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4. 28. 06:25

2021년 4월 28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를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서 살지 않을 것이다
(요한 12,44-50)


I came into the world as light,
so that everyone who believes 
in me might not remain in darkness.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서의 전반부를 마무리하는 부분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하여 다시 한번 설명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참하느님을 모시고 오셔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우리가 알게 해 주시고, 그 하느님을 사랑하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비로, 저희 마음의 눈을 새롭게 밝혀 주시어, 하느님을 눈으로 뵙고 알아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저희 마음을 이끌어 주셨나이다”(주님 성탄 감사송 1).
예수님을 보고 믿는 것은, 이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보내 주신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고 믿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를 ‘세상의 빛’으로 설명해 주십니다. 파스카 성야를 떠올려 보면,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솟아오릅니다. 죄의 어둠, 무지의 어둠, 사랑이 없는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한 줄기 빛을 비추십니다. 마치 초가 자신을 태워 빛을 밝히듯이, 예수님께서는 파스카의 어린양으로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어 삼위일체 사랑의 하느님을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은 이제 그 십자가 사랑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심판받지 않고 구원받아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신학교 입학 뒤, 제 앞에는 ‘행복’만 있을 줄 알았습니다. 그토록 되고 싶었던 신부님. 이제 신학교에 입학하면서 첫걸음을 뗐기 때문이지요. 쉽지 않은 길이어도 원하는 길이니 행복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입학 후 채 1년이 되지 않았는데 부정적인 마음이 가득해지면서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 길이 과연 나의 모든 것을 바칠 만큼 의미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더 좋아 보이는 화려한 길들이 제 눈에 비쳤습니다.


이런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독서’였습니다. 성경과 함께 다른 책들을 읽으며 지식이 쌓였고, 이 지식이 저에게 지혜를 아주 작지만 만들어주었습니다. 이 자그마한 지혜들이 모여 불신의 마음을 줄여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제로 나름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행복하지 않다는 분이 많습니다. 지혜가 없기 때문은 아닐까요? 주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내 안을 채우고 있지 못해서 힘듦만을 느끼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하고, 다른 책들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을 아는 데 더 집중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노력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부정적인 생각으로만 불평불만으로 일관한다면 주님께서는 과연 무엇이라고 말씀하실까요?

오늘 복음을 통해 아들을 믿는 것은 아버지 하느님을 믿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불신이 가득한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이었지요. 당시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했던 것은 세상의 관점으로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로마로부터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아, 그 옛날 모세가 보여줬던 모습을 세상에 펼칠 수 있는 그리스도만을 찾았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이 아닌, 자기들이 원하는 모습만을 찾으니 주님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빛을 가져다주시기 위해 당신 신성의 눈 부신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십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에게서 물러나는 것은 어둠에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그분께서 당신은 심판하기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는데, 어둠에 들어가 계속해서 심판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구원의 믿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며, 그 판결에 대해 하느님을 탓할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갖고 주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리가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인간적인 지식보다 주님의 지혜를 익혀야 할 것이며, 주님을 알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과 진정으로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평범함 속에서 숨어 있는 행복을 찾는 비범함이 잘 사는 삶이고, 내가 노력해서 얻는 내적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누가 뺏어갈 수 없죠(이해인).


나부터 제대로 바라보세요

이웃에 대해 헐뜯고 험담하는 것을 좋아하는 한 자매님이 있었습니다. 그는 상대의 단점을 들춰내서 창피를 주었고, 작은 꼬투리라도 잡아서 헐뜯곤 했지요. 이런 자매님을 누가 좋아해서 가까이하겠습니까? 따라서 주변에는 사람이 하나 없었습니다. 이러다 보니 낯선 외부 사람이 오면 이제까지 못 했던 이웃에 대한 험담을 쏟아붓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그녀의 집에 손님이 찾아왔고 둘은 창가에 앉아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매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손님에게 맞은편에 사는 이웃집에 대한 험담을 퍼붓습니다.

“저기 좀 봐요. 앞집 빨랫줄에 널린 옷들이 너무 더럽지 않아요? 세탁을 저렇게 엉터리로 하면 어떻게 하지?”

