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6일 연중 8주간 수요일
2021년 5월 26일 연중 8주간 수요일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
필립보 네리 성인은 1515년 이탈리아의 중부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때 사업가의 꿈도 가졌으나 수도 생활을 바라며 로마에서 살았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을 위한 활동을 많이 펼친 필립보 네리는 특히 병들고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형제회를 조직하기도 하였다. 그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6세에 사제가 되어 영성 지도와 고해 신부로 활동하면서 많은 이에게 존경을 받았다. 동료 사제들과 함께 오라토리오 수도회를 설립한 그는 1595년 선종하였고, 1622년 시성되었다.
★★★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거기에서 사람의 아들은 넘겨질 것이다.
마르코 10,32-45
Behold, we are going up to Jerusalem,
and the Son of Man
will be handed over to the chief priests and the scribe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시고자 하신 길과 야고보와 요한이 가고자 하였던 길이 사뭇 다른 길임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한 부활이라는 구원의 길로 하느님의 일을 이루고자 하시지만, 야고보와 요한은 명예와 영광이라고 하는 세속의 길로 사람의 일을 이루고자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주님을 따르는 이유가 자신의 명예와 영광이라는 세속적인 욕심 때문은 아닌지, 또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하는 이유가 자신의 뜻을 온전히 이루려는 고집 때문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좇는 야고보와 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하고, 당신께서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의 명예와 영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이루는 것이 바로 신앙이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그 ‘선물’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선물을 위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주시는 하느님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바로 그 자리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기억하는 전화번호가 있습니까? 종종 자기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스마트폰에 모두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외우는 전화번호가 몇 안 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10개도 안 되는 것 같습니다(에구 부끄러워라~~). 스마트폰을 보면 되니까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예전에 운전할 때는 목적지까지의 경로를 머릿속으로 떠올렸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목적지만 정확하게 입력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즘에 내비게이션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떤 질문을 받습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보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으로 정보검색을 먼저 한다고 합니다. 그 수가 자그마치 40%입니다.
현대사회는 생각하지 않는 사회라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주님도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도와 묵상보다는 주님에 대한 정보만을 얻으려는 것만 같습니다. 우리의 뇌도 계속 사용을 해야 뇌 근육이 생겨서 활성화된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도 계속 사용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이 아닌, 단순히 내 문제를 해결해주는 심부름꾼 정도로만 생각하게 됩니다. 이때 주님 안에서 참된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계속해서 기도하고 묵상해야 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인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그 오른쪽과 왼쪽에 앉게 해달라는 부탁을 합니다. 외적으로 보이는 영광의 자리에 앉게 해달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단순히 하늘나라에서 주님 옆에 앉으면 좋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세상의 영광만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은 세상의 기준과는 다른 삶, 오히려 고통과 시련이 가득한 삶이었습니다. 따라서 좋아 보이는 외적인 삶만을 기대하고 쫓으며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 삶의 한가운데에서도 겸손과 사랑의 실천을 해야 합니다.
나 자신의 모습을 다시금 되돌아보면서 주님의 참된 제자가 되기 위해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기도와 묵상 안에서 우리의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잘 아는 동생이 힘들다며 당신을 찾아왔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때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마 이런 말을 할 것입니다.
“그 정도면 충분해! 고생했어! 좀 쉬어! 괜찮아, 다 잘 될 거야.”
그런데 힘과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니라 이렇게 말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핑계 대지 마! 노력 부족이야! 야!! 이 한심아! 너는 낙오자가 될 거야.”
당연히 이 후자의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이 후자의 말은 상처가 되는 힘이 빠지는 말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말이라면서 그런 말은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나’입니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일 때가 너무 많습니다. 더 나은 ‘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자기를 비난하는 것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 비난보다 자기 자비가 필요한 ‘나’는 아닐까요?

뒷짐 진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당신 수난에 대한 예고 다음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돌아가셔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누가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해야 하느냐에 더 큰 관심이 있습니다.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주실 영광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무엇이든 당신 때문에 버릴 수 있다면 그 백 배의 상을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버리지 않는다면 그 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이나 블랙홀에 상장을 던져주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을 먼저 버려서 또 다른 자신인 하느님을 선물로 받지 못한 상태라면 그 사람은 무엇을 버리든 버린 것이 아닙니다. 모두 자신을 위한 것이니 버린 것이 아니라 투자를 한 것이 됩니다. 그러면 버린 것에 대한 상이 무의미해집니다.
