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
2021년 6월 27일 연중 제13주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
(마르코 5,21-43)
“Who has touched my clothes?”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Go in peace and be cured of your affliction.”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열두 해 동안 하혈하는 여자, 열두 살 어린 소녀. 열둘이라는 공통점을 지닌 두 사람입니다. 한 명은 난치병을 앓았고 다른 한 명은 죽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인간의 힘으로는 극복하기 어려운 한계를 마주하였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둘에게는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체험하였다는 교집합이 생깁니다. 물론 한 명은 예수님을 능동적으로 찾아가서 예수님께 손을 댔고, 다른 한 명은 수동적으로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께 손이 잡혔습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닮은 듯하면서도 서로 다른 두 사람의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줍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방법이 다양하게 존재합니다. 우리 스스로 예수님께 다가갈 수도 있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수도 있습니다. 우리의 손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기도 하고 예수님께 붙잡히기도 합니다. 숱한 고생을 하고 많은 의사에게 가진 것을 다 쏟아부으며 열두 해를 보낸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만 듣고 그분을 믿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아픈 딸을 고쳐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그분을 집으로 모시고자 하였지만, 집으로 가는 동안에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예수님을 더 수고스럽게 할 필요가 없다던 회당장은 어떻게 예수님을 쉽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그들이 마주한 상황은 비록 다른 모습이었지만 인간의 힘으로 극복할 수 없는 처지라는 같은 상황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만났습니다.
그러한 이들과 예수님의 만남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전해 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그분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은 구원으로 이어집니다. 믿음은 합리적인 사고의 결과가 아닙니다. 적당한 인간적 사고 안에서 만들어진 타당성의 결론이 아닙니다. 믿음은 때로는 무모하게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기도 하고, 그분께 손을 내밀기도 하면서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믿음과 겸손
-키엣 대주교-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비록 우리가 가난하고 이름없는 아주 작은 사람일지라도 잊지 않으십니다.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고 보살펴주실것이므로 주님을 믿고 의지하면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먼저 주님께 다가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적을 경험한 두 사람은 주님을 직접 만난 사람들입니다.
수많은 군중 속에서 주님에 대한 믿음 하나로 그분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그 여인은 하혈이 멈추고 병이 나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기적의 치유를 받은 어린 소녀는 이미 죽은 몸이기에 주님께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아이에게 다가가서 아이의 손을 잡아주자 아이는 곧바로 일어서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체험한 것은 단순히 치유된 육체만이 아닙니다. 그들은 육체의 변화보다도 더 강렬한 영혼의 변화를 체험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를 칭찬하고 격려해 주시기 위해 부르는 소리를 듣고 그녀는 기쁨과 행복으로 충만했습니다. 사회로부터 멸시당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혀있던 보잘것없는 자신이 예수님으로부터 사랑과 존중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자 그녀의 영혼이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죽었던 아이가 생명을 얻고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뵌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아이는 자신의 손을 잡고 계시는 예수님의 따뜻한 손길에서 편안함을 느꼈고 그 분의 인자한 눈빛에서 믿음을 얻었습니다.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기적을 베푸신 후 가장 먼저 하신 말씀은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는 세심한 배려이셨습니다.
누구나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기적의 은혜를 받으려면 자격이 필요합니다.
진실되고 확고한 믿음
죽어가는 아이의 아버지는 회당장이었습니다. 당시 유다의 회당장은 예수님을 반대하고 해칠 생각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직접 예수님을 찾아와 당신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에 대한 그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여인 역시 예수님께 다가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그분께 다가가서 그분의 옷자락을 만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여자에게 이르셨습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다른 사람에 의해서가 아닌 자신의 믿음이 있었기에 치유의 은총을 받은 것입니다.
겸손함
겸손이란 스스로 부족한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이 행동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 하고 간곡히 청한 회당장의 모습과 자신의 일이 알려진 후 ‘예수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한 여인’은 같은 모습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드러내는 진실된 모습이 결국 예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루에 수십 번씩 우리를 어루만져주시고 계시지만 우리는 주님을 보지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스쳐 지나갑니다.
일상 속에서 수없이 많이 우리의 손길을 원하는 고통받고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고 스쳐지나갑니다. 나의 일이 중요하고 바빠서 그들을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설령 마주쳐도 그 사람안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습니다. 이미 무감각해진 마음과 어두어진 눈으로 그 사람들의 눈속에 계신 주님을 볼 수 없기에 무심코 지나가버립니다. 아무리 많이 성경을 읽고 성체 성사를 모셔도 주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에 대한 진실된 믿음과 사랑없이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을 대한다면 나의 영혼은 변할 수 없습니다. 진실된 믿음과 깊은 겸손으로 주님께 다가가야 합니다. 나의 겸손과 확고한 믿음만이 주님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주님께 진실되고 겸손된 마음으로 다가간다면 우리의 삶도 변화될 수 있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주님의 진정한 사랑을 느끼고, 주님의 인자한 눈빛을 느끼고, 주님의 인자한 말씀을 깊이 깨달을 수 있다면 주님의 크신 사랑에 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사랑하시지만 모든 사람이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을 알고 회개하고 주님앞에 먼저 다가간다면 주님께서 손을 내밀어 주실 것입니다. 주님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주님을 보지 못하고 주님께 등을 돌리는 것이 더 두려운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더 깊은 겸손함과 확고한 믿음으로 주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아멘.
1. 주님의 말씀 중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구절은 무엇입니까?
2. 주님께서 나를 보살펴주고 계시다는 것을 느껴보았습니까?