그러자 손님이 이 자매에게 웃으며 말합니다.

“좀 더 자세히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이웃집 빨래가 더러운 게 아니라 여기 유리창이 더러운 건데요.”

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올바른 행동을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를 바라보지 못하는 사람은 남도 제대로 바라볼 수 없습니다.

 빛 속에 머물려면 만인 앞에 솔직해져라

-전삼용신부-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빛은 성전 안에 있는 진리입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빛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이 누구 곁에 머물거나 어떤 집에 들어가면 반드시 그 집의 규칙을 지켜야 하고 상대를 의식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    그리스도 옆에 머물며 할 수 없는 행동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분의 현존 안에 머물면 그분 때문에 할 수 없는 일이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우리는 그분의 뜻대로 살게 됩니다.

    현존이 곧 뜻이고 그리스도의 현존이 곧 빛입니다. 그러니 빛은 현존이고 계명입니다. 우리가 그분 계명 안에 머물면 우리는 그분 안에 머물고 그분은 우리 안에 머물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게 해서 구원하시는 방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뱀과 대화함으로써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잊지 않았다면 선악과를 따먹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현존을 잊음으로써 어둠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빛 안에 머물며 구원받으려면 항상 그분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의 현존을 항상 의식하며 산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요한이 한 이 말을 되새겨야 합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다시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 이전에 눈에 보이는 사람들 먼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눈에 마음에 들기 위해 살기 이전에 사람들 눈에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항상 사람들이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빛 속에 머물게 됩니다.
 

    ‘정직한 후보’(2020)는 ‘정치인이 거짓말을 못 하게 된다면 어떨까?’라는 상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할머니의 죽음과 보험회사와의 싸움을 통해 국회의원이 된 주상숙은 4선 당선을 위해 국민에게 거짓말을 일삼으며 인기몰이를 합니다. 사람들 앞에 나설 때는 싸구려 옷을 입고 낡은 신발을 신고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척하지만 실은 값나가는 옷을 입고 좋은 구두를 신으며 어마어마한 저택에 삽니다.

    하지만 주상숙에게는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모두가 죽은 줄 아는 주상숙의 할머니 김옥희입니다. 김옥희는 죽지 않고 살아있었지만 죽은 걸로 기록되어 있고 아무도 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지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상숙을 부른 김옥희는 제발 거짓말하지 말고 철 좀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며 돌탑을 쌓고 소원을 비는데 그날 이후로 주상숙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이상한 현상을 겪게 됩니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던 주상숙은 공식 석상과 방송 프로그램에서 자기 의도와는 다르게 진실만을 말해 고민에 빠집니다.
 

    사실 줄거리보다는 솔직한 정치인의 생각이 담긴 대사가 더 재미있는 것 같습니다. 시어머니가 찾아온다고 할 때 남편에게 “너희 집 얘기만 나오면 짜증이 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시사 프로그램에 나가서 야한 이야기를 하다가 사회자가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런 19금 토크를…. ”이라고 말하니, “어차피 투표는 19금이니까요.”라고 대답합니다.
    그녀는 고백합니다.
    “나, 말이 내 맘처럼 안 나와. 말이 똥처럼 나와.”
    그나마 솔직함으로 밀고 나가자는 유일한 희망을 찾고서는 “늦어서… 죄송하진 않아요.”라고 인사합니다.
    “나는 서민의 일꾼이다.”라고 말해보라는 보좌관에게 “야, 내가 서민의 일꾼은 아니잖아.”라고 합니다. 연설을 하면서 이런 말들도 쏟아냅니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사는 동네로… 만들 수 없다는 걸 잘 아시지 않습니까?”
    “국민들이 똑똑해지면 저 같은 사람은 아주 골치 아파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리고는 정치를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 자신과 함께 비리를 저질러 온 사람들을 폭로하고는 자신도 2년 감옥살이까지 합니다. 이것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한 일들입니다. 왜냐하면, 잠시라도 빛 속에서 살던 때가 좋았기에 계속 솔직해지려 했기 때문입니다.
 

