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5월 2일 부활 제5주일
2021년 5월 2일 부활 제5주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요한. 15,1-8)
I am the vine,
you are the branches.
Whoever remains in me
and I in him will bear much fruit,
because withou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신우식신부-
오늘 제2독서에서 요한 사도는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라고 권고합니다. 실천이 없는 사랑은 알맹이 없는 사랑 곧 껍데기만 남은 가치 없는 일입니다. 사실 성경을 펼치면 온통 ‘사랑’에 대한 이야기인 듯합니다. 신부님들의 강론이나 여러 신앙 강좌의 주제 또한 사랑에 대한 것이 가장 많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주변에서 귀가 따갑도록 듣는 말도 사랑이고 인기 많은 대중가요의 주제로도 사랑은 단골 메뉴입니다. 사랑하고 있을 때 이런 노래를 들으면, 더 가슴이 뛰고 기쁩니다.
사랑이란 무엇인가요? 이 세상은 온통 사랑이라는 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사랑은 너무나도 흔해 쉽게 휴지통에 버리는 휴짓조각처럼 널려 있기도 하고, 내가 가진 것만 사랑이고 나머지는 아니라고 쉬이 판단해 버리기도 합니다. 요즘 사회에서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경시되며, 유치한 것으로 치부되기도 합니다. 사랑보다는 돈과 명예 그 밖에 많은 물질적인 것에 사랑의 자리를 양보하고 “사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말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사랑은 어떤 것인가요? 오늘 복음을 통하여 주님께서는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다음 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다. 너희는 내 사랑 안에 머물러라”(요한 15,9). 예수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시기에 당신과 함께 머무름이 참사랑임을 알고 깨닫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이 사랑은 머무름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몸소 보여 주신 자기 증여의 삶 곧 이타적인 삶으로 이어져, 사랑을 말로만이 아니라 직접 실천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 버려야 합니다
-키엣대주교-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영적인 삶을 포도나무 가지의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삶
포도나무와 가지는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보여줍니다. 형식적인 하나가 아닌 하나의 생명으로 결합된 하나가 중요합니다. 마치 나무와 가지가 서로 붙어 수맥을 통해 같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형제 자매와 함께하는 삶
포도나무와 가지는 하나이자 전부입니다. 가지는 줄기와 뿌리로 이어져 하나의 나무가 됩니다. 오직 하나의 수맥,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따라서 생명이신 주님의 자녀인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입니다. 이기적인 개인이 될 수 없습니다.
함께하는 삶의 결과는 열매입니다.
나무는 생명수인 수액을 공급하고 가지는 그것을 받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가지에서 꽃이 피고 좋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지는 나무 줄기에 꼭 붙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가지는 잘라내야 수액이 낭비되지 않습니다. 잎이 푸르고 무성하며 가지가 많은 나무는 보기에는 아름답지만 결코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기위해서는 불필요한 가지치기가 필요하지만 수맥을 상하지않게 잘라야 영양분이 흘러갈 수 있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밭이 언제나 푸르고 풍성한 열매를 맺도록 포도밭 주인이 정성을 들이는 것처럼 하느님께서는 죽고 사라지는 인간이 아니라 풍성한 열매를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포도나무가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 있는 것처럼 인간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과의 친밀함
가지가 포도나무와 붙어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듯이 삶의 원천이신 주님과 함께 있을 때, 주님과의 완전한 일치가 이루어질 때 내 마음속에 계신 그 분의 의지대로 우리의 모든 것이 풍성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나를 치장하는 불필요한 가지를 잘라내야 합니다
너무 많은 가지는 성장을 방해합니다. 내 뜻대로 마구 자라고 있는 가지들을 잘라주어야 주님의 뜻대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총이 영혼 깊숙히 들어갈 수 있도록 겉치례를 잘라내야 합니다. 소박하고 겸손한 마음을 얻기 위해 과장된 권위를 잘라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실패를 통해 마음속 곁가지들을 잘라내도록 인도하십니다. 타인의 비판과 오해, 의심과 배반 등을 통해 필요없는 곁가지를 잘라내야함을 일깨워주십니다. 필요없는 가지를 잘라내는 고통을 통해 변치않는 이익을 줄것입니다.