3. 미사를 통해 기쁨을 느꼈다면 주님의 사랑에 응답할 용기도 얻었습니까?
4.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내가 부족한 것은 무엇인지 묵상해보십시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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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든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어쩔 수 없이 하는 경우라면 모를까 그런 일만 찾아 나서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몸은 힘든 일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교 의대 연구팀이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유형을 둘로 나눠 실험했습니다. 첫째 유형은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맛난 음식, 좋은 환경, 사회적 욕구 충족의 안락함을 추구합니다. 다른 유형은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삶의 목적과 의미를 찾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로, 예를 들면 아이 돌보기, 치매 노인 섬기기, 인기 없고 힘들지만 필요한 일을 하는 것 등입니다.
누구의 몸이 더 건강해졌을까요? 감각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이 내면적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보다 몸 안에 염증을 유발하는 유전자는 증가하고 항바이러스 유전자는 줄어들었습니다. 감각적 행복을 추구할 때 오히려 스트레스에 반응하며 염증을 일으키는 게놈이 더 많이 나타났습니다.
우리 몸은 힘들어도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아무 생각 없이 감각적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었을까요?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께 자기 딸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부탁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을 찾아가시지요. 그런데 그의 집에 도착하기 전에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이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웃습니다. 인간적인 판단으로는 죽은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임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세상의 눈으로만 그리고 감각적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에게 “탈리타 쿰!”라고 말씀하십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곳에 있는 모든 이에게 하신 말씀이 아니었을까요? 세상의 관점으로만 보고 있는 그 모든 시선을 벗어버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벌떡 일어나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살지 않습니다. 편안하고 쉬운 삶이 아닌 어렵고 힘든 상황에서도 기쁨을 간직하면서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런 노력을 갖추며 사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보여주시는 놀라운 표징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을 더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발해를 아십니까?”라고 질문하면 대부분 안다고 대답하실 것입니다. 저 역시 이 질문을 처음 받았을 때 안다고 대답했습니다.
“고구려 멸망 후 대조영이 세운 고대국가입니다.”라고 답하자, “또?”라는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반도 북부와 만주, 연해주에 존속했던 나라였습니다.”라고 하자, “또?”라고 다시 묻습니다. 이 질문에 그다음은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200년 넘게 존속했던 나를 단 2줄 정도로 설명할 수 있는 ‘앎’을 과연 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진짜 앎이 아닙니다. 그보다 아는 것 같은 ‘느낌’만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느낌뿐인 것을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우리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도 아는 느낌을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 앎은 진짜가 아닙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아는 느낌을 ‘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이 역시 진짜가 아닌, ‘아는 느낌’으로 사는 것뿐입니다.
진짜 앎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더 큰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기적이라도 청해야 하는 이유: 더 큰 기적을 믿기 위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두 치유의 기적을 소개합니다.
처음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아프다고 하여 치유하러 가시다가 하혈병 여인이 치유됩니다. 하혈병 여인이 치유된 이유는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이라도 대면 나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만 있다면 무엇이든 주시려는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치유의 힘’이 나온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이때 딸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집니다. 그런데 생각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칠 힘을 지니신 저분께서 죽은 사람은 살리실 수 없으실까?’
다른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병을 고치는 힘이 곧 죄를 용서하는 힘과 같음을 말씀하셨습니다. 중풍 병자에게 죄가 용서받았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병을 고치는 힘이나 죽은 사람을 살리는 힘은 같은 원천에서 나옴을 말해줍니다. 이 힘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은 믿음으로 자신을 봉헌하는 이의 병을 치유해주고 죄를 사해주며 심지어 생명까지 다시 넣어주시는 힘이십니다.
이렇듯 작은 것을 보고 큰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바로 ‘묵상’에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회당장 야이로는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보며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회당장 야이로는 분명 하혈병 여인의 치유를 통해 죽은 자신의 딸도 살아날 수 있음을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병을 고치시는 분이 영원한 생명도 주십니다. 어떤 것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만들 수도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원숭이는 자동차를 고칠 수 없습니다. 만들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칠 수 있다는 말은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 설계도와 에너지가 있으면 새로 만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고장 난 것은 작게 죽은 것이고, 망가진 것은 크게 죽은 것입니다. 작게 죽은 것을 살릴 수 있는 분이 크게 죽은 것도 살립니다.
우리 주위에서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다면 그것이 생명의 원천도 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 일어나는 치유의 기적을 통해 우리가 도달해야 할 믿음입니다.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기적이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루르드 성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루르드에서 치유의 기적이 보고된 것은 7000여 건에 이릅니다. 그런데 이 기적들이 공식적으로 교회에서 인정을 받으려면 수많은 의사의 오랜 조사가 필요합니다.
이때 ‘루르드 의료국’이 소집되는데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분야의 의사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기적의 조사는 10여 년이 소요됩니다.
그렇게 루르드 의사국에 의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라 인정되고, 또 그것이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된 초자연적 현상이라 믿어지는 기적은 현재까지 70건입니다. 기적중의 단 1%만 이 과정을 통과한 것입니다.
마지막 70번째 공식적 기적은 2018년에 공인된, 하반신 마비가 치유된 한 수녀님의 사례입니다. ‘베르나데트 모리오’ 수녀는 허리 신경근이 압박을 받아 하반신이 마비됐습니다. 허리 통증과 하반신 마비 증상은 그가 27살이던 1966년부터 시작됐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1968년부터 1975년까지 4차례 수술을 받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결국 1980년 하반신 마비 판정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한쪽 다리는 완전히 뒤틀려 보조기구를 착용해야 했으며 휠체어에 의존해 이동했습니다. 또한, 통증을 참기 위해 상당량의 모르핀을 사용해야 했습니다.
