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2021년 6월 22일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마태오 7,6.12-14)
Enter through the narrow gat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이 가득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선민의식은 자연스럽게 ‘이스라엘=하느님 백성’이라는 도식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지닌 민족의 정체성과 민족주의적 사고는 강한 배타성을 지닙니다. 게다가 자신들이 하느님의 백성이듯이 하느님께서는 자신들만의 하느님으로 계셔야 한다는 신학적 명제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지닌 선민의식과 강한 정체성은 하느님을 전능하신 창조주며 모든 민족들의 하느님이 아닌, 이스라엘만의 민족 신으로 만들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이런 보수적 신학의 입장을 거부하는 신학도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이 되는 길은 단순하게 혈통으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견해입니다. 중요한 것은 혈통이 아니라, 윤리적 가르침과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충실하게 살아가는 이라면, 누구라도 하느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혈통이 아닌, 윤리 중심의 공동체를 지향하고, 이를 위한 표현으로 시편에서는 “주님, 누가 당신 천막에 머물 수 있습니까?”(시편 15[14],1)라고 노래합니다. 기존의 가르침에서는 하느님의 천막인 주님의 집에 머무는 것은 유다인에게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화답송에서는 의로운 사람, 악의와 불의를 저지르지 않는 사람, 이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라면 성별이나 민족이나 능력을 떠나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하느님 백성이며, 그분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그러한 자격을 얻은 것은 모태 신앙이거나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견진성사를 받아서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의 가르침 안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였다면, 남에게 바라는 그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실천하면서 다시 주님의 장막에 머물 수 있는 신앙인의 특권을 누려 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계적인 부자인 빌 게이츠와 워런 버핏의 롤모델로 알려진 인물이 있습니다. ‘척 피니’(찰스 F. 피니)입니다. 그런데 그는 미국의 한 경제지에 ‘돈만 아는 억만장자’ 1위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즉, 돈밖에 모르는 사람으로 비난받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게 부자면서도 부인과 샌프란시스코의 자그마한 임대아파트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차고 있는 시계는 14,000원짜리 플라스틱 시계이며, 자동차도 집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직원들에게도 이면지를 쓰라고 했고, 소송에 휘말렸을 때 변호사 수임료마저 깎으려 했으며, 경제인 모임을 가면 계산하지 않으려고 일찍 자리를 뜨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렇게 사니 구두쇠라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러던 중 1997년 그가 운영하는 DFS면세점을 매각하는 과정에서 법정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고, 그로 인해 회계장부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미국 전역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15년 동안 2,900회 지출된 금액은 무려 40억 달러(4조 4천억 원)였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재산을 빼돌렸을 것으로 추측했지만 곧 진실이 드러났습니다. 모두 기부한 것이었습니다. 악랄하게 돈을 벌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던 것입니다.
그의 돈은 모두 가치 있는 곳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돈을 사랑했고 늘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돈에 끌려가는 사람이 아니라, 돈이 자신을 쫓아올 수 있도록 산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죽어서 하는 기부 보다 살아서 하는 기부가 더욱 즐겁다.”
이런 삶이 과연 쉽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부분 자신의 안일함을 먼저 챙기면서 살아갑니다. 돈을 가치 있는 곳에 쓰기보다는 나를 위해 쓰는데 먼저 생각합니다. 이렇게 남들이 가지 않는 가치 있는 길을 향해 가는 사람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닐까요?
이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하십니다. 이 문은 너무나 좁고, 이 문으로 가는 길은 비좁아서 찾아드는 사람이 적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좁고 비좁아도 이 길을 걸어가서 좁은 문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들처럼’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신의 사랑 실천 그 자체를 먼저 생각하기보다, 남들이 어떻게 하는지를 살펴보면서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문으로 또 널찍한 길을 가고 있습니다. 이 길을 예수님께서는 ‘멸망으로 이끄는 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길로 또 어떤 문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보통의 ‘남들’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고유한 ‘나’처럼 살아야 합니다. 특히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면서 말이지요.


미의 상징으로 불리는 클레오파트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의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는 옥타비아누스의 로마 해군에 대패하게 됩니다. 이제 죽음밖에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다양한 독약의 효능을 시험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아름다운 얼굴을 유지한 채 생을 마감할 수 있을지를 사형수와 노예를 시험 대상으로 삼아서 인체 실험을 계속했습니다. 그 결과 맹독성 코브라를 선택합니다. 사형수와 노예를 시험해 보니 전혀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한 표징을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 역시 맹독성 코브라에 물려 사망합니다.
