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2021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필립보 사도는 갈릴래아의 벳사이다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열두 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바르톨로메오로 짐작되는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려와 사도가 되게 하였다(요한 1,43-51 참조).
성경에 나오는 야고보는 제베대오의 아들과 알패오의 아들이 있는데, 오늘 기념하는 야고보 사도는 알패오의 아들이다. ‘작은 야고보’라 불리기도 하는 야고보는 신약 성경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였다. 예수님의 형제로 불리는 야고보(마태 13,55 참조)와 같은 인물인지 아닌지는 확실하지 않다.
☆☆☆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요한 14,6-14)
"Have I been with you for so long a time
and you still do not know me, Philip?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토마스 사도의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명쾌한 주님의 응답으로 이끕니다. 그래서 현대인에 비유되고는 하는 토마스 사도는 의심 많은 제자라기보다 의문이 많은 제자였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또 주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의 질문에 온화하게 답을 주십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요한 14,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사도들의 삶은 거칠었고, 힘들었으며 마지막에는 주님께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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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단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운(運)일까요? 아닙니다. 아마 모든 이가 ‘노력’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적은 노력이 아닌 피나는 노력으로써만 한 단계 더 높은 것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은 즐거울까요? 이 역시 아닙니다. 그 순간은 정말로 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며칠 전, 동창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수영장이 보였습니다. 이 수영장을 보면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 저 수영장 기억나? 너랑 나랑 여기 수영장 다녔잖아.”
기억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나?” 하면서 의문을 표시했더니, 딱 한 번 이 수영장에 함께 갔었다고 말합니다. 이 수영장은 25m 길이가 아니라, 50m 풀이었습니다. 따라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특히 강사는 늘 ‘한 바퀴 더’를 외치면서 소위 ‘빡세게’라고 할 정도로 힘들게 수영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고 안 갔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운동하려면 토할 것 같아야지, 기분 좋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기분 좋은 것은 운동이 끝난 뒤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통과 시련도 다음 단계,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가 아닐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그 뒤의 기쁨도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 고통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했는데, 그런데도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전교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늘 기쁨으로 가득 찰 것 같았지만, 밥도 제대로 먹을 시간도 부족했고 잠잘 시간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본다는 것은 편안하고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하느님 아버지를 본다고 해서 특별히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뵙고 느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특히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아버지 체험을 더 뜨겁게 하게 될 것입니다.


갑곶성지의 봉안당 안치식을 직접 진행하면서 유가족들을 만납니다. 그런데 많은 유족이 고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내가 조금만 잘했다면….’이라는 과거에 대한 후회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없는 문제라 ‘할 수 없어’라는 생각에 절망감을 느끼며 슬퍼합니다.
바꿀 수 없는 과거라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러나 후회를 없애지 못합니다. 이때 “세상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문제가 많다.”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이지만, 이 역시 일어날 수 있었던 하나의 여백인 것입니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지만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자신의 행동도 중요한 의미가 있었음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채우지 않아도 되는 여백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삶을 괴롭게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대신 지금 내가 해야 할 것과 앞으로 희망을 두어야 할 것에 집중하도록 합시다.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 라고 고백할 용기가 있는가?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합니다. 이는 “저는 사랑을 아직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닮는 이유는 사랑하면 서로의 존재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떤 자매가 다른 사람이 눈치챌 정도로 저의 말투를 따라 한다는 것을 알고는 저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기분 좋았던 적이 있습니다.
인간도 그럴진대 하느님은 그 완전한 자기 교환으로 아버지가 아드님을 통해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아버지를 보면 아드님이 드러날 것입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고 그 닮은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김동인의 소설 『발가락이 닮았다』는 닮음이 얼마나 관계에서 중요한지 잘 표현해줍니다.
M은 노총각으로 회사 월급으로 문란하고 방탕한 생활을 합니다. 그러다 자신이 생식능력을 잃은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의사를 찾아옵니다. 의사는 생식능력이 사라졌음을 알았지만, 희망을 주기 위해 가능한 것처럼 말해줍니다. 그렇게 M은 혼인하게 됩니다.
