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5월 5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5. 5. 06:24

2021 5 5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나는 포도 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누구든지 나에게서 떠나지 않고

내가 그와 함께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
요한 15,1-8 )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you can do nothing.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 출신 어떤 사람들의 가르침은 안티오키아 교회에 혼란을 줍니다. 선민의식과 편견은 하느님의 구원을 이스라엘 사람들의 관습에 매어 놓고, 사람들을 분리하고 편을 가릅니다.
오늘 복음은 마치 유다에서 내려온 이들처럼, 잘못 이해된 신앙을 맹신하여 나의 신념과 반대되면 가짜이며, 하느님의 구원조차도 내 생각과 다르면 얻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답을 줍니다. 우리는 ‘내가’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께 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좁은 사고 안에 ‘주님을’ 가두려는 유혹을 자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기도만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내가 주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의 제자가 되어, 나를 따르며 내가 청하는 것만을 들어주는, 옛날 이야기속의 도깨비방망이 같은 존재로 착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십니다. 이는 하느님과 우리의 신비로운 만남과 관계를 통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지극한 사랑은 우리를 주님과 떨어질 수 없게 하며, 그분 안에 머무르게 합니다. 선민사상이 아니라, 분리와 구분의 삶이 아니라, 용서와 호의를 통한 사랑의 삶이 우리를 주님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이러한 주님의 초대로 오늘 화답송의 시편 저자의 말은 곧 우리의 말이 됩니다. “‘주님의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 기뻤노라. 예루살렘아, 네 성문에 우리 발이 이미 서 있노라.”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세상에는 참으로 많은 종류의 자동차가 있습니다. 이는 굳이 자동차광이 아니라고 해도 알 수 있습니다. 거리에 돌아다니는 차들의 종류가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각 차의 다른 장단점이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4륜 SUV 차량은 험한 비포장도로를 쉽게 달리고 높은 둔덕도 거뜬하게 넘어갑니다. 대신 가속 능력은 떨어질 수밖에 없지요. 반대로 스포츠카는 빠르고 날렵하지만, 비포장도로에서는 가속 능력이 거의 쓸모없을 뿐 아니라 유지비도 많이 듭니다. 차의 능력을 제대로 알아야 그것에 맞게 차를 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만약 15t 덤프트럭을 몰면서 속도가 나지 않는다며, 또 코너링이 좋지 않다고 불평한다면 사람들의 놀림을 받게 될 것입니다. 차를 잘 모르면서 운전한다고 말이지요.

사람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각자에게는 이 세상에서 한몫을 담당할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절망, 좌절을 통해 그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맞는 나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창조하셨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닳아 있기에 분명히 자신의 고유한 역할이 있습니다. 기쁘고 행복하게 하는 나의 역할을 찾아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 자기의 힘만으로는 그 역할을 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께 붙어 있어야지만 자신의 역할을 이 세상 안에서 발휘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가지는 포도나무에서 떨어지면 안 됩니다. 생명의 자양분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주님 안에서 더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주님 안에서 더 많은 나의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서 나를 꼼짝하지 못하게 하는 구속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나의 자유를 빼앗는 것이라 할 수 있을까요?

포도나무이신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면 사랑을 실천할 수 없게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받는 은총의 생활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붙어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을 말씀하시고 보여주셨음을 받아들이면서, 우리 역시 사랑으로 말하고 사랑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분의 사랑 안에 머무를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며, 우리가 계명을 지켜나가면서 주님께서 주시는 참 평화를 간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주님에게서 떨어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람들은 함께 있음을, 서로 이야기 나누는 것을 얼마나 쉽고 당연한 일로 받아들이는가?(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모두가 가능한 삶

“신부님! 이제 머리가 굳어서 책을 봐도 눈에 안 들어와요.”