클레오파트라는 과연 고통 없이 생을 마감했을까요? 현대 의학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코브라의 신경독은 물리는 즉시 눈꺼풀 등의 얼굴 근육에 이상이 생기게 해서 몽롱하게 졸린 듯한 표정을 짓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속이 울렁거리고 극심한 통증과 호흡곤란으로 고통스러운데도, 근육이 마비되어 어떤 표정도 지을 수도 없고 말도 할 수 없고 고통으로 몸부림칠 수도 없어 최고의 끔찍한 고통을 겪으며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어떤 죽음도 편안하지 않습니다.

내게 다른 사람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상처가 있다면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는 타 종교나 심지어 종교가 없는 사람들에게까지도 널리 알려진 관계의 법칙인 ‘황금률’이 나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이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황금률을 지킬 수 있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으셨을 것입니다. 남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남들에게 해 주려면 반드시 예수님의 개입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며칠 전 이런 뉴스가 났습니다. 아파트 주차장에서 전기차 소유주들이 몰래 자기 차에만 밤새 코드를 꽂아놓고 충전을 시킨다는 것입니다. 전기세는 온 아파트 주민이 다 내는데 자기만 더 전기를 끌어쓰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자가 물었더니 자신은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어버렸습니다.
이는 분명 내가 다른 이들에게 받기를 원하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해 주는 모습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일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사람과 자연, 사람과 하느님 사이에서도 일어납니다. 자신이 해 주는 것보다 당연히 자신이 더 받아야 한다는 심리가 작용한 것입니다.
이를 ‘피해의식’이라 합니다. 피해의식이 있으면 우리는 황금률을 지킬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내가 황금률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면 어떤 피해의식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습니다.
뉴스의 그 사람은 분명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돈에 대한 상처를 받았음이 틀림없습니다. 가난한 집에 태어났다든지 형제간에 차별을 받았다든지 사랑이 부족한 어른 밑에서 자랐을 것입니다. 당연히 받아야 했던 사랑을 받지 못한 것이 상처가 되어 그 상처를 세상으로부터 치유하려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도 다 피해의식에 시달립니다. 그러니 자신의 피해의식을 세상에서 충족하려 할 때는 관계만 악화할 뿐입니다. 누가 같은 전기료를 부담하면서 전기차 가진 사람만 더 사용하는 것을 좋아할 수 있겠습니까? 치유되지 않은 피해의식 때문에 세상도 분열되고 자연도 파괴됩니다.
피해의식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때 받았던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치유하려면 세상 사람들에게 또 상처를 주어야 합니다. 그러니 무한한 사랑의 원천이신 그리스도로부터 치유하는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황금률도 내가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는 것입니다.
‘룸’(Room: 2015)은 실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17살 때 닉이라는 남자에게 속아 7년 동안 작은 헛간에 갇혀 살아야 했던 조이의 이야기입니다.
닉은 가끔 들어와 최소한의 음식과 생필품만을 주고 조이를 감금했습니다. 그리고 잭이라는 아이가 태어납니다. 잭이 5살 되었을 때, 닉은 직장을 잃습니다. 조금씩 주던 배급과 전기도 제대로 공급해 줄 수 없는 형편이 된 것입니다.
조이는 그곳으로부터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처음엔 잭이 독감에 걸린 것처럼 연기했지만 닉은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어 잭에게 죽은 시늉을 하라고 연습시켜 잭을 탈출시킵니다. 잭은 다행히 탈출에 성공하고 결국 엄마 조이를 구하고 닉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나 사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조이는 7년 동안 자신이 그렇게 고생하며 있었는데 편안하게 살면서 아버지와 이혼하고 다른 남자와 재혼해 살고 있던 어머니에 대한 불만, 자신의 딸을 납치해 7년 동안 감금한 닉의 아들인 잭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는 아버지, 자신의 이야기로 흥미만 유발하려는 언론들, 모두가 조이에게 감당할 수 없는 분노를 솟구치게 했습니다. 결국, 조이는 스스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합니다.