연예계에서는 소위 ‘배우 병’이란 것이 있습니다.
유재석 씨는 예능 촬영 도중 정준하 씨에게 “배우병 걸렸다. 자기가 배우인 줄 안다.”라며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정준하 씨가 개인 스타일리스트를 무려 5명이나 두고 주변 사람들에게 거만하게 대한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었습니다. 이처럼 ‘배우 병’이란 개그맨, 가수, 배우 중에서 배우들이 다른 직업의 연예인을 기본적으로 무시하는 것에서 나온 말입니다.
거의 매년 나오는 뉴스이지만 이번에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최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에서 유재석 씨가 ‘TV 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상을 받으러 나갈 때에 동료 개그맨들을 제외하고는 시큰둥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수상소감을 마치고 내려올 때는 더 싸늘한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자산어보’의 이준익 감독이 상을 받을 때는 모든 배우가 일제히 기립박수를 보냈습니다. 물론 수상소감을 마치고 내려올 때까지 아무도 자리에 앉지 않고 손뼉을 쳐 주었습니다. ‘배우 병’이라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었음이 증명되었습니다.
저는 왜 배우들이 그런 거만한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들이 일부러 그렇게 다른 연예인들과 급을 두려고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그들을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닌가 싶었습니다.
개그맨이나 가수들은 뼛속까지 개그맨, 뼛속까지 가수인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말은 개그맨들이나 가수들은 무대 위에서만이 아니라 일상에서도 남을 즐겁게 해 주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 뜻입니다.
남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은 자신의 재능을 사랑을 위해 봉헌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일상에서도 이어질 수 있는 직업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배우들도 촬영장에서는 말 그대로 연기로 자신을 바칩니다. 영화를 보는 이를 위한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 연기는 일상으로 이어질 수 없습니다. 만약 미친 사람 연기를 하거나 살인자를 연기하는데 본래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따라서 연기할 때는 기본적으로 자기 자신을 송두리째 그 배역에 내어놓지 못합니다. 말 그대로 관객을 위해 카메라가 찍을 때만 연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카메라가 꺼지면 자기 자리로 돌아옵니다. 자기를 지키려 하는 마음이 강한 것입니다. 직업상 자기 자신을 온전히 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주의하지 않으면 다른 연예인들보다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교만’인데, 나로 돌아오려는 마음이 강할 수밖에 없어서 자신들도 모르게 거만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가진 것을 봉헌하면 100배의 상은 분명히 받습니다. 하지만 자기 자신을 봉헌하지 않으면 말짱 도루묵입니다. 상을 주려고 해도 자기가 살아있다면 마치 뒷짐 진 사람에게 상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주는 즉시 땅에 떨어집니다. 겸손은 상을 받을 때 내어놓는 하늘을 향한 두 손과 같습니다.
오늘은 성 필립보 네리 사제 기념일입니다.
교황은 한 수녀원에 성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필립보 네리를 감시관으로 파견합니다. 그 성녀는 환시를 보고 많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필립보 네리는 그 성인이 상을 받을 손이 있는지부터 알아보려 했습니다. 그래서 일반인으로 변장하고 수녀원으로 향했습니다. 마침 폭우가 쏟아져 온몸은 비로 젖고 신발은 진흙으로 범벅이 되었습니다. 수녀원에 도착한 필립보 네리는 그 수녀를 오라고 하여 자신의 신발을 벗기고 발을 씻어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는 깜짝 놀라며 자기에게 어떻게 그런 천한 일을 시키느냐고 팔짝 뛰었습니다. 필립보 네리는 교황에게 가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그 수녀에 대해서는 더는 신경 쓰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 수녀원에는 성녀가 없습니다.”
우리는 연기로 우리 자신을 봉헌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모습이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나머지 사도들에게도 나타났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남을 행복하게 하려는데 진정으로 종이 되려는 마음이 없다면 선행을 하더라도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상을 받을 이유가 없습니다. 유재석 씨는 무명시절에 만약 자기가 다른 사람들처럼 유명해졌다고 거만해진다면 세상 모든 고통을 다 주셔도 달게 받겠다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 절실함이 있었기에 오랫동안 사람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저도 우리나라에서 연기를 잘한다고 소문난 어떤 배우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유명해지자 술좌석에서 후배 배우들에게 거만한 모습을 보인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 배우에 대한 좋아하는 마음이 싹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물론 진짜 그렇지 않기를 바라고 또 만약 그렇다면 다시 겸손한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도 항상 주의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도 사제로 하는 모든 이런 일들이 연기가 아니기를 바라고 뼛속까지 내어주는 군고구마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래야 바친 모든 것들의 100배의 상을 받을 손을 겸손하게 무릎 꿇고 내어놓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뒷짐 진 사람에게 상을 줄 수는 없습니다. ‘자기’를 봉헌하지 못한 사람에게 ‘자기 것’을 봉헌한 것에 대한 상은 의미가 없습니다.