이렇게 말한 사람은 30대 초반의 형제님이셨습니다. 100세 시대에 30대 초반이면 젊어도 너무 젊었다고 할 수 있는데, 벌써 공부할 나이가 지난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배움에 나이 탓을 많이 합니다. 머리가 안 돌아가서, 도저히 외워지지 않는다면서 ‘나이’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꼭 필요한 공부, 자신에게 의미를 주는 공부는 절대로 멈춰서는 안 됩니다. 저 역시 예전에는 책 읽기를 힘들어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거의 하루에 한 권꼴로 책을 읽고 있습니다. 20대에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50대를 사는 지금 가능한 일이 되어 있습니다.

배움뿐이 아닙니다. 세상 삶을 살면서 할 수 없는 이유를 얼마나 많이 만들고 있습니까?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겨우 2~30년을 바라본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100세까지도 사는 시대를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고, 할 수 있는 이유를 계속해서 찾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사랑하며 사는 것, 함께 하는 삶. 이 모두가 가능한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조재형신부-


예전에 동창 신부님과 스페인 성지순례를 갔습니다마드리드똘레도사라고자아빌라바르셀로나를 다녀왔습니다바르셀로나의 성가정 성당은 가우디의 설계로 건축되었습니다규모와 섬세함을 함께 갖춘 아름다운 성당이었습니다순례 중에 두 번의 문제가 있었습니다한번은 렌터카의 기름 넣은 문제였습니다차는 경유를 넣는 차였습니다그런데 렌터카 사무실 직원은 가숄이라고 적어 주었습니다가숄은 휘발유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나중에 주유소 직원에게 물어보니 가숄은 경유라고 알려주었습니다발음문제로 착각이 있었습니다다른 한번은 공항 문제였습니다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오기 위해서는 공항으로 가야 했습니다렌터카 반납을 위해 전날 답사까지 다녀왔습니다아침 일찍 공항으로 갔습니다그런데 공항에는 국제선과 국내선이 있었습니다저는 국제선이라고 착각하였고국제선에서 기다렸습니다나중에 국내선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미 시간은 늦어버렸습니다할 수 없이 가까운 시간으로 표를 구해서 마드리드로 왔습니다다행히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탈 수 있었습니다저의 실수를 받아주고이해해준 동창신부님이 무척이나 고마웠습니다.

 

초대교회는 복음을 전하면서 몇 가지 문제를 맞이했습니다첫 번째는 차별과 소외였습니다공동체가 커지면서 가난한 사람약한 사람들이 차별 받게 되었습니다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바빠서 공동체 내부의 일을 챙기기 힘들었습니다사도들은 모여서 기도하였고공동체 내부의 일을 도와줄 협조자를 선발하였습니다협조자들의 이름은 부제였습니다초대교회의 일곱 부제는 사도들을 도와서 공동체 내부의 일을 함께 하였습니다과부나 고아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공정하게 나누었습니다가난한 이와 아픈 이가 먼저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공동체는 불평과 불만이 사라졌고기쁨과 평화가 넘쳤습니다두 번째는 할례였습니다유대인들에게 할례는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맺은 계약의 표징이었습니다유대인들에게는 소중한 전통이었습니다그러나 공동체가 커지면서 이방인들이 세례를 받아 신앙인이 되었습니다이방인들에게 할례는 낯선 풍습이었습니다이번에는 이방인 출신 신앙인과 유대인 출신 신앙인 사이에 갈등이 생겼습니다유대인 출신 신앙인은 모든 신앙인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그러나 이방인 출신 신앙인들은 할례에 대해서 거부감을 가졌습니다그러자 오늘 독서에서 사도들과 원로들은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그 모임이 공의회가 되었습니다공의회는 시대의 징표와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기 위한 교회의 모임입니다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임입니다가장 최근에 있었던 공의회는 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성지 순례를 갔을 때신부님께서는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레지오 단원들의 첫째가는 직무는 무엇입니까어떤 분은 출석이라고 답을 하셨고어떤 분은 선교라고 답을 하셨고어떤 분은 사랑이라고 답을 하셨습니다또 어떤 분은 기도라고 답을 하셨습니다신부님께서는 모든 답에 점수를 주시면서 가장 정확한 대답은 자기성화라고 하였습니다자신이 성화되면 누가 머라고 하지 않아도 출석을 하고자신이 성화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선교하며자신이 성화되면 누가 말하지 않아도 기도 할 수 있다고 말을 하였습니다우리는 주변에서 자신은 성화되지 않았으면서 남을 성화시키려고 하는 분들을 볼 때가 있습니다신앙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의지와 뜻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분들을 볼 때도 있습니다힘으로 신앙생활을 하면 곧 지치게 됩니다힘이 빠지면 다른 사람들 때문에 신앙이 식어버립니다즐거웠던 일들도 시들해지고성당에 나오는 것도기도하는 것도 재미가 없어집니다자신의 힘으로 신앙생활을 하기 때문입니다성화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기도할 수 있으며 사랑을 나눌 수 있습니다무엇이 우리를 성화시킬 수 있을까요그것은 바로 주님 곁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우리는 스스로 성화되는 것이 아니라주님과 함께 연결될 때주님 곁에 머무를 때 성화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원칙을 이야기하십니다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머무는 것입니다예수님의 말씀에 머물고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르는 것입니다그렇게 하면 모든 문제는 해결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우리가 청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내 안에 머물러라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단 한 송이 꽃이지만 꽃이 죽지 않고 피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 일인가?