잭은 자신을 그런 환경에서 낳고 또 자신을 버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엄마 조이가 밉습니다. 그래도 엄마는 엄마이기에 잭은 병원에 있는 엄마에게 힘을 주려 합니다. 자신의 힘이라며 절대 자르지 않고 길렀던 긴 머리를 잘라 엄마에게 보낸 것입니다. 조이는 잭도 자신과 같은 피해자인데 엄마인 자신을 위로해주고 있음을 깨닫고는 다시 엄마로서 살아보려 합니다.
마지막 장면은 잭이 엄마와 함께 갇혀있었던 헛간을 보고 싶다고 하여 그 헛간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는 장면입니다. 겁이 나서 잘 들어오려 하지 않는 엄마와는 다르게 잭은 자신이 갇혀있던 작은 헛간의 이곳저곳과 마지막 인사를 합니다. 이는 피해의식과의 작별을 의미합니다.
엄마 조이는 몸은 탈출했지만 피해의식으로부터는 탈출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같은 피해를 본 아들 잭으로부터 위로와 힘을 얻어 그녀 또한 자신의 상처와 대면하고 그저 하나의 기억으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영화에서 조이는 이러저러한 상처로 피해의식을 지니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대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 때문에 받지 않아도 되는 피해를 당하셨음에도 또 우리에게 당신 소중한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계십니다.
사랑으로 받은 상처는 사랑으로만 치유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같은 무한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황금률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과거의 상처를 그저 좋은, 더 나아가 감사한 기억으로 만들어줄 수 있는 분은 무한한 사랑을 지니신 하느님, 그리고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신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그분의 사랑으로 우리 상처가 치유되어야 우리도 이웃들에게 요구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렇게 황금률이 완성됩니다.
자라오면서 절대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절대 즐겁게 이야기하지 못할 상처의 기억을 남겨놓지 맙시다. 그래야 피해의식 없이 타인이 나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나도 타인에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충족되어 모든 부끄럽고 상처가 된 기억들에 인사합시다. 그리고 갇혀있던 그 방을 나옵시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가죽옷을 입기 전까지는 서로를 비난합니다. 그러나 입고 나서는 그럴 필요가 없어 서로를 존중할 것입니다. 하늘 나라는 황금률이 그리스도의 수난 덕분으로 지켜지는 그런 곳입니다.

-조재형신부-
지난 5월 21일 ‘한미정상회담’이 있었습니다. 양국정상은 회담을 마치고 공식기자회견을 하였습니다. 한국의 문재인 대통령에게 기자가 이렇게 질문하였습니다. “백신과 관련해서 미국으로부터 얻은 것이 많이 있습니까?” 한국의 대통령은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 “한국은 미국으로부터 백신을 공급받는 대신에 미국의 백신을 한국에서 생산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생산된 백신은 필요한 국가에 공급 될 것입니다. 한국은 백신을 공급하는 중심지가 될 것입니다.” 한국 대통령의 답변을 들었던 미국의 바이든 대통령은 밝게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가 문재인 대통령을 좋아하는 이유는 한국만을 위한 백신을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백신을 공급하는 국가가 되려하기 때문입니다. 눈앞의 작은 이익을 보지 않고, 인류의 건강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양국의 대통령이 독실한 가톨릭신자라는 것도 좋았지만, 양국 정상의 생각이 가톨릭 적이라서 더 좋았습니다.
작은 일이지만 저도 기분 좋았던 일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1981년입니다. 여름방학이었습니다. 친구들과 함께 서부역에서 기차를 타고 문산으로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기차 시간은 다 되었는데 2명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남아서 표를 주어야 했습니다. 제가 남겠다고 했습니다. 늦게 도착한 친구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문산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조금 늦게 갔지만 좋은 점도 있었습니다.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텐트를 쳐 놓았고, 저녁 준비도 해 놓았습니다. 2021년입니다. 1월이었습니다. 신부님들과 여행을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숙소에 방은 5개였고, 인원은 6명이었습니다. 제가 거실에서 자겠다고 했고, 침랑을 가져갔습니다. 거실은 벽난로가 있어서 따듯했습니다. 냉장고도 거실에 있어서 물을 마시기도 편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이 있어서 아침에 산보가기도 편했습니다. 방을 양보한다고 했지만 얻는 것이 더 많았습니다.
