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복음

2021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Margaret K 2021. 4. 21. 07:10

2021년 4월 21일 부활 제3주간 수요일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

(요한 6,35-40)

 

 I came down from heaven 
not to do my own will
but the will of the one who sent me.


 

오늘의 복음 : http://info.catholic.or.kr/missa/default.asp

오늘의 묵상

 -서철신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라고 하시자, 군중은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고 간청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4,14)라고 하셨을 때, 사마리아 여인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날마다 물을 길으러 오지 않아도 되리라는 세속적 욕심에 그 물을 달라고 청하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길으러 오는 수고를 덜고 싶어 하고, 만나보다 좋은 육신의 배를 채워 줄 빵을 늘 받고 싶어 하는 욕심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바로 “생명의 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요한 복음서에 나오는 “나는 …… 이다.”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실 때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온전한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분’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당신께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당신을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결코’를 두 차례 반복하시며 강조하십니다.
이 ‘생명의 빵’에 대한 개념은 이스라엘 민족이 광야에서 하느님께 받아 먹은 만나에서 생겨났다고 합니다. 광야 생활을 하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만나를 하루 먹을 만큼만 거두어들일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게 하시려는 것”(신명 8,3)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날마다 만나를 먹으며 “사람을 먹여 살리는 것은 여러 가지 곡식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이들을 돌보는 당신의 말씀임을 배우게 하셨습니다”(지혜 16,26). 따라서 ‘생명의 빵’은 예수님이며, 예수님의 말씀이고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그분께 가야 하고 그분을 믿어야 합니다.

-조명연신부-

http://cafe.daum.net/bbadaking/GkzT

 

 자폐증의 대부로 유명한, ‘버나드 림랜드’라는 학자는 200여 명의 학생에게 잘 아는 사람 10명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10명이 불행한 사람인지 행복한 사람인지를 적고,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남을 돕는 사람인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인지 적게 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의 4분의 3 정도가 남을 돕는 사람이었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95%가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기적 삶이 아닌 이타적 삶이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남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여유가 있는 것이기에 행복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유가 없으면 불안, 두려움, 걱정 등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도 불행하게만 보입니다. 철학자 데모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큰 행복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다면, 즉 갖고 있지 않을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 큰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큰 행복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과 남과 비교하는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요?

생명의 빵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충만하지만 우리는 더 가지려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가져야 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많은 것이 오히려 행복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생명의 빵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빵은 다시 배고파지고 목마름이 계속 생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 한 명도 제외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가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회사에서 정상에 오르고 싶은 사람은 습관의 힘을 바르게 평가하고, 실천이 습관을 만든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자신을 망치는 습관을 버리고 성공을 돕는 새 습관을 빨리 익혀야 한다(존 폴 게티).


‘누가’ 내리는 평가인가?

고려시대 말기 유학자인 이달충의 책 ‘제정집’에는 우리가 생각할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다가 한 사람이 “누구는 그대를 가리켜 사람답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그대를 가리켜 사람답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대는 누구에게는 사람대접을, 또 다른 누구에게는 사람대접을 못받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별 일 아니란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좋아할 만한 일이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답지 않다고 해도 좋아할 만한 일이죠.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그건 걱정할 만한 일이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한다면 그또한 걱정할 만한 일입니다. 기분 좋아하거나 기분 나빠하고 걱정하기 전에 평가하는 사람부터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평가 자체보다 ‘누가’ 내리는 평가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스스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의 평가에 흔들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좋아요’라는 표시나 쓸데없는 악플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평가를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면 됩니다.

 결국 성체 안에 끝까지 남는자: 두려움 속으로 한 발을 내어 디딜 용기가 있는 자

-전삼용신부-


오늘 복음도 성체성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오늘 내용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지 않으시면 누구도 아드님께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빵의 기적을 체험한 이들은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할 때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정상적으로 보지 않고 떠나갑니다. 그들은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라고 하시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오늘 결국 예수님을 떠나간 이들은 어째서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신 이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됩니까? 그분이 나의 왕이 되십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어떻게 될까요? 부모의 종이 됩니다. 부모의 마음에 들려고 자신의 삶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찾아온 이들은 아직은 자기 자신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지, 자신의 주인이요 왕으로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이 부담스러운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나의 왕으로 모시겠다고 결심한 이들은 나를 포기하는 표를 보여야 합니다. 이것이 에덴동산에 있었던 선악과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동방박사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한 것과 같습니다. 자기를 봉헌할 마음이 없는 이들은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이끌어주지 않으십니다. 그들은 결국 아드님을 이용하여 자기 이익을 챙기려 할 것인데, 아드님을 그렇게 이용당하게 두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나로 살기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로 살기를 원하는 이들만이 성령의 이끄심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도움의 은총이라 합니다.

