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6. 16. 06:34

2021 6 16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그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마태오 6,1-6.16-18)

 

When you give alms,
do not let your left hand know what your right is doing,
so that your almsgiving may be secret.
And your Father who sees in secret will repay you
.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의로움은 의로움이 아니며,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고자 행하는 자선은 자선이 아닐까요? 누구나 다 알아볼 수 있게 자선을 베푼다면, 그것은 거짓된 자선일까요?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며, 단식을 알리면서 하는 단식은 헛된 단식일까요? 이것도 의로움이며 자선이고, 기도이며 단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에 보이게 행한다고 하여 그 의로움이, 자선이, 기도가, 단식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행위의 정의가 아닌, 그 행위를 통하여 얻는 상의 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받은 상’과 아버지에게 ‘받을 상’의 차이를 알려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은 현재적이고 즉각적입니다. 의로움을 행하였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 바로 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바로바로 보람을 느끼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을 상’은 어떤가요? 그 상은 현재가 아닌, 나중을 위한 상입니다. 사람들이 알아 주지 않습니다. 마음은 뿌듯할 수 있지만, 내 행위가 인정받지 못한다는 아쉬움도 들 수 있습니다. 좋은 일, 착한 일을 하고 오해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을 상’보다 사람들에게 ‘받은 상’이 더 좋아 보입니다. 그것이 솔직한 우리들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 ‘받을 상’이 더 좋은 상이라고 알려 주십니다. 그 말씀을 마음에 새겨봅시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로 여겨지고 빠르고 즉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래도 한 번쯤은 예수님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거스르며,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에게 ‘받을 좋은 상’을 생각해 보면 어떨까요? 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숨어서 나를 바라보아 주시는 아버지를 우리가 함께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소설책을 읽다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수 있는 이야기인 것 같아서 이곳에 그 내용의 일부를 옮겨봅니다.


소설 속의 아버지가 시험에서 빵점 맞은 아들에게 문제를 냅니다.

“1,000 더하기 0은 몇 일까?” “1,000이요.”

“맞아. 그런데 왜 1,000이지?” “0은 있으나 마나 한 수니까.”

“두 번째 문제, 1,000 빼기 0은 몇 일까?” “1,000이요.”

“맞아. 왜 1,000이지?” “0은 있으나 마나 한 수니까.”

“마지막 문제, 1,000 곱하기 0은 몇 일까?” “0이요.”

“0은 있으나 마나 한 숫자인데 왜 정답이 0일까?”

그러면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0은 있으나 마나 한 숫자가 아니야. 빵점 맞아도 빵점을 맞은 게 아냐. 0이 아무 것도 아닌 수가 아닌 것처럼 말이지.”

우리는 종종 있으나 마나 한 행동으로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쓸모없는 행동이라고, 아무런 가치도 없다면서 시간만 낭비한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0’이라는 숫자가 아무것도 아닌 전부인 숫자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가치 없다고 평가하는 그 모든 것들이 나를 위해 너무나 필요한 그래서 전부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선, 기도, 단식과 같은 하느님께 드리는 우리의 정성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많은 사람이 이 자선과 기도, 단식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기를 인정받기 위한 행동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에만 집중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알아줘야 가치 있는 것처럼, 또 그렇게 알아줘야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버려야 한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행동이 아닌, 하느님께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도 모르시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시기에, 당신을 향한 그 모든 자선, 기도, 단식을 기쁘게 받아들이시고 곧바로 커다란 은총과 사랑으로 갚아 주십니다.

‘0’이라는 숫자가 있으나 마나 한 숫자처럼 보이지만, 모든 숫자를 ‘0’으로 만들 만큼 힘 있는 숫자입니다. 마찬가지로 자선, 기도, 단식도 사람들이 모르기에 ‘0’처럼 하나 마나 한 행동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숫자 ‘0’처럼 자신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힘 있는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행동임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나의 자선과 기도 그리고 단식에 대해 묵상해 보셨으면 합니다.
만약 모든 사람의 충고대로 집을 짓는다면 비뚤어진 집을 짓게 될 것이다(덴마크 속담).


주님을 함부로 판단하지 맙시다.

