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9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2021년 5월 29일 연중 제8주간 토요일
오늘은 우리 나라의 124위 순교 복자들을 기념하는 날이다. 이 124위는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하여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다.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로,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는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라, 그가 속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을 기념일로 정하였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순교자 현양을 위하여 이날을 성대하게 지내기로 하였으며(기원 1), 교구장의 재량에 따라 성 바오로 6세 기념일도 선택하여 거행할 수 있도록 결정하였다(주교회의 2019년 추계 정기 총회).
★★★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요한 12,24-26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죽어 가는 씨앗’을 통하여 추수철에 많은 결실을 내는 이야기는 복음서에 자주 나옵니다(마태 13,3-9; 마르 4,3-9 등 참조).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에서 이를 부활과 영원한 행복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15,35-44 참조).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목숨을 바쳐 많은 이에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한 순교자들의 모범은 ‘땅에 떨어져 죽고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과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103위 순교 성인들과 오늘 기념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의 동료 순교자들은, 테르툴리아누스 교부가 말한 대로 ‘교회의 씨앗’임이 틀림없습니다. 순교자들은 박해자들의 온갖 회유와 궤변에도,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이신”(5월 29일 성무일도, 독서 기도, 제2독서) 하느님을 결코 배신할 수 없음을 담대하게 밝히며, 죽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굳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그들은 주님께서 주시는 “어떠한 적대자도 맞서거나 반박할 수 없는 언변과 지혜”(루카 21,15)로, 소중한 목숨을 바쳐 자신들의 신앙을 끝까지 증언하였습니다.
순교자들의 신앙 앞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우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의 믿음을 통하여 우리도 이 세상 것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는 신앙인으로 살아가도록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신앙을 증언합시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역사상 유명한 천재 한 명을 뽑는다면 누구를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 ‘아인슈타인’을 떠올릴 것입니다. 과학 일반, 특히 물리학 분야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입니다. 가장 중요한 현대의 기술 몇 가지는 그의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할 정도로 그의 업적은 뛰어나다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이런 아인슈타인이기에 사람들은 그가 아주 뛰어난 천재이고 실수를 거의 하지 않았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하지만 그는 복잡한 수학 문제 풀기를 좋아했지만, 쉬운 문제는 잘 풀지 못했다고 합니다. 또 중요한 연구에서 계산상의 실수도 많이 범했습니다.
이렇게 실수가 잦았지만, 그 누구도 그를 실패자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시도를 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실수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기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실수가 있어야 지금보다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가 넘어지는 실수를 두려워한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 아이는 걷지 못할 것입니다. 계속 넘어지고 넘어지면서 걷는 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이렇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는데, 왜 어른이 되어서 실수를 두려워할까요?
오늘 우리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미사를 봉헌합니다. 우리나라의 순교자들을 묵상해 봅니다. 그들 역시 처음에는 완벽한 신앙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실수나 실패를 자주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존경받고 사랑받는 것은 그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너무 무섭고 가족에 대한 사랑 때문에 배교를 하신 분도 계셨습니다. 그렇게 실패했다고 주님께서 벌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 역시 받아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배교를 했다가 곧바로 다시 순교를 선택하신 분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하셨던 우리 선조들의 신앙이 밀알이 되어 땅에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땅에서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으며, 주님 안에서 힘을 얻고 참 기쁨의 생활을 하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간직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실수나 실패에 연연하지 않고, 사랑이신 주님을 굳게 믿으면서 생활해야 합니다. 우리도 한 알의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사소한 문제로 친한 친구와 크게 다퉜습니다. 그런데 다투는 와중에 ‘이게 이렇게 싸울 일인가?’라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라고 다짐을 했고, 정중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했습니다. 그런데 친구의 반응에 크게 실망했습니다. 친구는 정색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게 무슨 사과야?”
이 말에 화가 치밀어서 “미안하다고 했잖아. 내가 뭘 어쩌라고.”라고 말하면서 더 큰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누가 문제라고 할 수 있을까요?