    요즘 어떤 정치인이 마이크가 꺼진 줄 알고 말을 하다 실수를 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어떤 신부님은 무선 마이크를 차고 미사를 하시다가 미사를 마치고 제의방 화장실에 들어가서 볼일을 보다 그 소리가 성당에 다 들렸다는 우스갯소리도 들었습니다. 이것이야 잘못은 아니지만, 이야기를 듣다보니 ‘항상 신자들이 다 보고 듣는 가운데 살아간다면 죄지을 일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자신의 부끄러움을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는 것은 외적인 것으로 덮어버린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솔직함을 잃는다는 뜻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그들의 거짓된 속성을 뜯어버리시고 아드님의 정직함을 입혀주십니다. 그것이 가죽옷입니다.
 

    그리스도를 입은 사람들이 빛 속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분과 함께 있으면 숨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분의 계명 안에 머물고 싶거든 먼저 솔직해집시다.
    가장 좋은 것은 만인 앞에서 할 수 없는 것은 안 하는 것이고, 만인이 들어도 괜찮은 말만 하는 것입니다. 생각까지 그럴 수 있다면 더 좋습니다.
    혼자 있을 때도 만인 앞에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합시다. 사실 세상 사람들보다 더 많은 수의 천상 백성이 지켜보고 있고 하느님도 보고 계십니다. 이것이 빛 안에 머무는 방법입니다.

 -조재형신부-


2014년입니다중서울지역 ME 대표사제를 맡게 되었습니다새해를 맞이하면서 봉사자들에게 가문비나무의 노래라는 책을 선물했습니다책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바쁘다는 이유로 미처 읽지 못하였습니다. 2021년입니다미동북부 ME 대표사제를 맡게 되었습니다새해를 맞이하면서 봉사자들에게 예전의 기억을 되살려서 가문비나무의 노래를 선물했습니다이번에는 시간을 내서 책을 읽었습니다앞에는 강이 있고뒤에는 산이 있는 깊은 산 속에 있는 느낌을 받았습니다복잡한 도시에서 벗어난 느낌이 들었습니다일상의 분주함에서 잠시 떠나 피정을 간 느낌이 들었습니다짧은 글과 사진들이 영혼을 울리는 잠언과 같았습니다.

 

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자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겨울을 이겨내면서 나이테는 촘촘해지고세포막이 단단해져서 악기에 필요한 공명이 잘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높은 산에서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아래에 있는 줄기는 스스로 잘라내고 높은 곳에 있는 가지만 햇빛을 받는다고 합니다추운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의 지혜라고 합니다그래서 나무는 넓고 둥근 나무로 자랄 수 있다고 합니다그런 나무가 좋은 악기의 재료가 된다고 합니다삶의 시련과 고통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그렇습니다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은 없습니다비에 젖지 않고 피는 꽃도 없습니다.

 

처음 본당신부가 되었을 때입니다. 20여 세대가 성당 땅에서 무상으로 살았습니다오랫동안 공소였던 성당은 특별히 관리가 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작은 액수라도 임대차계약을 맺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아무런 계약 없이 무상으로 20년 이상 살면 점유권을 주장 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계약서를 만들었고 성당 땅에서 사시는 분들을 모시고 임대계약서를 만들었습니다사람들은 임대료를 냈습니다사람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땅이 성당의 땅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우리의 영혼도 그런 것 같습니다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의 몸과 마음은 하느님과 사랑으로 맺어져야 합니다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됩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훈데르트바서(Hundertwasser)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생명에 관한 비유를 만들어 낼 능력이 없다내적 깨달음을 얻기는커녕더는 우리 주변이나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해석할 능력이 없다이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기를 그만두었다우리는 그릇되게 살고 있다우리는 그저 오래전에 썩어 버린 인식을 갉아먹고 있을 뿐이다.” 자본과 물질문명에 갇혀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하느님께서 맡겨주신 이 세상을 마치 자신의 것인 것처럼 함부로 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희망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하나는 소망의 모습이고다른 하나는 욕망의 모습입니다소망과 욕망의 공통점은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다만 욕망은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뜻을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그런 욕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고우리를 죄의 굴레에 떨어지게 합니다하지만 소망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하게 바라는 것입니다그런 소망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볼 수 있게 합니다그런 소망은 절망 중에서도 위로와 용기를 얻을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고 하셨습니다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우리들의 말과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그러기 위해서는 언제나 기도하고늘 감사드리며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나를 따르는 이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양승국신부-