예전에 전철을 타면,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선교하는 개신교 신자를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그런 사람을 보기가 힘듭니다. 사람들이 이런 말을 이제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이분법으로 신앙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을 믿어야만 하느님 나라에 가고, 믿지 않으면 불붙은 지옥에 가게 될까요? 믿지 않지만 정말로 천사 같이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을 기회가 없어서 믿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믿지 않았으니 너는 무조건 지옥이다!”라고 사랑이신 주님께서 말씀하실 것 같지 않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성지에서 보았던 광경입니다. 아이가 마구 울고 있었습니다. 아빠가 어르면서 울음을 멈추게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아이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때 어떤 자매님이 아이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울지 않아야 착한 아이지.”

곧바로 의문이 들지 않습니까? 왜 안 울면 착한 아이일까요?

이분처럼 우리 역시 자기 관점에서 바라보는 선악을 말하고 판단할 때가 많았음을 깨닫습니다. 주님을 조그만 분

 삼구(三仇) 교리가 사라지면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양산된다

 -전삼용신부-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왔습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하면 율법은 그리스도의 은총과 진리를 통하지 않고서는 지켜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어제 복음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율법을 지키려면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정글에서는 모든 것들이 생명을 노리는 원수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총과 진리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믿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파리를 원수로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생명을 빼앗아가지는 않기 때문이고 그래 봐야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아버지가 되면 우리는 생명을 보장받게 됩니다. 그러면 생명을 위협하는 것들이 더는 의미가 없어집니다. 그것들이 더는 두려움을 주지 않고 그래서 원수가 되지 않습니다.

    은총은 부모가 자녀에게 베푸는 사랑이고 진리는 부모의 모범과 가르침입니다. 이로써 자녀는 부모를 자신들의 창조자와 보호자로 믿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믿음을 주시기 위해 세상에 오신 것이고 이 믿음 없이는 율법이 지켜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우리 아버지로 믿는 것이 우리가 가야 할 최종 목적지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비로운 아버지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부모를 창조자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 때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사춘기’ 때가 있습니다. 이때를 잘 묵상해보면 우리가 언제 하느님을 아버지로 인정하지 않게 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사춘기 때는 부모를 믿을 수 없으므로 모으기 시작합니다. 모은다는 말은 내가 ‘주님’, 곧 주인님이 된다는 뜻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아이가 하도 햄버거를 먹고 싶다기에 사주었는데 아빠가 조금 달라고 하자 아이가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우 섭섭했다고 합니다. 자기 것으로 하려는 마음은 자신에게 오는 것이 부모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다음으로는 자기가 ‘창조자’가 되려고 합니다. 아기를 낳는 행복을 자기 힘으로 누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아기를 낳을 수 있는 사춘기가 되면 부모를 거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같은 수준의 창조자가 될 수 있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젤리나 졸리가 학생 때 남학생과 함께 살겠다고 집으로 데려온 적이 있는데 이는 부모를 넘어서겠다는 뜻과 같습니다. 자기도 아기를 낳을 수 있고 충분히 혼자 행복할 수 있는 주체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심판자’가 되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게 되고 판단의 기준이 자신이 됨으로써 남도 심판하게 됩니다. 심지어 부모를 심판하기까지 합니다. 이렇게 되면 부모에게 순종하기보다는 부모에게 명령하게 되고 이렇게 부모에게서 벗어나게 됩니다.

    교회는 이를 ‘삼구’(三仇), 곧 ‘세 가지 원수’로 가르칩니다. 물론 지금은 거의 말하지 않게 된 교리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믿게 만드는 영적 전쟁에서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으면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요? 100% 집니다.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영화 ‘스펙트럴 : 고스트워’(2016)는 몰도바에 주둔 중인 군인들이 보이지 않는 적으로부터 당하여 어쩔 줄 모르는 상황에서 시작됩니다.
    그들은 미국 국방성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국방성은 아주 짧은 빛의 파장을 이용하여 사물을 분간할 수 있게 만드는 초분광 고글을 만든 클라인 박사를 그들에게 보냅니다. 그 보이지 않는 유령과 같은 적을 초분광 고글로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곳에 도착한 클라인 박사는 군인들을 죽이는 유령의 존재들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우선은 그들이 세라믹을 통과하지 못하고 몸에 쇳가루가 묻으면 움직임이 둔해진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렇게 그들의 약점을 파악한 클라인 박사 덕분에 군인들이 가까스로 그들로부터 탈출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정체조차 모르는 적들에게 본진조차 초토화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정체도 알지 못하는 적들에게 죽음만 기다리던 그때 가만히 생각을 정리한 클라인 박사는 그들의 정체를 이렇게 말해줍니다.