둘 다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의 해결이 이루어질 수 있는 순간이 있었습니다. 바로 ‘내가 먼저 사과해야지.’라는 마음이 들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사과해야겠다’라는 생각에만 멈춰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먼저였습니다.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잘못했다고만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입으로만 하는 사과는 상대에게 아무런 감응도 주지 않습니다. 우리의 뉘우침도 혹시 이런 것은 아니었을까요?

자녀를 어른으로 대하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전삼용신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렇지만 복음의 흐름상 복음 묵상은 연중 제8주간 토요일로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몰아내신 다음 유다 지도자들이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런 일을 하는 거냐는 논쟁을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권한은 분명 하늘에서 오는 것이지만 그들이 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아십니다.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 하나를 물으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권한입니다.
그들은 요한의 권한이 하늘에서 온다고 하면 그가 증언한 당신을 왜 믿지 못하느냐고 말할 것을 알고 또 땅에서 오는 것이라고 하면 군중에게 욕을 먹을 것 같아서 모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러면 당신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시는 것인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유다 지도자들도 당신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위해 피를 흘리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피를 받을 자격이 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는 냉혹하다시피 대하십니다.
자녀에게는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어야 하는 것이 맞지만 자녀라고 해서 무조건적으로 내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사랑이고 자녀를 위해서도 부모를 위해서도 좋습니다. 우리나라 많은 부모들은 많은 경우에 자녀들을 끝까지 자신의 품에서 놓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자녀들도 정서적으로 독립할 수 없고 그렇다면 아기가 부모에게 끊임없이 요구하듯 그 요구를 들어주다가 부모는 피가 마르고 맙니다.
박애희 작가의 『인생은 언제나 조금씩 떠나간다』의 ‘모든 것을 주면 떠나버리는 사랑의 슬픈 법칙’이란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부모와 자녀의 이상한 법칙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버스 기사님이 오른편 맨 앞자리에 앉아계신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분은 같은 동네에 사는지 무척 가까워 보였다.
“어무니, 그래서 결국 준겨?”
“아니, 그럼 어떻게? 죽는소리를 하는데!”
“아이고, 내가 안 된다고 했잖여. 봐봐. 이제 아드님이 찾아오는지.”
“그러게. 나도 영 안 돼 보이긴 해서 주긴 했는데, 이젠 통 연락이 없더라고.”
“그게, 그런 거여. 어무니. 부모는 돈이 힘이여! 그걸 미리 다 줘버리면 부모를 잊는다니까!”
“그래도, 갸가 마음은 여려.”
“아니, 마음이 여린데 어머니 돈 다 가져가 버린대?”
“지 사는 게 영 마뜩치 않으니까 그런 거지 뭐. 아니, 이번 한 번 만이라고 말하는데, 어떻게 안 줘.”
“아이고, 어무니도 그렇게 마음이 약해서 어디다 쓴데? 아니, 지난번엔 첫째한테도 다 퍼줬으면서….”
“어떻게 안 줘? 자식 앞에서 모진 부모가 어딨게? 아, 그라고 이제는 더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어.”
“아휴, 어머니가 우리 엄니였으면 좋컸네유. 아참 어머니 병원 가시는 길이라고 했죠? 무릎은 어떠신겨?”
[출처: 유튜브 채널, ‘책 읽는 다락방 J’]
대화는 이어지지만 여기까지 보도록 하겠습니다. 부모님들은 다 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시겠지만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무릎이 아파서 병원에 다니는 데도 관심이 없습니다. 다만 어머니의 돈에 관심이 있습니다.
이렇게 된 것에는 부모의 책임도 적지 않습니다. 자녀를 아직도 품에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품에 안긴 자식은 ‘모기’입니다.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하는 존재로 자신을 인식합니다. 하지만 자녀가 세상에서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한다면 부모는 자녀를 정서적으로 독립시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과 똑같은 ‘어른’으로 대해야 합니다. 돈을 받을 자격이 있어야 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12살이면 부모는 자녀에게 유산까지 주고 모든 관계를 청산합니다. 자녀를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자녀들도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고 자기 삶에 책임을 지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진리를 청하는 유다인들에게 ‘No!’ 하십니다. 당신에게 진실하지 않은 사람에게 진실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른 취급을 하시는 것입니다. 어린이 취급은 어린이 때면 충분합니다. 어른 취급을 할 때 자녀도 부모를 어른으로 대하게 됩니다.