예수님과 아버지 하느님과의 일치된 삶은 우리가 본 받아야할 모범이십니다. 주님의 뜻을 찾기 위해 기도하고 그 뜻에 순종할 때 은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진정한 포도나무이신 주님,
저희가 진실로 주님과 하나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소서. 저희가 주님의 뜻대로 신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저희에게 해로운 것을 잘라내야 함을 알게 하여 주소서. 아멘.

1. 주님과의 친밀함을 방해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2. 잘라내야 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3. 주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항상 잘라낼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이날치라는 밴드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판소리인데 판소리 같지 않으며, 너무 신나서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그래서 어떤 밴드인지 인터넷을 살펴보니, 보컬 4명이 모두 국악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실제 판소리를 편곡해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판소리를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음악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지만 사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날치의 노래는 젊은 아이들도 좋아하고, 심지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유의 음악을 이렇게 바꿔도 되는 것일까?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이날치 구성원 중 한 명이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때 했던 판소리와 정조 때의 판소리가 같을까요? 아니란 말이죠. 지금 제가 즐기는 게 21세기의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갓 쓰고 도포 입고서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고, 이날치가 이렇게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인 거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전통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없겠지요. 새로운 세상에 새롭게 맞춘 바로 ‘나’의 모습이 정답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전통이라는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꽉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과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다르다면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큰 손해를 입는 것은 가지인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꽉 붙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변화에 맞춰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야곱 시대에는 야곱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나’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이제 고령이신 언론인이며 문학 평론가이신 이어령 선생님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기자가 했습니다.
“뒤늦게 깨달은 생의 진실은 무엇인가요?”
선생님은 곧바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집도, 자녀도, 책도, 지성도, 분명히 내 것인 줄 알았는데 다 선물이었다는 거죠.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고요.”
큰 공감이 가는 말씀이었습니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면 내 것을 지키겠다는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하게 됩니까? 그러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다 감사할 일이며, 기쁘게 나눠줄 수 있는 사랑을 간직하게 됩니다.
세상에 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삶을 마쳤을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심지어 내 몸뚱이조차 못 가져갑니다. 결국 ‘내 몸’이라 불리는 이 몸도 내 것이 아니었습니다. 모두가 다 감사한 선물이었습니다.

지나친 기도 지향의 위험성: 기도의 맛을 잃게 만들 수 있다.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성 목요일 만찬상에서 하신 예수님의 마지막 권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나무에 붙어있지 않은 가지는 아무런 열매도 맺을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언가 이뤄내려는 시도는 우리 안에 계신 하느님의 능력을 무력화시키는 행위입니다.
제가 주님께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너에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을 듣고, “이제 제가 무엇을 해 드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나에게 붙어있기만 하여라.”라는 대답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감히 하느님께 무언가 해 드릴 수 있다고 착각하고 스스로 무언가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시는 유일한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주는 것뿐입니다.
성령의 열매란 ‘사랑, 기쁨, 평화’입니다. 만약 기도하고 나서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마음이 자라남을 느낀다면 기도를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았던 것은 어떤 사람들은 성당에 오래 다닐수록 기도하는 시간이 짧아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방에서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 기도의 방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기도의 맛을 점점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기도의 맛은 기도 안에서 얻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가 아닌 다른 것을 바랄때 잃게 됩니다.
마치 과자를 먹을 때 단 맛을 원했는데, 짭짤한 맛이었을 때 깜짝 놀라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짭짤한 것도 맛이 있습니다. 다만 자신이 원했던 맛과 다를 때 그 과자가 싫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기도가 짧아지는 가장 큰 이유는 기도를 자기의 욕구를 채우려는 도구로 만들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만날 때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가 목적이듯, 기도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큰 문제는 ‘지향’입니다.