2010년입니다. 아프리카 수단에서 선교하였던 이태석 요한 신부님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의사였던 신부님은 선교지에서 아픈 사람을 돌보았습니다. 나환자들의 일그러진 발에 맞추어서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아이들을 위해서 음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음악을 통해서 기쁨을 되찾았습니다.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아프리카로 돌아가지 못하고 하느님의 품으로 갔지만 신부님의 제자들은 10년 뒤에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이 못다 이룬 꿈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면 우리가 가진 것이 십 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가진 것 하나를 열로 나누었기에 그것이 ‘천’이나 ‘만’으로 부푼다는 하늘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이 행복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행복 정석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이태석 신부님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였습니다.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모세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집트 땅에서 이끌어 낸 업적을 쌓지는 않았습니다. 다윗처럼 전쟁에서 많은 승리를 거두지도 않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처럼 굳센 신념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않았습니다. 베드로 사도처럼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따뜻한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마음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모두 한 형제이고, 한 가족인데 서로를 향해서 독한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로를 믿지 못하고, 포기와 양보는 패배라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만 이렇게 복잡하게 엉킨 문제들을 풀 수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명확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좁은 문은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눔과 희생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 사람을 가졌는가!’라는 글을 우리에게 남겨 주셨습니다. 무한 경쟁의 시대에 누군가를 위해서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친구를 위해서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내어주는 사람은 어둠 속에 빛나는 별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감사와 친절입니다. 주변을 보면 잃어버린 지갑을 찾아서 주인에게 돌려주는 분들이 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간직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 분들도 있습니다.
좁은 문은 눈에 보이는 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나눔과 희생, 배려와 양보, 감사와 친절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간다는 것!
-양승국신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창고들을 정리하면서 폐기 처분할 물건들을 과감하게 정리하였지만, 때로 애매한 물건들도 많았습니다. 조만간 어디엔가 쓰일거야, 하는 마음에 하나 둘 제 사무실에 쌓아두었더니, 한 달 만에 제 사무실이 잡동사니로 가득한 창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출입문도 겨우 열고 들어가야 하고, 책상까지 가려면 조심조심 걸어가야 합니다. 가끔씩 책상 앞에 앉으면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요즘 모으는 것도 필요하지만 처분하는 것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고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때로 잊어버리는 것도 얼마나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제 사무실도 갑갑하고 복잡하지만, 때로 제 영혼이나 내면의 상태도 그에 못지않게 답답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 제게 오늘 예수님께서 뼈 때리는 한 말씀을 건네시는군요.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넓적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오 복음 7장 13~14절)
하느님 나라의 문, 즉 생명의 문은 넓지 않고 좁다고 하십니다. 육신의 뱃살도 줄여야겠지만 영혼의 뱃살도 과감하게 줄여야겠습니다. 현세적 소유도 줄여야겠지만 다양한 걱정거리, 부정적인 기억들도 줄여야겠습니다.
나이를 먹어갈수록, 신앙생활의 연륜이 깊어질수록 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이 점점 깃털처럼 가벼워졌으면 좋겠습니다. 그 어디에도 묶이거나 매이지 않는 한 줄기 바람처럼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제게 있어 ‘좁은 문’은 어떤 문일까? 생각해봅니다. 한적하고 안전한 곳에서, 매일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축복의 장소에 살아가면서, 맡겨진 일에 충실하고, 주어진 시간에 기도하고, 기쁘게 살고...그리 어려운 길이 아닌 것 같지만, 쉬운 길만도 결코 아닌 것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평범한 일상을 비범하게 살아가는 것! 매일의 작은 의무들에 가치를 부여하고 충실하게, 정성껏 이행하는 것! 가장 가까이 살아가는 가장 작은 사람들을 소중히 여기고 예의를 갖춰 대하는 것!
매일 우리 앞에 펼쳐지는 좁고 가파르고 불편한 길을 불평불만하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는 것! 나와 달라도 너무 다른 그 역시 주님의 모상이며, 주님으로부터 축복받고 사랑받는 사람임을 기억하고 잘 견뎌내는 것! 그것이 구원과 생명의 좁은 길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생명과 구원으로 이르는 길이 좁고, 불편한지, 그래서 그리로 찾아드는 자들이 작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살짝 걱정되는 분들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 죄가 하늘을 찌르고, 구원받기에 합당치 않으며, 구원 받을 자격조차 없지만, 주님의 자비는 우리의 죄와 부당함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를 빼앗아 당신 등에 짊어지셨기 때문입니다.
