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30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6. 30. 06:54

2021 6 30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하느님의 아들이여,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마귀들을 괴롭히려고 여기 오셨습니까?

(마태 8,28-34 )


“What have you to do with us, Son of God?
Have you come here to torment us

before the appointed ti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하가르와 그 아들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졸라 대자 하느님께서는 사라의 부탁을 들어주라 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느님 말씀대로 행동합니다. 그 결과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집에서 쫓겨납니다. 그들을 생각하면 하느님과 사라가 너무 냉정해 보입니다. 그 냉정함은 호칭에서 드러납니다. 사라는 “저 여종과 그 아들”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녀에게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의 아들도 아니고 그저 여종의 아들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도 이스마엘을 ‘네(아브라함) 아들’이 아니라 “그 아이”라고 부르십니다. 이에 이런 질문을 던져 봅니다. 하느님과 사라에게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아들이기는 한 것일까요?

창세기의 저자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의 이름이 바뀌기 전에 태어났음에 주목합니다. 하느님과 계약을 맺기 이전, 아브라함의 이름은 ‘아브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이스마엘은 ‘아브람’의 아들입니다. 그리고 이사악은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하느님과 계약을 맺고 그가 새로운 이름을 얻은 뒤에 얻게 된 아들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상속을 약속받은 인물은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사악입니다(창세 17,19 참조). 오늘 독서는 가족 간의 갈등을 전해 주는 냉정한 가족사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 약속이 바탕이 된 상속에 위협이 되는 상황을 하느님께서 해결하시는 장면을 보여 줍니다. 바로 구원의 역사입니다.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께 항변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시냐고, 계시기는 한 것이냐며,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의 처지이고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계획은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외아드님의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지금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는 그분의 계획이 잘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감추어진 하느님의 의도가 있음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느 사업가가 매일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이 지하철 가는 길에 있는 신문 가판대에서 신문을 꼭 구입했습니다. 하루는 친한 친구와 함께 지하철을 타러 이야기를 하며 걷고 있었습니다. 이 날도 이 사업가는 신문 가판대에 가서 신문을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그 직원이 너무 불친절하고 예의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늘 하루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오늘이 당신 일생에 제일 재수 없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라고 하대하며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신문을 받아들고 지하철로 향하는 친구의 모습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니 그따위 대접을 받고도 계속 저 집을 가는 거야? 나 같으면 저 거지 같은 집을 다시는 찾아가지 않을 거야.”

그러자 이 사업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신문 가판대는 내가 가는 길목에 있어. 만약 다른 곳에서 신문을 산다면, 그 사람의 행동 때문에 나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잖아. 그 사람이 문제인데 왜 내가 손해를 봐야 하지?”

나의 손해, 불편을 감수하면서도 복수하려는 마음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쫓는 사람이 아닐까요?

마귀를 쫓아내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런데 이 마귀가 돼지 떼 속으로 들여보내게 해 달라고 청하고, 마귀가 들어간 돼지는 모두 물속에 빠져 죽습니다. 이 상황은 기뻐할 일일까요? 아니면 슬퍼할 일일까요? 분명히 기뻐할 일입니다. 마귀가 들어서 사람으로 온전히 살지 못했던 사람 둘이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다시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음을 전혀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온 고을 주민들이 나서서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합니다.

바로 돼지를 치는 사람의 물질적인 손해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돼지 안에 들어가서 모두 물속에 빠져 죽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들도 혹시 예수님으로 인해 물질적 손해를 입지 않을까를 염려해서 떠나가 달라는 청을 하는 것입니다.

마귀도 알아본 예수님의 권능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접 보고서도 그 권능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물질에만 집착하면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분에게 떠나달라고 청하다니, 분명히 지혜롭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렇게 눈앞의 손해만을 바라보면서 지혜롭지 못한 모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변화 없이 진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자기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사람은 그 어떤 것도 바꾸지 못한다(조지 버나드 쇼).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엄마, 나 폰이 안 돼. ㅠ 여기로 문자줘. 010-****-**** 이 번호로 카톡 줘.”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저는 어떻게 했을까요? 예전 같으면 상대방에게 “문자 잘못 보내셨습니다.”라고 했겠지만, 이런 문자로 보이스피싱 사기가 시작된다는 말을 들었기에 곧바로 ‘수신차단’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도 비슷한 문자가 왔었는데, 그때에는 제 이름까지 똑바로 적혀 있었습니다.