기도지향은 자칫 기도의 목적을 퇴색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미사 때나 기도 때 지향하는 것들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그 기도가 들어지면 이제 행복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욕구는 블랙홀과 같아서 주님께서 그것을 들어주신다고 해서 만족할 수 없습니다.
저도 살아오면서 그런 것을 많이 느꼈습니다. 저에게 가장 많은 원망을 하는 사람들은 제가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저를 떠나갑니다. 많이 들어주면 그만큼 많이 요구하게 되고, 그 많은 요구를 더는 들어줄 수 없는 처지가 되면 쓸모없는 도구처럼 버려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떠한 지향을 목적으로 기도하는 이들과 주님 사이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예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느 만둣가게 주인이 제때 따듯한 식사를 하지 못하는 환경미화원과 부랑자들에게 ‘사랑의 만두’를 공짜로 나누어주었습니다.
어느 정도 선행을 계속하다가 주인이 만두를 더는 공짜로 주지 못하겠다고 하자 그간 만두를 얻어먹던 사람들이 거칠게 항의를 하였습니다. 대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만두 말고 돈으로 달라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모두가 이른바 착하고 순진한 서민들이었습니다.
이들을 악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청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청하는 것을 들어주면 이제 상대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 아닌 호구로 여기게 됩니다.
처음엔 감사한 마음이 들 수 있어도 그 욕구는 블랙홀이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이전의 만족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청원 기도를 할 때 주의해야 할 이유가 바로 그것이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이유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호구로 전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다가는 오히려 상대에게 더 안 좋은 일이 생겨나게 할 수 있습니다.
명나라에 ‘여문의’라는 공정하고 청렴한 재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고향에 내려가 살았는데, 어느 날 한 사람이 술에 잔뜩 취해 그에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여 재상은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그의 잘못을 추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사람이 심각한 죄를 짓고 사형을 당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여 재상은 괴로워하며 스스로를 탓했습니다.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할 것에 자비를 베푸는 바람에 그가 더 나쁜 상태로 빠졌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유로 하느님께서도 한없이 요구하는 이에게 한없이 베푸실 수가 없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도의 참맛을 회복하면 나머지 것들은 다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묵주기도를 시작하기 전 엄청난 기도지향을 읊는 사람을 보면 ‘기도의 맛을 느끼지 못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그 수많은 미사 지향을 보며 ‘이것을 들어주시지 않으면 미사가 행복할까?’라는 생각도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 6,33)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말합니다.
성령을 통하여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히면 나머지는 굳이 청하지 않아도 받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사 지향이나 기도지향에 집중하다 보면 오히려 하느님 나라를 잃고 맙니다. 그러면 청원도 이뤄지지 않고 기도의 맛도 잃어 결국엔 기도에서 점점 멀어집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붙어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가지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가리옷 유다의 경우는 잘못된 지향으로 예수님께 붙어있었습니다. 의도가 깨끗하지 못하니 그 가지를 통해서는 좋은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세속과 육신과 마귀의 더러움을 씻어냅니다. 그러나 우리의 기도지향이 여전히 돈과 명예와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것에 있다면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힐 수 없습니다.
분명 우리가 청할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먼저 청하십시오. 그리고 잊어버리십시오. 기도 때는 제발 지향을 잊어버리십시오. 오히려 기도 중에는 자신이 청하는 모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청하십시오. 더는 그런 것은 생각나지 않게 되기를 청하십시오.
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조재형신부-
한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미국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스마트폰에 인증번호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보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발행된 신용카드를 한국의 사이트에서 사용하려고 하니 미국 카드회사의 보안절차를 밟아야 한다고 합니다. 컴퓨터에서 사용하려면 인증번호나 보안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합니다. 몇 번 시도를 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무통장 입금을 하니 결재가 가능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연결되는 많은 길이 있습니다. 무료로 사용하는 것도 있지만 광고 없이 보거나,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보기 위해서는 매월 회비를 내는 곳도 있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기위해서는 나만의 길을 열어야 합니다. 나만의 길을 열기 위해서는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합니다. 비밀번호가 발전해서 지문인식도 있고, 홍채인식도 있고, 목소리 인식도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잘 간직해야 하고, 가끔씩 변경해 주어야 합니다. 외부로 노출되는 경우에는 신분이 노출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고, 경제적인 피해를 입기도 합니다. 가끔씩 비밀번호를 잃어버려서 문을 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비밀번호를 모아서 보관할 필요도 있습니다.