결국, 자녀들을 정서적으로 독립시키지 않은 부모는 어떻게 될까요? 계속 젖을 찾고 젖이 나오지 않으면 젖꼭지를 물어버리는 아이처럼 됩니다. 부모는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끝까지 주다가 죽는 것이 부모의 삶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자녀에게 좋지 않습니다. 자녀를 영원한 어린이로 만들어버리고 결국엔 다 주어도 자녀는 부모에게 감사할 줄 모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떠난 후에 남겨진 것들』의 한 에피소드를 읽어봅시다.
이 책의 작가인 김새별은 고독사나 자살 등으로 돌아가신 분의 유품을 정리하고 청소하는 독특한 직업을 가진 사람입니다.
무엇이 그리 급했던 것일까? 작업절차를 채 설명하기도 전에 유족들은 우르르 안방으로 몰려갔다. 장롱문을 열어젖혀 이불 사이를 뒤지고 서랍을 빼내어 바닥에 뒤엎었다. 남자 여자 총 다섯 명, 서로를 부르는 호칭으로 보아 고인의 딸과 사위, 아들인 듯했다. 무슨 유서를 저리 요란하게 찾는 건가 했는데, 집문서 운운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체 어디다 숨겨놓은 거야?”
“금반지랑 금두꺼비도 있다더니 없는데?”
안방에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가족들은 나머지 방과 거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전달해줄 것을, 가족들은 집 안을 뒤죽박죽으로 헤집으며 청소만 어렵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아무리 의뢰인이고 소중한 고객이지만, 저런 사람들을 위해 청소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겠다고 말한 뒤 밖으로 나왔다. 찌는 듯한 여름이라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땀이 흘렀다. 그렇게 삼십 분이 넘게 지났을까.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이웃들이 퇴근해 집으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작업을 마쳐야 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마침 가족들이 나오는 참이었다. 원하는 것을 못 찾았는지 얼굴들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첫째 사위인 듯한 이가 물건이 나오면 전달해달라고 요청했다. 물론이었다. 앨범, 휴대전화, 신분증, 각종 서류, 통장, 현금, 귀중품 등은 요청하지 않아도 확실히 전달한다.
가족들이 어지럽혀놓은 통에 집 안은 더욱 정신이 없었다. 구역을 나눠 인원을 배정하고 유품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업이 마무리될 때까지 가족들이 원하는 것은 나오지 않았다. 유품을 담은 박스들을 차량에 실으라고 지시한 후, 정리 중에 나온 앨범과 사진 액자를 닦았다. 전해주기 위해 나가 보니 아파트 입구 쪽에 가족들이 모여 있었다.
“다른 물건은 없고 이것만 나왔습니다.”
딸이 실망한 얼굴로 액자와 앨범을 받아들었다. 순간, 아들이 그것을 냅다 빼앗아들더니 한쪽에 세워두었던 우리 차량 적재함으로 집어 던졌다.
“냄새도 심한 걸 뭐하러 가지고 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액자 유리가 깨졌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꺼림칙하다면 사진만 빼서 간직해도 될 것을. 나는 적재함으로 뛰어올라가 액자를 집어들었다.
“사진만 빼내면 괜찮을 겁니다.”
그러고는 사진을 빼기 위해 액자 뒷면을 떼어냈다. 그 순간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현금과 봉투였다. 액자 안의 스티로폼 중간 부분을 잘라내고 넣어놓은 것이었다. 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적재함 바닥으로 쏠렸다. 아들이 뛰어왔다. 돈과 봉투를 주워들고 막 건네려는데 아들이 휙 낚아채 갔다.
가족들이 모두 다가오고, 아들은 돈을 세기 시작했다. 오백만 원이라고 했다. 봉투에는 집문서가 들어 있었다. 나는 아들에게 사진을 내밀었다.
“이것만이라도 간직하시죠.”
아들은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마지못해 받아들었다. 그에게는 집문서와 현금만이 중요했다. 그 돈은 장례비용이었으리라. 죽는 순간까지 남겨진 자식들을 걱정하는 것이 부모다. 부모의 사진을 버리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현금과 집문서를 액자에 넣어놓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들은 고인의 사진을 더도 덜도 아니게 쓰레기 취급했다.