    “뭔지 알아요. 그것들은 벽은 통과하는 대신 세라믹을 통과하지 못하고 탱크 철갑도 통과하지 못했어요. 그것들이 사람에게 스치면 속은 얼고 겉은 타버립니다. 유령이 아니라 누가 만든 거예요. 제 생각이 맞다면 보스와 아인슈타인이 응축이론을 통해 예측한 물질의 상태와 같은데 이런 것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대량의 전기가 필요합니다. 현재 이것을 만들만한 곳은 단 한 곳, 마소로프 발전소밖에 없습니다. 그들이 얻는 에너지원인 전력을 차단하면 그것들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는 전쟁 영화에서 유일하게 과학자가 다 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희망으로 클라인 박사를 대동하고 발전소로 갑니다. 저항군이 전기를 통해 만든 무기가 있었지만 그들도 그것들을 감당할 수 없어 그것들에 의해 다 죽은 상태였습니다. 클라인은 전기를 끊으며 그것들의 존재를 사라지게 합니다. 이로써 힘든 전쟁이 끝납니다.

    

    우리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하느님을 아버지로 믿지 못하게 만들고 결국 헛된 것들을 원수로 여기며 살게 만듭니다. 이 지식이 없다면 모른 채 당하고만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싸우기만 해서는 되지 않고 알아야 합니다. 누가 적인지 알아야 하고 어떻게 없애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그 적이 세 가지 원수고 그 적을 무찌르는 무기가 자선-단식-기도라고 가르치십니다. 세속은 자선을 통해서, 육신은 단식을 통해서, 마귀는 기도를 통해서 이길 수 있습니다.
    청빈-정결-순명의 무기로 누구와 싸워야 하는지 몰랐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은 그것들은 실천하되 결국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합니다.
    목적도 모르고 적도 모르고 그저 무기 사용법만 알았던 것입니다. 좌우도 분별 못 하는 어린이들에게 무기를 주면 승리할 수 있을까요?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기도-자선-단식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그러하셨듯이 홀로 나 자신과 싸움을 위한 무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지만 요즘은 삼구와 그것을 이기는 방법, 또 그 결과인 복음삼덕을 거의 가르치지 않습니다. 심지어 자선-단식-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이 세속-육신-마귀를 이기려고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은 수도자들이 청빈-정결-순명을 서약하면서도 그것이 삼구와의 전쟁으로 얻는 결과라는 것도 알지 못하는 수도 있습니다.

   

    알지 못하면 전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훈련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와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하고 어떤 무기로 싸워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 없이는 영적 싸움은 100% 질 수밖에 없습니다.
    싸움의 목적이 무엇인지, 싸울 대상이 누구인지, 또 그것들을 이길 무기가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영성은 영혼 구원에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외국에서는 쉽게 볼 수 없지만 한국의 집에는 현관(玄關)’이 있습니다밖에서 집으로 돌아올 때 신발을 벗고 들어오는 공간입니다밖에서 있었던 일은 모두 털어 버리고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와서 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불교의 사찰에는 일주문(一柱門)’이 있습니다세속에서 부처님의 품으로 들어오는 문입니다번뇌와 고통을 벗어나서 깨달음의 길로 들어오는 문입니다세례를 받기 전에 입교식(入敎式)’이 있습니다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서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진리를 받아들이겠다는 다짐입니다가톨릭평화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프란치스칸 영성은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전체와 하나가 되는 입문 예식과 통과의례를 거치지 못한 체 겉으로만 어른이 되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면서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입문과정을 소개하였습니다.(2021년 5월 23일 기사고대인들은 입문과정을 통해서 5가지를 성찰하였습니다. ‘인생은 고되다당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당신의 인생은 당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당신은 통제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당신은 죽을 것이다.’