작년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주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집에 머물면서 작은 텃밭을 가꾸었습니다. 상추, 깻잎, 고추, 파, 방울토마토, 호박, 오이를 심었습니다. 올해도 땅을 일구고, 거름을 주었습니다. 모종을 심으면 끝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매일 아침 밭에 물을 주었습니다. 30분 정도 물을 주면 여름의 뜨거운 햇살을 견디어 냈습니다. 고추나 오이는 지지대를 세워야 했습니다. 줄기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여린 모종이 조금씩 자라면서 줄기가 커지고, 잎이 돋아납니다. 예쁜 꽃들이 하나둘 피고,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열매가 생기는 것을 봅니다. 손톱만한 것들이 점점 자라서 알찬 열매를 맺습니다. 물과 햇빛 그리고 정성이 함께하면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먹거리가 되었습니다. 상추는 신기하였습니다. 잎을 따서 먹으면 곧 다시 잎이 나왔습니다. 올 여름에도 물을 주고,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면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잘린 가지처럼 밖에 던져져 말라 버린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런 가지들을 모아 불에 던져 태워 버린다.” 우리가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오늘 독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전해주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회개’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교회를 박해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러 다녔습니다. 그러나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회개’하였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3번이나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닭이 울면서 베드로 사도는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베드로 사도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초대교회의 두 기둥인 바오로와 베드로 사도는 회개함으로써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텃밭은 며칠만 물을 주지 않으면 시들어서 말라 버립니다. 틈틈이 잡초를 뽑아 주어야 합니다. 주님과 함께 머물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늘 ‘겸손’을 말씀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늘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겸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세 번째는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를 미워한 사람까지도 용서해 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수난과 고통까지 감수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열정적인 사랑입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치는 사람은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생기가 돋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사람은 죽음의 골짜기를 간다고 해도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악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친교는 구체적인 우리의 행동과 사랑을 통해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를 통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송영진신부-
“나는 참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모두
깨끗이 손질하시어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1-4).”
1)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다 쳐내시고>
이 말씀에서 ‘나에게 붙어 있으면서’ 라는 말은, ‘나에게 붙어 있긴 하지만’,
즉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긴 하지만’이라는 뜻입니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신앙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아 버리면, 너희가 밖에 서서
‘주님, 문을 열어 주십시오.’ 하며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여도,
그는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루카 13,25-26).”
여기서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고, 또 ‘이웃과 함께’ 먹고 마신 것도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만 먹고 마신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주님 앞에서’ 먹고 마신 일은 주님과 아무 상관없는 일이고,
죄를 지은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라는 말은,
그들이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긴 했지만, 그 가르침을 듣고
실천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가르치시는 모습을 구경만 한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님의 집에 들어갈 자격을 얻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조금 다르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마태 7,21-23).”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는데도
왜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일까?
예수님의 말씀에 그 이유가 나옵니다.
그들이 한 일들은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즉 ‘주님의 이름으로’ 그런 일들을 하긴 했지만, 그들이 한 일들은 자신의 뜻을
이루려고(자기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려고) 한 일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한 예언은 예언이 아니었고, 마귀를 쫓아낸 것도 아니었고,
진짜 기적을 일으킨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속이는 짓을 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주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 죄’, 즉 신성모독죄를 지은 자들이고,
사람들을 속이는 죄를 지은 자들입니다.
2)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 말씀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이라는 말은, ‘포도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가지 쪽에서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으로 해석됩니다.
(나무에 붙어 있긴 하지만, 나무가 주는 생명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가지는,
앞의 2절에서 말한 ‘붙어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는 능동적으로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노력을
‘머무르다.’ 라는 말로 표현하십니다.