전화가 아닌 문자나 SNS 메시지로 오는 것은 무조건 의심하라고 하더군요. 문자나 SNS 메시로는 그 실체를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고 편하다는 점을 이용해서 범죄 행위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것을 피하는 우리의 일반적 모습을 악용하는 것이 아닐까요?

맞습니다. 쉽고 편안한 것만 쫓으려 할 때, 악도 같이 옵니다.

어렵고 힘들지만 참 기쁨을 체험할 수 있는 주님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돈은 언제부터 악이 되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마귀 들린 두 사람을 치유하시는 내용입니다. 가다라인들은 로마인들을 위해 돼지를 치는 실질적인 이방인들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모세의 법에 따라 돼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귀들의 청을 들어주십니다. 그들은 돼지 떼로 들어가고 싶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들의 청원을 들어주십니다. 그러자 그 돼지 떼가 언덕을 내리달려 바다에 빠져 죽습니다.

    가다라인들은 이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재산을 잃게 만든 예수님을 쫓아냅니다. 실상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 즉 재물을 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드는 돼지가 곧 마귀와 같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돼지는 본래 마귀 들린 것과 같은 악한 동물일까요? 아닙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에 돼지 자체로는 나쁜 동물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떠나가게 만들 때는 나쁜 동물이 됩니다.

    돈은 본래 나쁜 것일까요? 돈은 나쁘지 않습니다. 돈이 없으면 가족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고 이웃을 도울 수도 없습니다. 돈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몰아내게 만드는 원인이 될 때는 마귀 들린 것과 같이 됩니다.

    그렇다면 재물이나 명예, 음식 등은 언제부터 예수님을 몰아내게 할까요? 물론 통제가 되지 않을 때부터는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이니 악입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통제가 되지 않을까요?

     

    영화 ‘오만’(2019)의 내용입니다. 현우는 한 건설자재 영업회사의 막내입니다. 그는 선배들과 함께 매일 술자리에 참석해야 했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세희라는 여자를 만나게 되고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세희도 자신을 진심으로 대해주는 현우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좋은 관계가 유지되던 때 세희에게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현우는 거기서 그만두려 합니다.

  

    하지만 다시 술자리에서 세희가 다른 사람과 있는 것을 발견하고 질투를 느낍니다. 그래서 세희에게 사과하고 다시는 상처 주지 않겠다며 다시 시작해보자고 합니다. 그리고 세희의 빚을 다 갚아줍니다. 세희 딸도 아저씨가 싫지 않은 눈치입니다. 그들은 동거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회사 말단 직원의 월급으로는 이미 아이까지 있는 여자를 책임지기는 버거웠습니다. 현우는 밤에 대리운전을 하고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여 일합니다.

    그러나 너무 피곤했던 탓인지 서류를 잘못 올려 회사에서 권고 해직을 당합니다. 세희에게 이 사실을 알릴 수 없었던 현우는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가 보려 하지만 돈에 대한 압박이 심해 오고 세희는 다시 빚을 집니다.

    여기에서 서로 싸움이 오고 가고 현우는 세희의 뺨을 때립니다. 이때 자신이 그렇게도 미워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보게 됩니다.

    둘은 다시 남남이 되었고 현우는 다행히 다른 직장에 취직합니다. 우연히 길에서 세희와 그녀 딸의 뒷모습을 봅니다. 하지만 이젠 덤덤합니다. 자신과 맞지 않았던 사람임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왜 영화 제목이 ‘오만’일까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겠다는데 그것이 무슨 오만일까요? 그러나 그것은 오만입니다. 인간이 누군가를 사랑하면 그 사랑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것이 오만입니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하면 그 목표에 다다를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되는대로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목표가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결혼도 하고 그리스도 때문에 돈도 벌고 그리스도 때문에 열심히 살면 문제가 없습니다.