 

신앙은 이 다섯 가지 성찰에 대한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삶이 고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하느님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모든 것과 연결 될 때 그 삶은 가볍고 편안해 집니다. ‘내 멍에는 편하고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 28)’ 당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사실이지만부분적 전체로서 우주적 삶에 참여하게 될 때 당신은 전체로서 중요성을 지니게 됩니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루카 10, 20)’ 당신의 인생이 여러분과 관련된 것은 아니지만결국 모든 것이 연결된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당신의 인생이 우주 전체에 연결되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 당신은 통제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당신이 자신의 통제력을 놓을 때 온전히 책임을 져 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습니까?(루카 12, 25)’ 여러분이 죽는 다는 것은 사실이지만존재의 원천에 연결되어 살아갈 때 이 세상 삶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죽음도삶도천사도권세도현재의 것도미래의 것도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 38-39)’

 

인공지능의 시대에 우리는 더욱 풍요로운 것을 찾으려 합니다로봇으로 성적인 만족을 추구하려합니다깨끗한 고기를 만들려고 합니다인공자궁을 만들려고 합니다깨끗하고 안락한 죽음을 선택하려고 합니다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어느덧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그러나 그런 것들은 풍요롭게 할지는 모르지만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할 것입니다어릴 때의 기억입니다어머니는 늘 아버지의 자리를 말씀하셨습니다아버님께서 안 계셔도 그곳은 함부로 하지 않았습니다아버님의 안경아버님께서 들으시던 라디오아버님께서 읽으시던 성경책이 있는 자리가 있었습니다모세가 하느님께서 계신 곳으로 갈 때에 신발을 벗고 갔던 것처럼저도 아버님의 자리를 지날 때면 마치 아버님이 계신 것처럼 조심했습니다우리는 성당의 감실 앞을 지날 때면 고개를 숙이고 인사를 드립니다성모 상 앞을 지날 때도 인사를 합니다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과 자본만이 아닙니다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것입니다우리 안에 있는 신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우리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지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행복하여라주님을 경외하고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그의 후손은 땅에서 융성하고올곧은 세대는 복을 받으리라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이영근신부-

 

산상설교에서 의로움은 중요한 주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을 마치신 다음여전히 의로움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이는 의로움의 본질이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곧 의로움이란 남에게 보이기 위한 처신인 것이 아니라하느님 앞에 놓인 처지임을 말해줍니다그러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드러난 행동이나 결과를 보시는 것이 아니라마음속 생각을 보십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로운 생활의 중심은 세 가지였습니다그것은 자선과 기도와 단식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람들은 의로움을 통하여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맺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자신의 의로움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기도 했습니다곧 의로움을 통해 하느님이 아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받고 보상받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혹 우리도 그렇지 않는지를 보아야 할 일입니다사실우리의 기도나 봉사나 사랑을 통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만약 그것이 나의 경건함을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도구가 되고 있다면 말입니다그것을 통해서하느님께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그것을 통해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드러내고 있다면 말입니다진정우리는 겉모양이 그리스도인인 것이 아니라뼈 속에서부터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일입니다그러려면우리는 오늘 진정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현전을 마주하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그렇습니다우리 주님께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마태 6,6)이십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PR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그러나 거짓 PR은 오히려 자신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일입니다아무리 드러내려 해도 드러내 지지 않는 것이 있고아무리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드러나는 것이 있기 마련입니다우리는 적어도 하느님을 섬기는 척하지는 말아야 할 일입니다이런 점에서 오늘도 저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사실저는 어둠이 아닙니다그러나 제가 어둠과 놀면 저도 어둠이 되고 말 것입니다또한 저는 빛이 아닙니다그러나 제가 빛 앞에 머무르면 저도 빛의 옷을 입게 될 것입니다저는 천사가 아닙니다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노래하고 하느님을 섬긴다면 천사가 될 수 있습니다저는 마귀가 아닙니다그러나 마귀의 영을 따라 산다면 마귀 같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마태 6,1)

 

주님!

선을 과시하지 않고악을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게 하소서!