신앙인이 구원의 열매를 맺으려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능동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 방법은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머무른다는 말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면서, 예수님과 일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 곁에 있었지만, 즉 예수님에게 붙어 있었지만,
언제부터인지 예수님 안에 머물러 있지는 않았습니다.
몸만 함께 있었고, 마음은 떠나 있었다고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1-12).”
예수님 안에 잘 머물러서 열매를 맺는 사람은 겉과 속이 모두 충실한
‘알곡’이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지 않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은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보일 뿐이고 아무런 쓸모가 없는 ‘쭉정이’입니다.
신앙생활을 겉으로만 잘하는 것은,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잘한다고 인정을 받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의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또 자기 스스로 ‘나는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위선과 교만은
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우리는 항상 ‘지금 나는 알곡인가, 쭉정이인가?’를 잘 반성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 라고 말할 수 없는 생활입니다.
할 만큼 했다는 자만심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동안 쭉정이로 살았다고 해도 포기하면 안 됩니다.
쭉정이 같은 생활을 했더라도
회개하고 알곡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바로 지금이 기회입니다.>
3)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라는 말씀은 ‘약속’이고,
“내 안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우리를 살리기 위한 당부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너희가 내 안에 머무르면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가
아니라, “내가 이미 너희 안에 머무르고 있으니 너희도 내 안에 머물러라.”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찾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전에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1요한 4,19).
따라서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이미 우리 안에 머물러 계시는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는 일입니다

-조욱현신부-
오늘 복음의 내용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에 관한 내용이다. 복음의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비유는 잘 알려진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의 관계를 표현하는 평범한 내용 같지만, 그것은 훨씬 더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교회는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령의 역사"로 성장한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보다도, 주님께 대한 성실성, 즉 주님께 대한 두려움과 성화하시는 성령의 힘, 즉 성령으로 가능하다. 포도나무의 비유는 역시 이것을 말한다. 바오로 사도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하고 복음을 전했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일치하려고 한 것은(1코린 9,1), 성령의 특은이 교회 밖에서나 교회를 거슬러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의 모든 카리스마를 다 해도 그 그늘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위대한 바오로의 모습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에 대한 삶의 모습은 '말로서가 아니고 행동과 진실에 의한 상호신뢰와 참된 사랑으로' 사는 모습(1요한 3,18)이어야 한다. 그래서 어떤 가지도 자기 탓이든, 타인의 잘못이든 간에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가서는 안 된다.
복음: 요한 15,1-8: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로다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1절) 아들은 우리가 아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우리에게 참 포도나무가 되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포도나무라 하시며 그분과 성령 안에서 결합한 이들은 가지라고 하신다. 가지들은 포도나무와 연결됨으로써 포도를 맺는다. 우리는 삶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아가야 한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사악한 씨앗을 없애고, 말씀의 쟁기로 우리 마음을 갈아엎고, 계명의 씨앗을 뿌리시고 열매가 맺히기를 기다리신다. “열매를 맺지 않는 가지는 다 쳐 내시고, 열매를 맺는 가지는 더 많은 열매를 맺게 하신다.”(2절) 가지들은 열매를 맺고 자라는 데 필요하다.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가지들은 모두 잘리고 만다. 예수님의 복음이라는 포도나무도 세상 곳곳으로 심어졌고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예루살렘은 그래서 버려지고 말았다. 사랑에서 나오는 선행으로 우리가 단단히 결합하지 못하면 우리가 가지라고 하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죽은 가지가 될 것이다. 그런 가지는 잘릴 것이고, 농부는 잘린 가지들을 쓰레기처럼 태워 버릴 것이다. 열매를 맺는 가지는 아버지의 세심한 보살핌으로 더 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하신다.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한 말로 이미 깨끗하게 되었다.”(3절)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이다. 