-조재형신부-
스페인에 ‘톨레도’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성지순례로 몇 번 다녀왔습니다. 매번 가면서 대성당과 그림 그리고 유물을 보았습니다. 함께 미사하고, 엘 그레코 기념관엘 들렀습니다. 톨레도는 금세공이 유명한 도시입니다. 칼, 장신구, 시계를 구경하였습니다. 고백소에 놓으면 좋을 것 같은 시계를 사서 신부님들에게 드리기도 했습니다. 톨레도는 밖에서 보는 모습이 아름다워서 성 밖에 있는 다리 건너에서 보곤 했습니다. 역사탐방이라는 면에서 톨레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톨레도는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에서 가장 완벽한 성이라고 합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여있고, 한 면은 절벽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어디에서도 성을 공격하기 어려운 천혜의 조건을 갖추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톨레도는 위기의 상황에서 한 번도 도시를 방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완벽한 조건을 갖춘 성이었지만 성을 지켜야하는 사람들이 나약했고, 서로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결국 성을 지키는 것은 조건이 아니라, 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용기와 의지의 문제였습니다.
코로나19가 1년 넘게 지속되고 있습니다. 백신이 보급되고 있지만 아직도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합니다. 한 성당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헌금과 교무금이 줄었다고 합니다. 직원들의 월급도 주고, 성당 운영을 하면서 통장에 잔고가 얼마 없었다고 합니다. 걱정 중에 있었는데 놀라운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새벽에 성당을 문을 여는데 문틈 사이로 봉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봉투에는 약간의 봉헌금이 있었다고 합니다. 수녀님과 보좌 신부님과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다음 날에도 성당 문을 열려고 보니 봉투가 있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에는 편지와 함께 꽤 많은 봉헌금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이 재산의 반을 성당에 봉헌하셨습니다. 신부님은 감사하면서도 너무 많은 액수라서 어르신에게 돌려드리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르신은 한번 하느님께 봉헌한 것이니 성당에서 알아서 하라며 받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본당 신자분들은 신부님께서 매일 새벽에 성당 문을 열고 기도하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성당의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성당 문틈으로 봉헌금을 내셨습니다. 사제를 사랑하는 교우들과 매일 아침 성당 문을 열고 기도하는 사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있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도 작년 한해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홍보를 다녀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올해에도 아직 홍보를 다닐 여건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아직은 신문을 만들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부에서 직원들 급여를 줄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정책이 있었습니다. 제가 매일 올리는 묵상 글을 보시고 한국에서 후원금을 보내주시기도 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직원들이 올해는 급여를 삭감하였습니다. 우편함에 후원금을 넣어주고 가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비가 온 뒤에 땅은 더 단단해진다고 합니다. 마스크를 벗고, 이동이 자유로워지면, 구독신청서를 들고 홍보를 다니려고 합니다. 미주지역에 교회의 소식을 전하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과 신앙의 진리를 전하는 신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가르침에 목마른 독자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들보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는 독자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신부님은 성당 문을 열면서 바닥을 보곤 했다고 합니다. 문틈으로 봉헌금이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였다고 합니다. 저도 우편함을 열어보면서 독자들의 사랑을 기대합니다. 독자들이 구독료와 후원금을 보내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가난해서, 굶주려서 하느님과 멀어진 경우는 없었습니다. 교회가 하느님과 멀어졌을 때는 교회가 너무 많은 재산을 소유했을 때였습니다. 교회가 너무 많은 권한을 가졌을 때였습니다. 교회의 권력으로 세상의 권력을 다스렸을 때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 ‘권력과 자리’를 원했습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제자들도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권력과 자리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에로 이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섬기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고, 그런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은 손을 내밀 것입니다.
“당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보답을 주시고 당신의 예언자들이 옳다는 것을 드러내 주소서.”

