?’, 유튜브 채널, ‘SBS STORY’]
아이를 이용하려고 하며 필요로 했던 것이 사랑이었다는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그 사람 때문에 다른 욕심들이 사라질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입니다.
유튜브에 이런 실험 카메라 동영상도 있습니다. 안과에서 아들과 어머니, 의사 선생님이 짜고 아들이 실명 단계에 있어서 각막을 이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 가족 중 누군가가 각막을 이식해 주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아들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한쪽, 어머니 한쪽 이식해 주면 되는 거 아니냐고 말합니다. 아들은 감동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눈이 그렇게 안 좋게 태어나게 만든 것에 대해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집니다.
[출처: ‘아들의 갑작스러운 실명 소식, 그리고 아버지의 한 마디’, 유튜브 채널, ‘엔스크린’]
살 만큼 살았고 더는 욕심내며 살지 않게 각막이라도 내어줄 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런 욕심을 끊을 아들을 바라는 마음이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필요로 한다고 말할 때 마태오의 참사랑일 수도 있고 유다의 거짓 사랑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의 자기실현을 위해 예수님을 필요로 합니다. 어떤 사람은 모기가 되려고, 또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가 되려고 말입니다. 세상 욕구를 끊기 위한 마음이 아닌 이상 그리스도를 바라는 마음은 다 가짜입니다.

-조재형신부-
‘시청(視聽)과 견문(見聞)’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청은 단순히 보고 듣는 것입니다. 견문은 보고 깨달은 지식을 이야기합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흥준 교수는 ‘문학과 예술’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였습니다. 베들레헴 성당의 입구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여행객으로 왔다면 순례자가 되어서 가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순례자로 왔다면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가시기 바랍니다.’ 인터넷에서 기사를 검색할 때도 제목만 보기보다는 기사의 행간과 문맥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더 나아가 기사를 작성한 기자가 소속된 언론사도 보아야 합니다. 언론사의 보도 성향에 따라서 기사의 방향과 내용도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보고 싶은 기사만 찾아서 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언론사가 전해주는 기사만 보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기사를 검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행이나 성지순례를 갈 때입니다. 바쁜 일정 때문에 사진만 찍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처음 가는 곳이기도 하고, 주로 사진만 찍고 오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보았는지, 어떤 느낌이 있었는지 잘 모르게 됩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은 정신없는 시장입니다. 관광객들도 많고, 길이 좁고, 사람이 많습니다. 여행객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순례자로 가게 되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는 길이 다르게 보입니다. 그곳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신 곳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입니다. 기력이 없어서 넘어지신 곳도 있습니다. 성모님과 예수님이 만나신 곳도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가신 길도 있습니다. 베로니카가 예수님의 얼굴에 흐르는 땀과 피를 닦아 드린 곳도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그 길에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의 배우자를 찾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한 가지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미모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재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가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재능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는 것은 고향 땅에서 배우자를 찾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고향 땅에서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하느님께서 고향 땅에서 아브라함을 불러주셨듯이, 고향 땅에서 아들 이사악의 배우자를 정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지금은 본인의 의지에 의해서 혼인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예전에는 양가 부모의 의견을 따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해시대를 살던 신앙인들에게 자녀의 배우자의 기준은 같은 신앙이었습니다. 능력이 있어도, 재물이 많아도, 가문이 좋아도 신앙이 없으면 자녀의 배우자로 삼지 않았습니다. 저의 어머니도 자녀들의 배우자는 신앙인이어야 했습니다. 신앙이 없으면 먼저 세례를 받고 신앙인이 된 후에 혼인하도록 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원칙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이유입니다. 가난한 분, 외로운 분, 아픈 분, 절망 중에 있는 분들과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르신들, 아이들과 가까이 하고, 받을 것이 많은 분들과의 시간도 필요하겠지만, 줄 것이 없는 분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그분들을 통해서 주님께서 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영근신부-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대체 우리의 어떤 모습을 보고 부르셨을까? 우리의 잘난 모습, 우리의 능력, 혹은 우리의 선함, 봉사정신, 아니면 당신께 대한 충성이나 믿음을 보고 부르셨을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이는 우리가 죄인인 까닭에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죄를 짓지 않은 이들인 것이 아니라, 죄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냥 죄인인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도 용서해야 하는 일을 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신명기> 저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너희에게 마음을 주시고 너희를 선택하신 것은, 너희가 어느 민족보다 수가 많아서가 아니라,
너희를 사랑하시어 구해내셨다.”(신명 7,7-8)
그러니,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애와 호의를 입어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토록 사랑과 호의를 입은 이들이기에, 그렇게 사랑과 호의를 베푸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토록 자비와 용서를 입었기에, 그렇게 자비와 용서하는 일을 소명으로 받은 이들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나를 따라라” 하심은 우리도 죄인을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신께 받은 그 용서와 사랑, 그 자애와 호의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마태 9,13)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 실행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나약하고 부족함이 많은 죄인들인 내 형제들을 단죄하기보다 하느님의 자비의 마음, 호의의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팡세>를 쓴 파스칼은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이며,
하나는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죄인이다.”