죄라는 것! 세상 모든 사람들이 피할 수 없는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의 은총 역시 보편적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구원의 보편성이 우리의 죄를 모두 씻어주실 것이며 덮어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화 강생으로 인해 구원의 길, 구원의 문이 예수님 자신이라는 것이 명확해졌습니다. 따라서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을 찾는 일이 너무 쉬워졌습니다. 그 누구라도 예수님을 찾고, 그분을 향해 나아가고, 그분을 주님으로 고백한다면 100퍼센트 구원입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건너시는 말씀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마태 7,1)는 말씀이요,
또 하나는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더 강력하지만 활자화 되어 있지 않는 세 번째 말씀이 있습니다. 곧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라는 말씀으로, <루가복음>의 병행구절에 나옵니다.
사실, 우리가 심판하는 데는 그렇게 심판하게 하는 기준이 되는 준거 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복음의 정신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선입관이나 편견 등 고정관념이라면, 그것이 바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우리 눈의 ‘들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그런데 우리 눈의 ‘들보’를 어떻게 빼낼 수 있을까? 그것은 우리 눈에 빛을 밝혀드는 일입니다. 곧 우리 안에 심어진 사랑의 빛을 밝히는 것입니다. 어둠을 몰아내는 것은 본질적으로 빛으로부터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비추는 빛으로 상대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호의’로 상대를 보는 것입니다. 그를 ‘위하는 마음’, ‘축복하는 마음’,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곧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결국, 심판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단지 심판하지 않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선을 베푸는 행위 안에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말합니다. “자비는 심판을 이깁니다.”(야고 2,12-13)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심판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받을 것이다.”(마태 7,2)
이는 우리가 남에게 하는 것이 곧 자신에게 하는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타인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신을 심판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심판은 ‘자기 얼굴에 침 뱉기’가 되고 말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남을 심판하는 사람이여,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
남을 심판하는 바로 그것으로 자신을 단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로마 2,3)
그러기에 남에게 처신하기를 자신에게 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하느님께 하듯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병행구절인 <루가복음>에서는 이렇게 덧붙이십니다.
“용서하여라. 그러면 너희도 용서받을 것이다.”(루가 6,37)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단지 “남을 심판하지 말라”는 차원을 너머서, 오히려 “남에게 선을 베풀라”는 적극적인 요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판을 넘어서는 바로 이 용서야말로 심판을 벗어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하오니, 주님!
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게 하소서!
제 눈에서 보지 못하게 하는 들보를 빼내 주소서!
보지 못하고 있는 제 자신을 보게 하시고
형제의 눈에서 티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보게 하소서!
저를 보시는 당신을 보게 하소서!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마태 7,5)
주님!
눈을 뜨고도 자신을 보지 못하는 저는 눈먼 이입니다.
보지 못하면서, 보는 척 하지 말게 하소서!
보지 못하면서, 타인을 인도하지는 더더욱 말게 하소서!
제 눈에서 들보를 빼내주소서.
보는 것을 안다고 여기는 것이 제게는 들보이니.
제가 모른다는 것을 보게 하소서! 아멘.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라
-반영억신부-
사람은 살아가면서 기대와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바라는 바가 있고, 자식이 부모에게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부부간에는 물론 이웃간에도 친구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대와 바람에 만족하고 기쁨을 갖는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다고 느낄 때가 훨씬 많습니다. 내가 이만큼 했으면 너는 이 정도는 따라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합니다. 지극히 주관적으로, 자기는 잘하고 있는데 상대는 그에 못 미친다고 생각하기 일쑤입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상처를 만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대접받기를 원한다면 남을 똑같이 대접해 주어야 합니다. 사실 내가 받는 고통이나 기쁨은 내가 남에게 어떻게 해줘야 할 것인지를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한정된 사람을 뛰어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 한정된 테두리를 극복하도록 촉구하십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루가6,32).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시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많은 사람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속의 온갖 유혹을 거슬러 살려면 문이 좁고 길이 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소명입니다. 밑지고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옳은 길과 옳은 문을 찾는 수고는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나의 기대와 바람만큼 걸맞은 수고와 땀을 소홀히 하지 않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길이라 해도 그 길이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서둘러 그 방향을 바꿔야 할 것입니다. 험하고 힘든 고된 길이라 하더라도 그 길이 천상과 연결되어 있다면 군소리 없이 걸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매 순간이 세상을 감당하는 도전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좁은 문>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마태 7,6).”