모리오 수녀는 2008년 성모 발현 150주년을 맞아 루르드를 순례했습니다. 당시 순례를 “은총의 원천”이라고 회상한 수녀는 “신기하게도 성모 동굴에서 성모와 성녀 베르나데트를 느낄 수 있었다.”라고 말했습니다.
수녀는 순례 동안 고해성사를 하고 병자성사를 받았습니다. 수녀는 “당시 나는 치유를 바라지 않았다.”라면서 “그저 회심하길 바랐고 환자로서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힘을 달라고 기도했다.”라고 말했습니다.
순례를 마치고 보베에 있는 수녀원에 돌아온 수녀는 특이하게도 몸이 편안해지며 전체적으로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수녀는 한쪽 다리를 고정했던 보조기구를 풀라는 내면의 소리를 듣고 이를 풀었으며, 통증을 조절하기 위해 사용했던 신경자극기도 뗐습니다. 이후 수녀는 어떤 기구의 도움 없이도 걷기 시작했습니다. 통증도 사라졌습니다.
루르드 의료국은 모리오 수녀의 치유 사례를 2009년과 2013년, 2016년 3차례에 걸쳐 면밀히 조사했으며,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에 이 사건을 보고했습니다. 루르드 국제의학위원회는 수녀의 치유가 “현재의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베노아-고닝 주교는 “모리오 수녀가 이렇게 갑자기 완전히 상태가 호전된 것은 기적으로 볼 수밖에 없다.”라며 이 사례를 기적으로 인정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사례 중 특이한 것은 63번째로 공식 인정된 기적입니다. 주인공은 비또리오 미켈리(Vittorio Micheli)라는 이태리 사람입니다. 그는 군복무 중인 22세 때에 좌측 골반에 이상을 느껴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검사를 거친 후 그해 6월 4일에 그의 병명은 치명적인 악성 종양으로 밝혀졌습니다. 일 년가량 군 병원에 머물며 종양으로 잠식된 엉덩뼈의 머리 부분을 잘라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고관절은 냉혹하게도 점점 악화되어 갔습니다.
루르드에 순례를 하러 갈 때도 골반에서 발까지 석고 붕대를 하여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샘물로 목욕을 하였습니다. 그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태리로 돌아왔을 땐 외관상 상태가 호전된 것으로 보였고 군인의 신분이었기에 그는 트렌토의 군 병원에 다시 입원하였습니다. 군 병원에서 여러 번 X선 사진을 찍었지만 제대로 판독을 못 해서 의료진은 그의 상태가 이전과 마찬가지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6개월이 지나자 그는 놀라울 정도로 건강을 회복하여 통증이 없어졌으며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의료진은 “그의 골반이 뚜렷하게 복구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다시 루르드를 방문했고 루르드 의료국에 의해 “이러한 치유에 대해선 의학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어졌고,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지 13년이 지난 1976년 5월 26일에 트렌토의 알렉산드로 고따르디 대주교는 “창조주이신 아버지 하느님의 힘으로 특별히 중재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 충분한 증거”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잃었던 시력이 회복되고 암 덩이가 사라지는 것은 참으로 큰 기적입니다. 모리오 수녀 같은 경우처럼 40년 동안 휠체어를 타던 분이 연세가 들어서 두 발로 가뿐히 걷게 된 것은 더 큰 기적입니다. 그런데 비토리오 미켈리 같은 경우 암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요, 그것 때문에 잘렸던 뼈가 다시 생겨나 다리 길이가 같아졌다는 것은 더 기적입니다.
우리 주위엔 크고 작은 기적이 이렇게 존재합니다. 신자들의 기도로 죽었던 사람까지 다시 생명이 되돌아온 예도 주위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묵상하다 보면 믿음이 더 강해져서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시는 분이 죽은 우리를 부활시키지 못할 이유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이 세상을 마치 여행하는 것처럼 즐기며 살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두려우면 이 세상도 즐기지 못하고 나를 해칠까 봐 사람을 평생 두려워하며 누구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살리러 가시는 예수님을 붙잡아 시간을 빼앗은 하혈병 여인 때문에 화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녀 때문에 믿음이 더 증가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 만드실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우리 부활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살아갑시다. 망가진 것을 고치실 수 있는 분은 분명 다시 만드실 능력도 있는 분이십니다.