   

    몽고에서 선교하던 이용규 선교사에게 인도네시아에서 교육사업을 하라는 하느님의 뜻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일가족이 인도네시아에 정착하여 대학을 세우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실제 대학을 시작하려고 할 때 아주 많은 장벽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이슬람국가여서 그랬을 것입니다.
   

    ‘이제 여기선 아무것도 할 수 없겠다.’ 라는 생각이 들 때 비자에 어려움이 생겨 갑작스럽게 아이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들어가야 했는데 언제 돌아오게 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좌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이들은 울면서 “아빠, 그러면 우리 몇 달 동안 학교 못 가는 거예요?”라고 물었고, 이용규 선교사는 마음이 울컥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이 땅의 젊은 영혼들의 교육을 맡기겠다면서요. 그런데 저는 정작 제 아들과 딸의 교육 문제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제가 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때 하느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네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니?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생각해보니 그건 자신의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때 깨달음이 왔습니다.
    “제가 하느님의 일에 대해서 필요 이상의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제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하느님께 다시 맡겨드립니다.”

    그렇게 하고 나자 비워진 이용규 선교사의 손에 새로운 그림을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선교사 자녀들의 교육 문제에 대한 아픔을 주셨기에 그래서 대학을 세우기 전에 초,중,고등학교를 세우게 됐습니다. 인도네시아 정부에서 그리스도교 학교로 정부 인가를 내주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이슬람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기적적으로 새로운 법이 만들어지고 첫 사례로 그리스도교 학교로 올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출처: ‘너는 왜 네 일이 아닌 걸 걱정하니?’, 이용규 선교사, 유튜브 채널, ‘CGNTV SOON’]

   

    이용규 선교사는 이러한 체험을 바탕으로 『내려놓음』이란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 ‘내려놓음’은 어떤 ‘완성형’이 아니고 ‘지속적인 과정’입니다. 그리고 내려놓음의 핵심은 결국 하느님과의 관계 가운데 나의 주도권을 이양하는 것입니다.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관계 가운데 상대방이 중심이 될 수 있도록. 그리고 어떠한 노력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를 맡겨드리는 것. 그리고 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공급을 신뢰하면서 믿음으로 걸어가는 삶. 이것이 바로 내려놓음의 삶이라고 생각됩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결국 예수님을 떠나게 될 이들은 이 내려놓음이 없었습니다. 광야에서 빵을 주셨다는 말은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걱정은 필요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걱정을 채워줄 대상으로 그리스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내려놓으면 걱정이 없어집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나로 살아가는 것, 나의 주도권을 내려놓지 않는 삶이 아직 더 낫다고 여기는 이들이었습니다.

   

    영화 ‘마인’(Mine)은 사막 임무에서 실패한 두 병사가 사막을 건너다 지뢰를 밟게 되며 벌이지는 일을 그렸습니다. 둘 다 지뢰를 밟았고 주인공은 발을 떼지 않았지만 다른 군인은 발이 절단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됩니다. 주인공은 무려 70시간을 추위와 더위, 동물의 공격과 모래 폭풍을 이겨내며 견딥니다. 더는 희망이 없다고 느낀 그때 한 발짝을 옮깁니다. 그런데 그것은 지뢰가 아닌 하나의 깡통이었습니다.

    동료의 고통을 보며 발을 뗄 수 없어 고생한 그 70시간은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었지만 버리지 못했던 그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과 같습니다. 그에게 끊임없이 한 발을 내디디라고 말했던 원주민은 자아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알기에 그렇게 말했던 것인데 두려움이 그 발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자아를 밟고 움직일 용기가 없는 사람을 이끌어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신념을 가진 이는 도와주십니다. 나를 내려놓을 수 없으면 다른 나는 들어올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나는 나다.”이십니다.