이 말씀은, 15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자녀들의 빵을 집어 강아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좋지 않다(마태 15,26).”
‘개들, 돼지들, 강아지들’은 우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거룩한 것, 진주, 자녀들의 빵’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해석됩니다.
(또는 하느님의 은총을 전달해 주는
성전, 성경, 성사, 전례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을 구원의 대상에서
완전히 배제하는 말씀은 아닙니다.
구원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상 숭배자들은 구원받기를 바란다면 먼저 우상 숭배를 버려야 합니다.
(미신을 믿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일에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신앙인이 미신 행위를 하거나
그런 일에 가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자녀’ 라는 고귀한 신분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개나 돼지로 전락시키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리석기만 한 일이 아니라, 십계명 제1계명을 어기는 대죄입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말씀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라는 계명에 연결됩니다.
‘너 자신처럼’이라는 말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듯이’로 해석할 수도 있고,
‘너 자신이기 때문에’로 해석할 수도 있는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일에는 무슨 이유도 없고, 조건도 없습니다.
이웃 사랑 실천은 바로 그렇게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이웃은 하느님 앞에서 ‘남’이 아니라 ‘나’입니다.
(한 가족이고 한 몸이라는 뜻입니다.)
이웃의 아픔과 슬픔은 곧 나의 아픔이고 슬픔입니다.
그러니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겪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겪습니다.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1코린 12,26).”
<신앙인은 구원받기를 희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혼자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함께......>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마태 7,13-14).”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를 꾸짖으시면서 하신 말씀에 연결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말씀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태 16,23)”
예수님께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깜짝 놀라서 예수님을 말렸습니다(마태 16,22).
부활 예고는 흘려듣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는 말씀만 듣고서 놀란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느님의 일’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일’은 앞일은 생각하지 않고 지금 당장 편안하게 지내는 일입니다.
인간적인 눈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가시려는 십자가의 길은
너무나도 좁고 험한 길이고, 그 길 끝에 있는 문은 ‘좁은 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을 방해하려고(막으려고)
예수님을 말린 것은 아닙니다.
“왜 꼭 그 길로만 가셔야 하는가? 좀 더 쉽고 편한 다른 길은 없는가?” 라는
생각 때문에 말린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은 단순하고 명확합니다.
“이 길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예수님께서 가시는 십자가의 길 외에 다른 길은 모두
‘사람들을 멸망으로 이끄는 길’입니다.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예수님 말씀은, 베드로 사도가 사탄이라는
뜻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사탄은 언제나 항상 “쉽고 편한 길로 가라. 왜 굳이 어렵고 힘든 길로 가는가?”
라고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는 “어느 길로 가든지 도착하는 곳은 같다.” 라는
유혹도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은 백 퍼센트 거짓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6).”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씀에는 “다른 길은 없다.”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내게서 물러가라.” 라는 말씀은, “내게서 떠나라.”가 아니라,
“내 뒤로 가라.”, 즉 “제자의 본분을 지켜라.”입니다.
제자는(신앙인은) 예수님께서 가시는 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우리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좁은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좁은 문’과 ‘좁은 길’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로 그 문이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기
때문이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 문과 길이 좁든지 넓든지 간에 그것은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우리를 “멸망으로 이끄는 문과 길인가?”,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인가?”
그것만이 중요하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걸어가는 길이라고 해도, 또 좀 더 편하고 쉬운 길로
보인다고 해도, 그 길이 멸망을 향하는 길이라면
그 길을 걸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말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과 길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어렵고 힘들고 좁은 문과 길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신앙생활이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항상
어렵고 힘든 생활이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실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생활이 가장 편안한 생활이고,
다른 생활에서는 얻을 수 없는 참된 기쁨을 얻는 생활입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고난을 겪을 때도 많고, 많은 것을 참고 견뎌야
할 때도 많지만, 그 고난과 시련은 믿음과 희망으로 감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과 시련이 우리의 기쁨을 빼앗지는 못합니다(요한 16,22).>

복음: 마태 7,6.12-14: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조욱현신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6절) 여기서 ‘거룩한 것’이란 우리가 함부로 쓰거나 망가뜨리면 불경한 짓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범하려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불경의 죄를 지은 것이다. ‘진주’는 소중히 여겨야 하는 모든 영적인 것들이다. 거룩한 것이나 진주는 감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조개 안에 담겨있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드러내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 사람들이 명백하게 중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은 오로지 미움과 하찮게 여기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개로 배를 불리고 어떤 이들은 돼지로 배를 불린다. 나는 어떠한 것으로 불리고 있는가?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12절) 예수님께서는 이 한 마디로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을 요약하신다.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란다면, 남이 너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해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동료가 너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도 네 이웃에게 해주라고 하셨다. 이보다 짐스럽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는가? 이보다 공평한 것이 있겠는가?
