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6월 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Margaret K 2021. 6. 6. 07:05

2021 6 6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코 14,12-16.22-26)


he took bread, said the blessing,
broke it, gave it to them, and said,
"Take it; this is my body."
Then he took a cup, gave thanks,

and gave it to them,
and they all drank from it.
He said to them,
"This is my blood of the covenant,
which will be shed for many.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박형순신부-

 

 우리가 미사 안에서 만나게 되는 성체와 성혈의 의미는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과 계약을 맺으실 때는,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것은 옛 계약, 곧 구약입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이제 예수님의 탄생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더는 짐승의 피가 아닌, 예수님의 피로 모든 사람을 위한 새로운 계약을 하느님께서 맺으십니다. 새로운 계약, 곧 신약입니다.

계약이라는 조금은 경직된 형식의 언어가 사용되지만, 이 계약 안에는 사람을 향한, 나를 위한 하느님의 따뜻함이 담겨 있습니다. 나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내어 줌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성체와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어 주는 큰 신비를 담고 있는 것이지요.
이 큰 사랑의 신비를 우리는 비교적 손쉽게(?) 미사 안에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자 구약의 긴 역사가 필요하셨습니다. 한두 세대가 아니라 수천 년의 기나긴 시간입니다. 아울러 사람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셨습니다. 사람을 위해서,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예수님의 자기 결심이 필요하셨습니다. 구약에서 시작된 긴 역사와, 죽음에 이르기까지 온갖 멸시와 고난을 당하신 예수님의 철저한 자기희생이 없었다면 결코 가능할 수 없었던 사건입니다. 그 사랑의 절정을 성체와 성혈이 품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을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마주하고 있는지요? 나를 향한 하느님의 따뜻함과 품어 줌의 절정, 그것이 우리가 참례하는 미사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그 사랑의 표지가 바로 우리가 미사에 참례하는 것만으로도 만날 수 있는 주님의 보배로운 몸과 피입니다.

주님의 양식

-키엣대주교-

 

피는 생명을 위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따라서 피를 나눈다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고귀한 사랑으로 바로 십자가 위에서 우리 인류를 위해 희생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이십니다.

“모두 이 잔을 마셔라.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

주님의 피는 구원의 피이며, 계약과 용서의 피입니다.

구원의 피는 유월절 어린양의 모습을 통해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과 짐승의 피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어린 양의 피가 발라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구원되고 이때부터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잡아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이 아닌 당신 자신을 바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유월절의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인류는 죽음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입은 영혼의 문입니다. 주님의 피와 몸이신 성체를 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써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된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베트남에도 ‘피의 맹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결연을 맺을 때 서로의 피를 잔에 부어 나누어 마심으로써 하나 된 굳은 의지를 표현합니다.

예수님의 성체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를 이루는 신비와 인류에 대한 사랑의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과 하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피의 계약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용서의 피에 대해서는 구약에 여러 차례 묘사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의 사함을 구할 때 하느님께 속죄 양을 바쳤고 제사장은 동물의 피를 통해 죄를 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주님의 성체 성혈이신 영성체를 통해 죄의 사함을 받습니다. 생명을 내어주신 그리스도 주님의 사랑으로 인류는 구원과 거룩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흘러내리는 그 분의 피는 우리를 생명에 이르게 하고, 서로 용서하고 더 많은 용서를 할 수 있도록 끝없이 끝없이 흘러내립니다.

성체성혈 대축일을 맞이하여 우리 인류를 위해 당신 자신을 바쳐 피 흘리신 무한하신 주님의 사랑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주님,

주님께서 세우신 성체 성사를 통해 저희도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기를 기도드립니다. 영원하신 주님, 저희가 주님 당신과 같이 자신을 내어주고 이웃을 더 사랑하고 봉사해야 함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는 오직 한번,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쳐 온 인류를 구하신 가장 고귀한 분이십니다. 단 한번으로 온 인류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목자이신 사제들이 예수님이 맡겨주신 당신의 양들을 위해 온 힘과 마음을 다할 수 있도록 기도합시다.

2. 매일 미사에서 주님의 성체를 받아 모시며 내 몸 안에도 고귀하신 주님이 계시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까?

3. 인류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며 우리도 그 분의 희생과 사랑을 실천해 봅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어렸을 때의 기억 하나가 떠올려졌습니다. 주택에 살고 있었는데, 매년 봄이 되면 제비가 날아와서 둥지를 쳤습니다(박 씨는 한 번도 가져다주지 않더군요). 제비 둥지를 보면서 정말로 신기했습니다. 특히 약간의 시간이 지나면 둥지에서 새끼 제비의 재잘거리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작고 예쁜 새끼 제비를 볼 수 있었지요.


현재, 성지에서 제일 큰 나무 꼭대기의 까치둥지를 볼 수 있습니다. 도저히 사람의 손이 다을 수 없는 곳에 만든 까치둥지입니다. 그런데 어렸을 때 보았던 제비 둥지는 늘 사람이 사는 집 처마 밑에 있었습니다. 당연히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둥지를 만들어야 안전할 것 같은데 제비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았습니다. 이런 내용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글쎄 제비는 사람 가까이를 제일 안전한 곳으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뱀이나 구렁이로부터 지켜줄 수 있는 안전한 인간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제비를 다른 동물로부터 보호해 주었으며, 주변이 조금 지저분해지더라도 좋은 새라면서 환영했습니다.