마음의 단식으로 당신을 섬기게 하시고제 마음이 당신 사랑에 씻기게 하소서!

사람들 앞에서 의로움을 드러내지 않게 하시고기도로 마음이 순결하게 하소서!

당신 앞에 머무르게 하시고당신의 영으로 차오르게 하소서아멘.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하라

 -반영억신부-

 

순수한 의향을 가지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최선을 다했을 때 결과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는 것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결과가 아무리 좋아도 의향과 과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추합니다. 의학이 발달한 요즈음 M.R.I 를 통해 사람의 곳곳을 들여 다 볼 수 있습니다. PET-CT를 통해 암을 찾아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은 들여다볼 수 없습니다. 아마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들여다볼 수 있다면 많은 이들의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분이십니다.

 

상을 받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주어진 몫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 상은 주어지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 자체가 바로 상입니다.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거나 허풍을 떨어서는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 하느님 앞에 부끄러움만 더할 뿐입니다.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듣고 은인이라는 소리를 들을지언정 그것은 세상의 상일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것을 추구하고 하늘로부터 오는 상을 받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은 결국 모두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속된 천상을 지향하고 지금 여기서부터 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는 척, 가진 척, 잘난 척, 있는 척...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겉치레는 구원에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기도를 하든, 자선을 베풀든, 단식을 하든, 그 자체가 아름다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자선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며 단식은 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합니다. 그런데 기도나 자선, 단식을 함에 있어 사람의 시선을 의식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관계가 회복됩니다. 사람의 시선을 의식하면 마음이 갈라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시선을 명확히 하면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악행이 M.R.I 보다 더 정확한 주님의 마음에 찍힌다는 것을 생각하면 감히 나의 처신을 함부로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지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다 보면 주님의 상급이 주어질 것입니다. 상을 보지 말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그것이 기쁨입니다. 지금 내가 하는 모든 것이 결코 남에게 잘 보이려고 하는 일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그리고 오로지 주님 마음에 드는 것으로 감사할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길 희망합니다.

 

“성인은 숨어서 남모르게 일한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드러남을 중시하는 사회에서 심지어 의로운 일마저 드러내려고 하는 시도를 자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함께야). 우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기에 앞서 하느님의 시선을 마음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공연한 인간적 명성은 참된 길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숨은 일도 보시는 하느님의 시선을 느끼는 하루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위선자들처럼 하지 마라.>

 -송영진신ㄴ부-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위선자들이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듯이, 스스로 나팔을 불지 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네가 자선을 베풀 때에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 그렇게 하여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2-4).”

 

“위선자들의 자선은 자선이 아니다.”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자선을 자선으로 인정하지 않으신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 사람들은 “위선자들의 자선도 누군가에게는 도움을 주는 일이다.

그러니 그들의 자선도 어느 정도는 자선으로 인정할 수 있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위선자들이 내는 불우이웃돕기 성금 덕분에

누군가가 실제로 도움을 받긴 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자선도 어느 정도는 자선으로 인정할 수 있다는

세속 사람들의 말이 아주 틀린 말은 아닌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세속의 기준에 사로잡혀 있는 생각일 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의 결과만 보는 것은 세속의 기준으로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기준은 “어떤 마음으로 자선을 실천했는가?”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고’ 실천한 자선은,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자선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세속의 기준이 아니라, 하느님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위선’은 겉으로만 착한 척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위선’은 ‘선’이 아닙니다.

‘선’에 가까이 가 있는 것도 아니고, ‘선’과 비슷한 것도 아닙니다.

진짜 ‘선’이 아닌데도 ‘선’인 것처럼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는 ‘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선자들의 ‘자선’은 하느님의 기준으로는 ‘죄’일 뿐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내는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누군가가 도움을 받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라고 항의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세속 사람들 앞에서나 통하는 말이고,

하느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을 말입니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는 “다른 사람들 모르게 하여라.”

라는 뜻이기도 하고,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하여라.” 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기 자신도 모르게 한다는 말은, 자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 일을 행한다는 뜻이고, 자선이라는 것을 의식하지 않는다는 말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뿐이라는 마음으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루카 17,10).” 라고 진심으로 말하는 것,

그것이 자선을 행할 때의 자세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자선이라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칭찬과 상을 기대하게 되고,

그 기대가 위선으로 이어집니다.