 -양승국신부-

 

7~8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던 한국 수도회·수녀회들이 대부분 성소 급감과 회원들의 노령화로 인해 큰 위기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다들 암담한 현실과 미래를 걱정하며 과감한 가지치기를 통한 몸집 줄이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비관적으로만 생각할 일도 아닌 것 같습니다.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 수많은 수도자들을 양산해내던 성소의 황금기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이었던가? 라고 반문한다면,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도 없습니다.

  

수도생활이 소멸되어간다고 말하는 오늘 수도생활은 그 어느 순간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수세기 만에 처음으로 수도생활은 새로운 에너지로 고동치고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 시대는 외양과 활동에만 치중했던 지난 시절을 깊이 성찰하며, 수도생활의 깊은 내면과 핵심으로 들어가라고 수도자들을 초대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엄청난 수효의 수도자들보다 진짜 수도자 한명을 요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의 수도생활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도, 부활의 영성도 아닌 성토요일의 영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혼란과 당혹스러움의 영성, 무기력과 무능함의 영성입니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여겨지더라도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영성입니다. 

 

언젠가 외국 출장 중에 누군가 사무실로 꽃을 보내왔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출장을 끝내고 사무실에 들어가 보니 화분 속의 꽃들이 거의 다 말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송이 꽃만은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었습니다. 그 꽃 한 송이를 바라보면서 든 생각입니다.

  

‘단 한 송이 꽃이지만 꽃이 죽지 않고 피어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 일인가?’

  

대부분의 수도회·수녀회들이 갑작스레 닥쳐온 성소급감 현상으로 힘겨워하는 시대, 우리 가운데 단 한명의 수도자라도 활짝 꽃피어난다면, 그 향기를 만방에 퍼뜨린다면 이 얼마나 고맙고 갸륵한 일이겠습니까?

  

그러기 위해 가장 중요한 일은 참 포도나무이신 주님께 어떻게 해서든 ‘딱’ 붙어있는 일입니다. 그분 품안에 머무르는 일입니다. 수도자·성직자를 포함한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분께 ‘딱’ 붙어있으므로 인해 제 가치와 빛깔과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떨어져나온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17세기의 천재이자 ‘팡세’의 저자인 파스칼은 수학자이면서도 과학자였고, 또한 철학자였습니다. 파스칼은 그의 저서를 통해서 한 인간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위대한가를 잘 보여줬습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위대한 순간은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 그분께 딱 붙어 있을 때입니다.