    나로 살아가는 것에 지쳐 누군가에게 나의 주도권을 맡기고 싶다면 하늘을 바라보십시오. 내 일로 걱정하고 싶지 않아 모든 일을 주님 것으로 맡겨드리고 싶다면 동방박사를 이끌었던 별을 아버지께서 나에게도 다시 보여주실 것입니다. 자아를 떠나는 한 걸음의 용기만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참 자유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해 주십니다.

 -조재형신부-


동상이몽(同床異夢)’이라는 말이 있습니다같은 곳에 있지만 생각이 다른 경우를 뜻합니다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의 생각과는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제자들 중에 야고보와 요한도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과 다른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유다는 현실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원했습니다그것은 힘과 권력으로 이루어져야 했습니다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바치라고 하셨습니다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면 높은 자리를 차지하길 원했습니다부와 명예와 권력을 원했습니다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하셨습니다밀알 하나가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었지만 예수님과 다른 꿈을 꾸었습니다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모두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류시화는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리고 소금인형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당신의 피 속으로뛰어든 나는소금인형처럼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그대가 곁에 있어도 그대가 그립다는 것은 함께 있지만 생각과 마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사랑해서 결혼했고결혼해서 함께 살지만 많은 부부가 갈등과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있습니다감성적인 사랑을 의지적인 사랑으로 바꾸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감성적인 사랑이 화려한 불꽃이라면의지적인 사랑은 그 불꽃이 계속될 수 있도록 넣어주는 땔감입니다땔감이 없다면 불꽃은 곧 사라지기 마련입니다소금인형이 물에 녹아 소금물이 되듯이땔감이 재가 되어 화려한 불꽃이 되듯이 희생과 인내가 함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동상동몽(同床同夢)’을 생각합니다같은 곳에 있으면서 같은 꿈을 키워가는 것입니다이런 사람은 그대가 멀리 있어도 그대와 함께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이런 사람은 서로에게 아낌없이 녹아주는 소금인형이 됩니다첫 번째 순교자인 스테파노는 하늘을 보았을 때하느님의 영광과 하느님 오른쪽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습니다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사람들을 용서해달라고 청하였던 것처럼 돌을 던지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오늘 독서에서 필립포스는 사마리아의 고을로 내려가 그곳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선포하였습니다마귀들을 쫓아냈고병자들을 고쳐주었습니다그 마을에는 기쁨이 넘쳤습니다박해가 시작되었고시련이 다가왔지만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그 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교회는 조직과 제도를 통해서 성장하였습니다교회는 교리와 신학을 통해서 전통을 지켜왔습니다교회의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은 공동체의 중심이 되었습니다그러나 교회의 성장과 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중심은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내 아버지의 뜻은 또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꿈을 꾼다면 우리는 이미 이곳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삶은 결국 죽음에서 나옵니다!

 -양승국신부-

 

청년 시절, 시골 본당 연령회장님을 따라 입관예절을 도와드리러 갔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만 해도 신자들이 임종하면, 본당 연령회에서 염습이며 입관이며, 장례 절차 일체를 주관했습니다.

  

염습을 하기 위해 시신을 안치실에서 작업실로 옮겨 눕혔는데, 돌아가신 분이 대형 교통 사고를 당한 분이어서 그런지 몰골이 참혹했습니다. 눈뜨고 볼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연령회장님께서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묵묵히, 그리고 척척 염습을 해나가셨는데,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그 모습이 참으로 존경스러웠습니다. 저는 그저 필요한 물건을 달라고 하면 집어드리고, 시신을 옮길때 들어드리고 그랬습니다.

  

아직 젊은 분이었고 타지에서 오신 관광객이었는데, 야간에 낯선 길을 운전하다가 참사를 당했다고 전해들었습니다. 회장님께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염습하는 사이, 저는 개인적으로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람 목숨 참으로 별것 아니로구나, 숨 한번 끊어지면 아무것도 아니로구나, 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지극정성으로 동반해드리는 일이 무척 힘겨운 일이지만, 참으로 중요한 일이로구나, 하는 생각.