    무엇이든 이 세상 것은 내가 목표를 정할 때부터 악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목표액이 나를 지배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귀가 들어간 돼지는 통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목표를 정해놓으면 그것은 통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악마가 되어 나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피조물임을 잊는 것이 ‘오만’입니다. 영화 ‘리얼 스틸’처럼 만약 내가 만든 로봇이 목표를 갖게 된다고 생각해봅시다. 로봇은 주인의 명에 따를 때야만 생존이 보장됩니다. 그러나 로봇이 목표가 있다고 주인을 버리게 되면 주인은 더는 그 로봇에게 도움을 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그 로봇은 자신이 목표로 하는 것과 함께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피조물에게는 주인이 필요하고 주인이 허락해주면 갖고 그렇지 않으면 갖지 않는 삶이 가장 적당합니다. 이것이 악이 끼어들어 자신을 망치게 만들지 않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느님 뜻 외에 다른 목표를 갖지 맙시다. 그것이 결국은 하느님을 잃게 할 것입니다. 인간이 피조물임을 잊을 때 오만이 발생하고 그러면 목표가 세워지고 그 목표 안에 사탄이 개입하여 그것의 지배를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을 버리는 이유가 됩니다.

  

    베타니아의 마리아는 예수님을 위해 300데나리온이나 하는 향유 옥합을 깼습니다. 부자였지만 돈에 휘둘리지 않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 그 돈은 악이 아니라 선한 것이 됩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자녀도 키우고 헌금도 내고 할 것이 아니냐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돈을 벌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하라고 하셨습니다. 열심히 일하되 결과는 주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추구하는 것에 악의 기운이 스며들지 않습니다.

 -조재형신부-


책은 도끼다.’를 읽고 있습니다저자는 좋은 책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면서 2개의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판화가 이철수님의 글입니다그림과 함께 보면 더 좋겠지만 글만 나누려 합니다그림을 보고 싶으신 분은 인터넷 검색을 해 보시면 좋겠습니다하나는 잡초(雜草)’입니다. “잡초라 부르는 것조차 모두 아름답다세상에 시시한 인생은 없다어디에도.” 다른 하나는 좌탈(坐脫)’입니다. “염주 끈이 풀렸다나 다녀간다 해라먹던 차는 다 식었을 거다새로 끓이고바람 부는 날 하루 그 곁에 다녀가마몸조심들하고기다릴 것은 없다.” 짧은 글이지만 6월의 마지막 날을 돌아보기에는 의미 있는 글입니다지난 6개월 내가 누군가를 편 가르고평가하며 살았다면 남은 6개월은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보면 좋겠습니다지난 6개월 내가 추구하던 것이 세상의 명예권력성공이었다면 남은 6개월은 나눔희생겸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만유인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자연현상의 법칙을 따지면 그렇습니다그러나 사과가 떨어지는 것은 때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시간은 목적지를 향해서 직선으로 흘러갈 수 있지만시간은 계절이 가고 오듯이 순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직선의 시간에서는 쟁취해야 하고소유해야 하고업적을 쌓아야 합니다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그러나 순환의 시간에서는 베풀어야 하고겸손해야 하고사랑해야 합니다다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비행기에서 땅을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땅에 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을 봅니다산도 보이고강도 보이고건물도 보입니다자동차는 장난감처럼 보입니다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비행기에서 보면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남을 속입니다채울 수 없는 욕망 때문에 번민하고갈등합니다지난 6개월이 직선의 시간이었다면 남은 6개월은 순환의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사라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사라의 눈에는 하갈의 아들은 뽑아야 할 잡초처럼 보였습니다자신이 낳은 아들 이사악은 온전히 자라야 할 밀과 같이 보였습니다그래서 남편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이야기합니다인류가 살아왔던 삶의 방식이기도 합니다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잡초처럼 대합니다가난하고배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잡초처럼 대합니다신념과 가치가 다르다는 이유로 잡초처럼 대합니다장벽을 쌓아놓고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하느님께서는 하갈과 이스마엘의 아픔을 보셨습니다하갈과 이스마엘에게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십니다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방인을 함부로 대하지 마라너희도 한 때는 이방이었지 않느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지만 아픈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다나는 죄인들을 위하여 왔다.’ 깨달은 사람들이 추구하던 길입니다지난 6개월이 밀과 잡초를 가르는 삶이었다면 남은 6개월은 깨달음을 추구하는 삶이면 좋겠습니다.