작은 치유라도 바랍시다. 이것이 묵상을 통해 부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망가진 묵주를 고쳐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회복 불가능일 때 다시 만들어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조재형신부-
강원도 영월에 동강이 있습니다. 정부에서는 홍수예방과 농사를 위하여 동강댐을 건설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환경단체와 국민들의 반대로 댐 건설은 취소되었습니다. 정부는 동강 일대를 생태보존지역으로 지정하였습니다. 동강은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강을 찾으면서 지친 마음에 위로를 받고 있습니다. 저도 물길 따라 흐르는 아름다운 강을 보았습니다. 물은 스스로 길을 만들지는 않습니다. 물은 길을 따라 흘러갈 뿐입니다. 개발과 발전이라는 길을 만들면 물은 그 길로 흘러갑니다. 자연과 환경이라는 길이 있으면 물은 그 길로 흘러갑니다. 결정은 물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을 사랑하고, 물을 아끼는 사람들이 하는 것입니다. 가능하면 물길을 바꾸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물길에는 많은 생명이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지구라는 푸른 별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조상들이 살아왔고,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갈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수많은 생명들이 함께 머무는 공동의 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도 물길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물질과 자본이라는 물길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 물길에서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려고 합니다. 능력 있는 사람이 성공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회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자연과 환경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오존층이 파괴되고 있습니다. 생명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상기후로 인한 재난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물질과 자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더욱 부유해지고, 가난한 사람은 더욱 가난해지고 있습니다. 능력이 없는 사람들은 가난과 고통은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물질과 자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부실공사로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기도 합니다. 독재와 내전으로 정든 고향을 떠나는 난민이 생기기도 합니다. 마약을 만들어서 사람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물질과 자본은 이익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라는 물길이 아니었습니다. 성공, 권력, 명예를 얻으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물길을 알려주셨습니다. 그 물길을 따라가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서 돌아오는 목자처럼 모든 이를 품어주는 사랑의 물길입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는 용서의 물길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품어주는 자비의 물길입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다는 겸손의 물길입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는 희생의 물길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시는 나눔의 물길입니다. 배반했던 제자들에게 평화를 빌어주시는 믿음의 물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물길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일어서는,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나가는 성령의 물길입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느님 나라와 기쁜 소식을 삶을 통해서 보여주었습니다. 공동체에는 가난한 사람도, 고통 받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진 것을 서로 나누었습니다.
오늘은 교황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교황주일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물질과 자본의 물길을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셨던 사랑과 자비의 물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눔과 희생의 물길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교황님은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고 하였습니다. 교회는 상처를 받을지라도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교황님이 제일 먼저 방문했던 곳은 난민들이 머물던 람페두사였습니다. 교황님은 난민들의 아픔과 고통에 함께하자고 호소하였습니다. 유럽의 많은 나라들은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람페두사에 있던 난민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코로나19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자고 하였습니다. 바티칸에 노숙자들이 쉴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노숙자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샤워 실도 마련하였습니다. 코로나19의 백신을 어려운 이웃들과 나누자고 호소하였습니다. 한국을 비롯해서 많은 교회는 교황님의 호소에 응답하였습니다. 가난한 이들과 가난한 국가들에게 백신을 나눌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신앙인은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입니다. 그 길이 멀고 험해도 영원한 생명을 주기 때문입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 그러나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와 죽음에 속한 자들은 그것을 맛보게 된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지나가는 생명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고통과 십자가 앞에 힘겨워하지 않습니다!
-양승국신부-
유다 언어 관습 안에서 12라는 숫자는 ‘꽉 찬’ ‘완전한’ 이란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하혈하는 여인은 한두 해도 아니고, 열두 해 동안 고통에 시달려왔습니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매일 자신의 몸에서 다량의 피가 빠져나가는 상황이었으니 마음이 얼마나 심란했겠습니까?
매일 아침 해가 밝아올 때 마다, 그녀는 마음속으로 늘 이런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오늘 아침도 주님 자비로 이렇게 눈을 뜨게 되었구나. 그러나 매일 피가 빠져나가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목숨! 과연 내가 언제까지 살 수 있을까?’
결국 ‘열두 해 동안’이란 표현을 통해서 그녀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녀의 고통은 한 인간이 겪어야 하는 고통 중에서 가장 극심한 고통, 가장 견디기 힘겨운 고통이라는 것이 ‘열두 해 동안’이란 표현인 것입니다.
다른 한편 이미 죽어버린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나이도 묘하게 12살이었습니다. 그녀의 딸이 12살이란 표현은 적당히 죽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죽었다는 표현입니다. 더 이상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 12라는 숫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극에 달한 한 인간의 고통, 완전한 죽음조차도 예수님 앞에서는 별것 아니었습니다. 당신 말씀 한 마디에 극심한 심연의 고통도, 건널 수 없는 죽음까지도 호령하시고 지배하시며 극복하실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하느님은 인간의 생사조차도 좌지우지할 수 있는 능력의 주님이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조차 그분 앞에서는 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주관자이신 주님, 우리의 죽음이 아니라 생명을 원하시는 주님 앞에 한 가지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관하시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은 지나가는 생명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불멸의 생명, 하느님께서 선물로 주시는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그 누구도 죽음 앞에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간혹 어떤 사람이 숨이 넘어갔다가 다시 회복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현상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제한적인 것입니다.
운이 좋아서 죽을 운명을 딛고 한번 소생했다고 해서 영원히 또 소생하고 또 소생하지는 않습니다. 이 세상에 두발을 딛고 살아가는 그 누구도 이 땅에서 영원히 살지는 못합니다. 우리 육신이 지니고 있는 생명은 지나가는 것이며 지극히 한시적인 것입니다.
결국 죽는 것, 소멸되는 것, 사라지는 것이 운명인 우리 나약한 인간에게 있어, 언젠가 지상의 장막이 허물어지고, 급격히 쇠락하고, 영원히 머물지 않고 떠나야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떻게 해서라고 지상의 생명을 넘어 천상의 생명, 유한한 생명을 넘어 영원한 생명, 찰나의 생명을 넘어 궁극의 생명을 추구해야겠습니다.
비록 오늘 우리가 이 지상에 몸담고 있지만, 부단히 영원한 생명에로 건너가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해야겠습니다. 이 땅 위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살기 위해 발버둥쳐야겠습니다.