그 말씀은 각 사람의 가장 깊은 곳까지 들어가 그 사람의 숨겨진 뜻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어, 성령을 통해 인간의 헛된 욕망에 날카로운 칼날을 들이대어 깨끗하게 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열매를 맺도록 덕에 도달하게 할 것이다. “내 안에 머물러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4절) 가지가 포도 줄기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지 못한다면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우리도 우리를 기르시는 분과 결합하여 있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그분 안에 확고히 머물러야 한다. 왜냐하면 가지는 자신 생명의 수단이 되는 것을 줄기에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제자들 안에 머무시는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이다. 가지가 잘려도 줄기에서 새로운 가지가 움터 자라지만, 잘린 가지는 뿌리와 떨어져 죽고 만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5절) 가지가 줄기에서 생겨나듯, 주님으로부터 우리도 그분의 은총을 받아 부활과 구원의 뿌리로 지닌다. 아버지께서는 농부로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육체인 포도나무를 보살피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나약하기에 선을 하려 해도 선을 베푸시는 분 없이는 아무것도 완성에 이를 수 없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있다. 그때 그는 많은 열매도 적은 열매도 맺을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의 말씀이 우리 안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은 모자람이 없는 자산이며 모든 풍요로움의 근원이다. 그분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삶 속에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것이 아니다. 뿌리로부터 생명을 끌어 올리지 않는 죽은 가지와 같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너희가 많은 열매를 맺고 내 제자가 되면, 그것으로 내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이다.”(8절)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의 삶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한다는 것이다. 그 영광은 하느님의 영광이지 사람의 영광이 아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여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 드리는 것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능력이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 영광을 나 자신에게 돌려서는 안 된다. 그 영광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다른 복음에서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하신 것이다. 그런 선행이 인간의 힘만으로는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아버지께서 영광스럽게 되시는 것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때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우리는 선행을 하도록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창조되었습니다.”(에페 2,10)라고 한다. 그리스도와의 친교를 알 수 있는 것은 그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 즉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고 진정으로 형제를 사랑하는지에 달려있다.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으려면,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실천할 때 가능하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내용이 우리의 삶 속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초기 교회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우러러보았던 것 같이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우리 모두 노력하고 늘 기쁨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우리의 관계가 잘 드러납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
아버지를 뵙게 해 달라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명확히 선포하신 후 하시는 말씀들은 이 내용의 부연처럼 들리지요. 마치 그 관계성을 제자들에게 이해시키시려는 듯합니다.
사람의 인성을 취해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가시적 존재이십니다. 예수님의 존재와 행적이 사랑이고 자비이신 아버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계시지요. 예수님은 율법 조항으로 삭막하게 규격화시켜 버린 절대자의 틀을 깨고 사랑 때문에 앓으시는 진짜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고 한 말을 믿어라."(요한 14,11)
아버지와 아드님의 관계를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는 바탕은 믿음입니다. 서로의 존재 안에 머무름은 신비이기 때문에 육의 논리로 풀어낼 수 없는 까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메시아로서, 사랑의 유대로 아버지와 긴밀히 이어지시고, 아버지와 하나시라는 신비는 이를 믿는 이들을 그 사랑의 유대로 초대합니다. 믿으면서 그 사랑 안에 포함되도록 부름받는 은총의 신비입니다.
제1독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이루어진 선교의 결말 부분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정해진 사람들은 모두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박해하게 만들고 그 지방에서 그들을 내쫓았다."(사도 13,48-50)
회당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전한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일부 백성의 호의를 얻지만 이를 시기한 유다인들에 의해 결국 박해받고 쫓겨나게 됩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찼다고 하지요.
