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묵상

2021년 4월 23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Margaret K 2021. 4. 23. 07:12

2021 4월 23 부활 제3주간 금요일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2-59)


I have life because of the Father,
so also the one 
who feeds on me
will have life because of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예수님의 이 말씀에 유다인들은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말다툼을 벌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과 대화하는 이들을 군중에서 유다인으로 바꿈으로써, 이들이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심을 거부하고 적대시할 것을 암시합니다. 그런 유다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한발 더 나아가시어 ‘살을 먹고’ ‘피를 마시기’까지 해야 한다고 강조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 구절부터 성체성사의 선물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언급합니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시면서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루카 22,19)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게 하고, 예수님께서 당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신 것 또한 성체성사를 암시합니다.
특히 “내 살을 먹고”에서 동사 ‘먹고’는 ‘씹어 먹고’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그전까지는 단순히 먹는다는 일반적인 동사가 쓰이다가, 여기서부터 소리를 내어 씹어 먹는 행위를 강조하는 동사로 바뀝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을 단순히 먹는 것이 아니라 씹어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이 성체성사 안에서 실제적인 방법으로 생명을 주는 몸을 먹는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는 예수님의 살과 피의 실재성을 말하고, 더 나아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는 것은 참생명이신 예수님과 하나가 되고 그분의 희생에 동참하는 행위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성제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인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의 피인 성혈을 마실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조명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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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형제님이 교통사고로 다리에 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주님께 “일어나 걸을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더 큰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백내장이라고 해서 수술을 한 어떤 자매님이 계십니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는데, 글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점점 시력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매일 기도했습니다. “볼 수만 있게 해주세요.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 살게만 해주세요.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많은 분이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였습니다. 누군가가 간절하게 바라는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까요? 높은 지위를 얻어야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도 이렇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혹시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어떤 위험한 일을 겪으면 “휴~~ 죽을 뻔했네.”라고 말하고, 힘든 일을 겪으면 “아이고~~ 죽겠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없이는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박해라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었으며, 주님의 살을 모시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살을 모시면서 주님의 본성과 결합되게 되고,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증거를 당신의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을 통해서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분명한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감사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슬프도다! 부모는 나를 낳았기 때문에 평생 고생만 했다(시경).


부모님 덕분입니다.

지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많은 책을 읽고 또 많은 글을 쓰고 있는 저의 모습은 순전히 제 부모님 덕분입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제게 “~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늦게 일어난다고 뭐라 하신 적도 없고, 공부 안 한다고 혼내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새벽 3~4시에 홀로 일어나 기도하셨고, 아버지는 늘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계속 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저 역시 새벽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왜 제게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알아서 잘할 것으로 믿으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조건 믿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강요한 적은 없지만, 저를 믿고 부모님 스스로 보여주신 모습이 지금의 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저 역시 다른 이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하겠지요.

보이는 삶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역시 남들이 보고 있으므로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내가 속한 세상은 내가 먹는 '살과 피'(뜻)가 내리는 세상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말씀하시는 내용이 이어집니다. 사람들은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라며 서로 논쟁하고 다툽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생명체는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 없이는 생존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서 어머니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살 듯,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해 준 창조자의 태중에서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존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하늘의 법칙입니다.
 

    자동차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그 만든 사람이 주는 연료와 돌봄을 통해 생존하고, 스마트폰도 창조자가 잘 관리해주고 충전을 시켜주어야 제 역할을 다 합니다. 그런데 자동차에 들어가는 연료나 스마트폰에 들어가는 전기는 주인의 살과 피입니다. 그만큼 고생해서 번 돈으로 그것들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인간도 참 창조자이신 하느님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살과 피를 양식으로 먹고 마시지 않으면 마치 버려진 자동차 안에 짐승들이 집을 짓는 것처럼, 혹은 버려진 스마트폰을 원숭이가 무언가를 깨는 데 사용하는 것처럼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가 됩니다.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피조물은 창조자의 의도가 아닌 헛된 삶을 삶으로써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 뱀을 구워 먹은 적이 있습니다. 동네 형들이 쥐를 먹고 소화가 되지 않자 땅 구멍으로 들어가지 못 한 뱀을 잡았습니다. 형들이 저에게 소금을 가져오라 하고는 뱀의 껍질을 벗겼습니다. 제가 집에 달려가 소금을 가져왔더니 형들이 이미 뱀을 불에 구워놓았습니다. 저는 먹기 싫었지만 그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서 아무렇지 않은 듯 먹어야만 했습니다.
 