(자기 자신이 위선자인지 아닌지, 자기 스스로 식별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불우이웃돕기를 실천했을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주지 않고, 칭찬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을 때, 서운한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으면 위선자가 아닌 것이고,

서운하고 섭섭한 마음이 생긴다면 위선으로 갈 가능성이 큽니다.

속으로 서운해 하는 단계를 지나서, 사람들이 알아주고 칭찬해 주기를

노골적으로 바란다면, 그것은 이미 위선자가 된 것입니다.)

 

“너희는 기도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회당과 한길 모퉁이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한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5-6).”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기도는, 기도하는 척 ‘연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하는 척 연기하는 것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죄를 짓는 일이고,

하느님과 사람들을 속이는 죄를 짓는 일이고,

‘거룩한 일’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선을 베푸는 것보다 ‘더 큰 죄’가 됩니다.)

“기도할 때에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이라는 말씀은,

실제로 골방에 숨어서 기도하라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과시하거나 자랑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숨어 계신 네 아버지” 라는 말씀은,

“사람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어디에나 계시는 아버지”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 어떻게

기도를 하든지 간에 우리 기도는 언제나 항상 하느님께 곧바로 전달됩니다.

 

“너희는 단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침통한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려고 얼굴을 찌푸린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을 상을 이미 받았다.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16-18).”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단식하는 위선자들의 단식은 단식이 아니다.

그러니 그들처럼 하지 마라.”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단식 자체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위선자들이 하는 것과 같은 ‘거짓 단식’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단식은 일차적으로 회개와 속죄를 하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단식하는 것은 회개도 아니고 속죄도 아닙니다.

따라서 위선자들의 단식은 단식이 아닙니다.

이 말에 대해서, “그들도 실제로 밥을 굶는다.

그러니 그들의 단식도 어느 정도는 인정해 주어야 하지 않는가?”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밥을 굶는 그 행위 자체가 무슨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가 단식한다는 것을, 또는 회개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과시하려고

‘거짓 단식’을 하는 위선자들이 실제로 밥을 굶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고 가치도 없는 ‘어리석은 일’(쓸데없는 일)일 뿐입니다.

여기서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라는 말씀은,

평소처럼 행동하라는 뜻입니다.

단식과 회개뿐만 아니라 신앙생활 전체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일이 아니라,

나 자신이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아닌,

그저 사람들에게 잘난 체 하기 위해서 하는 신앙생활로는 구원받지 못합니다.

 복음: 마태 6,1-6.16-18: 올바른 자선

 -조욱현신부-

 

우리가 자선을 베풀 때는 그 자선이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뜻으로 사람들 앞에서 베풀 수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되 보이지 않게 할 수도 있으며,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사람들 앞에서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수도 있고, 몰래 베풀지만 남의 눈에 띄고 말 수도 있다. 예수께서는 밖으로 드러난 결과가 아니라 마음속 생각을 말씀하신다. 예수께서는 현재의 것에 관한 관심을 버리라고 하신다.

 

자신의 덕을 내보임으로써 사람들의 칭찬을 얻으려 하지도 말고, 남 앞에서 넘치게 기도함으로써 신심을 자랑하지도 말라고 하신다. 하느님 때문에 하는 일은 하느님께서 받아들이시지만,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하는 일은 인간의 칭찬이란 바람 속에 쏟아붓는 것이다. 그런 것은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 인간의 칭찬이라는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신심 깊은 마음의 표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선은 자랑하려고 베푸는 것이 아니다. “오른손”, “왼손”의 의미는 이것이다. 오른손은 의인이나 의로운 행위를 말하고, 왼손은 죄가 되는 행동이나 죄인들을 말한다. 그러므로 의인인 오른손은 왼손이 하는 일을 몰라야 하고, 우리가 충실하고 신심 깊게 행하기 위해서는 죄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기도 하지만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자선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

 

기도는 사람들에게 하는 것도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다. 기도할 때 우리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는 것이다. 기도는 천사의 무리와 하나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대천사가 토비트에게 “너희의 기도를 주님 앞으로 전해 드린 이가 바로 나다.”(토빗 12,12)라고 했듯이 기도는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천사들 손에 들려 하느님 앞으로 간다.