제비의 사람에 대한 믿음을 생각해봅니다. 그런데 우리 역시 힘 센 분 밑에 머물러서 보호를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주님이십니다. 이를 위해 우리의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세우신 성체성사를 특별히 기념하고, 그 신비를 함께 묵상하는 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와 늘 함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단순히 2천 년 전, 잠깐 이 땅에 오셔서 당신을 만난 사람들에게만 깊은 감동을 주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살아있는 빵으로 우리 곁에 계시기 위해 성체성사를 세우셨고, 자그마한 성체 안에 내재하시면서 우리가 쉽게 당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하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다가오신 주님이신데, 우리는 그 사랑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합니다. 스스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오만한 마음으로 인해서, 마치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처럼,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동으로는 예수님과 정반대의 길로 걸어가고 있습니다.

매번 최고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키워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기에 사람들과 함께 사는 제비들처럼, 우리 역시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편안함을 느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참 기쁨의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성체를 모시면서 이 주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어떻게 말할까'하고 괴로울 땐 진실을 말하라(마크 트웨인).


어떤 말을 할 것인가?

회계사 남편에게 아내가 묻습니다.

“여보, 내가 잘 몰라서 그런데, 인플레이션을 아주 쉽게 좀 설명해 주세요.”

남편은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러면 내가 쉽게 설명해 줄게. 예전에 당신 몸매가 36-24-36이었는데 지금은 48-40-48이 되었지? 이렇게 당신의 모든 것이 전보다 커졌는데, 당신의 가치는 옛날보다 떨어졌어. 이게 바로 인플레이션이야.”

어떻습니까? 쉬운 설명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내 입장에서는 듣기 싫은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쉬운 설명보다는 상처받지 않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았을까요? 그러나 많은 이가 상처를 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합니다. 문제는 상대방이 이해하리라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전혀 그렇게 이해하지 않는데도 말이지요.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고 말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다

-전삼용신부-

 

오늘은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그리스도와 하나가 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웃을 위한 양식이 되어주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먹고 양식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양식’의 반대말은 ‘음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양식엔 사랑이 담겨있고 음식엔 이기심이 담겨있습니다. 모든 생명체는 무엇이든 먹어야 삽니다. 지금까지 살아있다면 무엇인가는 먹었기에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에 따라 그가 어디에 살게 될지가 결정됩니다.

    모기는 어미로부터 양식을 받지 못합니다. 심지어 음식도 못 받습니다. 물론 탄생할 때는 부모도 조금은 희생합니다. 피 흘림 없이 태어나는 생명체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더라도 그것들은 부모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음식이 있는 곳에 머물게 됩니다. 물론 어디를 가든 환영받지는 못합니다.

    동물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습니다. 공동체가 더욱 끈끈할수록 부모와 지내는 시간이 깁니다.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으로 길러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부모에게서 태어났다고 부모처럼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로부터 사랑이 섞인 양식을 먹어야 부모가 있는 곳에 살 능력이 생깁니다.

    해리 할로우 박사는 ‘격리 원숭이’ 실험을 하였습니다. 새끼 원숭이를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떼어놓고 인간이 기른 것입니다. 인간도 분명 사랑이 섞인 양식을 새끼 원숭이에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식은 음식만이 아니라 가르침도 포함합니다. 미사가 그래서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 둘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둘 중의 하나만 부족해도, 혹은 그 가르침이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면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양식을 먹은 새끼 원숭이는 원숭이 무리에 끼일 수 없었습니다.

    굳게 닫혀있던 루마니아의 대형 고아원 ‘요람’이 1990년 개방되었을 때, 사진기자 ‘윌리엄 스나이더’는 그곳에 수용된 아이들의 상태를 찍어 세상에 알렸습니다. 그는 요람을 ‘인간 창고’라 불렀습니다. 많은 아이가 몸을 앞뒤로 흔들거나 머리를 벽에 쿵쿵 들이받고 이상하게 얼굴을 찡그리며 사람이 다가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영혼이 없는 상태로 자라고 있었습니다. 학대도 당한 적이 없고 굶주린 적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사회에서 필요한 소통 능력을 전혀 갖추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었을까요? 보모들이 주는 음식 속에는 ‘사랑’이 담겨있지 않았습니다. 요람에서는 일손이 부족하여 보모 한 명이 20~30명의 아기를 맡아야 했습니다. 보모가 하는 일은 음식을 배급해 주는 것뿐, 아이와의 따듯한 접촉이나 별다른 보살핌은 줄 수 없었습니다. 양식이 아니라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에 속할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내가 먹는 것이 음식인지 양식인지 구분할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먹는 것이 비단 식품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책도 먹고 동영상도 먹습니다. 뉴스에서 보니 15초짜리 ‘틱톡’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많은 사고가 잇따른다고 합니다. 젊은이들에게 공유되는 동영상인데, 예를 들면 운전하면서 율동을 따라 하다가 저수지에 빠지거나 기찻길에서 동영상을 따라 하다가 기차에 치이거나 스프레이로 불장난을 하다가 큰 화상을 입는 경우들입니다. 음식만 찾다가는 이와 같이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습니다.