    얼마 뒤 시장에서 약을 파는 사람을 어머니와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쭉 앉아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자세히 살피더니 저를 나와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어떤 약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리고 20분 정도 지났을 때 바지를 내려보라고 했습니다. 초등학생이라 창피한 것을 알았기에 많은 사람 앞에서 내리기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팬티까지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길고 흰 회충 몇 마리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사람이 회충을 발로 밟자 그 안에 또 회충 새끼들이 가득했습니다. 정말 끔찍한 장면이었습니다.
 

    아마도 뱀을 먹었을 때 그 회충이 제 몸속에 살게 된 것 같습니다. 뱀을 먹었던 것은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그 공동체에 머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주는 음식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는 이 사실을 말씀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분명 반대하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먹는 양식이 있는 곳에 나도 머무릅니다. 우리가 부모의 양식을 먹고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이렇듯 뱀의 뜻을 따르게 되고 뱀에 의해 나 자신이 잠식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시 부모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자아가 죽고 부모의 뜻이 나를 살립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하는데 부모의 뜻을 따를 수 없을 때는 자기의 뜻대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기생충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 유익한 사람이 되려면 그 자아를 죽여줄 양식이 필요합니다. 사람은 그 양식이 주어지는 곳에 머무르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안의 자아를 죽여 그것이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합니다. 이것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나오는 과정과 같습니다. 아이가 부모의 뜻을 따르지 않으면 누구의 뜻을 따르겠습니까? 뱀의 뜻을 따릅니다. 모세가 들고 내려온 십계명 판은 곧 하느님의 뜻을 의미하고 만나를 의미하며 하느님의 살과 피를 의미합니다. 또한, 생명 나무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먹기를 거부한다면 내가 하느님 뜻을 따라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뜻을 따라야 하므로 우상 숭배자가 됩니다.
 

    광야는 하느님의 자궁입니다. 하느님의 자궁에서는 하느님의 양식이 탯줄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됩니다. 그 탯줄이 교회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양식을 먹는 이는 이집트에 머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양식은 광야에서만 내리기 때문입니다. 만나는 하느님의 살이고 바위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하느님의 피입니다. 광야에서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으면 이집트에서 영원히 파라오의 노예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광야는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로부터 자유로운 곳입니다. 그러니 모기나 기생충 같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 이유는 광야에서만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요? 부모의 살과 피로 삽니다. 태아에서부터 그렇고 세상으로 나와서도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의 자궁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양을 공급받고 안 받고는 우리 자유입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지를 아는 사람만이 하느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십니다. 그 안에 나를 이기는 뜻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나에 사로잡히면 마치 떨어져 나간 포도나무 가지처럼 말라서 버려집니다.
 

    사람은 창조자의 살과 피로 삽니다. 내가 지금 먹고 마시는 양식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분명 그 힘으로 살고 있을 것이고 그 힘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머물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조재형신부-


16년 전입니다아는 자매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사제로 사는지 14년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지낼 만 한지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지낼 만한 것인지아니면 마지못해서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사제 생활이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시장에서 물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자매님은 제게 이런 이야길 하였습니다둘째 애가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데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하였습니다제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참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가끔 이런 질문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신부님은 왜 결혼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대답도 하기 전에 한 자매님께서 이렇게 답변을 하였습니다. “처자식이 있으면 자신이 맡은 신자들을 열심히 돌보며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으니까요.”라고 친절하게 대답을 하였습니다어때요 정확한 답변인가요수도자나 사제들의 독신을 단순히 효과적인 사목활동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은 효과주의나 경제마인드로 접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그렇게 되면 사목활동만 잘 한다면 독신은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가능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독신생활의 참된 이유는 한마디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스스로 독신으로 사셨고 우리를 위해 당신을 온전히 내놓으신 주님을 갈림 없는 마음으로 따르기 위한 것입니다사제가 독신으로 살기 때문에 사목활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이것은 독신생활에서 따라오는 부수적인 결과이지 목적은 아닐 것입니다사제나 수도자들의 독신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에서 그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관계입니까예수님은 나를 따르려면 이렇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첫째혈연관계보다 예수님을 더 따라야 한다고 합니다단순히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주님의 뜻과 가르침을 먼저 생각하고 따라야 한다고 이야기하십니다.