이제 우리는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이제 다시는 몰랐다고 핑계 대며 피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그렇게도 평범한 것을 실천하면서 사는 모습은 아니다. 복음을 아는 신앙인의 모습은 여기에서 한 단계 더 올라가야 한다. 그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그 사랑의 행위를 통하여 자신이 그만큼 성숙하는 그러한 사랑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13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 11,29) 하셨고 산상설교에서 겸손하고 온유한 이들에 대해 말씀하시지만, 이 편안한 멍에와 이 가벼운 짐을 마다하는 사람이 많아서, 생명으로 이끄는 길은 힘들고 문은 좁게 느껴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 우리는 하느님께서 남이 우리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주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그 짐은 은총이기 때문에 가볍고 기분 좋은 것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런데 어떻게 좁고 비좁은 길을 편하다고 하는 것이냐? 그것은 그것이 문이면서 길이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요한 14,6)라고 하셨다.
그 길이 좁아 보이는 것은 주님의 멍에 곧 계명이 무거워서가 아니라, 기꺼이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이가 적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안에, 곧 성령 안에 머물 수 있을 때만이, 그 계명을 따를 때만이 영원한 행복을 누릴 수 있으며,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아갈 수 있다. 주님의 뜻을 오늘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 13)
-한상우신부-
점점
작아져야 할
우리들 모습이다.
사랑이
깊을수록
낮아지고
작아지시는
좁은 문의
하느님이시다.
자아에 걸려
넘어지는
우리들 삶이다.
비우지 못하는
우리들 삶이다.
우리들
욕심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작아지고
작아지면
드디어 주님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좁은 문이란
자아중심이 아닌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복음의 삶이다.
복음의 삶이란
내려놓고
비우고
맡겨드리는
하느님
중심의 삶이다.
중심(中心)이
십자가이다.
좁은 문의
십자가가
구원의
첫시작이다.
관계와
관계 사이에는
십자가라는
좁은 문이 있다.
작아지는
회개(悔改)가
있다.
그분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
우리의 뜻까지
내려놓는
좁은 문의 신비다.
십자가의 신비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가르치시면서 예까지 보여 주십니다.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마태 7,12)
이 가르침은 참 훌륭하고 바람직하지만, 잘 지켜지기는 그리 쉽지 않은 듯합니다. 사람은 대개 남에게 바라는 건 많으면서, 타인에게 무얼 해줄 때는 자기중심성과 이기심이 발동하는지 좀 야박해질 때가 종종 있어 보이니까요.
"내가 왼쪽으로 가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가면 나는 왼쪽으로 가겠다."(창세 13,9)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너무 많아 함께 살기 어려워서 서로 갈라져 나가기로 합니다. 이때 아브람이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지요.
먼저 선택을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기득권이 될 수 있습니다. 비옥하고 물이 넉넉한 좋은 땅을 합법적으로 선점할 기회니까요. 하느님에게서 땅과 후손을 약속 받은 아브람은 어디가 되었든 자기에게 돌아오는 땅이 주님 약속의 땅임을 믿기에 관대히 선취권을 내놓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남에게 바라는 것을 남에게 해 주는 좋은 예가 될 것입니다.
그런데 롯은 "물이 넉넉하여 마치 주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 같"(창세 13,10)은 곳을 선택하고, 아브람은 그가 고른 곳의 반대편으로 나아갑니다. 롯의 선택 기준은 그러나 주님 눈에는 위험하지요. 성경은 풍요를 좇은 그의 영리한 선택이 소돔과 같은 욕망과 쾌락, 이집트와 같은 노예살이의 결과로 이어질 것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마태 7,13)
롯이 자리잡은 소돔은 "악인들, 죄인들의 성읍"이었지요. 그는 당장 눈에 보이는 외적 풍요가 어떤 결과를 잉태하고 있는지 모른 채, "넓은 문, 널찍한 길"을 택하여 나아갑니다. 복음사가는 이를 두고 "멸망으로 이르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다고 하였지요.