  

팡세는 영원의 시각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비춰보았습니다. 무한 속에서 바라본 한 인간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각하는 인간은 위대한 것입니다. 자신의 비참함을 모르고 하느님을 알게 되면 그 인간은 즉시 오만함에 빠집니다. 반대로 하느님을 모르고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되면 즉시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철저하게도 숨어계십니다. 파스칼에 따르면 하느님은 부정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넘치고, 확신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부족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은 영의 눈을 뜬 사람에게, 다시 말해서 깨달음을 이룬 사람에게는 보이지만, 눈먼 자들에게는 절대로 나타내보이지 않으십니다. 이 납득할 수 없는 하느님의 처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해야 신앙의 눈이 뜨이게 됩니다.

  

죄인인 인간은 티끌을 핥습니다. 무한한 우주 속에서 인간은 고작 티끌 같은 쾌락을 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티끌 속에는 끝내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습니다. 무한한 공허 속에 숨어계시는 하느님, 미소함의 극단 앞에 서 있는 인간은 무한한 관대함의 주님 앞에 그저 겸손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인간 자신의 나약함과 비천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심연의 좌절과 무의미에서 탈피하기 위해서 가장 좋은 해결책은 결국 하느님을 수용하는 일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단지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가 아닙니다참 포도나무와 가지에 대한 비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포도나무”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칭합니다그런데 여기에 “참”이라는 형용사가 붙어서예수님의 진리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참된 진리는 참 포도나무와 가지와의 관계곧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 관계를 “붙어있다, 머물다, 열매 맺다”라는 동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여덟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머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렇다면, “머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오늘 <복음>에서 우선 “붙어있음”을 말합니다.

곧 포도나무에 붙어있어서다른 데서가 아닌 바로 그 포도나무로부터 수액을 받아먹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에단순히 포도나무에 “붙어있다”는 사실만으로는 결코 “머물러 있다”고 할 수 없다왜냐하면 나뭇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다하더라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잘려져 불에 태워져버리기 때문입니다.

결국붙어있되열매를 맺는 이라야 머물러 있는 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머물다”는 말의 의미는 단지 그분께 붙어있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그분이 열매 맺으실 수 있도록 자신을 비워드림이요그분의 말씀의 권능이 자신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허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그분의 참 생명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요그분과 결합하여 있는 것입니다이를 두고 사도 바오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는 둘째 편지>에서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과 결합하는 이는 그 분과 한 영이 된다.”(1코린 6,17)

 

그러기에“머물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상호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로 붙어있음 말합니다.

곧 상호내주 혹은 상호공유의 관계를 말합니다이는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벌리는 역동적인 활동이 벌어지는 상호 친교상호교제상호 교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사도 베드로가 그의 둘째 편지>에서 밝히듯우리를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게 하셨습니다.”(2베드 1,4). 참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비로운 방식으로 우리 안에 계시며 활동하십니다참으로 우리는 참 포도나무이신 그분과 이토록 신비롭게 결합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신비로운 공동본성(Connaturality) 결합을 두고천사적 박사라 불렸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경탄하여 이렇게 탄성을 질렀습니다“아, 우리가 하나라는 걸 그토록 모르는가?”

바로 이 공동본성이 우리에게 신적 진리참된 진리를 가능케 하는 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자리가 신적 진리로써 사랑이 피어나는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를 가리켜토마스 아퀴나스는 공동본성에서 오는 사랑의 지혜하느님 사랑으로 주어지는 신적 지혜 혹은 관상이라고 일컫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신적 진리, 참된 진리에 참으로 머물러 있고,

                                                     많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을 오늘 <복음>에서 찾아본다면“너희는 나 없이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곧 가지는 나무에 속해 있을 뿐 스스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을곧 가지가 나무를 지탱시키는 것이 아니라나무가 가지를 존속시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요그분께 승복하여 그분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라야참된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사도 바오로처럼“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주님!

당신께서는 무너뜨리지만 열매를 맺어주셨고

부서뜨리지만 새싹을 틔워주셨습니다.