  

어제에 이어 오늘 첫번째 독서인 사도행전은 스테파노의 순교를 중심으로 예루살렘 교회가 받은 혹독한 박해를 묘사하고 있는데, 참혹한 동시에 감동적입니다.

  

독실한 사람 몇이 돌에 맞아 순교한 스테파노 부제의 장례를 치렀습니다. 젊은 나이에 무죄한 죽임을 당한 스테파노, 주님과 교회에 충실했던 스테파노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의 슬픔은 하늘을 찔렀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찢어질 듯 아팠습니다. 그래서 장례 절차 내내 대성통곡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스테파노가 악한들로부터 맞은 돌의 크기는 공기놀이하는 정도의 잔돌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야구공 크기 정도, 아니면 큼지막한 사과 크기였습니다. 그들이 스테파노를 둘러싸서 던진 돌은 한두개가 아니라 수백개였습니다. 

 

스테파노는 빗발처럼 날아오는 돌들을 피하지도 않고 고스란히 다 맞았습니다. 어떤 돌은 머리를 정통으로 가격했습니다. 어떤 돌은 얼굴에, 어떤 돌은 가슴에, 허리에 옆구리에...온 몸은 상처투성이요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임종한 스테파노의 시신을 수습하던 사람들은 시신의 상태를 보고 크게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무지막지하고 거대한 악 앞에, 그저 체념하고 포기하는 약함의 표시가 결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 승리의 표지였습니다. 

 

스테파노의 의 순교는 성령에 대한 경외심과 하느님 현존에 대한 강한 믿음의 표현, 그 결과였습니다. 결국 참다운 순교는 십자가상 예수님 죽음의 가장 깊은 동기를 파악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인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 현장에 사울이 함께 하고 있었다는 것,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유다 풍습에 따르면 최고의회 앞에 피고를 고발했던 증인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에게 첫번째 돌을 던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스테파노에게 첫번째 돌을 던진 증인들이 벗어둔 겉옷은 사울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만틈 회심 이전의 사울은 그리스도교인들을 박해하는 데 최일선에 서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교회를 없애 버리려고 집집마다 들어가 남자든 여자든 끌어다가 감옥에 넘겼다.”(사도행전 8장 3절)

  

따지고 보니 하느님 참 묘하십니다. 그토록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사울이었는데, 하느님께서는 박해자 사울을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당신의 사도로 선택하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이나 생각만으로 하느님의 크신 계획이나 섭리를 종잡을 수 없는 것입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를 통해 우리는 교회에 대한 박해가 교회의 성장과 강화와 얼마나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가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초기 교회는 스테파노의 피와 죽음으로부터 역동적인 성장을 위한 힘과 생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스테파노의 순교는 그리스도교 교회사 안에서 의미있는 전진을 향한 큰 걸음을 내딪게 했습니다. 삶은 결국 죽음에서 나옵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이영근신부-


예수님께서는 빵을 청하는 군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나는 생명의 빵이다.”라는 곧 “나는 ~이다”(εγω ειμι)라는 당신 자신에 대한 계시선언문입니다. 곧 당신 신비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신 신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당신 생명의 신비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에 대해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합니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이것은 당신 몸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내가 너희에게 주는 빵은 내 몸이다.”라는

       말씀은 한참 뒤에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생명의 빵”은 그분의 신성을 가리킵니다.

         ‘성찬의 빵’이 거기에 강림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빵이 되듯,

                  이 신성은 말씀이신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빵”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성은 육체의 고통을 없애 줄뿐인 육체의 양식이 아니라,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입니다. 본디 영원히 살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육체를 썩지 않게 보존해 주십니다. 곧 당신이 참 생명이요 참 양식임을 드러내십니다.