    음식과 양식을 구분하는 방법은 단순합니다. 양식은 분명 그 안에 이기심이 아닌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틱톡은 그것을 올리는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라고 올리는 것입니다. 상대의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이익을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요람에서 자기 이익을 위해 음식을 아이들에게 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식이지만 양식이 될 수 없는 이유는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을 먹으면 짐승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 이익을 위해 주는 음식만 먹는다는 말은 낮은 짐승의 수준에 머물고 모기나 기생충처럼 살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양식을 이루는 사랑과 진리는 하나의 실재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지 않기에 눈에 보이는 방식으로 전달됩니다. 사랑이 담겨 우리에게 오는 것이 양식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우리도 그분이 사는 곳에 머물 자격을 갖추게 됩니다.

    그분께서 주시는 양식 안에는 사랑과 진리가 담겨있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사랑이시고 진리이십니다. 이 사랑과 진리는 모기와 같은 본성을 벗고 자신에게 양식을 주는 이의 수준으로 우리를 향상합니다. 자신도 받은 것을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한 예를 봅시다.

    휴스턴의 한 라디오 방송국의 마이크라는 진행자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네브래스카주의 목장에서 살고 12살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로건이라는 소년의 전화였습니다.

    “마이크, 제 얘기 좀 들어주시겠어요?”

    “물론이지, 로건. 무슨 일이니?”

    “하느님이 저에게 하신 말씀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요.”

    “어제 우리 아빠가 송아지를 줄로 옭아매셨는데, 이 송아지는 매우 늙은 소에서 태어나서 엄마가 너무 늙어 건강한 우유를 먹지 못했어요. 비타민 C나 그런 좋은 성분이 있는 우유를 못 먹었어요.”

    “그래서?”

    “우리 송아지가 그만 등뼈가 부러지고 말았어요. 그래서 오늘 아침 제가 밖에 나가서 묻고 왔어요.”

    로건은 통화 중에도 계속해서 훌쩍거렸습니다.

    “하느님께 물어봤어요. ‘하느님, 왜 제 송아지를 데려가셨나요? 저에게 소중했는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어요. ‘로건, 내 아들도 나에게 소중했단다. 하지만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죽어야 했어.' 똑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전 그 송아지를 참 아꼈어요. 하느님의 아들도 매우 소중했어요.”

    “로건, 네 말이 맞다. 사실이야. 로건, 괜찮니?”

    “네, 괜찮아요. 하지만 이거 한 가지는 말하고 싶어요. 매우 중요한 얘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나 애완동물을 잃어버렸을 때, 하느님께서도 사랑하는 아들을 잃으셨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세요. 하느님은 모두 이해하세요. 하느님은 언제나 이해해 주세요. 그냥 하느님께 나아가면 돼요.”

    동물이건 사람이건 본인이 보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하고 본인이 받지 못한 것은 주지 못합니다. 내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분명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은 이와 같습니다. 성체 성혈을 먹고 마시는 사람들은 그 받은 대로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소중한 아드님까지 내어놓으시는 아버지 앞에서 이기적으로 음식만 팔아 이익을 챙기는 사람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 말씀대로 당신이 주시는 양식을 먹고 마시지 않으면 당신이 사시는 하늘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물론 양식을 먹는다고 다 하늘 나라에 합당한 수준으로 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그것을 원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고 싶으며 천상의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무용지물이 됩니다. 같은 이슬이라도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되고 뱀이 먹으면 독이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에 따라 양식 안에 든 사랑이 소화되기도 하고 사랑은 버려지고 음식만 소화되기도 합니다.

    세상에 속하려는 사람은 성체를 영하더라도, 마치 피자나 햄버거를 사 먹듯 헌금을 내고 당연하게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내가 봉헌하는 헌금도 나 자신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거저 받은 사람만이 거저 내어줄 수 있습니다. 거저 내어주지 못하면 나는 그저 음식이 되고 맙니다. 음식은 먹히거나 썩어버립니다. 잊히는 것입니다. 누가 생선 몇 마리, 돼지나 소 몇 마리를 먹었는지, 혹은 그 이름을 기억하겠습니까? 하지만 양식을 먹으면 그 양식을 준 이를 영원히 기억합니다. 그런 양식이 되는 삶을 살려면 양식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참된 양식이 되게 만드는 진정한 양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밖에 없습니다.

    나도 양식이 되어야 영원히 삽니다. 음식을 먹으면 음식이 되고 양식을 먹으면 양식이 됩니다. 내가 먹는 것이 내가 됩니다. 이는 내가 음식, 즉 고깃덩이가 될 것인지, 양식 곧 그리스도가 될 것인지의 결심에 따라 결정됩니다.