이토록 제 자신이 부서지고서야제 자신을 건네주고서야,

당신께 머무르는 법을 배워갑니다.

꽃이 지듯제가 무너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 않게 하소서.

열매가 떨어지듯제가 사라지는 것을 서러워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도 떨어져야 머물게 되는 이 신비로운 사랑 앞에

떨어지지 못함이 부끄럽고 죄송스러워 고개를 떨굽니다아멘.

 원하는 바를 다 이루어라

 -반영억신부-


우리는 흔히 기도한다고 하면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무엇을 달라고 합니다. 나의 바람을 정해 놓고 그것을 꼭 이루어 달라고 하소연할 때가 많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그분 마음에 드는 것을 행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달라는 기도에 익숙해 있습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달라고 떼를 씁니다. 그분의 뜻을 알아채는 것이 중요합니다.

 

레지오 마리애 선서문을 보면, “지극히 거룩하신 성령이시여, 당신의 위대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가 되게 하소서…제 영혼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시어 이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성모님의 사랑과 뜻에 일치하게 해 주소서....우리 주 그리스도께서 제 안에서도 자라시게 해 주소서……이 세상과 영혼들에게 그리스도를 모셔다드리게 해 주시고……복되신 성 삼위의 영광 안에 살게 해 주소서….당신께서 저를 받아 주시고 저를 써 주시며 저의 나약함을 굳센 힘으로 만들어 주시리라 확실히 믿으며 다짐하나이다.”하고, 이어서 충실한 봉사와 규율에 대한 엄격한 복종을 선서합니다.

 

개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봉헌의 기도요, 성령의 도구가 되기를 소망하며 성령께 각별한 사랑을 드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주님 안에 머물고 말씀 안에서 주님의 뜻과 일치할 때 효과적인 열매를 맺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문다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신앙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님 마음으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삶이 나를 지배하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라고 매달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먼저 그분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야 일치를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빌면 무조건 이루어지리라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고 맹목적인 신앙 논리를 펼쳐서는 안 됩니다. 기도가 사랑으로 가득 차 있을수록 그만큼 더 가치가 있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나의 할 일은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충성심을 바치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우리의 원의가 이루어지려면 먼저 타인 지향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 바람이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과 일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와 사랑으로 철저히 하나가 되셨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당신 스스로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느님께 열려있고 그분과 하나 되어 살아간다면 우리의 모든 바람은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열매는 나의 열매가 아니라 하느님의 열매가 맺어집니다. 그러므로 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기 전에 그분과의 일치된 마음을 살펴야 하겠습니다.

 

포도나무와 그 가지는 붙어있을 때 생명력을 지닙니다. 열매는 가지에 달리지만, 가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몸통이 튼튼해야 가지의 열매도 튼실합니다. 포도나무는 전체고, 가지는 부분입니다. 부분과 전체는 나뉠 수 없는 사이입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도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아들과 제자의 관계를 이어주는 것은 ‘사랑’과 ‘순명’입니다. 우리의 관계도 그러해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의 명을 좇지 않는다면 그는 참 제자가 아닙니다. 안 될 때 안 되더라도 최선을 다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좇아 살면 우리 인생에 알찬 열매가 맺을 것입니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이가 늘어난다는 의미와 함께 신앙의 삶을 통해 더 큰 생명력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 안에 머물러 원하는 바를 다 이루시기 바랍니다.

 

“모든 것은 당신의 것, 오로지 당신의 뜻대로 그것들을 처리하소서.” 하고 기도하며 오늘을 봉헌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송영진신부-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과 신앙인들은

‘한 몸’이라는 말씀이기도 하고, 예수님은 신앙인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신앙인들의 공동체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사랑으로 진리를 말하고 모든 면에서 자라나 그분에게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그분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 덕분에, 영양을 공급하는 각각의 관절로 온몸이 잘 결합되고 연결됩니다.