밥먹듯이 죄를 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위로가 되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 심판자가 아니라 구원자! 생각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사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던 하느님 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심판관으로서의 모습이 우세했습니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은 자신들의 우상숭배 앞에 크게 진노하시며 벌주시는 심판과 단죄의 하느님이 그리도 두려웠습니다. 저지른 잘못이나 악행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시는 징벌의 하느님 얼굴을 피하고만 싶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은 전혀 딴 판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공생활 기간 내내 입에 달고 다니신 말씀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


은혜롭게도 육화강생하신 예수님께서는 심판자나 처벌자의 모습이 아니라 한없이 부드럽고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때로 더없이 섬세하고 다정다감한 어머니의 모습으로, 여행길의 절친한 동반자로, 끝도 없이 기다리고 용서하는 그런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단죄가 아니라 구원’ 때문이라는 사실, 얼마나 감사해야 할 일인지요.
오늘도 제 삶 안에 길게 드리워진 짙은 죄의 뿌리를 슬픈 얼굴로 바라봅니다. 밥 먹듯이 지어온 숱한 죄와 과오 속에 살아온 제 지난날을 돌아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금 희망을 갖습니다. 우리의 죄가 진홍빛 같을지라도 죄질이나 죄 값은 뒷전이신 예수님, 오직 우리들의 해방, 구원, 영원한 생명에만 관심이 지극하신 자비의 예수님 때문에 오늘 다시 한 번 힘차게 일어서야겠습니다.

아무리 우리 죄가 크다 할지라도 결국 우리는 모두 구원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괜찮습니다. 하느님 자비는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단죄하고 속박하지 않는 한, 결국 우리는 무상으로 베푸시는 하느님 은총의 나라로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시는 예수님 앞에 오늘 우리 각자가 취해야 할 태도가 한 가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스스로를,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를 유심히 바라보면 성(聖)과 속(俗)이 뒤범벅되어 있습니다. 어제 천국을 살았지만 오늘은 지옥 체험을 합니다. 어제 천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오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탄의 얼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각자 개별 그리스도인들은, 그리고 우리 교회 공동체는 시시각각으로 늘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단히 예수님께로 나아가야합니다. 그분께서 매일 건네시는 생명과 구원의 복음을 듣고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심판받지 않고 구원되는 지름길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이영근신부-


<요한복음>을 표징의 책과 영광의 책으로 나눌 수 있는데오늘 <복음>은 표징의 책이 끝나는 12장 마지막 부분입니다예수님께서는 그동안 말씀해 온 것들을 요약하시면서간절함으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요한 12,44). 그것은 네 번에 걸친 “나는 ~이다”라는 표현과 함께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로 요약됩니다.

<첫 번째>는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요한 12,46)고 계시하십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46절)이라고 말씀하십니다이는 <요한복음>의 시작인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모든 세상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라는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늘 <복음>의 바로 앞 장면의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6)라는 말씀에 이르기까지의 전체 주제인 빛의 자녀 찾기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라고 계시하십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47절)이라고 하십니다이는 전체 복음서의 핵심을 보여주는 3장의 말씀곧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반면에 믿지 않는 이들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요한 3,18 참조).

<세 번째>는 “나는 스스로 말하지 않는다.”(요한 12,49)라고 계시하십니다그리고 그 이유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49절)이라고 하십니다이는 7장의 “내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요한 7,16)라는 말씀을 떠올려줍니다.