그런데 이 빵을 먹는 일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벌어집니다. 곧 예수님께 와서 믿고 받아먹는 이 안에서 실현되는 생명의 빵입니다. 그리하여, 이 빵은 믿는 이의 생명을 참된 생명에로 변화시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요한 6,39-40)

 

아버지의 뜻은 사람을 살리는 일이고 아들은 그 뜻을 실현하는데 전념합니다. 곧 당신께 와서 보고 믿는 이들을 살리십니다. 이렇게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모두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 바로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여기에 사용되고 있는 “보고”(Θεωρεω)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각작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참되게 보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십자가 아래서 “이 일들을 보고” 백인대장이 “참으로 이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태 27,54)라고 고백할 사용된 동사입니다. 그러니 여기서는 아들을 보면서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를 보는 것(요한 12,45)과 같은 그런 봄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에게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진정 우리의 내적인 눈이 열려야 할 입니다. 그것은 믿음으로 열리는 눈입니다. 믿음으로 보는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는다.”(요한 6,37)

주님!

아래로 흐를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받아 흐르는 큰 강물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아래에 머물러 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모든 것을 끌어안은 큰 바다 같은 사람 되게 하소서.

믿어주지 않아도 믿어 주고, 사랑해주지 않아도 사랑해 주며

물리치기보다 품을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제 형제를 물리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아멘.

 생명의 빵에 대한 갈망

 -반영억신부-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이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차지하는 구원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나는 과연 구원받게 될 것인가? 에 대한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버지께서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을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주어진 삶에 순종하면 족합니다.

 

사실 믿는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수동의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연 그것이 그러한지는 모른다 해도,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고 오직 순종하는 것이 신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에 끝까지 순종하는 믿음의 삶이 주님을 더욱 깊이 만나게 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주신 뜻은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하느님의 뜻은 미래의 사건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미래는 오늘을 통해서 오기 때문에 지금 그때를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더 좋은 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날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준비하는 오늘의 삶이 중요합니다. 하늘의 문은 세상에서 이미 열리기 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것은 신앙생활은 먼 미래에만 그 힘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 여기서 내 삶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로 이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님을 닮는 삶의 여정이며 태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요한 6,35). 하고 선언하셨습니다. 결코 배고프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영원한 생명의 빵을 이미 우리에게 양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의 빵을 먹어야 합니다. 미사 안에서 주어지는 성체는 우리를 위한 생명의 양식입니다. 생명의 양식에 대한 갈망이 커졌으면 좋겠고 그에 합당한 준비를 해야 하겠습니다.

 

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가 형성되려면 얼마나 더 마음을 열어야 하는지요?

 

성체이신 예수님을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성체의 삶을 생활화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모두를 내어주는 전적인 자기희생의 삶, 이웃을 위해 밥이 되어주고, 영양이 되어주는 삶을 엮여야 합니다. 아직 깨달음이 부족해 예수님을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의 자리에 세상 걱정만 가득해서 도무지 예수님께서 편하게 들어오시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예수님을 모시는데 그 어떤 장애물도 없기를 기도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아버지의 뜻>

 -송영진신부-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6-38).”

 

1)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의 표현만 보고서 ‘아버지께서 예수님께 주시지 않은 사람’도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특정인들만을 부르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사람’이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응답한 사람으로, 또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으로 해석됩니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을까?

이 표현은 ‘믿음도 은총’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내가 나의 능력만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곧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2) 자기가 종교와 신앙을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 일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그런데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부르셨다면,

그 ‘부르심’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을 부르신 것과 아무도 안 부르신 것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결국 각 개인의 선택이 중요하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부르심’이라는 말에만 초점을 맞추면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데,

‘하느님의 뜻’으로 바꿔서 표현하면 그 의문이 해결됩니다.

‘모든 사람’이 구원받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마태 18,14).

하느님의 그 ‘뜻’이 곧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그 ‘뜻’에 응답하는 것이 곧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에게 가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생활을 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신앙인이

하느님의 그 ‘뜻’과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입니다.

 

3)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부르심에 응답해서 나를 믿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때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이들과 함께 있는 동안,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켰습니다. 제가 그렇게 이들을 보호하여,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요한 17,12).”

이 말씀은 좁은 뜻으로는, 배반자 유다 말고는 당신의 제자들을 모두 지켰다는

뜻으로 바치신 기도인데, 넓은 뜻으로는, 자기 스스로 멸망의 길로 가는 사람들

말고는 모든 신앙인을 끝까지 지켜 주겠다는 약속으로 해석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약속이 세상 끝 날까지 유효하고,

틀림없이 지켜질 약속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약속도 믿는 것이 당연합니다.