혼인 후 아내가 임신하였습니다. 그러자 M은 다시 의심에 빠져듭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의사를 찾았지만 주저하다 검사를 받지 못합니다. 며칠 후 M은 다른 병원에서 검사를 받았는데 이상이 없었다고 의사에게 와서 말합니다. 고민에 빠져있던 의사는 짐을 벗은 느낌입니다. 물론 의사는 M이 검사를 해보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생식능력을 잃은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후일에 M은 아기가 아파서 다시 그 의사를 찾아옵니다. M은 자신과 전혀 닮지 않은 아들과 자기가 닮은 데가 있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가운뎃발가락이 긴데 아들의 가운데 발가락도 길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아이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고는 얼굴도 닮은 것 같다고 말해줍니다.
M이 아들을 사랑하기 위해 해야 했던 일은 첫 번째로 자신에게 생식능력이 있음을 믿어야 했고, 두 번째로 아들이 자신과 닮았다는 것을 찾아내야 했습니다. 사랑하면 닮아간다는 말이 곧 생식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녀가 자신을 닮았다면 그것 자체가 자신에게 영광이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우리 안에서 당신과 닮은 것을 하나라도 발견하려고 우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부자 아빠는 기요사키가 따른 친구의 아버지를 말합니다.
로버트 기요사키는 가난한 아버지를 닮지 않고 친구의 부자 아빠를 닮았음을 이 책에서 스스로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고 기뻐할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바로 로버트 기요사키가 닮고자 했던 부자 친구의 아빠일 것입니다. 그리고 로버트 기요사키는 “나를 본 것이 곧 부자 아빠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나를 본 것이 곧 누구를 본 것인가?”라고 생각할 때 나는 내가 닮으려는 사람, 곧 내가 영광을 주려고자 하는 이를 위해 사는 것이 드러납니다.
나 자신에게 한 번 물어봅시다. “나를 본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본 것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되지 않더라도 그렇다고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는,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아직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분의 자녀라고 자신이 여긴다면 당당히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릴 말은 없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선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나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자녀를 나를 향하여 나아오게 한 것이지 그리스도를 향하게 한 것이 아닙니다. 표지판이 자신을 향하여 차가 달려오게 만든다면 사고가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웃는 미소는 아버지를 닮았고 우리의 성격은 어머니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가 닮은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고 우리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 성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 고백할 수 있다면 “나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고, 그분 뜻에서 벗어나는 일이 없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인도의 독립에 커다란 역할을 한 사람 중에 ‘간디’가 있습니다. 간디에 대한 일화 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과 대화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존경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존경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위선과 가식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세상의 것을 따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간디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었지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 주어라.” 간디는 독립을 위해서 비폭력 저항운동을 하였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도의 국민들에게 전하였고, 실천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너희가 되질하는 바로 그 되로 너희도 되받을 것이다.”간디가 여행을 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기차에 올랐을 때 신발 한 짝이 플랫폼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이미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간디는 지체 없이 나머지 신발을 벗어 다른 한 짝이 떨어진 곳으로 던졌습니다. 사람들이 왜 신발을 던졌느냐고 물었을 때 간디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신발 한 짝은 도움이 안 되지만 신발 두 짝은 도움이 됩니다. 누군가 신발 두 짝을 주우면 요긴하게 신을 수 있습니다. 신발을 줍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라면 더 요긴하게 쓰일 겁니다.” 간디의 행동은 인도인의 마음을 움직였고, 영국 군대의 힘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비록 간디는 세례를 받은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행동과 말은 신앙인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기보다는 세상의 것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했습니다. 유다는 욕심 때문에 예수님을 배반했습니다. 베드로는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했습니다. 이런 일은 2000년 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말은 하지만 행동으로 실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가지 원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그 원칙을 지키면서 살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벗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것,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 사람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알려주고, 묶인 이를 풀어 주는 것, 갇힌 이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하느님 부재(不在)는 곧 의미의 부재요, 기쁨의 부재, 참 행복의 부재입니다!