둘째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를 마음의 준비가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면 독신으로 사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삶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셋째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버릴 수 있는 무소유의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십니다주위를 돌아보면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참 많습니다필요하지 않은 것들도 포기하지 못하는데 주님을 위해서 정말 필요한 것을 버릴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회심(回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바오로 사도는 다른 제자들처럼 예수님과 함께 지내지 않았습니다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보고나 듣지 못하였습니다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됩니다무엇이 바오로 사도의 삶을 바꾸었을까요예수님의 음성을 들었던 체험입니다예수님을 체험했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입니다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주님을 위해서라면 지금 죽는 것도 좋습니다.‘

 

교회를 박해하던 바오로 사도가 이방인을 위한 사도가 될 수 있었다면 세례를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복음의 사도가 될 수 있어야 합니다우리는 미사성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성체를 받아 모시기 때문입니다성체성사는 단순한 기억이 아닙니다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셨던 최후의 만찬이 재현되는 것입니다우리가 마음을 열고온전한 마음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면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도가 될 수 있습니다바오로 사도의 회심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이루어졌다면우리의 회심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매일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나는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그에게 보여 주겠다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쿠스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지낸 뒤곧바로 여러 회당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선포하였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안에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고 찬미드려야겠습니다!

 -양승국신부-

 

스테파노, 필리포스에 이어 오늘은 사울에 대한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집니다. 그 유명한 사울의 회개 스토리는 하느님께서 얼마나 신비하고 오묘하신 분이신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나중에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자신의 인생 여정을 통해 이루신 놀라운 업적을 돌아보며 이렇게 외쳤습니다.

  

“오! 하느님의 풍요와 지혜와 지식은 정녕 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얼마나 헤아리기 어렵고 그분의 길은 얼마나 알아내기 어렵습니까?”(로마서 11장 33절) 

 

회개 이전 사울이 그리스도교 신자들 사이에서 얼마나 악명이 높았으면, 환시 중에 주님으로부터 사울을 찾아가 안수하고 세례를 베풀라는 명을 받은 하나니아스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며 이렇게 반응했습니다.

  

“주님, 그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못된 짓을 하였는지 제가 많은 이들에게서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을 모두 결박할 권한을 수석 사제들에게서 받아 가지고 여기에 와 있습니다.”(사도행전 9장 13~14절)

  

사울은 그리스도교라면 치를 떨던 사람이었습니다. 나중에 바오로 사도는 그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밝힙니다. “유다교를 신봉하는 일에서도 동족인 내 또래의 많은 사람들보다 앞서 있었고, 내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는 일에도 훨씬 더 열심이었습니다.”(갈라티아서 1장 14절) 

 

사울은 유다인 중에 유다인이자 골수 바리사이였습니다. 율법학교도 수료했고, 유다이즘에 대한 특별한 사명 의식에 활활 불타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유다교에 대한 배반이라고 확신했습니다.

  

이러한 유다교에 대한 강력한 충성심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를 완전 박멸시키는 것이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부여하신 소명이라고 여겼습니다. 회개 이전 사울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그릇된 확신, 외골수로 빠지는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가 지니고 있었던 그리스도교에 대한 혐오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에 대해서 나중에 바오로 사도는 여러 차례 공개석상에서 표현하곤 했습니다. 

 

“나는 수석 사제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성도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를 감옥에 가두고, 그들은 처형할 때에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또 자주 회당마다 다니며 그들에게 형벌을 주어 예수님을 모독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너무나 격분하여 나라 밖 여러 고을까지 그들을 쫓아갔습니다.”(사도행전 26장 10~11절) 

 

이토록 열렬한 그리스도교 박해자를 굽어보시고, 큰 자비를 베푸시어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시는 주님의 선택이 참으로 놀랍고도 은혜롭습니다. 우리 인간의 생각과 주님께서 행하시는 신비 사이의 깊은 골이 우리를 크게 갈등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행하시는 기묘한 업적들 앞에서 그저 감탄하고 침묵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유다교인들 사이에서 촉망받는 차세대 지도라로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승승장구하던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은 사흘간의 바닥 체험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틈만 나면 유다 전역을 달려다니던 사울이었는데, 순식간에 아무 것도 볼 수 없게 되고 맙니다. 그토록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누군가의 도움없이는 한 발자국도 내딪지 못하게 됩니다. 그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으면 사흘내내 밥 한숟가락 뜨지 못했습니다.