 

문명은 그것을 살아내는 인간의 마음에 따라서 변화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우리의 문명은 밭과 같고그릇과 같다고 생각합니다무엇을 심느냐에 따라서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문명은 변화됩니다하느님의 말씀을 담고예수님의 가르침을 담는다면우리의 문명은 생명을 살리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하지만 우리가 악한 것들을 담는다면 우리의 문명은 생명을 파괴하는 무기가 될 것입니다예수님께서는 희망의 불을 밝히셨습니다변화의 불을 나누어 주셨습니다개혁의 불을 이야기하셨습니다가난한 이아픈 이외로운 이이방인들은 예수님의 불을 받아들였습니다예수님의 곁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악의 지배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얻기를 바라셨습니다남은 6개월은 주님을 따라서 참된 자유를 얻는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이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 지방에서 더러운 영을 쫒아내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첫 이방인지역 나들이입니다.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호수를 건너왔지만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만나게 됩니다.

마치 모세가 갈대바다를 건너왔지만 여전히 사막에서 또 다른 거센 돌풍을 마주했듯이 말입니다.

마귀 들린 이들은 족쇄나 쇠사슬로 묶어둘 수 없을 만큼 거센 돌풍에 휘둘려 밤낮으로 소리 지르며 무덤을 헤집고 다녔습니다.

바다의 거센 돌풍을 잠재우신 예수님께서는 이제 인간에게 부는 거센 돌풍을 잠재우십니다.

사실당시에 마귀들과 악령들이 추방되는 사건은 종말의 표징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마태 8,29)라는 마귀들의 외침은 종말의 때가 되기 전에는 당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지 않느냐고 예수님께 항변하는 것과 같습니다그러니예수님께서는 이제 마귀들을 쫓아내시면서 종말의 때가 왔음을 드러내십니다.

동시에 당신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혹 우리도 하느님께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나를 괴롭히지 말아달라고간섭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있지는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대체, 우리 안에 누가 있어 그렇게 하고 있을까요?

 

사실우리 안이 빛이라면 빛을 반겨 맞아들일 것이고어둠이라면 어둠을 반겨 맞아들일 것입니다.

마귀 들린 이는 자신 안에 마귀를 받아들인 까닭일 것이요우상숭배에 빠진 이는 우상을 받아들인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 생각이라는 우상에 빠진 이는 자기 자신의 이기와 편리를 따르기 마련일 것입니다.

그래서 돼지를 치던 이들은 거룩한 권능을 보고 오히려 달아납니다.

그리고 그 고을 주민들은 예수님을 보고 자기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합니다.

그러니우리 안에 돼지 떼가 판치게 방치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그분의 말씀과 은총을 반겨 맞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우리 안에 말씀을 품고 말씀의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빛이신 주님만이사랑이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서 어둠을 몰아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더러워져 있어 주님을 맞아들이기에 합당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 겸손인 것이 아니라오히려 더러워져 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이 겸손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죽은 이들의 무덤 가운데 살지 아니하고살아계신 주님의 사랑 가운데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입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주님!

어둠을 몰아내소서.

제 안에 돼지 떼가 판치지 않게 하소서.

저는 본래부터 주님의 거처이니제 안에 빛을 밝히소서.

죽은 이들의 무덤이 아니라살아계신 당신의 사랑 가운데 살게 하소서아멘.

 돼지보다 젖소가 좋다

 -반영억신부-


돼지가 젖소에게 물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보다 너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나는 죽은 후에 햄이며, 베이컨에 족발, 삼겹살, 곱창까지 몽땅 주는데 말이야?" 그러자 젖소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내 생각에 말이야 넌 죽은 후에야 모든 걸 주지만 난 살아생전에 우유며 치즈, 좋은 것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돼지는 새김질을 하지않기 때문에 구약에선 더러운 짐승으로 먹지 못하게 했고, 지금도 이스라엘과 아랍사람들은 먹지 않습니다. 가나안과 시리아, 로마 사람들은 돼지를 제물로 바쳤습니다. 유다인들에게는 돼지를 키우는 일조차 금기사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지역은 하느님의 뜻이 전해지지 않는 곳으로 먹어서는 안 되는 돼지를 키웠습니다. 그들에게는 식량입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은 돼지 취급을 받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이방인지역에 가셨습니다. 그리고 한 말씀으로 마귀들이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물에 빠져 죽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기 고장에서 떠나달라고 청하였습니다. 돼지들이 죽었으니 예수님께서 거기에 머무신다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벌써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에게는 악의 세력인 마귀가 죽었다는 것을 생각지 못하고 경제적 손실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돼지를 잃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잃는 것보다 훨씬 더 낫습니다.