오늘, 나는 죄인인가? 의인인가? 만약 죄인이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죄인들의 친구인 그분을 친구로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당신은 죄인인 까닭에 저를 부르셨습니다.
찾기도 전에 먼저 부르시고, 청하기도 전에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용서받았으니 용서하게 하소서. 먼저 찾아가고 먼저 용서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이다.”(마태 9,12)
주님!
당신이 바라시는 바를 알게 하소서!
제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바라는 것을 바치게 하소서.
희생제물이 아니라, 제 행실을 바치게 하소서.
제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내어놓게 하소서.
제 자신이 자비의 산제물이 되게 하소서. 아멘.

주님 품 안에 모두가 잘난 사람
-반영억신부-
우리는 기왕이면 깔끔하고 멋있어 보이는 사람과 만나고 싶어합니다. 얼굴도 잘 생기고 돈도 있어 보이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입니다. 호감이 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은총이요 복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매력이 흘러넘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갈수록 밥맛인 사람도 있습니다. 겉보기와는 너무도 달라서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보지 않으려 해도 자꾸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다가 세금 징수원으로 천대를 받는 사회계급에 속해 있는 마태오라는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길을 가시다가 부르셨다는 것은 하루하루 삶이 펼쳐지는 현장에서 부르셨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가 생활하고 있는 삶의 현장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길이란 목적지가 아니라 목적지에 이르는 통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삶의 현장인 이세상은 영원히 머물 곳이 아니라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이세상은 간이역입니다. 종착역은 하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악명 높은 사기꾼이나 탐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간주되어 공개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던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 집의 식탁에 앉아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셨습니다. 세리는 부정한 수단과 방법으로 돈을 버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주위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오히려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자기가 번 돈을 가치 있게 쓸 줄을 몰랐던 인색한 사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천대 받고 따돌림 당하던 계층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그렇게도 안목이 없었다는 말씀입니까?
그 반대입니다. 우리가 안목이 없다고 생각하는 만큼 예수님의 품이 넓다는 것입니다. 그 품에 들어가지 못할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스스로 거부하는 사람은 어쩔 수 없습니다. 아무리 문을 크게 열어도 스스로 들어가지 않는 자는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바리사이들이 꼭 그러했습니다. 마태오가 세관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바로 영적성장이 멈춘 상태를 말하기도 합니다. 세상에 안주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따돌림을 받는데도 불구하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두려웠고, 그곳을 떠나면 죽는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돈을 생각하면 떠날 수 없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은총의 날, 진정한 행복의 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여전히 옛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우리는 안주를 탈피하여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우리는 무엇에 안주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큰 품을 우리의 마음으로 간직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인정할 때,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될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그곳을 떠나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9-13)”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부르신 이야기와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하신 이야기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긴 하지만, 합해서 생각할 이야기가 아니라
따로 떼어서 생각해야 할 이야기입니다.
1)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그가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가 세리였기 때문에, 또는 죄인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것은 아닙니다.
그가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사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시고 뽑으신 것입니다.
<마태오를 부르시고 뽑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그의 직업을 보지 않으시고 그의 자격만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과거를 보지 않으시고 그의 현재만 보셨습니다.
그런데도 자꾸만 마태오의 직업이 세리였다는 것을 부각시키면서
직업이나 과거의 이력에 어떤 중요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고 옳지 않은 일입니다.>
2) “나를 따라라.” 라는 말씀은, “내 제자가 되어라.” 라는 뜻입니다.
마태오가 곧바로 일어나 예수님을 따른 것은,
이미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마태오가 예수님을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부르심을 받기 전부터 그는 예수님을 알고 있었고, 믿고 있었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마태오의 응답은 어부 출신 제자들의 응답보다
더 큰 용기와 더 많은 ‘버림’이 필요했던 일입니다.