(끝까지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헛일로 끝나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어떤 사무 착오로 억울하게 탈락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신앙생활이 과소평가되거나, 아니면 과대평가되는 불공정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4)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약속은 틀림없이 지켜진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신앙인이 끝까지 당신의 보호 아래 있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직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바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모든 신앙인을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예수님의 약속은

틀림없이 이루어질 약속입니다.

(여기서 ‘내 뜻이 아니라’ 라는 말은, 아버지의 뜻과는 다른

예수님의 뜻이 따로 있다는 표현은 아니고, 아버지의 뜻만을

충실하게 실천하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9-40).”

 

이 말씀에서,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이라는 말과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이라는 말은 같은 말이고, ‘하나도 잃지 않고’ 라는 말과

‘누구나’ 라는 말도 같은 말이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린다.’ 라는 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라는 말도 같은 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당신의 부르심에 응답하기를 바라시고,

모든 사람이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나 인간 세상의 현실을 보면 응답하지 않는(믿지 않는) 사람도 많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에 대해서 관심 갖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 있는 ‘혼인 잔치의 비유’는

바로 그런 사람들에 관한 비유입니다(마태 22,1-14; 루카 14,15-24).

하느님의 초대에 응답하든지 안 하든지 그것은 각 개인의 자유 선택인데,

응답하지 않음으로써 생기는 결과의 책임은 각 개인에게 있습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이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에(요한 3,17),

응답하지 않는 사람들이 받는 심판은 그 자신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일입니다.

<신앙인들의 선교활동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과 예수님께서 하시는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일입니다.

신앙인은 자기 혼자서 응답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응답과 구원을 위해서도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복음: 요한 6,35-40: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조욱현신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35절)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삶 전체를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어 놓을 빵이라는 뜻이다. 본래 죽지 않도록 창조된 인간이 이제 죽음을 이기게 되었다. 이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죄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다. 생명의 빵께서 우리를 생명의 말씀으로 회복시켜 주시고 참 생명을 주셨다. 그들은 성경도 알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도 보았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37절)이라는 말씀은 누구든지 당신을 믿지 않는 이는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그래서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37절)이라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순명하신다. 당신의 뜻은 바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시고 아버지의 뜻을 완수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아버지의 뜻을 행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자체가 아버지의 뜻이고 그 권능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일들을 하며 당신을 닮도록 초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아버지 뜻에 바치셨다. 우리도 하느님의 뜻을 행하도록 우리를 바칠 수 있어야 한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은 우리 모든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며 그 구원이 주님의 자비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신다. 이제는 이 생명의 빵에 대한 응답이 올바로 이루어져야 한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유대인들은 보았지만 믿지 않았다. 아들을 보고도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한 이들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지 못했지만 믿고 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보지는 못했지만 믿는 우리가 행복하다고 말씀하셨다. 사도 토마스가 주님의 상처를 확인하고 싶어 했을 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 하셨다. 사도들은 정확하게 증언해야 했기에 보았어야 했고 우리는 그 증언을 듣고 보지 않고도 믿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 우리의 완성을 위해 노력하며, ‘마지막 날’이 될 때까지 완성될 것을 우리는 믿고 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당신의 아드님께로 인도하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이시어 생명을 주는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써 다시 살리시며 완전히 새사람이 되어 죽지 않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은 성령 안에서 아버지와 아드님께서 주신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40절) 이 말씀은 믿음, 곧 생명으로 넘어감이 첫 번째 부활이며,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40절)라는 말씀이 두 번째 부활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생명의 빵이신 그분을 믿음으로 새로이 태어나야 하고, 마지막 날에 참으로 부활하는, 구원받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참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 38)

-한상우신부-


예수님께서도
내려놓음에서
시작하신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자신을
살리는 생명의
참된 길이다.

산다는 것은
내려놓음의
연속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함께하기위해
내려놓는
생명의 빵이
되는 것이다.

내려놓음이
회개이고
내려놓음이
실천하는
생명의
시작이다.

이와같이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려놓음이
행복이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나의
뜻을 내려놓는
기쁨이다.

생명의 빵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내려놓음임을
가르쳐준다.

십자가도
생명의 빵도
부활도
내려놓음의
은총이다.