또한 각 기관이 알맞게 기능을 하여 온몸이 자라나게 됩니다.

그리하여 사랑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에페 4,15-16).”

신앙인은 예수님과 한 몸이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서 살아가고,

영원한 생명에 도달하게 됩니다.

그 생명력을 잘 받는 방법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면서 자기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일치를 이룬다, 하나가 된다는 뜻인데,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능동적으로 실천함으로써 예수님 안에

머무를 수 있고, 예수님을 자기 안에 모실 수 있습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씀은 “구원을 받는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만이 구세주라는 뜻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 외에 다른 생명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 혼자서 도를 닦고 수행을 해서

그 생명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요한 15,6).”

 

이 말씀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도록 지금 당장

회개하라는 권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잘린 가지’는,

예수님을 믿었다가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라는 말씀은, 신앙인이면서도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한 경고입니다.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신앙인은 신앙인이 아닌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최후의 심판 때 같은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은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믿음은 지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밖에 던져진다.’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고,

‘말라 버린다.’ 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고,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라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영원히 소멸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 일은 그때 가서야 결정되는 일이 아닙니다.

심판 때의 일은 지금의 삶에서부터 결정됩니다.

‘지금의 삶’이 곧 심판 때의 일을 선택하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요한 15,7).”

 

예수님께서는 앞의 14장에서 이미 “너희가 내 이름으로 청하면

내가 다 이루어 주겠다(요한 14,14).”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 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 갈 것이다.

너희가 못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마태 17,20).”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또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마르 11,23; 마태 21,21).” 라는 약속도 하셨습니다.

이 말씀들은 신앙인들에게 ‘초능력’을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주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음을 믿으라는 권고입니다.

기적을 일으키는 것은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고,

우리가 할 일은 주님을 믿는 일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고

내 말이 너희 안에 머무르면”이라는 ‘조건’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또는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는

생활을 하지도 않으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생떼를 쓰듯이

기도를 하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너희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청하여라.” 라는 말씀에서 ‘너희가 원하는 것’

이라는 말은, ‘하느님도 원하시고 너희도 원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 나만 원하는 것’을 달라고 청한다면,

그것을 절대로 얻지 못합니다.

(혹시라도 그것을 얻는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탄이 준 것입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8).”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음으로써 내 제자라는 것을 입증하면”,

또는 “내 제자로서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으면”으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어야만 제자가(신앙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자가(신앙인이) 되는 일이 먼저고,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그 다음의 일입니다.>

여기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큰 영광이 되는 일이고,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고,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는 일입니다.

<‘영광’이라는 말은 좀 막연하기도 하고, 실감이 나지 않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광’을 ‘기쁨’으로 바꿔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것은 당연히 우리에게 큰 기쁨이

되는 일인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느님도 크게 기뻐하시는 일이고,

우리를 구원하려고 애쓰시는 예수님도 크게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 기쁨에는 ‘사랑’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자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어버이의 기쁨, 또 어버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자녀의 기쁨은 모두 사랑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 사랑과 기쁨이 바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힘이고,

신앙생활의 목적입니다.>

복음: 요한 15,1-8: 내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조욱현신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는 것 그리고 당신과 결합함으로써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얻는지 보여주시고자 하신다.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결합한 이, 그분 안에 뿌리를 내린 이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분께 결합한 이들은 가지이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물과 같은 성령으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물러야 한다. 가지는 자신의 생명 수단이 되는 것을 나무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우리는 나약하므로 우리가 선행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르게 할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면, 우리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7절 참조).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 영광을 돌려드릴 때, 우리는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들이 될 것이다. 아드님께서 그렇게 사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셨다.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주님 덕분에 우리는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 1)

-한상우신부-


너무 생각이
많은 우리들
삶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 실천에
이르지 못한다.

농부이신
아버지는
실천하는
분이시다.

창조도
십자가도
부활도
참된
실천이시다.

농부의 실천이
우리를
영글게하고
익어가게한다.