어부라는 직업은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는 직업이지만,
세리라는 직업은 한 번 버리면 되돌아가기가 어려운 직업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부들보다는 세리였던 사람이 더 부유했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려야 할 것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3) 뒤에 이어지는 식사는, 마태오가 준비한 감사의 잔치였거나,
아니면 마태오의 동료들이 준비한 송별식 잔치였을 것입니다.
그 당시의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은 ‘같은 부류’가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죄인이 된다는 사고방식.)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으면 같은 죄인이 된다고만
생각하고, 왜 그 반대로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죄인인 사람이 의인과 함께 음식을 먹어서 의인이 될 수는 없는가?
(왜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좋은 쪽으로는 생각하지 못하는가?)
어떻든 바리사이들의 사고방식은, 자신들은 의인이라는 교만과 위선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사람들에 대한 천대와 멸시가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고방식 자체가 ‘죄’입니다.
4)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라는
말씀은, 사람들을 ‘튼튼한 이들’과 ‘병든 이들’로 분류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바리사이들은 튼튼한 이들이고,
세리들은 병든 이들이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나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만나야 한다.”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전부 다, 구세주의 구원이 필요한 ‘병든 이들’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는 “너희 바리사이들도 병든 이들(죄인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만 만나신 것이 아니라 바리사이들도 만나셨습니다.
남녀, 빈부,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똑같이 만나셨습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감히 “나는 의인이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이미 구원받기로 확정된 사람이다. 그러니 나를 구원해 줄 구세주는
필요 없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5)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 없이 하느님을 섬기는 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다.” 라는 뜻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자녀들이 서로 편을 가르고, 서로 차별하고 무시하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무엇인가를 하느님께 잘 바치기만 하는 것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일입니다.)
이웃 사랑은 이웃과 내가 똑같은 사람이라는 인식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다.” 같은 우월감과 교만을 버리지 않는다면,
자선 실천을 잘하고 불우이웃 돕기 성금을 잘 낸다고 해도,
그것은 이웃 사랑이 아니라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에 대해서 말할 때, ‘그들’이라고 표현하면 안 됩니다.
‘그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내가) 죄인이고, ‘길 잃은 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나를’ 구원하려고 오셨습니다.
죄와 관련해서 어떤 특정 직업이나 특정 질병을 말할 때에도,
‘그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한 마음, 한 몸인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데,
‘그들’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특정 직업이나 특정 질병을 가졌던 이들을
공동체 밖으로 밀어내는 일이 되고, 차별하고 무시하는 일이 됩니다.
“‘그들’을 ‘그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가?” 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다른 사람들과 자신 사이에 금을 긋고, 벽을 쌓는 태도부터 버려야 합니다.>

복음: 마태 9,9-13: 나는 선한 사람을 부르러 오지 않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세관에서 일하고 있던 마태오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다. 주님께서는 그가 세리였지만 기꺼이 부르셔서 한순간에 사도가 되게 하셨다. 그는 세상일에 파묻혀 있었지만, 거짓 없는 신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마음속을 아시는 주님의 부르심에 합당하다는 판단을 받는다. 주님께서 그에게 “나를 따라라.”하시자, 한순간도 머뭇거리거나 미루지 않고 곧바로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9절) 마태오는 주님의 방문을 기해 자기 동료들을 불러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게 된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그래서 세리들과 또 죄인들이라고 표현된 그 사람들과 식사를 하시게 되었다. 죄인들과 함께 어울리심으로써 예수님은 나쁜 평판도 얻게 된다.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루카 7,34)하고 사람들은 예수님을 헐뜯게 된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사람들로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아주 많이 경멸하였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들로 여겼기 때문에 그들과 거래는 물론 말도 하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이 예수께서 세리인 마태오를 부르시고 또 그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으니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키기 때문에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자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13절). 이 말씀은 당신이 지금 당신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와 계시며, 그러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으며,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열심하고 착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은 이미 자신이 모든 것을 잘하고 있어서 자신으로 이미 가득 찬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른 것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스스로 튼튼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기 때문에,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배워라”(13절). 여기서 제사는 우리가 하느님께 드리는 예식인데 그 제사에 마음이 담기지 않은 제사, 형식적으로만 드리는 제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는 것이다. 형식과 의식은 중요한 것이지만, 여기에 우리 마음이 함께 봉헌되는 제사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과 자비를 통하여 우리가 실천하는 삶을 함께 봉헌할 때 참된 제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자선이 바로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에서 하시듯이 죄인들에게 가까이하시는 모습이다. 선입견과 편견에서 벗어나 진정한 사랑을 베풀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분과 차별이 아니라 포용과 통합의 시대가 도래하였음을 알리십니다.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 백성과 이방인이 언급됩니다.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창세 24,4)
사라가 죽은 뒤 아브라함은 아들 이사악에게 아내를 얻어주기 위해 자기가 떠나온 고향으로 종을 보냅니다. 당시 그들이 몸붙여 사는 가나안 땅의 여자가 아니라 동족의 딸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했기 때문이지요.