나의 하느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양승국신부-
16세기 가톨릭교회는 안팎으로 다양한 도전에 시달리며 크게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비하신 하느님께서는 고통당하는 교회와 당신 양떼를 결코 그냥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고통과 시련도 허락하시지만, 이겨낼 힘과 위로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는 탁월한 성인성녀들을 선물로 보내주셨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필립보 네리(1515~1595) 성인입니다.이탈리아 중부 아름다운 문화와 예술의 도시 피렌체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필립보 네리는 음악과 시와 예술과 사람을 무척이나 사랑했습니다. 그 누구와도 잘 어울리는 낙천적인 성격에다 경제적으로도 탄탄했으니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필립보 네리는 로마 여행을 하던 중 순교자들의 무덤 카타콤바를 순례하게 되는데, 거기서 받은 감동이 컸던 것 같습니다. 지하 무덤에서 그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신비로운 황홀경을 체험하게 됩니다. 당시 체험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이런 고백을 서슴치 않았습니다.
“나의 하느님,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도저히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흘러넘치는 충만한 하느님 사랑을 온몸으로 체험한 필립보 네리는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빨리 전해주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사로잡혔습니다. 즉시 중환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중노동에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을 찾아갔습니다.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련한 사람들에게 다가섰습니다.
세상 친절하고 다정다감할뿐더러 유머 감각이 흘러넘치는 필립보 네리의 모습에 만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감동을 받았습니다. 감동을 받은 것 뿐만 아니라 필립보 네리 안에 현존해 계시는 하느님을 만났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그와의 만남을 통해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편안하면서도 영성적인 필립보 네리의 모습에 반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사제의 길을 추천했습니다. 결국 주변 사람들의 거듭되는 요청에 따라 1551년 서른 여섯 살의 나이에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순풍에 돛을 단 필립보 네리 사제는 열정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하루 12~15 시간 동안 고백성사를 집전했습니다. 필립보 네리의 다정다감한 모습은 중죄인들의 얼어붙은 마음을 순식간에 녹게 만들었습니다. 크게 회심한 사람들을 모아 ‘오라토리오’라는 영적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이 보여준 사목자로서의 가장 특징적인 모습은 넘치는 인간적 매력과 탁월한 유머감각이었습니다.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고 흠모했습니다. 다들 조금이라도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안달이었습니다.
그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수많은 명사들이 찾아왔는데, 대표적인 인물 몇만 꼽으라면 이렇습니다. 이냐시오의 로욜라 성인, 가롤로 보로메오 성인,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성인...
노동자든 추기경이든, 가난한 사람들이든 부자이든, 노인이든 청소년이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좋아했습니다. 특히 필립보 네리는 광장이나 길거리에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필립보 네리 신부님은 청소년들이 마음껏 젊음을 발산할 수 있는 장소나 기회를 조성했습니다. 청소년들이 모이면 간단한 교리 공부를 시작했고 이어서 그들이 좋아하는 놀이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언제나 버릇없고 개념없는 길거리 청소년들 사이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예의도 갖추지 않는 청소년들의 행동 앞에 화가난 어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했습니다.
“청소년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놓아 두십시오. 그들이 죄만 짓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를 몽둥이로 때린다 해도 저는 괜찮습니다.”
언제나 겸손하고 온유했으며, 늘 친절하고 다정다감했고, 그 어떤 사람도 거절하지 않고 환대했던 기쁨의 사제 필립보 네리 신부님의 모습 앞에 참으로 큰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예루살렘으로 가십니다.
그런데 뒤따르는 제자들은 두려워하였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보상을 꿈꾸며 따라가지만, 죽으러 가는 길인지라라 사뭇 참담한 분위기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 장면에서, 베드로는 저희가 가족도 집도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마르 10,28) 라고 말하였지만, 진정 버린 것이 아니었던 가 봅니다.
그런데 베드로로만 그런 것도 아닌 가 봅니다. 야고보와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 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마르 10,37) 라고 말합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들도 진정 버리고 따르지 못한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두 제자들은 불쾌하게 여깁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마에스트로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합니다.
“비록 자신의 왕국이나 세계 전체를 떠났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을 그대로 움켜쥐고 있다면, 실상 그는 아무 것도 떠난 것이 아니다.
진정, 자기 자신을 놓아야,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은 사람이다.”
이는 자신과 세상과 가족을 놓았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것들을 놓은 그 자신마저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우리가 어디론가 떠날 수 있다하더라도 막상 떠나 온 자신으로부터 떠나지 못한다면, 결코 평화롭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떠나 온 자신에게 여전히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 10,43-44)
제자들은 비록 집과 가족을 떠나오기는 했지만, 아직 진정 따르는 자들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도 그럴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기보다, 따르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따르는 면이 더 강했던 것입니다.