  

하나니아스로부터 안수와 세례를 받는 사울은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면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시력만 되찾은 것이 아니라 성령의 비춤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를 볼 수 있는 통찰력도 함께 주어졌습니다.

  

이제 사울은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사람에서 박해당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유다 최고의회 전권 대사로서 활약하던 사람에서 최고의회 의원들 앞에 심문을 당하는 죄수로 서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 안에 펼쳐진 주님의 놀라운 업적을 바라보며 평생 감탄하고 찬미했습니다. 우리 역시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펼쳐지는 주님의 엄청난 업적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 안에 행하신 놀라운 기적에 감사하고 찬미드려야겠습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

-이영근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티베리아 호수 건너편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다음, 가파르나움으로 돌아와 “생명의 빵”에 대해 하신 설교의 마지막 결론 부분입니다. 어제 <복음>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르셨습니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며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릴 것이다.”(요한 6,53-54)

 

당신의 살과 피, 곧 당신의 사랑, 당신의 생명을 “먹고 마셔라”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먹다”(τρωγω)라는 동사는 씹다, 씹어서 부수다라는 뜻으로 인간이 음식을 씹을 때 사용하는 동사가 아니라, 초식동물이 풀을 먹을 때, 특히 새싹을 입으로 뜯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곧 초식동물이 풀을 씹을 때는 입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몸의 근육을 연계해 온 몸이 함께 움직여 씹듯이, 말씀을 온 몸으로 음미하며 살아가라는 의미, 곧 ‘실행’을 암시합니다. 곧 실행으로 먹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를르의 체사리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누가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먹지’ 않는다면,

                  (먹지 않고 저장된) 말씀은 만나에 구더기가 끓었듯이 구더기가 끓게 될 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몸’(살)은 ‘인간관계’ 곧 사랑의 사귐과 친교를 의미하고, ‘피’는 생명 곧 일치와 유대를 의미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은 예수님과의 사랑의 사귐과 친교로 예수님과의 유대와 일치된 생명을 이루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써, 당신께서 가지셨던 사랑으로 맺는 인간관계를 가지게 되고, 당신의 생명과 일치와 유대를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우리의 세 가지 태도입니다. 첫 번째 태도는 그분의 살과 피를 “어떻게 주는 지”를 의혹하고 따지는 말다툼(논쟁)이요, 두 번째 태도는 “먹지 않고 마시지 않고” 생명을 얻지 못함이요, 세 번째 태도는 “먹고 마시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됨입니다. 곧 첫 번째 태도는 앎의 의식적 차원의 문제요, 두 번째 태도는 하는 믿음의 결단 차원의 태도요, 세 번째 태도는 실행에 따른 존재적 차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일, 곧 ‘순명’이라는 ‘행위의 실행’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실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물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문다.”(요한 6,56)

 

이는 당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신비적 몸에 합치되는 것을 말합니다. ‘머문다.’는 것은 단순한 거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시는 것을 말하며, 그리하여 당신의 신적 생명이 우리에게 증여되고, 선사되고,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되어 흐른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당신의 살은 우리의 살이 되고, 당신의 피는 우리의 피가 되고, 그분의 생명 안에서 새롭게 창조됩니다.

이 크신 사랑은 우리의 가슴을 벅차오르게 합니다. 당신께서는 이토록 큰 사랑의 신비로, 오늘도 우리 안에서 당신 생명의 꽃을 피우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몸과 피를 건네주시며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말미암아”라는 말은 그분의 힘으로라고 번역하기도 하듯이, 이는 그분을 통하여 사는 것이며, 그것은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며, 그분 안에서 사는 것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는 이 미사 중에, 우리를 위해 내어놓으신 당신의 살과 피, 그 크신 사랑과 신비, 그토록 아름답고 거룩한 사랑을 먹고 마시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당신의 힘으로 말미암아 살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주님!

당신은 제 안에 머무르되 저를 장악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제게 먹혀 사라짐으로 제 안에 살아계십니다.

당신 안에 저를 허용하시되 저를 가두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숨결에 태워 드높게 날게 하십니다.