내려놓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하느님 나라는
생명의
빵이 되는
실천의 나라이다.

내려놓음이
생명의 참된
힘이라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내려놓음이
신앙의
신비이며
삶의 참된
변화이다.

우리를 살리고
삶의 여정마다
정화하여 주는
내려놓음의
빵이 우리들
한가운데에
내려오셨다.

내려놓음의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인다.

내려놓음이
아멘이다.

 -오상선신부-


오늘 미사의 말씀은 아버지의 뜻과 아드님의 행위가 하나임을 드러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요한 6,37)
아버지께서는 구원하시기로 마음 정하신 이들을 아드님께 보내시고, 아드님은 그들을 받아들여 구원의 길로 이끄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려고 오셨기에 아버지의 뜻을 그대로 따르십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뜻 안에서 움직이시는 이 신비는 맹종이 아니라 사랑에 기인합니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40)
예수님의 미션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이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와 같이 하느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목마르지 않고 배고프지 않은 충만함을 누리며 성삼위 하느님의 사랑에 참여하는 지복직관의 행복을 주시려는 것이지요.

창조와 마찬가지로 구원도 피조물인 우리 모두의 행복을 목적으로 합니다. 성삼위 하느님이 사랑의 유대 안에서 누리시는 행복을 우리도 누리게 하시려는 그분의 확고한 의지시지요. 이 목적에 대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뜻이 하나입니다.

제1독서에서는 그런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이루어지는 놀라운 과정이 엿보입니다.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스테파노의 순교 이후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아 흩어집니다. 특히 스테파노 죽음의 현장에서 비교적 소극적인 역할을 하였던 사울이 이제는 매우 적극적으로 박해를 주도하지요.

그런데 흩어진 신도들이 도망가서 그저 조용히 숨어 지내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퍼져 나간 곳곳에서 말씀을 전합니다. 박해가 파견의 역할을 한 것과 진배 없게 된 것이지요. 고통이 징검다리가 되어 구원을 견인합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다."(사도 8,8)
말씀을 듣고 받아들인 이들에게서 기쁨이 넘칩니다. 기쁨은 말씀의 결과이고 열매입니다. 효과이기도 하고 또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말씀이 곧 기쁜 소식이기에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여 삶의 중심으로 삼은 이들은 기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접한 이들의 특권인 기쁨은 그의 새로운 본성이 됩니다. 구원과 기쁨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지상 순례 여정을 걷고 있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을 앞당겨 맛보고 누릴 수 있는 방법이 곧 기쁨입니다. 기쁨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우울하고 절망스런 상황 앞에서도 힘 내어 기쁨을 선택하는 이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지금 기쁘십니까? 주님을 믿어서, 형제들과 함께라서, 고통을 견딜 힘이 있어서, 가난해도 나눌 수 있어서, 상처와 실패가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주님 사랑을 깨닫게 해 주어서, 자신의 한계 앞에 겸손할 수 있어서, 삶에서는 점점 작아지고 있지만 비움과 가난으로 오히려 점점 더 주님을 닮아가고 있어서...  구원의 기쁨은 삶의 역설 곳곳에 감추어진 보물인 것 같습니다.

아버지와 아드님이 의기투합하시어 우리를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으니 우리 구원은 따논 당상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오늘은 더더욱 큰 기쁨을 충만히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성령과 함께 힘껏 기뻐하십시오. 우리 기쁨으로 주님도 크게 흡족해 하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마지막 날까지도 기다리시는 주님

 -김찬선신부-


어제와 오늘 복음은 양식과 관련하여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인데

백성들이 모세가 하늘에서 만나를 줬다고 하니까 주님께서는

만나를 주신 것은 모세가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정정해주신 다음

오늘은 당신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살아갈 육신의 양식인 만나도 하느님께서 주시고,

영원한 생명의 양식인 당신도 하느님께서 주신 거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것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그렇지만 당신은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당신을 믿지 않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는데

마지막 날에 그들을 살리겠다 하시니 마지막 날엔 믿게 된다는 말씀이지요.

그런데 마지막 날이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공심판의 때 그러니까 세상 종말의 때일까요?

아니면 사심판의 때 그러니까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일까요?