-양승국신부-
오늘같이 쾌청하고 적당히 바람까지 불어주는 날은 만사 제쳐놓고 하는 일이 있습니다. 침구 빨래입니다. 쨍쨍한 햇볕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이불과 담요를 세탁기에 넣어 돌리고 또 돌립니다.
빨래줄에 널으며 멀리 바다를 바라보니, 잔잔한 수면 위로 유조선들이 왔다갔다 합니다. 유심히 보면 꼭 다니는 길로만 다닙니다. 바다에도 길이 있는 것입니다. 바다뿐만 아니라 하늘에도 길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한 인간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종종 당신의 신원, 정체성에 대해 소개하시면서, “나는 ~이다.”라는 표현을 사용하십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나는 살아있는 빵이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부활이며 생명이다.”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은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소개하십니다.
그런데 당신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은유적인 가르침은 꽤나 알쏭달쏭하면서도 긴가민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밀착 수행하며 동고동락했던 사도들조차도 예수님 신원에 대한 가르침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는데, 오늘 우리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을 묵상해봅니다.
길: 예수님의 육화강생으로 인해 이제 예수님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라도 하느님께 나아가고자 한다면, 반드시 예수님을 통해야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그리고 오늘 우리들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머무시는 동안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느님께로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 덕분에 우리 인간은 너무나도 쉽게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진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리는 우리 인간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통상적인 개념과는 맥을 완전히 달리 합니다. 학문적 진리로 이해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진리는 하느님을 가장 절대적이고 우선적인 가치로 인정하고, 온전히 그분을 믿는 것입니다.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과 약속, 그분의 충실함을 신뢰하고 의탁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 내려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은혜롭게도 하느님의 진리와 인간이 상봉했습니다. 우리 인간은 예수님에게서 은총과 진리를 받았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알고 그분의 메시지를 알게 됨으로써 하느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것이며, 갖은 속박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줄 것입니다.
생명: 우리 인간은 생명 유지를 위한 필수 조건인 의식주만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보다 충만한 삶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학문이나 예술 등 문화적 가치들을 향유하고자 노력합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서 인간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의식주를 넘어, 문화 예술, 학문 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인간은 오직 하느님과의 긴밀한 통교를 통해서 충족되며 완성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의 삶에서 하느님이 부재하실 때, 그 삶은 결코 충만한 삶, 완전한 삶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부재는 곧 의미의 부재요, 기쁨의 부재, 참 행복의 부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참된 삶은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과의 친밀한 통교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늠의 영광을 보리라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알게 되었으니 내 아버지도 알게 될 것이다.
이제부터 너희는 그분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을 이미 뵌 것이다.”(요한 14,7)
그러자 필립보는 “주님, 저희에게 아버지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요한14,8) 라고 간청합니다. 이 간청은 또한 우리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진정, 우리도 그분 뵙기를 열망해야 할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보았으면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 14,9)
사실, 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호라오”)입니다. 그러니 이는 보고 깨닫고 믿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달아 알아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것’이 깨달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통합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는 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 보고 깨달아 알게 됩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은 ‘믿음’으로 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보는 것’은 그것을 ‘믿는 것’을 넘어서, ‘보는 것’을 먼저 ‘믿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으로 볼 때라야 참된 앎이 오게 됩니다.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때 아버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믿음이 그분을 뵙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알게 하고, 보게 할 것입니다. 결국, 믿으면, 영광을 볼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귀착됩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저에게서 결코 믿음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서 결코 사랑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사랑을 믿게 해 주십시오.
저에게서 결코 희망을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믿게 해 주십시오.
오늘 그 믿음으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이미 우리 가운데 와 계시는 주님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를 뵙게 하소서.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야?”(요한 14,9)
주님!