곧 단순히 떠나왔다고 해서, 따르는 자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진정 섬기는 자라야 비로소 따르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떠나 온 자의 행위라기보다, 따르는 자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미 떠나 온 자신을 떠날 때라야, 진정 섬기는 자가 됩니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그야말로, 이미 비우고 오신 당신마저도 비우셨고, 아버지를 떠나오시고, 떠나오신 자신마저도 떠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미 버리고 온 자신을 버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섬기는 일로 드러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그분께서 하신 것처럼 하면서 그분을 따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
주님!
당신께서는 스승이시면서도 먼저 섬기셨고, 주님이시면서도 먼저 낮추셨습니다.
당신의 종이 되라 하지 않으시고 모든 이의 종이 되라고 하시고,
당신을 섬기라 하지 않으시고 작은이를 섬기라 하셨습니다.
당신이 보여주신 대로, 존경받기보다 먼저 존경하게 하소서.
섬김 받기보다, 먼저 섬기게 하소서.
모든 이를 귀하고 소중하게 여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갈 길은 멀고 험해도
-반영억신부-
우리가 무엇을 배운다는 것은 삶에 활력을 줍니다. 그런데 가르치는 사람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의 지향하는 바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아무리 애써서 가르쳐도 가르침을 받는 사람이 게으르거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스승은 끝까지 품고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면서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되어 당신의 수난과 부활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첫 번째 예고 말씀을 하셨을 때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을 꼭 붙들고 안 된다고 반박하다가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마르8,31-35). 하고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예고(마르9,30-32)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제자들은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길에서 논쟁을 하였습니다. 세 번째 예고(마르10,32-34)에서도 알아듣지 못하고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하고 높은 자리, 영광을 받는 자리를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청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10,43-44).고 말씀하셨습니다. 영광의 자리에만 집착하는 제자들에게 이제 인간의 생각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초점을 맞추고 살라는 일깨움을 주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너무도 다릅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인간을 생각하고 계시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 자신을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더 많은 것을 베풀고자 하시지만 인간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챙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영적인 것을 먼저 생각하지만, 인간은 육적인 것을 우선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하느님의 나라와 아버지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지만, 인간은 먼저 자기의 뜻과 이익만을 찾습니다. 세속적 승리, 이성적 승리가 아니라 십자가의 실패를 통한 승리를 갈망해야 하겠습니다.
높은 자리, 영광의 자리에 앉기를 원하는 야고보와 요한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였다는 것은 역시 그들도 그런 욕심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줍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높은 자리를 바라는 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영광의 자리에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수고 없이 영광만을 바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수고와 땀 없이 주어지는 영광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그래도 높이 높이 오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고 하신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멀고 험해 보여도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겸손하게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섬김은 가식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3장36-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당신을 모른다고 할 것을 예고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하자,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 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베드로는 착한 목자가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듯이(10,11.15.17참조). 자신도 예수님을 위해 바치겠다고 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명하신 새 계명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사랑은 그분이 보여주신 모범을 충실히 따르는 데서(“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나와야지, 자신의 의지나 용기를 과시하는 것으로 나타나서는 안 됩니다. 간절한 원의와 실천할 능력 사이에는 커다란 틈이 있기 마련입니다. 배워서 알았으면 안 만큼 진실하고 겸손하게 실천함으로써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출세와 섬김>
-송영진신부-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2-45).”
1) 이 말씀은 “서로 섬기는 공동체가 되어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을, ‘높은 사람이 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이 말씀은, “높은 사람이 되고 싶으면 ‘섬김’을 실천하여라.”도 아니고,
“섬기는 사람이 되면 높은 사람이 될 수 있다.”도 아니고,
“너희는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고 서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나서,
“주님이며 스승인 내가 너희의 발을 씻었으면,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어야 한다. 내가 너희에게 한 것처럼 너희도 하라고,
내가 본을 보여 준 것이다(요한 13,14-15).”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일은, 당신이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것을 행동으로 드러내신 일이기도 하고,
제자들에 대한 당신의 지극한 사랑을 드러내신 일이기도 합니다(요한 13,1).
그래서 예수님께서 본을 보여 주신 ‘섬김’은 바로 ‘사랑’입니다.
따라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사실은 ‘사랑’을 실천하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라 ‘섬기는 사랑’)
2)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요한 13,34-35).”