오늘, 제가 모든 것을 내어주고 그믐달처럼 자신을 감추신 그 오묘함과 놀라움으로

바람 부는 대로 흘러 다니는 그 가볍고 그윽한 당신 사랑의 숨결이 되게 하소서! 아멘.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송영진신부-


“그러자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요한 6,52).”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다.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 것이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라고 말씀하시자, ‘유대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집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알아들은 척 하는 사람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을 것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말씀에 대해서도 유대인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가 알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떻게 ‘나는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가?(요한 6,42)” 라고 하면서 거부감을 드러냈습니다.>

말다툼을 벌인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미 예수님을 믿고 있었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 거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복음서 저자는 제자들(신자들) 가운데에서 많은 사람이 되돌아가고

더 이상 예수님과 함께 다니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요한 6,66).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 때문에 많은 신자들이 예수님에게서 떨어져 나간 것입니다.

 

<이천 여 년이 흐른 지금도 성체성사 교리는 여전히 설명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교리입니다.

그리고 ‘살’과 ‘피’ 라는 표현도, 또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는다.’는 표현도

여전히 듣기가 너무 거북한 표현입니다.

성체성사 교리는 듣기가 너무 거북해도, 또 이해되지 않아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할 교리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교리입니다.

먼저 믿으면, 언젠가는 온전히 깨닫게 될 때가 올 것입니다(1코린 13,12).>

 

예수님께서는 듣기가 거북하다고 말하면서 떠나는 사람들을 붙잡지 않으셨고,

그들을 위해서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바꾸지도 않으셨고,

남아 있는 사도들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고 물으셨습니다(요한 6,67).

(이 질문은 ‘믿음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질문입니다.)

그러자 베드로 사도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요한 6,68-69).”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지만 믿는다는 대답입니다.

바로 이 태도가 ‘말씀’을 대하는 올바른 태도입니다.

‘하느님의 신비’를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은 그 한계를 뛰어넘는 일입니다.

(알아들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알아듣지 못해도 믿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요한 6,53-58).”

 

이사야서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이사 49,15).”

(우리는 하느님의 ‘젖먹이’이고,

하느님은 우리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 같은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을 ‘어미’로 표현하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마태 23,37).”

(우리는 살고 죽는 일을 분간하지 못하는 철부지 병아리들이고,

예수님은 그런 병아리들을 어떻게든 보호하려고 애를 쓰는 암탉 같은 분이십니다.)

이 말씀들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나를 먹어라.)” 라는 예수님 말씀을

연결하면,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의 모습이 바로 연상됩니다.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것은 곧 ‘자기를 먹이는 것’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몸 안에 있을 때에는 분명히 그렇게 되지만,

태어난 후에 젖을 먹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태중의 아기가 어머니의 생명력을 받아먹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너희가 나의 생명력을 받아먹지 않으면 너희는 살 수

없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생명력이 우리에게 전달되는 일, 즉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먹이시는 일을 ‘상징’하는 성사이면서,

동시에 실제로 예수님의 생명력이 전달되는 성사입니다.

(성체성사뿐만 아니라 모든 성사는 원래 상징이면서 동시에 실제적인 일입니다.)

‘살’과 ‘피’는 예수님의 생명력을 뜻합니다.

‘먹는다.’는 표현은, 믿는 것 이상의 강한 ‘일치’를 뜻합니다.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들여서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루는 성사입니다.

(이 말을, “예수님과 한 몸을 이룬 상태에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력을

받아들이는 성사“ 라고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라는 말씀이 바로 그 뜻입니다.

‘참된 양식’, ‘참된 음료’ 라는 말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예수님과의 ‘일치’와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영원함’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참되다.’의 반대말은 ‘거짓되다.’이지만,

몸의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한 음식이 거짓된 음식인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참된 양식’은 ‘영원한 양식’으로 해석되고,

몸을 위한 음식은 ‘허무한(썩어 없어질) 양식’으로 해석됩니다(요한 6,27).

물론 ‘허무한(썩어 없어질) 양식’도 우리가 지상에서 살아가려면 필요합니다.

‘주님의 기도’에 들어 있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몸을 위한 양식’과 ‘영원한 생명을 위한 양식’을 모두 가리킵니다.

만일에 누군가가 “둘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하냐?” 라고 물으면?