아버지가 홀로 살다 돌아가시고 스무날이 지나서야 그 사실을 알았는데 누구 하나 슬퍼하지 않았다. 고인의 시신을 처음 발견한 것도 자식이 아닌 옆집 할아버지였다. 이런 경우 조금 더 일찍 발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애초에 죽음을 막지 못한 것에 대해 후회하고 자책하느라 가족들은 가슴 아파한다. 그런 가족들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서 과연 위로가 될까 회의하면서도 위로의 말을 건네곤 했다.
그러나 그날은 가슴 아파하는 가족도 없었고 그러니 위로의 말을 건넬 필요도 없었다. 처음으로 사람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영혼이 있어서 고인이 지켜보고 있다면 그 심정이 어떨 것인가. 보는 이의 마음이야 어떻든 원하는 것을 얻은 가족들은 이제 볼일이 끝났다는 듯 총총히 사라졌다. 나만이 쓸쓸함을 감추지 못한 채 그 자리를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
참 씁쓸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냉정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부모가 자녀를 끝까지 자신의 자녀로 품고 있으려고 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자녀를 주님께 봉헌하거나, 적어도 이웃집 아저씨, 아줌마처럼 독립적인 존재로 대하지 않으면 자녀는 결국 부모를 이렇게 대하게 될 것입니다. 부모는 죽어가면서도 여전히 자녀들에게 피를 빨릴 존재이고 더는 피가 나오지 않으면 버려질 존재일 뿐입니다.
자녀가 모기의 본성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면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어느 순간이 되면 자신과 같은 동등한 존재, “네가 말 안 하면 나도 안 해!”라는 식으로 대해야 합니다.
부모가 먼저 자녀를 동등한 어른으로 대하지 않으면 자녀는 끝까지 부모를 자기가 아기였을 때처럼 대할 것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하느님께 봉헌하셨고, 예수님도 당신을 찾는 부모에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아버지 집에 있어야 하는 것을 모르셨습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만이 결국 자녀가 부모 또한 자신과 동등한 하느님의 자녀인데 자신을 무상으로 키워준 것에 대해 감사하게 만드는 길입니다.

-조재형신부-
가정방문을 다녀왔습니다. 2012년 본당사목을 마치고 가정방문을 다닌 적이 없었습니다. 교구청에 있었고, 지금은 신문사에 있기에 가정방문을 다닐 기회가 없었습니다. 부르클린 한인 성당의 미사를 도와 드리면서 가정방문을 요청받았고, 다녀왔습니다. 집에는 몸이 불편하신 형제님과 형제님을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습니다. 함께 갔던 자매님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성당에 아버지가 계신 것 같습니다.” 계속 손님신부님이 미사를 봉헌했기에 가정방문을 부탁드릴 수 없었다고 합니다. 몸도 불편하셨고, 코로나19의 위험 때문에 1년 동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성체를 영해 드렸습니다. 형제님은 눈물을 흘리면서 성체를 모셨습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저를 필요로 한다면 가정방문을 다니면서 몸이 불편하신 분들에게 성체를 영해 드리려고 합니다.
본당에 있을 때는 한 달에 한번은 봉성체를 다녔습니다. 주로 어르신들이 많았습니다. 침대에 누워계시는 분들이 있었고, 기억을 잃어버린 분도 있었습니다. 뇌수술을 하였던 학생도 있었습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사고로 목발에 의지하는 청년도 있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명으로 걷지 못해서 휠체어에 의지하는 젊은이도 있었습니다. 모두들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모셨습니다. 목발에 의지하지만 새로운 직업을 구했다는 청년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저도 기뻤습니다. 수술 경과가 좋아졌다는 학생이 머리카락이 많이 자랐다고 좋아했을 때는 저도 좋았습니다. 평생 걷지 못하는 자매님이 밝은 모습으로 제게 인사할 때면 가슴이 찡했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기다리면서 성체를 모시던 분들이 생각납니다.