서로 실천하는 ‘섬기는 사랑’은 예수님의 제자라는(신앙인이라는) 표시가 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제자라면(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섬기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말씀을 하실 때,
‘권고’가 아니라 ‘계명’이라고 표현하셨습니다.
‘계명’은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하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는 것은,
‘다른 민족들’이나 하는 짓, 즉 하느님을 안 믿는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도 신앙인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할 ‘주님의 명령’입니다.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는 것은 죄를 짓는 일입니다.)
3) ‘섬기는 사랑’이라는 말을, “‘섬김’은 ‘사랑’으로 실천해야 한다.”,
또는 “‘사랑’은 ‘섬김’으로 실천해야 한다.”로 풀어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에 ‘섬김’을 실천하면서 ‘사랑 없이’ 한다면,
그것은 자존심이 상하는 기분 나쁜 일을 억지로 하는 ‘위선’이 될 뿐입니다.
(사랑 없이 하는 ‘섬김’에는 ‘기쁨’이 없고,
하기 싫은 일을 하는 괴로움만 있습니다.)
또 만일에 ‘사랑’을 실천하면서 ‘섬김 없이’ 한다면, 그것도 ‘위선’입니다.
(‘섬김 없이’ 하는 사랑은 그냥 단순하게 좋아하는 감정이거나,
소유욕이거나, 집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섬김’과 ‘사랑’은 항상 하나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사랑으로 섬김을 실천할 때, 또는 섬김으로 사랑을 실천할 때,
그때 비로소 순수한 기쁨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결코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니고, 주님의 뜻을 실천한다는 기쁨과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 주는 기쁨이 합해진 ‘신앙인의 참 기쁨’입니다.)
4)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는 말씀을 사도들에게 곧바로 적용해서,
사도들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고 있는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또는 사도들이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기를 바란 것으로 오해하면 안 됩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라고 말씀하신 것은, 사도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꾸짖으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원칙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가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를
청한 일은(마르 10,37), 두 사도가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싶어서,
또 사람들에게 세도를 부리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물론 두 사도의 요청에는 인간적인 명예욕과
자존심과 자긍심 같은 것이 들어 있긴 합니다.
아마도 두 사도는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들이기 때문에
그 위치에 합당한 영예를 얻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5) 예수님께서는 두 사도에게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도 마시고,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내 오른쪽이나 왼쪽에 앉는 것은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마르 10,38-40).
이 말씀은 거절도 승낙도 아닙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가 겪게 될 고난만 예고하시는 말씀으로 보이지만,
고난 끝에 얻게 될 영광이 암시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은,
두 사도가 ‘잘못된 요청’을 하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는지를 모르는 채로 청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광을 얻기 위한 과정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십자가를 기꺼이 받아들여서 지는 일과
예수님을 본받아서 ‘섬기는 사랑을 실천하는 일’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내가 허락할 일이 아니라, 정해진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 뜻에 합당하게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와 왼쪽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에게는 권한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단순히 예수님의
최측근 제자라는 이유만으로는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교황이나 추기경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닌 것처럼.)
또 이 말씀에는 예수님의 오른쪽에 한 명, 왼쪽에 한 명, 그렇게 두 명만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모든 자리가 다 예수님의 오른쪽 자리이고, 왼쪽 자리입니다.
그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전부 다 똑같이 ‘높은 사람’이 됩니다.

복음: 마르 10,32-45: 내가 마시게 될 잔을 마실 수 있느냐?
-조욱현신부-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제자들은 놀랍고 두려운 말씀을 듣는다. 스승님께서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의 손에 넘겨져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할 것이라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자신들도 그분과 함께 죽임을 당하거나, 당신의 삶과 가르침으로 그토록 큰 기쁨을 주시던 분이 원수들의 손에 넘어가 돌아가시는 것인가 하고 두려워했다. 그러나 미리 부활의 영광도 알려주신 분이시다. 예수님의 마음은 아주 착잡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스승님의 마음은 헤아리지 못하고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37절) 하고 있으니 한심하다. 복음의 야고보와 요한은 베드로와 같이 특별한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중요한 사건에 주님과 증인들로 함께 하였고,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에 함께 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와 함께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천둥의 아들들”(마르 3,16-17)이라 불렸다.
또 이것을 본 다른 제자들은 화를 내고 있다. 이 제자들 역시 그 두 제자와 같이 제사보다는 잿밥에만 관심이 있는 자들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의 구원의미와 제자들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꿈꾸는 것은 전혀 다른 방향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참다운 신앙 행위가 무엇인지 묵상하며 노력하여야 한다.