    뱀이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뱀이고 소가 되려는 사람은 무엇을 먹어도 소가 됩니다. 각자가 소화하고 싶은 것을 소화하기 때문입니다. 양식이 될 것인지, 음식이 될 것인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살 것인지 천국에 속하고 싶은지 정해야 합니다. 그것을 정했다면 그 살고 싶은 곳에서 오는 양식을 먹으면 됩니다. 양식은 부모가 자녀에게 자신이 사는 곳으로 초대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황제펭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암컷이 알을 낳으면 수컷은 3달 동안 남극의 눈보라를 맞으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알이 부화될 때까지 품고 있었습니다그동안 암컷은 바다에 나가서 새끼를 위해 먹이를 잡으러 갑니다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눈물겨웠습니다암컷이 돌아오면 수컷은 이제 먹이를 잡으러 바다로 나갑니다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황제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카르디널 피시(Cardinal fish)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이 물고기는 암컷이 낳은 알을 입에 넣어서 부화시킨다고 합니다알이 부화될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고 합니다수컷의 입안에 있는 알은 안전하게 부활 할 수 있습니다본능이라고 말하기에는 새끼를 위한 수컷의 사랑이 놀라웠습니다알이 모두 부화하면 비로소 수컷은 먹이를 먹을 수 있습니다자식에 대한 사랑이라는 면에서 추기경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가족을 위해서라면 장기를 기증하고목숨까지 바치는 경우가 있습니다본능에 충실한 황제펭귄도카르디널 피시도 그렇게 자식을 사랑하는 것을 봅니다그러나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목숨까지 바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하느님을 닮은 사람만이 그렇게 하였습니다최귀동 할아버지가 있습니다할아버지는 본인도 힘들게 구걸하는 가운데 더 어려운 할아버지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그 모습을 본 오웅진 신부님은 지금의 꽃동네를 일구었습니다걸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정성과 사랑이 수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었습니다이태석 신부님이 있습니다신부님은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가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나병환자들을 위해서 맞춤 신발을 만들어 주었습니다학생들을 위해서 밴드를 만들어 음악을 가르쳐 주었습니다신부님은 과로로 짧은 사제생활을 마치고 하느님 품으로 갔습니다그러나 신부님을 따르던 학생들은 의사가 되어서 신부님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고 있습니다신부님은 더 많은 젊은이들의 열정과 희생으로 다시 살아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사건이 바로 예수님입니다이것은 세상의 흐름을 바로 잡기 위해서 였습니다세상의 흐름이 강한 곳에서 약한 곳으로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긴 곳에서 짧은 곳으로 흘러간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아름다워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그런 세상은 예수님이 꿈꾸던 하느님 나라입니다사자와 어린아이가 함께 있는 나라늑대와 어린 양이 함께 있는 나라사막에도 샘이 흘러 꽃이 피는 나라입니다우리가 열심히 일해서공부해서 성공해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하나는 출세해서 자기만 잘 살고잘 먹기 위해서입니다다른 하나는 출세해서 세상의 차별을 없애기 위해서입니다혼자서 5000명의 것을 빼앗아 먹을 수도 있지만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도 있습니다예수님께서는 바로 혼자서 5000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 오셨습니다제자들의 발을 씻겨 드리시면서 어떻게 해야 공평한 세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 주셨습니다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것을 기억하는 날입니다성체성사의 가장 큰 의미는 내어줌입니다사제는 미사 때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재현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먹으십시오이는 여러분을 위해서 내어 줄 나의 몸입니다여러분은 모두 이것을 받아 마시십시오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입니다죄를 사하여 주려고 여러분 모두를 위해서 흘릴 피입니다여러분은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십시오.’ 내가 잘 사는 것도 중요합니다그러나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남을 잘 살게 해주는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것도예수님께서 성체와 성혈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것도 모두 우리가 잘 살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또한 우리도 이웃을 잘 살게 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시를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꽃입니다.

꽃은 나비에게 주고

꿀은 벌에게 주고

향기는 바람에 날려 보냅니다.

그래도 나는 하나도 잃은 것이 없답니다.

가을이면 더 많은 열매로 태어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핵심 주제, 성체성사

 -양승국신부-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신자들 얼굴을 마주보게 됩니다. 한명 한명 얼굴을 쭉 한번 훑어보면 천차만별입니다. 미사가 파스카 신비를 기념하는 승리의 잔치, 구세주 하느님께서 죄 많고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오시는 감사의 축제,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가는 구원의 전례이기에 당연히 행복에 겨워야 함에도 그렇지 않은 얼굴들도 많습니다.

  

주일미사가 의무라니, 빠지면 귀찮게 고해성사를 봐야하니 어쩔 수 없이 오셔서 '제발 좀 빨리 끝나라'는 표정들도 눈에 띕니다. 더 심한 분들은 도대체 의욕이 없는 분들입니다. 마치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소가 닭 바라보듯이 멀뚱멀뚱 바라봅니다. 심드렁한 표정입니다. 흥미도 반응도 없습니다. 때로 연옥벌이라도 받는 것 같은 모습의 신자들도 계십니다.