당신은 저를 용서하셨지만, 저는 자신을 용서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저를 희망했지만, 저는 절망했습니다.
결코 거두지 않으시는 당신의 믿음을 믿게 하소서.
결코 떨어질 수 없는 당신의 사랑을 사랑하게 하소서.
결코 놓지 않으시는 당신의 희망을 희망하게 하소서.
함께 있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본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이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아멘.

복음: 요한 14,6-14: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
오늘은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이다. 성 필립보는 베짜타 출신으로 세례자 요한의 제자였다가 예수님을 만나 사도가 되었다(요한 1,43-44). 최후의 만찬 때에 주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청한 분이다. 성 야고보도 역시 열 두 사도 중의 한 분이며 알패오의 아들로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신 후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1코린 15,7), 야고보 서간을 저술하신 분이시다.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이 다시 읽히고 있는데, 예수님이 바로 우리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는 길이며,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모두가 진리이고, 살아있는 모든 생물에게 생명을 주시기도 거둘 수도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그러한 권한을 가지신 분은 하느님뿐이신 데 하느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누구도 예수님을 거치지 않고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아버지 하느님도 알게 될 뿐 아니라 하느님을 “이미 뵌 것이다.”(7절)고 하신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8절)하고 있다. 예수님은 “필립보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그런데 너는 어찌하여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하느냐?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9-10절)하신다.
즉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당신은 하나이시며 예수님을 통해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우리는 잘 알 수 있다는 것을 깨우쳐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참 모습을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모습은 아닐 것이며 믿음도 필요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 “내가 예수님을 한번만이라도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열심히 살 수 있을 텐데!” 그러나 나의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는 그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하느님은 우리 인간이 하느님을 알 수 있고 볼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은 육신을 취하시어, 사람이 되셨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의 중심은 바로 예수께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고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셨는가에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고 어떻게 행동하실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서 순간을 위해 노력한다면 그 안에서 우리는 참된 길을, 진리를, 생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대단히 어려운 큰일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조그마한 일들 안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 9)
-한상우신부-
우리와 함께
사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믿지 않는다.
끝이 없는
어리석음의
여정이다.
하느님께
상처를
주는 쪽은
언제나
우리들
자신이었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선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사람과
하느님이
함께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다.
믿음의 삶은
변화의 삶이다.
믿음의 관계는
기도의 관계로
구체화된다.
아버지께로
가는 길이신
예수님을
만나는
여정이다.
믿음을
되찾아
주시는
주님이시다.
자아에서
벗어나는 것이
성장하는
올바른
믿음이다.
어리석은
고집과
미련에서
나와야만
성장할 수
있는 우리들
믿음이다.
예수님께
받은 사랑이
너무 크다.
사랑은
일상을 밝히고
관계는
내면생활로
옮겨진다.
신앙은
현실 도피가
아닌 생생한
현실안에서
예수님과
함께하는
믿음이다.
비틀거리는
역사의
중심에
함께하시며
우리를
성장시키시는
주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삶안에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을
뵙는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청하는
믿음의 강렬한
시작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명확히 선포하신 후 하시는 말씀들은 이 내용의 부연처럼 들리지요. 마치 그 관계성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는 듯합니다.
사람의 인성을 취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가시적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이 사랑이고 자비이신 아버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율법 조항으로 삭막하게 규격화시켜 버린 절대자의 틀을 깨고 사랑 때문에 앓으시는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은 믿음입니다. 서로의 존재 안에 머무름은 신비이기 때문에 육의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로서, 사랑의 유대로 아버지와 긴밀히 이어지시고, 아버지와 하나시라는 신비는 이를 믿는 이들을 그 사랑의 유대로 초대합니다. 믿으면서 그 사랑 안에 포함되도록 부름받는 은총의 신비입니다.
제1독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루어진 선교의 결말 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사도 13,48-50)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부 백성의 호의를 얻지만 이를 시기한 유다인들에 의해 결국 박해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요.