예수님은 물으신다. “내가 마시는 잔을 마실 수 있느냐?”(38절) 하시며, 당신의 잔을 마실 것을 요구하신다. 당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지 않고서는 천국에 다다를 수 없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39절) 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 말씀을 완전히 깨달은 것은 아니었다. 하늘나라에서의 높은 지위,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걸어야 할 길이 어떤 것인가를 일러주고 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는 제자들이 전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보면 그렇다. 참된 권위는 힘이 아니라, 아름다운 봉사를 통해서 나오는 것이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부부간에 표현할 수 있는 서로에 대한 배려는 나의 위신을 조금도 손상치 않는다. 오히려 그것으로 더욱 나와 내 배우자가 선명히 드러날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완전한 사랑을 간직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주님께 나를 따르시라고 하는 때가 많다. 이 모습은 바로 주님을 나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분으로 만들고, 오늘 복음에서 현세적인 이익만 추구했던 그래서 예수님과 마음이 아직은 멀었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생각할 수 있다. 이제는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 십자가의 길을 통하여 그분을 닮아갈 수 있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5)
-한상우신부-
구원과 수난은
분리될 수 없다.
구원의 맥박은
수난의 맥박과
일치한다.
수난은 늘
두렵기에
익숙하지 않다.
우리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할 수 없다.
예수님 수난에
우리자신을
내맡기는 것이
참된 믿음이다.
예수님 수난으로
구원은
지배가 아닌
참된 섬김임을
알게된다.
파격적인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
수난을 받으신다.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건네신다.
생명을 창조하신
분이 생명의
수난에 뛰어드신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방관자가
아니시다.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애쓰시는
분이시다.
수난의
파도에서
하느님을
만나게된다.
수난은
창조이다.
제자들또한
수난을
받아들이면서
자아의 욕심에서
깨어나게 된다.
예수님의
수난에서
눈이 열린다.
심연을 비추는
주님의 수난이다.
수난의 뒷면이
참된 사랑임을
우리는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예수님의 수난은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다.
무지한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를
일깨워 줄뿐이다.
목숨을 바치는
수난은 가장
고귀한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이
수난의 여정까지
은총으로
바꾸어놓았다.
생명과 수난
생명과 구원은
하느님 사랑안에서
하나로 결합된다.
목숨 바치는
수난이
너와 나를
살리는 참된
구원이다.
구원의 길을
예수님께서
외로이
걸어가신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당시 예수님의 존재와 모습이 왜 파격이고 도전이 되었는지 보여 주십니다.
"자비, 용서, 표징, 기적, 불쌍히 여기심, 영광, 성취, 보답, 호의 ... "
제1독서 안에는 인간이 하느님께 기대하는 바가 담긴 단어들이 홍수처럼 쏟아집니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을 위한 기도 내용으로 짜여진 집회서 36장에 백성의 바람과 간청이 고스란히 녹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기도에서 구약의 백성이 바라보는 전형적 하느님관이 드러납니다. 크고 위대하시며 징벌하기도 하시고 용서도 하시는 하느님, 하늘 옥좌에 앉아 세상을 다스리고 심판하시는 분, 세상 모든 권력을 쥐고 영광을 떨치시는 분이 이스라엘을 소유하신 하느님이시지요.
그런데 그러한 기대로 가득 찬 제자들에게 복음 속 예수님은 상이한 지평을 열어 주십니다.
"제자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 가고 계셨다."(마르 10,32)
지금은 예수님께서 이미 두 차례나 당신 수난을 예고하신 데 이어 세 번째로 다시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는 순간으로, 이 배경 설명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들립니다. 예루살렘은 사형선고와 수난, 죽음의 도시이고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나아가고 계시지요. 그분은 뒤에서 "진격!"을 외치며 부하들의 등을 적진으로 떠미는 장수가 아니라, 몸소 앞장서서 본보기가 되어 주시는 스승이심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르 10,43)
예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면 첫 자리를 달라고 청탁하는 제베대오의 두 아들과 그들을 불쾌히 여기는 동료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마치 철부지들을 붙잡고 타이르듯 간곡히 당부하시는 스승의 마음이 느껴지지요.