<네 번째>는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라고 계시하십니다“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50절)이라고 하십니다이는 “나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한다.”(요한 38)과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분을 안다.”(요한 8,55)는 말씀을 밝혀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당신에 대한 선언에 앞서 이렇게 밝히셨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

 

이처럼예수님께서는 스스로가 원천인 것이 아니라하느님 아버지가 원천임을 말해줍니다그러니 예수님의 말씀 이면에는 아버지의 권능이 있고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는 아버지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곧 당신은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께 속하며아버지의 유일한 계시자로당신을 보는 것은 당신을 보내신 분을 본 것이 됩니다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게 됩니다그리하여 구원은 아버지께서 명령하신 대로아들의 말씀을 듣고 믿고 받아들이는 일에 달려있게 됩니다그렇습니다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세상에 드러내시는 빛으로 오셨고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갑니다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요한 12,47)

주님!

당신께서는 말씀을 이루시되결코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응답을 기다리며오히려 저에게 승복하십니다.

이 놀라운 겸손에 제가 무릎 꿇습니다.

주님당신의 겸손을 배우게 하소서아멘.

<나를 믿는 사람은>

 -송영진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이 말씀은, “예수님은 하느님과 같으신 분(예수님은 하느님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하느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는 것은 곧 하느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라는 말은,

“예수라는 이름의 한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은 “말씀은 하느님이셨다(요한 1,1).” 라는 복음서 저자의

신앙고백으로 시작해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는

토마스 사도의 신앙고백으로 마무리된 책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라고 표현합니다(콜로 1,15).

또 히브리서 저자는 “아드님은 하느님 영광의 광채이시며

하느님 본질의 모상”이라고 표현합니다(히브 1,3).

“예수님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이는 모습”이라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2,46).”

 

이 말씀은, “예수님은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과 같은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8장에도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어둠 속에 머무르다.’ 라는 말씀과 ‘어둠 속을 걷는다.’ 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한다는 뜻이고,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둠 속을 걷지 않는다, 생명의 빛을 얻는다.’ 라는 말씀들은 모두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뜻하는 말씀입니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 라는 말씀과 “나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할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구원하려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나를 믿는 사람”이라는 말씀과 “나를 따르는 이” 라는 말씀은,

‘멸망’을 피하고 ‘구원’과 ‘생명’을 얻기 위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들을 가리킵니다.

‘빛’에 관해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빛이 너희 가운데에 있는 것도 잠시뿐이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걸어가거라. 그래서 어둠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게 하여라.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빛이 너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가 되어라(요한 12,35-36).”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는 일은 항상 ‘지금’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나중’으로 미루는 것은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라는 말씀은,

“죄 속에서 사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알지 못하고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이다.” 라는 뜻인데,

여기서 ‘모른다.’ 라는 말의 뜻은 ‘무지’보다는 ‘외면’에 더 가깝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죄 속에서 살면서,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은

‘구원의 길’을 외면하고 ‘멸망’을 향해서 가는 사람이다.” 라는 뜻입니다.)

 

“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

나를 물리치고 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자를 심판하는 것이 따로 있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 내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47-50).”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내가 주는 구원을 받기를 거부하는 것은

자기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다.”입니다.

‘아버지의 뜻’은 세상을 심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드님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요한 3,17).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잃은 양’을 하나라도 더 구하려고

찾아 헤매는 목자이신 분이시고(루카 15,4-7), ‘부러진 갈대’ 같은 사람도,

‘연기 나는 심지’ 같은 사람도 살리려고 애를 쓰시는 분이십니다(마태 12,20).

그렇기 때문에 구원받기를 희망하고,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면,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 가운데에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있고, 믿고 회개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마지막 날의 심판을 받기 전에

‘지금’ 자기들 스스로 심판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마태오복음 25장에 있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보면,

심판관이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라 세우시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는데(마태 25,32-33), 실제 상황에서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갈라 세우시기 전에 사람들이 스스로 알아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갈 것입니다.

(자기가 어느 쪽에 서야 하는지를 알고서 그쪽으로 갈 것입니다.)

“왼쪽으로 가야 하는데도 시치미를 떼고 오른쪽으로 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또 오른쪽에 설 자격이 충분히 있는데도

너무 겸손해서 왼쪽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바오로 사도는 ‘심판의 날’을,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의 숨은 행실들을

심판하시는 그날”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로마 2,15-16).