예전 세검정 성당에 있을 때입니다. 근육이 마비되는 증상이 있어서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젊은이가 제게 시를 하나 주었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해서 자유롭게 다닐 수 없었지만 젊은이의 영혼은 저보다 훨씬 자유롭고, 고결했습니다. 오늘은 그 친구가 제게 주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세상은/ 별들이 많은/ 은하수 같은 것입니다.
별들이 많기에/ 밤하늘이 아름다울 수 있지만
그 뒤에는/ 우주라는/ 어두운 하늘이 있습니다.
별들이 밤하늘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아름다울 수 있는 겁니다.”
현대사회는 성공, 1등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꽃밭의 꽃들은 서로 자기가 1등이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꽃밭에서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장애인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활 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서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모든 인간은 흔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신앙은 1등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패와 허물을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저의 삶에도 바람이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후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20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IMF의 거센 파도가 저에게도 밀려와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다리가 골절돼서 15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혈압도 높고, 치아도 좋지 않은 편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며, 비에 젖으며 피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합니다. 시련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기 때문입니다.
오늘 축일로 기억하는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증거하였고,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이영근신부-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순교자들 기념일입니다.
그들 중 5위(이일언, 신태보, 이태권, 정태봉, 김대권)가 1839년 전라도 전주 숲정이에서 순교한 날입니다.
이들은 한국초기교회의 순교자들로서, 시대로는 오히려 103위 성인보다도 앞서 사셨던 분들입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는 병인박해 순교자 103위를 시성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에 입국하기 전에 교회를 일궈낸 이들이 누락되었다가, 2014년 프란치스코 교종에 의해 신해박해(1791)부터 병인박해(1866)까지의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된 것입니다.
이들 중 최연소자는 12세로 이봉금 순교자이며, 최고령자는 75세로 한국인 첫 사제 김대건의 증조부인 김진후 순교자이며, 이들 가운데, 첫 순교자 윤지충과 권상연은 이종사촌입니다.
전라도 진산 출신으로 1790년 베이징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신주를 불사르고 모친상을 천주교식으로 치렀다가 체포령을 내려지자 자수했습니다.
1791년 12월 8일에 전주 남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첫 기념일을 앞두고 당시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 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님은 <특별담화문에서, 그들은 “신분 차별과 불평등, 가난이 일상화되었던 시대에 그리스도의 형제애를 보여주었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특별한 관심을 보여주었다”고 말씀하시면서, “복자들에게 물려받은 신앙의 유산을 이웃들과 함께 나누고, 그분들의 도움으로 우리도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자”고 권고하였습니다.
다블뤼 주교는 『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에서, 윤지충 바오로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진산 군수가 “네가 사교(邪敎)에 빠져 있다는 게 사실이냐?”고 묻자, “저는 전혀 사교에 빠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천주의 종교를 따르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진정한 길입니다.” 라고 대답하였고, 또 다른 곳에 이송되어서도 “왜 사교에 빠져 방황하느냐?”고 문책하자, “저는 조금도 사교에 빠진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하늘과 땅, 천사와 사람,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창조자요 위대한 아버지신데, 그분을 섬기는 것을 사교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합니다.
이는 그야말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는 말씀을 몸으로 보여줍니다.