 

예수님의 행위는 하느님을 모시지 못하고 악의 세력이 자리할 때 이방인의 지역이 되는 것이고 그곳에 죽음이 온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방 지역이란 다른 곳이 아닌 내 삶의 자리 한 가운데 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남을 위해 배려하지 못하고 나중에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 이기적인 마음, 힘들이지 않고 한몫 챙기려 하는 한탕주의, 소위 용하다는 곳을 찾아다니며 하는 미신행위, 가정을 뒤흔드는 향락을 쫓아 즐기는 행위 등등 우리 삶의 자리가 유혹의 자리요, 이방의 자리가 되고 있으며 죽음의 자리가 되고 있습니다.

 

마귀들은 사람들을 뒤흔들었지만, 예수님께는 꼼짝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다라인들의 지역을 가만히 지나가시는데도, 견디지 못하고 빨리 멀어지기를 바라면서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마귀들은 예수님 앞에서는 힘을 못 쓰고 꽁무니를 뺐습니다. 그렇다면 마귀들이 아무리 날뛰더라도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 아무 걱정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면 근심하지 않고 방황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 방황하면 마귀는 다가오고 절망이 기다립니다. 예수님을 꼭 잡기 바랍니다.

 

우리는 각자의 삶의 자리를 하느님을 모신 자리로 빛내야 합니다. 결코 자신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하느님의 힘에 의존하여 하느님 안에서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누구를 기쁘게 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느님입니까? 세속입니까? 사실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답을 못살고 있을 때가 있음을 고백합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며 공정한 마음을 지키고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 차별 없는 사랑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못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주님께 봉헌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무엇을 하려거든 돼지보다 젖소가 되어 지금 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가다라인들의 지방에서>

 -송영진신부-


“예수님께서 건너편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이르셨을 때,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하고 외쳤다. 마침 그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곳에 놓아기르는

많은 돼지 떼가 있었다. 마귀들이 예수님께,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라.’ 하고 말씀하시자,

마귀들이 나와서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돼지를 치던 이들이 달아나

그 고을로 가서는, 이 모든 일과 마귀 들렸던 이들의 일을 알렸다.

그러자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나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28-34).”

 

이 이야기는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마귀를 쫓아내신 이야기이지만,

넓은 뜻으로 보면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복음을 선포하려고 가셨다가

거부당하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마귀 들린 사람들이 한 말은, 실제로는 마귀들이 한 말입니다.

마귀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른 것은,

신앙을 고백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항하기 위해서입니다.

(어쩌면 “당신이 정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인가?” 라고

빈정거리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간섭하지(방해하지) 말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그 마귀들은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부르긴 했지만,

속으로는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의 권한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려고 합니다.

“때가 되기도 전에”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마귀들을 세상에서 쫓아내려고

정하신 때가 되지 않았다는 뜻으로 한 말인데, 이 말은 거짓말입니다.

그 ‘때’는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저희를 괴롭히시려고”는 “저희를 쫓아내시려고”입니다.

 

<마귀들이 한 말은, 가다라인들의 생각을 대변하는 말일 수도 있습니다.

가다라인들은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 즉 이방인들이고,

그래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라는 것도 안 믿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도, ‘구원’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라는 말을

가다라인들의 말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믿는 유대인들 지역에나 갈 것이지,

하느님과 상관없이 살고 있는 우리 지방에는 왜 왔는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라는 말은,

“우리가 부르지도 않았는데, 왜 마음대로 와서 우리를 귀찮게 하는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런 반응은 선교활동을 하는 이들이 흔히 겪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을 때,

관심 갖고 귀 기울이는 사람도 있지만,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적대감을 드러내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제자들이 사람들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거부당하거나 배척당하는 일을 겪을 것이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마태 10,12-13).”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한 집’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집이고,

‘마땅하지 않은 집’은 복음을 거부하는 집입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선교사들이 전해 주는