‘그날’은 모든 것이, ‘숨은 행실들’까지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날이고,

각 개인의 양심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날이고,

자신의 죄 때문에 부끄러워서 숨도 쉴 수 없는 날입니다.

그래서 왼쪽으로 가야 할 사람이 시치미를 떼고

오른쪽으로 가는 일은 감히 할 수 없습니다.

심판의 날이 닥치면, 왼쪽으로 가야 할 사람은

부끄러워하고 절망하면서 스스로 왼쪽으로 갈 것이고,

오른쪽에 설 자격을 얻은 사람은 기뻐하면서 오른쪽으로 갈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은 그날이 되어서야 이루어지는 일이 아니라 ‘오늘’ 하는 일입니다.

‘지금의 삶’이 곧 선택입니다.

“오늘 어떻게 살고 있는가?”가

구원과 심판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조욱현신부-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흐르는 물은 샘물의 본질과 같다.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가 모두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46절) 주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고,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숨어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자신을 스스로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자신을 단죄해서는 안 된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 하신다. 바로 당신이 바로 말씀이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 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나는 빛으로서 이 세상에 왔다."(요한 12, 46)

-한상우신부-


사람의 아들
하나하나의
삶이 빛이다.

어둠을
밝히는
참된
빛이시다.

거짓의
껍질을
벗게하는
진리의
참빛이시다.

빛은
그 어디에
있어도
빛으로
존재한다.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신다.

존귀함을
되찾아주신다.

빛은
길이다.

빛이 있기에
길을 찾는다.

빛은
우리자신을
비추어준다.

빛은 먼저
우리자신의
먼지를
보게한다.

빛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알게된다.

빛은
언제나
늘 가까이
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삶이 참된
빛이다.

그래서
빛은
십자가이다.

십자가의
실천이
빛의 참된
생명력이다.

빛은
감출 수
없다.

그래서
올곧은
빛이다.

이미
와 있는
세상의
빛이시다.

서로
사랑하는
사랑이
빛의 삶이며
빛의 실천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순종을 이야기하십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요한 12,44-45)
예수님께서 당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누차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를 이 세상에 드러내시기에 예수님은 또한 아버지의 현존이십니다.

보이지 않는 아버지 하느님을 예수님을 통해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습니다. 아드님은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시며 그 사랑을 이 세상에 실재하도록 하시니까요. 예수님이 아버지께 전적으로 순종하시기 때문입니다. 굴종이나 맹종이 아닌, 그분 본성 그대로의 사랑의 순종입니다.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요한 12,50)
예수님은 육화하신 아버지의 말씀이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이 예수님이란 존재로 이루어졌을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르침과 행적으로 그 말씀을 완성하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간의 약함을 안고 오셔서 우리 가운데 사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합니다.

제1독서는 새로운 시대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성령께서 이르셨다. '내가 일을 맡기려고 바르나바와 사울을 불렀으니, 나를 위하여 그 일을 하게 그 사람들을 따로 세워라.'"(사도 12,2)
구약을 성부의 시대, 신약을 성자의 시대, 예수님 승천 이후 교회의 시대를 성령의 시대라고 하지요. 예수님 승천 이후, 성부, 성자와 한 분이신 성령께서 이 세상에 현존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전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파견하신 바르나바와 사울은..."(사도 12,4)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파견하셨고, 아드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해 주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변호자요 보호자가 되어 주시지요. 성령께서는 제자들과 함께하시며 모든 민족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이 전해지도록 힘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 제가 민족들 앞에서 당신을 찬미하고, 당신 이름을 형제들에게 전하오리다. 알렐루야."(입당송)
제자들은 성령에 힘 입어 모든 민족들에게 담대히 주님의 이름을 전합니다. 사도행전은 성령께 순종하는 사도들의 열정적 행보를 통해 구원의 지평이 온 세상으로 열리고 펼쳐지는 과정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제 말씀하시는 분은 사도 개개인이 아니라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성령이십니다.(마르 13,11 참조)