이 땅에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맛들이고 얻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큰 은총 하나가 있습니다. 더 이상 지나가는 생명에 연연해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세상의 고통과 십자가 앞에 힘겨워하지 않습니다.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현실조차도 관대하고 기쁘게 수용합니다.
주변을 찬찬히 살며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들이 많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살아있지만 살아있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생명에 연연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영원한 생명을 소홀히 합니다. 살아있지만 진정으로 살아있지 못한 모습입니다. 하느님 없이, 영혼 없이 살아가는 그 모습이 참으로 참담합니다. 그 모습이 결국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인 것입니다.
오늘 이 하루를 살아가면서 진정 참된 삶을 사는 것이 무엇인가? 고민하고 그 삶을 한번 제대로 살아볼 수 있는 은총과 자비를 청해야겠습니다.

일어나라, 탈리타 쿰!
-반영억신부-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이 시간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느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기를 기도합니다.
복음을 보면 야이로라는 회당장이 예수님을 뵙고 그분 발 앞에 엎드려,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얻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고 간곡히 청하였습니다. 회당장이라면 마을 사람들에게서 명예와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무엇 때문에 엎드렸습니까? 어린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이 보기에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을 것 같은 사람이지만, 그 사람의 내면과 가정에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거센 돌풍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 시련 중에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사람이 누구 앞에 엎드린다는 것은 항복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준다는 뜻입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딸을 위하여모든 것을 내 놓았습니다.
남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아쉬울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회당장이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여간해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는 어린 딸의 고통 앞에서 예수님께 엎드렸습니다. “부모가 죽으면 땅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부모의 가슴에 묻는다.” 고 합니다. 회당장은 거센 역풍을 무릎을 꿇는 성숙한 믿음을 통해 해결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고통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통은 우리의 시선을 다른 높은 것을 바라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회당장은 고통을 통해서 그동안 보지 못했던 곳으로 눈을 돌리게 되고 자기가 얼마나 무능력한 존재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죽어가는 어린 딸을 절망과 분노와 슬픔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었다면, 그는 결코 주님을 만나지도 못했을 것이고 죽어가는 어린 딸을 살리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엎드려 간절히 청하였습니다.
우리도 말 못 할 고민이나 걱정을 지니고 있다면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간청해야 합니다. “저로서는 더는 어떻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이 문제를 당신에게 맡깁니다. 당신의 능력이 함께하지 않는다면 이 고통과 고민, 어려움을 해결하지 못합니다. 당신만이 해결의 열쇠입니다. 도와주십시오. 당신만을 믿습니다.”하고 주님께 모두를 맡겨 드릴 때 거기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래전의 일입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찾아와서 고해성사를 보면서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내시며 동안의 쌓인 모든 것을 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쉬고 계시던 이분이 고해성사를 보게 된 계기는 하나의 시련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병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는데 손목에 이상이 생겨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을병도 아니고 손목에 이상이 생긴 것을 뭐 그리 대단하게 생각하느냐? 호들갑을 떤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분에게는 큰 두려움이었습니다. 병원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았는데...그래서 고해성사보고 수술에 임하려고 한 것입니다.
얼마 후 비가 주룩주룩 내리던 날 그분이 다시 오셨습니다. 남편과 함께 오셨는데 선물을 잔뜩 가지고 오셨습니다. 제가 어르신들을 모시고 있는 것을 알고 한약제로 만든 소화제를 가지고 오셨습니다. 배우자 되는 분이 한의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병은 의사에게 맡겨야지 신부에게 찾아오시느냐? 그분이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하느님의 몫과 인간의 몫이 따로 있습니다. 저는 그 도구일 뿐입니다.” 보통의사는 겉으로 드러난 병을 치료하지만, 명의는 원인을 다스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병을 치유해주시면서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선언하신 이유가 거기 있습니다. 그 자매는 수술을 받지 않고 완치가 되었습니다. 내면의 치유를 통해 외적인 병도 나았습니다. 주님의 능력은 언제, 어느 때 드러납니까? 믿음이 있는 곳에서 그분께서 역사하고 싶으실 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맡기는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 간청하는 와중에 시련이 연속으로 올 수도 있습니다. 회당당장이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하는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하고 말합니다. 절망적인 순간입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매달렸고 희망을 가질 수도 있었는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가능성이 없는 절망의 순간입니다. 인간적인 한계에 접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예수님께서는 믿음을 북돋워주십니다. ‘사람들이 뭐라고 하던지 네가 지금까지 지켰던 믿음을 흔들리지 말고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말씀입니다. 선택의 순간이 온 것입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을 것이냐 아니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것이냐?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인간이 끝났다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시작하십니다. 인간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은 은총의 때, 구원의 때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침내 회당장은 “사람들의 말”이라는 유혹을 극복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주님의 능력, 권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련은 은총의 기회입니다. 그러니 시련을 주님의 시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은혜를 청하십시오.
혈액암으로 고통을 받는 한 자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투병생활을 하면서도 늘 맑고 밝은 모습이라서 환자라고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그분께서 투병 중에 천일기도를 시작하셨고, 물질로도 매일 일정액을 봉헌하였으며 저에게 매주 편지를 쓰셨습니다. 그의 편지 중 하나입니다.