아무리 시기와 모독, 박해와 축출, 배척과 거부라는 험하고 불쾌한 일을 겪어도 마음에 주님을 모신 이는 흔들리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걸 제자들이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저 참아내고 견디는 수준을 넘어서 기쁠 수 있는 것은 스승이 가신 길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아가다 종래에는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믿음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육과 감정의 원리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담대히 예수님께서 하셨고 또 그들에게 하라고 당부하신 일들을 할 것이고, 성령에 힘입어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보호자요 변호인인 성령을 보내시어 제자들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는 힘을 주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치워주시며, 믿는 이들의 간청을 단 한 마디도 흘려 듣지 않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성삼위의 사랑 안에 함께 스며들어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며, 우리는 주님께서 해 주시는 모든 것이 그 응답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리고 나.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복되답니다.

말씀 나누기 -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제대로 중심잡기 (ofmkorea.org)
-김찬선신부-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19년 5월 3일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필립보야, 들어라,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같이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요한 14,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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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하듯 복음의 삶은 죽음의 삶이 아닌 기쁨과 부활의 삶으로, 주님께서 영원히 함께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전한 예수님의 삶과 행적은 전설이 아니라 믿음에 대한 온전한 증거의 삶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우리가 기리고 있는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는 모두 복음 안에서 기쁨을 찾는 삶을 살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보람만을 찾는 것이라면 그들은 순교를 통한 영원한 삶을 얻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삶은 세상이 주는 헛된 보람을 좇기보다는 어렵고 힘들어도 ‘길이며, 진리이며, 생명이신 주님’을 아는 것이었습니다.
참기쁨을 깨닫는다면, 그 어떤 것도 우리를 주님에게서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기꺼운 마음으로 봉사합니다. 보람보다는 기쁨을 찾아 봉사하는 이들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마태 16,24-28 참조) 길이신 주님을 따라 걸으며, 진리이신 주님 안에서 자유로워지고(요한 8,32 참조),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요한 3,16 참조). 필립보 사도와 야고보 사도처럼 주님 안에서 참된 기쁨을 되새기는 신앙인은 늘 삶에서 기쁨을 찾고 세상이 주는 보람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신우식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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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 필립보는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청합니다. 이는 “저는 사랑을 아직 모릅니다.”라고 고백하는 말과 같습니다. 사랑하면 닮습니다.
닮는 이유는 사랑하면 서로의 존재를 주고받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면 닮아가고 그 닮은 사람을 드러내는 것이 상대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비록 아직은 그리스도를 완전히 닮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분의 자녀라고 자신이 여긴다면 당당히 “내가 곧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 이것만큼 그리스도를 기쁘게 해 드릴 말은 없습니다. 내가 그분의 자녀임을 고백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계시이고 선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도 “나를 보는 것이 곧 그리스도를 보는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고 우리를 보는 것이 곧 하느님을 보는 것이라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상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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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보가 “아버지를 뵙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과시해 보여주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뵌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는 ‘보고 알았다’, ‘보고 깨달았다’라는 뜻의 단어입니다. 이는 베드로와 요한이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갔을 때, 요한이 베드로를 뒤따라 무덤으로 들어가서 “보고 믿었다”(요한 20,8)라고 할 때 사용된 동사(“호라오”)입니다. 그러니 이는 보고 깨닫고 믿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깨달아 알아보는 것은 ‘믿음으로 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믿음으로 보는 것’이 깨달아 아는 것이요, ‘본다는 것’과 ‘안다는 것’과 ‘믿는다는 것’의 통합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뵙는 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알아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믿음으로 볼 때라야 참된 앎이 오게 됩니다. 곧 믿음으로 예수님을 볼 때 아버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결국, 믿음이 관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무지가 여전히 믿음의 부족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슬퍼하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믿으면 하느님의 영광을 보리라.”(요한 11,40)
-이영근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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