 

골방이라는 것은 마음의 침실이다. 그 마음으로 자기가 기도하는 것과 자신이 기도를 바치는 분만을 생각하도록, 기도할 때는 다른 것은 보지 말고 하느님만 바라보라고 하신다. 그래서 외적인 생각과 걱정을 완전히 끊기 위해, 육신의 감각으로 통하는 문을 모두 닫아걸라는 말씀이다. 그러한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자선과 기도가 그렇듯이 단식을 할 때도 겉꾸미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하신다. 예수께서는 남에게 보이려는 행위나 꾸밈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겉으로 꾸민다.”라고 하시지 않고, “그들은 얼굴을 찌푸린다.”(16절) 하신다. 그렇게 하는 것은 남에게 드러내는 자랑거리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너희는 그들이 맺은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볼 수 있다.”(마태 7,16)라는 말씀으로 양의 옷차림을 한 이리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 바 있다. 그들이 맺는 열매를 보고 그들이 양의 옷을 입은 이리인지 실제로 양인지 결국 드러날 것이다. 말씀으로 언제나 참 열매를 맺는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라."(마태 6, 3)

-한상우신부-


마음을
깨우는 것이
기도이다.

오른손도
왼손도
똑같은
마음이길
기도드린다.

바라는 것보다
베푸는 것이
더 큰 행복이다.

우리자신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다.

자아를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참된
단식이며
자선이다.

하느님께서는
진실한 삶을
원하신다.

진실한 실천은
진실한 사랑이다.

이웃을 위한
자선과 기도는
결국 나를 위한
자선과 기도이다.

분리될 수 없는
공동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자선과 기도의
출발은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다.

진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자선이며
기도이다.

입(口)으로
하는 자선에서
가슴과 마음으로
하는 자선으로
옮겨가야 한다.

이것이 참된
실천이며
기도이다.

참된 마음은
언제나
아름답다.

자선의
앞모습과
뒷모습에서
예수님의
뜨거운
마음을
다시 만난다.

어떻게 살것인가?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와 우리의 관계를 이야기하십니다.

"네 자선을 숨겨 두어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4)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마태 6,6)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마태 6,18)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종교적 수덕 생활의 기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정화하고 성화하는 도구로 이 세 가지 덕목의 실천을 중요시하였지요.

"단식"은 자신의 육을 비움으로써 영육을 정화하고, "자선"은 그렇게 비워낸 것을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그들의 영육을 돌보며, "기도"는 이 모든 실천들의 이유이고 목적인 아버지와의 통교를 추구합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 아버지와의 사랑이니 그렇다 치고, 단식과 자선이 아버지와의 은밀하고 내밀한 소통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단식은 비운 만큼 그 자리가 주님의 거처가 될 수 있기 때문이고, 자선은 가난한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기에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행할 때 오직 아버지만 신경 쓰면 됩니다. 주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지, 어떤 평판을 얻을지, 내게 어떤 득이 될지 계산하고 행하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은 이미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주님은 당신께 몰입된 자선과 기도와 단식을 기꺼이 받으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에도 선한 영향력이 되어 더 큰 찬미와 찬양, 감사의 불씨가 되도록 만드십니다. 우리가 애써 드러내지 않아도 그분께서 잘 쓰실 것이니 우리는 그저 주님만 바라고 행하면 되지요.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형제들을 돕는 일에 대해 계속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할 수 있게 됩니다."(2코린 9,8)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은 받는 이 자신만을 풍요롭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선행으로 이어지게 마련입니다. 거기까지 이르러야 은총이라 할 수 있지요. 자신과 가족만의 안위와 사치를 보장하는 재화, 우월감을 키우는 자리나 능력, 입에 발린 찬사와 칭찬을 은총이라 믿고 싶을지도 모르나, 하느님과 자신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일 수도 있습니다.