“요즘에는 몸은 아프지만 성부, 성자, 성령님과 성모님을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서 좋은 점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아요.‘나의 사랑하는 딸, 000야! 내가 너에게 병고를 주는 것은 너를 얼마나 내가 사랑하는지 깨닫게 함이며 또 한 가지는 너의 몸과 마음을 비울 수 있을 데까지 그리고 내려놓을 수 있을 때까지 내려놓아라. 그래야 내가 네 안에 자리 잡고 너의 주인이 될 수 있단다. 이제까지는 너의 몸과 마음이 너에 의해서 움직였지만, 지금부터는 이제 내가 너의 주인이란다.’그래서 이제는 저를 비울 수 있을 때까지 많이 많이 비워서 큰 빈 공간을, 하느님이 자리 잡으실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려고 노력할 거예요, 신부님, 저의 이 마음을 어떻게 생각하세요? (070811).
“저는 병을 통해서 얻은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성체를 모시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고 기쁨인가? 두 번째는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닌 하느님이 심을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병의 고통을 통해 몸과 마음의 주인은 하느님이시니 당신이 알아서 저를 쓰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제게 평화와 기쁨을 줍니다”(070901). 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은 아주 힘든 주였던 것 같애요. 마음 속으로 ‘그래 암세포야! 너 내가 그렇게 좋으면 내 몸 속에 들어와 놀다 가거라.’하며 너그러운 척하면서도 실제로 줄기세포 이식 후에는 99%의 암세포가 죽고 1%는 남을 수가 있는데 왜 나는 그 1%의 극소수의 수치에 포함되어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하고 묵상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도 답은 한 가지! 제 생명을 주신 분도 한 분, 거두어 가실 분도 한 분, 우리 주 하느님뿐이시니 모든 것을 그 분 계획안에 맡기고 따르는 길 뿐임을!’(080217). 이라고 말씀하시며 고통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며 남모르게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천일을 다 채우지 못하고(080625) 세상을 떠나셨지만, 임종을 맞기까지 하느님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크게 느꼈고 흔들림 없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주검 앞에서는 울고불고 우왕좌왕 혼란이 있게 마련입니다. 슬픔과 무질서가 지배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 집에는 오늘 복음에서처럼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이 살아있었습니다. 슬픔 가운데에도 영원한 부활의 생명에 대한 희망이 넘쳐났습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부활하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의 삶을 믿는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명하고 살 때 주님의 능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탈리타 쿰!”, “일어나라!”는 주님의 말씀에 소녀가 일어나 걸어 다녔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믿고 신뢰하면 이런 기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은 순명을 낳고 순명은 기적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기적을 쫓아다니지만 기적은 믿음을 지닌 삶의 자리에 있습니다.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드시기 빕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소녀는 육으로뿐 아니라 영으로도 살아났습니다. 이제 그는 새로운 음식을 먹어야 합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4,4).라고 한 하느님의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육적인 음식을 먹던 그는 죽었습니다. 이제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말씀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6,51.) 신앙인이 먹어야 할 음식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성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자주 읽고 미사 참례를 더 많이, 더 자주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숙된 믿음의 사람으로 세상을 밝히 빛내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천상의 것들을 추구하는 신앙인이 되어 기적을 낳고 기적을 전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절망 - 희망 - 구원>
-송영진신부-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희망이신 분’입니다.
‘구원’은 절망 상태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일이고,
‘믿음’과 ‘희망’은 그 구원을 얻는 방법입니다.
(‘절망’은 ‘믿음’과 ‘희망’이 하나도 없는 상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로마 8,24).”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구원을 주신다는 것을 믿고 예수님께 희망을 두는 사람은
이미 구원을 받은 것과 같습니다.
(‘믿음’과 ‘희망’은 구원의 시작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절망 상태에 있던 사람이 예수님 덕분에 그 절망에서 해방된 이야기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구원’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이사야서를 인용해서 예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20-21).”
(하혈하던 여자를 ‘부러진 갈대’로,
야이로의 딸을 ‘연기 나는 심지’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끝났다.” 라고 최종적으로 선고하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나는 끝났다.” 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모든 일을 끝내는 권한은 예수님(하느님)에게만 있습니다.
“...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숱한 고생을 하며 많은 의사의 손에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그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과연 곧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마르 5,25-29).”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라는
말은, 그 여자가 죽음과도 같은 끔찍한 절망 상태에 빠져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인간 세상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라는 말은,
누군가가 그 여자에게 가서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했음을 나타냅니다.
(“포기하지 마라. 예수님이라는 분이 병을 잘 고치신다고 한다.
예수님께 가서 간청해 보아라.”)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것은 ‘희망의 시작’이고,
예수님에게로 간 것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희망은 믿음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믿음 없는 희망과 희망 없는 믿음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라는 여자의 생각은
그의 믿음과 간절함을 나타냅니다.
<여자의 병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이 고쳐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믿어야 할 대상은 예수님의 옷이 아니라 예수님입니다.
만일에 이 이야기를 읽고서 “여자의 병은 예수님의 옷이 고쳐 주었다.” 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미신이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아직 말씀하고 계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는,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말하는 것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5-36)”
“그리고 아이의 손을 잡으시고 말씀하셨다. ‘탈리타 쿰!’ 이는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러자 소녀가 곧바로 일어서서 걸어 다녔다. 소녀의 나이는 열두 살이었다.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마르 5,41-42).”
회당장 야이로가 딸을 고쳐 달라고 예수님께 청할 때에는(마르 5,23)
그는 병을 고치는 ‘예수님의 권능’을 믿고 있었고,
딸이 건강하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완전히 절망했습니다.
다 끝나버렸다고 생각하면 희망도 사라집니다.