아브라함이 이루게 될 민족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하느님 백성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단지 그 민족의 번영이나 안위만을 위한 특혜가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시작입니다. 하느님께서 다른 민족을 적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근간과 기틀이 형성되는 단계에서 하느님 백성이 자신의 정체성을 이루어가는 과정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결국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을 통해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때에는 더 이상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구분이 필요없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 주신 사랑의 결속만 남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의인과 죄인이 언급됩니다. 민족이라는 하나의 틀이 완성된 후에는 민족 내부에서 또 다른 구분의 단초가 등장한 것이지요. 바로 율법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식민지 이스라엘의 세리는 동포의 혈세를 착취해 정복국 로마의 배를 불려 주고 자신도 그 권력에 기생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방인과의 잦은 접촉과 동포에 대한 착취 때문에 늘 죄인이라 손가락질을 받는 이들이지요.
세관은 그런 세리들의 일터이고 그곳에 앉아 있던 마태오 역시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그날 예수님은 그곳을 지나가시면서 짧은 찰나에 마태오 내면의 깃든 고뇌와 갈망, 가능성을 보십니다. 그리고 지체없이 그를 부르시지요. 그가 지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평판을 받든 상관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 자리에서 그를 부르신 겁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마태오는 그대로 일어나 그분을 따라나섭니다. 이렇게 그는 육을 만족시키는 세리라는 직업을 떠나 영의 길로 주저없이 들어선 것이지요.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태 9,11)
예수님의 제자단에 참여하게 된 마태오는 예수님을 모시고 동료들까지 불러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직업이 직업인만큼 마태오의 주변 사람들은 그와 비슷한 처지의 세리이고 죄인이었나 봅니다. 그러니 바리사이들 눈에 그 잔치는 세리와 죄인들의 불결하고 부정한 난장일 뿐이겠지요. 그들은 당장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항변합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예수님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으십니다. 구분이 없으니 차별하지도 않으시지요. 예수님 눈에는 의인도 죄인도 한 아버지의 한 형제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가로막는 구분의 벽을 허물고 모두를 끌어안으십니다.
예수님께 의인은 이미 하느님 사람이니 살아온 그대로 주님 앞에 머무는 기특한 벗이고, 죄인은 새로운 부르심에 응답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기대되는 형제입니다.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선을 긋고 차별하는 것은 주님의 방식이 아니지요.
하느님 백성의 기틀이 형성되던 때에는 순혈 민족과 이방인의 구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온 세상의 주인이신 분이 구원의 지평을 이스라엘 담장을 넘어 온 세상으로 활짝 열어주신 뒤에는 오히려 구분이나 차별이 극복하고 넘어서야 할 구태이며 악이 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와 이웃 안에서 의인과 죄인을 가르던 율법의 문자적 잣대 역시 그 모두를 위해 희생하신 예수님을 통해 사랑으로 통합되었습니다. 주님 앞에서 완전한 의인일 수 없고, 또 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손가락질과 비방, 소외와 방치, 적대와 외면은
스스로를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으로 만들어 버릴 뿐입니다.
율법은 이제 더이상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고 가르는 잣대가 아니라 모두를 포용하고 통합하는 울타리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선포하고 실행하신 예수님 가르침의 골자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셨으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탁월한 지식이나 능력이 아니라 믿음을 통해 의인이 되게 하시니 이 또한 감사합니다. 그러니 우리 또한 사람을 함부러 차별하거나 무시하지 말고, 죄인이고 또 의인인 우리를 통해 세상이 조금 더 포용적이고 관대하며 사랑 넘치는 그런 곳이 되기를 빌어 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