중요한 것은
실천이다.

좋은 관계의
원천에는
언제나 좋은
실천이 있었다.

좋은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이다.

정체성은
관계이다.

정체성이
바로
관계의
열매로
이어진다.

관계가
삶을 바꾼다.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삶의 양면을
아우르는
하느님이시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참 포도도나무의
모든 바탕이
되신다.

하느님과의
관계안에서
자라나는
우리들이다.

건강한
관계는
건강한
실천이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삶에는
건강한 실천이
있었다.

건강한 실천의
핵심에는
오늘을 이끌어
가시는 아버지
하느님을 향한
신뢰가 있다.

농부이신
하느님은
참 포도나무를
신뢰하시고
포도나무 가지인
우리를 신뢰하신다.

신뢰하기에
실천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열매는
실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보여 주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5)
포도나무와 가지가 한 몸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과 한 몸입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는 포도나무 줄기에서 무수한 가지들이 뻗어나가고, 그 가지에 잎과 함께 예쁘고 달콤한 포도송이들이 달려 온전한 나무를 이루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는 포도나무에게 있어 그 자체로 소중한 일부분이지만, 뿌리에서부터 영양분을 공급받아 열매에 전달하는 통로도 됩니다. 가지 덕분에 땅의 양분을 받아 튼실하게 맺힌 포도 열매는 태양과 바람의 보살핌 덕에 달고 건강한 맛으로 익어갑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사랑에 우리의 협력이 더해져 영근 열매로 세상은 더 윤택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것과 같습니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요한 15,8)
포도나무와 가지는 좋은 열매를 맺어 아버지의 사랑과 능력, 그분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그러기 위해서 가지들은 포도나무에 꼭 붙어 있어야 하지요. 가지는 나무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나무에서 잘려나간 가지는 그저 땔감이 될 뿐이지요. 

제1독서에서는 초대교회의 형성기에 촉발된 교의적 도전과 해결 과정이 드러납니다.

"모세의 관습에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사도 15,1)
유일하신 하느님을 섬기는 유다교의 역사와 전통 안에서 생겨난 그리스도교는 계승과 새로운 정립의 기로에 섭니다. 이 주장을 한 이들은 아마도 그리스도교 신자 자격을 유다인의 정체성을 보장하는 할례의 전통 위에서 세우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연속적인 부분과 비연속적인 부분이 선명해질 필요성이 대두된 과정이 되었지요.

"이 문제 때문에 ...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올라가기로 하였다."(사도 15,2)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의 사도들, 원로들과 상의하기로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가지들로서 함께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이 지향과 계획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포도나무의 일체감을 드러냅니다. 나무와 가지들이 한 몸의 영혼을 유지하고 협력하는 것입니다. 기도와 나눔, 회의를 통해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과정은 성령의 개입으로 거룩해지고 일치를 찾아갑니다. 하느님 백성의 유익을 위한 모든 발걸음이 곧 아버지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사도들과 원로들이 이 문제를 검토하려고 모였다."(사도 15,6)
한 아버지의 같은 자녀로서, 한 포도나무를 이루는 지체들로서 모인 이들은 자기 이익이나 욕심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추구합니다. 이 전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하나인 교회를 이루고 하느님 백성을 양육하지요.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예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반복해서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분과 우리의 관계는 이 머무름에서 시작되고 피어납니다. 그 자체로도 최고의 관계적 기도인 머무름은 열매까지 내어 아버지께 영광이 됩니다. 머무름으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어린 아이가 엄마품에 꼭 안겨있듯 포도나무이신 예수님께 꼭 붙어 그분께 머무르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분께 붙어있기만 하면 우리가 좀 부실하고 모자란, 대단치 못한 가지여도 반드시 아버지께서 흡족해 하실 열매가 달릴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한 나무를 이루고 있는 우리 모두는 행복합니다.

 말씀 나누기 - 부활 5주 수요일-헛사랑?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13일 부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