딸이 죽어버렸으니 예수님의 ‘치유의 권능’에 대한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리고 야이로는 아직은 ‘죽은 사람을 살리는 예수님의 권능과 권한’을
모르고 있었고, 그 권능과 권한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앞의 이야기와는 다르게 믿음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생명의 주님’으로 계시하신 이야기입니다.
(야이로라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어서 은총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당신의 신원과 권능과 권한을 드러내신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또 그 소녀가 예수님을 알고 있었는지, 또 예수님을 믿고 있었는지,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 소녀가 아니라, 예수님과 야이로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절망하지 말고 나를 믿어라.” 라는 뜻입니다.
이 이야기는 여러 가지 점에서 라자로를 살리신 일과 사실상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라자로가 앓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곧바로 라자로에게
가신 것이 아니라 일부러 이틀 뒤에 가셨습니다(요한 11,6).
그래서 라자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라자로의 병을 고쳐 주실 것이라고 믿었지만,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실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리신 일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님’으로 당신을 계시하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집으로 곧바로 가셨다면
소녀가 죽기 전에 도착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도중에 하혈하는 여자를 만나셨고, 그 사이에 소녀가 죽었습니다.
야이로는 딸이 죽기 전에는 딸의 병이 낫기를 희망했지만,
그 딸이 죽은 다음에는 모든 희망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은, 야이로를 절망에서 건져 주신 일이고,
그에게 영원한 새 희망을 주신 일입니다.
<라자로를 살리시는 것을 보고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요한 11,45).
그런데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이야기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말은 없고, 몹시 놀라서 넋을 잃었다는 말만 있습니다.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란 그 사람들이 놀라기만 하고 그것으로 그쳤는지,
아니면 예수님을 믿었는지, 그것은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로 남아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주어진 질문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주님으로 믿겠느냐?”>

연중 제13주일 : 나해
-조욱현신부-
오늘의 주제는, “생명”이란 하느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며, 이제 그 생명과 구원을 예수께서 구체적으로 베푸신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오직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이는 영적이든 육체적이든 “죽음”과는 반대 개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항상 영원히 살아 계신 하느님께 속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인간은 본래, 하느님의 모습으로 창조되었고(창세 1,26), 하느님의 본성을 본떠서 만드신(지혜 2,23) 존재이기 때문에 불멸한 존재로 영원히 살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죽음이란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드신 분이 아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 기적들은 예수님을 우리 인간의 생명을 위해 완전히 함께하시는 분으로 나타나고 있다.
복음: 마르 5,21-43: 소녀야, 일어나라!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의 사화가 함께 소개되고 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소생과 12년간 하혈하던 부인의 병을 고친 이야기이다. 이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가르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죽음과 그 죽음의 일반적 전제조건인 병을 지배하는 예수님의 권위와 그 기적의 근거가 되는 믿음을 북돋우고 있다는 것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마르코 복음사가는 이 사화를 통해서 예수께서 죽음을 지배하시는 분임을 말하고자 하고 있다.
회당장이 예수께, “제 어린 딸이 죽게 되었습니다.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 아이가 병이 나아 다시 살게 해 주십시오.”(23절) 하고 청한다. 그러나 하혈하는 여인을 만났기 때문에 그 딸의 상황이 치명적인 상황이 되고 만다. “따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스승님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35절)하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집에 가셔서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에게 “어찌하여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저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39절)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우선은 그 아이의 죽음이 거짓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극복될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것이 주님의 부활과 같이 다른 삶으로 옮아가는 순간으로 보는 그리스도교적 사상이 들어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때(40절) 예수님의 권능이 나타난다. “탈리타 쿰”(41절),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고 하시며 소녀를 다시 살리셨고, 사람들은 “몹시 놀라 넋을 잃었다.”(42절) 한다. 이 놀라움은 예수님의 부활 후 무덤 앞에서의 여인들의 놀라움과 같이 표현되는 것으로 주님의 부활과 연결되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예수께서 죽음에 대한 권능을 지니신 분이라는 것을 볼 때, 병에 대한 그분의 권능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참으로 그분의 생명에 대한 능력은 예수님 자신도 조절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이는 힘으로 옮아가듯이 퍼져나가는 것으로 나타난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절). 이미 여인은 기적을 체험하였다. 바로 생명이 죽음을 지배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만들지 않으셨고 산 이들의 멸망을 기뻐하지 않으시기”(지혜 1,13) 때문이다.
이 기적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또 알 수 있는 것은 믿음에 대한 북돋움이다. 이 믿음은 더 많은 시험을 당함으로써 고통스럽지만, 그 안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딸이 죽은 것을 알고 낙담하고 있을지 모르는 회당장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36절) 하신다. 아마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그 순간에 우리의 믿음이 강해지고 굳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하혈하던 여인도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셨을 때, 어쩌면 자기 자신의 잘못을 캐는 듯한 말씀을 하셨을 때 두려워하였다고 한다(33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위기에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나게 되며, 그분과 참된 친교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신비를 알게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알려주고 있다. “그분께서는 부유하시면서도 여러분을 위하여 가난하게 되시어, 여러분이 그 가난으로 부유하게 되도록 하셨습니다.”(2코린 8,9). 그분이 하느님으로서 가난하게 되신 것이 바로 우리가 가장 가치 있는 부, 생명에 참여시키기 위한 것임을 우리가 안다면, 바로 우리의 현세적인 부를, 그것을 필요로 하는 형제들과 나누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닮는 일임을 바오로 사도는 강조하고 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시기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으신(필립 2,7) 그분을 알아볼 수 있을 때, 그분은 우리 생활의 모든 순간, 모든 행동에 새로운 의미를 주실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죽음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모든 인간이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기를 원하시고 또 항상 초대해 주신다. 여기에 응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몫이다. 우리의 믿음을 더 강하게, 굳게 가지도록 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그분과 인격적인 만남을 살려고 할 때, 그렇게 살 수 있으며, 생명 안에 살아갈 수 있다. 그것이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다.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마태 8, 10)
-한상우신부-
믿음은
아픔을
외면하지
않는다.