  

그런가 하면 '더 이상 행복할 수가 없다'는 표정도 눈에 띕니다. 진지한 얼굴, 단정한 자세, 미사 전례의 단 한순간도 놓치지 않겠다는 표정,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려는 경건한 모습입니다. 마치도 이 세상에서 드리는 마지막 미사인 듯 정성이 지극합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는 속죄의 제사, 희생의 제사, 십자가의 제사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기쁨의 축제입니다. 따라서 미사가 거행되는 시간은 환희의 순간입니다. 감사의 순간입니다. 은총의 순간입니다. 부족한 죄인들이 천상잔치에 참여하니 너무도 기쁜 나머지, 너무도 감사하고 은혜로운 나머지 감격에 겨워 눈물이 흐르는 은총의 순간이 미사입니다. 

 

'성체성사의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분이 한 분 계십니다. 만년에 이르러 그 힘든 상황에서도 죽기까지 성체성사와 끈을 놓지 않으셨던 분, 그래서 그분께서 세상에 보낸 마지막 편지 역시 성체성사가 핵심주제였습니다.

  

머릿속에 떠올리기만 해도 행복해지고 마음이 따뜻해져오는 전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그분께서 하느님 품으로 돌아가신 지가 벌써 꽤 지났네요. 만년에 이르러 참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지요. 위급한 순간마다 자주 가시던 병원이 로마 시내에 위치한 제멜리(쌍둥이란 의미) 병원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입원하셨던 2005년 3월 성목요일을 기해 교황님께서는 당신이 극진히 사랑하셨던 모든 사제들에게 유언과도 같은 서한을 보내셨습니다. 

 

이 편지 주제가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저는 이 편지를 고이 간직하고 틈날 때 마다 꺼내서 읽어보곤 합니다. 교황님 유서다 생각하면서. 그 내용이 너무나 감동 깊고, 또 의미심장합니다. 

 

"사랑하는 사제 여러분, 저는 다른 환자들과 나란히 병원에서 회복을 기다리며 성찬례를 통해 저의 고통을 그리스도의 고통에 일치시키면서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온 교회가 성찬례에서 생명을 얻으므로, 사제의 삶은 더욱 성찬례로 구현되는 삶이 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사제들에게 '성찬 제정문'은 축성문 이상의 것, 곧 '생명의 조문'이 돼야 합니다." 

 

"성체성사 때 모두 경건히 침묵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장엄한 말씀을 되풀이할 때 우리 사제들은 이 구원의 신비를 전하는 특별한 전령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찌 설득력 있는 전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사제들을 향한 교황님의 충고말씀은 제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너무나 행복해하는데, 정작 가장 성체성사 가까이 서 있는 저, 매일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저는 별 감흥이 없던 때가 많았음을 깊이 반성합니다. 

 

오늘부터라도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는 성찬 제정문을 낭독할 때마다 이런 마음을 지녀보고자 노력하렵니다.

  

"나를 구워먹든지 삶아먹든지 어떻게 해도 상관없습니다. 나를 이용해도, 돌아서서 험담해도, 나를 구박해도 나는 묵묵히 견딜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을 위해 내 모든 것을 내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그런 나를 통해 무한히 자비하신 하느님을 조금이라도 느끼시라는 것입니다." 

 

오늘도 사랑에 굶주리고, 허기와 갈증에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고맙게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생명의 빵이신 주님의 몸은 은혜롭게도 늘 우리 가까이에 계십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달려갈 수 있는 성체성사 그 한가운데 자리 잡고 계십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

-이영근신부-

 

6월의 첫 주일입니다성체성혈대축일입니다. 6월이면떠오르는 꽃이 있죠수도원 올라오는 길가 젬마 자매님 집 울타리에도가타리나 자매님 울타리에도우리 성모님 정원 앞에도 뒤에도피어있는 장미입니다. “6월의 장미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입니다.

하늘은 고요하고/ 땅은 향기롭고/ 마음은 뜨겁다// 6월의 장미가/ 내게 말을/ 건네옵니다.//

사소한 일로 우울할 적마다/ ‘밝아져라’/ ‘맑아져라’/ 웃음을 재촉하는 장미//

삶의 길에서/ 가장 가까운 이들이/ 사랑의 이름으로 무심히 찌르는 가시를/ 다시 가시로 찌르지 말아야 부드러운 꽃잎을 피워낼 수 있다고//

누구를 한 번씩 용서할 적마다/ 싱싱한 잎사귀가 돋아난다고/ 6월의 넝쿨장미들이 해 아래 나를 따라오며/ 자꾸만 말을 건네옵니다.//

사랑하는 이여/ 이 아름다운 장미의 계절에/ 내가 눈물 속에 피워 낸/ 기쁨 한 송이 받으시고 내내/ 행복하십시오.//

오늘 우리는 기쁨의 장미 한 송이로 행복합니다그런데 더 기쁘고 더 행복한 것은 예수님의 성체성혈로 피어난 꽃용서와 화해의 꽃고백성사의 집이라는 꽃이 수도원 입구에 참으로 아담하고 아름답게 피었습니다오늘은 이 용서와 화해의 꽃집을 마련하기가지 여러 모양으로 도움을 주신 은인들을 모시고이 집을 축복하고 개장하는 날입니다오늘 모두 이 용서와 화해의 꽃집에서 축복과 기쁨 영적 꽃다발을 받으시길 바랍니다.(이 꽃집의 이름은 미사 후축복식 때 원장수사님께서 발표하시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그리스도의 성체성혈의 신비는 계약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신비입니다오늘 <말씀전례>의 주제도 계약입니다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공통으로 등장하는 단어도 계약입니다계약에서 가장 두드러진 표현은 죄의 용서입니다그러기에 오늘 고백성사의 집을 축복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 깊은 일입니다.