‘예수님의 평화’와 ‘구원의 은총’을 얻어 누리게 될 것이고,

복음을 거부하면 선교사들이 전해 주는

‘예수님의 평화’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

평화와 은총을 전해 주는데도 자기가 안 받아서 못 받는 것입니다.>

 

마귀들은 예수님께 반항하려고 시도했지만,

계속 반항하다가는 자기들이 지옥으로 쫓겨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은 피하려고 일종의 타협안을 제시합니다.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달라는 요청은,

사람들 속에 있을 수 없다면 돼지 떼 속에나 있겠다는 뜻인데,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쫓겨나는 것을 피하려는 잔꾀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마귀들의 요청을 들어 주셨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아마도 그것들의 요청을 들어 주어도

결국에는 인간 세상에서 완전히 제거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한 일은 놀랍고도 기이한 일인데,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은

말 못하는 미물들에게도 죽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고,

그래서 마귀들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한 것이라고 해석됩니다.

(마귀들을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것.)

 

여기서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그들은 자기네 고장에서 예수님을 쫓아냈다.”입니다.

(떠나 달라고 정중하게 요청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거칠게 쫓아냈을 것입니다.)

가다라인들이 예수님을 쫓아낸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은혜를

알지 못하고서 물질적인 피해만 생각했기 때문에,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예수님의 권능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야훼 하느님을 믿는 유대교와

유대인들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자기들의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것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등으로 해석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우리는 그냥 살던 대로 살겠다.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두어라.”

라는 생각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돼지 떼가 죽어서 생긴 재산 피해는 이미 일어난 일이고,

어쩔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손해배상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돈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 그냥 쫓아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선교활동을 할 때 어려운 일들이 많지만, “살던 대로 살겠다.

이대로 살게 내버려 두어라.” 라는 태도가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영혼 구원에 대한 무관심과 종교와 신앙에 대한 무관심이

적대감과 박해보다 더 극복하기 어려운 난관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설득하지 않으시고 그냥 떠나신 것은,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눈을 뜨게 해 주어도 자기 스스로 눈을 감고 살겠다고 고집 부리는 사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복음: 마태 8,28-34: 가다라인들 지방의 마귀 들린 사람

 -조욱현신부-


예수께서는 호수를 건너, 가다라 지방으로 가셔서 무덤에 사는 마귀 들린 사람들을 만나신다. 마귀 들린 이들은 우상숭배에 빠진 이들을 의미한다. 쇠사슬에 묶여 무덤에 산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느님을 멀리하고 자신의 죄라는 쇠사슬과 죄라고 하는 차꼬에 묶여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29절) 한다.

 

그가 말하는 때는 “메시아의 때”로서 마귀가 정복당하는 때를 말한다. 그러면서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31절) 하고 간청한다. 돼지 떼는 호수 가까운 곳에서 아무것이나 주워 먹으며 세상의 죄에 따라 살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상징한다. 이 속된 호수 가까이 사는 그들은 오류와 무절제한 욕망에 젖어있어서 쉽게 마귀들에게 정복당하고 만다.

 

예수께서는 “가라!”하고 명령하셨고,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 돼지 떼는 물속에 빠져 죽는다(32절). 이러한 소식을 들은 동네 사람들이 나와서 예수님을 보고는 저희 마을에서 떠나 달라고 간청하였다(34절)고 전하고 있다. 하느님을 모르고 예수께서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의 현존 그 자체가 도전이며, 하나의 두려움으로 다가올 수 있다. 그래서 떠나 달라고 하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은 물론 깨끗이 치유된, 크나큰 고통을 당했던 그 마귀 들렸던 사람도 보았지만, 예수님께 자기들을 떠나가 달라고 간청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하는 것이 처음부터 받아들이기 힘든 도전으로 두려움으로 될 수 있어서 다른 것보다도 그분과 만나기조차 꺼리는 것이다.