믿음이란
믿는 것의
뜨거운
실천이다.
진실로
주님을 믿는
우리들 삶이
참된 믿음의
삶이다.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것이
믿음의 삶이다.
믿음과 실천
이 모두는 사랑을
한뿌리로
두고있다.
믿음으로
소통하고
사랑으로
삶은 치유된다.
진실한 믿음은
서로를 살린다.
믿음이 열리는
순간이 아픔을
치유하는 치유의
순간이다.
백인대장은
믿었다.
믿는 사람이
신앙인이다.
가장 아픈
곳에서 믿음은
다시 밝아온다.
믿음으로
삶을 다시
건져 올리시는
주님이시다.
우리의 삶과
믿음은
분리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향한
믿음을 만나고
싶어 하신다.
삶을 다시
살리는
믿음이다.
믿음으로
이 순간도
걸어가고 있는
우리들 삶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생명의 주인이신 주님을 보여주십니다.
"정녕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불멸의 존재로 창조하시고, 당신 본성의 모습에 따라 인간을 만드셨다."(지혜 2,23)
제1독서는 본래 인간이 어떤 존재였는지 이야기합니다. 악마의 시기로 세상에 죽음이 들어오기 전에 인간은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 받은 존재였지요. 그리고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어 하느님을 닮아가도록 섭리하신 존재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영원한 생명에서 제외되어 질병과 죽음의 고통을 겪는 인류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르 5,28)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며 고통을 겪던 한 여인이 군중 가운데 섞여 예수님 곁으로 다가갑니다. 그녀는 치유를 위해 온갖 노력을 했으나 더 나빠지기만 하는 중이었지요. 그녀에게 예수님은 마지막 희망이었을 겁니다.
그녀의 마음 안에 떠오른 이 강한 믿음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그분의 능력에 대한 소문 덕일 수도 있고 오랜 갈망이 낳은 직관 덕일 수도 있을 겁니다. 중요한 건 그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실제로 몸을 움직여 예수님 뒤로 다가갔다는 겁니다.
피를 흘리는 자체를 부정하게 보는 관습의 지배를 받는 현실에서 그런 병을 앓는 여성이 유다인 남성에게 다가가 옷에 손을 댄다는 것은 어지간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힘든 일이지요. 행여 몹시 수치스럽고 난처한 반격을 당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녀는 그만큼 절박했고 그만큼 희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리고 병에서 벗어나 건강해져라."(마르 5,34)
여인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사려 깊고 다정한지요! 병이 나은 것을 확인해 주시는 것에 더해, 이 순간까지 겪은 그녀의 조마조마했던 마음까지 살펴 주십니다. 그녀는 몸과 마음 모두 치유받고 온전해집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여라."(마르 5,36)
하혈하는 여인의 일로 잠시 지체하는 사이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는 전갈이 오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절망에 빠지려는 회당장의 믿음과 희망을 북돋워주십니다. 그와 함께 가기로 한 이상 딸의 생명은 이미 예수님의 손에 들어 있으니, 회당장은 믿기만 하면 됩니다.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마르 5,41)
예수님께서 소녀를 일으키십니다. 훗날 아버지께서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을 일으키신 바로 그 능력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넘어설 수 없는 죽음이란 극점에서 말씀으로 죽은 이를 일으키신 그 힘은 그분이 하느님이심을 증명합니다.
결국 생명은 하느님의 일입니다. 인간의 의학과 과학 기술이 이에 협력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생명을 온전히 지배할 수 없음은 자명하지요. 그렇다면 생명에 대한 하느님의 주권을 믿는 우리는 무엇으로 그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요?
제2독서에 드러난 사도 바오로의 권고에서 그 답을 찾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풍요가 그들의 궁핍을 채워 주어 나중에는 그들의 풍요가 여러분의 궁핍을 채워 준다면, 균형을 이루게 됩니다."(2코린 8,14)
우리는 이처럼 상호적 기여를 통해 서로를 지탱합니다. 그저 평범하고 부족할 뿐인 우리가 생명을 일으키는 주님의 능력에 함께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나눔과 헌신이지요.
소유와 시간과 힘과 마음을 나누는 것은 자신이 누리는 생명을 덜어내어 조금 더 채워져야 하는 부분을 살리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언젠가 우리에게 되돌아와 결국 모두를 풍요롭게 할 에너지로 남습니다. 이 주고받음의 신비를 사도는 "균형"이라 이야기하고, 제1독서에서 지혜서 저자는 "정의"(지혜 1,15)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라!" 하고 힘차게 격려하시고 또 "평안히 가거라." 하고 다정히 속삭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 그리고 영원히 살게 하기 위해 오신 "생명" 자체인 분이십니다.
주님을 만지기 위해 있는 힘껏 그분 곁으로 다가가 손을 뻗기를, 그리고 우리가 받은 생명을 품고 지금 결핍 중에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웃들에게도 손을 길게 뻗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 안에서 우리 모두 균형을 이루고,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가 실현되어 갈 것입니다.

말씀 나누기 - 연중 제13주일-우리는 어떤 자입니까?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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