<1독서>는 시나이에서 맺은 옛 계약으로모세를 통하여 맺어지는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계약입니다. <복음>은 최후만찬에서 행하신 성체성사의 설정을 통하여 맺어지는 새 계약의 장면입니다그리고 <2독서>는 새 계약의 중재자이신 그리스도께서 죄를 속량하시고 상속재산을 받게 해주셨음을 되새깁니다.

 

<1독서>의 시나이 계약에서모세는 희생된 짐승의 피를 절반을 제단에 뿌리고 나서, “계약의 책을 백성에게 읽어줍니다그러자 백성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실행하고 따르겠습니다.”(탈출 24,7) 하고 응답합니다모세는 나머지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말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여기에는 계약을 구성하는 요소가 세 가지로 제시되고 있습니다첫째는 하느님의 말씀이요둘째는 백성들의 응답이요셋째는 피를 뿌리는 예식입니다곧 계약은 용서를 위한 피의 의식을 통해서 제정되지만동시에 하느님 말씀의 수용을 통해서 제정됩니다이처럼계약에 있어서 말씀과 의식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이는 일찍이 들어보지 못한 어안이 벙벙해지는 놀라운 사실을 드러냅니다곧 야훼 하느님과 백성이 같은 피로 결합되었다는 것은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관계로의 친교를 말합니다본문의 “이스라엘의 자손들”(탈출 24,5)은 이 친교로 야훼 하느님의 혈족가족(‘am’)이 됨을 말합니다참으로 어마어마한 계약인 것입니다이는 순전히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호의의 선물이요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계약은 나아가서우리를 형제 사이로 만듭니다하느님의 가족으로서 형제가 되게 합니다그렇습니다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가족이며서로 형제인 것입니다그러니 우리가 형제인 것은 바로 계약이 가져다 준 선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예수님께서는 해방절(마르 14,12;“무교절 첫 날, 곧 파스카 양을 잡는 날”)의 양이 되십니다곧 당신의 피를 계약의 피로 뿌리십니다그리하여 옛 계약 안에 이미 감추어져 있던 신비가 드러나게 됩니다곧 구원의 사랑이 선포되고새로운 생명이 시작됩니다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르셨습니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그런데여기에는 구약의 계약과는 다른 것이 표현되고 있습니다곧 새 계약은 구약의 옛 계약과는 어떻게 다른 것일까예언자 예레미아는 말합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 나는 이스라엘 집안과 유다 집안과 새 계약을 맺겠다. 그것은 내가 그 조상들의 손을 잡고 이집트 땅에서 이끌고 나올 때에 그들과 맺었던 계약과는 다르다. ~시대가 지난 뒤에 내가 이스라엘 집안과 맺어 줄 계약은 이러하다. ~나는 그들의 허물을 용서하고,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겠다.”(예레 31,31-34)

 

그렇습니다“죄 사함”의 용서가 “새 계약”입니다오늘도 우리는 미사 중에 <성찬제정 축성문>에서사제는 포도주를 들고서 허리를 굽혀 말합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들을 위하여 흘리는 피다”

 

나아가서‘죄를 사하여’ 용서할 뿐만 아니라, ‘그들의 죄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것’이 새 계약입니다또한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신 피’이것이 바로 성체성혈의 신비에서 보여주는 주님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토록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성혈로 죄 사함의 용서와 자비를 입었으니마땅히 자비와 용서를 베푸는 계약의 삶타인을 위하여 내놓는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이제이 미사 중에예수님의 성체성혈로 맺으신 새 계약을 우리의 삶으로 기념(anamnesis)하고 찬양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합시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주님!

제가 산산조각 났을 때

저보다 먼저 산산이 부서진 이는 당신이십니다.

저를 풍기박살 낸 이도 바로 당신이십니다.

그래야만 온 몸을 쪼개고 피 흘리신 당신을 만날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오늘도 당신처럼다른 이들을 위하여

먼저부서지고 찢어져 피 흘리게 하소서아멘.

 <이를 행하여라.>

 -반영억신부-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2-25)”

 

1)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은

요한복음 6장에 있는 ‘생명의 빵’에 관한 말씀들에 연결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요한 6,48).”

“이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0-51).”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4-56).”

만일에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지 않았다면, 이 말씀들은 당신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말씀으로만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 ‘실제적인’ 지침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이 믿는다고 생각하는 일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이루어지는 행위가 되기를 바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일은,

예수님께서 당신 몸으로 주신 빵을 먹는 실제 행위로 실천됩니다.

따라서 성체성사는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제입니다.

 

2) 바오로 사도는 성체성사 제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주님에게서 받은 것을 여러분에게도 전해 주었습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 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1코린 11,23-29).”