신앙인은 “영원한 생명을 위한 ‘참된 양식’이 더 중요하다.” 라고

‘온 마음’과 ‘온 삶으로’ 대답하는 사람입니다.>

천상의 빵을 모셔야 한다

 -반영억신부-


음식을 먹으면 그만큼 몸에 영양을 보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음식에 얼마만큼의 사랑과 정성이 들어갔느냐가 맛의, 좋고 그렇지 않음을 판가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맛보다는 영양을 중시하며 잡곡밥이나 현미를 먹기도 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오히려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음은 그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 해도 사랑과 정성이 빠지거나 걱정을 안고 있으면 맛을 잃고 맙니다. 사랑과 정성이 담겨야 음식입니다. 사랑이 담기지 않으면 음식이 아니라 사료입니다. 사료는 짐승이 먹는 것입니다.

 

기도는 맛있는 음식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통해서 영양을 보충하듯 기도를 통해 영적 양식을 보충해야 합니다. 아무리 맛있고 풍성한 음식이 준비되어있다고 해도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영양이 보충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하지 않으면 영적인 성장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따라서 ‘맛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기도 안에서 맛있는 음식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의 온전한 일치를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맛있는 음식으로 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의 살과 피를 음식으로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하나가 된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심으로써 인격적인 결속을 이룬다는 것이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살은 생명을 주는 행위이고, 피는 희생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살리고자 영혼의 힘이 되는 양식을 기꺼이 내어 주시고 또한 우리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서 대신 희생을 바치신 분입니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살게 되고 또 살찌게 됩니다. 영혼이 살찐 이들, 즉 사랑이 풍부한 이들이 비로소 다른 이들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하셨는데‘예수님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추구하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나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고, 그분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나도 따라 걷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의 빵을 올바로 받아 모실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예수님의 삶을 닮아 가는 과정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면서도 이 세상의 생명에 더 관심이 많은 것은, 이미 세상의 안락함에 젖어 있는 까닭입니다. 삶의 자리를 영원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천상의 양식인 성체를 제대로 모셔야 합니다. 성 안토니오 마리아 클라렛은 말합니다. “우리가 영성체에 임할 때 모두 같은 주 예수님을 모십니다. 그러나 다 같은 은총을 받고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차이는 준비된 마음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영성체에 임하는 사람과 예수님 사이에 더 많은 유사성이 있을수록 영성체의 결실도 더 좋은 것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영성체 없는 신앙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복음: 요한 6,52-59: 내 살은 참된 양식이며 참된 음료이다.

 -조욱현신부-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다인들은 불쾌하게 여기고 멀리하려 한다. 우리가 감사해야 할 것은 바로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을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당신이 하늘에서 오신 생명의 빵이라는 사실을 알아듣지 못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53절)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모여, 일치된 마음으로 한 덩이의 빵을 나눈다. 이 빵은 불사의 약이다. 이 빵은 죽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히 살게 하는, 예수님께서 “받아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0,26) 하신 빵이다.

 

누구든지 예수님의 거룩한 살을 먹는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그분의 살은 생명인 ‘말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인이지만 믿음으로 주님의 몸과 피를 받는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 있고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다. 참으로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그분의 빵이 주어졌다. 이 빵은 땅에서 생산되는 빵이지만 축성되면 평범한 빵이 아니다. 이는 지상의 것인 동시에 천상의 것인 성체이다. 성체를 영하는 우리의 몸도 썩는 몸이 아니라, 부활하여 영원으로 가게 되는 희망을 지닌 몸이 된다. 즉,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화된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55절) 참된 양식은 우리를 구원하신 당신이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먹어야 함을 확인해 주시는 말씀이다. 말씀이 살이 되시고, 살이 된 말씀을 우리가 받는다면 그분께서는 우리 안에 당연히 머무르신다. 그래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56절) 하신다. 성체는 참된 살이요 참된 피다. 그것을 먹고 마시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57절) 아드님은 살아 계신 분의 살아 있는 모습이시다. 아드님은 아버지와 같으신 분이다. 이렇게 파견되신 그분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신다. 이처럼 우리는 그분의 살로 말미암아 산다. 이분을 우리가 먹으면 생명을 먹는 것이다. 그분이 먹힌다고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죽은 이들에게 생명을 주신다.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58절)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을 사십 년간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더 위대한 목적을 위해 오신 그분은 이보다 더 위대한 일을 하실 수 있다. 구약에서는 장수를 약속하지만, 그분은 끝없는 생명을 약속하신다. 예수님은 이 가르침을 카파르나움에서 가르치실 때, 회당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이 생명의 빵을 열심히 영해야 한다. 성체를 통해 하나가 되고 생명을 얻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 55)

-한상우신부-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양식과 음료처럼
피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이다.