아무리 시기와 모독, 박해와 축출, 배척과 거부라는 험하고 불쾌한 일을 겪어도 마음에 주님을 모신 이는 흔들리거나 절망하지 않는다는 걸 제자들이 보여줍니다. 그들이 그저 참아내고 견디는 수준을 넘어서 기쁠 수 있는 것은 스승이 가신 길을 따름으로써 그분을 닮아가다 종래에는 그분과 하나가 된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요한 14,12)
믿음으로 제자들은 더 이상 육과 감정의 원리에 매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담대히 예수님께서 하셨고 또 그들에게 하라고 당부하신 일들을 할 것이고, 성령에 힘입어 주님의 뜻을 이 세상에서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함께하시며 보호자요 변호인인 성령을 보내시어 제자들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어떠한 환난과 박해에도 무너지지 않는 힘을 주시고, 주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장애가 되는 걸림돌을 치워주시며, 믿는 이들의 간청을 단 한 마디도 흘려 듣지 않고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성삼위 하느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주님 안에 머무르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도 주님 안에 있습니다. 아버지와 하나이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성삼위의 사랑 안에 함께 스며들어갑니다. 주님은 우리의 사랑의 간청을 물리치지 않으시고 들어주시며, 우리는 주님께서 해 주시는 모든 것이 그 응답임을 믿고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그리고 나. 이 사랑 안에 머물러 주님을 관상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 안에서 우리 모두는 아름답고 복되답니다.

사랑해서 남주나?
-김찬선신부-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의 공통어는 주님 안에 머묾이고
그래서 부활 제5주일 주제도 주님 안에 머묾이겠습니다.
나그네와 순례자의 영성을 살아야 하고, 그래서 매일 떠나야 하는
우리 프란치스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어떻게 해야 하나,
머문다면 어디에 머물러야 하나 즉시 생각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오늘 주님 말씀에 순종하여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머물지 말고 떠나야 합니다.
같은 주님께서 또한 가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떠나야 할 때는 떠나야 하고,
머물러야 할 때는 머물러야 하는 것인데
그래도 주님의 가장 강력한 명령은 당신을 따르라는 것이고,
주님을 따를 때 이 '떠남과 머묾'이 동시에 실현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따라서 가는 것이기에 당연히 머물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고, 혼자 제멋대로 가거나 주님을 떠나서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가는 것이고, 늘 주님 곁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따름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말 그대로 주님을 졸졸 따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명령과 삶을 따르는 것인데, 물론 둘 다 사랑입니다.
먼저 졸졸 따르는 사랑은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사랑이요,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아 내가 충만해지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병아리가 닭을 쫓고, 아이가 엄마 치맛자락을 붙잡고 따라가듯
그 목적 자체가 주님 사랑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요
그 사랑 안에 머물고, 그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기 위한 것이기에
철저히 나를 위한 것이고 나의 행복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가 당신을 떠나지 말고 머물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없으면 당신이 허전하거나 아쉬어서서가 아니라 철저히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하라시는 것이니 주님 안에 머무는 것을
마치 우리가 주님께 선심쓰듯이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명령과 삶을 따르는 것은 보다 성숙한 사랑으로서
받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이웃을 찾아가는 사랑이요,
받기만 하던 사랑이 주는 사랑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아이였을 때 엄마의 치맛폭을 떠나지 못하던 것이
사춘기를 지나면 차츰 친구와 더 많이 어울리고
사랑의 짝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의 사랑도 성장하면
주님 사랑 안에 머물지만 않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합니다.
그런데 이것도 실은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공부해서 남주지 않는 것처럼 사랑해서 남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하면 내 안에 있던 사랑이 빠져나가 그에게 다 가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고 오히려 더 사랑으로 내가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신비입니다.
돈은 주고나면 내게 없고 그에게 있지만
사랑은 줘도줘도 내 안에서 넘치고 그를 채우는 것입니다.
내가 그를 채우면 하느님 사랑이 나를 채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라고 얘기하는 오늘 요한 1서의 뜻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 요한.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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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중에는 그저 주님의 기도에서 청하라고 한 것만 생각하십시오. 주님의 기도 안에 우리가 하느님 자녀로서 청해야 할 모든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것들만 청한다면 주님은 당신 자녀를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게 하시기 위해 우리가 신경 쓸 모든 것들을 해결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누릴 행복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거기서 오는 기도의 맛 때문에 점점 더 오래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 곧 하느님 나라만을 청하는 기도가 되기를 빕니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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