바오로 사도가 이 말을 한 것은,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소외시키고

자기들끼리만 모여서 먹고 마시는 것을 꾸짖기 위해서입니다(1코린 11,17-22).

 

주님의 몸을 먹는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는 이유와 의미가 중요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몸을 먹는 것은 주님과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그 일치는 성체를 먹기만 하면 저절로 되는 일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라는 주님의 말씀을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이를 행하여라.” 라는 말씀은, 성체성사를 거행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삶 안에서’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사랑 실천 없이 주님의 몸을 먹는 것은 주님의 몸에 죄를 짓는 일입니다.>

 

3) 신앙은 관념이 아니라 ‘삶’이고, 사랑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성체와 성혈이 주님의 몸과 피라는 것을 배워서 아는 것과

그 교리를 진리로 믿는 것은 신앙의 시작 단계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믿는다고 생각하는 단계에서 멈추지 않고, ‘믿는 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를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삶과 성체성사를 일치시키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성체성사의 정신은 사랑과 희생입니다.

사랑과 희생을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설명 자체는 사랑도 아니고 희생도 아닙니다.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6-18).”

 

4) 성체성사를 제정하실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라고 예고하신 말씀이기도 하고, 하느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예언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은 “하느님 나라가 완성된 후에

그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식사를 하는 잔치가 열리는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잔치를 언급하신 것은, 그날이 반드시 온다고 예언하신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지상에서는 한 번도 맛보지 않은 포도주를 뜻하는 말로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기쁨과 행복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은 포도주인데,

여기서는 파스카 음식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 라는

말씀은, “포도주를 다시 마실 틈이 없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이 곧 닥친다는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의 뜻을 다시 정리하면,

수난과 죽음이 곧 닥칠 것이기 때문에 또다시 파스카 음식을 먹을 틈도 없지만,

머지않아서 하느님 나라 잔치가 열릴 것이고,

그 잔치 음식을 먹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지상에서의 성체성사와 하느님 나라의 잔치가 연결되어 있음을

암시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지상에서의 성체성사는 하느님 나라 잔치의 시작이고,

하느님 나라 잔치는 성체성사의 완성”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통해서 하느님 나라 잔치에 미리 참여하게 되고,

그 잔치 음식을 미리 맛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나해

 -조욱현시부-

 

성체성사의 신비는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찬미를 모두 동원하여도 그 신비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그래서 부속가 2절에 “정성다해 찬양하라. 찬양하고 찬양해도, 우리능력 부족하다.” 하고 있다.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화 시키는 효과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의 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취하셔서 우리를 당신으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다.

 

복음: 마르 14,12-16.22-26: 이는 내 몸이다. 이는 내 피다.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포도주를 축성하시며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라고 선언하실 때, 이 말씀은 제1독서의 모세의 선언,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계약이란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를 제물로 바치심으로써 계약을 맺으신다. 바로 당신 자신이 새롭고 영원한 계약이 되신다. 성체성사는 그러기에 새로운 계약인 것이다.

 

복음의 앞부분은 희생제물로 바쳐지고 그것을 먹어야 하는 파스카 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러나 새로운 파스카 양은 당신 자신을 희생제물로 바치시는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성체성사는 이러한 그리스도 행위의 예고이며 다른 한 편으로는 그 행위의 재현이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22절)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봉헌하는 것도 또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루카는 이 사실을 더 분명히 전해주고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24절) 축복양식의 이 말씀은 희생제물을 바치며 거행했던(탈출 24,5) 시나이산에서의 계약(탈출 24,8)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피를 흘린다는 것”은 분명히 희생제사(레위 1,5.12.15; 3,2. 8.13)에 항상 연결된 죽음의 행위를 연상케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종합하면, 성체성사는 무엇보다도 주님의 돌아가심을 거행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면서 하신 모든 말씀은 당신의 몸이 창에 찔려 피가 완전히 다 쏟아진 성금요일에 입증된 죽음의 상황의 재현이다. 이 모든 것은 희생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창에 찔리는 고통과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해 아버지께 사랑의 봉헌을 통해 자신을 바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현존”일 뿐 아니라, “희생”이다. 예수님께서 갈바리오 산 위에서 바치셨고 오늘도 당신 사랑으로 우리 모두를 감싸시며 성사를 통해 신비스럽게 재현하시는 바로 그 “희생” 자체이다. 이러한 것으로 성체성사를 거행할 때 느끼게 되는 매력적이면서도 두려움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히브리서에서도 “피”로써 새로운 계약을 맺는 “희생”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구약의 사제직과 대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탁월성을 강조하고 있다. 구약의 사제들은 물질적인 희생제물을 봉헌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영원히” 당신 자신을 봉헌하셨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모든 인간을 악에서 해방하시어 당신 자신과 더불어 “영원한 상속 재산”(히브 9,15)을 받을 수 있게 해 주셨다. 이 상속 재산은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의 피로써 “새로운 계약”의 중재자가 되심으로써 보증하셨던 영원한 생명, 구원이다. 우리는 이미 신앙을 통해 성사적 표징 안에서 미래의 “유산”을 차지하고 있다.