목마름이
있기에
우리는
하느님을
향한다.

참된 사랑에
목마른
우리들 삶이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음료가 되시고
빵이 되신다.

그 어떤 것도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이다.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깨닫게된다.

하느님을 닮은
소중한
사람들이다.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는
하느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삶의
배고픔과
삶의 갈증을
아시는
주님이시다.

삶의 중심에는
우리를 살게하는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있다.

주님께서
주시는
양식과 음료는
일시적이거나
찰라적이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우리를 위해
참된 양식과
참된 음료가
되신다.

우리 힘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우리들 삶이다.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은 서로를
살린다.

하느님의 뜻은
살과 피를 통해
우리 삶속에서
이루어지길
원하신다.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다.

참된 음료와
참된 양식으로
오시는 주님은
참된 삶을
일깨워주신다.

참된 삶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참된 사랑의
주님을 만난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우리의 일치하고픈 주님의 마음이 읽혀집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요한 6,56)
백성에게 내어줄 빵이 곧 당신 살이라는 말씀에 유다인들은 충격을 받아 서로 논쟁을 벌입니다. 육의 귀와 육의 마음으로는 예수님 말씀에 담긴 참 뜻을 좀처럼 알아듣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머무름"
먹는 것이 그 사람을 이룹니다.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이 우리의 뼈와 살을 이룰 뿐만 아니라 정서와 인성에까지 영향을 미치지요. 예수님은 당신을 먹는 행위를 머무름으로 연결하십니다.

그분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는 존재 안에 스며든 그 살과 피로 인해 그분의 일부가 되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물러 그와 하나가 되어 주십니다. 머무름이 일치라는 궁극의 차원으로 심화됩니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7)
당신으로 말미암아 산다는 표현은 내 존재와 삶의 의미가 곧 당신이라는 진심의 고백이지요. '말미암음'은 참으로 강한 결속입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의 근원이시고 원동력이시듯, 예수님의 살과 피를 받아모시는 이는 철저히 예수님으로 인해 존재하고 사랑하며 움직입니다. 예수님이 그의 존재와 행위의 이유가 되시는 겁니다.

"머무름과 말미암음"으로 우리는 온전히 주님과 하나가 됩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머무르심으로 우리 또한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가지요. 천상 예루살렘의 혼인 잔치에 이르기까지 불완전하나마 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일치의 은총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수님은 사울에게 이 일치의 관계로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 9,4)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
새로운 길에 들어선 이들을 박해하는 일에 앞장 선 사울이 그 일을 자청해 수행하기 위해 다마스쿠스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 나타나십니다. 충격으로 땅에 엎어져 누구신지를 묻는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변하시지요.     

예수님은 신앙 때문에 박해받는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당신에 대한 믿음 때문에 죽음의 위험을 감수하는 이들 안에 당신이 계시고, 또 당신 심장 안에 그들을 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서로 일치한 두 존재는 그 무엇으로도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위협도, 박해도, 죽음도 이 일치를 무너뜨리기는 커녕 더 견고히 만들어 줄 뿐이지요.

"가거라. 그는 다른 민족들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내 이름을 알리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 9,15)
다마스쿠스에 사는 주님의 제자 하나니아스에게 주님께서 이르십니다. 사울의 악명을 들은 터라 그에게 가기를 주저하는 하나이아스에게 예수님은, 사울 역시 예수님과의 머무름, 말미암음의 관계로 초대받은 사람임을 밝히십니다.

선교는 교인의 수를 늘이는 활동이기 이전에, 누군가를 주님과 머무름, 말미암음 관계를 맺는 은총으로 초대하는 선행이 아닐까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는 이는 다른 이에게도 그 행복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될 테니까요. 
 
사랑하는 벗님! 우리가 주님으로 인해 울고 또 웃는 것처럼 주님 또한 우리로 인해 울고 웃으십니다. 그분을 모시는 우리가 그분과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주님 안에 머물러, 그분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며 살아가는 벗님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그 사랑 안에 깊이깊이 잠기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주님을 놓치면 구원을 놓친다.