곧 목숨을 바쳐 섬기는 순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곧 “순교”입니다. “섬김”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섬김의 순교”를 통하여 복음이 증거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밀알이 되어
-반영억신부-
‘봄에 씨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수고와 땀없이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헛수고입니다. 열매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 노력해야 합니다. 열매는 최선을 다한 후 따라오는 선물입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의 풍요로움도 그에 걸맞은 정성이 필요합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그 선물의 소중함을 받아들이려는 수고의 몫은 우리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묵은 나는 죽고, ’새로운 나‘로 태어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이기적인 나‘에서 죽고, ’영적인 나‘로 거듭 태어나야 합니다. 내 뜻을 이루거나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따르는 것에, 모두를 걸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이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됩니다. 사랑과 헌신은 희망을 이룹니다. 시편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126)
희망을 오늘 여기서 살아냄으로써 기쁨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기념일(루카9,23-26)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광
오늘은 잊었던 감격을 일깨우는 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을 다시 묵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124위 시복식미사 강론 전문 (2014,8,16)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없이 많은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복음: 요한 12,24-26: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조욱현신부-
오늘은 한국천주교회의 초기의 순교 복자들 124위,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떼르뚤리아누스 교부는 『순교자들의 피는 그리스도인들의 씨앗이다.』(호교론 50,13) 했듯이 이분들은 참으로 우리 한국천주교회의 씨앗이 된 분들이다. 지난 2014년 8월 16일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주례로 시복되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우리 순교자들은 모두 오늘 복음에 나오는 한 알의 밀알이었다. 그 밀알이 죽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다시 살아나 많은 열매를 맺었다. 오늘의 한국천주교회의 모습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신 길과 같다. 예수께서 지상 생활을 하실 때는 하느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십자가와 부활의 열매로 모든 이가 그분을 알게 되었듯이 순교자들의 피는 이렇게 열매를 맺은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이란 자신의 삶에 대해 과도한 욕망에 빠짐으로써 자기를 파괴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돈에 대한 집착 때문에 자기 자신이 파멸하고 마는 결과를 초래한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이러한 집착에서 자유로우며 진정으로 하느님 안에 살아있는 사람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위해 우리 자신을 이겨 나가야 한다. 순교자들이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늘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이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그분을 올바로 섬기려면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 그분은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그분이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사랑을 실천할 때, 선을 행하려는 뜻 말고 다른 의도가 있어서는 안 되며,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한다(마태 6,3 참조).
오늘의 순교 복자들처럼, 우리도 주님을 따르는 삶을 살아가면서 그분을 닮도록 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으며, 당신의 죽음으로 아버지의 뜻을 위해 가장 큰 사랑을 드리셨다. 우리가 지금 순교 정신을 산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것같이 나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끊고 나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실현하며 그분을 체험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분의 길을 가지 못하면서 그분을 따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삶으로 순교자들을 기리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신부-
새로운
시대는
그냥 오지
않는다.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고
누군가의
순교가 있었다.
신앙은
실천이다.
이 땅에서의
실천이다.
우리가
직면하는
현재의
절박한
실천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실천으로
어둠을 밝히신다.
실천이 빛이며
빛을 따르는
순교는
낡은 가치를
갈아엎는
새로운 실천이다.
또다른 삶이
있다.
욕망을
치유하는
순교이다.
순교는
삶의 씨앗이며
믿음의 씨앗이다.
신앙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는
밀알 하나이다.
순교의 영성은
더 좋은 세상을
위해 한 걸음
앞으로 나가는
성장의 영성이다.
참된 영성은
사악한
우리마음을
선하게
변화시킨다.
순교의 출발점은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일깨워주는
삶의 출발점이다.
이 땅의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은
인간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다시금 일깨워준다.
구원은 현실을
변화시키는
뜨거운 삶이다.
뜨거운 삶은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게 하는
순교의 참된
안목이다.
사악함이 아닌
참됨의 가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순교(증거)의 의미를 들려 주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은 제자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밀알을 빗대어 증거의 삶을 이야기하십니다. 밀알이 썩는다는 건 그 자체의 형상이 훼손되고 무너지는 겁니다. 고유하게 지녔던 형태와 내용이 사라져서 자기가 없어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지요.
밀알이 땅에 묻히면 흙의 온도와 양분, 수분이 씨앗을 불리고 썩혀 형태를 무너뜨리지만, 그 대신 그 안에 내재되었던 생명력이 끌어내어집니다. 그러니 끝까지 제 형태를 고수하려면 흙이나 수분을 거부하면 되고, 반대로 더 많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썩기를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지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예수님은 섬김과 따름, 함께함을 하나로 엮어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어 따르고, 그러면서 그분이 좋아하실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을 섬기는 건 마치 한 호흡처럼 자연스레 이어지는 수순이지요.