 

순간적이고 현세적인 손해가 아까워 구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떠나 달라고 했던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는 없었는가? 믿음이 없었던 그들처럼 우리도 세상을 구원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우리의 마음의 고장에서 떠나 달라고 하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삶이 주님께 우리를 떠나 달라고 간청하고 있는 삶이 아닌지 잘 살펴보아야 하겠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갈림길에 살고 있다. 오늘의 동네 사람들처럼, 죄의 상징이며, 불결한 악마의 상징인 돼지 떼를 선택하고, 악마의 세력으로부터의 해방을 포기한다면, 우리도 역시 그들처럼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밖으로 몰아내는 없애버리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매 순간 하느님의 뜻 앞에 서 있다. 이 하느님의 뜻은 하나의 십자가의 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십자가를 어떻게 지고 가면서 앞으로 나아가느냐가 중요하다. 그 십자가가 영광을 줄 줄 알지만, 그 과정이 두려워 그 십자가를 버려야 할까? 아니면 그 도전에 순순히 응답함으로써 영광을 누릴까? 여기서 또한 우리의 선택이 필요하다. 주님께 올바로 응답하는 선택을 하여야 하고, 진지한 마음으로 주님께 우리 자신을 봉헌하며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배척 당하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도 무엇을 선택할지 물으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마태 8,29)
가다라인들의 지방에 다다르신 예수님 앞에 마귀 들린 두 사람이 마주 오며 외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신원을 당장에 알아보고 경계합니다. 어둠은 빛과 섞일 수 없고 악은 선과 화합할 수 없으니까요. 빛이신 분이 다가오시자 그들은 지레 겁먹고 예수님을 밀어내려 합니다.

"온 고을 주민들이 예수님을 만나러 왔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마태 8,34)
마귀들이 자청해 들어간 돼지떼가 모두 물속에 빠져 죽자 고을 사람들이 놀라서 모여듭니다. 두렵기도 하거니와 재산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지요. 마귀에게 시달리던 이가 온전히 회복되어 더 이상 고을에 위협이 되지 않게 되었으니 형제를 얻은 셈이지만, 그들에게는 두 사람의 안위보다 죽은 돼지 떼로 인해 입은 손실이 더 크고 중했나 봅니다.

구원은 간절히 갈망하고 바라는 이에게는 세상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지만, 재물과 권력, 지위와 인맥 등 다른 보물을 섬기는 이에게는 그다지 급할 것 없는 부차적 장식품 정도인 듯하지요. 내 재산의 티끌 하나라도 건드리면 악의 축으로 몰아세우고, 정치나 사회 제도조차 자기 재산 관리의 하수인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세태는 이미 너무 흔해서 악이라고 인식 못할 정도가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께서 아무리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주러 오셨어도, 아무리 존재 안의 악을 몰아내고 선으로 채워주시려 해도 완고하게 "당신과 제가 무슨 상관이냐?"고 거부한다면 구원을 강요할 수 없는 노릇입니다. 공동체가 그간의 불안과 두려움에서 벗어나 평화를 얻게 되더라도 손해에 대한 분노가 감사를 압도하면 결국 빛이신 분께 "떠나 주십시오" 하게 되겠지요.  

제1독서에서는 아브라함의 두 아내와 두 아들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 아이와 네 여종 때문에 언짢아 하지 마라.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주어라."(창세 21,12)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을 현대적 시각과 가치관으로 읽을 경우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순간에 맞닥뜨립니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주인 사라에 의해 아브라함의 아이를 갖게 된 하가르가 이사악 출생 이후 비정하게 내쳐지는 이 장면 또한 우리를 적이 당혹스럽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느님께서 하가르와 이스마엘의 생명을 귀하게 돌봐 주시고 함께 계시면서 한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신다는 약속으로 일화가 마무리 지어지면서 위안이 되기도 하지요. 그런데 하가르와 사라의 관계를 사도 바오로의 서간 내용과 병행하여 해석하면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우의적인 뜻이 있습니다. 이 여자들은 두 계약을 가리킵니다. 하나는 시나이 산에서 나온 여자로 종살이할 자식을 낳는데, 바로 하가르입니다. ... 그러나 하늘의 예루살렘은 자유의 몸으로서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의 몸인 부인의 자녀입니다."(갈라 4,24-31 참조)

하가르가 "이집트 여자"라는 사실 역시 이런 우의적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이집트는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살이를 하던 곳이었고, 광야에서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되돌아가고픈 안전지대로 미화된, 유혹의 올가미를 상징하지요.

아브라함은 마음이 언짢으면서도 하느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내보냅니다. 인간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대목이지만, 사도 바오로처럼 옛 계약과 새 계약 사이의 선택이라 본다면 분명 냉엄할 정도의 결단이 필요한 순간인 것입니다.