 -김찬선신부-


어제 당신을 생명의 빵이라고 하시며

그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고 하신 주님께서

오늘은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주님이 생명의 빵이시니 그 빵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함은

지극히 당연한 말씀이지만 지당한 말씀이라고 치부만 하고 지나치면

안 되기에 오늘은 이 말씀을 곱씹어보려고 합니다.

 

주님의 생명은 우리 인간의 생명과 달리 지음이나 낳음을 받지 않고,

오히려 그 생명으로부터 모든 생명이 나오고 시작되는,

그래서 우리의 생명도 있게 하신 근원적인 생명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있기 전에 우리 생명이 있지 않았고,

이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생명이 있게 되었기에

나의 생명을 주십사고 요청할 나도 없었고

그래서 나의 동의 없이 나를 있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우리는 감사를 드립니까?

이에 대해 감사를 드려야 하나요?

 

제가 음악 방송을 듣다 보면 방송을 통해 사랑과 감사를 전하는

청취자들의 편지를 듣게 되는데 나의 딸이 되어주어서 고맙다거나

나의 엄마가 되어주셔서 고맙다는 내용을 듣곤 합니다.

그리고 이때 저는 흐뭇합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어찌 이런 자식이 나에게서 나왔냐고 하거나 왜 나를 낳았냐고

부모자식 간에 서로 원망하는 것에 비하면 이 얼마나 흐뭇한 관계입니까?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만드신 것을 싫어하실 리 없다는 지혜서 말씀처럼

당신에게서 나온 우리를 싫어하지 않으시고 사랑하시는데

혹 우리는 감사는커녕 왜 나를 있게 하셨냐고 하느님께 원망하지 않는지요.

 

하느님의 생명은 근원적 생명일 뿐 아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라는

주님 말씀처럼 마지막 날에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적인 생명이십니다.

 

나를 있게 하고 구원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은

애를 낳아놓고 내팽개친 자격 없는 부모처럼

자격이 없는 하느님이시라고 할 수 있는데

고맙게도 하느님은 끝까지 사랑하시고 마지막에 살릴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도 우리는 감사는커녕 투덜거릴 수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내가 언제 구해달라고 했느냐는 투이지요.

 

이는 마치 깡패 집단에 속해 방탕하게 살아가는 자식을

큰 대가를 치르고 빼어냈더니 이렇게 살게 내버려 두지

왜 거기서 빼냈느냐고 오히려 성을 내는 것과 같겠지요.

 

실로 미래도 구원도 생각지 않고 이 세상을 사는 포기한 인생들이 있습니다.

구원을 포기한 인생이야말로 대학을 포기한 인생보다,

취업이나 결혼을 포기한 인생보다 포기한 인생입니다.

 

그런데 포기한 인생은 아니지만, 정신없이 사는 인생은 많고

어떤 때 우리도 그렇게 허방지방 인생을 삽니다.

 

이는 목표를 지향하지 않고 정신없이 노를 젓는 것과 같습니다.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를 젓긴 했는데 엉뚱한 곳으로 가고 있는 것이며

그래서 포기한 인생은 아니지만 실패한 인생입니다.

 

그래서 길잡이신 주님을 놓치면

구원을 놓치는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5월 1일 부활 제3주간 금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 (요한 6,5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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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따라서 우리가 미사성제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살인 성체를 모시고 예수님의 피인 성혈을 마실 때,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예수님 ‘안에 머무르며’, 예수님께서도 우리 ‘안에 머무르십니다.’ 먹고 마심으로써 예수님과 한 몸이 되어 예수님처럼 사는 것입니다. 

-서철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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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기가 어머니 태중에서 어머니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살 듯, 모든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해 준 창조자의 태중에서 창조자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생존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하늘의 법칙입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는 우리 안의 자아를 죽여 그것이 만드는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합니다. 이것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로 나오는 과정과 같습니다. 

사람은 창조자의 살과 피로 삽니다. 내가 지금 먹고 마시는 양식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분명 그 힘으로 살고 있을 것이고 그 힘이 흘러나오는 세상에 머물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전삼용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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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노도 말합니다. “미사성제에 참례하러 가기 위하여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를 천사가 세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에서와 영원에서 큰 상급을 주실 것입니다.”그러므로 너무 바쁘다는 말을 하지 말고 하루 일과 중에 미사참례를 첫 자리에 놓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사는 지상의 천국입니다.”“미사는 종합영양제입니다.”영성체 없는 신앙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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