그런데 이 따름과 섬김은 대상에 대한 사랑에서 발화합니다. 사랑을 빼고서는 닮음이나 따름, 섬김이 불가능하지요. 그래서 반드시 물리적이지 않아도 그분과 늘 함께 머무르는 상태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하는 대상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곧 사랑 안에 머무름입니다. 순교는 결국 사랑하는 대상 안에 자신을 묻어 그분의 행위 안에 완전히 썩어서 녹아드는, 그래서 자신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신비일 것입니다. 무수한 순교자의 죽음이 예수님의 희생제사 안에 하나로 합쳐져, 아버지께 바치는 같은 사랑의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이교 제사의 위협에도 율법을 지키기 위해 순교를 받아들인 엘아자르라는 현인이 등장합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2마카 6,26)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눈속임을 제안 받은 엘아자르의 일갈입니다. 잠시의 기만으로 죽음의 손길은 피한다 해도 전지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앞에 부끄러울 짓은 하지 않겠다는 각오지요.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엘아자르가 고백한 경외의 마음이 곧 주님께 드리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을 해치고 훼손하여 물리적인 흔적을 지우려는 죽음의 손길도 마다하지 않게 하지요. 그래서 비록 이 세상에서는 목숨을 잃어 사라질지라도 믿음의 증거이자 사랑의 증거인 순교는 영원히 남아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자라게 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리며 시성을 기원하는 오늘, 교리와 성사를 제대로 접할 수 없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주님께 뜨겁고 충실한 단심을 바쳐드렸던 사랑을 묵상하며, 우리에게도 그 은혜를 주십사 청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사실 순교(증거)를 목적으로 사랑하는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순교(증거)할 수 있는 겁니다. 썩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저 사랑이 시키는 일을 하나씩, 그렇게 하루씩 채워가다 보면 우리는 사랑 안에 주님과 하나 되어 사랑을 완성해 나가게 될 것이고, 그저 죽어 사라지는 게 아니라 더 풍요로운 생명의 열매로 탈바꿈할 것입니다. 증거의 삶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 모두를 축복합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해 빌어주소서. 아멘.

일생과 영생
-김찬선신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오늘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축일에 우리는 또 알아듣기 힘든 말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거라는 말씀과 마주합니다.
그런데 미워해야 할 '자기 목숨'은 무엇이고
간직해야 할 '목숨'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의 저는 미워해야 할 또는 잃어야 할 '자기 목숨'을
자기만의 목숨 또는 자기 것으로 소유한 목숨으로 이해했고,
'목숨'은 하느님이 주신 목숨 또는 하느님의 목숨으로 이해했습니다.
우리 신앙 안에서 자기 것이란 아무것도 없고 다 하느님 것이며
목숨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목숨이고 재물이고 하느님께서 주셔야지만
우리는 그것을 지닐 수 있고 걷워가시면 지닐 수 없는데
목숨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면 하느님께서 주신 목숨에서 이탈하기에
아무리 애지중지하여도 그 목숨은 시들하게 될 것이고 죽게 될 것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포도나무와 가지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바와 같은 내용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각도를 약간 달리해서 성찰해봤습니다.
일생과 영생의 차원입니다.
일생, 한생, 한뉘, 일평생, 한평생은 모두 같은 뜻으로서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살아 있는 동안'이라고 사전은 얘기하고,
저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삶'이라고 바꿔 이해해봤습니다.
그러면서 하루살이를 생각해봤는데
하루살이의 일생은 하루입니다.
그 하루살이를 보면서 우리는 참 무상하고 허무하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영생의 하느님 또는 영원한 생명의 하느님의 눈에서 볼 때
이 세상에서 우리의 일생이라는 것은 얼마나 무상하고 허무합니까?
우리의 일생一生은 그야말로 영원분의 일一에 불과한 생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이라는 표현을 쓰시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자기 목숨이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자기 목숨이요
앞서 얘기한 일생 또는 한생을 말함인데 일생은 영생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랑해야 할 것은 일생이 아니라 영생이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목숨이어야 한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말씀하시는 것이고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과 모든 순교자들은 다
영생을 위하여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입니다.
바보가 아니고 자기를 진정 사랑한 사람들입니다.
바보는 오히려 영생을 생각지 않고 그저 일생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기를 사랑해야 하고 자기 목숨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런데 정말 자기를 사랑하고 목숨을 소중히 여긴다면
그 목숨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사랑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이 세상에서 삶을 집착하고 안주하는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오늘 주님으로부터 가르침 받는 우리들이고
오늘 축일로 지내는 순교자들에게서 본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29일 금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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