복음 속 등장 인물들은 거듭 예수님을 배척하고 거부합니다. 좋은 일을 하시는 분이 두려운 이유는 재물이나 이기심, 자기중심성 등 세상 것이 더 좋고 가치롭기 때문이겠지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매번 이러한 선택의 순간이 주어지지요. 물질적 세속적 현실적으로 득이 되는 것은 주님의 선물로 여기면서 십자가 앞에서는 자기와 상관 없으니 그냥 떠나 주시길 바란다면 그리스도교는 신앙이 아니라 기복적 취향일 뿐이겠지요.

관대하고 넓은 마음으로 세상을 포용하지만, 하느님의 뜻이 명백하다면 때로는 손해가 되더라도 단호히 식별하고 의탁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속 가다라인들은 그리하지 못했지만, 우리에게는 열린 결말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6월의 마지막날, 한해의 절반을 마무리하는 날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전반기를 결산하면서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선택의 순간을 놓치지 말고, 물질적 이익보다 조금 손해가 되더라도 선하고 진실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붙잡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떠나시지 않도록 꼭 붙잡으십시오. 그분을 누리시게 될 것입니다. 아멘.

 시간과 공간의 주인은?

 -김찬선신부-


오늘 복음의 얘기는 공관 복음에 모두 나오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다른 두 복음과 차이 나는 것이 바로 때에 대한 언급입니다.

다른 복음들에서는 때에 대한 얘기가 없는데

마태오 복음은 때가 되기 전에 주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추가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그런데 이 때가 무슨 뜻입니까?

때가 되기도 전이라면 정해진 때가 있었다는 말입니까?

 

이런 뜻이 없지 않은지 영어 번역에서는

'before the appointed time'라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정해진 때가 있었다면 그러면 누가 정한 것입니까?

또는 주님과 마귀 사이에 약속된 때가 있었을까요?

그런데 주님께서 마귀와 때를 약속하셨겠습니까?

그럴 리가 없겠지요.

 

그렇다면 때란 마귀들이 마음대로 생각한 때이고,

그때보다 일찍 주님께서 오셨다는 거겠지요.

 

우리는 자주 주님의 때가 아닌 인간의 때나 나의 때를 가지고 있지요.

예를 들어 우리의 죽음과 관련하여 50 살이면 일찍 죽는 거라거나

80 살이면 살만큼 살았다거나 100 살이면 오래 사는 거라고 합니다.

기대 수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이지요.

 

이것이 마귀의 문제이고,

우리가 이러하다면 우리도 마귀적입니다.

 

그렇습니다.

마귀나 악마적인 인간은 자기들이 시간과 때의 주인이고자 합니다.

 

이에 비해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을 시간의 창조자요 주인이라고 믿고,

믿을 뿐 아니라 하느님의 때에 순종을 하고 맡깁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마귀가 더 문제인 것은

다시 말해서 더 불순종적인 것은 시간과 때보다 장소의 불순종입니다.

 

오늘 복음의 마귀들은 가다라 지방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 존재입니다.

가다라 지방을 자기 영역이라고 주장하고 거기서 떠나지 않으려 하고,

자기 영역에는 하느님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하며 그래서

들어오면 침입이고, 자기들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어쩌면 마귀란 이 세상 지구를 떠나 하느님 당신께로 오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한 존재들일지도 모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과 같이 살자고 초대하시는데도 그 초대를 감히

거절하는 것인데 그 이유가 바로 이 세상에 대한 애착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자기 영역을 가지려고 하는 것부터가 실은 악마적인 것입니다.

자기 영역 곧 Privacy는 누구건 같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지요.

 

요즘 프라이버시, 프라이버시라는 말을 많이 쓰고,

프라이버시를 침범하지 말라는 말도 입버릇처럼 쓰는데

프라이버시가 있는 순간, 거기는 자기만의 공간이고 누구도

들어와서는 안 되는 공간이고 그래서 들어오면 침입이 되는 곳이지요.

 

아무튼, 오늘 복음의 마귀를 보면서

우리도 자기의 장소를 너무 애착하여 하느님 초대도 거절하지는 않는지,

자기 영역을 고집하여 하느님마저 침입으로 여기지는 않는지

자신을 반성하는 오늘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7년 7월 5일 연중 제13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