은총은 선한 지향을 가진 이들, 선한 영향력으로 아버지의 일에 협력하는 이들을 통해 선순환을 일으켜 이 세상을 더 풍요롭고 충만하게 하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사도가 독려하는 구제 활동은 단순히 자선으로 그치지 않고 베푸는 이와 받는 이, 그리고 온 세상에 구원이 침투되어 번지게 하시는 아버지의 일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부유해져 매우 후한 인심을 베풀게 되고, 우리를 통하여 그 인심은 하느님에게 대한 감사를 불러일으킬 것입니다."(2코린 9,11)
아버지의 뜻에 따라(기도), 자신을 비워(단식), 베푸는 이(자선)는 모든 면에서 더욱 부유해집니다. 아버지께서 육만이 아니라 영혼까지도 넘치게 채워주실 것이니까요.

이처럼 주님만을 추구하며 실천한 헌신과 연민의 사랑은 타인의 영혼에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 그 영광이 자기에게 돌아오지 않고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로 올려지는 것이지요.

감사가 넘치는 세상! 생각만 해도 행복하지요!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받은 모든 은총을 자기 이익만을 위해 헛되이 유실하지 않는다면, 은총은 선행으로 이어지고 감사를 낳아 이 세상을 아버지의 영으로 더욱 충만한 용광로가 되게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바치는 자선과 기도와 단식의 사랑 고백을 그분이 숨어서, 숨어서 얼마나 기다리시는지요! 숨은 일도 보시는, 숨어 계신 나의 아버지께 오롯이 몰입하여 자신을 내어 드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로 인해 세상에 은총과 선행과 감사의 에너지가 무한히 증폭될 것이니, 우리는 행복합니다. 주님도 행복하실 것입니다. 아멘.

 우리 사랑의 시작과 끝

 -김찬선신부-

 

"너희가 자선을 베풀 때에"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기도와 단식과 함께 자선을 베풂에 대해 

말씀하시고,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선행에 대해 얘기하기에

오늘 강론은 선행과 자선에 대해서 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선행 또는 자선을 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의 칭찬을 받기 위해서.

자기 만족이나 충만을 위해서.

하느님의 상을 받기 위해서.

 

그런데 제 생각에 세 가지 다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칭찬받으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고,

만족이나 충만을 얻으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것이며,

하느님으로부터 상을 받으려는 것도 자기를 위한 거지요.

 

다만 어떤 것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이 더 나를 위한 것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인데

칭찬을 위한 선행이 가장 저차원이라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을 것입니다.

 

남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때 행복한 것은

나의 행복이 남에게 좌우되는 것이 우선 문제이고,

그것도 칭찬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니 더 문제지요.

 

그런 사람이 없으면 행복하지 않을 것이고,

칭찬 대신 야단을 맞으면 더 행복하지 않겠지요.

그러니 선행은 좋은 것이지만 그런 선행은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 못됩니다.

 

두 번째로 나의 만족과 충만을 위한 선행도 칭찬을 받기 위한 선행보다는 

낫다고 할 수 있지만, 나의 행복을 위해서는 문제가 있습니다.

참사랑의 행복이 아니고 기만적인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선행이란 근본적으로 사랑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만족이나 충만을 위한 것이라면 사랑의 선행이 아니지요.

 

사실 선행만큼 큰 만족과 충만감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면 이런 행복이 인간으로서는

가장 고차원적인 만족을 주는 행복일 것입니다.

 

나는 욕심 가득하고 명품에서 만족을 얻는 그런 시시한 사람이 아니고,

남에게 나쁜 짓을 하는 그런 악한 사람은 더더욱 아니며

선행을 하는 사람이라는 만족감은 최고의 만족을 주고,

사랑을 한다고 생각했을 때의 충만감은

연인들이 누리는 사랑의 충만감 못지 않은 충만감을 주지요.

 

그것이 오직 문제라면 자기 만족과 충만감에 갇히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으로 끝이고 더 이상 하느님과 하느님의 사랑이

이 선행 안에서 발생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선행은 하느님의 사랑이 시작과 끝이 되어야 하는데

내가 사랑을 하고 나의 만족과 충만감이 사랑의 목적이니

이 선행 안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사랑이 발생치 않음은 당연하지요.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을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이라고 얘기하며 오늘 우리에게 이렇게 얘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6월 19일 연중 제11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