 

이 유산은 서두에 말했듯이, 성체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로 변화시켜주는 성사이며, 그래서 참 아들딸이 되게 하는 성사이다. 즉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성사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화 되어 그리스도와 같이 된다면, 우리는 한 몸 그리스도를 이루게 되며 그리스도로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제는 성체성사를 열심히 거행하며, 합당한 준비로 성체를 영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성체성사는 그리스도 수난의 기념이며, 옛 계약의 완성이며,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놀라운 일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며, 인간에 대한 그리스도의 무한한 사랑의 놀라운 증거”(Opuscolo 57)라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말하고 있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가 주님에게서 받은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간직해야 하는지 알려 주십니다.

"내가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음식을 먹을 내 방이 어디 있느냐?"(마르 14,1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내시며 이르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내 방" 즉 당신의 방을 찾고 계십니다. 파스카 예식을 치르면서 함께 음식을 나눌 방이 필요하신 건데 왜 굳이 "내 방"이라고 하셨을까요?

"내 방"

이는 당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방'을 의미하고 또 '그분께 속한 방'이란 의미도 포함합니다. 머리 둘 것 없으셨던 예수님께서 에루살렘 도성 안에 당신 방을 소유하셨을 리는 없을 터이니, 이 "방"은 그저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을 겁니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마르 14,22)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르 14,24)

예수님께서 파스카 예식 중 쪼개어 나눠주는 빵이 당신의 몸이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그 긴 세월 동안 내내 행하였던 의식이고, 빵 나눔인데, 당신의 영원하고 결정적인 파스카 제사를 준비하시는 이 때 그 의미를 새롭게 규정하신 겁니다.

제1독서에서는 시나이 산에서 주님과 백성이 계약을 맺는 장면입니다.

"모세는 피를 가져다가 백성에게 뿌리고 말하였다. '이는 주님께서 이 모든 말씀대로 너희와 맺으신 계약의 피다.'"(탈출 24,8)

피를 뿌리는 예식은 모세가 주님의 모든 말씀과 모든 법규를 일러주고, 이 모두를 실행하겠다고 백성이 응답한 뒤 이루어집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기 직전, 주님의 백성이 문지방과 상인방에 바른 어린 양의 피는 그들을 대살육의 재앙에서 보호해 주었지요.(탈출 12,23 참조) "피"는 함부로 흘리거나 먹어서는 안 되는 생명 그 자체로서, 이제부터 주님과 백성을 마치 혈연관계처럼 결속시켜 주는 동시에 주님의 소유가 된 백성을 보호해 줄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이루어진 새 계약을 이야기합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히브 9,14)

성자의 희생 제사로 우리에게 더 이상 짐승을 잡고 그 피를 뿌리는 예식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봉헌하는 미사성제야말로 우리 구원을 위해 새롭게 당신 자신을 바치시는 십자가의 제사이기 때문입니다.

"새 포도주를 마시는 그날까지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결코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르 14,25)

이스라엘이 짐승의 피로 하느님과 맺은 계약은 예수님의 피로 완성되었고,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마실 새 포도주를 기다립니다. 새 포도주는 성령, 사랑, 그리고 영원한 일치입니다. 더 이상의 고통도 눈물도 없을 그곳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줄 피는 뜨겁고 열렬한 사랑의 합일로 이어져 우리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줄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리라."(영성체송)

오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을 전부 내어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기념하는 축제의 날입니다. 우리에게 내주시는 그분의 몸과 피는 이 세상에서 그분의 현존을 보증하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이를 받아 모시는 우리는 설령 아무리 부족하고 나약한 죄인이어도 주님께 머물러 차츰 주님으로 변모되어 갑니다. 우리 자신이 파스카 예식이 이루어지는 "내 방" 곧 '주님의 방'이 되어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성체의 삶을 완성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주님의 몸과 피를 모시고 주님 안에 머물러 사랑을 누리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코로나19의 조심스런 상황에서 첫영성체를 하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을 축복하면서, 그들로 인해 우리 가정과 교회, 세상이 더욱 정화되고 성화되길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주변에 있는, 영육으로 굶주린 이들에게 소박한 나눔으로 성체의 삶을 완성하는 오늘 되시면 좋겠습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을 축하드립니다.

 말씀 나누기 - 성체왕 성혈 대축일-천치밥통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8년 6월 3일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받아라. 이는 내 몸이다.”  또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제자들에게 주시니 모두 그것을 마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는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 (마르코 14,12-16.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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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흠 없는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발라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날 밤 어린 양의 피가 발라놓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재앙에서 구원되고 이때부터 유월절이 되면 어린양을 잡아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이것이 구약의 계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양이 아닌 당신 자신을 바침으로써 새롭고 영원한 유월절의 양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체 성혈로 인류는 죽음과 죄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체 성혈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일치를 이루는 신비와 인류에 대한 사랑의 계약이 성립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피로써 인간이 거룩한 하느님과 하나되었음을 의미합니다. 피의 계약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진정한 자녀가 되었고 우리 모두는 형제 자매가 되었습니다. 

-키엣대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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