사랑하는 벗님! 세상의 작은 변방 이스라엘에서 하느님의 개입으로 시작된 구원의 역사는 아드님이신 성자의 희생제사로 완성되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우리가 사는 오늘 여기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성령의 인도로 이 구원 역사 안에서 작은 발걸음을 새기면서 나아가는 중이지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주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 주시는 분이 성령이십니다. 그러니 성령께 마음을 활짝 열고 그분께 순종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세상 안의 작디 작은 나라, 그중에서도 힘 없고 가난하고 미소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지만 마음이 성령의 불로 타오르면 온 세상을 품고도 남을 광대한 그릇이 된답니다. 사랑의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머리를 맞대기보다는

 -김찬선신부-


"그 무렵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면서 널리 퍼져 나갔다."

 

오늘 사도행전에 하느님의 말씀이 자라면서 퍼져 나갔다는 표현이 있는데

하느님의 말씀이 널리 퍼져 나갔다는 것은, 예를 들어 예루살렘으로부터

안티오키아로, 안티오키아에서 에페소 등으로 퍼져 나갔다는 뜻으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더욱 자랐다는 말씀은 그 이해가 쉽지만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작은 말씀이 있고 큰 말씀이 있기라도 하고,

아이처럼 처음에는 작았는데 점차 커지기라도 한다는 건가요?

 

그것은 이런 뜻일 겁니다.

하느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는 말처럼

하느님 말씀은 그 신비가 얼마나 깊고, 얼마나 높으며, 얼마나 넓은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지만 우리는 그 신비를 처음에는 조금밖에

알지 못하다가 점차 그 신비를 많이 알아가는 것일 겁니다.

 

사실 저는 하느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몇십 년을 성서를 읽고 십삼 년째 말씀 나누기를 하는데도

새로운 뜻이 계속 생겨나니 이것은 마치 나무에서 새 가지와 새 순이

돋아 나 큰 나무로 자라나듯 제 안에서 말씀이 자라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 반대도 있을 것입니다.

전혀 자라지 않거나 오히려 죽어가는 것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예로 들었던 경우들,

길바닥이나 돌밭이나 가시덤불과 같은 우리 마음 밭일 때

씨앗에서 싹이 돋지 않거나 싹이 났어도 자라지 않는 경우들입니다.

 

이것이 개인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자라지 않는 것이라면

공동체 안에서 하느님 말씀이 자라지 않는 차원도 있지요.

하느님 말씀을 공동으로 듣지 않거나 서로 소통하지 않는 경우입니다.

 

하느님 말씀은 듣지 않고 인간의 소리만 난무하거나

하느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각자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말씀을 언제나 공동으로 듣는 것이 중요하지만

특히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공동으로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머리를 맞댑니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에서 나온 제일 좋은 의견들을 모아서 결정하지요.

 

이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일 것이고,

이렇게만 해도 의견을 모으지 않고 책임자가 독단으로 결정하거나

자중지란이 일어나 전혀 의견을 모으지 못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이것이 비록 하느님 말씀을 공동으로 듣고 하는 결정

못지않게 좋은 결정일지라도 신앙인다운 결정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머리를 맞대기보다 하느님 말씀을

공동으로 듣는다는 것이 어떤 겁니까? 성경 떼기를 공동으로 하는 겁니까?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프란치스코는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마치

점괘를 찾듯이 성경을 세 번 펼쳐 거기서 하느님 뜻을 찾아냈지요.

 

이렇게 성경 말씀으로 하느님 말씀을 찾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성경이 아니라 형제를 통해서 하시는

주님 말씀도 잘 경청할 줄 알았습니다.

 

회의 중에 하는 형제의 말이 그 형제의 말이 아니라 하느님 말씀이었고,

특히 클라라와 실베스뗄에게 기도한 뒤 하느님 뜻을 찾아달라고 했는데

이것이 오늘 안티오키아 공동체가 단식기도한 뒤 두 사도의 파견을

결정한 것처럼 기도 안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고 결정한 것이지요.

 

아무튼, 하느님 말씀을 공동으로 들을 때 하느님 말씀이 자라나고

또 더 널리 퍼져 나감을 오늘 안티오키아 공동체에서 배우는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6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