어쩌면 예수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전형적인 하느님관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상태라서 그런 소망을 가졌을 겁니다. 전능하시고 엄위하신 하느님의 외아드님이 영광을 받으시면 측근인 자기들도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리라 기대했겠지요. 다른 제자들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화를 낸 이유는 그들 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욕망이 숨어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45)
예수님은 전형적인 신관에 파격이 되는 말씀을 하십니다. 즉 예수님이 보여 주시는 하느님은 기존의 모습이 아니라, 섬기는 신, 종의 자리로 내려간 신, 백성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신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구약의 백성이 섬기는 하느님과 다른 신이실까요? 아닙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성부 하느님과 같은 하느님으로서 아버지의 말씀과 뜻을 행하는 분이시지요. 비움과 섬김과 죽음은 인류에게 베푸시는 하느님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고 완성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세도와 군림, 권력과 영화를 꿈꾸었다면 지금부터는 멘붕 상태로 들어가게 될 겁니다. 앞장서 가시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면서, 앞으로는 그 바벨탑과도 같았던 꿈이 차근히 혹은 처절히 무너지는 체험의 과정을 밟아가게 되겠지요. 그 안에서 자신의 바닥을 체험하고 다시 자비의 하느님께 매달리면서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영성생활이 이제 시작인 셈이지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어떤 모습의 주님을 따라 나섰는지 되짚어 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의 꿈이 하느님의 꿈과 이어져 있는지,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파격과 도전이 각자에게 어떤 의미인지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가 있는 자리보다 더 낮고 비천하고 어려운 곳으로 내려가 우리를 지탱해 주는 분이시지요. 그러니 우리도 용기를 내어, 앞장 서신 그분의 뒤를 따라, 믿고 희망하며 나아갑시다. 이 길은 결국 사랑의 완성이신 주님과의 일치로 이어질 것이니 이 여정 안에 있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홍해는 건너야지 건너 뛰어서는 안 된다
-김찬선신부-
오늘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루살렘 입성을 코앞에 두고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주님의 양편에 자기들이 앉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이 영광을 받으시러 들어가는 거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주님께서 이렇게 질문을 하십니다.
"너희는 너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지도 못한다.
내가 마시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내가 받는 세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
이에 두 사도는 할 수 있다고 하시고
주님께서는 두 사도도 주님과 같은 잔과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답하십니다.
완전한 동상이몽인데 잔은 잔이로되
축배의 잔과 고통을 잔의 차이를 모르고 있는 것이고,
축배의 잔은 고배를 마시고 난 뒤에 마시는 것임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가나안으로 가면서 홍해를 통과하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홍해는 건너가야지 건너 뛰어 가는 것이 아닌데도 말입니다.
아주 미성숙한 아이는 쓴 것은 무조건 싫어하고 거부합니다.
그래서 약도 거부하지요.
그러다가 점차 성장하며 쓴맛단맛을 다 보고 난 뒤에야
인생에 단맛만 있을 수 없다거나 고진감래라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에게 인생을 가르쳐주시는 말씀이었지요.
무슨 뜻입니까? 다 아시지요!
고통이 다해야 단 것이 온다는 말 아닙니까?
더 풀어 얘기하면 겪어야 할 고통을 다 겪지 않으면 단 것은 오지 않고,
겪어야 할 고통을 반드시 겪어야 달콤한 인생이 펼쳐진다는 것이지요.
다시 홍해 얘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홍해를 건너야 가나안을 가는 것은 알겠는데
문제는 홍해로 들어가면 물에 빠져 죽습니다.
죽는데 무슨 가난안입니까?
죽으면 그만 아닙니까?
그런데 이집트 군대가 뒤쫓아오고 그래서 돌아서도 죽고
홍해 바다로 들어가도 죽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닥칩니다.
이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홍해 바다로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이때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군사에게 죽느니
하느님 말씀을 따라서 죽기로 하고 홍해를 건너갑니다.
다른 구멍이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자
하느님 말씀을 믿기로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퀴불러 로스의 죽음 수용의 5단계를 생각게 됩니다.
인간이 죽음을 즉시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원망-타협-절망을 네 단계를 거친 뒤에야 죽음을 수용한다는 거지요.
저는 고통 수용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앞서 봤듯이 고통은 무조건 싫다고 거부하는 것이 인간인데
네 단계를 거쳐서 마침내 고통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이 5단계 뒤에 6단계가 있다는,
그러니까 고통과 죽음 뒤에 기쁨과 부활의 새로운 삶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을 홍해를 앞둔 이스라엘 백성처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 그것이 지금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아무튼, 홍해는 건너가야지 건너 뛰는 것이 아님을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