자기가 선택한 땅이 아닌, 하느님께서 선택해 주신 땅으로 나아간 아브람은 "네가 보는 땅을 모두 너와 네 후손에게 영원히 주겠다."(창세 13,15)는 축복을 받습니다. 세상에! "보는 땅"이라니요! 발길이 닿은 땅도 아니고 싸워서 점령한 땅도 아닌, 아브람 시야에 들어온, 보는 땅을 주신다는 말씀에서 주님의 무한하신 스케일이 느껴집니다.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마태 7,6)
"거룩한 것, 진주"는 우리 각자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리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진주를 산 상인의 비유에서도 보듯(마태 13,45-46 참조) 모든 것을 걸고 지켜야 하는 영혼의 본질이고 정수일 겁니다.
하느님의 숨을 받아 이 세상에 와 살고 있는 우리가 목숨처럼 소중히 지켜야 할 것이 있다면, 그건 죽을 때 가지고 갈 수 없는 재물이나 현세적 지식, 썩어 없어질 외모가 아닐 겁니다. 무언가 선택을 할 때 (개, 돼지들에게 참 미안한 비유입니다만) 거룩하고 귀한 것을 알아보지 못해 개, 돼지들로 빗대어진 쾌락과 욕망, 허영과 사치들에 자신을 던지지 말라는 뜻이지요.
아무리 삶이 녹록치 않고 제도와 사람들의 이해가 따라오지 못해도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지향, 귀한 꿈을 세상의 바벨탑, 소돔의 널찍한 문으로 밀어넣어서는 안 되지요. 쉽고 넓고 편한 세상의 달콤한 유혹 뒤에는 "멸망"이 감춰져 있습니다.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진주를 아시는 주님께서는 이를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벗님! 나의 선택이 어떤 기준에서 나오는지,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거룩함, 귀한 진주를 잘 간직하며 살아가는지 돌아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목놓아 기다리시는 생명의 좁은 문을 향하는 이들이니까요. 이 길에 서로 동행이 되어 주는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말씀과 함께 우리가 걸어가는 이 길이 생명으로 가는 길임을 굳게 믿습니다. 아멘.

<누가 더 행복할까?>
-김찬선신부-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세 부류의 사람이 있겠습니다.
내가 바라는 대로 나에게 해 주기를 남에게 바라고 요구하는 사람.
오늘 주님 말씀처럼 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남에게 해 주는 사람.
남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이 원하는 대로 해 주기만 하는 사람.
그런데 어떤 사람이 더 행복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더 사랑하는 사람이겠습니까?
당연히 남에게 바라는 사람, 바랄 것이 있는 사람이 불행합니다.
그것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바라는 것이기 때문이고,
만족과 충만의 상태가 행복이듯이 부족의 상태,
부족으로 인해 불만이 있는 상태가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이 아닌 욕망의 상태이지요.
사랑은 너를 채우려는 것이고
욕망은 나를 채우려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니 남에게 바라는 것은 하나도 없고
남이 원하는 것을 오히려 해 주려는 사람은
하느님처럼 완전히 충만하고 행복한 사람이요
완전한 사랑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바라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고
다만 그것을 하느님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거나
인간으로 채우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보통의 사람은 그것을 사람으로
그것도 가까운 사람으로 채우려 합니다.
이것이 다른 사람에게 불만이 없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불만이 있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런 우리에게 주님은
내게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십니다.
사랑도 받고 사랑도 하라는 얘기이고,
바라는 그대로 해 주라는 것은 그 주고 받음이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라는 그대로 해 주는 사람이 드물고
바라는 것 없이 해 주기만 하는 사람은 더 드물어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고 하시며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실로 생명 의지와 행복 의지가 없으면 욕망대로 살고,
사랑도 받으려고만 들지 하려고 들지 않을 우리이니
오늘 주님 말씀에 자극을 받는 우리라면 이제
생명 의지와 행복 의지가 사랑 의지를 견인토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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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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