 

그런데 이것을 묵상하다가 저는 문득 하느님께서는

왜 만나를 하루 치만 주셨을까? 생각게 되었습니다.

 

가난의 차원에서, 욕심을 부리고 축적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순종의 차원에서, 하느님이 주시는 대로만 받게 하려는 것이었을까요?

 

사실, 만나가 하루 치가 아니라 많이 쌓여 있다면 인간은 어떻게 할까요?

그것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거라는 것을 망각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지천으로 널려있다고 생각하여 그 소중함을 모를 것입니다.

 

 

쌀독에 쌀이 한 바가지밖에 없을 때 쌀이 소중하지

쌀이 그득할 때는 그리 소중하지 않은 것과 같고,

시한부 인생에게 생명이 소중하지 앞날이 창창하게

젊을 때는 살아있음의 소중함을 잘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마지막 날에 살리시겠다는 말씀은

우리가 믿게 될 때까지 기다리시겠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생애의 마지막에 가야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바라고 믿게 되니 그때까지도 기다리시겠다는

당신의 강한 구원 의지의 표시일 것입니다.

 

여러분도 그러시겠지만 저는 5년 전과만 비교해도

죽음에 대한 생각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그만큼 죽음을 더 가까이 느끼고 더 수시로 느낀다는 뜻인데

거의 매일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죽음을 생각하고,

그때마다 생명의 주님께 대한 믿음을 추스릅니다.

 

그렇습니다.

전에는 지혜와 섭리의 주님을 더 믿었다면

이제는 생명과 사랑의 주님을 더 믿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마지막 날까지 기다리셨다가

마지막 날에 살리시겠다는 주님 말씀이 가깝고도 고맙게 다가온 오늘입니다.

지난 매일복음 묵상 글 보기 : 

 2020년 4월 29일 수요일


오늘의 성인 : 

http://maria.catholic.or.kr/sa_ho/saint.asp

프란치스칸 성인들 : https://www.roman-catholic-saints.com/franciscan-calendar.html 

   

 

되새기고 싶은 글들

 나는 내 뜻을 이루려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려고 왔다.(요한 6,35-40)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요한 6,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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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성녀 카타리나는 고해신부에게 말했습니다. “신부님, 저는 배가 고픕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하여 이 영혼에게 양식을 주십시오. 성체이신 주님을 주십시오. 주님을 모실 수 없을 때는 성당으로 가서 그분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또 바라봅니다. 저는 이렇게 만족을 얻습니다.” 성 알도 마르코치는 “저는 식사를 거르는 것보다 영성체를 못하는 것이 더 견디기 힘듭니다.”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성체를 모셨으면 합니다.

 “영성체는 우리의 그리스도교적 생명력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우리가 육신에 영양을 주기 위해 밥을 먹어야 하듯 우리의 영혼을 위하여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성 가롤로 보르메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반영억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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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의 능력만으로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음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셨기 때문에 내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이 곧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입니다.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좋으신 뜻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에페 1,4-5).

-송영진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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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도 내려놓음에서 시작하신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자신을 살리는 생명의 참된 길이다.

산다는 것은 내려놓음의 연속이다.

가장 좋으신 하느님과 함께하기위해 내려놓는 생명의 빵이 되는 것이다.

내려놓음이 회개이고 내려놓음이 실천하는 생명의 시작이다.

이와같이 내려놓아야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일 수 있다.

내려놓음이 행복이다.

하느님을 향한 믿음은 나의 뜻을 내려놓는 기쁨이다.

생명의 빵은 가장 중요한 가치가 바로 내려놓음임을 가르쳐준다.

십자가도 생명의 빵도 부활도 내려놓음의 은총이다.

내려놓는 마음과 마음 사이에 하느님 나라가 있다.

하느님 나라는 생명의 빵이 되는 실천의 나라이다.

내려놓음이 생명의 참된 힘이라는 것을 언제나 뒤늦게 깨닫는다.

내려놓음이 신앙의 신비이며 삶의 참된 변화이다.

우리를 살리고 삶의 여정마다 정화하여 주는 내려놓음의 빵이 우리들 한가운데에 내려오셨다.

내려놓음의 진실한 사랑을 받아들인다.

내려놓음이아멘이다.

-한상우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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